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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8월 20일 19시 42분 등록

한시미학산책 2(83째 주)

11기 정승훈

 

저자 연구

정민 (1960~ )

 

고전을 안 읽으면 인생의 고전을 면치 못할 것이라는 정민 교수.

LUXURY 20123월호 인터뷰 발췌

 

우리 고전을 보물 창고 삼아 들려주는 그의 이야기는 쉽고, 재미있고, 흥미롭다. 미로처럼 복잡하게 얽힌 당대의 사회정치경제적 상황과 인물의 내면을 쉽고도 풍성하게 보여주는 솜씨가 최고다. 그의 강의를 들은 어떤 이는 이렇게 평을 달았다. “프로의 설명은 정말 섹시하구나. 우리 고전을 통해 이 시대 삶과 방향을 이토록 재미있게 펼쳐 보이다니.” 그 감탄의 힘을 동력 삼아 정민 교수는 지금껏 약 40권의 책을 냈다. 작년에만 3권이다. <새로 쓰는 조선의 차문화>(김영사), <다산의 재발견>(휴머니스트), <삶을 바꾼 만남>(문학동네). <한시미학산책>, <미쳐야 미친다>, <다산선생 지식경영법> 등 베스트셀러도 여러 권이다.

 

인생의 오묘한 진리를 깨치는 데는 동서양 모든 고전이 훌륭한 역할을 할 테지만 이해가 쉽고 공감도 큰 쪽은 역시 우리 고전을 읽을 때다. 정민 교수는 같은 한문으로 돼 있어도 우리 고전을 읽을 때 입에 딱 붙고 가슴에 딱 와 닿는 느낌이 더 든다라고 했다. 한 뿌리의 언어, 문화, 역사, 정서에서 오는 무형의 힘이 작동하는 거다. 하지만 서양 고전은 줄줄 외면서도 우리 고전을 대라고 하면 말문이 막히는 것이 사실. <허생전>, <홍길동전>, <춘향전>, <장화홍련전> 등 시험용으로 암기한 몇 개가 고작이다. 읽어보자고 마음을 먹어도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어떤 책을 골라야 하는지, 한문을 몰라도 괜찮은지, 읽을 만한 가치는 있는지, 읽어두면 뭐가 좋은지 의문과 의혹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생각해보면 중고등학교 때 그렇게 <흥부전>이나 <춘향전> 같은 고전을 배웠으면서도 작품 전체를 제대로 읽어본 적은 없는 것 같다는 기자의 질문에 고전이 그래요. 그렇게 재밌을 수가 없는데 읽을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읽으면 아무런 감흥이 없지요. <춘향전> 하면, 만날 변학도가 춘향이 괴롭히고 춘향이는 대들고 이런 것만 생각하는데 이몽룡과 춘향이 첫날밤 장면 한번 읽어봐요. 얼마나 섹시하고 에로틱한지. 이건 뭐 19금 이상이에요. 수업 시간에 수업을 할 수가 없어요. 너무 너무 너무 야해. 이런 게 춘향전을 읽게 하는 재미거든. <흥부전> 같은 작품도 그래요. 얼마나 유머가 넘치는데요. <심청전>도 사람을 그렇게 울리면서도 웃겨요. 이런 것들이 어우러지는 게 고전의 힘인데 교훈적인 것만 가르치니까 재미가 없는 거예요.

 

한국 최고의 고전으로 또 어떤 책을 추천하겠냐고 물으니 저자는 이덕무의 전집 <청장관전서>가 좋아요. 그중에 이목구심서편을 꼭 읽어보세요.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 입으로 말하고, 마음으로 느낀 것을 적은 비망록인데 인간에 대한 애정이 깊이 담겨 있어요. 문장도 좋고요. 연암이 그의 문장을 여러 번 베껴 먹었지요. 이덕무는 정말 따뜻하고 매력적인 사람이에요. 어떻게 이렇게 열심히 살 수 있을까 싶죠. 연암과 다산의 중간에 있다고 할까? 눈물 나는 인간이에요. <삼국유사>도 빠뜨릴 수 없지요. 이 책을 나는 한국 역사의 압축 파일Zip-Code’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고대사의 정수지요. 근데 이 파일이 잘 풀리질 않아요. 힘들어요. 올해 안에 <삼국유사 깊이 읽기>란 책도 낼 것 같은데 우리 문화의 원형에 대한 사유가 이 안에 다 들어 있어요.”

 

저자는 연암 식으로 가르치려 노력한다고 말한다. “토론을 중시하고 섣불리 결론을 내지 않아요. 서툴러도 좋으니까 네 걸 쓰라고 강조하지요. 인터넷에 있는 지식은 아무 짝에도 쓸모없어요. 내 관점이 있어야지요. 서랍에서 꺼내 쓰는 정보 말고 판단력, 직관력, 통찰력을 갖춰야 해요. 뭔가 목표를 세워 추진한다고 칩시다. 선택과 집중이 중요한 게 아니라 선택하고 집중할 대상을 판단하는 것이 더 중요해요. 인터넷 시대에 정보는 가짜와 진짜가 섞여 시궁창처럼 흐르는데 가짜와 진짜를 구분할 수 있는 안목, 통찰력이 없으면 망하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고전을 읽어야 하고, 고전에서 배워야 하는 거예요. 고전古典을 안 읽으면 고전苦戰을 면치 못해요!

 

다산이나 연암 이 두 명의 최고 학자가 많은 저서를 통해 강조하는 것은 한마디로 무엇인지에 대해 저자는 내가 주체가 되는 삶이에요. 끌려 다니지 말자는 거지. 그런데 주체가 되려면 바른 판단을 할 수 있어야 해요. 나는 누구인가? 여기는 어디인가? 이 두 가지를 꼭 알아야 해요. 그래야 무엇이 될지, 어디로 갈지도 나오지요. 이런 것에 대한 판단의 힘, 통찰력의 근거를 이런 스승들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겁니다. 다산이 세상엔 두 개의 저울이 있다고 했어요. 시비是非의 저울과 이해利害의 저울. 여기서 네 개 경우의 수가 생깁니다. 첫째 시이리是而利. 옳은 일을 해서 이롭게 되는 경우. 둘째 시이해是而害. 옳은 일 했는데 손해 보는 거야. 다른 놈들이 계속 끼어들기를 해 내가 늦게 가는 거죠. 셋째 비이리非而利. 나쁜 짓을 해 이로워지는 경우. 사기 쳐서 돈 벌었잖아. 새치기해서 빨리 갔잖아. 할리우드 액션 해가지고 우승했잖아. 이게 비이리예요. 마지막이 비이해非而害겠죠. 사기 치다 걸려서 감옥 가는 거. 그런데 첫 번째는 드물고, 두 번째는 싫어. 세 번째라도 하려다가 결국 네 번째가 되는 게 인간의 삶이에요. 문제는 교육이 가치를 두는 지점이에요. 내가 손해를 보더라도 정도를 지켜야 한다, 당 대표 출마했는데 쟤는 돈을 썼지만 나는 안 쓰겠다. 근데 쟤가 되고 나는 떨어졌어. 그래도 나는 괜찮다. 이렇게 생각을 해야 하는데 누가 그러느냐는 거지. 요즘 우리 교육은 세 번째에다 가치를 둬요. 나쁜 짓을 해서라도, 커닝을 하건, 입학사정관을 구워 삼건, 돈을 쏟아부어 최고 과외 선생을 붙이건, 좋은 대학만 가면 된다 이거 아니에요? 과정보다는 결과에 우선 가치를 두는 이런 생각이 우리 사회에 너무 팽배해 있어요. 관건은 이걸 바로잡는 겁니다. 늦어도 정도를 지키면 그게 이익이다, 이걸 믿게 해줘야 해요. 정도를 지키면 병신이다, 이걸 강요하니까 아무도 안 하는 거지. 아침에 강변북로를 타고 출근할 때마다 아주 화가 나요. 새치기하는 놈들, 담배꽁초 버리는 놈들 보면 아주 속이 썩어요(웃음).”

 

자본주의 사회에서 정신만 갈고닦으며 살 순 없지 않냐는 어리석음 물음엔 생각을 바꿔야죠. 강사 월급 받다가 전임 교수 월급 받으니까 황홀하더라고. 지금 생각해보면 그 돈 받고 어떻게 살았나 싶어. 그럼, 어떤 게 진실이냐? 진실이 없어요. 강사 때는 방학 때 이 금액이 그대로 나왔으면 원이 없겠다 생각했는데 교수되고 나니까 이걸 월급이라고 줬냐하게 되는 거죠. 누가 그럽디다. 부자는 이만하면 됐다하는 사람이래. 그러니까 세상에 부자가 없는 거래. 이만큼 가진 놈은 저만큼 가진 놈이 부자로 보이지, 자기는 부자라고 생각 안 한다는 거예요. 결국 이만하면 부자다하는 생각만 마음에 집어넣으면 다 부자가 되는 건데 그걸 못하는 거죠.“ 라고 답한다. 누구나 생각해봐야 할 이야기이다.

 

옛 선비들의 삶과 비교해 지금 사회와 사람들에게 없는 것은 무엇인지에 대해선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 시대 책 읽고 시 쓰는 건 일상이었어요. 풍류라기보다 삶의 방식이었어요. 오늘날 국회의원들 룸살롱 가서 폭탄주 마시는 거나 조선 시대 선비들이 술 한잔 먹고 시 한 수 짓는 거나 큰 차이 없어요. 다만, 선조들은 식견과 통찰력을 늘 중요한 삶의 가치로 생각했어요. 오늘날 우리는 어때요? 얼마나 잘사느냐, 얼마나 성공했느냐로 인생을 평가하지요. 여기에는 인생에 대한 긴 관점과 사유가 있을 수 없어요. 좀 잘나갔다 하는 사람들이 조금만 시련이 닥치면 자기 발등을 찍거나 가미카제도 아니면서 사회까지 함께 폭발시키고 끝나버리지요? 이런 사람들이 다산처럼 귀양을 가면 어떻게 되겠어요? 재기, 못합니다. 한 방으로 끝나버리는 거예요. 삶의 본질과 근원을 늘 들여다보는 사람들은 좌절의 순간에 빛나요.”

 

내 마음에 무찔러 드는 글귀

 

열세 번째 이야기 ; 씨가 되는 말 시참론

머피의 법칙, 되는 일이 없다

시화에는 시를 보고 그 사람의 출처궁달을 예견하는 삽화들이 뜻밖에 많다. 특히 앞서 무심히 한 말이 뒷날의 예언이 되는 경우를 따로 시참이라고 한다. 언어의 주술적 힘을 믿어 말을 함부로 하지 말 것을 경계한 것이다. (335)

진달래꽃 한 떨기

푸른 산중에서 가져왔다네.

연적에 생애를 부치었으니

타향의 나그네와 한가지일세.

그의 아버지가 시를 보고 울었다. 시에 나타난 뜻이 처량하고 괴로워 오래 현달할 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뒤에 그는 사화에 연루되어 20대의 젊은 나이에 화를 당하고 말았다. (338)

9살에 지은 시를 보고 현달할 상이 아니라고 보았다니 그것이 더 신기하다.

 

형님! 그자 갔습니까?

시에는 그 사람의 기상이 절로 스며든다. 한 구절의 시만 봐도 그 사람의 궁달을 점칠 수가 있다. (339)

관서 땅 늙은 수령 한가해 일 없는데

봄바람에 취해 눕자 분홍 꽃잎 점을 찍네. 양파 정태화 (339)

세상에서 전하기를 이 시는 무한히 좋은 기상이 있으니, 정태화가 40년 동안 재상 자리에 있으면서 부귀를 누리는 것이 모두 이 한 연 가운데 있다고 했다. (339)

이건 너무 무리한 짜맞춤 아닌가. 시 한 연을 보고 부귀를 누리는 것과 연결시키다니.

 

대궐 버들 푸른데

우습다 벗님네들 마음 너무 조급해

단번에 최고봉에 오르려 하는도다.

 

멀리서 보려 하면 근심 더욱 멀어지니

올라도 최고봉엔 오를지 말지니라. (344)

이 두 사람의 시를 두고 이수광은 이렇게 말한다. “진화의 시는 말이 몹시 박절하여 남은 맛이 없으니 그가 멀리 이르지 못한 것은 당연하다. 정도전의 시는 마치 만족함을 아는 것 같았으나 나가기를 탐내어 그칠 줄 모르다가 스스로 화를 입었으니 역시 말할 것이 못 된다.” 안목이 자못 매섭다. (345)

시를 보고 알았다기 보다 그 사람을 알고 시를 보고 끼어 맞춘 것으로 보인다.

바른말을 했다 하여 임금이 매질로 한 시인의 목숨을 앗아갔던 이 일은 포학한 권력에 대한 증오를 불러 뒤에 인조반정의 한 빌미를 주었다. (350)

 

하늘은 재주 있는 자를 시기한다

나식은 시사가 어지러운 것을 보고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오히려 스스로 자취를 감추는 데 힘썼다. 정미년에 벽서의 화가 일어나자 그의 형 나숙과 함께 화를 당했다. 일찍이 역귀 쫓는 소리를 듣고 시를 지었다.

역귀 쫓는 북소리 온 마을에 울리니

이리저리 쫓는 소리 그 형세 어지럽다.

해마다 들었어도 흰 머리만 늘었나니

나라 안의 한 귀신을 제거함 있었던가. (351)

재능 있는 자는 운수가 사납다. 이는 하늘이 그렇게 만드는 것이다. 하늘 또한 시기심이 많음을 알 수 있다. 재주를 주고서는 어이하여 다시 궁하게 한단 말인가? (354)

재능 없음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까.

말에는 정령이 깃들어 있다. 입에서 나온다고 다 말이 아니다. 생각 없이 되는 대로 쓴 한 편의 시가 어느 날 재앙이 되어 돌아온다. 말 한 마디, 시 한 구절을 삼가지 않을 수 없다. 어이 붓을 함부로 놀리랴!

앞부분에서 시인은 천기를 누설하게 된다 라는 구절을 본 기억이 난다. 그런 면에서도 조심해야하는 것도 있겠다. 사람에겐 영성지능이 뛰어난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열네 번째 이야기 ; 놀이하는 인간 잡체시의 세계 1

글자로 쌓은 탑, 층시 또는 보탑시

뭐지

콩이야.

얼굴 가득한 꽃

모래밭 빗방울 자국.

꿀벌이 제 집인 줄 알겠네.

여지 열매와 복숭아 씨, 쓴 외

온 하늘의 별들이 지는 꽃잎 때렸나. (359)

일종의 말장난이다. 한시 중에는 이런 말놀이가 유난히 많다. (360)

글자가 층을 이뤄 늘어나므로 층시라고 한다. 탑을 쌓은 모양으로 생겼다 하여 보탑시라고도 한다. (360)

처음 보는 글의 모습이다. 옛사람도 글로 그림처럼 형상화하기를 좋아했구나.

 

회문시, 바로 읽고 돌려 읽고

나그네 천연거에 올라거더니 客上天然居

느긋이 천상의 객이 되었네. 居然天上客 (367)

한시 가운데 회문시라는 것이 있다. 내리읽거나 치읽으나 의미가 통하는 형식의 시체를 말한다. 그러면서도 평측이나 압운이 흐트러져서는 안 되므로 그 제한이 몹시 까다롭다. (368)

한시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또한 한시이기에 이리도 해석되고 저렇게도 해석된다. 그 해석에 따라 역사적 사실도 달라진다.

현대까지도 이런 회문시는 창작된다. 주책종은 1962년 싱가포르를 여행한 뒤 그 소감을 담은 <성도기유>란 작품을 남겼다. 시의 원문은 스무 글자를 동그랗게 원형으로 써 놓았다. 역시 자자회문시다. (380)

 

그림으로 읽기, 신지체

日心人腹

무에 어려울 게 있답니까? ‘자가 기니 이는 장일長日입니다. ‘자에 점 하나가 없으니 바로 무점심無點心입지요. ‘자를 조그맣게 썼으니 소인 小人이구요, ‘자 안에 획을 비웠으니 복중공腹中空입니다. 그러니까 날은 긴데 점심이 없으니, 소인이 뱃속이 비었습니다.’라는 말입니다. 한 상 차려줄 줄 알고 기다리는데 점심상이 없으니 밥 달란 말이옵니다.” (382)

기막힌 해석이다.

마치 겉으로 그럴 듯한 그림을 그려놓고 그 속에 물건들을 숨겨둔 숨은 그림 찾기와 유사하다. 언어로 유희하는 퍼즐 놀이인 것이다. (385)

 

열다섯 번째 이야기 ; 실험정신과 퍼즐 풀기 잡체시의 세계 2

빈칸 채우기, 수시. 팔음가. 약명체

일생 동안 병고에 괴로웠는데

이월에도 아파서 목이 잠겼네.

삼 일 밤을 끙끙대며 잠 못 이루니

사대 등신 멀쩡한 몸 헛것이로다. (하략) (389)

매 구의 첫 자에 차례로 숫자를 매겼다. 운자를 지켜 숫자만 빼면 여느 시와 다를 게 없다. (389)

대개 이 종류의 잡체시는 채워 넣는 글자가 무엇이냐에 따라 얼마든지 늘어난다. 춘하추동 네 글자를 넣으면 사시시가 되고, 약초의 이름을 매 구절만다 채워 넣으면 약명체가 된다. (390)

 

구슬로 꿴 고리, 장두체와 첩자체

장두체란 글자 그대로 각 구절 첫 글자에 비밀이 감추어져 있는 형식이다. 달리 옥련환이라고도 한다. 옥은 글자니 옥련환은 글자가 고리처럼 이어지는 꼬리따기 노래다. (395)

무대가 자그만 세상이라면 舞臺小天地

천지는 커다란 무대일러라. 天地大舞臺

를 중앙에 두고 무대천지의 위치를 서로 맞바꿨다. 간결하면서도 깊은 함축을 담았다. (397)

잡체시가 나름 언어유희인 것 같은데 내가 보기엔 한편 말장난 같다.

 

파자놀음과 탁자시

한시 중에는 앞서 장두체와 같이 파자하여 장난을 친 문자 유희가 심심찮게 있다. 글자를 쪼갰다 하여 탁자시라고도 한다. (399)

새가 바람 속에 들어가더니 鳥入風中

풀을 다 뜯어먹자 나귀로 변했네. 銜出虫而作鳳

자 속으로 가 들어가서는 을 물고 나왔으니, 결국은 자가 된 것이다. (402)

 

이합체와 문자 퍼즐

이합체란 이처럼 각 구절의 첫 자에서 반토막씩 잘라 둘을 합쳐 한 글자로 만들고, 이렇게 만들어진 글자의 조합으로 제목을 삼는 형식의 시체를 말한다. 글자가 일단 떨어졌다가 뒤에 다시 합쳐지므로 이런 이름이 붙었다. (406)

이런 시들 속에는 그 어려운 한자를 마치 떡 주무르듯 제멋대로 가지고 놀았던 옛 시인들의 풍류가 거나하다. 장난은 장난이되 격조를 잃는 법이 없었다. 얼마나 많은 습작의 과정을 거쳤으면 언어를 이처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었을까. 언어를 매만지는 장인의 근성이 이런 잡체시를 낳았다. (409)

 

열여섯 번째 이야기 ; 말장난의 행간 한시의 쌍관의

초록 저고리, 국수 한 사발

연일 내린 장맛비에 풀은 푸른데 草綠積雨裏

국화는 찬 모래에 곱게 피었네. 菊秀寒沙發

독음으로 한번 읽어보라. ‘초록적우리, 국수한사발이다. 초록 저고리를 입은 아가씨가 시장한 길손에게 국수 한 사발을 내오는 모습을 보고 지었다는 이야기가 덧붙어 있다. 이런 시들은 자꾸 비슷하게 가지치기를 해서 변종과 아종을 만들어낸다. (416)

한자를 소리 나는 대로 쓰면서도 풀이하면 말이 되게 했다는 것이다. 물론 말이 안 되는 경우도 있었으나 한자를 가지고 노는 재미가 있다.

백성이 태평성대를 즐거워한다는 낙민루에서 정작 백성은 낙루落淚를 하고 있다. 교화를 선양해야 마땅할 선화당에는 교화는커녕 재앙밖에 닥칠 것이 없다. 감사 조기영의 토색질에 함경도민이 함경도咸警逃’, 즉 모두 놀라 달아날 지경에 이른 것이다. 각각의 단어에 반어적 의미를 연결시킴으로써 풍자의 칼날을 세웠다. (428)

 

장님의 단청 구경

승소가 적게 오니 스님 웃음 적은데

승소는 떡의 별칭이었다. 차려온 쟁반에 떡이 조금밖에 없어 스님의 웃음이 가셨다고 말장난을 했다. (418)

객담은 술의 별명이었다. 이색이 환호작약하여 전날의 구절에 대를 맞추었다.

객담이 많이 오니 객의 말도 많아지네. (419)

쌍관의 묘미를 활용한 멋들어진 응수도 절묘하다. (419)

 

견우와 소도둑

앞서 본 예화들은 모두 말장난에 불과하지만, 언어를 구사하는 재치와 기지가 반짝인다. 시와 말장난은 엄격히 다르지만, 언어를 주된 질료로 삼는 시는 본질적으로 얼마간 유희적 기분을 띠게 마련이다. 특히 음이 같은 말이나 뜻이 여럿인 표현을 활용한 쌍관, 즉 말장난은 현대시에서도 흔희 보는 기교다. (423)

한시의 기교는 한자를 알고 이해해야하니 쉽지 않다. 저자는 그걸 찾고 즐기는 것 같지만 일반독자까지 즐기기엔 무리가 있다.

첩의 몸이 직녀가 아니옵거늘

낭군이 어이해 견우시리오

견우는 글자 그대로 풀면 소를 끌다’, 즉 소를 끌고 간 도둑이란 말이다. 자신이 직녀가 아닌데 어떻게 낭군이 견우가 될 수 있느냐고 말해, 남편이 결코 소를 훔치지 않았다는 뜻을 대신했다. (425)

목근은 무궁화다. 무궁화는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이면 져서 일일영이라고도 부른다. 중국 사람들은 우리와 달리 덧없는 소인배의 작태에 견주곤 한다. (430)

같은 꽃인데도 나라마다 달리 보는 것은 문화적 차이겠다. 어디 꽃뿐이겠냐 마는.

 

새울음 속에 담긴 사회학

포곡은 중국 음으로는 뿌꾸. 뻐꾹의 음차다. 이를 의미로 읽으면 씨 뿌려라가 된다. 뻐꾹뻐꾹 울음이 씨 뿌려라. 씨 뿌려라하는 소리로 들린다. (431)

동물의 소리도 각 나라마다 다르고 동,서양은 특히 많이 다르다. 언어에서 오는 차이일까. 뿌꾸와 뻐꾹은 그래도 비슷하다.

한시는 이렇듯 새 울음소리를 음차하여 훈독함으로써 이중 의미를 담는 금언체시라는 것이 일찍부터 발달했다. 위의 노고지리는 다른 시에서는 노고질로 표기하여 늙어 병든 시어머니의 병환을 안타까워하는 며느리의 효성을 칭찬하는 내용으로 바뀌기도 한다. (433)

까마귀가 고악고악하고 운다. 고악은 뜻으로 풀면 시어머니 나빠요가 된다. ... 그렇다면 저 새는 왜 부곡부곡하고 우나요? 부곡은 며느리가 잘못했다는 의미다. (434)

 

선덕여왕의 자격지심

예전부터 모란꽃을 그릴 때에는 나비를 함께 그리지 않았다. 모란은 부귀를 상징하고 나비는 여든 살 늙은이를 나타낸다. 모란에 나비를 함께 그리면 여든 살이 되도록 부귀를 누린다는 것으로 의미가 제한되어버린다. 나비는 왜 여든 살 늙은이가 되는가? 나비 자의 중국 음은 디에인데, 여든 살 늙은이 자의 발음이 또한 같아 서로 쌍관된 것이다. (436)

고양이는 또한 일흔 살 늙은이를 의미한다. ‘자의 발음이 일흔 살 늙은이 자와 발음이 마오로 같기 때문이다. (438)

표범을 나타내는 한자 빠오로 읽히니, 알린다는 뜻의 와 발음이 같다. 까치는 희작이라 하여 기쁜 소식을 상징한다. 까치와 표범을 합쳐야 기쁜 소식을 알린다는 문장을 이룬다. ‘은 보낼 과 발음이 같다. 이 그림을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 기쁜 소식을 알린다는 송구영신, 신년보희의 의미로 읽어야 하는 까닭이다. (440)

그림과 독음에 이렇게 많은 상징이 있는 줄 몰랐다.

시인이 문자 유희에 빠져서는 안 되겠지만, 그러한 유희 속에 뜻밖에 드러나는 언어의 발랄한 생기를 일부러 멀리할 일은 더더욱 아니다. (442)

 

열일곱 번째 이야기 ; 해체의 시학 파격시의 세계

요로원의 두 선비

육담풍월은 한시처럼 다섯 자 또는 일곱 자의 시를 짓되 한글과 한자를 섞어서 짓는 문자 유희의 한 종류다. (445)

눈물의 석 줄

한시의 어조는 조선 후기에 오면 단순하고 천편일률적인 목소리에서 벗어나 자못 복잡한 양태를 연출하였다. 그들은 성리학적 세계관이 규정하는 제반 조건에 깃들어 있었으면서도 그것에서 벗어나려 하였다. 시인의 태도는 자연스럽게 희극적 양상을 나타내게 되고, 시는 진지함과 거리가 점차 멀어졌다. (448)

미술도 그렇고 건축도 그렇고 모든 분야가 서로 다른 형식을 이끈다.

희작시의 작가들이 보여주는 시정신은 탈중심주의, 탈이데올로기를 표방하는 현대 해체시의 세계와 맞닿아 있다. (449)

 

김삿갓은 없다

희작시의 특징은 파격과 해학, 민중성과 익명성으로 대표된다. 특정 작가가 없을 뿐 아니라, 있다 해도 별 의미가 없다. 희작시는 기존 한시의 문법을 과감히 깨뜨린다. (452)

김삿갓은 없다. 세간에 그의 시로 일컬어지는 시는 김삿갓이 아니고 누가 이런 시를 지으랴 싶은 것을 모아놓은 것이라고 보면 된다. (453)

다른 것 같다 하고 같은 것 다르다 하니,

같고 다름이 다르고

같은 것 다르다 하고 다른 것 같다 하니,

다르고 같음이 같구나. 김시습 (454)

다 같은 발상에서 나온 말장난이다. 하지만 그 속에 담은 뜻까지 장난스러운 것은 아니다. 말투가 가벼울 뿐 내용은 진지하다. (455)

종내는 조선조의 모든 희작시가 김삿갓의 이름 아래 야권통합을 이루고야 말 모양이다. (458)

김삿갓이 야권통합을 이루다니. 저자의 표현이 재밌다.

 

슬픈 웃음, 해체의 시학

해체주의는 자명한 이치와 질서와 도덕을 근본적으로 회의한다. 세계를 가변적이고 일상적이며 부조리한 것으로 인식한다. 자아도 더는 일관되게 세계와 교섭하고 대결하는 심리적 통일첸 종합적 기능으로 보지 않는다. 그래서 해체시는 무질서한 세계를, 파편화된 세계를 그대로 수용한다.” (458)

땅 이름 약수인데 병 고치기 어렵고

....

역 이름 여량이나 주림을 못 구하네.

여랑은 강원도 정선 땅에 있던 역 이름이었다. 약수의 물은 약효가 없고, 양식이 남아돌아야 할 여량엔 굶주리는 백성뿐이다. (460)

그저 가벼운 말장난에는 감동이 없다. 시대적 아픔이나 슬픔을 승화해야 뭔가 느낌이 있다.

마고 할미는 새처럼 긴 손톱을 지녔다는 전설 속 선녀의 이름이다. (462)

마고할미에 대한 이런 전설도 있었구나.

우스운 것 앞에서 뜻밖에 진지해지고, 진지한 것을 단번에 희화해버리는 시인의 희극적 태도는 한마디로 세상을 우습게 보는 태도에서 출발한다. (462)

대체로 김삿갓의 장난 시를 읽을 때마다 필자가 느끼는 감정은 서글픔과 씁쓸함이다. ... 비록 조부의 훼절에 말미암은 개인적 연유에서 비롯되었다고는 하나, 김삿갓의 시정신은 당대 조선 사회가 처했던 제반 역사 환경의 변모에 의해 안받침되어 사회적 성격을 부여받는다. 시는 그 사회를 비추는 거울인 까닭이다. (465)

어쨌든 그의 웃음은 슬프다. 그 슬픈 웃음의 뒤안길은 외면한 채, 자꾸 가십적인 살을 붙여 그를 봉이 김선달류의 비천한 재담가로 만드는 것은 사람들의 악취미다. (467)

 

한시 최후의 광경

언어가 힘을 잃은 시대의 표정을 맨 얼굴로 전달한다. 욕설과 비아냥거림, 딴전과 엇박자 등 시의 문법을 파괴하는 폭력이 난무한다. 이들은 형식을 파괴하며 가치를 재배치한다. (467)

이러한 한시 양식의 해체는 아예 한글로 한시를 짓는 이른바 언문풍월로까지 발전한다. 언문풍월은 예전 궁녀들이 한시의 작법을 응용하여 나름의 규칙을 세워 시를 짓던 일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진다. ... 언문풍월이 본격적으로 창작된 것은 개화기에 와서다. 1900년대에는 심지어 시조문학과 경쟁관계를 유지할 만큼 기세를 떨쳤다. (469)

참대붙인종이

흔들면은바람

몹시더운여름에

친한벗이네로<부채> (470)

의식의 변화는 내용의 변모를 부른다. 내용만으로 의식의 변화를 담아내지 못할 때 형식이 변한다. (472)

 

열여덟 번째 이야기 ; 바라봄의 시학 관물론

지렁이의 머리는 어느 쪽인가

말을 듣고 빛깔을 보아 지각이 어둡지 않은데도 사람 중에 간혹 방향을 잃고 길을 헤매는 자가 있으니 슬프다. 성호 이익 관물편(475)

지렁이만도 못한 인간에 대한 글이다. 사람이기에 그렇다. 자신이 그럴 리 없다 자만하기에, 아님 그런 자각을 못하기에.

어떤 이가 야생 거위를 길렀다. 불에 익힌 음식을 많이 주자 거위가 뚱뚱해져서 못 날았다. 그 뒤 문득 음식을 먹지 않았다. 사람이 병이 났다고 생각하고 먹을 것을 더 많이 주었다. 그런데도 먹지 않았다. 열흘이 지나 몸이 가벼워지자 허공으로 날아가 버렸다. 옹이 이를 듣고 말하였다. 지혜롭구나. 스스로를 잘 지켰도다. (477)

동물 중에 인간만이 배가 부른데도 계속 먹는다.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 다른 동물이다. 가장 잔인하고 이기적이다. 옛 사람도 이를 알고 있었다.

 

저 매화에 물을 주어라

123. 설사를 하셔싸. 매화분이 그 곁에 있었는데, 다른 데로 옮기라 하시며 말씀하셨다. “매형에게 불결하니 마음이 절로 미안하다.”

매화를 아끼는 퇴계의 마음은 마치 하나의 인격체를 대하는 듯하다. 임종하던 날 그는 매화분에 물 줄 것을 명했고, 불결한 냄새가 매화분에 닿는 것조차 미안해했다. 사물에 자아를 얹고, 관물을 통해 천기를 읽었던 선인들의 삶의 체취가 그대로 느껴진다. (480)

매화를 매형이라 부르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소동파가 <적벽부>에서 말했다. “장차 변하는 것을 기준으로 본다면 천지는 일찍이 한순간도 그대로 있지 못하고, 변치 않는 것을 통해 본다면 물과 아가 모두 다함이 없다.” 젊은 날 성취를 향한 집착과 작위하고 경영하던 마음을 훌훌 던져버리고, 자연의 변화에 몸을 맡겨 다만 일신의 한적을 추구할 뿐이다. 청산은 말이 없으니 그를 보며 묵언의 마음을 배운다. (483)

 

생동하는 봄풀의 뜻

드러난 현상만보면 이런 설명이 가능하겠지만, 떳떳한 한 이치가 분명할진대 어찌 두 마음이 있다 할 수 있겠는가? 결국 마음 공부는 언뜻 보아 다른 듯이 보이는 현상 속에 내재된 한 가지 이치를 수시로 자가 점검함으로써 외물에 현혹되지 않는 힘을 기르는 것이다. (488)

너무 이렇게 관물하다 보면 노자처럼 되지 않을까.

이래서 좋으면 저래서 나쁘고, 저래서 미쁘면 이래서 언짢으니, 군자는 의연하게 제자리에 지켜 서서 변화의 기미를 보아 몸을 맡길 뿐이다. (490)

맞다. 인생사 무엇이든 무조건 좋고, 무조건 나쁜 것은 없다. 이제 옳고 그름의 경계도 명확하지 않다. 나에게 옳음은 더더욱 그러기에, 나의 옳음을 남에게 강제하는 것은 또 다른 폭력이다.

만물 속에 답이 있다. 고요히 바라보라. 마음이 늘 문제다. 외물에 끌려다니면 안 된다. 가만히 응시하면 물이 흐르고 꽃이 핀다. 속개가 날고 물고기가 뛴다. 하나도 모를 것 없다. 명징하고 투명하다. (491)

 

유아지경과 무아지경

유아지경은 아로써 사물을 보는 까닭에 사물과 내가 모두 나의 색채로 물들고, 무아지경은 물로써 사물을 보므로 어느 것이 나이고 어느 것이 사물인지 알 수가 없다.” 왕국유(491)

사물로 향하는 아의 삼투압은 이렇게 이루어진다. 서로 팽팽한 표면장력을 유지하다가 어느 순간 그 균형이 깨지면서 한꺼번에 빨려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스펀지에 물이 스미듯 서서히 눈치 채지 못하는 사이에 이루어진다. 시인은 이제 없다. (492)

진정한 의미에서 무아지경의 시는 없다. 무아지경이라고 해서 시인의 주관 정취가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495)

 

속인과 달사

본 바가 적은 자는 백로를 가지고 까마귀를 비웃고, 오리를 가지고 학을 위태롭게 여긴다. 사물은 제 스스로 괴이함이 없는데 자기가 공연히 성을 내며, 한 가지만 같지 않아도 만물을 온통 의심한다. (498)

이 글을 보는 나를 두고 하는 말 같다. 합리적 의심이라 하지만 괜한 의심이다.

깨달음이 없이는 우리 모두는 눈뜬장님일 뿐이다. 눈을 뜨고 있다고 다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보려 한다고 보이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깨달음은 결코 거져 얻어지지 않는다. 사물을 바라보는 눈은 아무렇게나 열리지 않는다. (499)

누구나 보고 있지만 못 보는 사실, 늘 마주치면서도 그저 지나치는 일상 사물에 담긴 의미를 읽을 수 있어야 한다. 익숙한 사물과 낯설게 만나, 그 낯섦으로 그 사물을 새롭게 만나는 것, 이것이 관물론이 시학과 만나는 접점이다. (499)

뚱냥이의 블로그 글들이 생각난다. 일상 사물을 보고 시학으로 표현한다. 또 구본형선생님의 익숙한 것들과의 결별도 생각난다.

 

열아홉 번째 이야기 ; 깨달음의 바다 선시

산은 산, 물은 물

선은 어지러운 마음이 일어나지 않음을 말한다. 생각도 없고 움직임도 없는 것이 선정이다. (504)

그림자 없는 나무 베어와서는

물속의 거품에다 태워버린다.

우습구나 소 등에 올라탄 사람

소 타고서 다시금 소를 찾누나. 서산대사 게송 (508)

이렇듯 말 같지 않은 소리만 골라서 하는 까닭은 단 하나다. 따지지 말라는 것이다. 머리로 따져 알려들지 말고 가슴으로 느껴 직지인심 견성성불 하라는 말이다. 굳이 말로 하자면 이렇게밖에 설명할 수 없는 세계를 일러주는 중이니 섣불리 사변의 잣대를 들이댈 생각일랑 아예 하지 말라는 우격다짐이다. (508)

설명을 봐도 잘 모르겠다. 사변의 잣대를 들이대지 말고 섣불리 생각하지 말고 받아들이라는 건데 말도 되지 않는 내용을 무작정 가슴으로 느낀다는 게 가능한가?

선기와 시취

말로 일러주면 언어의 그물에 걸려들고, 이치로 설명하면 이로에서 길 잃고 헤맨다. 그러니 언어로 설명하기를 포기하겠다는 것이 불립문자요, 알아들을 놈만 알아들으래서 교외별전이다. (513)

인생의 목숨이란 물거품과 같거니

여든 몇 해 생애가 봄 꿈속과 한가질세.

지금에 죽음 임해 가죽자루 내던지니

한 덩이 붉은 해가 서산에 지는구나. 보우 스님 <사세송> (515)

인생은 물거품이요 한바탕 봄꿈이다. 성가진 가죽 부대를 벗어던지니 속이 다 후련하다. 그 뒤엔 무엇이 남는가. 붉은 해가 서산에 진다. 슬프고 안타까울 일이 하나도 없다. 이렇듯 선시의 세계는 칼끝 같은 깨달음을 노래한다. 언어가 무력화되고 의미가 힘을 잃는다. (515)

선시가 선승의 전유물이란 생각은 큰 잘못이다. 선시는 하나의 사고방식이기도 하다. 불교가 있기 전에도 선시는 있었고, 불교를 믿지 않아도 선시를 쓸 수 있다. (517)

선시를 보며 불교와 비슷해서 스님만이 쓰는 것인가 싶었는데 저자는 아니라고 한다.

 

설선작시, 본무차별

시가 선과 만나 선시가 된다. 시가 선의 경지에 이르면 시선이다. (518)

선이면서 선 없어야 그제서 시가 되고

시 속에 시 없을 때 선이 또한 엄연하다. 보하 <시선편> (519)

알쏭달쏭하다. 선과 시는 애초에 길이 다르다. 선이 시가 아니고, 시도 선은 아니다. 하지만 닮았다. 방법이 흡사하다. 선이면서 선이 없어야 시라는 말은, 선의 방법을 빌려 오되 선에 함몰되지 말라는 말이다. 시이되 시를 벗어나야 선이란 말은, 어쩔 수 없이 시를 빌려도 시가 선일 수는 없음을 명백히 깨달으라는 주문이다. (519)

전혀 모르겠다.

진짜 앞에서 가짜는 오금도 못 편다.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자재원성이다. 저 하고 싶은 대로 행주좌와 어느 것 하나 걸림 없이 원만하다. 숨 쉬고 밥 먹듯 자연스럽다. 이것이 선의 극치다. 시도 다를 것이 없다. 스스로를 괴롭혀 쥐어짜는 시, 안 알아준다고 닦달하는 시, 알맹이 없이 허세만 남은 시는 가짜다. (521)

옛사람의 길을 따르지 말라. 너는 너의 길로, 나는 나의 길로 선에 도달하고 시를 깨달을 뿐이다. 남의 흉내로는 안 된다. 안목 없는 세상은 자꾸만 옛길을 따라오라고 요구한다. 이렇게 쓰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강요한다. 좋은 시는 끊임없는 반란의 산물이어야 한다. 친숙한 관습과의 결별, 익숙해진 접점에서 벗어나기를 쉼 없이 추구해야 한다. (523)

구본형선생님에게 영향을 준 글귀이겠다.

 

거문고 소리는 어디서 나는가

선시의 언어는 직관의 언어다. 의미를 해체하고, 사물로 말한다. 풍경으로 보여주고 설명하려 들지 않는다. 직관의 언어는 무책임하다. 친절하기는커녕 때로 소통 자체를 거부한다. (528)

 

스무 번째 이야기 ; 산과 물의 깊은 뜻 - 산수시

가짜 어옹과 뻐꾸기의 은사

천옹은 어옹에게 세 주지 않으려고

일부러 강호에 순풍 적게 보내네.

인간 세상 험하다 그대여 웃지 마오

그대 외려 급류의 한가운데 있는 것을. 고려 김극기 <어옹> (531)

이 작품은 고려 말 현실을 외면하고 강호에 묻혀 살며 고고함을 뽐내던 사이비 어부, 즉 속류 은사들을 신랄하게 풍자한 것이다. (531)

어옹이 물고기옹이었군. 은사는 숨어사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고....

뜻있는 이들이 모두 저만 좋자고 강호로 들어가 버리면, 정작 현실의 질곡은 누가 감당하고, 도탄에 빠진 백성은 누가 건진단 말인가. (533)

뻐꾸기 은사란 조선 중기의 학자 권응인의 송계만록에 나오는 말이다. 아이들이 숨바꼭질 놀이를 할 때 술래가 저 숨은 곳을 못 보고 엉뚱한 데를 헤매면 숨은 아이는 짐짓 뻐꾹뻐꾹하며 자신이 숨은 곳을 알려준다. 그는 이 모습이 꼭 가짜 은사들이 방편상 강호에 숨어서는 자기가 여기 있으니 좀 알아달라며 현실을 기웃대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꼬집었다. (533)

 

청산에 살으리랏다

이렇듯 자연은 우리에게 떳떳한 삶의 모습을 일깨워준다. 일상에 찌들어 생기를 잃고 풀이 죽어 있을 때, 자연은 인간에게 소생의 원기를 불어넣어준다. 의 동서를 막론하고, 때의 고금을 떠나서 자연이 예술의 변함없는 경배의 대상이 되어온 것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그러나 자연이 아무나 자신의 품에 끌어안는 것은 아니다. (537)

첨단과학의 시대일수록 산수자연을 향한 선망과 동경은 더해만 가는 모양이다. (538)

 

요산요수의 변

산이 나오고 물이 나온다고 다 산수시가 아니다. 산수와 인간이 만나 나누는 교감이 있어야 한다. 산수를 내 편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산수 쪽으로 향해 가서 어느덧 물아의 경계를 허물고 하나가 되는 동화가 있어야 한다. (541)

산수만이 아니라 모든 것이 그렇다. 내가 가서 동화가 되어야 한다.

 

들늙은이의 말

고요한 밤 산집에 말없이 앉았자니

등허리 시큰하여 잠을 자야 하겠구나.

이때의 이 마음을 그 누가 알겠는가

온 숲 시든 잎이 가을 매미 전송한다.

피곤하면 자고, 깨면 고요히 사물을 바라볼 뿐이다. 이제 눈을 좀 붙여볼까. 이렇게 중얼거리던 시인은 마음속에 무언가 와 닿는 깊고 그윽한 느낌을 가졌다. (548)

 

가을 구름이 내 정수리를 어루만지네

옛사람의 문집을 뒤적이다 보면 뜻밖에 많은 산수유기와 만나게 된다. 유기는 산수를 향한 고인의 진지한 열정의 산물이다. 여기에는 자연 앞에 선 외경이 있고, 인간의 왜소를 돌아보는 겸허가 있다. 이제 산수유기는 고작 수필의 대접밖에 못 받아 설 자리를 잃고, 연구자들에게조차 외면당하는 처지에 놓였다. 구도자의 심경이 되어 산수 간을 노닐던 고인들의 그 시원스런 정신의 경계도 다시 만날 길이 없어 안타깝다. (550)

연구자로서의 안타까움이 느껴진다.

 

스물한 번째 이야기 ; 실낙원의 비가 유선시

풀잎 끝에 맺힌 이슬

칼 빼어 물 베어도 물은 다시 흐르고

잔 들어 맘 달래도 시름은 더 깊어지네.

인생살이 사는 동안 뜻 같은 일 없었지

내일엔 머리 풀고 쪽배 타고 떠나리. 이백 (558)

 

그들이 흘리는 눈물은 눈앞의 상황에 매여 일희일비하는 가벼운 슬픔이 아니다. 중국의 미학자 이택후가 위대한 고독감이라는 헌사를 바친 이런 시들에는 인생을 향한 깊은 관조와 달관이 있다. 비분강개 속에 인생의 갖은 신산을 겪으면서 오히려 이들은 인생을 더 깊이 바라보는 중후함을 얻은 듯하다. (559)

 

닫힌 세계 속의 열린 꿈

현실의 억압은 개체의 삶을 질식시킨다. 인간은 닫힌 세계 속에서 끊임없이 반란을 꿈꾼다. (559)

유선시는 고대인이 꿈꾼 상상의 세계를 노래한다. 그것은 아득한 은하수 저편 아홉 층의 하늘을 지나 있는 옥황상제가 거처하는 황금 궁전이거나, 동해 너머 출렁이는 파도 속에서 거대한 여섯 마리 거북이가 등에 업고 오르락내리락한다는 상상의 섬 삼신산으로 나타난다. (560)

심청전, 토끼전에서 바다속 용왕과 왕궁을, 홍길동전에서 율도국을, 우리의 고전에서 많이 본 모습들이다.

무의식의 세계는 원초적 상징들로 가득 차 있다. 상징은 좌절되었던 본능적 충동을 만족시키려는 욕구와 관련된다. 이러한 상징들은 꿈을 통해 신비한 세계를 열어 보임으로써 현실에서 상처받고 왜소해진 자아의 의식을 확장시키고 소생시켜준다. (566)

 

구운몽, 적선의 노래

구운몽신선 세계를 향한 꿈을 노래한 작품이다. 유선적 상상력이 빚어낸 도교적 깨달음이 그 바탕에 깔려 있다. (567)

한참 글을 읽고 나면 그래서 꿈이었다.‘ 허망하다. 현실에선 불가능하니 상상속 세계이며 그러니 꿈속의 세계다. 나도 이 형식으로 칼럼을 썼었다.

스스로를 적선으로 생각할 때 유선 행위는 언젠가 자신이 속해 있었던 잃어버린 낙원, 또는 본향으로의 귀환이며, 동시에 불완전한 현재에서 완전했던 과거로의 회귀라는 성격을 띤다. (571)

 

이카로스의 날개

유선시에서 하계는 하루살이만 득실대고, 풍파 잘 날이 없으며, 만 길이나 쌓인 먼지가 시야를 흐리는 부정적인 공간으로 묘사된다. 또 다른 작품에서는 티끌만 자옥하고, 급류 속에 온갖 잡귀가 질주하며, 온갖 근심이 인간의 실존을 질식시키는 공간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572)

반복적으로 확인되는 하계를 향한 혐오감의 표현은 반동형성에 의한 양가감정의 투영이다. 현실에 대한 집착이 강할수록 선계는 미화되고 하계의 모습은 일그러져 나타난다. (572)

꿈은 깨게 마련이고, 자아는 결국 변한 것 없는 현실과 마주할 수밖에 없다. 자아는 몽중 유선의 과정에서 더욱 확대된 세계와의 괴리 앞에 다시 직면한다. 탈출은 좌절의 새삼스런 확인일 뿐이어서 현실과의 불화나 첨예한 긴장 상태를 해결할 어떤 대안도 마련해주지 못한다. (574)

꿈일 뿐 현실은 변하지 않지만 대리만족이나 일종의 해방감을 느끼지 않을까.

 

스물두 번째 이야기 ; 시와 역사 시사와 사시 (578)

할아버지와 손자

흰둥이 앞서가고 누렁이 따라가니

들판 풀 주변에는 무덤들 늘어섰네.

제사 마친 늙은이는 밭 사이로 난 길에서

손자의 부축 받고 취하여 돌아오네. 이달 <체총요> (579)

짧은 시 속에 함축이 매우 깊다. 시인은 임진왜란으로 이 땅에서 벌어진 죽음의 참상을 남의 얘기 하듯 장면으로 포착한다. 슬픔은 간접화되고 전쟁의 체험도 배경으로 숨는다. 오히려 인생무상의 주제를 떠올리기 십상인 이 시는 그럼에도 깊은 아픔을 내재한다. (580)

역사시, 한시에서 주배경이 되는 역사라 임진왜란이 많겠다.

권벽은 임지왜란 당시 73세의 노구를 끌고 피난길에 올랐다. 고통스런 피난의 와중에도 시고를 담은 상자만은 내려놓지 않았다. 보다 못한 아내가 도망다니며 죽을 겨를도 없는데 그깟 시 상자는 어디에다 쓰려느냐고 타박했다. 그는 결코 시 원고 뭉치가 든 상자만은 버리지 않았다. 더욱 놀라운 것은 노령의 피난길에서도 128수에 달하는 시를 일기 쓰듯 남겨 당시 피난길의 고초와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전황을 세밀하게 기록했다는 점이다. (582)

얼마 전 <택시운전사>를 봤다. 역사의 현장에 들어가 사진이든 글이든 기록을 남기는 사람이 있기에 역사를 기억하게 된다. 권벽은 종군 기자다.

 

시로 쓴 역사, 시사

시는 시대를 비추는 거울이다. 시의 거울에는 그 시대 사람들의 바람과 애환이 그대로 떠오른다. 한 편의 시는 방대한 사료로 재구성한 어떤 역사보다 생생하다. 사람들은 이를 일러 시사詩史라 한다. (583)

시사는 시로 쓴 역사란 뜻이다. 역사를 소재로 시를 썼다는 말이 아니라, 앞서 본 이안눌의 시처럼 시인이 직접 보고 들은 당시의 일을 시로 기록해둔 것이 뒷날 사료적 가치를 지니게 됨을 두고 하는 말이다. (583)

 

이튿날 앞길로 나서려는데

할아범 혼자서 작별하누나. 두보 삼리 중 <석호리> (585)

전문을 발췌하지 않았지만 저자의 설명까지 읽고 나니 뭉클하다. 혼자 읽을 땐 할아범이 잡혀가지 않았구나 했는데, 결국 할멈까지 잡아간 거였다.

집안에 장정이라곤 남편 하나뿐인데 돌아가신 아버지와 난 지 사흘밖에 안 된 핏덩이의 군포를 독촉하다 이정은 목숨보다 중한 소를 끌고 가버렸다. 눈이 뒤집힌 가장은 칼을 뽑아 이정을 찌르지도 못하고 애꿎은 자신의 남근을 자르고 말았던 것이다. (587)

삼정의 문란하여 백성의 살림이 어려웠다는 것은 역사시간에 배웠다. 하지만 이렇게 시로 직접 사례를 접하니 그 참혹함이 절로 이해된다. 소름끼친다. 그러다 문득 시사로 역사를 배우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쨌건 삼정의 문란을 말할 때 당시 이를 증명하는 어떤 통계수치보다도 우리는 이 <애절양> 한 편을 통해 그 시대 백성의 절규를 실감으로 듣는다. 시는 이렇게 역사가 된다. (57)

 

변새의 풍광

아들을 낳는 것 정말 나쁘고

딸 낳음이 좋단 말 이제 알겠네.

딸 낳으면 이웃에다 시집이나 보내지만

아들 낳아 잡초 속에 묻히고 마는 것을.

두보의 <병거행>이다. 이 시를 읽어보면 왜 두보의 시를 시사라고 하는지 알 수 있다. (590)

운이 좋아야 20~30년 만에 돌아올 수 있다. 어린 소년이 희 머리로 돌아와도 다시 다른 곳에 끌려간다. 일손이 없어 민생은 도탄에 빠졌다. 전쟁 비용을 대기 위해 세금은 더욱 가혹해진다. (591)

역사에 관심이 많은 나는 시사가 다른 한시보다 끌린다.

 

군사는 모두 다 흰머리여서

오랑캐 멸할 날 볼 이 누구랴. 장적 <출새> (591)

변새시에는 당시 전쟁터의 스산한 분위기와 끝없이 계속되는 정복 전쟁에 지친 고통스런 신음소리가 천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생생하게 살아 있다. 그래서 시는 그 시대를 비추는 거울이 된다. (592)

 

궁사, 한숨으로 짠 역사

정 머금어 궁중 일을 말하고 싶지만은

앵무새 앞인지라 감히 말을 못하네. 주경여 <궁사> (593)

새 앞에서도 말을 못하는 그 심정이 얼마나 답답할까.

제량 시기 이래로 시인들은 궁녀의 생활과 정감을 제재로 한 궁사를 많이 창작했다. 군왕에게 총애를 잃은 후궁들의 원망과 하소연이 주된 내용이다. (593)

귀신 쫓는 데 영험이 있다는 복숭아 나뭇가지와 갈대로 뜰을 쓸며 집에서 역신을 몰아낸다. (596)

 

사시, 역사로 쓴 시

만리장성을 쌓은 벽돌을 해체하여 적도를 따라 벽을 쌓으면 허리 높이로 지구를 한 바퀴 돌 수 있다고 한다. 그 규모가 기가 질린다. (598)

진나라를 망하게 할 자는 호라고 적혀 있었다. 시황이 이에 몽염을 파견하여 군대 30만 명을 출동시켜 북으로 흉노를 치고 하남의 땅을 거두어 44현을 만들고 장성을 쌓았다. 통감(598)

역사를 보면 독재자들은 건설에 열중했다. 진시황은 만리장성과 아방궁을, 흥선대원군은 경복궁 복원을, 박정희는 고속도로와 산업단지들을 지었다. 백성들은 부역으로 세금으로 힘든 삶을 살았다. 세월이 달라 박정희는 경제성장이 되었다.

망진자호야라 예언한 것은 오랑캐가 아닌 진시황의 둘째아들 호해를 가리킨 말이었다. (598)

첫째 아들 부소를 자살하게 하고 왕위를 차지한 막내아들 호해다. 결국 5년 만에 진나라는 망했다.

치열한 역사의식도, 현실의 부조리를 고발하는 저항정신도 시인이 먼저 흥분하면 한낱 구호로 전락하고 만다. 흥분을 가라앉힐 때 역사와 현실은 더욱 심각하게 독자의 뇌리에 각인된다. ... 시의 정서는 이념과는 상관없다. (602)

 

우수수 나뭇잎 지는 소리를

성근 빗소리로 잘못 알고서.

중 불러 문 나가 보라 했더니

시내 남쪽 나무에 달 걸렸다네. 송강 정철 <산사야음> (602)

1980년대 후반의 일이다. 기말시험 문제에서 이 작품의 감상을 요구했다. 한 답안이 이랬다. “부르주아적 근성에 철저히 물든 정철의 봉건 착취계급으로서의 면모가 여실히 드러난 작품이다. 창밖의 일이 궁금하면 자기가 직접 문을 열어보면 되지 않는가? 그 쉬운 일도 하기 귀찮아 프롤레타리아 계층인 사미승을 부려먹고 있다.” 투철한 역사의식이 담긴 이 답안이 오랫동안 생각난다. 이런 의식아래 시는 더는 설 자리가 없다. (602)

이 답안을 쓴 80년대 대학생이 그려진다. 그 당시 한양대 대자보는 광주사태와 민주화를 위한 투쟁으로 내용이 처절했다. 그러니 한가하게 한시나 읽으며 시의 정서를 논한다는 것이 쓸데없이 보였을 거다. 지금 보니 모든 것을 하나의 시각으로만 보는 위험(?)과 답답함이 느껴진다.

스물세 번째 이야기 ; 사랑이 어떻더냐 정시

담장 가의 발자국

사랑은 아름답다. 슬퍼서 아름답고, 아름다워서 슬프다. 평소 한시를 고리타분하게만 생각하던 이도 사랑을 노래한 정시를 읽고는 뜻밖이라는 표정을 짓곤 한다. (607)

뜻밖이라는 것이 뭘까 궁금해진다.

 

비단 버선 물결 걷듯 사뿐사뿐 가더니

중문 한번 들어서곤 아득히 사라졌네.

다정할사 잔설이 그래도 남아 있어

그녀의 발자국이 담장 가에 찍혔구나. 강세황 <노상소견> (607)

앞서가는 어여쁜 아가씨의 뒷모습에 온통 마음을 뺐겼다. 저도 몰래 뒤를 쫓아왔건만 그녀는 무정하게 눈길 한 번 주는 법 없이 대문 안으로 사라져버렸다. 굳게 닫힌 대문 앞에 갈 길도 잊은 채 그는 서 있다. (607)

 

야릇한 마음

연밥은 암만 캐도 한 줌이 안 되는데

백사장 쌍쌍 원앙 문득 샘이 나누나.

원앙은 짝져 날고 얘기도 못 나누니

노 저어 돌아오며 공연히 애끊누나. 성간 <채련곡> (609)

그녀는 마음이 콩밭에 가 있어, 아무리 캐어도 연밥은 한 줌이 되지 않는다. 그녀는 백사장에서 쌍쌍이 노니는 원앙새를 보고 문득 질투심을 느꼈다. 그녀가 연밥 따는 일에 몰두하지 못한 것은 마음속 연인 때문이었다. (610)

그녀의 마음을 짐작하며 시를 쓴 것이겠지.

 

흰 모시 적삼에 눈썹 곱게 그리고서

마음속 정 둔 얘기 재잘재잘 얘기하네.

임이여 내 나이를 묻지를 말아주오

50년 전에는 스물셋이었다오.

73세의 노인도 여인이구나. 마지막 구에서 웃음이 났다.

보름달 같은 임

제 마음 일편단심 대나무 같고

임의 마음 둥그런 달과 같아요.

둥근 달은 찼다가도 기운다지만

대 뿌리는 얼키설키 서려 있지요. 성간 <나홍곡> (615)

 

환한 보름달로 임을 추켜세운 것은 딴 뜻이 있다. 저 달은 엊그제까지만 해도 보름달이었다. 그런데 어느새 그믐달이 되고 또 초승달이 된다. 대나무 뿌리는 그렇지 않다. 달의 차고 기움에 관계없이 땅 속 깊은 곳까지 얼키설키 서려 변할 줄을 모른다. (615)

 

진 꽃잎 볼 적마다

밤빛은 아득하여 오경에 가까운데

뜰 가득 가을 달이 참으로 또렷하다.

이불 쓰고 억지로 임 그려 잠 청해도

임의 곁에 이르면 절로 놀라 깨었네. 삼의당 김씨 <깊은 밤의 노래> (618)

 

만날 길 없어 밤마다 꿈길로 찾아 나선다. 이것이 사랑이다. 어렵사리 임을 만나 놀랍고 두근거려 꿈을 깬다. 이것은 그리움이다. (619)

 

내가 죽고 그대가 살았더라면

정시 중에 가장 뭉클한 것은 아내를 먼저 떠나보낸 남정네들의 노래다. 고생만 하다 떠난 아내여서 가슴에 저미는 아픔이 유난한다. (622)

 

월하노인 통하여 저승에 하소연해

내세에는 우리 부부 처지 바꿔달라 하리.

나는 죽고 그대만이 천리 밖에 살아남아

그대에게 이 마음의 슬픔 알게 하리라. 김정희 <유배지에서 아내의 죽음을 애도하며> (622)

 

월하노인은 중매의 신이다. 전생에 그가 두 사람의 인연을 맺어주어 현생에 부부가 되었다. 이제 백년해로의 언약을 저버리고 떠난 그녀가 야속하다. 월하노인에게 요청해서 내세에는 부부를 바꾸어 태어나게 해달라고 하소연하겠다고 했다. 그래야 지금의 이 기막힌 심정을 그대가 알겠기에 하는 말이다. (623)

한시에서 사랑의 노래는 기쁨의 구가는 적고 가라앉은 슬픔이 많다. 정서란 애초에 모든 것이 충족된 속에서 터져 나오는 법이 없다. 소중한 무엇밖에 놓여 있다는 생각, 안겨야 할 어디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는 마음에서 정서는 비로소 움터 나온다. (625)

 

스물네 번째 이야기 ; 한시와 현대시, 같고도 다르게 상동구이론

동서양의 수법 차이

그가 말한 동양의 수법이란 한시의 수법이다. 직접 말하지 않는다. 다 보여주지 않는다. 이미지를 세워 대신 말한다. 현대시도 같다. 현대시와 한시는 여러모로 참 닮았다. (629)

 

지훈과 목월의 거리

한시도 지을 줄 알았고 예스러운 표현을 즐겨 쓴 조지훈의 시보다 박목월의 시가 한시의 기맥에 더 가닿았다. 사실 청록파 세 사람 중에 한시의 정서에 가장 밀착되어 있는 시인이 박목월이다. (640)

낯선 마을의 가을비

한시와 현대시의 만남을 한두 구절의 표현상 유사성만 가지고 논의하는 것은 별의미가 없다. ... 우리가 말하는 의미 있는 모방은 심동모이의 모방이다. 껍데기만 같으면 못 쓴다. 이것을 다시 한마디로 표현한 말이 상동구이다. 같음을 숭상하되 다름을 추구한다. 같지만 다르고, 다르기에 같다는 말이다. 과거와 현재는 이렇게 만난다. 한시와 현대시도 그렇다. (649)

 

에필로그 ; 그때의 지금인 옛날 통변론

지팡이 자국마다 고이는 봄비

지금과 옛날의 사이에는 무엇이 있나. 시간의 강물도 여기서는 의미가 없다. 깊은 밤 연구실에 앉아 백광훈의 시를 번역하다가, 권필의 시를 소리 내어 읽다가 몇백 년 전 그들과 어제처럼 앉아서 이야기를 나눈다. 그가 울면 나도 울고, 그가 웃으니 나도 좋다. (654)

형식은 변한다. 생각도 변한다. 그러나 변치 않는 것이 있다. 이 강산, 이 흙 밟고 살아온 사람들의 가슴속에 스민 정서는 세월로도 씻을 수 없는 원형질로 남는다. (655)

같은 민족으로 느끼는 동질감, 더 나아가 인간이기에 공감하는 정서들이 있기 마련이다.

 

거미가 줄을 치듯

오늘날의 독서는 어떤가. 천박한 식견으로 이미 용도 폐기된 낡은 지식을 금과옥조인 양 떠받든다. 저 혼자 보기 아깝다고 다른 사람에게도 강요한다. ... 세계와 가슴으로 만나려거든 눈을 크게 뜨고 마음을 활짝 열 일이지, 왜 좀먹고 쥐 오줌에 지린 옛 책에 코를 박는가? (658)

 

그때의 지금인 옛날

문학에는 정해진 규범과 형식이 있다. 새것을 추구해도 이것마저 무시할 수는 없다. 새것이 힘을 얻으려면 옛것을 변화시키는 통변의 정신이 있어야 한다. (659)

창힐의 정신으로 안연의 마음을 담는다면 옛날과 지금의 경계는 더는 아무 의미가 없을 것이다. ‘그때지금이었던 왕희지의 글씨가 후대 서가의 기준이 되듯, ‘오늘’ ‘여기서 부르는 내 노래는 뒷날 시가의 보석이 된다. (662)

 

사기의 불사기사

옛것을 본받아라. 그러나 그 정신과 원리를 본받아야지, 형식을 본받아서는 안 된다. 이 경우 원리란 무엇인가? 부뚜막의 숫자를 조작하여 적을 현혹시킨다는 것이다. 형식이란 무엇인가? 부뚜막 숫자를 늘리거나 줄이는 것이다. 손빈은 부뚜막 숫자를 줄여서 이겼고, 우승경은 반대로 늘여서 이겼다. 손빈은 적진을 향해 들어가고 있었고, 우승경은 적진에서 후퇴하는 중이었다. 방법은 반대로 했지만 이긴 것은 같다. (665)

 

도로 눈을 감아라

한유가 말한 정신을 배울 뿐 표현은 본받지 않는다는 원리를 환기한다면 우리가 한시를 통해 퍼 올릴 수 있는 샘물은 무궁무진하다. 기갈에 바짝 타는 목을 축이고 더위에 찌든 몸에 상쾌한 등목을 해줄 수 있다. 가야 할 미지의 길은 끝없이 펼쳐져 있다. 짧은 두레박줄을 길게 늘리고, 먼 길에도 부르트지 않도록 들메끈을 고쳐매야 할 것이다. (668)

한시 연구에서 논문을 쓰자는 것인지 위인전을 쓰고 있는지 분간 안 되는 연구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669)

저자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알 것 같다.

미의식의 부재는 문학성의 검증을 원천적으로 봉쇄한다. (669)

우리는 눈뜬장님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다가온 서구의 빛깔과 형상에 망상을 일으켜, 어느 골목이 바른 골목인지, 어느 대문이 제 집인지도 모르고 길가에서 망연자실 울고 있는 눈뜬장님이었다. (670)

학계에 만연하고 있는 서구를 쫓아가기만 하는 모습을 보고 저자가 든 생각이다. 나도 같은 생각이다. 이제 그만 쫓아가고 멈춰서 어느 길로 가고 있는 지 봐야한다.

문학은 발전해왔는가. 아니다. 다만 변화해왔을 뿐이다. 다시 눈을 감아라. 먼저 네가 들어가야 할 대문부터 찾아라. (671)

 

내가 저자라면

 

1. 목차에 대하여

연재 글이지만 연재 글처럼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며 흐름을 유지한다. 제목을 잘 배치해서 그런 것 같다.

 

2. 보완이 필요한 점

책 내용은 좋으나 너무 두껍다. 분량을 줄여서 출판해도 좋겠다. 좋은 한시가 많아 소개하고픈 마음에 그랬을 듯하나 끝까지 다 읽기 힘들 것이다.

 

열한 번째 이야기 ; 시인과 궁핍 시궁이후공론은 너무 내용이 길다. 비슷비슷한 겹치는 내용이다. 좀 줄였어도 좋았을 것이다.

열네 번째 이야기 회문시의 내용은 일반 독자가 보기엔 너무 전문적이고 자세해서 이런 것까지 알아야 하나 싶다. 대중서라기보다 논문을 보는 듯하다.

 

한자를 모르는 사람을 위해 독음을 달아 주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한자세대인 나도 읽게 되지 않고 모르는 한자도 많다.

 

3. 이 책의 장점

한시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를 할 수 있는 책이며 무엇보다 설명이 뛰어나 한시를 다시 보게 된다. 게다가 그림들도 적절히 잘 배치해 이해를 돕고 있다.

한시의 상징뿐만 아니라 그 상징이 유래한 원래 한시까지 알려준다.

 

4. 내가 저자라면 이렇게

<한시로 보는 여심>, 중국과 조선의 시를 소개하고 설명했다. 내가 저자라면 조선 여인의 시를 모아 엮었을 것이다. 작자미상도 많았을 것이고 이름난 시인도 있을 테지만 공통점을 살펴보는 것도 좋겠다.

 

<그림으로 보는 한시>, <그림으로 보는 상징>, 그리스로마신화를 보면 공작새는 헤라의 상징이며, 번개는 제우스의 상징이다. 이처럼 많은 상징과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런데 한시와 그림에도 이런 상징들이 담겨있다. 내가 저자라면 그림을 주로 하고 상징을 보여주는 한시를 한 편씩 소개하는 책을 만들어보고 싶다.

 

<한시로 보는 역사>, 시사는 역사의 현장을 생생하게 알 수 있는 시다. 우리 역사를 알 수 있는 시들을 시대순으로 엮어서 역사와 연결하는 것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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