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연구원

북

연구원들이

  • ggumdream
  • 조회 수 2262
  • 댓글 수 0
  • 추천 수 0
2017년 8월 21일 11시 54분 등록

1. 저자에 대하여

 

저자의 스승

 

저자에게 저술 철학을 확실하게 심어준 스승이 있다.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스승이지만 늘 만날 수 있는 스승이다. 연암 박지원이 바로 그가 공부하면서 책 속에서 만난 스승이다. 저자는 연암을 만나 생각하는 방식, 글쓰기 습관, 문화를 바라보는 시각과 콘텐트에 대한 이해를 배웠다고 말한다.

연암에 이어 그가 발견한 스승은 다산 정약용이다. 그가 보기에 다산은 진정한 지식과 정보의 기획편집자이며, 그에게 나아갈 방향을 가르쳐준 스승이다. 새 스승에게 배운 바를 책으로 펴낸 것이 <다산선생 지식경영법>이다. 이 책은 다산이 어떻게 당대의 지식과 자신의 문제의식을 책으로 기획, 편집했는지 살펴보는 책이다. 이는 곧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통할 수 있는 지식 정보화의 본질을 들여다보는 작업이기도 하다. 그가 다산이 남긴 글을 들여다보며 얻은 결론은 책 쓰기, 그러니까 지식 정보화 작업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다는 것을 다시 확인한 것이다.

제가 놀란 것이 18세기 실학이 다른 식으로 말하면 정보화인 거예요. 세계의 정보를 어떻게 체계화해 조선 지식인들이 볼 수 있게 만드느냐가 당시 관심이었고, 이는 지금이나 그때나 변치 않는 저술의 근본이죠. 그게 학술적 저술이건 실용서 잡글 쓰기건 지식 정보를 수집하고 편집하는 과정은 모두 같아요.”

그는 다산의 책 쓰기 작업은 곧 지식 편집 작업이었고, 대부분 집체작업이었다고 설명했다. 책에 대한 구상이 서면, 제자들로 팀을 꾸린 뒤 각자에게 정확한 작업을 나눠주고 지침을 내려 지식을 뽑고 정리해 카드로 만들라고 하는 방식이다. 그 카드들을 모아 구상한 순서대로 배치하고 종합 편집한 뒤 마지막에 다산 자신이 도입부를 쓰고, 중간에 생각을 집어넣고 종합한다. 다산 정약용이 그렇게 많은 책을 써낼 수 있었던 비결이 바로 여기 있다는 것이다. 그런 경이로운 저술 능력을 방법론 측면에서 들여다본 책이 <다산의 지식경영>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 <목민심서>를 보면 다산 정약용 저라고 안 하고 다산 정약용 편이라고 했어요. <목민심서>를 하다가 비중이 크고 자료가 많은 것은 아예 따로 떼어 <흠흠신서>로 새끼를 치고, 얻은 아이디어는 다른 책으로 다시 구상하는 그런 식이죠. 이런 글쓰기는 저나 다산이나, 예나 지금이나 모두 통하는 근본적인 공통점이라고 할 수 있어요.”

공부가 쌓일수록 관심이 좁아지는 것이 대부분 전문가들이 겪는 약점이다. 그는 그런 함정을 잘 피해가며 자기 관심과 사유의 범위를 넓히는 데 성공하고 있다. 내용에 빠지지 않고 내용을 담아내는 방법론에도 관심을 기울여온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그도 스승 다산을 닮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왕성한 필력과 스스로 단련한 기획 감각으로 우리 시대의 지식 편집자로 자신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그 자신이 생각하는 저술가로서의 진로는 다산 같은 정방위 지식경영인이다. 고전 속에서 요즘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정보를 찾아 편집해서 요긴한 정보로 배열해내는 작업이 그가 추구하는 글쟁이로서의 방향이다.

그는 지금까지 책이라는 것은 결국 소통의 문제에 달렸다는 것을 확인시켜줬다. 학문 언어든 대중 언어든 글이란 결국 소통을 전제로 하며, 그의 책처럼 학자가 일방적으로 강의하는 것이 아니라 대화를 전제로 글을 쓰면 대중들은 분명 거기에 답하고 열광한다. 이제 그는 보다 넓어진 주제의식으로 새로운 글쓰기를 시도하고 있다. 그런 도전은 아무리 전문적인 내용도 보편적 교훈을 담고 있으면 독자들이 적극적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경험한 자신감에서 나온다. 놀랍도록 부지런한 자세로 관심의 폭을 넓혀가고 있는 이 글쟁이의 행보는 그래서 더욱 기대를 모은다.

 

2. 내 마음에 무찔러 드는 글귀

 

세 번째 이야기 보여주는 시, 말하는 시

 

당시와 송시

 

95. 이 나라에서 지위의 높고 낮음은 단지 시를 쓰는 능력에 따라 결정된 뿐이다.

모든 것이 능력에 따라 결정되는게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님을 알아가고 있다.

 

95. 대게 현세의 불우에 대한 보상심리의 반영인 셈이다.

 

95. 소영비술만으로 대적하겠다며 첨두노 몇을 데리고 혼자서 적진을 향해 돌진한다. 소영비술이란 천지의 풍운조화를 일으키는 피리 부는 비술로 다름 아닌 시를 말함이요, 첨두노란 머리가 뾰족한 하인이니 붓의 다른 말이다.

 

97. 당시를 두고 흔히 중국 고전시가의 꽃이라고 말하여 계절로 치면 봄에 해당한다고들 하고, 이에 반해 송시는 가을에 비긴다.

 

100. 시의 작법은 영묘影描포진鋪陳’. 두 가지를 벗어날 수 없다고 전제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당인은 광경을 즐겨 서술하였다. 그래서 그 시에 영묘가 많다. 송인은 의론 세우기를 즐겨하였다. 그래서 그 시에 포진이 많다. 무릇 광경을 서술함은 국풍國風의 뒤를 이어 나온 것이라서 참되고 두터운 맛이 적다. 의론을 세움은 양아兩雅에서 나온 것으로 생각의 자취가 완전히 드러나 있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당인은 시를 가지고 시를 지었고, 송인은 문을 가지고 시를 지었다고 여겨 당시가 송시보다 훨씬 뛰어나 송시는 당시에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이는 당시에는 영묘가 많고, 송시에는 포진이 많은 까닭이다. 그러나 송시가 당시만 못한 것은 바로 기격氣格이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지 포진이 영묘만 못하여서 그런 것은 아니다.

조금만 더 쉽게 설명하면 좋으련만 影描, 鋪陳, 國風. 兩雅, 氣格 하나같이 어렵네. 그냥 가슴으로 느껴야 하는 것인가. 지식이 짧은 것이 아쉽구나.

 

101. 당시의 특징으로 거론한 영묘란 글자 그대로 그림자를 묘사하는 것이다. 그림자는 실체가 아니다. .... 대상과 마주하여 일어나는 시인의 감정은 실로 그림자와 같아서 꼬집어 말하기가 어렵다. ....반면 포진이라 함은 그대로 펼쳐 진술한다는 의미이다. 시인이 의론을 세워 자신의 주의 주장을 전달하려 할 때 흔히 이 방법을 사용한다.

 

101. 당시가 낭만적이고 감성적인 취향이라면, 송시는 고전적이고 이성적인 취향이다. .... “사람의 일생에서 소년 시절에는 재기가 발랄하여 마침내 당시의 기풍을 띠게 되고, 노년 시절에 이르면 사려가 깊어져서 송시의 기풍을 띠게 마련이다.” ..... 사실 이러한 점은 현대의 시인도 비슷하다. 젊은 시절 격동하는 감정의 분출과 화려한 비유로 독자를 사로잡던 시인도 만년에는 인생에 대한 깊은 통찰을 담담한 언어에 담아 노래하는 것을 흔히 본다.

 

102. 말하자면 시 속의 경물은 자신의 의논을 펼치기 위해 짐짓 끌어온 차용물에 불과한 것이다. ...... 당시를 존중하는 사람은 송시를 배척하여 비루하여 배울 바가 못된다고 한다. 송시를 배우는 사람은 당시를 배척하여 나약해서 배울 것이 없다고들 말한다.

무릇 모든 학문에는 파벌이 있는 법. 서로 자기 것이 우위라고 주장한다. 단점이 있는 반면 서로 경쟁을 하니 좋은 시가 나오는 장점도 있을 것이다.

 

103. 당시는 가슴으로 쓴 시이다. 여기에는 시인의 웃음과 눈물이 있어.

 

104. 윌리엄 예이츠의 이니스프리와 같은 의미

윌리엄 예이츠의 시 '이니스프리(innisfree)의 호도(湖島)'. 이니스프리는 휴식을 주는 섬이란 뜻이다.

단순히 화장품의 이름이 아니었다. 모든 브랜의 이름은 그냥 붙여지는 것이 아니다. 의미가 있는 것이다.

 

107. 스무 자에 불과하지만 길 가는 나그네의 辛苦(신고)와 뼈에 저미는 외로움이 생생하게 마음을 파고든다.

 

107. 이안눌은 평생에 두보의 시를 13천만이나 읽었다는 시인이다.

1만 시간의 법칙이 있다. 1만 번을 읽으면 시를 쓸 수 있는 것인가.

 

108. 이와 같이 당시는 가슴으로 전해오는 정감의 세계를 노래한다. .... 이런 까닭에 당시풍의 시는 이성의 원리가 지배하는 시대보다는 감성의 원리가 지배하는 시대에 즐겨 불린다.

 

109. 그러나 대체로 송시는 이 시기 발달한 禪宗과 성리학의 영향으로 인생에 대한 철학적 음미를 내용으로 하는 경향이 짙다. 또 쓸데없는 수식을 배제하고 섬세한 관찰과 개성적 표현을 중시하였으며, 제재 상 일상생활에의 관심과 밀착이 두드러진다. 이에 따라 시의 공용성은 더욱 강조되었고, 표현이 다분히 산문적이고 서술적이 되었다. 정감이 풍부하고 유려한 당시에 비해 송시는 이지적이고 심원한 풍격을 갖추고 있다. 또 송대에 발달한 詞文學은 시에 비해 낭만적이고 서정적인 세계를 노래하여, 이때에는 시와 사 사이에 역할 분담이 이루어진 것도 간과할 수 없다.

詞文學 : ()는 중국의 당 대에 만들어져 송 대에 융성한, 속곡(俗曲)에 맞추는 가사 문학이다. 굳이 이런 양식의 문학이 있으니 당시와 같은 시를 지을 필요는 없었다는 뜻이 아닐까.

 

109. 온종일 짚신 신고 발길 따라 가노라니 終日芒鞋信脚行(종일망혜신각행)

한 산을 가고 나면 또 한 산이 푸르도다 一山行盡一山靑(일산행진일산청)

마음에 생각 없어 형상 부림 안 당하니 心非有想奚形役(심비유상해형역)

도는 본시 무명커늘 어찌 빌려 이룰까 道本無名豈假成(도본무명기가성)

간밤 이슬 마르잖아 산새는 지저귀고 宿露未晞山鳥語(숙로미희산조어)

봄바람 다하기 전 들꽃이 피었구나 春風不盡野花明(춘풍부진야화명)

지팡이로 돌아올 때 천봉이 고요터니 短笻歸去千峯靜(단공귀거천봉정)

푸른절벽 안개 속에 저녁 햇살 비춰든다 翠壁亂烟生晩晴(취벽난연생만청)

김시습 <無題>이다. 제목부터 뭔가 비장하다.

110. 그는 느닷없이 도는 본래 무명한 것인데 이것을 어찌 이루고 말고 하는 이치가 있겠느냐고 반문한다. 도를 이루고야 말겠다는 욕망, 成道 成佛에의 욕망은 한 산을 가고 나면 또 산이 막아서듯 이루어질 수 없는, 마음이 빚어낸 허망한 집착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12구의 언술이 구도의 행각에 나선 구도승의 수행 과정을 비유하고 있고, 34구는 그 과정 끝에 도달한 어떤 깨달음을 말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111. 56구에서 다시 시적화자는 숨고 사물의 세계를 노래한다. .....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제 스스로 알아 지저귀고 망울 부푸는 것이 자연의 섭리다. .... 7구에서 천봉이 고요하다고 한 것은 사실 앞서의 깨달음이 가져온 내면의 고요, 내면의 평정을 말하려 함이다. .... ‘늦저녁의 햇살이 비쳐들어 이전 나를 괴롭히던 망집의 실체를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언뜻 보아 이 시는 자연을 서성이는 나그네의 노래로 보기 쉽다. 하지만 그 의미를 하나하나 따져보면 뜻밖에 이같이 심오한 깨달음의 세계와 만나게 된다.

저자가 아니면 해석이 전혀 불가할 듯. 그저 저자의 학문의 깊이가 부러울 뿐.

 

112. 오도시란 도를 깨달은 순간의 법열을 노래한 시이다.

 

112. 무엇을 이루고야 말겠다는 집착 속에서 우리는 아무것도 얻을 수가 없다.

슬프지만 인정해야 하는 사실. 연구원과정속에서 뭘 이루겠다는 욕심은 버리자. 그저 배우고, 읽고, 느끼자.

 

112. 깨달음은 먼 데 있는 것이 아니다. 바로 우리 곁에 있다.

 

113. 이 시를 읽고 나면 고요한 연못가에 엎드려 맑고 잔잔한 수면을 바라보는 순수함이 마음을 고요하게 만드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여기서 퇴계가 말하고자 한 것은 사물 자체가 아니다. 맑고 일렁임이 없는 연못은 사실은 일체의 삿됨이 끼어들지 않은 순수무구한 마음을 상징한다. 그래서 이 시를 두고 제자인 김부륜은 천리가 유행함에 인욕이 끼어듦을 염려한 것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114. 사람의 마음은 본디 순선하여 맑고 깨끗하기가 이슬 머금은 풀입이나 일렁임 없는 수면과도 같다. 그러나 자꾸만 인욕이 끼어들어 순수를 잃게 만든다. 지금 시인은 제비가 물결을 차서 평정을 깰까 열려하듯 혹 자신의 삶에 인욕이 개입되어 본성을 잃는 일은 없어야겠다고 다짐하고 있는 셈이다. 이때 시인이 표층에서 묘사하고 있는 외물은 시인이 전달코자 하는 내용의 표피에 불과하다. 그 안에는 깊고 유원한 사변의 세계가 자리 잡고 있다.

나는 감정형의 사람인데 시는 이성적인 송시풍이 더 마음에 든다. 그동안의 생활때문인가.

 

114. 송시풍의 시는 이와 같이 담담한 가운데 깊이를 지녔다. 또한 일반적으로 당시가 대상 그 자체에 몰입함으로써 자연스레 시인의 情意를 드러내는 방식을 취하는 데 반해, 송시는 시인이 자신의 정의를 대상을 통해 드러내는 방식을 취한다.

 

114. 마이어 에이브럼스는 <거울과 등불>이란 책에서 문학의 기능을 거울과 등불의 두 가지로 나누었다.

 

115. 한때 우리 시단에서도 참여시니 순수시니 하는 이름으로 소모적인 논쟁이 반복되었던 것을 기억한다. 한편에서는 암흑의 시대에 거울만 닦고 있는 시인을 향해, 창밖에서 천둥 번개가 치든 말든 안방에서 내방가사나 읊고 있는 바퀴벌레 같은 인간들이라고 매도했다. 또 한쪽에선 등불을 높이 들고 무조건 따라오라고만 외치는 시인을 향해 시가 무슨 혁명의 도구냐고 항변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115. 시는 우선 시가 되어야 한다. 당시와 송시의 구분이나 참여니 순수니 하는 변별은 그 다음 문제다. 동시에 그것은 세계관의 문제이므로 좋고 싫음의 판단이 있을 뿐 우열의 기준이 될 수는 없다. .... 웅변이나 설교를 시의 형식을 빌려 듣고 싶은 독자는 없다.... 또 자신이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몽환적 어휘의 나열이나 이미지의 배합에만 몰두하고 있다면 혹세무민의 연금술사에 지나지 않는다. 시는 결코 독해할 수 없는 상형문자이거나 암호문일 수가 없다.

 

116. 꿈속에서의 환상이 급전직하 티끌세상의 나락으로 추락하고 있다. .... 현세에서 시인의 삶이란 곁에 누운 병든 아내의 신음처럼 고달프고 괴로운 것을. 그러고 보면 시란 까맣게 잊고 있었던 신선세계, 또는 존재하지 않는 피안의 세계를 향한 회귀의 몸부림일지도 모르겠다. .... 티끌 세상의 귀양살이가 끝나 천성으로 복귀할 때까지 뱃속의 먹물이 다 마르도록 시인은 다만 깨어 노래할 뿐이다.

 

다섯 번째 이야기 버들을 꺾는 뜻은 / 한시의 情韻味

 

123. ‘는 글자 그대로 대상을 보면서 생각을 일으키고, ‘은 이를 이어받아 보충한다. ‘에서는 시상을 틀어 전환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12구와 3구 사이에 단절이 온다. 그 단절에 독자들이 의아해할 때, 4에 가서 하나로 묶어줌으로써 완결된 구조를 이룬다.

 

125. 당나라 때는 벗과 헤어지면 버들가지를 꺾어 이별의 정표로 주는 풍습이 있었다. 그래서 절류折柳’, 버들가지를 꺾는다는 말에는 앞서 본 남포와 마찬가지로 이별이란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버들가지가 이별의 신표가 된 사정은 이러하다. 버드나무는 꺾꽂이가 가능하다. 신표로 받은 버들가지를 심어두면 뿌리를 내려 새 잎은 돋운다.

 

126. 우리의 우저도 사랑도 그와 같이 시들지 말자는 다짐의 의미도 담겼다. 의 중국 음은 머무른다의 의미 와 똑같다. 그러니 버들가지에는 가지 말고 머물러달라는 의미도 있다.

 

126. 남포의 버들은 가지가 없네...... 봄이 와서 풀은 푸른데, 떠나는 임에게 버들가지를 꺾어주려 해도 많은 사람들이 죄다 꺾어버려 남은 가지가 없다는 말이다.

 

128. 매미란 본시 버들가지에 물오르는 아지랑이 봄날에 우는 곤충이 아니다. 춘접추선이란 말이 있듯, 봄날의 꽃밭을 넘나드는 것이 나비라면, 매미는 여름도 깊어 가을이 오는 어스름에야 비로소 목청이 훤히 트인다. 이로 보아 12구와 34구 사이에는 많은 시간의 단절이 있었음을 알게 된다.

 

128. 숲 아래에 있던 매미가 위로 올라온 것에서 시인은 조금이라도 더 높이 올라가 더 멀리 바라보고픈 그녀의 마음을 포착한다. 그녀는 지금 저렇듯 해가 지고 마는 것이 원망스럽고 아쉽다. 그렇게 세월이 가고, 임은 영영 안 오고, 내 청춘의 한 시절도 그렇듯 한숨 속에 시어지고 말 것이 아닌가 싶어서이다.

 

129. 어느 조경학자가 우리나라 한시에 자주 나오는 초목의 빈도수를 조사하여 통계 낸 결과를 발표한 적이 있다. 당당히 1위를 차지한 것은 소나무도 국화도 아닌 바로 버드나무였다. 그는 이 결과를 놓고 버드나무가 우리 생활공간 가까이에 많이 있었으므로 빈번하게 시의 제재로 쓰인 것이 아니겠느냐는, 지극히 상식적인 결론을 내리고 말았다. 그는 버드나무가 봄날의 서정을 촉진시키는 환기물인 동시에, ‘이별과 재회에의 염원을 상징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다시 말해 버드나무가 빈도수에서 1위를 차지했다면, 그것은 봄날의 서정이나 이별을 주제로 한 작품이 제일 많았다는 것과 같은 의미다.

재미있는 글이다. 조경학자는 당연히 한시를 모르고 자기 전공분야를 중심으로 해석을 한 것이다. 사실 조경학자의 말도 맞지 않을까. 버드나무가 그만큼 주위에 많았기 때문에 서정과 이별의 상징이 되었을 수도 있는 것이다. 어찌됐든 어떤 글을 쓸 때는 항상 가능한 모든 분야를 확인해야 함을 배운다.

 

130. 한시에서 사랑과 연관되어 상징적 의미로 쓰이는 어휘를 더 살펴보자. ‘추선秋扇’, 즉 가을 부채가 그것이다.

 

131. ‘가을 부채는 한시에서 으레 버림받은 여인을 상징한다. 부채는 더운 여름날에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물건이다. 하지만 더위가 물러가고 가을이 오면, 여름내 애지중지하던 부채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잊힌다. 마찬가지로 한때 내게 그토록 다정하던 임은 어느덧 나를 까맣게 잊고 돌아보지 않으신다. 시인은 비록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가을 부채를 손에 쥐었다는 말만 가지고 이미 그녀가 임에게 버림받은 여인임을 구체적으로 말한다.

 

131. 옛사람은 풀이 썩어서 반딧불이가 된다고 믿었다. 반딧불이는 황폐한 풀덤불에서 날아다니는 곤충이다. 그 반딧불이가 그녀의 창가를 난다고 하여 지금 그녀의 거처가 얼마나 황폐하고 황량한지를 말했다. 임이 찾지 않는 꽃밭엔 잡초만 우거졌다. 그녀는 반딧불이를 부채로 후려침으로써 자신을 향해 끊임없이 달려드는 처량함과 황량함을 저리 가!”하며 몰아내려 안간힘을 쓴다. 그녀는 엄연한 현실을 차마 인정하고 싶지 않은 듯 하다.

 

135. 누각 위에는 왜 오르는가? 누각의 난간은 높은 곳에 있어, 그곳에서 보면 먼 곳에서 오는 사람을 잘 알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난간에는 왜 기대는가? 기다림에 지친 까닭이다. 그래서 누각에 오르거나 난간에 기댄다는 뜻의 등루登樓’, ‘의루倚樓’, ‘의란椅欄’, 혹은 빙란憑蘭등의 표현 속에는 그리움의 의미가 담긴다.

많은 사람들이 말하는 아는만큼 보인다는 말이 새삼 많이 다가온다. 삼국유사를 읽으면서 경주가 그랬고 한시를 읽으면서 그 읽는 의미를 알게 된다. 제주 다빈치박물관에서 다빈치에서 설명을 들으면서 그그랬다. 하나의 예를 들면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이름인데 빈치는 이탈리아 지방도시의 이름이고 어디에서 온이라는 뜻이다. 다시말해 빈치 지방에서 온 레오나르도란 뜻이다.

 

137. 최경창의 <無題>란 작품이다. 한시에서 무제를 표제로 내거는 것은 마땅히 붙일 만한 제목이 없어서가 아니다. 제목을 붙이지 않은 채 오히려 독자의 적극적인 독서를 요구하기도 한다. 또한 무제시는 이상은 이래로 남녀 간의 애정을 다루는 염정풍의 분위기를 띠는 것이 보통이다.

미술작품에서도 <無題>를 많이 만나는데 애정의 의미가 아니라 無題는 그 이름에서 묵직한 무엇이 느껴진다.

 

138. 말 한마디 거스르면 쫓겨나고, 목숨을 부지하기도 벅찬 세월이었다. 하나 둘 떠나가고, 새로 맞은 봄바람 앞에 나 홀로 가슴 아프다.

이 얼마나 좋은 세상에 살고 있는가. 자유롭게 말할 수 있고 글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

 

140. 저물녘의 피리 소리는 가버린 시설이나 세상을 떠난 벗을 향한 그리움과 맞닿아 있다.

 

140. 어떤 시인이 부른 노래가 사람들의 정서를 파고들어 깊은 공감을 일으키면, 이것이 자주 여러 시인의 입에 오르내리게 된다. 그렇게 되면 특정 단어 위에 사전적 의미를 넘어선 정운이 얹힌다. 지금까지 살펴본 南浦折柳’, 그리고 秋扇倚樓’, ‘聞笛등이 다 그런 예들이다. ...... 한시 감상에서 이러한 어휘를 바로 알지 못하면 시를 전혀 엉뚱하게 곡해할 염려가 크다.

 

141. 이러한 어휘들은 시가 속에 감춰둔 암호와도 같아, 이것을 해독하지 않고는 그 시에 접근하는 통로를 열 수가 없다.

 

141. ‘無窮의 의미를 읽어 나라꽃으로 기린다. 이에 반해 중국 사람들은 이를 朝開慕落花’, 즉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이면 지는 꽃이라하여 인간의 덧없는 부귀영화를 상징하는 꽃, 또는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소인배의 상징으로 폄하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무궁화 운동가가 우리나라 사람이 지은 무궁화 시가 별반 없음을 통탄하여 중국 시인이 노래한 무궁화 시를 잔뜩 모아보았자 자신이 바라던 무궁화를 예찬한 노래는 한 수도 얻을 수가 없다. 맹교가 <사귐>에서 소인배 같은 근화의 마음, 아침엔 있다가가도 저녁엔 없네.”라 한 것이나, 백낙천이 <방언>에서 소나무는 천 년 만에 마침내 썩는데, 무궁화는 단 하루를 영화롭게 여긴다네라 한 예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정말 국화가 무궁화이지만 정작 무궁화에 대한 관심이 없고 주변에서 잘 볼 수 없는 그런 꽃이다. 단순 관심 부족으로 볼 수 있나. 정말 희한하게 무궁화에 대한 시나 글을 본 적이 없다. 중국의 평가는 무시할 필요가 있다. 모든 국화에는 장단점이 있으니 거기에 연연해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143. 특정 어휘가 특수한 정운을 띠게 되면 요즘 식으로 말해 사은유 dead metaphor가 된다. 이것이 진부한 표현으로 떨어지지 않으려면 시인은 늘 새로운 감성과 참신한 생각으로 이를 다스릴 줄 알아야 한다. 진부한 것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 익숙한 것을 새롭게 만나도록 하는 것, 이것은 시인의 창조적 정신이 만들어내는 하나의 마술이다.

 

여섯 번째 이야기 즐거운 오독 / 모호성에 대하여

 

148. 신문의 신간 소개를 보니 그리고 사람을 그리다라는 제목을 단 수필집이 보인다. 여기서 그리고그림을 그린다인가, 누군가를 그리워한다인가, 아니면 단순히 ‘and’의 뜻인가. 또는 사람을 그려놓고 그 사람을 그리워한다는 것인가. 어떤 사람을 그리워하다가 그림으로 그렸다는 것인가? 이 경우 언어는 어느 하나의 의미로 고정되기를 즐기지 않는다.

멋진 제목이네. 여러 가지 의미로 다가오는 다의성이 아름답다.

 

150. 경전에 대한 주자의 여러 해석에 줄곧 의문을 제기하던 그는(왕양명) 마침내 斯文亂賊(사문난적)의 낙인이 찍혀 죄를 입어 죽임을 당했다. 이른바 띄어쓰기가 사람을 잡은 이야기다. 이 시기 이데올로기화한 주자학은 이미 해석의 융통성조차 인정하지 못하는 맹목적 권위로 있었던 것이다.

 

150. 일상의 언어에서 의미는 어느 하나가 옳으면 나머지 그른 것이 되지만, 시의 언어에서는 꼭 그렇지가 않다. 이 대목에서 모호성의 문제가 발생한다.

 

150. 시의 어휘나 구절들은 대개 어느 하나로 규정하기 어려운 포용력과 융통성을 지닌 문맥을 형성한다. 특히 한시 언어에서 이러한 점은 놀라울 정도로 잘 발휘된다. 뛰어난 시는 어떤 의미에서 언어의 포용력과 융통성을 극대화한 시라고 말해도 괜찮다.

 

158. 4구의 의미가 잘 들어오지 않는다. 지지배배 지지배배 쉴 새 없는 그 소리를, 시인은 시시비비 시시비비쯤으로 듣고 있다. 일껏 是非를 벗어나자고 세상을 향한 문을 닫아걸고 있는 나에게 제비가 자꾸만 무엇이 옳고 그른지 좀 더 가늠해보자고 따지는 것 같더란 뜻이다. 廉潔(염결)을 향한 자의식도 이쯤 되면 지나치다 하겠지만, 새소리의 음사로 뜬세상의 작태에 상관하지 않겠다는 주제를 담아내는 재치는 대가란 기림이 아깝지 않다.

 

158. 이렇듯 모호성은 문화적 교양이나 문학 관습을 공유하지 못하는 데서 발생하기도 한다. 예전 같으면 즉각 손뼉이 터져 나왔을 대목도 무슨 말인지 잘 알 수 없게 되는 것이다.

 

160. 시인은 고향이 어디라고 말하는 대신 대숲 길에 엷은 안개가 피어나고, 보랏빛 등꽃 위로 보슬비가 보슬보슬 내린다고 말한다. 동문서답 같지만 시인은 지금 제 고향은 바로 그렇게 아름다운 곳이랍니다.”라고 대답하고 있는 중이다.

 

161. 어둡던 하늘이, 우중충하던 산허리가 온통 백로의 흰빛으로 차오른다. 왠일일까? 어디선가 나타난 아이가 소를 타고 시냇물을 첨벙대며 건너왔던 것이다. 고요하고 팽팽하던 긴장이 일순간에 무너졌다. 바로 그때 강 저편에 무지개가 찬란히 걸렸다. 소 탄 아이의 첨벙대는 물장난이 백로를 놀래 깨웠고, 백로의 비상이 날을 개게 하고 무지개를 띄웠다. 자연이 인간과 만나 하나로 교감하는 현장이다. 왕국유의 말을 빌리면 不隔(불격), 즉 틈이 없다.

 

162. 스무 글자 어디에도 춥다는 말이 없다. 그저 경물을 묘사하고 있을 뿐이다. 제목마저 없었다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어리둥절해질 법하다. 시인은 제목으로 분위기를 잡아놓고, 정작 시 속에서는 독자의 예상을 외면하고 딴청을 부렸다. 여기에서 의미의 단절이 온다. 단절을 채워 제목과 본문을 잇는 것은 독자의 몫으로 남겼다. ...... 어쩌면 고금의 솜씨가 이렇듯 暗合하는가.

 

165. 건덕은 <장자> <산목>에 나오는 도가적 이상향의 이름이다.

 

166. 서울 사는 사람은 언제나 전원의 목가적 풍광을 사모한다. 그러나 막상 그곳에 가면 며칠이 못 되어 다시 도회의 변화한 풍광과 따뜻한 커피 한잔이 그립게 마련이다. 이에 대한 처방은 무엇일까? 서울과 시골의 중간쯤에는 사는 것은 어떨까?

 

167. 가도의 이 시가 널리 회자되어 일본 에도 시대의 대표적 시인 마쓰오 바쇼는 이런 하이쿠를 남겼다. “가을 십년에 도리어 에도쪽을 가리키는 고향”. 10여 성상의 에도 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으로 떠나는데, 문득 되돌아보니 고향인 이가를 향한 설렘보다 에도를 향하는 애틋한 마음이 더욱 간절하다는 사연이다.

얼마 전 일고 있는 하이쿠. 생각보다 멋진 시다. 한시에 견줄 만큼

 

168. 오독은 감상자의 착각, 즉 상식의 허에서 말미암은 경우지만, 시구 해석상의 오독일 경우는 그 문제가 자못 심각하다.

 

170. 뱃속에 아이가 있던 시점은 여러 해 전 남편이 수자리 살러 떠나던 당시다. 그러니까 그때 뱃속에 있던 그 아이가 아버지의 겨울옷을 가져다주러 변방으로 떠날 만큼 자랐다는 말이다.

 

170. 그런 이 시를 놓고 근엄한 유학자의 입에서까지 서슴없이 이런 외설적인 이야기가 시화될 정도로 고려사회의 성 풍정이 타락했다고 지적하는 오독을 지하에서 포은이 듣는다면 과연 어떤 표정을 지었을지 궁금하다.

무릇 무엇을 해석해서 대중 앞에 내놓을 때는 항상 최악의 경우까지 생각해야 할 것이다.

 

172. 우리 형제가 먼 변방에서 이리 만나니 기쁘기 한량 없으나, 멀리 서울에서 우리 형제 걱정에 매일 대문간에 기대에 서 계실 어머니를 생각하니 기쁘던 마음은 간데없고 구슬픈 생각에 목이 멘다는 이야기다. 한문이 갖는 언어의 함축과 정운, 그리고 시인이 행간에 감춰둔 마음을 십분 이해하지 못한 탓에 이런 오역이 나왔다. 때로 무정견, 몰안목으로 인한 오독은 읽는 이를 민망하게 한다.

 

172. 꼼꼼한 독시의 과정 없이 무성의한 치레나 선입견에 의한 오독으로 일관하는 이런 해설은 오히려 독자의 바른 이해를 방해한다. 해설자의 명망이 시인의 수준을 결정지어주는 것이 아닐진대 이런 해설이 꼭 필요한지 의아할 때가 있다. 시를 읽는다는 것은 시인이 언어의 미로 위에 숨겨놓은 코드를 독자가 찾아가는 과정이다. 그 과정은 진진한 지적감성적 여정이어서 때로는 오독도 즐겁다. 시인은 부러 말꼬리를 흐려 독자를 어리둥절하게 하고, 독자는 잠시 멍해 있다가 다시 코드를 찾아 나선다. 설사 가다가 길을 잠시 잃은들 어떠랴. 아니, 애초부터 길은 없었는지도 모른다.

 

일곱 번 째 이야기 사물과 자아의 접속 / 정경론情景論

 

175. 마음에 일어나는 정을 건네듯 사물에 보내면, 사물은 답이라는 듯이 흥을 불러일으킨다. 경물은 이렇듯 시인의 눈 속에서 어느 순간 정으로 착색된다.

 

175. 명나라 때 사진은 <사명시화>에서 이렇게 말했다. “은 시의 매개이고, 은 시의 배아다. 이 둘이 합하여 시가 된다. 몇 마디 말로 만 가지 형상을 부려서 원기가 혼성하니 그 넓음이 가엾다.” 무심히 경물과 마주하여 마음속에 정이 일어난다.

 

176. “은 이름이 둘이나 실제로는 나눌 수 없다. 시에 뛰어난 자는 이 둘을 절묘하게 결합하여 가장자리가 없다. 빼어난 시는 정 가운데 경이 있고, 경 가운데 정이 있다.” 이른바 妙合無垠(묘합무은)’의 주장이다. 선녀의 옷은 꿰맨 자취를 찾을 수 없어 천의무봉이다. 정과 경이 만나 하나가 되는 것도 이와 같다. 어디까지가 경이고 어디부터가 정인지 그 가장자리를 찾기 어렵다. 정을 말하는가 싶은데 어느새 경을 묘사하고 있고, 경을 그려 보이는가 싶어 보면 다시금 정을 토로한다.

 

177. 경물과 마주하기 전에 시인은 별다른 생각이 없었는데, 경물과 마주하는 순간 문득 정이 일어났다.

보통 사람은 그냥 지나치는 것이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대상을 진정 바라볼 수 있는 감흥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177. 빗속에 누렇게 잎 시든 나무

등불 아래서 하얗게 머리 센 사람

이것은 경이 정과 합하여 하나가 된 예다.

 

179. 정과 경의 미묘한 줄다리기 속에서 서로 긴장을 유지할 수 있어야 좋은 시다.

 

180. 사물에 정이 접촉한 순간 누군가를 향한 그리움으로 변한 것이다.

 

180. 송희갑은 일찍이 권필의 명성을 사모하여 강화까지 찾아갔다. 10년을 기약하고 시 공부를 시작했다. 뒤에 스승이 장티푸스에 걸려 수십 일 간 사경을 헤맬 때 한시도 떠나지 않고 곁에서 시중을 들었다. 땔나무와 집안일도 그가 도맡아 했다. 충직한 그를 권필은 각별히 아꼈다. 권필이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사람이 천하를 널리 보지 못하면 시가 국한되고 만다. 나는 유감스럽게도 이미 할 수가 없지만, 네 근골로는 능히 이 일을 할 수가 있다. 다만 압록강 북쪽은 관문의 방비가 몹시 엄하니 반드시 어두운 길에 숨어 엎드려 있다가 물 있는 곳을 만나면 수영을 해서 몰래 건너야 갈 수가 있다. 너는 모름지기 중국말을 배우고 수영을 익히도록 해라.” 행만리로의 강산지조가 있어야만 비로소 시가 얽매임 없이 툭 터진다. 시를 제대로 짓기 위해서라면 불법으로 국경을 넘는 것도 마다할 것 없다고 스승은 제자를 부추겼다. 순진한 제자는 허구한 날 바다에 뛰어들어 수영을 익히다가, 마침내 바다의 짠 기운에 기혈이 삭아서 일찍 죽고 말았다. ..... 시키는 스승이나 하란다고 하는 제자나 다 딱하다. 한편으로 그토록 도탑던 사제의 정과 시를 향한 맹목적인 열의가 그립다.

이정도 열정이 있어야 뭘 해도 하지 않을까. 비록 그는 죽었지만 어쩌면 행복한 죽음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나저나 그 옛날에도 국경이 그리 삼엄했을라나. 갈려면 굳디 바닷길이 아니어도 될텐데..

 

182. 가을 새벽의 해맑은 경은 자연스레 자신을 돌아보는 시인의 정을 일으켰다. 돌아보면 뭐 하나 제대로 이룬 것이 없다. 남은 것은 늙고 병든 고단한 몸뚱이 뿐이다. 손꼽을 만한 벗도 없다. 제 몸 하나 갈무리하기도 버거운데 세상일은 더하여 마음을 심란케 한다. 이때 동편 저 너머로 붉은 해가 떠오른다. 실망하지 말라고, 아직 늦지 않았다고 위로해준다.

 

184. 문제는 언제나 정과 경의 조화다.

 

185. 남곤은 훗날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제가 쓴 시문을 다 불사르고 죽었다. 시에서 정은 경을 앞지른다. 준엄한 나무람을 앞세운 후 뒤를 경으로 받쳤다. 한식 지난 골목길, 묵은 담장 너머로 노란 수유꽃이 버짐 피듯 피었다. 다 부질없다고, 흩어지고 남은 것은 천추에 더러운 이름뿐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186. 죽창에 해가 빗겨 하루해가 또 간다. 주인은 이리 뒹굴 저리 뒹굴 종일 누워 책을 본다. 기약을 두지 않은 독서라 看書. 보려 보는 것이 아니라 눈앞에 있어 본다는 뜻이다. 속세의 아웅다웅하던 삶이 인적 끊긴 마당에서 찧고 까부는 참새 떼와 같다. 名利를 향한 마음은 죽창에 빗긴 사양인 양 시들하다.

이런 삶을 올 한해 살려고 했는데 연구원이 덜컥 되어버렸다. 하지만 지금 삶이 내게는 더 맞는 듯

 

189. “정을 잘 말하는 자는 말이 깊은 듯 얕고 드러날 듯 감추어져서 그 마음의 무한함을 깨닫게 한다. 경을 잘 말하는 자는 형용함을 생략한 채 약간만 보태도 참모습이 또렷하고 생기가 넘쳐난다.”

 

191. 여기서 어디까지가 정이고 어디까지가 경인가. 무엇을 물이고 무엇이 아인가.

 

193. 시적 화자는 풍경 속의 일부로 녹아들어 버렸다. 한 폭의 그림 속이다. 주관 정의가 객관 경물에 완전히 녹아들어 차 향기를 맡고 빗소리를 듣는 주체가 시인인지 나인지조차 분간하기 어렵다.

 

193. 하상이 <추수헌사전>에서 말했다. “시는 함축을 귀하게 여긴다. 곧장 말해버리면 문제가 생긴다. 시인은 그저 경상을 묘사하면서 정의가 절로 드러나게 해야 한다.” 왜 경만 보여주는가? 저도 모를 정서를 말로 표현하기는 말하는 이나 듣는 이나 쉽지 않다. 효과도 신통치 않다. 경물만 묘사했는데 정의가 드러날 수 있을까?

 

198. 詩言志’, 즉 시가 뜻을 말한다는 말은 <시경>이래 가장 친숙한 시의 정의다. 시란 무엇인가? 품은 뜻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뜻은? 나아가 말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어떻게 말하는가?

 

198. “시는 뜻을 말하는 것이다. 뜻이란 마음이 가는 바이다. 그래서 시를 읽으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

글도 마찬가지다. 글이든 시든 저자를 마음을 읽을 수 있어야 좋은 글이나 시가 될 것이다.

 

199. 네 구 모두 정의 술회임에도 그 감정의 절절함이 비탄에 빠지지 않은 哀而不悲의 경계를 얻었다.

 

201. 한시에서의 정과 경의 어울림을 살펴보았다. 이들 사이에 우열은 없다.

 

201. “시는 혹 경이 앞서고 정이 뒤따르거나, 혹 정이 먼저고 경이 나중한다. 정과 경이 나란히 이르기도 하는데, 서로 떨어진 듯 융합하니 각기 그 묘가 있다.”

 

202. 시는 찬 샘물이다. 시를 잘 쓰려면 물의 善變을 배워야 한다. 굴원의 시와 장자의 산문에는 강개의 비분이 담겨 있다. 그러나 그 강개는 어디까지나 돌에 부딪혀 난 여울의 소리였지, 악악대며 떠드는 왜가리 소리가 아니었다. 후대로 내려올수록 시의 법은 점차 시끄럽고 번다해져 옛사람의 정신은 찾아보기가 어렵다. 수다스럽게 말하고 아프고 끙끙대는 소리가 시의 내용이 되고 말았다. 심상의 나락으로 떨어지지 말라. 그러나 진정한 시법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통과해야 할 최후의 현관이 있다. 그 현관 앞에서 서려면 많은 과정이 필요하다. 그 문을 여는 법은 아무도 일러줄 수가 없다.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 제 손으로 직접 열고 들어가야 한다.

글을 쓰는 것 역시 이런 과정이 필요하다. 지금 이 순간 힘이 든다고는 하나 이런 어려움 없이 내가 어떻게 글을 쓸 수 있을까.

 

여덟 번째 이야기 - 일자사一字師이야기 / 시안론

 

205. “시는 묘함이 한 글자에 달려 있다. 옛사람은 한 글자를 가지고 스승으로 삼았다.” “시구는 한 글자가 공교로우면 절로 빼어나게 된다. 마치 한 낱의 영단으로 돌을 두드려 금을 만드는 것과 같다.” “시는 한 글자만 고쳐도 경계가 하늘과 땅 차이로 달라진다. 겪어본 사람이 아니고서는 이해할 수 없다.”

 

205. 한 글자가 시슬 죽이로 살린다.

 

209. 비유하자면 사람이 급하게 모자를 사려고 시장에 들어가 여러 개를 꺼내 놓고 하나하나 써보면 반드시 하나하나 써보면 반드시 마음에 쏙 드는 것이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모자 고르는 법을 쓸 수만 있다면 시안은 공교롭지 않음이 없다. 하나하나 골라 써보고 거울에 비춰 비교하듯, 글자를 바꿔 넣었을 때 일어나는 미묘한 변화를 음미할 수 있어야 시안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210. 시안을 글자 그대로 시의 눈알이다. 시안은 시에서 가장 정채롭고 시인의 정신이 집약된 지점, 하나만 건드려도 나머지가 따라 움직이는 일동만수의 경락이다. 시안은 단순히 수사적으로 자구를 단련하는 기교의 문제가 아니다. 시가 예술의 정경미를 형성하는 핵심처인 것이다.

 

211. 또 글자를 단련함은 용을 그려 눈동자를 찍자 용이 번드쳐 올라가는 것과 같다. 한 글자의 빼어남이 시 전체를 기이하게 할 수 있다. 시안이란 바로 한 편 시의 눈동자에 해당하는 자리다. 시의 힘줄과 뼈대가 바로 이곳에 모여 있다. 이로 인해 전체 시는 갑자기 생동하는 활기를 띤다.

 

212. 하늘 높이 솟은 봉우리는 높이 솟았다또는 솟아올랐다등으로 표현하는 것이 상식이다. 시인은 이를 뒤집어 반 너머 떨어졌다고 표현하였다. 바로 여기에 표현의 묘가 응축되어 있다. ‘이 안잔다. 이렇게 말하고 보니 구름 위로 산이 솟은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산이 지상으로 지금 막 내려오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이런 참신한 발상은 이백이 아니고는 불가능할 것이다.

 

221. 일자사의 첫 번쩨 미감 원리는 의미의 중복을 피하라.’는 것이다..... 시는 중복을 꺼린다. 한 글자도 넘치거나 부족해서는 안 된다. 이 절제된 경지를 한유는 이렇게 말했다. “풍부하되 한 글자도 남지않고, 간략하되 한 마디도 빼먹지 않느다.” 한 글자만 더하거나 빼도 와르르 무너지는 그런 글, 그런 시를 쓰라는 주문이다.

 

222. 모든 것이 다 그렇지만 지나친 것은 문제다.

 

223. 두 번째 미감 원리는 여운을 남기고 호응을 중시하라.’는 것이다. 여운은 추상의 여백에서 생긴다. 시는 단정적 언사를 꺼린다. 사물과 시인이 만나 빚는 의경은 카메라 렌즈처럼 또렷하게 잡히지 않는다. 오히려 일부러 초점을 흐리는 데 묘한 맛이 있따. 그래도 의경의 호흡이 흐트러지면 안 된다.

 

227. 세 번째 미감원리는 시상의 온유돈후를 중시하라.’는 것이다. 감각적 직설보다는 에둘러 말하는 데서 온건한 맛이 깊어진다. 모난 말보다는 각지지 않은 표현에서 중후한 체취가 풍겨난다.

 

229. 몇 글자의 차이지만 세상을 바라보는 두 사람의 관점이 전혀 다르다. 이것이 시상의 온유돈후를 추구하라는 일자사의 세 번째 미감원리다.

 

229. 시안과 일자사 이야기는 창작상 한 글자의 차이가 만들어내는 미묘한 질감의 차이까지 십분 고려했음을 말해준다.

 

230. “지금 사람은 시를 논하니, 이것은 死眼이지 활안이 아니다.” 나아가 그는 시에서 정채가 서려 얽힌 영롱한 지점을 찾을 수 있어야 살아 있는 눈, 즉 활안을 포착하게 된다고 했다. 시안이 없다 해서 수준 낮은 시가 되는 것도 아니다. 명나라 호응린은 <시수>에서 시에 시안이 있는 것은 돌에 티눈이 있는 것과 같다는 이른다 티눈론을 주장했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230. 성당시의 구법은 두텁고 깊이가 있어 마치 양한의 시와 같아 한 글자에서 구할 수가 없다. 두보 이후부터 시구 가운데 기이한 글자가 있으면 시안으로 여겼다. 이러한 구법이 있고 나서 두터움과 깊이는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옛사람은 돌에 티눈이 박혀 있으면 벼루의 흠으로 여겼다. 나는 또한 말한다. 시구 가운데 눈이 있으면 시의 한 흠집이 될 뿐이다.

어찌 시만 해당되는 말이고 예전에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다. 글을 쓰면서 그 시대의 흐름을 따르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신만의 것을 추구하는 것일 것이다.

 

231. 시인은 시안을 연마할 때 집착을 버려야 한다. 진정한 의미의 시안은 시안을 감추는 장안의 경지에까지 이르러야 한다. 사물을 꿰뚫어보는 혜안과 통찰력 없이 그저 남의 눈이나 놀라게 만드는 수사적 기교로는 아무 것도 이룰 수가 없다.

 

아홉 번째 이야기 작시, 즐거운 괴로움 / 苦吟論

 

235. 대상을 향한 미친 듯한 몰두 없이 위대한 예술은 이룩되지 않는다. 불광불급이라 했다. 미쳐야 미친다. 비록 하찮은 기예라 해도 자신을 온전히 잊는 몰두가 있어야 비로소 성취를 말할 수 있다.

 

235. 신발을 벗어놓고 한 곡을 부를 때마다 모래를 한 알씩 던져, 신이 모래로 가득 차야 돌아왔다.

 

237. 추사보다 조금 앞선 시기에 초서에 능했던 명필 이삼만은 일생에 먹을 갈아 구멍을 낸 벼루가 여러 개였다. 낙숫물이 돌을 뚫는다더니, 벼루 여러 개가 밑창 나도록 그는 열심히 먹을 갈고 또 썼다. 사광은 전국시대의 유명한 악사였다. 그는 소리르 듣는 데 방해가 된다며 자신의 눈을 찔러 소경이 되었다. 예술도 이쯤 되면 이르러 간 경지를 측량할 길이 없게 된다. 최고의 경지를 오르려면 잗다란 기교쯤은 까맣게 잊어라. 정신의 뼈대를 하얗게 세우고, 영욕도 득실도 생사까지도 마음에 두어서는 안 된다.

일생을 살면서 무엇을 시작할 때 반드시 가슴에 새겨야 할 문장들이다.

 

243. 주흥사周興嗣가 하룻저녁 사이에 <천자문>을 만들어 올렸는데 수염과 머리칼이 다 세어버렸다. 돌아와서는 두 눈을 한꺼번에 실명하고, 죽을 때에는 마음이 단전을 떠난 것이다. .... 창작은 이같이 피를 말리는 일이다.

 

252. 구양수는 글을 지으면 벽에다 붙여놓고 볼 때마다 이를 고쳤다. 완성 후에 보면 처음 것은 한 글자도 남지 않은 적이 많았다고 한다. 소동파가 <적벽부>를 짓자, 사람들은 그가 고치지 않고 단숨에 지은 줄 알았다. 막상 이를 짓느라 버린 초고가 수레 석 대에 가득하였다. 그사이의 고심참담이야 따져 무엇하겠는가.

 

253. 아무 짝에 쓸모없는 줄 알 면서도 쓰지 않고는 못 견디는 사람이 시인이다. 쓰지 않고는 배기지 못하는 표현 욕구를 옛사람들은 기양이란 말로 표현했다. ‘은 가려움증을 말한다. 아무리 긁어도 긁어지지 않는 가려움이 있다. 이런 가려움은 어떤 연고나 내복약으로도 못 고친다. 이와 마찬가지로, ‘쓰지 않고서는 배길 수 없는 표현욕이 있으니 이것이 바로 기양이다.

 

253. 시인의 마음속에는 무엇이 있기에 정신을 피폐케 하고 진기를 소모해가면서 허구한 날 시구의 조탁에만 힘 쏟게 만드는가. 시인으로 하여금 시를 떠날 수 없게 만드는 마물이 있으니 옛사람들은 이를 일러 詩魔라 했다.

 

254. 어찌해볼 수 없는 시마란 놈이

아침저녁 남몰래 따라와서는

한번 붙어 잠시도 안 놓아줘서

나를 이 지경에 이르게 했네

날이면 날마다 심간 도려내

몇 편의 시를 쥐어짠다네

..................................

그렇다고 놀랄 만한 시를 지어서

천 년 뒤에 남길 만한 것도 없다네

손바닥을 비비며 크게 웃다가

웃음을 그치고는 다시 읊는다.

살고 죽음 반드시 이 때문이리

이 병은 의원도 못 고치리라

 

255. 시 때문에 생긴 증세를 자가 진단해 시로 그 처방을 내렸다. 시를 떠나서는 단 하루도 살 수 없다. 이 지경에 이른 것은 모두 시마 때문이다.

 

256. 시인은 산꼭대기에서 세상을 굽어보는 자이다. 그러면서 산 아래에서 헐고 뜯고 싸우는 인간의 작태를 비웃고, 때로 그들을 위해 눈물 흘리는 존재다.

 

256. 재미있지 않은가. 한 사람은 위에서 아래를 보며 개미 같다고 하고, 훅 불면 날려가 버릴 것 같다고 하고, 가소롭기 짝이 없다고 한다. 아래서는 또 위를 보며 머리카락에 붙은 이 같다고 하고, 저 혼자만 공연히 고상한 체한다 하고, 꼴 같지 않게 논다고 눈을 흘기니 말이다. 사실 실용으로 말하면 시처럼 아무 짝에 쓸모없는 것도 없고, 시인처럼 무능한 인간들도 없다. 세상 고민을 혼자 다 짊어진 듯 끙끙대지만, 실제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258. “문장학은 우리 도의 커다란 해독이다. 문장이란 무엇인가? 문장이란 허공에 걸려 있고 땅에 퍼져 있으니, 어찌 바람을 보고 달려가 붙잡기를 바라겠는가?” 또 세상에 보탬이 되지 않는 글을 한평생 읽고 외워본들 슬프고 우울하기만 하지, 천하와 국가를 위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하여 문학의 해독에 대해 깊은 우려를 표명했다.

 

258. 시는 또 인간의 언어 중 가장 빛나는 금강석이다. 사실 세상에는 쓸모만으로 따지면 맥 빠지는 일들이 너무나 많다. 이른바 예술도 쓸모없기는 마찬가지다. 그것은 사람을 배부르게 해주지도 못한다. 마라톤 주자가 42.195킬로미터를 달린들 그것이 나하고 무슨 상관인가. 그런데도 우리는 이봉주, 황영조의 우승에 마음 설렌다.

배부른 돼지보다는 배고픈 철학자가 되고 싶은 것이 요즘 심경이다. 그러나 현실은 돼지가 되라 한다.

 

258. 당나라 때 시의 융서은 약간은 미친 듯한 열기와 목숨을 건 집착에서 이룩되었다. 가슴을 칼로 도려내고, 두 눈을 바늘로 찌르며,심장을 다 토해낼 듯, 가슴속에 찬 서리가 든 듯한 고통을 감내하면서 이들은 오직 시를 위해 살았고, 시를 위해 일생을 심력을 쏟아 부었다. 지금도 날마다 시집이 쏟아져 나오고 잡지마다 시가 넘쳐난다. 하지만 낙루의 감격은 고사하고 수염을 꼬는 고심의 흔적조차 찾지 못할 시가 수두룩하다.

 

258. 그렇더라도 이 아무짝에 쓸모없는 시를 짓겠다고 고금에 피를 말리며 밤을 지새우는 시인이 어찌 손꼽겠는가. 그 고심참담의 결과를 앞에 놓고 독자들은 마음의 위로를 얻고 삶의 깊은 의미를 읽는다. 시가 인간 언어의 정채로운 금강석이든, 아무 짝에 쓸모없는 해독이든 시는 시다. 금강석이 될지 독약이 될지는 오로지 시인 자신의 마음가짐에 달린 일이다.

 

열 번째 이야기 미워할 수 없는 손님 / 詩魔論

 

263. 시마는 시 귀신이다. 시마는 어느 순간 시인에게 들어와 살면서 시인으로 하여금 끊임없이 시를 생각하고 시만 짓게 하는 귀신이다. 시마가 한번 붙으면 다른 일에는 하등 관심이 없고, 오로지 시에만 몰두하게 된다. 더욱이 짓는 시마다 절창 아닌 것이 없다. 시마는 시인에게 즐거운 괴로움을 선사하는 모순적인 존재다.

나에게도 시마와 같은 그것이 왔으면 좋겠다. 그러나 바라기만 한다고 올 것인가. 노력하고 노력해야 한번쯤 곁눈질 할 것이다. 기다림. 준비

263. 뒤에 시마가 그에게서 떠나갔다. 그후로 그는 시는커녕 한 글자도 알지 못하는 무식쟁이가 되어버렸다. .... 시마는 시인에게 제멋대로 들어왔다가 어느 순간 훌쩍 떠나버리는 재미난 귀신이다. 그러다가 시마가 훌쩍 떠나가면 시를 짓고 싶은 마음도 없어질 뿐 아니라, 제아무리 노력해도 좋은 시를 지을 수 없게 된다.

264. 하지만 이 시마란 녀석은 적어도 시인에게는 방해꾼이 아니라 언제고 환영해야 할 손님이다. 시마가 붙고 나면 그냥 하는 말도 모두 기가 막힌 시가 되지만, 시마가 떠나면 꿀 먹은 벙어리가 되니 말이다.

만약 내게도 시마가 나타나 시나 글에 대한 마를 불러주는 대신, 너는 무엇을 줄것이냐고 물어보면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지 하는 괴로운 상상을 한다. 그녀석에게 줄 것이 없다. 아니면 멋진 한시 하나 지어주면 좋으련만 그런 재주가 없으니.

265. 현세가 불우한데도 시에만 몰두하는 자신을 두고 남들은 시마에 붙들렸다고 말한다. 하지만 자신은 신선의 경지와 견주더라도 조금의 손색이 없노라며 창작의 길에서 느끼는 깊은 희열을 예찬했다.

268. 한마디로 시마의 증세는 시 외에 아무것도 눈에 뵈는 게 없어지는 현상이다.

269. 길을 가면서도 시 생각, 밥을 먹으면서도 시 생각, 심지어 꿈에서까지 시 생각뿐, 그밖에 다른 것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어지는 증세, 예의와 염치, 체모조차 우습게 보는 태도, 눈에 띄는 사물마다 허투루 보지 않고 거기에 담긴 비밀을 찾아내겠다고 달려드는 증상이 이른바 시마 증후군이다.

이같이 노력하고, 시외에는 아무것도 생각이 나지 않는데 시마가 찾아오지 않겠는가. 이런 삶을 살지는 못한다. 다만 절반의 노력을 해보려 할 것이다.

270. <구마시문>에서 이규보가 제시한 시마의 다섯 가지 죄상은 다음과 같다.

첫째, 세상에서 알아주지도 않는데 붓만 믿고 찧고 까불게 만드는 죄다.

둘째, 천기를 누설하면서도 당돌하여 그칠 줄 모르고,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세상을 놀라게 하는 죄다.

셋째, 삼라만상의 온갖 형상을 닥치는 대로 남김없이 옮겨내서 겸손할 줄 모르는 죄다.

넷째, 제멋대로 상 주고 벌 주며, 정치를 평론하고 만물을 조롱하여, 뽐내며 거들먹거리는 죄다.

다섯째, 목욕을 싫어하고 머리 빗기를 게을리 하며, 공연히 끙끙대고 인상을 써서 갖은 근심을 불러들이는 죄다.

272. 이규보와 최연이 시마의 죄상을 뒤집어 읽어보면 바로 시인 예찬론에 지나지 않는다. 시인은 남이 알아주든 시로 자신의 포부를 마음껏 펼칠 수 있다. 날카로운 예지로 드러나지 않은 사물의 깊은 의미를 파헤쳐 사람들의 인식을 높은 곳으로 이끌어준다. 그뿐인가? 사물을 관찰하여 감춰진 의미를 찾아내고, 세속의 질서나 사람들의 행위에 대해 시를 통해 마음껏 비판할 수 있는 특권을 지녔다.

272. 한마디로 이규보와 최연등이 꼽은 시마의 죄상은 오로지 시만 생각하고 시에 죽고 시에 사는 전업 시인으로 누리는 특권에 대한 즐거운 비명일 뿐이다. 결국 시마란 놈은 이마에 뿔 달린 귀신이 아니라, 시인으로 하여금 시를 쓰지 않고는 배길 수 없게 만드는 억제할 수 없는 충동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나는 시마를 시인이 자신을 겸손을 나타내기 위한 수단이 아닐까. 결국 시마는 자신이 노력해서 얻은 자기자신의 또다른 창조물이다.

278. 시 귀신에 얽힌 많은 이야기들은 모두 시를 향한 시인들의 끝없는 몰두와 집착이 빚어낸 환영일 뿐이다. 꿈속에서 귀신이 들려준 시는 실상 귀신이 들려준 것이 아니라 자신이 귀신의 입장이 되어 노래한 것일 따름이다. 시와 관련된 귀신들은 한결같이 무섭지 않고 인간에게 해코지를 하는 법이 없다. 이들 귀신이 바로 시인 자신의 분신이니 그럴 수 밖에 없지 않겠는가.

282. 시마는 한마디로 옛사람의 시를 향한 열정의 다른 표현이다. 시귀는 사물의 비밀을 끝까지 꿰뚫으려는 시인의 집착이다.

282. 속담에 목공은 일생 동안 궁하나, 철공은 필경 부자가 된다.’고 했다. 목공은 늘 깎기만 하고, 철공은 항상 붙여 더하기 때문이다.

283. 이미 시마가 떠나버린 현실을 인정치 못하고, 이전에 벌어놓은 점수까지 죄 까막는 조악한 시를 발표하는 모습은 보기에 민망하다. 시마가 떠나가면 시와 넋두리조차 구분하지 못하게 된다.

시마가 떠난 것이 아니라 시인 자체가 변한 것이다. 정신이든 무엇이든

283. 배부르고 따듯함 속으로 시마는 깃들지 않는다. 모든 것이 충족된 넉넉함을 시마는 혐오한다. 무언가 결핍된 상태, 그 결핍을 채우려는 시인의 정신이 죽장처럼 곤두서 있는 지점에서 시마는 슬그머니 시인에게 스며든다.

! 그럼 나도 결국 결핍해야 되는건가! 그렇다. 충분하니 이렇게 대충하는 것이다. 결핍과 부족함이 답인가 보다. 스스로를 결핍과 부족으로 채워야겠다.

 

열한 번째 이야기 시인과 궁핍 - 시궁이후공론


287. 시는 왜 쓰는가? 말로는 풀리지 않을 시름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시름도 노래 앞에서는 눈 녹듯 사라진다.

288. 문학은 득의가 아닌 실의에서 나온다. 아무 아쉬울 것 없는 왕공귀인들은 문학에 목숨 거는 일이 거의 없다.....낙척한 떠돌이와 불우한 재야의 문인에게 문학은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하고 절대적인 수단이다.

그렇구나. 나도 모든 것을 실의해야 하는데 그러고 싶지는 않다. 아직 준비가 안된 것이다.

288. 문장은 훌륭하고 공명도 함께 누리는 이치는 없다.

288. 라이오넬 트릴링은 현대의 문화인은 정치적으로는 부와 쾌락을 원하면서 예술적실존적으로는 내핍과 괴로움을 원하는 모순적 상태에 있다.”고 말한다. 쾌락을 거부하고 프로이트식으로 말해 반쾌락에서 만족을 찾는 본능적 충동이 있다는 것이다.

289. 모든 것이 갖춰진 넉넉한 환경에서 문학은 설 자리를 잃는다. 욕망이 좌절되고 꿈이 상처 입을 때 비로소 사람의 마음속에 이른바 정서란 것이 생겨난다. 그것은 슬픔과 분노, 격정과 눈물이 되어 터져 나온 것이 바로 시이다.

289. 사방을 둘러보면 아무도 없고 계면쩍어 씩 웃다가 장차 부끄럽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하는, 이것이 사마천이 책을 저술할 때입니다.

290. 중요한 것은 사마천의 글솜씨가 아니다. 오히려 그가 그 글을 지을 때 품었던 마음자리를 얻는 것이다.

290. 이거다 싶었는데 결국 손에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조금만 더 주의를 기울였으면 잡았으리라는 자책감, 혹시 누가 내 모습을 보지 않았을까 하는 부끄러움, 바로 이런 모종의 안타까우면서도 착잡한 마음이 바로 사마천이 <사기>를 지을 때의 마음이라고 했다.

291. 그때 항우가 천하를 쟁패했다면, 형가의 독 묻은 비수가 진왕의 가슴을 갈랐다면 역사는 어떻게 뒤바뀌었을까? 지나간 시대 영웅들의 비분강개한 삶의 역정을 돌아보는 사마천의 마음은 어떤 것이었을까? 역사의 운명을 바꾸어 놓은 순간들, 손아귀에 쥐었다가 놓쳐버린 역사의 파란곡절을 지켜보는 사마천의 그 마음은 못 읽고, 오로지 그 박진감 넘치는 문장의 묘사에 감탄하여 실감나네!”만을 연발한다면, 부뚜막 아래서 숟가락 하나 주워들고 무슨 장한 발견이라도 한 듯이 숟가락 주웠다.”고 외치는 것과 무슨 다를 점이 있겠는가?

292. 궁혀엥 처해졌던 사마천은 오로지 <사기>를 완성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그 치욕과 모멸의 시간을 견뎌냈다. <사기>를 완성한 후 서문을 쓰면서 그는 좌절 속에서 불멸의 저술을 꽃피운 발분의 저작들을 떠올렸다.

<사기>를 완성했을 때 그의 기분은 정말 어떠했을까. “아버지 드디어 당신의 꿈을 제가 해냈습니다. 제가 해낸 것 맞죠?”

292. 마음속에 응어리진 이 있으니 이를 펴지 않고서는 견딜 길이 없다.

294. 시인은 코 앞에서 나비를 놓쳐버린 소년의 안타까움을 지녀야 한다. 견디기 힘든 시련과 좌절 앞에서 주저앉지 않는 발분의 정신을 지녀야 한다. 발분하는 서정 없이 어찌 남을 감동시키겠는가.

294. ‘시궁이후공’, 시가 궁해진 뒤에 더 좋아진다는 논의와 시능궁인’, 시가 능히 사람을 궁하게 한다는 관념으로 나뉜다.

295. 선비가 식견을 쌓아두고도 세상에서 펼치지 못하면 스스로를 산꼭대기나 물 밖에 놓아두고 즐기는 경우가 많다. ... 선비가 마음속에 지식과 경륜을 쌓아두고도 그것을 사회적으로 실현할 수 없을 때 마음속에 근심과 울분이 쌓인다.

295. 뛰어난 시인의 경우 거의 예외 없이 곤궁을 달고 살았다.

지금도 마찬가지 아닌가. 시인=가난. 변치않는 공식이지만 시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많다. 그만큼 시가 주는 그 무엇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296. 한편 부정할 수 없는 것은 그들이 시슬 씀으로 해서 곤궁을 더욱 가중시키거나 지속시켰다는 사실이다.

296. 시능궁인과 시궁이후공은 역의 명제다. 하지만 실제 이 둘은 모순관계에 놓이지 않는다. 불만족의 상태에서 만족을 구하려는 모순적 충동지향이 바로 시능궁인의 사고를 잘 설명해준다. 시궁이후공이라 할 때 궁은 공하기 위한 충분조건이고, 공은 궁하기 위한 필요조건이다. 또 시능궁인이라 할 때는 시는 궁하기 위한 충분조건이고 궁은 시를 잘 쓰기 위한 필요조건이다. 이때 궁은 물질적 빈궁보다 실의와 좌절 같은 정시적 상태에 가깝다. 단순한 경제적 결핍른 시인의 발분 욕구를 저해하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정신적 측면이 배제된 궁은 궁이 아니라 빈이다.

298. 세한으로 낙목한천의 계절이 오자 전에 미처 느끼지 목한 송백의 푸르름을 새삼 인식하게 된다. 제주에 유배가있던 추가가 제자 이상적의 변치 않는 정성에 대한 답례로 <세한도>를 그려주었다.

298. 한 편의 시가 뛰어난 작품으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일상성을 뛰어넘는 인식의 갱신이 필요하다.... 다시 말해 궁의 상황이 가져다 준 이상과 현실 사이의 극단의 괴리감, 여기서 벗어나려는 자아의 노력이 덧붙여져 시에서 공의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299. 내 길이 지금과는 맞지가 않아/괴로이 광막함을 찾아 헤맨다/얼음과 눈 살과 뼈를 에이듯 해도/기꺼이 마음만은 평화롭다네. ...살과 뼈를 에는 듯한 추위의 고통속에서도 스스로 옳다는 자부와 창작의 기쁨에 마음은 언제나 평화롭다.

300. 사람은 누구나 시를 지을 수 있다. 다만 성정이 얽매이면 시는 망하고 만다. 성정을 절곡하는 것에 부귀보다 심한 것이 없다.

301. 대체로 문학은 충족에서 나오지 않고 상실과 일탈에서 나온다.... 커튼 치고 촛불 켠다고 좋은 시가 나올 수는 없다. 자기 최면의 수식은 교언영색의 자기기만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에 그친다면 시인은 기능적인 언어조립공에 불과하다.

302. 글을 읽고 그림을 배우면 반드시 빈천에 이르게 되고, 이를 배우지 않고 그림에 어두워야 반드시 부귀를 누리게 된다면 천하에 책이나 그림 같은 것은 진시황이 불태우기를 기다지 않고도 절로 없어졌을 것이다. .... 요컨대 시의 공졸은 궁달과 관계되는 것이 아니라 시인의 타고난 능력과 관계되는 것일 뿐이라고 본 것이다.

306. 궁한 뒤에 시가 더 좋게 된다는 말은 예외를 인정치 찮은 사실 명제도 아니고, 의당 그래야 할 당위 명제도 아니다.

307. 불평즉명, 발분서정, 시구이후공 등의 논의는 궁극적으로 아이덴티티의 문제를 환기시킨다. 아이덴티티, 즉 동일성은 자신을 자기자신이라고 느끼는 감정이다. 즉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이상적관념적 자아와 실제의 자아 사이에 어떤 편차도 없는 상태를 말한다.

307. 궁하다고 그 궁함속에 가라앉고 마는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서도 결코 풍취를 포기하지 않는 독립불구의 정신, 시의 공교로움은 이러한 정신안에서만 보장될 수 있다. 시인은 탄탈로스와도 같은 존재다. 맛있는 으묘식과 샘물을 앞에 두고도 영원한 갈증과 갈망 속에서 헤맨다는 탄탈로스! 시인은 사서 고생하는 사람들이다.

우리 역시 사서 고생하는 사람들이다.


열두 번째 이야기 시는 그 사람이다 - 기상론


314. ‘문여기인’, 즉 글은 그 사람과 같다고 한다. 무심히 내뱉는 말 속에 그의 인생관이나 처세의 방식이 드러난다. 글을 보면 그 사람을 알 수가 있다.

318. 비슷한 형편에서 같은 의도로 쓴 작품이 어찌 이리 다를까? 그 사람의 그릇이 같지 않은 까닭이다. 인간은 삶의 외형적 조건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렇다고 곤궁에 찌들어 본연의 기상마저 허물어서는 안된다. 한시 비평에서 말하는 기상론이란 바로 시인의 기질과 삶의 자세가 그의 시에 거울처럼 비쳐진다는 생각을 말한다. 그래서 시를 읽으면 만나보지 않고도 그 사람을 알게 된다.

323. 떨어지고 먼 길을 돌아왔는데/처자의 기색이 좋지가 않네/누렁이만 흡사 반갑다는 듯/문 앞에 드러누워 꼬리 흔든다. ... 남편의 과거 급제만 바라보고 그간 온갖 고생을 마다하지 않았는데, 이번에도 또 낙방을 하고 터덜터덜 돌아오는 남편이 곱게 보일리 없다. ... 찬밥 신세이기는 저나 나나 한가지니 동병상련의 연민은 아니었을까.

328. 정약용의 이 연작을 읽노라면 갈증 끝에 청량음료를 마신 듯 체증이 후련하게 내려간다. 이러한 경계는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다. 가슴 속에 독만권서의 온축과 행만리로의 기상을 담고서야 가능하다. 호방하기로는 다시 이런 시는 어떨까.

332. 달리 무슨 사족이 필요하랴. 시는 곧 그사람이다. 알려 해서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시인의 언어가 제 스스로 말해주는 사실이다. 언어가 그 사람의 기상을 대변한다는 것은 그 연원이 깊다. 무심히 뱉은 말이 씨가 되고, 화실이 되어 돌아온다. 시화에 자주 보이는 시참이 바로 이를 말한다. 시인은 모름지기 가슴속에 호연한 기상을 품을 일이다. 떳떳함을 길러야 한다.


열세 번째 이야기 씨가 되는 말 - 시참론


335. 예전 이승만 대통령이 남북통일넉 자를 휘호했다. 기세 좋게 나가던 붓질이 마지막 한 일 자 한 획을 힘차게 가로 긋는 순간 허리가 잘렸다. 잘 나가던 붓끝이 하필이면 한 일 자의 중간에서 두 동강이 났더란 말인가. 사람들이 이를 남북분단의 서참이라고들 했다.

338. 지하에 맺친 한을 녹여줄 한 잔 술이 없고, 인간에 떠난 넋을 되돌릴 한 촉의 향이 없다면, 그는 저승에도 못 가고 인간에도 돌아오지 못한 채 그저 원혼으로 구천을 맴돌아야 할 판이다. 도대체 그는 무슨 마음을 먹고 이런 시를 지었을까?

339. 시에는 그 사람의 기상이 절로 스며든다. 한 구절의 시만 봐도 그 사람의 궁달을 점칠 수가 있다.

341. 늦게 일어난 것은 간밤 시상이 해맑아 새벽까지 잠을 설친 까닭이다. 남창에 해가 들었으니 이미 대낮이다. 기지개를 켜고 아이를 불러 먹을 간다. 깨끗한 종이를 펼쳐놓고, 간밤 고심한 시구들을 정갈하게 옮겨 적는다. 한가로워 구김살이 없다. 그는 수복을 다 누리고안온한 삶을 살다가 갔다.

351. 시의 정조로 보아 권필은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인식하고 있었던 것처럼 여겨진다.

351. 권력 주변에 기생하는 황금의 난무는 더욱 기세가 드세져가고 버들 빛, 곧 유씨의 세도와 권세는 한층 도도해져만 가는 현실에 대한 암유로 읽힌다. 그러한 현실을 앞에 두고 시인은 계절의 아름다움에 몰입하지 못하고 자꾸만 구슬픈 생각에 자조의 나락 속으로 한없이 빨려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며칠 뒤 그는 비명에 죽었다.

353. 곧은 나무는 금세 도끼에 찍혀 재목이 된다. 그 가지를 일부러 구부림은 베임의 화를 면키 위해서였다. 그래도 곧은 성품은 감추지 못해 끝내 지팡이감이 되어 도끼질을 당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대체로 그에게 호라르 피할 것을 경계한 것이다.

355. 말에는 정령이 깃들어 잇다. 입에서 나온다고 다 말이 아니다. 생각없이 되는 대로 쓴 한 편의 시가 어느 날 재앙이 되어 돌아온다. 말 한 마디, 시 한 구절을 삼가지 않을 수 없다. 어이 붓을 함부로 놀리랴.


열네 번째 이야기 놀이하는 인간 잡체시의 세계1


367. 가운데를 접으면 마치 한 마리 나비 모양이다. 일부러 9자구를 생략하여 나비 날개의 가운데 부분을 형상화했다. 시를 희화적 형상으로 나타내려는 시도는 독일 등 외국의 경우에서도 흔히 발견된다.

368. 한시 가운데 회문시라는 것이 있다. 내리읽으나 치읽으나 의미가 통하는 형식의 시체를 말한다. 그러면서도 평측이나 압운이 흐트러져서는 안 되므로 그 제한이 몹시 까다롭다. 가장 일반적인 회문시는 바로 읽어도 되고 거꾸로 읽어도 되는 작품을 말한다.

370. 운자를 앞뒤로 맟춰야 하고, 의미도 거꾸러 읽을 때를 대비해야하니 제약이 이반저만이 아니다. 그런데도 시상의 전개가 자연스럽고, 앞뒤로 읽어 어느 것 하나 부자연스러운 구석이 없다.

380. 작가는 아무 글자로 시작해도 괜찮고 어느 방향으로 읽어도 좋다고 주를 달아놓았다. 이 밖에 한 글자나 두 글자, 세글자씩 건너뛰어 읽거나, 7언 또는 장단구로 읽을 수도 있다.

381. 이런저런 방법으로 읽어 단 스무 글자로 만들어낼 수 있는 시의 조합이 놀랍게도 각 체를 망라하여 무려 1,000수가 넘는다고 한다. 한마디로 어안이 벙벙하다.

382. 잡체시 중에도 글자 모양으로 장난을 친 시가 있다. 보통 머리로는 알 수가 없어 신지체라고 부른다.


열다섯 번째 이야기 실험정신과 퍼즐풀기 잡체시의 세계2


390. 숫자가 1에서 10에 그치지 않고, ,,,,조까지 확대되었다. 당시 친일단체 일진회의 매국 행태를 신랄하게 풍자했다. 숫자가 하나씩 늘어나면서 시상의 전개도 고조된다. 창작상 장난기를 수반해도 문면은 서슬 푸르다. 바로 이러한 태도 속에 잡체시의 매력이 있다.

390. 춘하추동 네 글자를 넣으면 사시시가 되고, 약초의 이름을 매 구절마다 채워 넣으면 약명체가 된다. 별자리의 이름을 넣어 성명체라 하고, <주역>의 괘명을 넣어 괘명체가 된다.

393. 각 구절마다 각각 반하, 인언, 당귀, 전호 등의 약초 이름을 슬며시 끼워 넣었다. 다른 암시적 의미는 없다. 시인의 설명에 따르면 제술관으로 중국 사신을 접대하는 행사에 참여했는데, 큰 병을 앓은 뒤끝이라 사람들이 자신의 건강을 많이들 걱정했다. 약방문에 人言이란 약초가 있어 장난 삼아 지었다는 시다. ‘인언비상의 별칭이다. 극독을 지녀 소량만 약재로 쓴다. 시 속의 약제들은 모두 담이나 감기 따위의 치료제로 쓰는 것들이다. 당시 그는 몸이 허해 기침 감기를 심하게 앓았던 모양이다. 사람의 말에 극독이 있다고 한 것도 흥미롭다.

409. 이 밖에도 기묘한 잡체시는 수도 없이 많다. 이런 시들 속에는 그 어려운 한자를 마치 떡 주무르듯 제멋대로 가지고 놀았던 옛 시인들의 풍류가 거나하다. 장난은 장인이되 격조를 잃는 법이 없었다. 얼마나 많은 습작의 과정을 거쳤으면 언어를 이처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었을까. 언어늘 매만지는 장인의 근성이 이런 잡체시를 낳았다.

409. 오늘날 잡체시가 던지는 의미는 무엇일까? 언어의 부단한 실험정신, 질곡을 만들어 놓고 그 질곡에서 벗어나기, 언어의 절묘한 직조가 보여주는 즐거움 외에도 잡체시는 오늘의 시단에 의미 있는 시사를 준다. 젊은 시인들이 실험하고 있는 각종의 형태시들은 기실 우리가 까맣게 잊고 있던 전통의 재현일 뿐이다. 세상을 돌고 돈다. 이 모든 현상들 앞에서 우리는 수없는 상호 텍스트화를 되풀이하고 있을 뿐이다.


                                       열여섯 번째 이야기 말장난의 행간 한시의 쌍관의


419. “무릇 대구는 정밀함을 귀히 여기는 법, 기일이 늦은 것쯤이야 무슨 상관이리오. 또한 천 리를 멀다 않고 와서 알려주니 이 더욱 기이하고 기이한 인연입니다.” 한 구절의 시구 때문에 천릿길을 오간 미담도 미담이려니와 시구 하나로도 상대를 기선 제압하려는 미묘한 경쟁이 재미있다. 쌍관의 묘미를 활용한 멋들어진 응수도 절묘하다.

미담보다는 이색의 무서움과 자존심을 엿볼수 있다. 그런 것이 오늘날의 이색을 있게 한 부분일 것이다.

422. 설명을 듣고서야 위 시가 왜 시답지 않았는지 알게 된다. 겉으로 드러난 진술은 의도를 감추기 위한 사탕발림이다. 표면적 의미에만 집착해서는 이 시의 의미가 드러나지 않는다. 표면 진술과 실질 의미 사이에 의도적인 괴리가 조성되어 있어 언어적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독자의 연상능력을 자극하여 말장난을 깨닫게 유도함으로써 지적 쾌감을 제공하는 경우이다.

423. 앞서 본 예화들은 모두 말장난에 불과하지만, 언어를 구사하는 재치와 기지가 반짝인다. 시와 말장난은 엄격히 다르지만, 언어를 주된 질료로 삼는 시는 본질적으로 얼마간 유희적 기분을 띠게 마련이다. 특히 음이 같은 말이나 뜻이 여럿인 표현을 활용한 쌍관, 즉 말장난은 현대시에서도 흔히 보는 기교다. 말장난은 한시에도 빈번하게 애용되었다.

424. 범증이 앞서 옥격을 세 번씩이나 들어 보인 것은 무슨 뜻이었을까. ‘과 음이 같다. 어서 결단을 내려 유방을 죽이라고 신호한 것이다. 뒷날 항우는 유방의 사면초가 포위에 걸려 제 칼로 목을 찔러 자살하고 말았다.

424. 이렇듯 을 나타내고, ‘으로 을 전달하는 것은 한자의 동음사를 활용하여 쌍관의를 나타낸 예이다.

430. 시인의 독법은 평생을 따라다닌 비방과 시비를 떠올리면 다른 설명이 필요없다. 쌍관의는 이처럼 시의 함축미를 효과적으로 높여주는 매우 유용한 수단이다.

436. 그런데 예전부터 모란꽃을 그릴 때에는 나비를 함께 그리지 않았다. 모란은 부귀를 상징하고 나비는 여든 살 늙은이를 나타낸다. 모란에 나비를 함께 그리면 여든 살이 되도록 부귀를 누린다는 것으로 의미가 제한되어버린다. 나비는 왜 여든 살 늙은이가 되는가? 나비 자의 중국 음은 디에die’인데, 여든 살 늙은이 자의 발음이 또한 같아 서로 쌍관된 것이다.

<삼국유사>의 고운기에게 알려줘야겠네. 많은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는 부분이네. 그런데 모란과 나비를 왜 안 그렸을까. 옛날에 여든 살이면 엄청 오래 산 것인데 부귀와 오래 삶의 좋은 의미 아닌가.

436. 욱일충천하던 대제국의 제왕이 변방의 조그만 나라 신라의 여왕이 시집가고 안 가고에 무슨 관심이 있었겠는가? 그저 모란꽃 그림으로 귀국의 부귀영화를 바란다는 의례적 인사를 보내온 것이었는데 재지가 넘쳐흘렀던 여왕은 자격지심에 그만 오버센스를 하고 말았던 것이다.

438. 적어도 모란꽃 그림에 굳이 나비를 그려 넣어 여든 살 먹도록 시집도 안 가고 잘 먹고 잘 사기를 바란다는 식의 격조 없는 농담을 할 당 태종은 아니었을 줄로 안다. 단지 쌍관의 원리로 전개되는 독화의 원리를 몰랐던 듯하다.

하긴 당 태종의 입장에서 보면 모란꽃만 해도 충분했을 것이다.

440. 이 그림을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 기쁜 소식을 알린다는 송구영신, 신년보희의 의미로 읽어야 하는 까닭이다.

440. 이렇게 보면 시뿐 아니라 그림에서도 쌍관이 독화의 핵심원리로 작동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442. 사물에 언어를 결합하여 쌍관할 줄 알았던 선인들의 예술정신이 낳은 상징의 함축을 잘 보여준다. 갑오년 동학혁명 당시를 노래하고 있는 민요 갑오세甲午歲, 가보세, 을미적乙未賊을미적과 같은 예도 모두 쌍관의의 활용이 돋보이는 예에 해당한다. 언어 예술로서 詩歌 언어가 이러한 유희적 성분을 갖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것은 시가 예술 위에 신선한 호흡과 생동하는 활기를 불어넣어준다. 시인이 문자 유희에 빠져서는 안 되겠지만, 그러한 유희 속에 뜻밖에 드러나는 언어의 발랄한 생기를 일부러 멀리할 일은 더더욱 아니다.


열입곱 번째 이야기 해체의 시학 파격시의 세계


448. 거들먹거리는 서울 것을 압도할 만큼의 시제를 지녔으면서도 정작 시골내기는 청운의 벼슬길에 명함 한번 내밀어보지 못했다. 오히려 전전하는 여관마다 천덕꾸러기 신세였을 뿐이다. 모처럼 서울 것 하나가 제대로 걸려 분풀이는 했지만, 뒷맛은 여전히 씁쓸하다.

452. 형식미의 굳건함을 고수하던 전통 한시의 대해 풍자와 해학의 효과를 발휘하기에 충분하다. 내용의 희화화뿐 아니라 형식도 함께 무너지는 조짐을 보인다.

452. 희작시의 특징은 파격과 해학, 민중성과 익명성으로 대표된다. 특정 작가가 없을 뿐 아니라, 있다 해도 별 의미가 없다. 희작시는 기존 한시의 문법을 과감히 깨뜨린다. 소재도 사설시조가 평시조에 대해 그랬듯이 비시적 대상을 시의 소재로 적극 끌어 들인다. 또한 그럴 듯한 표면 진술로 사탕발림을 해놓고, 이면에서 풍자와 해학을 겨냥하는 언문풍월도 다양하게 발달했다. 전통 한시의 기준에서 본다면 이들 희작의 파격시들은 시랄 것도 없는 장난에 불과하다. 도대체 점잖은 선비가 할 짓이 못 된다. 시시덕거리고 키득키득대는 정서에 더 가깝다.

458. 김삿갓이 간 적 없는 제주도에서까지 제보가 여럿 있었다. 김삿갓의 시는 앞으로도 계속 늘어날 전망이다. 종내는 조선조의 모든 희작시가 김삿갓의 이름 아래 야권통합을 이루고야 말 모양이다.

458. 김준오는 자신의 저서 <도시시와 해체시>에서 이렇게 말했다. “절대적 진리도, 선도 없다는 해체주의는 세상일에 집착하지 않는 일종의 허무주의다. 왜곡된 현실을 왜곡되게 표현하는 해체시에서 온갖 비속어, 욕설 등이 서슴없이 구사되는 언어의 테러리즘을 보게된다. 해체시의 어조는 진지하지 않고 너무 유희적이고 거칠다.” “ 해체주의는 자명한 이치와 질서와 도덕을 근본적으로 회의한다. 세계를 가변적이고 일상적이며 부조리한 것으로 인식한다. 자아도 더는 일관되게 세계와교섭하고 대결하는 심리적 통일체나 종합적 기능으로 보지 않는다. 그래서 해체시는 무질서한 세계를, 파편화된 세계를 그대로 수용한다.”

462. 우스운 것 앞에서 뜻밖에 진지해지고, 진지한 것을 단번에 희화화해버리는 시인의 희극적 태도는 한마디오 세상을 우습게 보는 태도에서 출발한다.

464. 해체시가 온갖 추악함과 모순으로 가득 찬 세계를 비정하게 들춰낼 뿐 판단하지 않은 것과 사뭇 같은 태도다.

465. 대체로 김삿갓의 장난 시를 읽을 때마다 필자가 느끼는 감정은 서글픔과 씁쓸함이다. 경국제세의 포부를 품고 배우고 익힌 학문과 지식을 고작 이깟 희학질에 썻더란 말인가? 그인들 이런 시를 짓고 싶었겠는가. 그에게 이런 장난질에 몰두하게끔 강요한 현실이 역으로 희대의 민중시인을 낳았다는 사실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465. 김삿갓의 시정신은 당대 조선 사회가 처했던 제반 역사 환경의 변모에 의해 안받침되어 사회적 성격을 부여받는다. 시는 그 사회를 비추는 거울인 까닭이다.

467. 김삿갓이 장난질의 와중에 그 많은 과체시를 남겼다면, 그속에 담긴 뜻은 무엇이었을까? 나도 마음만 먹으면 체제가 요구하는 교과서적인 시 쓰기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항의가 아니었을까? 어쨌든 그의 웃음은 슬프다. 슬픈 웃음의 뒤안길은 외면한 채, 자꾸 가십적인 살을 부텨 그를 봉이 김선달류의 비천한 재담가로 만드는 것은 사람들의 악취미다.

467. 이러한 희작시들은 전통적 미학과 기존 가치의 규범을 과감히 해체한다. 언어가 힘을 잃은 시대의 표정을 맨 얼굴로 전달한다. 욕설과 비아냥거림, 딴전과 엇박자 등 시의 문법을 파괴하는 폭력이 난무한다. 이들은 형식을 파괴하며 가치를 재배치한다.

472. 의식의 변화는 내용의 변모를 부른다. 내용만으로 의식의 변화를 담아내지 못할 때 형식이 변한다. 기존 한시의 굳건한 문법은 개화기의 발랄한 실험정신 아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해체의 양식들을 선보였다. 다만 그것이 치열한 시정신에 의해 안받침되지 못한 결과 새로운 형식들은 일과성의 장난기에 그치고 말았다. 하지만 이러한 실험들이 시사하는 의미는 대단히 심장하다.

472. 오늘의 시단에서도 새로운 담론과 말하기 방식에 대한 모색은 활발하게 계속된다. 기존 언어에 대한 회의와 불신의 벽을 허물고, 새로운 시의 문법을 찾아 나서려는 노력도 힘차다. 그러나 새로운 말하기가 강렬한 실험적 의도를 가졌음에도 시대정신이나 시정신에 의해 안받침되지 않는다면 이 또한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잡체시나 파격시가 오늘의 시단에 던지는 의미는 여전히 생생하다.


열여덟 번째 이야기 바라봄의 시학 - 관물론


475. 지렁이의 머리는 어느쪽인가? 해를 피해 나아가는 쪽이다. 배는 어느쪽인가? 바닥에 닿는 쪽이다. 성호 이익의 <관물편>에 보인다. 성호의 관찰은 한 단계 더 나아간다. 칠규, 오장을 갖추지 못한 지러잉도 제 몸의 해를 피해 이로움을 향해 나아갈 줄 안다. 그런데 사람 중에는 패망이 뻔히 보이는데도 눈 뜨고 그 길을 가서 제 몸을 망치고 일을 그르치는 이가 있다. 지렁이만도 못하다.

관찰의 힘, 사색의 힘 얼마나 큰 것인지를

476. 물고기와 인간은 어떻게 다른가? 희로애락의 감정은 물고기도 있다. 편안함을 기뻐하고, 눈앞의 이익을 탐하며, 강한 적을 두려워한다. 물고기에게 인의예지가 있는가? 염치와 부끄러움, 사양할 줄 아는 마음이 있는가? 없다. 이것이 인간과 물고기를 갈라놓는 기준이다.

477. 열흘 넘게 굶은 거위는 탐욕을 버리는 대신 자신을 잘 지켰다. 먹어서는 안 될 음식을 많이 먹고 뚱뚱해져 날지도 못하는, 그러고도 그 맛에 길들어 살을 찌우다 마침내 제 몸을 망치는 인간 거위들은 세상에 또 얼마나 많은가.

478. 개구리는 벼랑에 매달린 거미를 노리고, 뱀은 개구리를 향해 간다. 거미는 또한 제 그물에 걸릴 벌레를 기다린다. 세상 이치가 참 묘하다.

479. <관물편>은 이익이 안산에 살면서 생활 주변에서 사물을 관찰하며 느낀 단상을 77항목을 걸쳐 그때그때 기록한 것이다. 주변 사물에 대한 면밀한 관찰을 통해 그 사물들에 담겨 있는 이치를 캐어 이를 현실의 삶과 연관 짓는 실학적 사고가 담겨 있다. 사물을 살펴 지혜를 얻는 격물치지 정신의 실천이었다.

한번 해봤는데 쉽지 않다. 지속적으로 하기가 어렵다. 꾸준함이 결국 이긴다.

486. 사물의 겉모습에 현혹되지 않고, 마음으로 보고 이치로 살펴 사물의 본질에 깊이 다가서는 통찰의 경로를 설명한 내용이다. 옛 글속에서 이처럼 관물의 의미를 곱씹고 있는 내용이 적지 않다.

487. 만물은 일정함 없이 형세에 따라 이리 변하고 저리 변한다. 덩달아 마음마저 이리저리 옮겨 다니면 사람이 못 쓰게 된다. 마음의 본바탕을 굳게 지켜 거죽으로 드러나는 형상에 현혹되는 일이 없어야겠다. 위엄으로 누르고 덕으로 향기를 뿜어 일체의 작위함을 벗어던진다. 말을 잊고 이끼 가득한 작은 뜰을 관찰한다. 누가 심은 것도 아닌데 저절로 마당을 덮은 이끼. 내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작용도 다를게 없다.

488. 결국 마음 공부는 언뜻 보아 다른 듯이 보이는 현상 속에 내재된 한 가지 이치를 수시로 자가 점검함으로써 외물에 현혹되지 않는 힘을 기르는 것이다.

491. 만물 속에 답이 있다. 고요히 바라보라. 마음이 늘 문제다. 외물에 끌려다니면 안 된다. 가만히 응시하면 물이 흐르고 꽃이 핀다. 솔개가 날고 물고기가 뛴다. 하나도 모를 것이 없다. 명징하고 투명하다.

495. 진정한 의미에서 무아지경의 시는 없다. 무아지경이라고 해서 시인의 주관 정취는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시학상의 무아지경은 시인의 정신이 사물로 녹아들어 물아의 구분이 사라지고, 마침내 자신을 잠시 잊어버린 것에 불과하다. 이른바 마음이 엉기고 형상이 녹아든 심응형석의 경계다.

499. 깨달음이 없이는 우리 모두는 눈뜬장님일 뿐이다. 눈을 뜨고 있다고 다 볼수 있는 것이 아니다. 보려 한다고 보이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깨달음은 결코 거저 얻어지지 않는다. 사물을 바라보는 눈은 아무렇게나 열리지 않는다. 손끝이 갈라지는 연습 없이, 그저 기타들고 동해 바닷가에 서 있다고 훌륭한 연주자가 되는 법은 어디에도 없다. 하지만 깨닫는 순간 모든 것은 순식간에 변해버린다. 차원이 달라진다. 속인과 달사의 경계는 종이 한 장 차이이지만, 실제로는 하늘과 땅 차이다.

499. 관물론은 사물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의 문제는 귀결된다. 어떻게 볼 것인가? 무엇을 읽을 것인가? 누구나 보고 있지만 못 보는 사실, 늘 마주치면서도 그저 지나치는 일상 사물에 담긴 의미를 읽을 수 있어야 한다. 익숙한 사물과 낯설게 만나, 그 낯섦으로 그 사물을 새롭게 만나는 것, 이것이 관물론이 시학과 만나는 접점이다. 시인은 격물 또는 관물의 정신에서 한 발짝도 물러서서는 안된다. 그래야만 주변 사물이 끊임없이 발신하는 의미를 깨어 만날 수 있다. 히드라의 예민한 촉수와 같이 안테나를 세워 세계와 교신할 수 있어야 한다. 탄성계수를 유지하지 못하는 관물은 관물이 아니다. 그것은 견물일 뿐이다. 여기에 무슨 생의로움이 있겠는가. 눈앞 사물과의 설레는 만남, 세계와 줄다리기하는 팽팽한 긴장이 없이 좋은 시는 결코 이루어지니 않는다. 시인은 반란자다. 그의 눈이 포착하는 모든 것은 언제나 새롭다.


열아홉 번째 이야기 깨달음의 바다 - 선시


504. 선가의 깨달음은 미묘하여 말로 세워 전할 수 없다. 초조달마가 동쪽으로 건너와 말로도 세울수 없고 가르침으로도 전할 수 없는 교외별전, 불립문자, 직지인심, 견성성불의 법을 전한 이래, 새로운 사유의 방식을 제시한 선풍이 중국에 크게 떨쳤다.

504. 선은 분별지를 마음에서 걷어내는 것이다. 명상, 즉 생각을 잠재우고, 묵상, 곧 생각을 침묵시키는 것이다. 그때 남는 것은 마음 뿐이다. 선은 마음을 텅 비워 본래의 나와 만나는 순간이다. 명상이란 뜻을 지닌 범어의 ‘Dhyana’를 선으로 옮겼다. 정려 또는 사유수로도 옮긴다. 다시 말해 선은 생각을 걷어내는 마음공부다. 근심과 기쁨을 마음에서 걷어내는 것이 바로 선이다.

하라리도 이 선, 즉 명상으로 많은 답을 얻는다고 했다. 해 볼만한 것이다. 마음에 욕심이 많은 나는

505. 감도 없고 옴도 없다. 텅 비었고 꽉 찼다. 나는 누군가? 너는 누구냐!

506. 선의 경지는 사변의 길로는 다다를 수가 없다. 말을 떠나고 생각이 끊긴 곳에서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 그 세상을 어찌 말로 설명할 수 있을까? 그래도 인간은 언어를 떠나서는 살 수가 없으니, 이언절려를 말하고 불립문자를 말하면서도 언어에 기댈 수 밖에 없다. 말의 길로는 다다를 수 없는 언어도단의 세계를 말로 설명하려 드니, 선에는 자다가 봉창 뜯는 소리가 자주 보인다.

508. 이렇듯 말 같지 않은 소리만 골라서 하는 까닭은 단 하나다. 따지지 말라는 것이다. 머리로 따져 알려 들지 말고 가슴으로 느껴 지지인심 견성성불하라는 말이다.

510. 하지만 깜깜한 세상에 등불을 밝히는 연꽃이 피어나는 그 소리만큼은 번개가 소뿔을 물어뜯뜻이 웅장하다. 이런 것이 선의 세계다.

510. 그는 제자인 야규 미쓰요시에게 검술에 대한 충고의 말을 남겼다. 핵심은 마음을 항상 흐르는상태로 유지하라는 것이었다. 진정한 검술은 의식적으로 얻어진 기교를 넘어선다. 높은 경지의 검객은 자신이나 적의 검의 움직임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다만 무의식의 명령에 몸을 맡긴다. 검을 휘두르는 것은 이제 그가 아니다. 실제 어떤 검객들은 적을 쓰러뜨리고 나서도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 항상 흐르는상태로 마음을 유지하라. 흘러가는 상태에 자신의 정신을 얹으라.

515. 인생은 물거품이요 한바탕 봄꿈이다. 성가신 가죽 부대를 벗어던지니 속이 다 후련하다. 그 뒤엔 무엇이 남는가. 붉은 해가 서산에 진다. 슬프고 안타까울 일이 하나도 없다. 이렇듯 선시의 세계는 칼끝 같은 깨달음을 노래한다. 언어가 무력화되고 의미가 힘을 잃는다.

517. 선시가 선승의 전유뮬이란 생각은 큰 잘못이다. 선시는 하나의 사고방식이기도 하다. 불교가 있기 전에는 선시도 있었고, 불교를 믿지 않아도 선시를 쓸 수 있다.

517. 상추꽃 핀 아침 / 자벌레가 기어가는 지구 안쪽이 자꾸만 간지럽다.

이 놀라운 깨달음 앞에 세계는 한 순간 어안이 벙벙해진다. 앞선 선승들의 자취와 방불치 아니한가.

가운데 마음을 흐르게 하는 일, 선은 시인에게 이러한 심법을 일깨워준다.

518. 시가 선과 만나 선시가 된다. 시가 선의 경지에 이르면 시선이다. 시와 선은 어떤 공통점이 있기에 자주 한자리에서 거론되는가? 역대로 시와 선을 나란히 놓고 설명하는 논의는 다 소개할 수 없을만큼 많다.

519. 선과 시는 애초에 길이 다르다. 선이 시가 아니고, 시도 선은 아니다. 하지만 닮았다. 방법이 흡사하다. 선이면서 선이 없어야 시라는 말은, 선의 방법을 빌려 오되 선에 함몰되지 말라는 말이다. 시이되 시를 벗어나야 선이란 말은, 어쩔수 없이 시를 빌려도 시가 선일 수는 없음을 명백히 깨달으라는 주문이다.

519. 물에 녹은 소름은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마셔보면 금방 알 수 있다. 눈에는 안 보이지만 분명히 있다. 꼭 꼬집어 말하지는 않았어도 아주 또렷하다. 시와 선은 이렇게도 만난다.

520. 학시와 학선은 원리가 같다. 누가 오래 시를 썼고, 누가 더 도를 닦았느냐는 조금도 중요하지가 않다. 시쳇말로 짬밥수를 따지지 말라는 뜻이다. 중요한 것은 자가의 요득, 즉 한 소식을 깨쳤느냐 깨치지 못했느냐에 달렸다. 깨닫고 나면 그 다음부터는 거칠 것이 없다. 그냥 되는 대로 읊조려도 절창 아닌 것이 없고,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이 부처님의 설범이 아닌 것이 없다.

523. 깨달음 없는 참선은 공연히 제 몸을 들볶는 짓이다. 깨달음이 없는 시는 말장난에 불과하다. 심장을 토해내고 폐부를 도려내는 고심참담도 좋지만, 깨달음은 원래 없는 것을 쥐어짜는 조탁과는 관계가 없다. 옛사람의 길을 따르지 말라. 너는 너의 길로, 나는 나의 길로 선에 도달하고 시를 깨달을 뿐이다. 남의 흉내로는 안 된다. 안목 없는 세상은 자꾸만 옛길을 따라오라고 요구한다. 이렇게 쓰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강요한다. 은 시는 끊임없는 반란의 산물이어야 한다. 친숙한 관습과의 결별, 익숙해진 접점에서 벗어나기를 쉼없이 추구해야 한다.

익숙한 것과의 결별. 중요하다.

528. 시와 선이 하나로 만나 선시가 된다. 절묘한 결합인 셈이다. 선시의 언어는 직관의 언어다. 의미를 해체하고, 사물로 말한다. 풍경으로 보여주고 설명하려 들지 않는다. 직관의 언어는 무책임하다. 친절하기는커녕 때로 소통 자체를 거부한다. 선시는 종종 오해되고 있다. 그저 말이 안 되는 뚱딴짓소리만 선시로 말해서는 안된다. 승려가 지은 시를 모두 선시라 할 수도 없다.

528. 선의 화두가 그러하듯이, 좋은 시는 타성에 젖은 뒤통수를 후려친다. 그러고 보면 문자로도 세울 수 없는 깨달음은 큰 깨달음이랄수도 없겠다. 고려 때 혜심의 설날 법어에 이런 것이 있다. “아이는 한 살 더 먹기를 바라고, 늙은이는 한 살 더 줄기를 바랄 것이다. 누가 한 해라는 시간을 정해 놓았더냐. 차라리 한 해라는 시간을 없애버림은 어떨꼬?” 통쾌하지 않은가.

내 나이는 29살에 멈춘지 오래다. 하지만 몸은 그렇지 않다. 정신은 자신있는데 육체는....


스무 번째 이야기 산과 물의 깊은 뜻 산수시


531. 고려말 현실을 외면하고 강호에 묻혀 살며 고고함을 뽐내던 사이비 어부, 즉 속류 은사들을 신랄하게 풍자한 것이다. 목은, 도은, 포은, 둔촌 등 당시 유명 인사들의 호에서도 알 수 있듯, 격동하는 현실 앞에서 은둔의 풍조가 만연하였다. 뜻있는 이들이 모두 저만 좋자고 강호로 들어가 버리면, 정작 현실의 질곡은 누가 감당하고, 도탄에 빠진 백성은 누가 건진단 말인가.

534. 산정에 선 시인은 그러한 번뇌와 시름을 훌훌 벗고 정처도 없고 집착도 없는 구름의 마음이 되었던 것이다.

536. 속객의 자취가 끊어진 곳을 속객이 홀로 찾았다. 시야가 툭 터진 산마루에 올라서니 함께 짊어지고 온 속된 생각도 말끔히 씻긴다.

536. 어둠 속을 홀로 미끄러지듯 경쾌하게 떠가는 돛단배, 얽매이고 집착하며 아옹다옹하던 속세에서는 생각지도 못한 정경들이다. 그제야 시인은 공명에 얽매여 시비를 다투고 영욕에 집착하던 지난 삶이 얼마나 구차하고 부끄러운 것이었는지 새삼 깨닫는다. 돌아보면 그것은 달팽이 뿔 위의 알량한 싸움에 지나지 않았다.

537. 이렇듯 자연은 우리에게 떳떳한 삶의 모습을 일깨워준다. 일상에 찌들어 생기를 잃고 풀이 죽어 있을 때, 자연은 인간에게 소생의 원기를 불어넣어준다 양의 동서를 막론하고, 때의 고금을 떠나서 자연이 예술의 변함없는 경배의 대상이 되어온 것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우리가 여행이든, 운동이든 어떠한 형태로 자연을 찾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537. 부귀의 즐거움이 있고 산림의 즐거움이 있다. 이 두 가지를 함께 할 수 없을 때는 어느 것을 선택해야 할까?

산림의 즐거움을 만끽하고 얻고 다음에 하산하여 부귀를 쌓을 것이다. 마치 가난을 알고 부자가 되는 것과 그냥 부자가 되는 것은 차이가 있듯이.

538. 주자는 공자의 이 말을 이렇게 풀었다. “지혜로운 사람은 사리에 통달하여 두루 통해 막힘 없는 것이 물과 같으므로 물을 좋아한다. 어진 사람은 의리에 편안하여 중후하여 옮기지 않는 것이 산과 같기에 산을 좋아한다.”

539. 노자도 <도덕경>에서 상선약수라 하여 으뜸가는 선을 물에 견준 일이 있다. 물은 언제나 낮고 더러운 곳에 처하면서 만물을 이롭게 한다. 노자는 물에서 유약겸하의 교훈을 읽어, 처세훈의 요체로 삼았다.

유약겸하: 부드럽고 유연하며 겸손하게 낮추는 것이 강한 것을 이긴다

539. 온갖 만물을 기르면서 싫증내지 아니하고, 사방에서 모두 취해가도 못하게 하는 법이 없다. 구름과 바람이 일어나 천지 사이의 기운을 소통시켜 나라를 이룬다. 이것이 어진 사람이 산을 좋아하는 까닭이다.

541. 산이 나오고 물이 나온다고 다 산수시가 아니다. 산수와 인간이 만나 나누는 교감이 있어야 한다. 산수를 내 편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산수 쪽으로 향해 가서 어느덧 물아의 경계를 허물고 하나가 되는 동화가 있어야 한다.

543. 날마다 산기슭 정자에 앉아 산을 보며 나는 산을 닮아간다. 산을 종으로 유비하여 바라본 발상도 재치있거니와, 선비의 의연한 마음가짐이 범접할 수 없는 기상으로 압도해온다.

549. 정지용의 <인동차>이다. 책력도 없는 산중에 삼동이 깊다. 자작나무 덩그럭 불에 인동차가 끓는다. 윗목 그늘엔 무 순이 새로 돋고 눈보라 소리도 멎었다. 흰 겨울에 노주인의 장벽을 타고 찻물이 내려간다. 매월당의 시 다음에 얹어 읽으면 좋을 법하다.


스물한 번째 이야기 실낙원의 비가 - 유선시


557. 인간에 낙원은 있는가? 낙원은 없다. 따지고 보면 인생은 절망과 비탄의 연속일 뿐이다. 믿었던 것들로부터 배반당하고, 사랑하던 사람마저 하나 둘 떠나보낸 후 빈 들녘을 혼자 헤매는 것이 우리네 삶이다. 뒤돌아보면 뜻대로 된 일은 하나도 없다.

559. 그들이 흘리는 눈물은 눈앞의 상황에 매여 일회일비하는 가벼운 슬픔이 아니다. 중국의 미학자 이택후가 위대한 고독감이라는 헌사를 바친 이런 시들에는 인생을 향한 깊은 관조와 달관이 있다. 비분강개 속에 인생의 갖은 신산을 겪으면서 오히려 이들은 인생을 더 깊이 바라보는 중후함을 얻은 듯하다.

559. 현실의 억압은 개체의 삶을 질식시킨다. 인간은 닫힌 세계 속에서 끊임없이 반란을 꿈꾼다.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세계, 어떤 갈등도 없으며 모든 것이 조화롭고 충만한 세계는 어디에 있는가? 인생은 그렇듯이 슬프고, 인간은 그렇듯이 나약한 존재인가? 삶의 짙은 회의 속에서 시인들은 무의식의 저편에 저장된 언젠가 떠나온 곳, 잃어버린 낙원의 기억들을 떠올린다. 그것은 모든 것이 완벽한 꿈의 세계입니다. 유선시는 고대인이 꿈꾼 상상의 세계를 노래한다.

566. 선계의 형상은 현실에서의 억압이 투사되어 열린 세계로의 비상을 꿈꾼 결과다. 꿈은 무의식의 세계이다. 인간의 의식이 한계에 도달할 때 무의식이 열린다. 무의식의 세계는 원초적 상징들로 가득 차 있다. 상징은 좌절되었던 본능적 충동을 만족시키려는 욕구와 관련된다. 이러한 상징들은 꿈을 통해 신비한 세계를 열어보임으로써 현실에서의 상처받고 왜소해진 자아의 의식을 확장시키고 소생시켜준다.

567. ‘구운은 아홉 가지 영롱한 빛깔의 구름을 뜻한다. 신선이 거처하는 장소의 의미로도 쓴다. ... 구운몽은 신선 세계를 향한 꿈을 노래한 작품이다.

571. 이러한 관념의 밑바닥에는 개인의 힘의 한계를 훨씬 웃도는 현실에 대한 우울한 비관주의가 가라앉아 있다. 스스로를 적선을 생각할 때 유선 행위는 언젠가 자신이 속해 있었던 잃어버린 낙원, 또는 본향으로의 귀환이며, 동시에 불완전한 현재에서 완전했던 과거로의 회귀라는 성격을 띤다.

576. 선계로의 비상은 이카로스의 날개를 연상시킨다. 그리스로마 신화에 나오는 그는, 날개를 만들어 태양 가까이까지 날아올랐다가 날개가 녹아 떨어져 죽었다. 한계를 초월코자 하는 비상의 욕구는 결국 죽음의 징벌을 부르고 말았다. 초월의 소망을 담은 유선의 행위가 현실의 새로운 비전과 연결되지 못한다고 해서 선계를 향한 꿈 자체를 배격할 필요는 없다. 실현될 수 없다 해서 더 나은 삶을 향한 열망이 배격되어야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삶의 절망이요 공포가 아닐 수 없다.

576. 유선시는 중세적 꿈꾸기의 산물이다. 이러한 꿈꾸기는 허망한 몽상이나 환상이 아니다. “문학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사회는 꿈을 꿀 수가 있다. 문학이 다만 실천의 도구일 때, 사회는 꿈을 꿀 자리를 잃어버린다. 꿈이 없을 때 사회 개조는 있을 수 없다.” 김현의 이말은 바로 유선시에서 중세적 꿈꾸기가 갖는 의미를 매우 상징적으로 드러내 보여준다. 우리의 혈관 속에 내재한 원초적 상징들을 까맣게 잊고 있던 그 기호들을 유선시는 우리에게 일깨워준다.


스물두 번째 이야기 시와 역사 시사와 사시


583. 이들 시는 임진왜란 당시 한양성을 빠져나간 피난민들의 삶을 생생하게 증언한다. 이럴 때 시는 당당히 역사가 된다.

583. 시는 시대를 비추는 거울이다. 시의 거울에는 그 시대 사람들의 바람과 애환이 그대로 떠오른다. 한 편의 시는 방대한 사료로 재구성한 어떤 역사보다 더 생생하다. 사람들은 이를 일러 詩史라 한다.

583. 시사는 시로 쓴 역사란 뜻이다. 역사를 소재로 시를 썼다는 말이 아니라, 앞서 본 이안눌의 시처럼 시인이 직접 보고 들은 당시의 일을 시로 기록해둔 것이 뒷날 사료적 가치를 지니게 됨을 두고 하는 말이다. 시를 읽으면 그 시대가 눈앞의 일처럼 생생하게 펼쳐진다. 굳이 역사책을 뒤질 것 없이 한 편의 시를 읽는 것이 더 낫다.

587. 백골징포는 죽은 사람의 사망신고를 받아주지 않고, 산사람에게 청구하듯 군포를 곟속 받는 것이다. 황구첨정은 출생신고를 갓 마친 아이에게 징집통지서를 보내는 것이다. 눈도 뜨지 못한 핏덩이더러 빨리 입대하든지 군포를 내라고 야료를 부린다. .... 눈이 뒤집힌 가장은 칼을 뽑아 이정을 찌르지도 못하고 애꿎은 자신의 남근을 자르고 말았던 것이다.

587. 어쨌든 삼정의 문란을 말할 때 당시 증명하는 어떤 통계수치보다도 우리는 이 <애절양>한 편을 통해 그 시대 백성의 절규를 실감으로 듣는다. 시는 이렇게 역사가 된다.

592. 변새시는 당시 전쟁터의 스산한 분위기와 끝없이 계속되는 정복 전쟁에서 지친 고통스런 신음소리가 천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생생하게 살아 있다. 그래서 시는 그 시대를 비추는 거울이 된다.

597. 시가 세교에 보탬이 된다는 말은 그 내용의 감계를 두고 이르는 말이다. 때로 시는 이렇듯 한 시대를 증언하는 비망록이 되기도 한다.

601. 역사는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돈다. 누가 역사의 교훈을 외면할 수 있으랴. 시인들이 지나간 역사의 거울에 현재를 비춰보는 것은 이 때문이다. 옛 문집에는 영사시가 으레 몇 수쯤 실려 있다.

601. 사시 또는 영사시는 역사적 사실을 주제로 쓴 시다. 차고술금, 옛 일을 끌어와 지금을 말하는 것은 한시의 오랜 관습이다. 시인은 맥없이 옛일을 들추지 않는다. 그들은 과거 속에서 현재를 바라보는 우회 통로를 찾고 있다.

602. “부르주아적 근성에 철저히 물든 정철의 봉건 착취계급으로서의 면모가 여실히 드러난 작품이다. 창밖의 일이 궁금하면 자기가 직접 문을 열어보면 되지 않는가? 그 쉬운 일도 하기 귀찮아 프롤레타리아 계층인 사미승을 부려먹고 있다.” 투철한 역사의식이 담긴 이 답안이 오랫동안 생각난다. 이런 의식 아래 시는 더는 설 자리가 없다.

내가 딱 이랬다. 그러나 이제 서서히 깨달아 간다. 그 시대는 그런 상황이었고 더군다나 시는 시로써 받아들여야지 거기에 오늘날의 객관적 잣대를 기준으로 들이댈수는 없는 것이다.

603. 역사란 무엇인가? 현재의 퇴적일 뿐이다. 지금 시대의 자취를 일러 후세는 옛날이라 한다. 그렇다면 굳이 지나간 옛날에 얽매일 필요가 없겠다. 지금 여기에 충실하면 그것이 곧 옛날이다. 시사는 시인의 충실한 증언이 뒷날의 역사로 자리매김된 것이다. 사시는 시인이 과거의 거울에 비춰 현재를 읽으려는 노력의 산물이다. 인간의 삶은 본질적으로 변한 것이 없다. 어제의 태양은 오늘도 그대로 뜬다. 지나간 역사가 오늘 비추는 등불인 까닭이다.


스물세 번째 이야기 사랑이 어떻더냐 - 정시


607. 사랑은 아름답다. 슬퍼서 아름답고, 아름다워서 슬프다.

611. 무엇을 이루자고 나는 이 산중에 있는가. 저 봄풀을 보아라. 저들도 싱그러움을 뽐내며 저마다 향기를 풍기고 있지 않은가. 사람이 한 세상을 살아가는 일은 사람끼리 어깨를 비비며 회로애락을 함께 나누는 것이 아니었던가. 어째서 나는 이를 모두 떠나와 깊은 산 속에서 이 청춘의 시간을 태우고 있단 말인가. 생각이 여기에 미친 그녀는 6년간 산중 생활을 그만두고 환속하고 말았다.

인간적이다. 인간이라면 이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사람이 사람속에서 살아야지. 산속에서 사는 것은 못할 짓이다.

612. 50년 전에는 나도 나이가 스물셋이었다고 하였다. 묻지 말라 하고는 스스로 대답하는 수사의 묘가 재치 있다. 그러니까 지금 그는 73세의 노인이다. 자신의 스물셋의 한창나이였다면 그녀와의 멋진 로맨스를 이루어보기라도 할 텐데 하는 아쉬움을 그렇게 달랬다.

남자는 다 똑같다는 말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619. 임을 만나기를 얼마나 고대했는데, 정작 만나 한마디도 못한 것이 말할 수 없이 아쉽다. 만날 길 없어 밤마다 꿈길로 찾아 나선다. 이것이 사랑이다. 어렵사리 임을 만나 놀랍고 두근거려 꿈을 깬다. 이것은 그리움이다.

621. 슬하에 아이는 말을 갓 배우겠고/부엌의 늙은 종은 양식이 없다하겠지/정원엔 황량하게 가을 풀이 돋았겠고/날로 여윌 그 모습이 눈에 선히 본 듯 하오.

먼 변방에서 귀양 살던 가장은 문득 떠오르는 가족 생각에 가슴이 저민다. 귀양 올 때 뱃속에 있던 아이는 지금쯤 기면서 말을 배우기 시작했을 것이다. .... 정원엔 잡초만 무성할 게고, 그 위에 야윈 아내의 갸날픈 모습이 겹치니 견딜 수가 없다.

여러 해전 딱 이런 상황이었다. 귀양은 아니지만 주말부부 아니 월말부부당시 기억이 새록새록하다. 갓난 아기를 혼자 돌보고 있을 그녀가 떠올라 힘이 들었다.

621. 모든 것은 자신의 탓이다. 이런저런 생각에 그는 또 밤을 하얗게 지샌다. 자신은 나라에 죄를 지은 몸이다. ! 언제나 다시 만나 오순도순 남편으로서 아비로서 도리를 다하며 살아볼 것인가. 그날이 진정 오기는 올까? 그는 자꾸 생각이 많다.

622. 아내가 세상을 떴다. 함께 묻어주려고 아내의 옷가지를 살피다 목이 메고 말았다. 아내의 옷상자에는 시집올 때 지어온 옷이 반 넘어 그대로다.

아내에게 잘해야겠다. 늘 그러하듯이 없을 때 아쉬울 때 잘해야지 하는 늦은 생각이 든다.

623. 아내의 영전에 곡 한 번 할수 없는 자신의 처지가 기가 막히다 못해 참담했다.

625. 한시에서 사랑의 노래는 기쁨의 구가는 적고 가라앉은 슬픔이 많다. 정서란 애초에 모든 것이 충족된 속에서 터져 나오는 법이 없다. 소중한 무엇밖에 놓여있다는 생각. 안겨야 할 어디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는 마음에서 정서는 비로소 움터 나온다.


                               스물네 번째 이야기 한시와 현대시, 같고도 다르게 - 尙同求異論


629. 그가(조지훈) 말한 동양의 수법이란 한시의 수법이다. 직접 말하지 않는다. 다 보여주지 않는다. 이미지를 세워 대신 말한다. 현대시도 같다. 현대시와 한시는 여러모로 참 닮았다.

630. 이 좋은 도시를 떠나 왜 굳이 그런 곳에서 살려 하느냐고 누가 묻는다면 그저 웃겠다고 했다. 그는 도회의 찌든 삶 속에서 구름이 언덕을 넘어가고 강냉이가 땀과 함께 익어가는 건강한 삶을 소망했다.

634. 벌목정정이란 단어 하나가 정서의 맥놀이를 일으켜서 저 <시경>에서부터 당나라 두보를 거쳐 현대의 정지용에까지 이어지는 정서의 다리를 놓았다. 놀랍지 않은가?

저자의 한시에 대한 연구가 놀랍다. 3개의 시에 대한 놀라운 연결도 연결이지만 저자의 이 연결고리를 찾기 위한 노력이 엿보인다. 무릇 무엇을 할려면 이정도는 해야 하지 않을까.

637. 정지용의 시에는 이렇듯 한시의 구문과 어법이 또렷이 살아 있다. .... 가장 모던한 그의 시가 가장 한시와 닮았다. 재미있는 역설이다.

고전이라는 것이 이렇듯 새로운 것이다. 가장 올드한 것이 가장 모던한 것과 일맥상통한다.

640. 사실 청록파 세 사람 중에 한시의 정서에 가장 밀착되어 있는 시인이 박목월이다.

642. 풀면 이렇게 진진한 사연인데 시인은 끝까지 말을 아껴 여백을 넓혔다.

644. 그녀는 내게 언제나 돌아오려는가고 묻는다. 나는 해줄 대답이 없다.

언젠가 그녀도 내게 물었다. 언제나 돌아오느냐고. 나는 그래도 해줄 대답이 있었다. 그리고 돌아왔다.

646. 조운의 현대시조는 이렇듯 한시의 정서에 뿌리박아 참신한 풍격을 일궈낸 것이 많다.

647. 하늘에 걸린 반달을 천상의 존재가 쓰다 버린 빗으로 연상하여 시상을 풀었다. 상상력의 원천이 같다. 한시와 현대시는 이렇게도 만난다.

649. 한시와 현대시의 만남을 한두 구절의 표현상 유사성만 가지고 논의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649. 한시와 현대시도 그렇다. 겉모습의 유사함만 가지고 한시와의 유사성을 말한다면, 그것은 껍데기의 비슷함일 뿐이다. 모방에도 차원이 있다. 貌同心異(모동심이)의 모방이 있고, 심동모이心同貌異의 모방이 있다. 겉모습만 같고 알맹이는 딴판인 것은 모동심이다..... 우리가 말하는 모방은 심동모이의 모방이다. 껍데기만 같으면 못 쓴다. 이것을 다시 한마디로 표현 말이 상동구이尙同求異. 같음을 숭상하되 다름을 추구한다. 같지만 다르고, 다르기에 같다는 말이다. 과거와 현재는 이렇게 만난다. 한시와 현대시도 그렇다.

글을 쓸 때 항상 주의해야 하는 것이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하지만 새롭지 않지만 새로움을 추구하는 것이 중요하고 중요하다.

에필로그 그때의 지금인 옛날 - 通變論

654. 현대시를 읽다가 불쑥 한시의 정서와 만난다.

654. 필자는 한시와 현대시가 무던히도 잘 닯았다는 생각을 한다. 별개의 미학으로 대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654. 지금과 옛날의 사이에는 무엇이 있나. 시간의 강물도 여기서는 의미가 없다.

655. 옛것이 어째서 오늘에 감동을 주는가? 그들은 내가 아닌데 왜 나와 같을까? 그와 나를, 그들과 미당을, 그들과 목월을 이어주는 원형질은 무엇일까?

655. 하지만 형식의 복고에 앞서 이 원형질을 찾아나서는 일이 우선해야 할 것 같다. 형식은 변한다. 생각도 변한다. 그러나 변치 않는 것이 있다. 이 강산, 이 흙 밟고 살아온 사람들의 가슴속에 스민 정서는 세월로도 씻을수 없는 원형질로 남는다.

657. 천지자연의 조화가 음악고 하나로 만나고, 유동하는 천기 속에 시가 한데 어우러졌다.

658. 오늘날의 독서는 어떤가. 천박한 식견으로 이미 용도 폐기된 낡은 지식을 금과옥조인 양 떠받든다. 저 혼자 보기 아깝다고 다른 사람에게도 강요한다. 취해 죽으려면 독주를 들이켜야지. 왜 술지게미만 배터지게 먹는가? 세계와 가슴으로 만나려거든 옛 책에 코를 박는가? 왜 푸드덕거리며 날아가는 새를 시골 노인의 지팡이 위 조작품으로 만들어버리는가?

658. 우리의 지식이란 이렇듯 살아 있는 사물, 가슴 뛰고 피 흐르는 우주를 사변의 틀 속에, 언어의 무덤 속에 가두어 죽이는 것은 아니었던가?

659. <주역>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한다. 통하면 오래간다.”고 했다. 천지만물은 변화 유동한다. 한 시대가 가면 또 한 시대가 온다. 이 도도한 변화 앞에 옛것만 좋다고 우겨야 될 일이 아니다. 새것은 또 옛것과 별개의 무엇인가? 그럴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이것과 저것이 다름을 확인함에 있지 않고, 그 사이에 숨을 통하게 하여 오래 가게 만드는 일이다. 이른바 통변의 정신이 여기서 나온다.

659. 문학에는 정해진 규범과 형식이 있다. 새것을 추구해도 이것마저 무시할 수는 없다. 새것이 힘을 얻으려면 옛것을 변화시키는 통변의 정신이 있어야 한다.

660. 천추만세는 지금으로부터가 옛날이다. 참 무서운 말이다. 옛날은 그때의 지금이었을 뿐이다. 지금은 훗날의 옛날이다. 현재에 충실하라. 그러면 그것이 훗날의 모범이 된다. 옛것을 맹종치 말라. 그 옛것도 그때에는 하나의 지금이었을 뿐이다. 세월은 흘러간다. 오늘의 주인공이 내일은 무대 뒤로 사라진다. ‘지금여기가 차곡차곡 쌓여 역사가 된다. 사람은 가도 문학의 정신은 사라지지 않는다. 어제가 오늘 되게 하고, 오늘이 내일 되게 하는 원형질이 여기에 담겨 있다.

661. 당돌한 제자가 묻는다. 옛날에도 있었다면 무엇 때문에 제가 또합니까? 스승은 벌떡 일어나 세 번 절로 화답한다.

662. 창힐의 정신으로 안연의 마음을 담는다면 옛날과 지금의 경계는 더는 아무 의미가 없을 것이다.

662. 어떤 지금도 옛것의 구속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옛것을 바로 알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옛것을 어떻게 배울까? 그 껍질을 배우지 말고 정신을 배워야 한다.

662. ‘사기의 불사기사의 정신이다.... 또 그는 옛사람의 정신을 본받되, ‘사필기출’, 즉 자기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말한다.

663. 공명선은 글 한 줄 안 읽었지만 스승이란 책을 옳게 읽어 낸 독서가다. 다른 제자들이 옛 경전에 눈이 팔려 있을 때, 그는 스승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펴 읽었다.

665. 옛것을 본받아라. 그러나 그 정신과 원리를 본받아야지. 형식을 본받아서는 안 된다.

665. 한신은 배수진을 쳐서 이겼다. 임진왜란 당시 신립은 배수진을 쳐서 참패당했다. ... 용감히 싸웠지만 왜병의 조총층 유효사거리가 100보였고, 아군의 화살은 고작해야 50보였다. 군대는 몰살당하고, 신립은 강물에 뛰어들어 자살했다.

666. 같은 배수진이었건만 한신은 이겼고 신립은 졌다. 왜 그랬을까? 배수진을 쳐서는 안 될 곳에 쳤기 때문이다. 남의 흉내내나 내는 시는 결코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한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보살을 만나면 보살을 죽여라. 옛길을 따르지 말라

666. 중요한 것은 거북선이 아니다. 그것을 운용하는 장수의 용병술이다. 아무리 해박한 이론의 무장이 있었도, 그것을 운용하는 통변의 정신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시를 쓰는 데 이론은 오히려 장애가 될 때가 더 많다. 우리 해군의 승리는 결코 거북선 때문이 아니다.

667. 해마다 충무공 호국 얼을 선양한다는 단체의 주관으로 벚꽃 축제가 성대하게 벌어지는 해괴한 이 현실에서, 우리가 진정 되찾아야할 것은 바다 속에 가라앉은 거북선이 아니라, 충무공의 그 거룩한 정신일 뿐이다.

생각해보니 그러네. 꽤 여러해 군항제를 봤지만 왜 그 단체에서 주관을 하는지는 생각해본 적이 없네.

일본과 싸운 충무공이 그 나라의 국화인 벚꽃 축제를 개최한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667. 국문학과 교과과정을 보면 현대시론이나 현대소설론, 현대 비평론과 같은 강좌는 있어도, 한국시론이나 한국소설론, 한국비평론 등의 강좌는 찾아볼 수 없다. .... 우리에게 고급한 문예이론이 없었던가? 우리에게 깊이 있는 문학의 체계가 없었던가? 과거의 시갛은 오늘의 시학에 아무런 처방이 될 수 업는가? 그렇지 않다.

668. 연구자들은 문화의 차이나 배경에 대한 고려 없이 최신의 서구 이론을 무작정 대입하는 연구를 낸다.

669. 그들은 언제나 아득히 먼 곳에 있었고, 우리는 따라가기 바빴다. ... 이제는 이 모든 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지금까지 우리가 숨가쁘게 쫓아왔던 담론이 모두 거짓이라고 한다. 모든 것은 해체되어야 한다고 한다.

669. 툭하면 현실인식이고, 입만 열면 역사의식을 말한다. 그런 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문학성이 담보되지 않은 의식이라 대자보나 설교와 무엇이 다른가? 미의식의 부재는 문학성의 검증을 원천적으로 봉쇄한다.

670. 내가 나의 주인이 못 되고, 내 집을 찾아가지 못할진대 열린 눈은 망상이 될 뿐이다. 소화하지 못하는 지식은 지식이 아니다.

670. 도로 눈을 감아라. 그러면 네 집을 찾으리라. 나는 그의 이 말을 외래의 것을 버려 자신의 소아 속에 안주하라는 말로 듣지 않느다. 주체의 자각이 없는 현상의 투시는 혼란을 가중시킬 뿐이다.

671. 눈에 현혹되지 말라. 네 튼튼한 발을, 네 듬직한 지팡이를 믿어라. 갑자기 눈이 열리기 전에 내 앞에 놓여 있던 세계, 익숙해져 있던 세계, 나와 사물 사이에 아무런 간극도 없던 세계로 돌아가라. 그 세계가 속삭이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본래의 제자리를 찾아야 할 것이다..... 문학은 발전해왔는가, 아니다. 다만 변화해왔을 뿐이다. 다시 눈을 감아라. 먼저 네가 들어가야 할 대문부터 찾아라.

 

3. 내가 저자라면

 

보완이 필요한 점

현대시와 비교한 23번째 이야기는 참신했다. 한시가 우리가 생각하는 만큼 고리타분하지 않고 현대시에도 이어져 내려오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사례를 든 현대시가 현대라기 보다는 근대라는 느낌이 들었다. 가장 모던한 시가 나오지 않았다. 시를 잘 모르지만 현대시는 압축미가 없어지고 그야말로 이게 산문인지 시인지 모를정도로 길어지고 있음을 개인적으로는 느끼고 있다. 물론 시가 어떤 정형화된 틀에 의해 쓰여진다는 것이 시답지 않은 것은 주지하고 있지만 한시를 연구한 저자와 국문학자인 저자가 느끼는 가장 최근의 현대시와 한시를 비교하는 대목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졌다.

 

이 책의 장점

1. 사람의 가슴 속 깊은 곳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책이다. 시 한편에 더군다나 그동안 나와는 관계가 없다고 생각했었던 한시에서 울컥 올라오는 감정이 북받친다.

 

2. 옛날 성인들이 왜 그렇게 시를 쓰고 쓰고자 했는지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시 한자 한자를 쓰기 위해 그 얼마나 많은 습작을 했을 것이며, 한자에 대한 공부를 얼마나 해야 그렇게 떡 주무르듯이 할수 있는 그들의 노력에 감동할 수밖에 없다.

 

3. 사실, 요즘 누가 한시를 읽겠는가. 나도 그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시가 가진 매력을 마음껏 펼쳐서 보여준 저자에게 감사하다. 한시가 이런 것이다는 정수를 알려줬다. 사실 한시를 싫어했다기 보다 왜 중국의 글자에 그렇게 목매다시피 했는 것이 젊은 시절 생각이었다면 이번 책으로 한시에 대한 매력에 흠뻑 빠질수 있었다. 그리고 이제부터 한자를 제대로 공부해서 한시에 대해 두고두고 공부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4. 한시만이 아니라 마지막 한시와 현대시의 이야기에서 현대시를 잠깐이라도 언급해주어 한시가 현대시의 명맥이 이어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내가 저자라면 이렇게

 

1. 당시풍의 최고권위를 가진 최치원과 송시풍의 대표자인 김시습을 비교했지만 이 두사람의 대표시를 하나씩 사례를 들어 설명을 했으면 당시와 송시의 차이점을 더 쉽게 알수 있었을텐데 조금은 아쉽다.

 

2. 보완할 점에도 밝혔다시피 가장 최근의 핫한 현대시와 한시의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와 가장 유사한 사례를 들고 싶다. 시를 표현하는 것이 정말 다양해졌다. 예전에는 이게 시야라고 하는 부분이 당연히 시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한시의 맛과 현대시의 맛을 비교해보고 싶다.

IP *.106.204.231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