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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연구
사마천(司馬遷: BC. 145? ~ 90?)
전한 시대의 역사가로 중국 최고의 역사가로 평가받고 있다. 중국을 넘어 동양 최고의 역사서로 손꼽히고, 외국인들이 중국을 이해하기
위해 가장 많이 읽는다고 알려진 <사기>를 썼다.
(논란이 있기는 하지만) 기원전 145년에 섬서성 용문에서 사마담(司馬談)의 아들로 태어났다. 천문역법과
도서를 관장하는 태사령(太史令)이었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린시절부터
고전문헌을 두루 읽고 컸다. 10세 즈음에는 고문을 완전히 깨쳐 10대
초부터 강남, 강북의 여러 지방을 두루 편력했으며 산동과 하남을 거쳐 수도 장안에 들어갔고 20세가 되던 해에는 낭중(郎中: 황제의 시종)이 되어 무제를 수행하여 사천에서 운남 등 중국 각지를
여행하며 역사의 무대를 직접 방문했다. 그저 기존의 자료만 정리해서 만든 역사서가 아니라 실제로 역사가
일어났던 지역을 방문하고 고증하는 등 발로 움직여서 저술했기 때문에, 2,000년이 훨씬 지난 지금까지
동양 최고의 역사서로 칭송받는 <사기>가 만들어질
수 있었다. 그가 사기를 완성할 수 있었던 데는 두가지 커다란 사건이 있었다. 한 가지는 그가 30대
중반 즈음이던 BC. 110년 아버지의 죽음이다. 한 무제
시절에 태사령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직업과는 별개로 <전국책(戰國策)>, <초한춘추(楚漢春秋)> 및 제자백가(諸子百家)에 의거하여 사서(史書)를 저술했지만 완성하지 못하고 사망하면서 아들에게 역사서를 완성할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 이에 사마천은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태사령이 되면서 황실 도서에서 자료를 수집했고 사기를
집필하기 시작했다. 또 하나의 사건은 BC99년, 그가 48세가 되던 해에 벌어졌다.
그는 흉노의 포위 속에서 투항할 수 밖에 없었던 이릉(李陵) 장군을 변호하다가 무제의 화를 사서 궁형(宮刑)을 당하고 말핬다. 사실 그에게는 사형 등 다른 선택지도 있었지만
사형보다 더 치욕스럽다는 궁형을 선택했던 건 아버지의 유지를 이어 <사기>를 완성하기 위해서였다. 사마천은 죽지 못해 사는 치욕스러운 삶을 이어가며 옥중에서도 저술을
계속하였다. 4년 뒤에 무제의 용서를 받고 환관의 자격으로 중서령(中書令)에 복직하여 저술 활동을 계속하였으며 마침내 <사기>를 완성하였다. 개인의 삶으로 보자면 너무도 불행하고 치욕적이었겠지만
어쩌면 “궁형”이라는 불행이 그가 <사기>를 저술하는데 집중하고 완성하는데 혼신의 힘을 쏟게
했으니 그의 삶만으로도 천재 또는 영웅들의 삶의 아이러니와 아픔을 볼 수 있는 역사 그 자체라고 할 수 있겠다.
마음을 무찌르는 글귀 개정판 역자
서문 8 가진 것이 많았어도
성공하지 못한 자들이 있는가 하면,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에서 거대한 족적을 남긴 자들도 적지 않았으며, 또 많은 이들이 수성에 성공하지 못하고 모래성 무너지듯 힘들게 쌓아 올린 탑을 무너뜨린 경우도 보면서 타고난
능력과 자질 못지않게 자신이 몸담은 세상에서 올바르게 처신하는 자세도 중요한 것임을 다시금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제 아무리 용기와 배짱을 지니고 있더라도 늘 겸허함을 지니고서 자신을 낮추며 세상의 흐름을 살펴보아야 하는 냉철함이 필요하다. 단순히 승부사적 기질만 가지고 무모한 사마귀처럼 앞만보고 돌진하려는 자는 도리어 쉽게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점도 알게 되었다. 역사와 고전을 공부하는
이유다. 수천년 전에 있었던 일이 지금 나의 삶에 무슨 상관일까 싶지만 인간의 본질은 수천년 전이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과거에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면서 현재의 나를 뒤돌아보고
어떻게 살아야할지 배우게 된다. 역자 서문 12 개나 닭 울음소리를
흉내내는 재주로 맹상군의 목숨을 구한 계명구도(鷄鳴狗盜) 고사의 주인공이나, 3년이 넘게 방 한구석에서 밥이나 축내다가 자천(自薦)이라는 형식을 통해 재능을 과시한 모수(毛遂)도 이들 중 하나이다. 3년이나 방구석에서 밥만 축내고 있었던 건 아니겠지. 밥을 축내면서
무슨 일을 했었는지 궁금하다. 창조적인 일은 쉴 때 벌어진다는 말이 점점 현실로 다가온다. 많은 사람들이 그랬다. 그냥 시간만 버리고 밥만 축내는 줄 알았는데
그 시간에 바쁠 때는 몰랐던 자신을 발견하고 숨었던 능력을 찾기도 한다. 진짜로 밥만 축내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16 최근 중국에서 200여 명의 학자가 힘을 모아 번역 출간한 <이십사사전역(二十四史全譯)>(한어대사전출판사, 2004,
88권) 가운데 <사기>(2권)는 해제에서 사마천이 마르크스의 유물론 사상의 실천자임을
전제로 하고 번역에 임했다고 밝히고 있다. 이와 같이 번역에 이념성이 개입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감히 생각해 본다. 번역을 했던 사람으로서
동감하기도 하고 아니기도 한다. 그럼 번역가의 생각은 전혀 개입되지 않는게 맞는 걸까? 어떤 책은 번역가의 생각이 너무 개입되어서 원전이랑 전혀 달라지는 경우도 있다. 이럴 때 번역은 제 2의 창작이라 변명하기도 한다. 그동안은 이념이나 생각이 많이 개입되지 않는 실용서적을 번역해서 크게 고민하지 않았는데 앞으로 다른 종류의
책을 번역하게 되면 고민해봐야 할 문제다. 해제 23 물론 사마천의 기술
방식이나 자료 선정 방법 등에 전혀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2000년 전이라는 시간적 의미로 볼 때, 정말 이 정도로 완벽한 체제를
갖춘 역사서가 어떻게 가능했는가 하는 탄성이 저절로 터져 나오게 된다. 그러게. 요즘처럼 방대한 자료가 데이터베이스화 돼서 잘 정리된 것도 아닌데… 어떻게
이런 책을 쓸 수 있었을까? 읽으면서도 이름이 많아서 헷갈리고 짜증났었는데, 이런 자료를 모으고 정리해서 책을 쓴 사람도 있다. 읽는 것만이라도
감사하며 제대로 하자. 30 <사기 열전>의 독특한 인물의 선택, 서술 방식은 역사는 결코 지배자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시각에서 출발한다. 34 격동의 시대를 약
120여 명이라는 비운의 인물을 통해 그려 냈으니 결국 사마천에게는 ‘비극’이야말로 아닌 게 아니라 시대의 표징이었던 셈이다. 슬프다. ‘비극’이 아닌 ‘희극’의 역사는 없는 걸까? 35 <사기 열전>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라는
물음에 대해 다양한 해답을 제시한다. 사마천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그리고
보다 나은 삶을 살아가기 위해 겪는 고충을 거의 모든 인물이 똑같이 겪었음을 역사적 사실을 통해 말해 준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시대에 맞선 자, 시대를 거스른
자, 그리고 시대를 비껴간 자들의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 사마천은 인간 사회에서 흔히 있을 수 있는 대립과 갈등, 배반과 충정, 이익과 손실, 물질과
정신, 도덕과 본능, 탐욕과 베풂 등 양자택일의 기로에 선
인간을 제시하고, 그런 갈등 자체가 인간이 사는 모습임을 강조한다.
1.
백이열전(伯夷列傳) 68 사마천이 이 편을 쓴
의도는 단순히 수양산에서 굶어 죽은 백이와 숙제의 행적을 기록하려 했다기보다는 도도히 흐르는 역사 속에서 어찌할 수 없는 인간의 운명에 궁형(宮刑)을 당한 자신을 빗대어 쓴 것이다. 특히 하늘이 도(天道)에 대해 옳고 그름(是非)의 의문을 던지면서 세상 이치의 냉엄함에도 주목하고 있다.
왜 유가 경전에는 허유와 무광 등의 사적이 없을까? 백이와 숙제는 정말 원망하는 마음이 없었을까? 74 그러나 백이와 숙제는
이를 부끄럽게 여기고 의롭게 주나라 곡식을 먹지 않고, 수양산(首陽山)으로 들어가 고사리를
뜯어 먹었다. “요즘 사람”인 나의 시각으로는 그냥 고집쟁이 노친네들로 밖에 안 보인다. 뭐가 중한걸까?
74 저 서산(西山)에 올라 고사리를 캤네 폭력으로 폭력을 바꾸었건만 그 잘못을 모르는구나. ~ 마침내 수양산에서 굶어 죽었다.
착한 이가 곤경에 빠지는 것이 하늘의 도인가? 76 요즘 시대에 들어서면서
하는 행동은 규범을 따르지 않고 오로지 법령이 금지하는 일만을 일삼으면서도 한평생을 편안하게 즐거워하며 대대로
(부귀가) 이어지는 사람이 있다. 그런가 하면
걸음 한 번 내딛는 데도 땅을 가려서 딛고, 말을 할 때도 알맞은 때를 기다려 하며, 길을 갈 때는 작은 길로 가지 않고, 공평하고 바른 일이 아니면
떨쳐 일어나서 하지 않는데도 재앙을 만나를 사람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나는 매우 당혹스럽다. 만일 (이러한 것이) 하늘의
도라면 옳은가? 그른가? 그때나 정말로 “요즘”이나
비슷한 것 같다. 아니 전 시대를 통틀어 착한 사람들이 어려운 일을 겪고 오래 못사는 건 마찬가지인
것 같다. 그래서 구세주를 기다리고, 내세를 믿고 죽어서
받을 복에 집착할 수 밖에 없는 것 같다. 그렇지라도 않으면 인생이 너무 억울하고 불공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로 인해서 현세가 유지가 안 될 듯…
천리마의 꼬리에 붙어야 1000리의 길을 갈 수 있다. 77 “부귀가 찾아서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말채찍을 잡는 천한 일자리라도 나는 하겠다. 또 만일 찾아서 얻을 수 없다면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좇겠다.” 논어를 읽을 때도 마음을 무찌르는 글귀로 꼽았었다. 지금도
그때의 생각이랑 같다. 뭐 몇 달 지나지 않았으니 당연하다.
78 “같은 종류의
빛은 서로 비추어 주고, 같은 부류들은 서로 어울린다.” “구름은 용을 따라 생기고
바람은 범을 따라 일어난다. 성인이 나타나야 만물도 다 뚜렷해진다.”
~ 안연이 학문을 돈독히 했지만 천리마(공자를 비유함)의 꼬리에 붙었기에 행적이 더욱 두드러지게 되었다. 바위나 동굴 속에
(숨어 사는) 선비들은 때를 보아 나아가고 물러나지만 훌륭한
명성이 묻혀 거론되지 않는 것이 슬프구나! 시골에 묻혀 사는 사람 중에 덕행을 닦아 명성을 세우고자
하는 사람이라도 지고한 선비를 만나지 못한다면 어떻게 후세에 (이름을)
남길 수 있겠는가? 그렇다. 천리마의 꼬리에 붙던, 거인의 어깨 위에 오르던지 해야 그나마 100리라도 가고 멀리 볼
수 있다. 천리마와 거인을 알아보고 곁에 있을 수 있는 것도 큰 능력이다.
2.
관.안 열전(管晏列傳) 나를 알아준 이는 포숙이다 84 “~내가 일찍이
세 번이나 벼슬길에 나갔다가 세 번 다 군주에게 내쫓겼지만 포숙이 나를 모자란 사람이라고 여기지 않았던 것은 내가 때를 만나지 못한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 나를 낳아 준 이는 부모이지만 나를 알아준 이는 포자(鮑子, 포숙)이다.”
84 포숙은 관중을 추천하고
자신은 그의 아랫자리에 있었다. (포숙의) 자손들은 대대로
제나라의 봉록을 받으며 봉읍지를 10여 대 동안 가졌으며 늘 이름 있는 대부가 되었다. 세상 사람들은 관중의 현명함을 칭송하기보다는 사람을 알아보는 눈을 가진 포숙을 더 찬미하였다. 과거에도 그랬지만 요즘에야 말로 사람을 알아보는 눈을 가지는 것이 더 중요하다. 저절로 갖게 되지는 않는 법. 사람보는 눈을 키우려면?
창고가 가득 차야 예절을 안다 85 “ 창고에 물자가
풍부해야 예절을 알며, 먹고 입는 것이 풍족해야 명예와 치욕을 알게 된다. ~ 수원(수원)에서 물을
흘러가듯이 명령을 내리면 그 명령은 민심에 순응하게 된다.”
군자는 자신을 알아주는 이에게 뜻을 드러낸다 87 (안영은) 조정에 나아가서는 임금이 물으면 바른말로 대답하고, 묻지 않을 때에는
곧은 몸가짐을 하였다. 나라에 도가 있으면 명령을 따랐지만 도가 없으면 그 명령만을 따르지는 않았다.
88 “제가 죄인의
몸일 때 저 옥리들은 저에 대해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깨달은 바가 있어서 속죄금을 내어
저를 구해주었으니 이는 저를 알아준 것입니다. 저를 알아주면서도 예의를 갖추지 않는다면 진실로 죄인의
몸으로 있는 편이 낫습니다.”
90 “오늘날 안자가
살아 있다면 나는 그를 위해 채찍을 드는 마부가 되어도 좋을 만큼 흠모한다.”
3.
노자. 한비 열전(老子韓非列傳) 훌륭한 상인은 물건을 깊숙이 숨겨 둔다 95 “당신이 말하는
사람들은 뼈가 이미 썩어 없어지오 오직 그들의 말만이 남아 있을 뿐이오. 도 군자는 때를 만나면 달려가지만, 때를 만나지 못하면 쑥처럼 이리저리 떠도는 모습이 되오. 내가 듣건대
훌륭한 상인은 (물건을) 깊숙이 숨겨 두어 텅 빈 것처럼
보이게 하고, 군자는 아름다운 덕을 지니고 있지만 모양새는 어리석은 것처럼 보인다고 하였소. 그대의 교만과 지나친 욕망, 위선적인 모습과 지나친 야심을 버리시오. 이러한 것들은 그대 자신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소.” 명품도 비루한 사람이 들면 짝퉁처럼 보인다. 사람이 명품이면
오히려 명품에 집착하지 않는다. 군자는 아름다운 덕을 과시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겠지. 겉모습은 어리석어 보였을지 몰라도 한마디만 해도 덕을 풍기지 않았을까? 알아본
사람들은 알아본다.
97 “길이 다르면
서로 도모하지 않는다.”
관리가 되느니 더러운 시궁창에서 놀리라 98 “천금(千金)은 박대한 이익이고 경상(卿相)이란 높은 지위지요. 그대는 어찌 교제(郊祭, 고대 제왕이 해마다 동짓날에
도성의 남쪽 교외에서 하늘에 올린 제사)를 지낼 때 희생물로 바쳐지는 소를 보지 못했습니까? 그 소는 여러 해 동안 잘 먹다가 화려한 비단옷을 입고 결국 종묘로 (끌려) 들어가게 되오. 이때 소가 (몸집이) 작은 돼지가 되겠다고 한들 어찌 그렇게 될 수 있겠소? 그대는 빨리
돌아가 나를 욕되게 하지 마시오. 나는 차라리 더러운 시궁창에서 노닐며 스스로 즐길지언정 나라를 가진
제후들에게 얽매이지는 않을 것이오. 즉을 때까지 벼슬하지 않고 내 뜻대로 즐겁게 살고 싶소.”
형명지학의 대가 신불해 용의 비늘을 건드리지 말라 101 유세의 어려움은
내 지식으로 상대방을 설득시키기 어렵다는 것이 아니고, 내 말솜씨로 뜻을 분명히 밝히기 어렵다는 것도
아니며, 또 내가 감히 해야 할 말을 자유롭게 모두 하기 어렵다는 것도 아니다. 유세의 어려움은 군주라는 상대방의 마음을 잘 파악하여 내 주장을
그 마음에 꼭 들어맞게 하는데 있다. 매우 당연하고 쉬운 것 같으면서도 쉽지 않다.
102 말을 꾸미지
않고 간결하게 하면 아는 게 없다고 하찮게 여길 것이고, 장황하게 늘어놓으면 말이 많다고 할 것이며, 사실에 근거하여 이치에 맞는 의견을 말하면 소심한 거쟁이라 말을 다 못한다고 할 것이고, 생각한 바를 거침없이 말하면 버릇없고 오만한 사람이라고 할 것이다. 이런
것들이 유세의 어려운 점이니 마음속에 새겨 두어야 한다. 유세에서 중요한 것은 상대방의 장점을 아름답게 꾸미고 단점을 덮어 버릴 줄 아는 것이다.
상대방이 자신의 계책을 지혜로운 것으로 여긴다면 지나간 잘못을 꼬집어 궁지로 몰아서는 안 된다. 자신의
결정을 용감한 것이라고 여기면 구태여 반대 의견을 내세워 화나게 해서는 안 된다. 상대방이 자신의 능력을
과장하더라도 그 일의 어려움을 들어 가로막아서는 안 된다.
103 재상 이윤(이윤)이 요리사가 되고, 백리해(百里奚)가 포로가 된 것은 모두 군주에게 등용되기 위한 수단이었다. 이 두 사람은 모두
성인이면서도 이처럼 자기 몸을 수고롭게 하고 천박한 일을 겪은 뒤에 세상에 나왔다. 그러므로 재능 있는
인재라도 이러한 일을 부끄러워할 것이 없다. 재능이 있는 인재들은 그런 일을 하더라도 부끄러워하지 않을 것 같다.
오히려 재능이 없는 사람들이야 말로 하찮은 일이라 여기며 부끄러워해서 그런 일조차도 제대로 못하는 경우가 많다. 잘하는 사람은 뭘 해도 잘하더라. 재능이 아니라 태도의 문제라고
본다. “It’s Attitude, not Aptitude” 영어에도 비슷한 말이 있다.
104 이웃집 사람과
관기사가 한 말은 모두 옳으나 심한 경우는 목숨을 잃고 가벼운 경우는 의심을 받았다. 이는 안다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니라 아는 것을 어떻게 쓰느냐가 어렵다는 뜻이다.
105 용이라는 벌레는
잘 길들여 가지고 놀 수도 있고 그 등에 탈 수도 있으나, 그 목덜미 아래에 거꾸로 난 한 자 길이의
비늘이 있어 이것을 건드린 사람은 (용이) 죽인다고 한다. 군주에게도 거꾸로 난 비늘이 있으니, 유세하는 사람이 군주의 거꾸로
난 비늘을 건드리지 않아야 성공한 유세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용을 벌레라고 하다니… 기개가 대단하다고 해야할까?
4.
사마양저 열전(司馬穰苴列傳) 109 전쟁만큼 큰
죄악은 없다고 한다. 그러나 춘추 전국 시대에 전쟁은 필요악이었다. 법가에서는
부국강병을 주장하면서 전쟁을 통하여 전쟁을 없애는 ‘이전거전(以戰去戰)’이론을 제시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병가들도 어떻게든 승리하여 적을 소멸시키고 자신을 보존하는 일에 주요 관심을 두었다.
약속은 생명과도 같다 병사들을 감동시킨 용병술 113 (양저는) 병사들이 머무는 막사와 우물, 아궁이, 먹을거리, 질병을 물업고 약을 챙겨 주는 일도 몸소 보살폈다. 또한 장군에게 주어지는 물자와 양식을 모두 병사들에게 누리게 하였는데, 자신은
병사들 중에서도 몸이 가장 허약한 병사의 몫과 똑같이 양식을 나누었다. 이로부터 사흘 뒤에 병사들을
다시 순시하자 병든 병사들까지도 출정하기를 바라 모두 앞다투어 싸움터로 나갔다.
5.
손자. 오기 열전(孫子吳起列傳) 117 조조(曹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