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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8월 21일 11시 56분 등록

저자 연구

정민(鄭珉. 1961, 충북 영동 출생)

1995년부터 한양대학교 국문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하지만 그를 국문 아니 문학 전문가라고 부르는 건 그를 너무 작게 만드는 것 같다. 우리나라 문학, 한시 등 문학 뿐만 아니라 그림을 해석하는 도상학에서 예술에 나타난 새 연구까지 그의 관심 분야는 전반적인 문화, 예술에 넓게 걸쳐 있다. 그런데 문화적 배경을 모르고 어떻게 옛 그림을 해석할 수 있을까? 그는 어느 인터뷰에서 그 부분에 대한 아쉬움 때문에 스스로 그림을 해석하고 새 이야기를 정리한 <새 문화사전>까지 저술했다고 한다. 어떤 의미에서 그도 르네상스인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스승은 이기석 교수라고 한다. 대학시절 한문특강을 통해 만난 이 교수는 그가 한문을 본격적으로 공부하는데 영향을 끼쳤으며 지금의 한시 전문가가 될 수 있도록 한자라도 직역하지 않으면 크게 혼을 냈다고 한다. 지금도 정민 교수는 사는 게 힘들 때면 포천에 있는 그의 무덤을 찾는다고 한다.  

살아 생전에는 인생의 방향설정에 영향을 끼쳐 한 분야의 대가가 될 수 있게 하고 돌아가신 후에는 힘들 때마다 찾을 수 있는 힘이 되는 스승을 갖고 있다는 점이 너무도 부럽다. 

나에게는 비록 살아 생전에는 뵙지 못했지만 돌아가신 후에 나의 길을 찾게 해주신 스승이 계신다. 아직 힘들 때 찾은 적은 없다. 앞으로 힘들 때 한번 찾아뵐까 한다. 투정도 부리고 길도 묻고 해보고 싶다. 왠지 다 받아주실 것 같다.  

 

 

시인과 궁핍 시궁이후공론

불평즉명, 불평이 있어야 운다

287 사람의 말 또한 그러하다. 어쩔 수 없는 것이 있은 뒤에야 말하게 되니, 노래에 생각이 담기고 울음에는 품은 뜻이 있다. 무릇 입에서 나와 소리가 되는 것은 모두 불평함이 있기 때문이다.

불평, 불행 뿐만 아니라 기쁘 행복해서 소리가 되는 경우도 있을텐데그냥 절실할 때 가장 소리가 잘 나오는 법이라고 이해하자.

 

288 천지는 만물이 다 좋게만 하는 법이 없다. 뿔 있는 놈은 이빨이 없고, 날개가 있으면 다리가 두 개뿐이다. 이름난 꽃은 열매가 없고, 채색 구름은 쉬 흩어진다. 사람에 이르러서도 그러하다. 기특한 재주와 화려한 기예가 뛰어나면 공명이 떠나가서 함께하지 않는다. 이것은 이치가 그러하다.

세상이 공평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언제나 더 많이, 더 좋은 것을 갖는 사람들이 있고, 덜 갖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하지만 신은 모든 것을 주지는 않는다는 말도 믿는다. 위에서 말한 천지는 만물이 다 좋게만 하는 법이 없다.’라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가진 좋은 것을 개발, 이용하고 내가 못 가진 것, 가질 수 없는 것들에는 욕심내지 말자.

 

289 모든 것이 갖춰진 넉넉한 환경에서 문학은 설 자리를 잃는다. 욕망이 좌절되고 꿈이 상처 입을 때 비로소 사람의 마음속에 이른바 정서란 것이 생겨난다. 그것이 슬픔과 분노, 격정과 눈물이 되어 터져 나온 것이 바로 시이다.

 

나비를 놓친 소년, 발분서정의 정신

290 소년은 꽃잎에 앉은 예쁜 호랑나비를 보았다. 정신을 손가락 끝에 온통 집중시켜 살금살금 나비에게 다가간다. 잡았다 싶었는데 나비는 손가락 끝에 감촉만 남긴 채 훨훨 날아가 버린다. 뻗었던 손이 부끄럽고, 전심전력의 몰두가 허망해지는 순간이다. 이거다 싶었는데 결국 손에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조금만 더 주의를 기울였으면 잡았으리라는 자책감, 혹시 누가 내 모습을 보지 않았을까 하는 부끄러움, 바로 이런 모종의 안타까우면서도 착잡한 마음이 바로 사마천이 <사기>를 지을 때의 마음이라고 했다.

 

294 가장 훌륭한 시는 재주 부리지 않고 얻은 것이다. 재주를 부려 얻은 것은 훌륭하지 않다. 난새와 봉화의 맑은 소리와 주옥의 빛나는 기운, 병든 이의 앓는 소리, 슬피 울며 흘리는 눈물이 어찌 모두 재주를 부려 얻어진 것이겠는가? 그런 까닭에 시 삼백 편은 모두 성현이 발분하여 지은 바라고 한다. 이렇게 본다면 발분하지 않고는 지을 수 가 없다.

공감한다. 요즘의 시는 재주 부려서 그럴듯하게 만든 것이 많아 보인다. 그래서 시가 별로인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시궁이후공과 시능궁인

296 시능궁인과 시궁이후공은 역의 명제다. 하지만 실제 이 둘은 모순관계에 놓이지 않는다. 불만족의 상태에서 만족을 구하려는 모순적 충동지향이 바로 시능궁인의 사고를 잘 설명해 준다. 시궁이후공이라 할 때 궁은 공하기 위한 충분조건이고, 공은 궁하기 위한 필요조건이다또 시능궁인이라 할 때 시는 궁하기 위한 충분조건이고 궁은 시를 잘 쓰기 위한 필요조건이다. 이 때 궁은 물질적 빈궁보다 실의와 좌절 같은 정신적 상태에 가깝다. 단순한 경제적 결핍은 시인의 발분 욕구를 저해하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정신적 측면이 배제된 궁은 궁이 아니라 빈()이다.

왠지 말장난 같다. 내가 잘 이해를 못해서 그러는 거 아니다.

 

궁한 사람의 시가 좋은 이유

297 일반적인 경우로 보더라도 시는 역시 궁한 뒤에 더 좋아진다. 어디 시뿐인가? 모든 예술, 학문이 다 그렇다. 시장에서 떡 파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노래를 구성지게 참 잘 불렀다. 노래 때문에 그 집 떡이 유명해져서 인기가 높았다. 형편이 넉넉해지자 더는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그러자 그의 떡 가게 손님도 점차 줄어들었다. <지봉유설>에 나온다.

맞는 말이다. “궁하다를 꼭 빈곤하다로만 해석하기 보다는 필요하다‘, ‘절실하다로 해석하면 이해가 빠르다. 뭐든 절실해야 온 마음과 정성을 담아 최선을 다하게 되는 것 같다. 예전에 많이 쓰던 헝그리 정신과도 통한다.

 

300 천하에는 성정이 없는 사람이 없고, 시를 지을 수 없는 사람도 없다. 사람은 누구나 시를 지을 수 있다. 다만 성정이 얽매이면 시는 망하고 만다. 성정을 질곡하는 것에 부귀보다 심한 것이 없다. 성정이 얽매이고 보면 재주가 아무리 높고 언어가 뛰어나도 말단일 뿐이다. 어찌 다시 시가 있겠는가. 이것이 고금에 시로 이름난 사람이 궁하고 낮은 지위에서 많이 나오는 까닭이다.

 

301 대체로 문학은 충족에서 나오지 않고 상실과 일탈에서 나온다. 어느 여류 시인이 시를 쓸 때는 먼저 커튼을 치고 촛불을 켜서 실연의 기억과 같은 슬픈 일을 생각한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커튼 치고 촛불 켠다고 좋은 시가 나올 수는 없다. 자기 최면의 수식은 교언영색의 자기기만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에 그친다면 시인은 기능적인 언어조립공에 불과하다.

 

시와 궁달의 관계

301 궁의 상태는 예민한 감각을 길러준다. 가슴속의 불평이나 울분이 촉수가 되어 시를 더욱 우수하게 만들어준다. 그렇다면 궁하지 않은 사람은 결코 훌륭한 시를 쓸 수 없는가 하는 의문이 있을 수 있다. 궁한 이의 시가 모두 좋은 것도 아니다. 현달하고도 시가 좋은 경우도 얼마든지 있다.

 

302 조선 전기의 대표적 관각문인인 서거정은 <동인시화>에서 예로부터 궁한 사람의 말은 모두 비쩍 마르고 차며 파리하고 무덤덤하다.”고 하고, 그 시를 보면 초췌하고 곤궁한 기상을 볼 수 있다고 했다. 조희룡(趙熙龍, 1789~1866)<석우망년록(石友忘年錄)>에서 사람들이 이루고자 해도 재주와 능력이 미치지 못하므로 그런 말로 자신을 변호하는 것일 뿐이라며 이런 말을 남겼다.

사람들은 늘 말한다. 문인은 빈천함이 많고, 그림을 배우는 자는 더욱 궁박한 상이 많다고. 사해의 사람은 항하의 모래알 수만큼이나 많다. 글을 읽고 그림을 배우면 반드시 빈천에 이르게 되고, 이를 배우지 않고 그림에 어두워야 반드시 부귀를 누리게 된다면 천하에 책이나 그림 같은 것은 진시황이 불태우기를 기다리지 않고도 절로 없어졌을 것이다.

사회전반적으로 빈익빈부익부가 점점 심해주지만 문학, 출판 분야도 심하게 빈익빈부익부인 것 같다. 유명 작가는 100쇄 이상 찍는 경우도 여러 번 있다고 하는데 많은 작가들이 전업작가로 사는 게 힘들다고 한다. 글재주가 뛰어나야 되기도 하지만 운도 많이 작용하는 것 같다.

 

303 구양수가 매성유의 시를 논하면서 궁한 뒤에 시가 더욱 뛰어나다고 여겼다. 황산곡은 두보의 시를 논하면서 늙어갈수록 시가 더욱 좋아진다고 보았다. 그러나 나는 홀로 궁하다고 좋아지거나 늙어갈수록 낫게 되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다만 뛰어난 자만이 더욱 뛰어나게 되는 것이다. 왜 그런가? ~ 궁한 사람은 더욱 구슬펐고, 늙은 사람은 더욱 거칠고 졸렬해서 좋은 것이 거의 드물었다. 이로 볼 때 오직 뛰어난 자만이 더욱 뛰어나게 될 뿐이다. 궁함은 사람을 뛰어나게 하지 못하고, 늙음도 사람을 뛰어나게 하지 못함이 분명하다.

요컨대 시의 공졸은 궁달과 관계되는 것이 아니라 시인의 타고난 능력과 관계되는 것일 뿐이라고 본 것이다.

 

306 무릇 시를 읊음은 목청 좋은 이가 슬퍼 목 메는 곡조로 남을 슬프게 하거나, 호방하고 번화한 노래로 남을 기쁘게 하는 것과 같다. 시 또한 그러하다. 궁할 때는 그 말이 궁하고, 달하게 되면 그 말이 달하게 된다. 시에 능한 사람이 형용하여 말로 표현함에 능하기 때문이다. 어찌 시인이 시로 인해 궁하게 되고 달하게 되는 이치가 있겠는가?

 

탄탈로스의 갈증

307 문학을 포함한 모든 예술 활동을 인간 내부의 두 자아를 일치시켜 나가려는 몸짓으로 볼 수 있다면, 궁의 상황은 더 나은 예술작품의 창조를 위한 충분조건이 된다. ~

상실감이 강하면 회복에의 갈망도 커진다. 동일성의 추구란 현실과 자아, 혹은 현실적 자아 사이에 형성된 파국적 관계를 청산하려는 노력인 셈이다.

 

307 “도잠(陶潛)과 두보는 해학적 풍취가 있는 사람들로, 궁하고 쓰라린 이야기를 하더라도 결코 풍취를 포기하려 들지 않았다 그들은 우스운 소리도 하고 통속적인 자유시도 쓰는 풍취를 지녔기에 궁핍하고 배고픈 중에도 미쳐버리지 않았고 타락하지도 않았다.” 궁하다고 그 궁함 속에 가라앉고 마는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서도 결코 풍취를 코기하지 않는 독립불구(獨立不懼)의 정신, 시의 공교로움은 이러한 정신 안에서만 보장될 수 있다. 시인은 탄탈로스와도 같은 존재다. 맛있는 음식과 샘물을 앞에 두고도 영원한 갈증과 갈망 속에서 헤맨다는 탄탈로스! 시인은 사서 고생하는 사람들이다.

한시를 다루는 책에도 그리스 신화의 인물이 등장한다. 역시 그리스.로마 신화는 기본적으로 꼭 읽어야할 책이다.

도잠과 두보에게 해학적 풍취가 없었더라면 그냥 삶을 포기하는 선택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 해학적 풍취, 그리고 가 그들이 삶을 포기하지 않았던 끈, 마지막 자존심, 뭐 그런거였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시는 그 사람이다 기상론

이런 맛을 아는가?

311 걸상에 걸터앉아 저며 먹으며 큰 은대접에 술을 가득히 부어 마시고, 얼근히 취할 때에 하늘을 쳐다보면 골짜기의 구름이 눈이 되어 취한 얼굴 위를 비단처럼 펄펄 스친다네. 이런 맛을 자네 아는가.

아마도 나는 평생 모를 맛이겠지. 솔직히 알고 싶은 맛은 아니지만, 자신만의 맛을 가졌고, ‘너는이 맛 모르지?’ 라고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좋아 보이기는 한다. 나도 나만이 아는 맛, 남들에게 넌 모르지?”라고 자랑할 수 있는 맛을 갖고 싶다.

 

314 당리당략에 얽매여 동당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벼슬길을 코 묻은 떡을 다투는 아이들에 비유했다. 그 호방함 속에 일말의 누추함도 찾아지지 않는다.

 

시로 쓴 자기소개서

316 세상 사람 모란을 사랑하여서 동산에 가득히 심어 기르네.

뉘 알리 황량한 들판 위에도 또한 좋은 꽃떨기 피어 있음을.

빛깔은 시골 방죽 달빛 스민 듯

언덕 나무 바람결에 향기 풍기네.

땅이 후져 공자님네 오지를 않아 고운 자태 농부의 차지 된다네.

 

318 비슷한 형편에서 같은 의도로 쓴 작품이 어찌 이리 다를까? 그 사람의 그릇이 같지 않은 까닭이다. 인간의 삶의 외형적 조건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렇다고 곤궁에 찌들어 본연의 기상마저 허물어서는 안 된다. 한시 비평에서 말하는 기상론이란 바로 시인의 기질과 삶의 자세가 그의 시에 거울처럼 비쳐진다는 생각을 말한다. 그래서 시를 읽으면 만나보지 않고도 그 사람을 알게 된다.

 

아무도 날 찾는 이 없는

320 돋우지 않으면 꺼지고 말 심지, 끝만 남은 심지는 마치 버틸 힘조차 없는 자신의 투영이다. 굳이 곧추앉아 그는 심지를 돋운다. 잠 못 이루는 것은 온 산 가득 내린 눈 때문이 아니다. 바람소리 때문이 아니다. 온 산을 뒤덮을 만큼의 무게로 두 어깨를 짓누르는 삶의 근심, 잊힘에의 절망 때문이다. 가물거리는 등불을 꺼뜨리지 않으려 함은 혹 누군가 이 밤에라도 찾아올지 모른다는 일말의 기대를 놓지 못해서였을까?

그 옛날이나 지금이나 별로 다를 바가 없다. 요즘의 우리도 잊힘에의 절망을 두려워한다. 특히 한 때 매우 인기가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던 사람들이 더 크게 느끼는 것 같다.

 

321 “하늘과 땅 사이에 물건은 각기 주인이 있나니, 진실로 나의 소유가 아니면 비록 터럭 하나도 취하지 말 일이다. 오직 강 위의 맑은 바람과 산 사이의 밝은 달은 귀가 이를 얻어 소리가 되고, 눈은 이를 보아 빛깔을 이루나니, 이를 취함이 금함이 없고, 이를 써도 다함이 없다. 이는 조물주의 다함 없는 곳집이다.”

 

강아지만 반기고

322 모든 것이 낯선 타관 땅에서 옛 친구와 약속도 없이 만났을 때 그 기쁨을 어찌 말로 표현할까?

몇 년 전에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다. 화장실을 찾아 들어간 강남의 어느 건물 지하 까페에서 대학 친구를 만났다. 졸업 후 처음, 10여년 만에 만난 것 같은데, 그 친구는 그 건물에 있는 회사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날의 우연으로 다시 대학 동기들을 만났고, 다른 친구들과도 연락을 하고 지내게 되었다. 그리고 또 다른 만남으로 연결되면서 변경연도 알게 되었고그러고 보니까 그날의 우연한 만남이 나를 오늘 여기로 이끌게 된 것 같기도 하다. 참 우연이란

 

323 북풍한설 몰아치는 겨울 골목에서 아이를 등에 업고 우는 과부, 당당하던 기상 간데없이 적 앞에 무릎 꿇은 늙은 장수, 임금의 발걸음이 아예 끊긴 궁녀, 올해에도 합격자의 명단에 끼지 못한 만년낙방선비, 그 마음을 누가 헤아리겠는가. 장난이지만 인생의 한 단면을 예리하게 포착했다.

 

또한 통쾌하지 아니한가

326 한 달 남짓 찌는 장마 퀴퀴한 기운 쌓여 사지도 나른하게 아침저녁 보냈는데

초가을 푸른 하늘 툭 터져 해맑더니 끝까지 바라봐도 구름 한 점 없어라.

또한 통쾌치 아니한가. (不亦快哉)

딱 요즘 날씨 같다. 통쾌하다.

 

327 높은 산 꼭대기에 지팡이를 놓고 쉬니 구름 안개 겹겹이 하계를 가로 막네.

느지막이 서풍이 백일을 불어가자 만학과 천봉이 일시에 드러난다.

또한 통쾌치 아니한가. (不亦快哉)

 

328 주흥이 도저하여 종이를 펼쳐 시상을 고르는데 생각과 달리 말이 이어지질 않는다. 찌푸린 하늘은 툭 찌르면 장대비가 쏟아질 듯한데 빗방울은 좀체 듣질 않는다. 연신 붓방아만 찧고 있는데, 마침내 빗방울이 후드득 떨어지니, 꽉 막혔던 시상도 동시에 툭 터져 도도한 시흥을 주체할 길 없다. 벌떡 일어나 붓을 움켜쥐고 통쾌하게 휘두르니 붓에서 넘친 먹물이 종이 위로 뚝뚝 떨어진다. 체증이 쑥 내려간다.

 

328 정약용의 이 연작을 읽노라면 갈증 끝에 청량음료를 마신 듯 체증이 후련하게 내려간다. 이러한 경계는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다. 가슴 속에 독만권서(讀萬卷書)의 온축과 행만리로(行萬里路)의 기상을 담고서야 가능하다.

 

자족의 경계, 탈속의 경지

330 부족해도 만족하면 언제나 여유롭고 족한데도 부족타 하면 언제나 부족하리.

넉넉함을 즐기면 족하지 않음 없고 부족함을 근심하면 만족할 때가 없네. ~

내 것을 구한다면 족하지 않음 없고 밖의 것을 구하면 어이 능히 만족할까. ~

고금의 지락은 족함 앎에 달렸나니 천하의 큰 근심은 부족함에 있도다. ~

부족함과 족함이 모두 내게 달렸으니 외물 어이 족함과 부족함이 되리오. ~

내 즐길 바 함께함에 진실로 때가 있어 몸에 책을 간직하니 즐거움이 족하도다.

지금의 내 마음, 앞으로 내가 간직하고 살아가야 할 삶에 대한 태도이다. 외워야겠다.

 

332 시는 곧 그 사람이다. 알려 해서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시인의 언어가 제 스스로 말해주는 사실이다. 언어가 그 사람의 기상을 대변한다는 것은 그 연원이 깊다. 무심히 뱉은 말이 씨가 되고, 화살이 되어 돌아온다. ~ 시인은 모름지기 가슴속에 호연한 기상을 품을 일이다. 떳떳함을 길러야 한다.

 

씨가 되는 말 시참론

머피의 법칙, 되는 일이 없다

335 시화에는 시를 보고 그 사람의 출처궁달을 예견하는 삽화들이 뜻 밖에 많다. 특히 앞서 무심히 한 말이 뒷날의 예언이 되는 경우를 따로 시참(詩讖)’이라고 한다. 언어의 주술적 힘을 믿어 말을 함부로 하지 말 것을 경계한 것이다. ~ 예전 어느 가수가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을 노래하고 젊어 세상을 뜨고, 또 어떤 가수가 한마디 변명도 못하고 잊혀져야 하는 건가요라고 노래해 실제 그렇게 되고 말았던 일 같은 것은 요참(謠讖)’이다.

가수들의 삶이 노래 따라 되는 경우가 많다고 하는데이것도 일종의 자기충족적 예언(Self-fulfilling Prophecy)인 것 같다. 즉 말하는 대로…! 그러니까 나는 그렇게() 할거야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착각하며 살아야 한다.

 

형님! 그자 갔습니까?

340 비단 같은 강물은 옥인 양 맑고 백사장은 금가루를 뿌린 듯하다.

뉘 능히 몇 말을 담아가서는 세상 사람 마음을 씻어주려나.

 

대궐 버들 푸른데

344 멀리서 보려 하면 근심 더욱 멀어지니 올라도 최고봉엔 오르지 말지니라.

 

345 마른입 입김 불고 비 오듯이 땀 흘리며 열 걸음에 엳아홉 번 쉬면서 오르누나.

뒷사람이 앞서감을 괴이하게 생각 말라 느릿 가도 마침내는 산마루에 이를지니.

 

349 이튿날 권필은 혹독한 형벌로 걷지 못하고 들것에 실려 동대문을 나섰다. 평소에 몸이 워낙 약했고, 상처도 심해 바로 길에 오르지 못하고 동대문 밖 민가에 머물렀다. 찾아온 벗들이 권하는 막걸리를 마시고 장독이 솟구쳐 그만 세상을 뜨고 말았다.

350 광해 또한 하룻밤 사이에 어찌 갑자기 죽었단 말인가?” 하면서 후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고 적었다. 이항복은 늘 한탄하며 우리가 정승 자리에 있었으면서 권필 한 사람을 능히 살리지 못했으니, 선비 죽인 책임을 어찌 면할 수 있겠는가? ’라고 말하곤 했다.

어떻게 이럴까 싶은데 실제로 주변에서 이런 일들을 본다. 밥을 못 먹고 술만 먹고 있다는 친구에게 술을 권하는 사람들을 봤다. 술친구라며큰 일이 벌어진 후에야 그럴줄 몰랐다며 후회한다. 권필의 친구들도 그러지 않았을까? 장독으로 괴로워하니 괴로움 잊으라며 막걸리를 권했을 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죽을 줄 몰랐다며

 

하늘은 재주 있는 자를 시기한다

354 만물을 빚어내는 형체를 부여하는 것은 하늘의 재주이다. 조화를 따라 만물의 형상을 잘 본뜨는 것은 시인의 재주이다. 하늘보다 더 공교로운 것은 없는데 시인이 어찌 하늘의 공교로움을 빼앗을 수 있단 말인가? 재능 있는 자는 운수가 사납다. 이는 하늘이 그렇게 만드는 것이다. 하늘 또한 시기심이 많음을 알 수 있다. 재주를 주고서는 어이하여 다시 궁하게 한단 말인가?

 

355 시라는 것은 성정의 허령함에서 나오기 때문에 먼저 요()와 천()을 알아 생각이 솟아나서 그리 하지 않으려 해도 그리 되고 만다. 시가 사람을 궁하게 하는 것이 아닐, 그 사람이 궁한 까닭에 시가 절로 이와 같게 된다. 재주 있는 사람은 하늘도 시기하니 세상 사람을 또 어찌 허물하겠는가? 슬프다. ~

말에는 정령이 깃들어 있다. 입에서 나온다고 다 말이 아니다. 생각 없이 되는 대로 쓴 한 편의 시가 어느 날 재앙이 되어 돌아온다. 말 한 마디, 시 한 구절을 삼가지 않을 수 없다. 어이 붓을 함부로 놀리랴!

 

놀이하는 인간 잡체시의 세계 1

글자로 쌓은 탑, 층시 또는 보탑시

362 누구나 전생의 업을 받고 태어난다. 현세의 고로움과 즐거움은 전생 선악의 업보일 뿐이다. 한때의 덧없는 부귀에 얽매여 바른 길에서 벗어나기 보다는, 무봉탑에 등불이 환하고 무근수에 꽃이 피듯 광명대도의 세계에서 마음을 노닐게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내용이다. 무봉탑과 무근수는 자아를 일컫는다. 실제로 글자의 배열 또한 무봉탑의 형상을 하고 있어 더 흥미롭다

 

회문시, 바로 읽고 돌려 읽고

370 마음을 맑게 할 수가 있고 可以淸心也

맑은 마음으로 마셔도 좋다. 以淸心也可

맑은 마음으로도 괜찮으니 淸心也可以

마음도 맑아질 수가 있고 心也可以淸

또한 마음을 맑게 해준다. 也可以淸心

재미있다. 장난 같지만 사실 이런 장난하기 쉽지 않다. 어떻게 해도 말이 되는 글자들을 조합하려면 하려면 한자에 아주 능통해야 한다.

 

그림으로 읽기, 신지체

385 이 모두 한자가 아니고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어려운 창작들이다. 물론 장난기가 다분히 서려 있지만, 적어도 내용 면에서는 진중함을 유지하고 잇는 것이 특징이다. 이는 마치 겉으로 그럴 듯한 그림을 그려놓고 그 속에 물건들을 숨겨둔 숨은 그림 찾기와 유사하다. 언어로 유희하는 퍼즐 놀이인 것이다.

 

실험정신과 퍼즐 풀기 잡체시의 세계 2

빈칸 채우기, 수시. 팔음가. 약명체

389 일진회원 너희들도

이천만중 일분자로

삼전론에 미혹받고

사대강령 주창타가

오조약에 선언하니

육대주에 괴물이요

칠적들의 노예되니

팔역민의 원수로다

구추단풍 엽락하니

십원창승 가련하다

백년부귀 구하다가

천재유취 되었구나

만세호창 하지 마라

억조창생 비웃는다

요즘에도 이런 식으로 쓰는 글을 본다. 이렇게 눈에 확 띄게 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냥 일반 글처럼 보이는데 앞 글자만 떼어 놓고 보면 욕이라든가, 특정인만 알 수 있게 하는 암호라든가. 쉽지 않다. 글재주가 있고 언어에 대한 이해가 많아야만 쓸 수 있는 글이다.

 

구슬로 꿴 고리, 장두체와 첩자체

397 썩지 않을 이름으로 선비 기개 밝으니 선비 기개 밝고 밝아 만고에 해맑도다.

만고에 맑은 마음 배움에 달렸으니 배워 행함 가운데 썩지 않을 이름 있네.

 

397 무대가 자그만 세상이라면

천지는 커다란 무대일러라.

 

파자놀음과 탁자시

403 하늘이 모자 벗고 한 점을 얻으며

()’가 지팡이를 잃고 띠를 하나 둘렀네.

 

무슨 소리일까? ‘()’이 모자를 벗으면 ()’가 된다. 여기에 다시 한 점을 얹으니 ()’이다. ‘()’가 지팡이를 잃으면 ()’만 남고, 여기에 다시 띠를 하나 둘러주면 ()’가 된다. ‘견자(犬子)’는 쉽게 말해 개새끼이다. 문전박대를 당하고 나서 부아가 치밀어 비꼰 시다.

 

이합체와 문자 퍼즐

409 얼마나 놀라운 유희인가. 말하자면 이합체 한시는 각 구의 첫 글자를 거의 미리 정해놓고 시를 짓는 셈이다. 그러니 언어 운용상의 제한과 어려움은 말해 무엇 하겠는가. 그런데도 장유의 시를 보면 표면적으로는 그런 제한을 받은 흔적을 전혀 느낄 수가 없다.

이 밖에도 기묘한 잡체시는 수도 없이 많다. 이런 시들 속에는 그 어려운 한자를 마치 떡 주무르듯 제멋대로 가지고 놀았던 옛 시인들의 풍류가 거나하다. 장난은 장난이되 격조를 잃는 법이 없었다. 얼마나 많은 습작의 과정을 거쳤으면 언어를 이처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었을까. 언어를 매만지는 장인의 근성이 이런 잡체시를 낳았다.

오늘날 잡체시가 던지는 의미는 무엇일까? 언어의 부단한 실험정신, 질곡을 만들어 놓고 그 질곡에서 벗어나기, 언어의 절묘한 직조가 보여주는 즐거움 외에도 잡체시는 오늘의 시단에 의미 있는 시사를 준다. 젊은 시인들이 실험하고 있는 각종의 형태시들은 기실 우리가 까맣게 잊고 있던 전통의 재현일 뿐이다. 세상은 돌고 돈다. 이 모든 현상들 앞에서 우리는 수없는 상호 텍스트화를 되풀이하고 있을 뿐이다.

 

말장난의 행간 한시의 쌍관의(雙關義)

초록 저고리, 국수 한 사발

418 낙민루(樂民樓)와 선화당(宣化堂)은 함경 감영 안에 있던 실제 건물 이름이다. 독음으로 읽어보면 각 구의 앞쪽 세 글자와 뒤쪽 세 글자의 독음이 같다. 백성이 태평성대를 즐거워한다는 낙민루에서 정작 백성은 낙루(落淚)를 하고 있다. 교화를 선양해야 마땅할 선화당에는 교화는커녕 재앙밖에 닥칠 것이 없다. 감사 조기영의 토색질에 함경도민이 함경도(咸驚逃)’, 즉 모두 놀라 달아날 지경에 이른 것이다. 각각의 단어에 반어적 의미를 연결시킴으로써 풍자의 칼날을 세웠다.

 

장님의 단청 구경

419 인상여와 사마상여는 藺相如司馬相如

이름 서로 같아도 실상은 다르다네.  名相如實不相如 ~

위무기와 장손무기는 魏無忌長孫無忌

저쪽도 꺼림 없고 이쪽 또한 꺼림 없네. 彼無忌枇亦無忌

 

견우와 소도둑

423 시와 말장난은 엄격히 다르지만, 언어를 주된 질료로 삼는 시는 본질적으로 얼마간 유희적 기분을 띠게 마련이다. 특히 음이 같은 말이나 뜻이 여럿인 표현을 활용한 쌍관, 즉 말장난 pun은 현대시에서도 흔히 보는 기교다.

한자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말도 그렇고 영어에도 pun이 많다. 영어세서는 발음은 같으나 철자가 다른 단어, 또는 철자까지도 같으나 뜻이 여러 개인 단어로 pun을 만든다. 영단어의 특성을 반영했기 때문에 우리말로 번역하기 어렵거나 번역하더라도 그 재미를 고스란히 담기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외국어를 배울 필요가 있다.

 

425 첩의 몸이 직녀가 아니옵거늘  妾身非織女

낭군이 어이해 견우시리오.  郎豈是牽牛

단어의 뜻뿐 아니라 견우 직녀 얘기를 알지 못하면 이해를 할 수 없다. 그래서 문학을 이해하기위해서는 신화 등 문화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428 임을 만나 물 건너로 연밥을 던지다가 남의 눈에 띄었을까 반나절 무안했네. ~

임은 내가 연꽃 속에 숨어 지켜보고 잇는 줄도 모른채 사방을 두리번댄다. 그가 하는 양을 숨어 지켜보다가, 안타까운 나머지 그녀는 임의 발치에 연밥을 던지고 말았다. 수줍어 저 여기 있어요라고 말은 못하고 말이다.

3구의 연자(蓮子)’는 연밥, 곧 연꽃의 열매를 뜻한다. 그러나 이 작품 속에서 연자련자(憐子)’, 그대를 사랑한다는 속뜻을 담아 사랑의 고백이 되었다. 그녀가 물 건너로 던진 것은 그저 심상한 연밥이 아니라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사랑의 고백이었던 것이다.

 

430 ‘근화일일영(槿花一日榮)’의 상식을 뒤엎어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의미를 읽었다. 접시꽃의 일편단심을 풍도의 만수산 드렁칡 같은 처신에 비겼다. 시인의 독법은 평생을 따라다닌 비방과 시비를 떠올리면 다른 설명이 필요 없다. 쌍관의는 이처럼 시의 함축미를 효과적으로 높여주는 매우 유용한 수단이다.

 

새 울음 속에 담긴 사회학

433 시어머니 그 무엇이 그리 나빠서 너 까마귀야 고악 고악욕하는 게냐.

며느리도 잘못한 거 하나 없는데 이 새는 부곡 부곡말을 하네요. ~

시어머니가 먼저 운을 뗀다. 까마귀가 고악고악하고 운다. 고악(姑惡)은 뜻으로 풀면 시어머니 나빠요가 된다. 시어머니가 무슨 나쁜 일을 했다고 까마귀 너는 만날 시어머니가 나쁘다고 울어대는 게냐고 나무랐다. 며느리가 즉각 맞받는다. 아니, 어머니! 며느리도 특별히 잘못한 게 없는데, 그렇다면 저 새는 왜 부곡부곡하고 우나요? 부곡(婦曲)며느리가 잘못했다는 의미다. 부곡부곡 하고 우는 새는 무슨 새일까? 좀전에 씨 뿌려라며 울던 뻐꾸기다. 시어머니가 나쁘다고 울고, 뻐꾸기는 며느리가 못됐다고 우니, 피장파장이다. 말장난의 재치가 돋보인다. 모두 쌍관의 묘미를 활용하고 있는 예들이다.

 

435 북풍한설(北風寒雪) 가마귀 집 귀한 줄 깨닫고 가옥가옥(家屋家屋) 우누나

유소불거(有巢不居) 저 까치 집 잃음이 부끄러 가치가치(可恥可恥) 짓누나

명월추당(明月秋堂) 귀뚜리 집 잃을까 저허서 실실실실(失失失失) 웨놋다. –<금쌀악>

 

선덕여왕의 자격지심

440 이렇게 보면 시뿐 아니라 그림에서도 쌍관이 독화(讀畵)의 핵심 원리로 작동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442 언어 예술로서 시가(詩歌) 언어가 이러한 유희적 성분을 갖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것은 시가 예술 위에 신선한 호흡과 생동하는 활기를 불어넣어준다. 시인이 문자 유희에 빠져서는 안 되겠지만, 그러한 유희 속에 뜻밖에 드러나는 언어의 발랄한 생기를 일부러 멀리할 일은 더더욱 아니다.

한자의 특성을 잘 살린 언어 유희여서 그렇지 우리 말의 특성을 잘 살린 우리 나름의 말장난, 일명 아재 개그도 있고, 영어에는 pun이라는 말장난이 있다. 각 언어 고유의 특성은 물론 문화까지 담은 것들이라 다른 나라 말로 번역하면 재미가 없어진다. 이렇듯 각 언어, 문화권마다 말장난이 있는 걸 보면 인간의 본능적 유희인 것 같다.

 

해체의 시학 가격시의 세계

요로원의 두 선비

<요로원야화기>는 갖은 시체를 놓고 두 선비가 각축을 벌인 이야기이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를 그리 단순하지 않다. 거들먹거리는 서울 것을 압도할 만크의 시재를 지녔으면서도 정작 시골내기는 청운의 벼슬길에 명함 한번 내밀어보지 못했다. 오히려 전전하는 여관마다 천덕꾸러기 신세였을 뿐이다. 모처럼 서울 것 하나가 제대로 걸려 분풀이는 했지만, 뒷맛은 여전히 씁쓸하다.

조선 버전 금수저와 흑수저의 이야기랄까. 몇 백년이 지나도 실상은 달라진 것이 별로 없는 것 같다. 그래도 그 때 서울 선비는 순수했던 것 같다. 자신이 졌다는 걸 인정했으니이래서 시궁이후공이라 했나 보다.

 

눈물이 석 줄

450 열일곱 자 시를 지어놓고는  作詩十七字

곤장을 스물여덟 대나 맞았네.    受笞二十八

만 언의 상소문을 지었더라면    若作萬言疏

죽었을 거야.                         必殺

시인은 슬프고 억장이 무너져서 쓴 글일텐데, 읽는 사람은 가슴이 아픈 한편 웃기다. 웃프다는 말이 딱 맞는 시인 것 같다.

 

김삿갓은 없다

452 희작시는 대체로 전승 과정에서 부연 확장된다. 예를 들어 김삿갓이 어느 자린고비 구두쇠 늙은이의 부고장에 종이를 아낀다며 류류화화(柳柳花花)’라는 넉 자를 써주었다. ‘버들버들 떨다가 꼿꼿이 죽었다는 뜻이다. 심장마비가 사망언인이었다. 이거이 한단계 더 발전해서 류류정정화화 (柳柳井井花花)가 되었다. ‘버들버들 떨다가 우물우물하더니 꼿꼿이 죽었다는 것이다.

 

454 옳은 것 옳다 하고 그른 것 그르다 함, 이것이 옳음 아니고   是是非非非是是

그른 것 옳다 하고 옳은 것 그르다 함, 옳지 않음 아닐세.         是非非是非非是

그른 것 옳다 하고 옳은 것 그르다 함, 이 그름이 아닐진대       是非非是是非非

옳은 것 옳다 하고 그른 것 그르다 함, 이것이 시비로구나.        是是非非是是非

~ 다 같은 발상에서 나온 말장난이다. 하지만 그 속에 담은 뜻까지 장난스러운 것은 아니다. 말투가 가벼울 뿐 내용은 진지하다.

 

455 “말하기 좋다 하고 남의 말 하는 것이, 남의 말 내 하면 남도 내 말 하는 것이, 말로써 말이 많으니 말 말을까 하노라.”

 

456 吾看世시옷

是非在미음

歸家修리을

不然点디귿

내가 세상 사람을 보니          吾看世人

시비가 에 달려 있더라.          是非在口

집에 돌아가 을 닦아라           歸家修己

그러지 않으면 하게 되리        不然点亡

그야말로 한자와 한글에 모두 능통해야 나올 수 있는 글이다. 박수가 절로 나온다.

 

슬픈 웃음, 해체의 시학

465 대체로 김삿갓의 장난 시를 읽을 때마다 필자가 느끼는 감정은 서글픔과 씁쓸함이다. 경국제세의 포부를 품고 배우고 익힌 학문과 지식을 고작 이깟 희학질에 썼더란 말인가? 그인들 이런 시를 짓고 싶었겠는가. 그에게 이런 장난질에 몰두하게끔 강요한 현실이 역으로 희대의 민중시인을 낳았다는 사실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 시는 그 사회를 비추는 거울인 까닭이다.

 

465 네 다리 소반 위에 죽 한 그릇 놓였는데

하늘빛과 구름 그림자 함께 배회하누나.

주인아 면목 없다 말하지 마시게나

물 위에 비쳐오는 청산을 아끼노니.

 

467 김삿갓이 장난질의 와중에 그 많은 과체시를 남겼다면 그 속에 담긴 뜻은 무엇이었을까? 나도 마음만 먹으면 체제가 요구하는 교과서적인 시 쓰기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항의가 아니었을까? 어쨌든 그의 웃음은 슬프다. 그 슬픈 웃음의 뒤안길은 외면한 채, 자꾸 가십적인 살을 붙여 그를 봉이 김선달류의 비천한 재담가로 만드는 것은 사람들의 악취미다.

 

한시 최후의 광경

468 오늘 아침 남의 수레 빌려서 타다가 홀연히 떨어져서 뒤꼭지가 깨졌네.

장안의 큰길에서 에고에고 울자니 세상 사람 모두 다 미치광이라 하더라.

 

471 명주비단고운

요리조리가는

어김없는네로다

좋은솜씨지은

요즘 많이 하는 랩이 따로 없다. 그러고 보면 힙합이나 랩을 후세 사람들은 지금 우리가 한시 공부하듯이 운율, 비유, 숨은 행간의 뜻 등을 분석하며 공부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472 오늘날 시단에서도 새로운 담론과 말하기 방식에 대한 모색은 활발히 계속된다. 기존 언어에 대한 회의와 불신의 벽을 허물고, 새로운 시의 문법을 찾아 나서려는 노력도 힘차다. 그러나 새로운 말하기가 강렬한 실험적 의도를 가졋음에도 시대정신이나 시정신에 의해 안받침되지 않는다면 이 또한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잡체시나 파격시가 오늘의 시단에 던지는 의미는 여전히 생생하다.

 

바라봄의 시학 관물론

지렁이의 머리는 어느 쪽인가

475 지렁이의 머리는 어느 쪽인가? 해를 피해 나아가는 쪽이다. 배는 어느 쪽인가? 바닥에 닿는 쪽이다. ~ 칠규, 오장을 갖추지 못한 지렁이도 제 몸의 해를 피해 이로움을 향해 나아갈 줄 안다. 그런데 사람 중에는 패망이 뻔히 보이는데도 눈 뜨고 그 길을 가서 제 몸을 망치고 일을 그르치는 이가 있다. 지렁이만도 못하다.

왠지 내가 지렁이만도 못한 사람이 되고 있는 것 같다.

 

476 꽃이 향기를 내는 것은 꽃의 본색에 불과하다. 빈 들판에 잘려 흩어지는 것도 정해진 운명이 아니겠는가. 꽃은 누가 알아주고 마고를 개의치 않고 향기를 낼 뿐이다. 인간이 한세상을 살다 가는 것도 이와 다를 게 없다. 귀인의 정원에서 정원사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피어나는 꽃이 있고, 깊은 산속에서 저만치 혼자서 피었다 지는 꽃도 있다. 능력 있는 인재와 그를 알아주지 않는 공평치 않은 세상길에 대한 탄식과 자조가 행간에 깔려 있다.

 

477 어떤 이가 야생 거위를 길렀다. 불에 익힌 음식을 많이 주자 거위가 뚱뚱해져서 못 날았다. 그 뒤 문득 음식을 먹지 않았다. 사람이 병이 났다고 생각하고 먹을 것을 더 많이 주었다. 그런데도 먹지 않았다. 열흘이 지나 몸이 가벼워지자 허공으로 날아가 버렸다. ~

자연은 자신의 리듬을 잘 알아 억지로 거스르는 법이 없다. 열흘 넘게 굶은 거위는 탐욕을 버리는 대신 자신을 잘 지켰다. 먹어서는 안 될 음식을 많이 먹고 뚱뚱해져 날지도 못하는, 그러고도 그 맛에 길들어 살을 찌우다 마침내 제 몸을 망치는 인간 거위들은 세상에 또 얼마나 많은가.

그러게. 거위만도 못한 사람들도 많은 것 같다. 남 얘기가 아니다.

 

477 개구리의 빠름이 해를 멀리하기에 충분하다. 그런데도 마침내 다른 놈에게 잡아먹히는 것은 뜻이 게을러서다. 재앙과 근심이 닥치는 것은 흔히 이만하면 되겠지 하는 마음에서 비롯된다.

자꾸 내 얘기처럼 들린다.

 

저 매화에 물을 주어라

480 “오늘은 정신이 전과 다르니 내가 죽을 모양이다. 다시는 약을 올리지 말라.” ~ 이날부터 선생은 약을 끊으시고 미음조차 입에 대지 않으셨다. 종일 가만히 누워 계셨으나 조금도 자세를 흩트리지 않았다.

미국의 평화주의자이자 자연주의자인 스콧 니어링(Scott Nearing)이 떠오른다. 그 역시 100세의 생일을 맞은 며칠 뒤 그만하면 충분히 살았다고 생각하고, 품위와 존엄 있는 방식의 죽음을 맞기로 했다. 생명을 늘이기 위해서 노력하지 않았으며 고통을 줄이기 위해 진통제나 마취제를 맞지 않았고 음식과 물조차도 끊고, 온전한 몸과 마음으로 죽음을 평화롭게 맞았다. 100세를 살았으니 그럴 자격이 충분히 있다고 생각한다. 잘 사는 것(well-being)만큼이나 잘 죽는 것(well-dying)이 더 중요하다는 걸 몸소 보여줬다.

 

생동하는 봄풀의 뜻

487 만물은 일정함 없이 형세에 따라 이리 변하고 저리 변한다. 덩달아 마음마저 이리 저리 옮겨 다니면 사람이 못 쓰게 된다. 마음의 본바탕을 굳게 지켜 거죽으로 드러나는 형상에 현혹되는 일이 없어야겠다.

 

488 요순의 사업은 천고에 우뚝한데 한 조각 뜬구름이 허공을 지나간다.

조촐히 작은 집은 푸른 시냇가에 있어 노는 고기 종일 보며 마음을 맑게 하네.

 

490 소에게는 윗니 없고 범은 뿔이 없나니 천도는 공평하여 부여함이 마땅토다.

이로써 벼슬길의 오르내림 살펴보니 승진했다 기뻐 말고 쫓겨났다 슬퍼 말라. ~

오늘 잠시 승진했다 하여 기뻐할 것이 없고, 또 좌천되어 한직으로 밀려났다 해서 실망할 일도 아니다. 이래서 좋으면 저래서 나쁘고, 저래서 미쁘면 이래서 언짢으니, 군자는 의연하게 제자리에 지켜 서서 변화의 기미를 보아 몸을 맡길 뿐이다.

 

491 만물 속에 답이 있다. 고요히 바라보라. 마음이 늘 문제다. 외물에 끌려다니면 안 된다. 가만히 응시하면 물이 흐르고 꽃이 핀다. 솔개가 날고 물고기가 뛴다. 하나도 모를 것 없다. 명징하고 투명하다.

가끔 전혀 상관없는 두가지 일의 작동 원리가 같다는 걸 알고 놀라는 경우가 있다. 달리기와 인생, 춤과 인생, 개의 사회와 인간 사회 등. 답을 찾기 위해 멀리 갈 필요 없다. 알아볼 수 있는 눈이 있어야 된다.

 

유아지경과 무아지경

494 어제 만발한 살구꽃은 진흙탕에 떨어지고, 그 자리에 복사꽃이 환한 웃음을 머금었다. 슬퍼할 것도 안타까워할 일도 아닌 셈이다. 만발한 복사꽃을 바라보는 경이와 비바람에 떨어진 살구꽃의 빈 가지를 바라보는 허탈을 함께 포착했다. 봄은 그렇게 와서 또 그렇게 간다. 우리네 인생도 마찬가지다. 시인은 여기서 사물의 한 이치를 반추한다.

 

495 진정한 의미에서 무아지경의 시는 없다. 무아지경이라고 해서 시인의 주관 정취가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시학상의 무아지경은 시인의 정신이 사물로 녹아들어 물아의 구분이 사라지고, 마침내 자신을 잠시 잊어버린 것에 불과하다.

내가 물아의 구분이 사라지고 마침내 나를 잠시 잊어버리는 무아지경의 경지를 경험할 때는 물속에 있을 때다. 다이빙을 할 때 간혹 여긴 어디인가, 나는 누구인가…?’하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우주의 무중력 상태일 때와 비슷한 느낌이라고 한다. 우주 여행을 하기 전까지는 바다속에서라도 무아지경을 느껴야겠다.

 

497 슬픈 것은 소실댁인데 우는 것은 갈매기다. 슬픈 그녀는 정작 낮잠이 깊었고, 갈매기가 대신 나서서 소금발이 쓰리다며 끼룩끼룩 운다. 퇴짜 맞아 녹슬어가는 툇마루의 놋요강 같은 그녀의 슬픔을 누가 헤아릴까? 더욱이 그녀는 지금 만조의 때가 아닌가? 시인은 애써 화면 밖에 몸을 빼고 있지만, 재판관처럼 그녀의 감정 속에 끼어든다. 유아지경이다.

 

속인과 달사

497 통달한 사람은 괴이한 것이 없지만 속된 사람은 의심스런 바가 많다. 본 것이 적어 괴이함도 많은 것이다. 대저 어찌 달사(達士)라 하여 물건마다 쫓아가서 직접 눈으로 본 것이겠는가, 하나를 들으면 눈앞에 열 가지가 펼쳐지고, 열을 보면 마음에 백 가지가 베풀어져, 천 가지 괴이함과 만 가지 기이함을 도로 사물에 부칠 뿐 자기와는 간여함이 없다. 때문에 마음은 한가로워 여유가 있고 응수함은 다함이 없다. ~ 사물은 제 스스로 괴이함이 없는데 자기가 공연히 성을 내며, 한 가지만 같지 않아도 만물을 온통 의심한다. ~

달사와 속인을 가르는 경계는 무엇인가? 그것은 깨달음이다.

 

499 깨달음이 없이는 우리 모두는 눈뜬 장님일 뿐이다. 눈을 뜨고 있다고 다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보려 한다고 보이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깨달음은 결코 거저 얻어지지 않는다. 사물을 바라보는 눈은 아무렇게나 열리지 않는다. 손끝이 갈라지는 연습 없이, 그저 기타 들고 동해 바닷가에 서 있다고 훌륭한 연주자가 되는 법은 어디에도 없다. 하지만 깨닫는 순간 모든 것은 순식간에 변해버린다. 차원이 달라진다. 속인과 달사의 경계는 종이 한 장 차이이지만, 실제로는 하늘과 땅 차이다.

 

499 익숙한 사물과 낯설게 만나, 그 낯섦으로 그 사물을 새롭게 만나는 것, 이것이 관물론이 시학과 만나는 접점이다. ~ 눈앞 사물과의 설레는 만남, 세계와 줄다리기하는 팽팽한 긴장이 없이 좋은 시는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다. 시인은 반란자다. 그의 눈이 포착하는 모든 것은 언제나 새롭다.

 

깨달음의 바다 선시(禪詩)

산은 산, 물은 물

504 선은 분별지를 마음에서 걷어내는 것이다. 명상(瞑想), 즉 생각을 잠재우고, 묵상(默想), 곧 생각을 침묵시키는 것이다. 그때 남는 것은 마음뿐이다. 선은 마음을 텅 비워 본래의 나와 만나는 순간이다. ~ 다시 말해 선은 생각을 걷어내는 마음 공부다. 근심과 기쁨을 마음에서 걷어내는 것이 바로 선이다.

 

507 ‘만약에 사상산을 건너려고 한다면 토끼 뿔 지팡이를 짚어야만 하리라.

생사의 바다를 건너고 싶다면 모름지기 밑 빠진 배를 타야 하리라.’

토끼에게 무슨 뿔이 있으며, 있다 한들 얼마나 길어 지팡이로 만드겠는가. 밑 빠진 배를 타야만 건널 수 있는 바다는 어떤 바다인가? 읽을수록 알쏭달쏭하고 들을수록 해괴하다. ~

그림자 없는 나무 베어와서는 물속의 거품에다 태워버린다.

우습구나 소등에 올라탄 사람 소 타고서 다시금 소를 찾누나.’ ~

불가에서 멱우(覓牛)’는 구도와 같다. 깨달음이 바로 앞에 잇는데 미망에 사로잡혀 엉뚱한 데서 찾아 헤맨다는 의미다.

이렇듯 말 같지 않은 소리만 골라서 하는 까닭은 단 하나다. 따지지 말라는 것이다 머리로 따져 알려 들지 말고 가슴으로 느껴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하라는 말이다. 걷이 말로 하자면 이렇게밖에 설명할 수 없는 세계를 일러주는 중이니 섣불리 사변의 잣대를 들이댈 생각일랑 아예 하지 말라는 우격다짐이다.

의미는 여기저기에서 끊어지고, 따라 읽으려는 순간 벼랑 끝에 선 나를 본다. 선은 자기 자신과 맞대면해서 자신을 한칼에 베겠다는 것이다. 남을 다 속여도 자신을 속이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 만 사람이 다 인정해도 내 스스로 수긍하지 못하면 도로(徒勞)에 그치고 만다.

세상에는 따지지 말고 그냥 느끼거나 깨달아야 하는 일들이 분명이 있다. 대표적인 것이 종교다. 그냥 믿어야지 분석하고 따지면 믿을 수 없게 된다. 하지만 따져야 할 것들도 있다. 두 가지의 다름을 깨달아야 한다.

 

선기와 시취

510 핵심은 마음을 항상 흐르는상태로 유지하라는 것이었다. 진정한 검술은 의식적으로 얻어진 기교를 넘어선다. 높은 경지의 검객은 자신이나 적의 검의 움직임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다만 무의식의 명령에 몸을 맡긴다. 검을 휘두르는 것은 이제 그가 아니다.

 

515 인생은 물거품이요 한바탕 봄꿈이다. 성가신 가죽 부대를 벗어던지니 속이 다 후련하다. 그 뒤엔 무엇이 남는가. 붉은 해가 서산에 진다. 슬프고 안타까울 일이 하나도 없다. 이렇듯 선시의 세계는 칼 끝 같은 깨달음을 노래한다. 언어가 무력화되고 의미가 힘을 잃는다.

 

설선작시, 본무차별

518 선객은 깨달음의 미묘한 소식을 시의 형식을 빌려 쓴다. 금상첨화(錦上添花). 시인은 선의 사고방식을 배워 자신의 생각을 이미지로 전달한다. 절옥도(切玉刀)가 따로 없다.

 

522 스스로를 괴롭혀 쥐어짜는 시, 안 알아준다고 닦달하는 시, 알맹이 없이 허세만 남은 시는 가짜다. ~

세상 사람들은 이 구절이 기막힌 줄을 대부분 잘 알지 못한다. 대개 기이한 것만 가지고 구하려 들기 때문이다. ~ 괴롭게 끙끙대고 어려운 것만 말하는 자들은 대체로 때닫지 못한 자들이다.”

내가 그동안 시를 어려워하고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내게는 대부분의 시가 이렇게 보였다. 이제보니 내가 시를 잘 몰라서 그랬던 것 같다. 시를 이해하려해도 공부가 필요한 것 같다.

 

523 깨달음 없는 참선은 공연히 제 몸을 들복는 짓이다. 깨달음이 없는 시는 말장난에 불과하다. 심장을 토해내고 폐부를 도려내는 고심참담도 좋지만, 깨달음은 원래 없는 것을 쥐어짜는 조탁과는 관계가 없다. 옛사람이 길을 따르지 말라. 너는 너의 길로, 나는 나의 길로 선에 도달하고 시를 깨달을 뿐이다. 남의 흉내로는 안 된다. ~ 좋은 시는 끊임없는 반란의 산물이어야 한다. 친숙한 관습과의 결별, 익숙해진 접점에서 벗어나기를 쉼 없이 추구해야 한다.

 

거문고 소리는 어디서 나는가

527 시의 생각과 선의 사고는 무던히도 닮았다. 시인과 선객은 가깝게 왕래한다. 서로 말귀가 통하고 배짱이 맞기 때문이다. 선방에 가짜 선객이 많듯이 시단에 가짜 시인이 많은 것도 같다 대충 비슷하게 흉내 내도 사람들이 잘 모르는 점도 비슷하다. 하지만 진짜 앞에서는 둘 다 꼼짝 못한다. 숨도 쉴 수 없다.

 

528 선시는 종종 오해되고 있다. 그저 말 안되는 뚱딴짓소리만 선시로 말해서는 안 된다. ~ 구름을 잡는 소리를 해야만 선시라고 착각하지 말라. 선시도 일상성을 벗어나지 않는다. ~ 선시는 깨달음 없는 삶, 생존의 나날을 혐오한다.

선의 화두가 그러하듯이, 좋은 시는 타성에 젖은 뒤통수를 후려친다.

 

산과 물의 깊은 뜻 산수시

가짜 어옹과 뻐꾸기 은사

533 귀거래 귀거래 한들 물러간 이 그 누구며

공명이 부운(浮雲)인 줄 사람마다 알건마는

세상에 꿈 깬 이 없으니 그를 슬허하노라

 

청산에 살으리랏다

537 이렇듯 자연은 우리에게 떳떳한 삶의 모습을 일깨워준다. 일상에 찌들어 생기를 잃고 풀이 죽어 있을 때, 자연은 인간에게 소생의 원기를 불어넣어준다. ()의 동서를 막론하고, 때의 고금을 떠나서 자연이 예술의 변함없는 경배의 대상이 되어온 것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그러나 자연이 아무나 자신의 품에 끌어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결국은 자연을 찾아가게 되는 것 같다. 요즘 나는 자연인이다라는 TV 쇼가 인기다. 세상에서 나름 잘 나갔던 사람들도 있고, 너무 힘들어서 견디다 못해 산 속으로 들어간 사람들도 있다. 대부분의 생활을 자급자족해야 하는 힘든 일인데도 하나 같이 하는 말은 건강해졌다는 것. 그리고 행복하다는 것. 물론 외롭다는 말도 한다. 하지만 어쨌든 자연이 우리에게 떳떳한 삶의 모습을 일깨워준다는 말은 맞는 것 같다.

 

537 대저 천하의 온갖 물건을 다 끌어다가 하고 싶은 대로 해보는 것은 부귀한 사람이 즐거움이다. ~ 그러나 산림에 사는 선비는 천하 사람들이 즐거워하는 것을 보더라도 마음이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다. 간혹 마음으로 하고 싶은 것이 있었지만 따져보아 얻을 수 없어 그만 둔 자는 물러나 이곳에서 즐거움을 얻는다. 저 부귀한 사람은 능히 온갖 물건을 마음대로 할 수 있지만 함께 할 수 없는 것이 있으니 오직 산수의 즐거움이 그것이다.

 

요산요수의 변

538 “지혜로운 사람은 사리에 통달하여 두루 통해 막힘 없는 것이 물과 같으므로 물을 좋아한다. 어진 사람은 의리에 편안하여 중후하여 옮기지 않는 것이 산과 같기에 산을 좋아한다.”

 

538 “군자는 물을 덕()에 비유한다. 두루 베풀어 사사로움이 없으니 덕과 같고, 물이 닿으면 살아나니 인()과 같다. 낮은 데로 흘러가고 굽이치는 것이 모두 순리에 따르니 의()와 같고, 얕은 것은 흘러가고 깊은 것은 헤아릴 수 없으니 지()와 같다. 백 길이나 되는 계곡에 다다라도 의심치 아니함은 용()과 같고, 가늘게 흘러 보이지 않게 다다르니 살핌과 같으며, 더러운 것을 받아도 사양치 아니하니 포용함과 같다. 혼탁한 것을 받아들여 깨끗하게 하여 내보내니 사람을 착하게 변화시킴과 같다. 그릇에 부으면 반드시 평평하니 정()과 같고, 넘쳐도 깎기를 기다리지 않으니 법도와 같고, 만 갈래로 굽이쳐도 반드시 동쪽으로 꺾이니 의지와 같다. 이런 까닭에 군자는 큰 물을 보면 반드시 바라볼 뿐이다.”

 

들 늙은이의 말

544 구름은 희고 산은 푸르다. 시내는 흘러가고 돌은 서 있다. 꽃은 나를 맞이하고 새는 노래 부른다. 골짜기는 메아리로 대답하고 나무꾼은 노래한다. 사방이 온통 적막해지니 내 마음 절로 한가해지네.

 

가을 구름이 내 정수리를 어루만지네

551 우러러 토령을 보니 5리쯤 되겠는데, 잎 진 단풍나무는 가시와 같다. 흘러내린 자갈돌이 길을 막아선다. 뾰족한 돌이 낙엽에 덮였다가 발을 딛자 비어져 나왔다 벌렁 나자빠질 뻔하다가 일어나느라 손을 진흙 속에 묻고 말았다. 뒤에 오던 사람들이 웃을까 봐 부끄러워 단풍잎 하나를 주워 들고서 그들을 기다리는 체하였다.

재미있는 시트콤의 한 장면 같다. 점잖은 체 걷던 양반이 미끄러져 나자빠질 뻔 하다가 얼른 일어나서 단풍잎 주으려고 그런 척 한다니나도 비슷한 일을 겪은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잘 기억이 안 난다. 아니 정말 어느 시트콤에서 봤던 장면을 내 경험이랑 착각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554 무릇 유람이란 흥취를 위주로 하나니, 노님에 날을 헤이지 않고 아름다운 경치를 만나면 머물며, 나를 알아주는 벗과 함께 마음에 맞는 곳을 찾을 뿐이다. 저 어지러이 떠들썩하는 것은 나의 뜻이 아니다. 대저 속된 자들은 선방에서 기생을 끼고 시냇가에서 풍악을 베푸니, 꽃 아래서 향을 사르고 차 마시는 데 과일을 두는 격이라 하겠다. 어떤 이가 내게 와서 묻는다. “산 속에서 풍악을 들으니 어떻습디까?” “내 귀는 다만 물소리와 스님이 낙엽 밟는 소리를 들었을 뿐이오.”

 

실낙원의 비가 유선시

풀잎 끝에 맺힌 이슬

558 인생이란 마치도 꿈과 같은 것

종당에는 허무로 돌아가거늘.

 

558 칼 빼어 물 베어도 물은 다시 흐르고

잔 들어 맘 달래도 시름은 더 깊어지네.

인생살이 사는 동안 뜻 같은 일 없었지

내일엔 머리 풀고 쪽배 타고 떠나리.

 

닫힌 세계 속의 열린 꿈

566 선계의 형상은 현실에서의 억압이 역으로 투사되어 열린 세계로의 비상을 꿈꾼 결과다. 꿈은 무의식의 세계이다. 인간의 의식이 한계에 도달할 때 무의식이 열린다. 무의식의 세계는 원초적 상징들로 가득 차 있다. 상징은 좌절되었던 본능적 충동을 만족시키려는 욕구와 관련된다. 이러한 상징들은 꿈을 통해 신비한 세계를 열어 보임으로써 현실에서 상처받고 왜소해진 자아의 의식을 확장시키고 소생시켜준다.

 

구운몽, 적선의 노래

570 젊어선 안기생을 따라나서서 바다 위 봉래산을 노닐었다네.

같이 약목의 그늘에 앉아 둘이 함께 대추를 한 알 먹었지.

한 끼 먹을 사이라고 말을 하지만 오랜 세월 흘렀음을 어찌 알리오.

그 때에 버렸던 대추의 씨가 어느새 월굴을 찌른다 하네.

선가의 일이야 아득만 하여 세상과는 자취를 달리 하누나.

어이해야 봉래궁에 돌아가 누워 천추만춘 긴 세월을 누리어볼꼬.

부상의 동쪽 바다 내려다보면 모래 먼지 자옥이 날리는구나.

어렸을 때 읽었던 소설 구운몽이 떠오른다. 그냥 남자 선비의 판타지 같았는데

 

이카로스의 날개

575 꿈에 청의동자의 안내로 상계에 올라 군선이 둘러싼 가운데 옥황으로부터 장생편을 받았다. 한 번만 읽어도 3,000수를 한다는 그 장생편을 막 읽으려는데 창밖 처마 밑에서 재잘대는 제비 소리에 그만 꿈을 깨고 말았다. 백옥루의 웅장한 광경과 늘어선 군선의 장관이 깨진 창으로 찬 기운이 스멀스멀 돋아나는 방 안으로 급강하되면서, 시인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화려한 장식의 황금 궁궐이나 신선의 음악소리가 아니라 눈앞의 온갖 근심뿐이다.

 

576 초월의 소망을 담은 유선의 행위가 현실의 새로운 비전과 연결되지 못한다 해서 선계를 향한 꿈 자체를 배격할 필요는 없다. 실현될 수 없다해서 더 나은 삶을 향한 열망이 배격되어야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삶의 절망이요 공포가 아닐 수 없다. 유선의 과정에서 만끽한 인간 한계를 추월하는 해방감은 세속적 가치의 무의미함과 인간 존재의 왜소함을 새삼 인식케함으로써 현실의 불우와 모순으로부터 잠시 떨어져 스스로를 객관화할 수 잇는 거리를 확보해준다.

 

시와 역사 시사와 사시

할아버지와 손자

580 산도 아닌 밭두둑 주변에 울멍줄멍 돋아난 새 무덤들 중에 소년의 아버지가 묻혀 있다. 아들의 무덤에 제사지내고 돌아오는 아버지의 심정, 할아버지가 왜 저러시나 싶어 말똥말똥 올려다보는 어린 손자의 천진한 눈빛. 오랫동안 잊히지 않는 슬픈 영상이다. 짧은 시 속에 함축이 매우 깊다. 시인은 임진왜란으로 이 땅에서 벌어진 죽음의 참상을 남의 얘기 하듯 장면으로 포착한다. 슬픔은 간접화 되고 전쟁의 체험도 배경으로 숨는다. 오히려 인생무상의 주제를 떠올리기 십상인 이 시는 그럼에도 깊은 아픔을 내재한다.

그런데 엄마는 또 어디 있는걸까? 혹시 엄마도 저 무덤 중의 하나에 누워있는 건 아니겠지. 아니었으면 좋겠다. 그냥 여자라서 무덤에 제사 드리는게 허락되지 않아서 못 오고 집에서 아들이랑 시아버지 기다리고 있는 거라면 좋겠다.

 

582 이맛살 찡그리며 듣다가 말고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리네.

아전이 나서며 아뢰는 말이 곡할 이나 있다면 덜 슬픕지요.

칼날 아래 온 집안이 죄다 죽어서 곡할 이도 없는 집이 얼마인뎁쇼.”

옛날이나 현대나 우리 나라에는 왜 이렇게 슬픈 일이 많았던 걸까? 우리 나라만이 아니라 세계 맣은 곳에서 지금도 가슴 아픈 일들이 많이 벌어지고 있다. 안 보려고 해서 안 보일 뿐앞으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

 

시로 쓴 역사, 시사

583 시는 시대를 비추는 거울이다. 시의 거울에는 그 시대 사람들의 가람과 애환이 그대로 떠오른다. 한 편의 시는 방대한 사료로 재구성한 어떤 역사보다 더 생생하다.

 

587 <목민심서(牧民心書)>는 이렇게 말한다. “심하게는 배가 불룩한 것만 보고도 이름을 짓고, 여자를 남자로 바꾸기도 한다. 더 심한 경우 강아지 이름을 혹 군안에 기록하니, 이는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정말 개다. 절굿공이의 이름이 혹 관첩에 나오니 이는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정말 절굿공이다.” 웃어야 할 일인가, 울어야 할 일인가. 어쨌건 삼정의 문란을 말할 때 당시 이를 증명하는 어떤 통계수치보다도 우리는 이 <애절양> 한 편을 통해 그 시대 백성의 절규를 실감으로 듣는다. 시는 이렇게 역사가 된다.

그야말로 헬조선이었던 것 같다.

 

변새의 풍광

591 가을 변방 첫눈이 하마 내리고 장군은 멀리 군대 출정시키네.

병영 나눔 횃불로 표시를 하고 말을 놓아 깃발도 거두질 않네.

찬 다라 아래 장막은 습기에 젖고 어둔 사막 밤 정찰 더뎌만 진다.

군사는 모두 다 흰머리여서 오랑캐 멸할 날 볼 이 누구랴.

 

592 이 대목은 읽는 이로 하여금 저도 모르게 비장한 격정에 젖어들게 한다. 변새시에는 당시 전쟁터의 스산한 분위기와 끝없이 계속되는 정복 전쟁에 지친 고통스런 신음소리가 천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생생하게 살아 있다. 그래서 시는 그 시대를 비추는 거울이 된다.

 

궁사, 한숨으로 짠 역사

593 쓸쓸히 퇴락한 낡은 행궁에 궁화만 적막히 붉게 피었네.

머리가 희게 센 궁녀가 있어 한가로이 현종 때를 얘기하누나.

 

사시, 역사로 쓴 시

601 역사는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돈다. 누가 역사의 교훈을 외면할 수 있으랴. 시인들이 지나간 역사의 거울에 현재를 비춰보는 것은 이 때문이다. ~

사시 또는 영사시는 역사적 사실을 주제로 쓴 시다. 차고술금, 옛일을 끌어와 지금을 말하는 것은 한시의 오랜 관습이다. 시인은 맥없이 옛일을 들추지 않는다. 그들은 과거 속에서 현재를 바라보는 우회 통로를 찾고 있다.

 

603 역사란 무엇인가? 현재의 퇴적일 뿐이다. 지금 시대의 자취를 일러 후세는 옛날이라 한다. 그렇다면 굳이 지나간 옛날에 얽매일 필요가 없겠다. 지금 여기에 충실하면 그것이 곧 옛날이다. 시사는 시인의 충실한 증언이 뒷날의 역사로 자리매김된 것이다. 사시는 시인이 과거의 거울에 비춰 현재를 읽으려는 노력의 산물이다. 인간의 삶은 본질적으로 변한 것이 없다. 어제의 태양은 오늘도 그대로 뜬다. 지나간 역사가 오늘을 비추는 등불인 까닭이다.

전통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전통을 지켜야 한다며 그동안 해왔던 방식을 고수하고 집착하는 경우가 많지만 오늘의 변화가 나중에는 전통이 될 것이다. 지금 오늘의 변화에 충실하게 살면 그것이 곧 전통이 될 것이다.

 

사랑이 어떻더냐 정시

담장 가의 발자국

607 비단 버선 물결 걷듯 사뿐사뿐 가더니 중문 한번 들어서곤 아득히 사라졌네.

다정할사 잔설이 그래도 남아 있어 그녀의 발자국이 담장 가에 찍혔구나.

 

야릇한 마음

611 무엇을 이루자고 나는 이 산중에 있는가. 저 봄풀을 보아라. 저들도 싱그러움을 뽐내며 저마다 향기를 풍기고 있지 않은가. 사람이 한 세상을 살아가는 일은 사람끼리 어깨를 비비며 희로애락을 함께 나누는 것이 아니었던가. 어째서 나는 이를 모두 떠나와 깊은 산 속에서 이 청춘의 시간을 태우고 있단 말인가. 생각이 여기에 미친 그녀는 6년간의 산중 생활을 그만두고 환속하고 말았다.

 

612 흰 모시 적삼에 눈썹 곱게 그리고서 마음속 정 둔 얘기 재잘재잘 얘기하네.

임이여 내 나이를 묻지를 말아주오 50년 전에는 스물 셋이었다오.

빵 터졌다. 일흔 셋의 할아버지가 나도 50년 전에는 스물 셋이었다고 내 나이를 묻지 말라니예나 지금이나 나이 드는 것은 싫은 것 같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런 얘기 들으면 그 할아버지 주책이라고 했겠지만 지금은 왠지 귀엽다는 생각이 든다.

 

보름달 같은 임

615 제 마음 일편단심 대나무 같고 임의 마음 둥그런 달과 같아요.

둥근 달은 찼다가도 기운다지만 대 뿌리는 얼키설키 서려 잇지요.

 

진 꽃잎 볼 적마다

617 제가 가진 마름꽃 거울을 보면 그대가 처음 줄 때 생각이 나요.

임은 가고 거울만 홀로 남으니 다시는 내 모습 안 비춰봐요.

 

619 깜빡 잠이 들어 임을 만나면 한마디 건네기도 전에 깜짝 놀라 잠이 깬다. 임을 만나기를 얼마나 고대했는데, 정작 만나 한마디도 못한 것이 말할 수 없이 아쉽다. 만날 길 없어 밤마다 꿈길로 찾아 나선다. 이것이 사랑이다. 어렵사리 임을 만나 놀랍고 두근거려 꿈을 깬다 이것은 그리움이다.

 

까치가 우는 아침

619 약속을 하시고선 왜 늦으시나 정원의 매화도 시드는 이때.

나무 위 까치가 울기만 해도 부질없이 거울 보며 눈썹 그려요. ~

아침 까치가 울면 귀한 손님이 온다. 까치 소리가 들리면 임이 틀림없이 올 것 같아 그녀는 거울 앞에서 눈썹을 고친다. 헛손질이 잦아질수록 그녀의 불안이 깊어진다.

 

내가 죽고 그대가 살았더라면

622 시집올 제 해온 옷이 반 넘어 그대로라 상자 열고 살펴보다 더욱 맘을 상하네.

평생 좋아하던 것을 함께 담아 보내니 빈산에 다 맡기어 티끌 되어 스러지라.

얼마나 일찍 죽었기에 시집올 제 해온 옷이 반 넘어 그대로일까. 옛날이라 시집도 일찍 왔을텐데스무살이나 넘었을까? 남은 사람도 안 됐지만 그렇게 일찍 죽은 여자도 너무 안 됐다.

 

625 달은 전처럼 떴어도 그 밤 함께 발을 걷어올리다 탄성을 발하던 그 임이 내 곁에 없다. 닫아건 문에 바깥일에 흥미를 잃은 마음을 담았다. 변함없는 자연과 덧없는 인간사가 교차되면서 적막한 심사를 고조시킨다.

 

한시와 현대시, 같고도 다르게 상동구이론

동서양의 수법 차이

630 왜 산에 사느냐고 묻는데, 딱히 할 말이 없어 그저 웃고 대담은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마음이 전혀 답답하지 않고 오히려 더 여유롭다. 복사꽃이 물 위로 떠가는 것을 보니 인간 세상이 아닌 무릉도원이 바로 여기가 아니겠느냐고 했다.

 

한시와 모더니즘

633 봄산을 동반 없이 혼자서 찾아가니 쩡쩡 나무 찍는 소리 산이 더욱 그윽하다.

시내 길 남은 추위 얼음 눈을 나서 석문의 지는 해에 숲 언덕에 다다랐네.

욕심 없어 밤이면 금은 기운 알아보고 해 멀리해 아침마다 사슴 노닒 바라본다.

흥겨워 아마득히 나갈 곳을 헤매다가 그댈 보니 마치도 빈 배를 띄웠는 듯.

 

지훈과목월의 거리

640 흰 달빛 자하문

달안개 물소리

대웅전 큰 보살

바람 소리 솔 소리

범영루 뜬 그림자

흐는히 젖는데

흰 달빛 자하문

바람 소리 물소리.

 

641 시인은 다른 한 마디 보태지 않는다. 보여줄 따름이다. 그런데도 안개 낀 달밤, 불국사의 몽환적 분위기 속에서 바람 소리 물소리가 풍경으로 되살아난다. 마법 같다.

그림보다 사진보다 더 잘 보여줄 수도 있다. 그야말로 마법 같다.

 

밤비와 아내 생각

644 너도 밤마다 꿈에 나를 본다 하니

오고 가는 길에 만날 법도 하건마는

둘이 다 바쁜 마음에 서로 몰라보는가.

바람아 부지 마라 눈보라 치지 마라

어여쁜 우리 딸의 어리고 고운 꿈이

날 찾아 이 밤을 타고 이백리를 온단다.

~ “그리운 내 딸아! 아빠도 네가 못 견디게 보고 싶어 꿈길을 자꾸 헤맨단다. 하지만 내 발걸음은 번번이 너를 놓쳐 안타깝구나. 서로 달려가기만 하느라 중간에 길이 어긋났던 게지. 바람아, 눈보라야! 어여쁜 우리 딸의 고운 꿈길에는 행여 얼씬할 생각도 하지 마라. 그 여린 것이 밤마다 2백 리씩 애비 찾아 오가는 길을 아무 방해도 하지 말아주려무나.”

 

낯선 마을의 가을비

649 모방에도 차원이 있다. 모동심이의 모방이 있고, 심동모이의 모방이 있다. 겉모습만 비슷하고 알맹이는 딴판인 것은 모동심이다. 하급의 모방이다. 겉보기엔 전혀 다른데 알맹이가 같은 것이 심동모이다. 우리가 말하는 의미 있는 모방은 심동모이의 모방이다. 껍데기만 같으면 못 쓴다. 이것을 다시 한마디로 표현한 말이 상동구이다. 같음을 숭상하되 다름을 추구한다. 같지만 다르고, 다르기에 같다는 말이다. 과거와 현재는 이렇게 만난다. 한시와 현대시도 그렇다.

 

에필로그: 그때의 지금인 옛날 통변론

지팡이 자국마다 고이는 봄비

거미가 줄을 치듯

658 오늘날의 독서는 어떤가. 천박한 식견으로 이미 용도 폐기된 낡은 지식을 금과옥조인 양 떠받든다. 저 혼자 보기 아깝다고 다른 사람에게도 강요한다. 취해 죽으려면 독주를 들이켜야지, 왜 술지게미만 배 터지게 먹는가? 세계와 가슴으로 만나려거든 눈을 크게 뜨고 마음을 활짝 열 일이지, 왜 좀먹고 쥐 오줌에 지린 옛 책에 코를 박는가? ~ 우리의 지식이란 이렇듯 살아 잇는 사물, 가슴 뛰고 피 흐르는 우주를 사변의 틀 속에, 언어의 무덤 속에 가두어 죽이는 것은 아니었던가?

 

그때의 지금인 옛날

660 옛것을 기준으로 지금을 보면 지금이 진실로 낮다. 그렇지만 예사람이 스스로를 볼 때 반드시 자신이 예스럽다 여기진 않았을 것이다. 당시에 보던 자도 또한 지금 것으로 보았을 뿐이리라. 세월은 도도히 흘러가고 노래는 자주 변한다. 아침에 술 마시던 자가 저녁엔 그 장막을 떠나간다. 천추만세는 지금부터가 옛날인 것이다.

 

사기의 불사기사

665 옛것을 본 받아라. 그러나 그 정신과 원리를 본받아야지, 형식을 본받아서는 안 된다.

옛것만 아니라 다른 문화에서 배우는 것도 마찬가지다. 외국에서 유학을 하는 사람들 중에 선진문물을 배운다며 그 정신은 못 배우고, 껍데기만 배워서 닮는 사람들도 많이 봤다. 무엇이든 껍데기보다는 정신이 중요하다.

 

666 설사 우리에게 거북선이 없었다 해도 충무공이 있는 한 왜군은 해상권을 장악할 수 없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거북선이 아니다. 그것을 운용하는 장수의 용병술이다. 아무리 해박한 이론의 무장이 있어도, 그것을 운용하는 통변의 정신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시를 쓰는 데 이론은 오히려 장애가 될 때가 더 많다. 우리 해군의 승리는 결코 거북선 때문이 아니다. ~ 우리가 진정 되찾아야 할 것은 바다 속에 가라앉은 거북선이 아니라, 충무공의 그 거룩한 정신일 뿐이다.

 

도로 눈을 감아라

670 화담 선생이 길을 가다가 집을 잃고 길에서 울고 있는 사람을 만났더랍니다. “너는 왜 우는가?” 그가 대답하기를, “제가 다섯 살에 눈이 멀어 이제 스무 해가 되었습니다. 아침에 나와 길을 가는데 갑자기 천지만물이 맑고 밝게 보이는지라 기뻐 돌아가려 하니, 골목길은 갈림도 많고 대문은 서로 같아 제 집을 찾지 못하겠습니다. 그래서 웁니다.” 선생이 말했다. “내가 네게 돌아가는 법을 가르쳐주겠다. 도로 네 눈을 감아라. 그러면 바로 네 집을 찾을 수 있으리라.” 이에 눈을 감고 지팡이를 두드려 걸음을 믿고 도달할 수 있었더랍니다. 이것은 다른 거시 아닙니다. 빛깔과 형상이 전도되고, 슬픔과 기쁨이 작용이 되어 망상이 된 것이지요. 지팡이를 두드리며 걸음을 믿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가 분수를 지키는 관건이 되고, 집으로 돌아가는 보증이 됩니다.

 

670 20년 만에 눈이 열린 장님에게 다시 눈을 감으라니, 이것이 무슨 말인가? 기적같이 열린 광명한 세상을 거부하란 말인가? ~ 내가 나의 주인이 못 되고, 내 집을 찾아가지 못할진대 열린 눈은 망상이 될 뿐이다. 소화하지 못하는 지식은 지식이 아니다. 우리는 눈뜬 장님이었다. ~

도로 눈을 감아라. 그러면 네 집을 찾으리라. ~ 눈에 현혹되지 말라. 네 튼튼한 발을, 네 듬직한 지팡이를 믿어라. 갑자기 눈이 열리기 전 내 앞에 놓여 있던 세계, 익숙해져 있던 세계, 나와 사물 사이에 아무런 간극도 없던 세계로 돌아가라. 그 세계가 속삭이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본래의 제자리를 찾아야 할 것이다. 그 다음 차차 새롭게 열리는 빛의 세계를 바라볼 일이다. ~

다시 눈을 감아라.

 

 

내가 저자라면

l  목차에 대하여

처음 책을 읽으면서 이게 뭔가 했다. 기존의 시집이나 논어, 도덕경 해석처럼 한시가 먼저 나오고 그 다음에 해석이 나올 줄 알았는데, 몇 페이지가 지나도록 시가 보이지 않아서 당황했었다. 좀 정신없기는 하지만 이런 구조도 좋은 것 같다.

 

l  보완이 필요한

한 시에 독음이 있었더라면 좋았겠다. 대부분 독음 없이 해석한 부분도 좋았지만 말장난의 행간, 특히 쌍관의 같은 부분은 독음까지 알아야만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물론 인터넷을 검색하면 어렵지 않게 독음을 찾을 수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옆에 병기되어 있었더라면 좋았을 것 같다.

<한시미학산책>이라 독자가 어느 정도 한자에 대한 이해가 있다고 생각해서 였을까? 사실 이 책은 나같이 한자에 대한 이해가 매우 부족한 사람도 재미있게 읽고 한시를 감상할 수 있는 책이다. 독음이 있었더라면 더 재미있게 볼 수 있었을 것 같다.

 

l  책의 장점

나는 한시는커녕 일반 시도 별로 안 좋아한다. 안 좋아한다기 보다는 뭔가 심오해 보이는 시는 어려워서 이해가 안 되고, 쉬운 시는 그냥 말장난 같다고 느껴져서 였다. 그런데 이 책을 보면서 한시에 대한 오해가 많이 풀렸다. 한시가 교과에서만 보던 어렵고 딱딱한 문장이 아니라 아름답고 가슴을 울리는 시가 될 수 있음을 알았다. 그리고 말장난 같다고 느꼈던 시들도 사실은 그저 장난이 아니라 어울림이 있는 좋은 시라는 걸 알게 되었다. 좋은 시들을 소개해서 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번역과 정리를 잘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나처럼 한시에 관심 없고 몰랐던 문외한도 한시에 관심을 갖게 하고 더 찾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들게 만든 점.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다.

 

l  내가 저자라면 

얼마나 한자 공부를 많이 하고 한시를 많이 알아야 이런 글을 쓸 수 있을까? 책을 읽을수록 저자의 방대한 지식과 내공에 놀랐다. 나라면 이런 책을 쓸 생각도 못했을 것 같다. 시를 직접 쓰는 것도 어렵지만 이렇게 시 이론과 그에 딱 어울리는 시를 배치해서 책으로 정리하는 것도 매우 어렵고 의미있는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내가 저자라면 2편이나 부록 정도로 따로 빼서 저자와 시별로 정리하는 페이지를 만들었을 것 같다. 시 이론을 중심으로 정리가 되다 보니 한 시인의 시가 여기 저기에 등장해서 좀 중구난방 스럽다는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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