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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8월 21일 02시 41분 등록

한시미학산책

 

정민지음 / 휴머니스트

 

마음을 무찔러 온 글귀

 

열세 번째 이야기 씨가 되는 말

 

P335 – 특히 앞서 무심히 한 말이 뒷날의 예언이 되는 경우를 따로 시참 詩䜟이라고 한다. 언어의 주술적 힘을 믿어 말을 함부로 하지 말 것을 경계한 것이다.

평소의 생각은 말을 뱉게 만들고 밖으로 내 뱉은 말은 씨가 되어 행동으로 옮겨지니 말한대로 결국 돌아오는 것이다.

 

P336 – “한마디 변명도 못하고 잊혀져야 하는 건가요라고 노래해 실제 그렇게 되고 말았던 일은 같은 것은 요참 謠讖이다.

이용의 잊혀진 계절은 정말로 많이 회자되곤 한다. 여기서 다시 보니 흥미롭다.

 

P340 – 송시열이 돌아간 후 정태화는 아우를 꿇어 앉혔다. “나는 자네가 내 뒤를 이어 영의정이 되어줄 줄 알았네. 그런데 오늘 하는 언동을 보니 영의정 그릇은 아닐세 그려..” 형은 혀를 차며 아우를 준절히 나무랐다. 뒤에 정지화의 벼슬은 우의정에서 그쳤다. 야담으로 전하는 이야기다.

 

P345 – 마른입 입김 불고 비 오듯이 땀 흘리며

열 걸음에 엳아홉 번 쉬면서 오르누나

뒷사람이 앞서감을 괴이하게 생각 말라

느릿 가도 마침내는 산마루에 이를지니.

과연 느긋한 배포가 앞서 본 시보다 한 격이 높다.

 

P350 – 바른말을 했다 하여 임금이 매질로 한 시인의 목숨을 앗아갔던 이 일은 포학한 권력에 대한 증오를 불러 뒤에 인조반정의 한 빌미를 주었다.

 

P353 – 곧은 남는 금세 도끼에 찍혀 재목이 된다. 그 가지를 일부러 구부림은 베임의 화를 면키 위해서였다. 그래도 곧은 성품은 감추지 못해 끝내 지팡이감이 되어 도끼질을 당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우리 인생 사는데 에도 깊이 새길 말인 것 같다. 제 잘난 맛에 높이 뻗기만 하면 곧 잘려나간다.

 

P355– 말에는 정령이 깃들어 있다. 입에서 나온다고 다 말이 아니다. 생각 없이 되는 대로 쓴 한편의 시가 어느 날 재앙이 되어 돌아온다. 말 한 마디, 시 한구절을 삼가지 않을 수 없다. 어이 붓을 함부로 놀리랴!

말은 많은 생각의 응축된 형태이다. 말로 표현했다는 것은 많은 생각들 중에서 일부를 드러낸 것이다. 그러니 말은 곧 그 사람의 사상이요 행동으로 옮겨진다. 그러니 말 한마디 한마디 신중해야 하는 것이다. 이는 곧 삶에 있어 신중하게 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열네 번째 이야기 놀이하는 인간

 

P368 – 한시 가운데 회문시라는 것이 있다. 내리 읽으나 치읽으나 희미가 통하는 형식의 시체를 말한다. 그러면서도 평측이나 압운이 흐트러져서는 안 되므로 그 제한이 몹시 까다롭다. 가장 일반적인 회문시는 바로 읽어도 되고 거꾸로 읽어도 되는 작품을 말한다.

한시에도 이런 유희가 있는 줄 이번에 처음 알았다.

 

P369 – 이번엔 꺼꾸로 읽어보자, 즉 앞 시의 첫 자가 끝 자가 되고, 끝 자가 첫 자가 되도록 뒤집어 읽으면 다음과 같다.  그녀는 근심 속에 인상을 찡그린다. 긴 날을 함께 보낸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넘실대는 강물은 그녀의 마음인 듯하고, 흘러가는 구름을 보면 신의 없는 임의 약속이 떠오른다. 그녀는 눈물로 새벽 외로운 베개를 적신다. 창밖에선 분분히 꽃잎이 지고, 꾀꼬리도 가는 봄이 아쉬워 울음을 떠뜨린다. 운자를 앞뒤로 맞춰야 하고, 의미도 거꾸로 읽을 때를 대비해야 하니 제약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런데도 시상이 전개가 자연스럽고, 앞뒤로 읽어 어느 것 하나 부자연스러운 구석이 없다.

시를 쓰면서 이런 것까지 고려하다니 참으로 신기하다.

 

P369 – 회문시 중에는 글자를 하나씩 밀려서 읽는 것도 있다. 다음은 찻주전자에 흔히 써넣은 <다호시 茶壺詩>이다. ‘가이청심야 可以淸心也라는 다섯 글자가 써 있는데, 이를 한 글자씩 밀면서 읽으면 이렇게 된다.

마음을 맑게 할 수가 있고

맑은 마음으로 마셔도 좋다.

맑은 마음으로도 괜찮으니

마음도 맑아질 수가 있고

또한 마음을 맑게 해준다.

둥근 찻주전자에 돌려가며 쓴 글이라 사실 어느 글자부터 읽어야 할지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아무 글자부터 읽더라도 뜻이 통하도록 한 것이다. 이런 것을 자자회문시 字字廻文詩라고 한다.

한시만의 매력이라고 해야하나, 옛 성현들의 언어유희가 놀라울 따름이다.

 

P371 – 작금이라 한 것은 남편을 멀리 떠나보낸 아낙이 비단에 한 글자씩 수를 놓아 편지 대신에 부치곤 했던 전통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P377 – 각 구절의 끝 글자와 다음 구절의 첫 글자를 보면 절반씩 갈라 꼬리따기 식으로 접속된다. 시의 내용은 군령기의 효용과 의미를 기렸다. 그림 자체를 설명한 셈이다. 단순한 회문에서 다시 하나의 파자 퍼즐을 보텐 난이도가 높은 형태다.

신기할 따름이다. 이런 건 도대체 어떻게 생각해 내나.

 

P381 – 더욱이 위 시는 각 구의 처음과 끝이 두 글자씩 꼬리따기 식으로 연결되어 읽는 묘미를 더한다. 이런저런 방법으로 읽어 단 스무 글자로 만들어낼 수 있는 시의 조합이 놀랍게도 각 체를 망라하여 무려 1,000수가 넘는다고 한다. 한마디로 어안이 벙벙하다.

 

P385 – 별 희한한 짓도 다 했다. 그래도 재미있지 않은가? 근엄하기만 해서야 무슨 맛이 있겠는가? 우스개에 불과해도 운치가 있다. 이상 간략하게 층시와 회문시, 신지체 등으로 불리는 잡체시들을 몇 수 살펴보았다. 이 모두 한자가 아니고서는 상상초차 할 수 없는 어려운 창작들이다. 물론 장난기가 다분히 서려 있지만, 적어도 내용면에서는 진중함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는 마치 겉으로 그럴듯한 그림을 그려놓고 그 속에 물건들을 숨겨둔 숨은 그림 찾기와 유사하다. 언어로 유희하는 퍼즐 놀이인 것이다. 이 밖에도 절로 무릎을 치게 하는 절묘한 잡체시가 수없이 많다.

 

열다섯 번째 이야기 실험정신과 퍼즐 풀기

 

P390 – 숫자가 1에서 10에 그치지 않고, 백천만억조까지 확대되었다. 당시 친일단체 일진회의 매국 형태를 신랄하게 풍자했다. 숫자가 하나씩 늘어나면서 시상의 전개도 고조된다. 창작상 장난기를 수반해도 문면은 서슬 푸르다.

 

P403 – 무슨 말일까? ‘천리초 千里草를 한데 묶으면 동童이 되고 십일복 十日卜탁卓자가 된다. ‘청청 靑靑은 푸르게 우거져 왕성한 모양이고, ‘부득생 不得生은 죽는다는 뜻이다. 당시 전횡을 일삼던 간신 동탁이 지금은 저렇게 날뛰지만 머지않아 망할 것이라는 예언성 참요 讖謠였다.

한자만이 가능한 일인 것 같다. 글자를 나눠서 의미를 나누고 다시 합해서 의미를 만들고, 한시는 정말 고급스러운 선비들의 고고한 이야기만을 하는 것으로 알았다.

 

P404 – 대궐 오동잎에 꿀물로 주초위왕 走肖爲王이라고 쓴 뒤 벌레가 글자대로 갉아먹자 왕에게 바쳐 조씨 趙氏가 왕을 꿈꾼다고 모함했던 일도 같은 착상에서 나왔다.

 

P405 – 감龕에서 용龍을 떼니 합 合이 남고,  시 時에서 일 日을 취하자 사 寺가 남는다. 나그네는 의도적으로 합사구졸네 글자를 남겨 고승은 가고 없고 남은 것은 온 절간에 구질구질한 졸장부뿐이라고 기롱했다. 파자를 활용한 비교적 단순한 탁자시가 이에 이르러 다시 한 단계 더 복잡하게 변했다.

이 시를 만들다니 천재다. 아니 해석한 사람도 천재다.

 

P409 – 오늘날 잡체시가 던지는 의미는 무엇일까? 언어의 부단한 실험정신, 질곡을 만들어 놓고 그 질곡에서 벗어나기, 언어의 절묘한 직조가 보여주는 즐거움 외에도 잡체시는 오늘의 시단에 의미 있는 시사를 준다. 젊은 시인들이 실험하고 있는 각종의 형태시들은 기실 우리가 까맣게 잊고 있던 전통의 재현일 뿐이다. 세상은 돌고 돈다. 이 모든 현상들 앞에서 우리는 수없는 상호 텍스트화를 되풀이 하고 있을 뿐이다.

 

열여섯 번째 이야기 한시의 쌍관의 雙關義

 

P414 – 쉽게 말해 장인어른, 신발 한 켤레만!” 이 위 편지의 진짜 사연이다. 요 맹랑한 편지를 앞에 두고 고개를 갸웃거리던 장인은 이윽고 무릎을 딱 치고 가죽신 두어 켤레를 산사로 보냈다. <어우야담>에 나오는 이야기다. 퀴즈의 수준이 꽤 높다.

 

발칙한 사위이다. 그리고 이를 알아챈 장인 또한 대단하다. 아마도 열심히 공부하는 사위를 대단하게 생각했을 듯싶다.

 

P418 – 백성이 태평성대를 즐거워한다는 낙민루에서 정작 백성은 낙루 落淚를 하고 있다. 교화를 선양해야 마땅할 선화당에는 교화는 커녕 재앙밖에 닥칠 것이 없다. 감사 조기영의 토색질에 함경도민이 함경도 咸驚逃즉 모두 놀라 달아날 지경에 이른 것이다. 각각의 단어에 반어적 의미를 연결시킴으로써 풍자의 칼날을 세웠다.

 

P418 – 승소가 적게 오니 스님 웃음 적은데

승소 僧笑는 떡의 별칭이었다 차려온 쟁반에 떡 僧笑이 조금밖에 없어 스님의 웃음 僧笑이 가셨다고 말장난을 했다. 이색이 대구를 지으려 하였으나 도저히 짝을 맞출 수가 없었다. 진땀을 빼다가 사과했다. “ 뒷날 다시 와서 알려드리지오.” 뒤에 천 리밖을 노니는데, 그곳 주인이 호리병에 무엇인가를 담아가지고 나왔다. 무엇인지 물어보니 객담 客談이라고 했다. 객담은 술의 별명이었다. 이색이 환호작약하여 전날의 구절에 대를 맞추었다.

객담이 많이 오니 객의 말도 많아지네.

 

P419 – 한 구절의 시구 때문에 천릿길을 오간 미담도 미담이려니와 시구 하나로도 상대를 기선제압하려는 미묘한 경쟁이 재미있다. 쌍관의 묘미를 활용한 멋들어진 응수도 절묘하다. <어우야담>에 실려 있다.

 

P424 – 이렇듯 결玦결 決을 나타내고, ‘환 環으로 환 還을 전달하는 것은 한자의 동음사를 활용하여 쌍관의를 나타낸 예이다. 예전 한시에서 이러한 쌍관의의 활용은 시적 함축을 높이는 기법으로 애용되었다.

 

P427 – 한시에서 쌍관의란 이렇듯 하나의 글자가 동음이나 다의에 의해 한 가지 이상의 뜻을 함축하게 되는 경우를 이른다. 이러한 쌍관의의 활용은 표의문자인 한자의 특성상 한시에서 매우 빈번하게 활용된다.

 

P428 – 3구의 연자 莚子는 연밥, 곧 연꽃의 열매를 뜻한다. 그러나 이 작품 속에서 연자련자그대를 사랑한다는 속뜻을 담아 사랑의 고백이 되었다. 그녀가 물 건너로 던진 것은 그저 심상한 연밥이 아니라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사랑의 고백이었던 것이다.

 

P430 – 무궁화는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이면 져서 일일영 一日榮이라고도 부른다. 중국 사람들은 우리와 달리 덧없는 소인배의 작태에 견주곤 한다.

이런걸보면 중국은 가깝고도 먼 나라인 듯 하다. 하나의 문화권이라고 생각이 들면서도 이런 사소한 것에서 서로간의 해석과 이해가 다르다.

 

P430 – 무궁화를 소인배라 비웃는 것도, 두 조정을 섬기지 않는 충신으로 기리는 것도 보기에 달렸다. 접시꽃의 일편단심을 충신이라 높일 것도 못 되고, 줏대없는 아첨배라 욕해도 상관없다. 인간 세상의 시비란 원래 그런 것이니까, 2구의 양조두 아침일면서 동시에 두 조정의 의미가 된다. 열녀는 두 지아비를 섬기지 않고,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고 했다. ‘근화일일영 槿花一日榮의 상식을 뒤엎어 불사이군 不事二君의 의미를 읽었다. 접시꽃의 일편단심을 풍도의 만수산 드렁칡 같은 처신에 비겼다. 시인의 독법은 평생을 따라 다닌 비방과 시비를 떠올리면 다른 설명이 필요 없다. 쌍관의는 이처럼 시의 함축미를 효과적으로 높여주는 매우 유용한 수단이다.

 

P433 – 한시에는 이렇듯 새 울음소리를 음차하여 훈독함으로써 이중 의미를 담는 금언체시라는 것이 일찍부터 발달했다. 위의 노고지리는 다른 시에는 노고질 老姑疾로 표기하여 늙어 병든 시어머니의 병환을 안타까워하는 며느리의 효성을 칭찬하는 내용으로 바뀌기도 한다. 한두 가지 예를 더 살펴보자.

 

P434 – 말장난의 재치가 돋보인다. 모두 쌍관의 묘미를 활용하고 있는 예들이다. 이러한 금언체 한시의 문학 전통은 개화기에 와서도 활발하게 이어졌다. 1908 <대한매일신보>에 실려 있는 <의장청조>가운데 한 수를 보자

망한 나라의 뻐국새는 이제 더는 씨 부려라라고 울지 않고 복국 復國’, 나라 찾자며 움다. 1920 6 <개벽> 창간호에 실렸다가 압수 삭제된 시 <금쌀악> <옥가루>에서도 새 울음소리의 음차를 통한 시대 풍자를 읽을 수 있다.

 

P435 – 둥지를 짓지 않은 까마귀는 북풍한설을 만나고서야 집 귀한 줄 알고 가옥가옥울고, 제가 지은 둥지를 남에게 빼앗긴 까치는 그것이 부끄러워 가치가치하며 우짖는다. 귀뚜라미는 실실실실울며 국권의 상실을 슬퍼한다. 나라 잃은 슬픔과 치욕에 대한 암유이다. 남산의 부엉이도 다시 일어서자는 다짐으로 부흥부흥울고, 속독새는 한밤중에도 자지 않고 빨리빨리 잃은 국권을 회복하자고 속속속속운다. 경칩을 만나 몸을 푼 개구리마저 그 사업에 참여하겠다고 개개개개울어대니, 진정 겨례의 독립은 요원한 이야기가 아니었던 셈이다.

 

P440 – ‘표 豹빠오bao’로 읽히니, 알린다는 뜻의 보 報와 발음이 같다. 까치는 희작이라 하여 기쁜 소식을 상징한다. 까치와 표범을 합쳐야 기쁜 소식을 알린다는 문장을 이룬다.  

 

P440 – 갈대숲에 기러기가 내려앉는 그림은 노안도 蘆雁圖. 갈대를 나타내는 노 蘆노 老와 쌍관되고, 기러기 안 雁안 安과 쌍관된다. 늙어 편안하시라는 노안도

이렇게 보면 시뿐 아니라 그림에서도 쌍관이 독화의 핵심 원리로 작동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수법은 연원이 매우 오래된 것이다. 그리고 다분히 관습적이다. 관심이 사물의 본래 속성과 동 떨어진 해석을 낳는 경우도 있다.

 

열일곱 번째 이야기 해체의 시학

 

P457 – 점점 알 수 없는 오리무중이다. 다시 보니 시옷은 인 人’, 마음은 구 口’, 리을은 기 己자다. 디귿 위에 점을 찍으면 망할 망 亡자가 된다. 이렇게 풀어놓고 다시 시를 읽으니 이게 된다.

한시가 한글과 만나 새로운 형태를 만들어 낸다.

 

P465 – 대체로 김삿갓의 장난 시를 읽을 때마다 필자가 느끼는 감정은 서글품과 씁쓸함이다. 경국제세의 포부를 품고 배우고 익힌 학문과 지식을 고작 이깟 희학질에 썼더란 말인가? 그인들 시를 짓고 싶었겠는가. 그에게 이런 장난질에 몰두하게끔 강요한 현실이 역으로 희대의 민중시인을 낳았다는 사실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그의 시에 이나 벼룩, 욕설과 섹스 등 비시적 대상의 시화가 지배적 특징으로 나타나는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비록 조부의 훼절에 말미암은 개인적 연유에서 비롯되었다고는 하나, 김삿갓의 시정신은 당대 조선 사회가 처했던 제반 역사 환경의 변모에 의해 안받침 되어 사회적 성격을 부여받는다. 시는 그 사회를 비추는 거울인 까닭이다.

 

P467 – 김삿갓이 장난질의 와중에 그 많은 과체시를 남겼다면 그 속에 담긴 뜻은 무엇이었을까? 나도 마음만 먹으면 체제가 요구하는 교과서적인 시 쓰기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항의가 아니을까? 어쨌든 그의 웃음은 슬프다. 그 슬픈 웃음의 뒤안길은 외면한 채, 자꾸 가십적인 살을 붙여 그를 붕이 김선달류의 비천한 재담가로 만드는 것은 사람들의 악취미다.

사람들이란 남의 말 하기를 그리고 남을 우습고 가십거리로 만들기를 즐긴다. 이상한 일이다. 그것이 미담을 이야기하는 것보다 휠씬 재미있으니

 

P469 – 육담풍월의 파격시도 어느 순간 갑자기 나온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의 집적 속에서 차츰 차츰 이루어졌다.

모든 것은 한 순간에 되는 것은 없다 모두 인과관계가 있는 것 같다.

 

P472 – 기존 한시의 굳건한 문법은 개화기의 발랄한 실험정신 아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해체의 양식들을 선보였다. 다만 그것이 치열한 시정신에 의해 안받침되지 못한 결과 새로운 형식들은 일과성의 장난기에 그치고 말았다.

 

열여덟 번째 이야기 바라봄의 시학

 

P476 – 귀인의 정원에서 정원사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피어나는 꽃이 있고 깊은 산속에서 저만치 혼자서 피었다가 지는 꽃도 있다. 능력 있는 인재와 그를 알아주지 않는 공평치 않은 세상길에 대한 탄식과 자조가 행간에 깔려 있다.

 

P477 – 거위에게는 거위의 생리가 있다. 이를 벗어나니 병통이 된다. 그러나 보라. 자연은 자신의 리듬을 잘 알아 억지로 거스르는 법이 없다. 열흘 넘게 굶은 거위는 탐욕을 버리는 대신 자신을 잘 지켰다.

동물이 인간보다 낫다. 병통이 되는 것을 알면서도 꾸역꾸역 굶지 않고 먹어대는 나 자신을 보니 거위보다 못하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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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491 – 유아지경은 아 我로써 사물을 보는 까닭에 사물과 내가 모두 나의 색채로 물들고, 무아지경은 물 物로써 사물을 보므로 어느 것이 나이고 어느 것이 사물인지 알 수가 없다.

 

P492 – 무아지경은 시인의 주관 정서가 전혀 드러나지 않은 채 물아가 하나가 되어 피아의 구별이 무너진 상태다. 왕국유는 이어지는 글에서 무아지경은 호결의 인사만이 도달할 수 있다하여 유아지경보다 무아지경을 높이려는 뜻을 분명히 밝혔다.

이 책과 내가 하나됨을 느끼니 이 또한 무아지경이 아니겠는가.

 

P493 – 서로 팽팽한 표면장력을 유지하다가 어느 순간 그 균형이 깨지면서 한꺼번에 빨려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스펀지에 물이 스미듯 서서히 눈치 채지 못하는 사이에 이루어진다. 시인은 이제 없다.

좋은 표현이다. 언젠가 나도 다른 곳에 써먹어 봐야겠다란 생각이 든다.

 

P494 – 비가 와서 꽃을 피우면, 바람은 와서 이를 떨군다. 어제 만발한 살구꽃은 진흙탕에 떨이지고, 그 자리에 복사꽃이 환한 웃음을 머금었다. 슬퍼할 것도 안타까워 할 일도 아닌 셈이다. 만발한 복사꽃을 바라보는 경이와 비바람에 떨어진 살구꽃의 빈 가지를 바라보는 허탈을 함께 포착했다. 봄은 그렇게 와서 또 그렇게 간다. 우리네 인생도 마찬가지다.

주석 자체가 시다. 봄은 그렇게 왔다가 가고 우리네 인생도 그렇게 왔다가 간다.

 

P499 – 깨달음이 없이는 우리 모두는 눈뜬 장님일 뿐이다. 눈을 뜨고 있다고 다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보려 한다고 보이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깨달음은 결코 거저 얻어지지 않는다.

무엇이든 그냥 얻어지는 것은 없다. 인생의 진리인 것 같다. 깨달음 또한 그만한 노력과 희생이 필요하다.

 

P499 – 사물을 바라보는 눈은 아무렇게나 열리지 않는다. 손끝이 갈라지는 연습 없이, 그저 기타들고 동해 바닷가에 서 있다고 훌륭한 연주자가 되는 법은 어디에도 없다. 하지만 깨닫는 순간 모든 것은 순식간에 변해버린다. 차원이 달라진다. 속인과 달사의 경계는 종이 한 장 차이이지만 실제로는 하늘과 땅 차이다.

 

P499 – 어떻게 볼 것인가? 무엇을 읽을 것인가? 누구나 보고 있지만 못 보는 사실, 늘 마주치면서도 그저 지나치는 일상 사물에 담긴 의미를 읽을 수 있어야 한다. 익숙한 사물과 낯설게 만나 그 낯섦으로 그 사물을 새롭게 만나는 것, 이것이 관물론이 시학과 만나는 접점이다.

이 책의 핵심 정수란 생각이 든다. 관물론 뿐이겠는가. 우리가 시를 쓰고 글을 쓸 때 가져야 할 자세와 능력이다. 누구나 볼 수 있지만 못 보는 것을 봐야 한다. 그런 눈은 그냥 오지 않는다. 그 사물에 대한 사랑이 있어야 하고 늘 지켜봐야 한다.

 

P499 – 시인은 격물 또는 관물의 정신에서 한 발짝도 물러서서는 안된다. 그래야만 주변 사물이 끊임없이 발신하는 의미를 깨어 만날 수 있다. 히드라의 예민한 촉수와 같이 안테나를 세워 세계와 교신할 수 있어야 한다. 탄성계수를 유지하지 못하는 관물은 관물이 아니다. 그것은 견물일 뿐이다. 여기에 무슨 생의로움이 있겠는가 눈앞 사물과의 설레는 만남, 세계와 줄다리기하는 팽팽한 긴장이 없이 좋은 시는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다. 시인은 반란자다. 그의 눈이 포착하는 모든 것은 언제나 새롭다.

주변에 사물이 발산하는 의미를 알아챌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시인은 아니 우리는 깨어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이 이야기하는 것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좋은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다.

 

열아홉 번째 이야기 깨달음의 바다

 

P510 – 항상 흐르는상태로 마음을 유지하라. 흘러가는 상태에 자신의 정신을 얹으라.

 

P514 – 충지스님의 <임종게>이다. 어떤 삶의 끝에서 이렇듯 투명한 정신의 자락이 펼쳐지는가. 스님은 이 게송을 남기고 옷을 갈아입은 뒤 그대로 입적하였다. 생사의 바다를 훌쩍 건너 저승길을 망치 소풍 가듯 떠났다.

부러운 임종이다. 그러나 이 역시 쉽게 넘을 수 없는 수련의 결과일 것이다.

 

P517 – 내게 깨끗한 것이 남에겐 더럽고, 내가 더러워 못 견딜 것도 남에겐 아무렇지 않을 수 있다. 이렇게 생각을 한번 바꾸면 모든 것이 시원스럽게 된다. 깔깔깔 웃게 된다.

 

P519 – 물 속에 녹은 소금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마셔보면 금방 알 수 있다. 눈에는 안 보이지만 분명히 있다. 꼭 꼬집어 말하지는 않았어도 아주 또렷하다. 시와 선은 이렇게도 만난다.

 

P522 – “연못에 봄풀이 돋아나오고, 정원 버들 우는 새 소리 변했네.”란 천고의 명구를 남겼다. 봄이 되니 봄풀이 돋아나고, 버들개지에 물 오르자 꾀꼬리의 목청이 변한다. 마치 밥 먹으니 배 부르다는 말과 다를 게 없는 이 무덤덤한 구절을 두고, 역대로 칭찬이 마르지 않았다.

 

P522 – ‘자가료득도출과구그리고 자재원성에 있다. 즉 스스로 깨달아야 하고, 전범에 붙들리지 말며, 툭 터져 자재로워야 한다는 것이다. 선도 그렇고 시도 그렇다.

 

P525 – 거문고의 소리는 어디서 나는가. 거문과와 손가락의 사이에서다. 거문고에 손가락이 닿아 소리로 울리는 이 미묘한 이치를 아는가?

 

P528 – 한편으로 시와 선이 하나로 만나 선시가 된다. 절묘한 결합인 셈이다. 선시의 언어는 직관의 언어다. 의미를 해체하고, 사물로 말한다. 풍경으로 보여주고 설명하려 들지 않는다. 직관의 언어는 무책임하다. 친절하기는 커녕 소통 자체를 거부한다.

 

스무번 째 이야기 산과 물의 깊은 뜻

 

P533 – 아이들이 숨바꼭질 놀이를 할 때 술래가 저 숨은 곳을 못 보고 엉뚱한 데를 헤메면 숨은 아이는 짐짓 뻐꾹뻐꾹하며 자신이 숨은 곳을 알려준다. 그는 이 모습이 꼭 가짜 은사들이 방편상 강호에 숨어서는 자기가 여기 있으니 좀 알아달라며 현실을 기웃대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꼬집었다.

 

P534 – “불구문달과에 응시하려고 갑니다.” <인화록>에 실려 있다. 공명을 향한 인간의 집착이 안쓰럽다.

 

P537 – 이렇듯 자연은 우리에게 떳떳한 삶의 모습을 일깨워준다. 일상에 찌들어 생기를 잃고 풀이 죽어 있을 때, 자연은 인간에게 소생의 원기를 불어넣어 준다, 양洋의 동서를 막론하고, 때의 고금을 떠나서 자연이 예술의 변함없는 경배의 대상이 되어온 것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그러나 자연이 아무나 자신의 품에 끌어 안는 것은 아니다.

자연은 우리에게 늘 일깨워주고 알려준다 우리가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못 알아들을 뿐이다. 요즘들어서 더욱 더 그런 생각이 든다.

 

P541 – 고려때 최항의 <절구>. 흔히 최충의 작품으로 잘 못 알려져 있다. 뜰의 달빛이 대낮같다. 자리를 깔자 청하지도 않은 청산이 슬그머니 들어와 앉는다. 손님이 왔으니 풍악이 없을쏘냐. 솔가지 사이로 바람이 겅중겅중 지나면서 악보로는 잡을 수 없는 가락을 들려준다. 맑고 상쾌한 경지다. 이 거나하고 해맑은 운치를 어찌 말로 다 하랴.

 

P553 – “서울은 가보았소?”

한번 가보았지요. 티끌만 자옥이 날려 도저히 못 살 곳 같습니다.”

먼지만 날려 도저히 사람 살 곳이 못 됩디다.” 하고 스님은 고개를 내젓는다. 환속을 말하는 짓궂은 농담에는 칠정이 다 말라버렸다고 대답한다.

서울은 예나 지금이나 왜 그럴까? 그 당시 사람들 모두 살 곳이 못된다고 한다. 그러나 인간들은 모여든다. 욕망과 욕심을 가지고 모여든다.

 

스물한 번째 이야기 실낙원의 비가

 

P557 – 인간에 낙원은 있는가? 낙원은 없다. 따지고 보면 인생은 절망과 비탄의 연속일 뿐이다. 믿었던 것들로부터 배반당하고, 사랑했던 사람마저 하나 둘 떠나보낸 후 빈 들녘을 혼자 헤매는 것이 우리네 삶이다. 뒤돌아보면 뜻대로 된 일은 하나도 없다. 한나라때 악부시 <해로>는 풀 잎끝에 맺힌 이슬만도 못한 인생을 이렇게 노래한다.

풀잎 위 이슬

너무 쉽게 마르네.

내일 아침 이슬은 다시 내리겠지만

한 번 떠난 사람은 돌아올 줄 모르누나

 

P558 – 죽림의 청담 淸談이란 것도 세상 일에 초연한 방약무인傍若無人이기보다는 어지러운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는 안간힘에 가깝다 하겠다. 이때 죽림은 현실의 폭력이 미치지 않는 정치적 진공지대일 뿐이다.

 

P559 – 중국의 미학자 이택후가 위대한 고독감이라는 헌사를 바친 이런 시들에는 인생을 향한 깊은 관조와 달관이 있다. 비분강개 속에 인생의 갖은 신산을 겪으면서 오히려 이들은 인생을 더 깊이 바라보는 중후함을 얻은 듯하다.

 

P567 – <구운몽>신선 세계를 향한 꿈을 노래한 작품이다. 유선적 상상력이 빚어낸 도교적 깨달음이 그 바탕에 깔려 있다. 팔선녀의 상전은 남악형산 南嶽衡山의 위부인 魏夫人이다.

<구운몽>뿐 아니라 대부분의 고전소설 주인공은 전생이 신선이거나 선녀이다. 그들은 천상에서 죄를 지어 인간에 귀양 온다. 그때 마침 지상에서는 늦도록 자식이 없던 노부부가 백일치성을 드리게 되고, 그 정성에 감응하여 죄를 지은 신선은 그 집에 늦게 얻은 자식으로 태어난다.

 

P572 – 현세에서 득의가 주어졌더라면 이들은 결코 선계를 꿈꾸지 않았을 것이다. 반복적으로 확인되는 하계를 향한 혐오감의 표현은 반동형성에 의한 양가감정의 투영이다. 현실에 대한 집착이 강할수록 미화되고 하계의 모습은 일그러져 나타난다.

시는 현실을 잊고자 하는 마음에서도 나온다.

 

P576 – 초월의 소망을 담은 유선의 행위가 현실의 새로운 비전과 연결되지 못한다 해서 선계를 향한 꿈 자체를 배격할 필요는 없다. 실현될 수 없다 해서 더 나은 삶을 향한 열망이 배격되어야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삶의 절망이요 공포가 아닐 수 없다.

유선시는 중세적 꿈꾸기의 산물이다. 이러한 꿈꾸기는 허망한 몽상이나 환상이 아니다. ‘문학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사화는 꿈을 꿀 수가 있다. 꿈이 없을 때 사회 개조는 있을 수 없다.” 김현의 이말은 바로 유선시에서 중세적 꿈꾸기가 갖는 의미를 매우 상징적으로 드러내 보여준다. 우리의 혈관 속에 내재한 원초적 상징들을 까맣게 잊고 있던 그 기호들을 유선시는 우리에게 일깨워준다.

유선시는 사회적 열망의 결정체이자 사회적 갈등을 조금은 풀어주는 역할을 한 것은 아닐?란 생각을 해본다. 현실에서 이룰 수 없는 조금은 감정적으로 해소하는 역할을 수행해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스물두 번째 이야기 시와 역사

 

P580 – 짧은 시 속에 함축이 매우 깊다. 시인은 임진왜란으로 이 땅에서 벌어진 죽음의 참상을 남의 얘기 하듯 장면으로 포착한다. 슬픔은 간접화되고 전쟁의 체험도 배경으로 숨는다. 오히려 인생무상의 주제를 떠올리기 십상인 이 시는 그럼에도 깊은 아픔을 내재한다.

 

P582 – 권벽은 임진왜란 당시 73세의 노구를 끌고 피난길에 올랐다. 고통스런 피난의 와중에도 시고를 담은 상자만은 내려놓지 않았다. 더욱 놀라운 것은 노령의 피난길에서도 128수에 달하는 시를 일기 쓰듯 남겨 당시 피난길의 고초와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전황을 세밀하게 기록했다는 점이다. 도적 떼가 하는 중에 길을 전전하다가 막히면 되돌아 왔다.

 

P583 – 시는 시대를 비추는 거울이다. 시의 거울에는 그 시대 사람들의 바람과 애환이 그대로 떠오른다. 한 편의 시는 방대한 사료로 재구성한 어떤 역사보다 더 생생하다. 사람들은 이를 일러 시사 詩史라 한다.

시는 그 시대 사람들의 삶을 응축해서 나타내고 있다.

 

P593 – 꽃은 피었는데 적막하다. 대문도 굳게 닫혔다. 임금의 총애를 잃은 지 오래되었음을 이렇게 말했다. 여럿이 함께 난간 앞에 서 있으니 총애를 잃은 궁녀는 혼자만이 아니다. 아니, 그녀들은 여태 한 번의 총애조차 받아보지 못했는지도 모르겠다, 일렁이는 청춘은 꽃과 맞주하여 원망의 넋두리를 한없이 풀어놓고 싶었다. 그러나 앵무새 앞인지라 두려워 감히 말을 하지 못한다고 했다. 절묘하다. 글자마다 원망이 서려 있다.

 

P597 – 지방에서 고과한 서류를 차곡차곡 쌓아두고, 글자 아는 궁녀가 어상 가까이 나아가 이를 읽어 재가를 여쭈었다. 허균이 이 시를 지을 당시에는 미처 생각지 못했겠지만, 이 연작은 당시 궁궐 풍습과 여러 행사 및 제도를 이해하는 한 통로가 된다. 시가 세교에 보탬이 된다는 말은 그 내용의 감계를 두고 이르는 말이다. 때로 시는 이렇듯 한 시대를 증언하는 비망록이 되기도 한다.

 

P598 – <통감 通鑑>의 한 대목이다. 녹도서에서 망진자호야 亡秦者胡也라 예언한 것은 오랑캐가 아닌 진시황의 둘째아들 호해 胡亥를 가리킨 말이었다. 그러나 만세토록 진나라의 왕업을 잇겠다던 시황은 오랑캐를 막으려고 만리장성을 쌓았다. 궁궐안에서 재앙의 싹이 움트는 것을 모르고, 그깟 만리장성으로 오랑캐를 막으려 했던 진시황의 어리석음을 신랄하게 꼬집었다.

 

P601 – 역사는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돈다. 누가 역사의 교훈을 외면할 수 있으랴. 시인들이 지나간 역사의 거울에 현재를 비춰보는 것은 이 때문이다.

 

P601 – 사시 또는 영사시는 역사적 사실을 주제로 쓴 시다. 차고술금 借古述今, 옛일을 끌어와 지금을 말하는 것은 한시의 오랜 관습이다. 시인은 맥없이 옛일을 들추지 않는다. 그들은 과거 속에서 현재를 바라보는 우회 통로를 찾고 있다.

 

P603 – 역사란 무엇인가? 현재의 퇴적일 뿐이다. 지금 시대의 자취를 일러 후세는 옛날이라 한다. 그렇다면 굳이 지나간 옛날에 얽매일 필요가 없겠다. 지금 여기에 충실하면 그것이 곧 옛날이다. 시사는 시인의 충실한 증언이 뒷날의 역사로 자리매김된 것이다. 사시는 시인이 과거의 거울에 비춰 현재를 읽으려는 노력의 산물이다. 인간의 삶은 본질적으로 변한 것이 없다. 어제의 태양은 오늘도 그대로 뜬다. 지나간 역사가 오늘을 비추는 등불인 까닭이다.

 

스물세 번째 이야기 사랑이 어떻더냐

 

P607 – 사랑은 아름답다. 슬퍼서 아름답고, 아름다워서 슬프다. 평소 한시를 고리타분하게만 생각하던 이도 사랑을 노래한 정시 情詩를 읽고는 뜻밖이라는 표정을 짓곤 한다.

나 역시 연애 편지를 쓰면서 처음 시를 썼던 것 같다.

 

P611 – 무엇을 이루자고 나는 이 산중에 있는가. 저 봄풀을 보아라. 저들도 싱그러움을 뽐내며 저마다 향기를 풍기고 있지 않은가. 사람이 한 세상을 살아가는 일은 사람끼리 어깨를 비비며 희로애락을 함께 나누는 것이 아니었던가. 어째서 나는 이를 모두 떠나와 깊은 산 속에서 이 청춘의 시간을 태우고 있단 말인가.

청춘의 감정은 출렁이는 물결 같다. 가둘수록 더 거세진다. 이를 굳이 가라앉히려는 노력은 부질 없는 짓이다

청춘의 출렁이는 감정이 그리워진다. 그때 마음이라면 지금 시를 수백구는 쓸 수 있을 것 같다.

 

P615 – 저 달은 엊그제까지만 해도 보름달이었다. 그런데 어느새 그믐달이 되고 또 초승달이 된다. 대나무의 뿌리는 그렇지 않다. 달의 차고 기움에 관계없이 땅속 깊은 곳까지 얼키설키 서려 변할 줄을 모른다. 이랬다 저랬다하는 임의 마음을 잡아두려는 여인의 마음을 애교 있게 펼쳤다.

 

P622 – 정시 중에 가장 뭉클한 것은 아내를 먼저 떠나 보낸 남정네들의 노래다. 고생만 하다 떠난 아내여서 가슴에 저미는 아픔이 유난하다. 망자를 애도하는 시라 하여 도망시 悼亡詩라고도 한다.

 

스물네 번째 이야기 한시와 현대시, 같고도 다르게

 

P629 – 직접 말하지 않는다. 다 보여주지 않는다. 이미지를 세워 대신 말한다. 현대시도 같다. 현대시와 한시는 여러모로 참 닮았다.

 

P630 – 3연의 왜 사냐건 웃지요가 이 시의 압권이다. 이백은 <산중문답> 1,2구에서 날더러 무슨 일로 산에 사냐 묻기에, 웃고 대답 아니해도 마음 절로 한가하다고 노래했다. 이백이 한자로 14자나 들여 한 말을 그는 한글 단 7자로 표현했다. 놀라운 압축 능력이다.

 

P634 – 벌목정정이란 단어 하나가 정서의 맥놀이를 일으켜 저 <시경>에서부터 당나라 두보를 거쳐 현대의 정지용에까지 이어지는 정서의 다리를 놓았다. 놀랍지 않은가?

사람의 정서는 고금을 떠나 공통되는 것이 있다. 시대가 변한다고 사람의 마음, 느낌, 감정이 변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P639 –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리

술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외줄기외로움저녁놀그리움을 말할 뿐, ‘다정하고 한 많음도 병인 양하여처럼 직접 설명하지 않는다. ‘타는것은 시인의 마음이 아니라 저녁놀이다. 외로운 것은 나그네가 아니라 남도 삼백 리길이다.

 

P641 – 시인은 다른 한 마디 보태지 않는다. 보여줄 따름이다. 그런데도 안개 낀 달밤, 불국사의 몽환적 분위기 속에서 바람 소리 물소리가 풍경으로 되살아 난다. 마법 같다.

시인의 펜 끝은 마법과도 같다. 새로움을 창조해 낸다.

 

P645 – 황진이의 한시 <상사몽 相思夢>이다. 양주동 선생의 번역으로 더 유명하다. “꿈길 밖에 길이 없어 꿈길로 가니 / 그 임은 나를 찾아 길 떠나셨네 / 이 뒤엘랑 밤마다 어긋나는 꿈 / 같이 떠나 노중에서 만나를지고.”

 

P647 – 하늘에 걸린 반달을 천상의 존재가 쓰다 버린 빗으로 연상하여 시상을 풀었다. 상상력의 원천이 같다. 한시와 현대시는 이렇게도 만난다.

 

P649 – 우리가 말하는 의미 있는 모방은 삼동모이의 모방이다. 껍데기만 같으면 못 쓴다. 이것을 다시 한마디로 표현한 말이 상동구이 尙同求異다. 같음을 숭상하되 다름을 추구한다. 같지만 다르고, 다르기에 같다는 말이다. 과거와 현재는 이렇게 만난다. 한시와 현대시도 그렇다.

 

에필로그 그때의 지금인 옛날

 

P658 – 오늘날의 독서는 어떤가. 천박한 식견으로 이미 용도 폐기된 낡은 지식을 금과옥조인 양 떠받든다. 저 혼자 보기 아깝다고 다른 사람에게도 강요한다. 취해 죽으려면 독주를 들이켜야지. 왜 술지게미만 배 터지게 먹는가? 세계와 가슴으로 만나려거든 눈을 크게 뜨고 마음을 활짝 열 일이지. 왜 좀 먹고 쥐 오줌에 지린 옛 책에 코를 박는가?

 

P666 – 같은 배수진이었건만 한신은 이겼고 신립은 졌다. 왜 그랬을까? 배수진을 쳐서는 안 될 곳에 쳤기 때문이다. 남의 흉내나 내는 시는 결코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한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보살을 만나면 보살을 죽여라 옛길을 따르지 말라.

 

P668 – 자척으로 된 선인들의 이야기를 센티미터 자를 들이대어 재려든다. 옛사람들은 길이 관념이 없다는 푸념만 늘어놓는다. 눈금을 호환해 읽을 생각은 못한다. 연구자들은 문화의 차이나 배경에 대한 고려 없이 최신의 서구 이론을 무작정 대입하는 연구를 낸다.

 

P671 – 문학은 발전해왔는가. 아니다. 다만, 변화해왔을 뿐이다. 다시 눈을 감아라. 먼저 네가 들어가야 할 대문부터 찾아라.

 

내가 저자라면

 

1. 목차에 대해서

저자는 한시의 아름다움과 현대적 의미, 그리고 한시가 갖고 있는 의미에 대해서 일반 사람들에게 잘 이해될 수 있도록 책을 썻다. 그러나 책 앞에 한시가 갖는 구조라 운율, 각 시대별 시 작성법에 대해서 설명했더라면 뒤에 나온 시들이 더욱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이 든다.

맨 앞 목차에 한시의 역사나 한시의 구조에 대한 목차가 들어갔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

 

2. 보완이 필요한 점

목차에 대해서 밝힌바와 같이 한시에 대한 조금 더 상세한 설명과 역사적 배경, 구조, 그리고 한시의 작법에 대해서 설명을 해 놓았더라면 뒤 부분에 나온 한시들이 조금 더 가슴에 와 닿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한시의 독음에 대해서 몇 번 명시하는 데 사실 한문을 배운 나로서도 모르는 한자들이 나오는데 이 한자의 독음을 모르니 해당 문장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옥편을 찾는다면 가능하겠지만 책을 읽으면서 옥편까지 펼쳐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헛갈릴 때가 있다. 기존 철학자의 주장을 정확하게 정리하고 그에 대한 다른 철학자들의 입장, 그리고 저자의 주장과 의견을 달았으면 조금 더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을까란 생각을 했다.

 

3. 이 책의 장점

한시에 대해서 다시 보게 되었다. 아니 사실 한시는 이미 제 수명을 다한 고대 성형문자와 같은 해당 시대에나 통용되던 텍스트로만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 책을 통해서 살아있고 생생한 한시의 느낌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옛 선인들이 한시를 짓는 방법을 통해서 나 또한 조금이나마 시를 써보는데 도움이 될 수 있는 여러 팁을 얻을 수 있었다.

 

4. 내가 저자라면 이렇게

한시의 역사와 한시의 구조, 구성, 작법에 대해서 조금 더 상세히 써서 조금 더 독자들이 한시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도록 하겠다. 운율이나 5, 7언 시에 대해서 배운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이에 대해서 한번 더 서술해 줌으로써 한시를 해석하고 감상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길잡이를 조금이라도 제시해 주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리고 한시마다 독음을 적어 주는 것이 좋을 것 같다. 한문을 공부한 세대임에도 모르는 한자들이 많았다. 그나마 독음이라도 적어 준다면 따로 찾아보는데 도움도 되고 독음에 대해서 설명하는 장에서도 큰 어려움없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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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22 21:20:10 *.18.218.234

ㅋ 연애편지, 역시 사랑꾼. 어떤 시였는지 궁금하네요.

한시미학산책 재미있게 읽으신 거 맞죠? 리뷰에서 묻어나네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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