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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0월 2일 09시 22분 등록

 

괴테는 말했다.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보지 않은 사람과 인생을 논하지 말라

나는 감히 말한다. “눈물 젖은 밥을 먹어보지 않은 자, 여행을 논하지 말라”.

 

그녀와의 첫 만남

한국 사람이에요?”

”……”

“Are you Korean?”

내가 자신의 한국어를 못 알아 들었다고 생각했는지 영어로 다시 물어본다. 고개를 들어보니 전형적인 일본인의 모습을 한 젊은 여자가 내게 말을 걸고 있었다. 한국어로 쓰여진 책 표지를 보고 내가 한국 사람인 줄 알아봤다며, 무슨 도움이 필요한지 물어본다. 순간 그녀의 모습이 천사처럼 보였다.

“Yes, please help me~!!”

 

1996 12월 어느 날, 나는 오사카역에서 도쿄로 가는 기차를 알아보고 있었다. 그해 여름방학 때 동생과의 내기로 참가했던 한 방송국의 퀴즈 대회에서 뜻밖에 3등을 하고, ‘5,000마일에 해당하는 비행기 티켓을 상품으로 받았다. 이제 곧 4학년, 취업준비에 집중해야 했던 터라 나는 당분간 그 티켓을 사용하지 않고 나중에 취업이 되면 편한 마음으로 해외여행을 하리라고 계획했었다. 그런데 졸업을 앞두고 있던 친구가 겨울 방학 때 일본을 여행하겠다며 같이 가자고 권했다. 면접에서 번번이 떨어지고 취업 재수를 준비하려던 친구가 마음을 가다듬기 위해 일본에 갔다 오겠다고 했다. 영어도 일본어도 유창한 친구와 여행을 가면 편할 것 같았고, 나도 여행을 다녀온 후에 본격적으로 취업준비를 하자는 생각으로 흔쾌히 동의했다.

오사카로 들어가서 도쿄에 갔다가 서쪽으로 와서 교토, 나라 등을 방문한 뒤에, 오사카로 돌아와서 귀국하는 일정을 짰다. 첫날의 숙박지까지 예약한 후에 출발 날짜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친구가 취업이 됐다고 했다. 바로 출근해야 돼서 같이 일본을 못 가겠다고 한다. 물론 친구의 취업을 진심으로 기뻐하고 축하해줬지만 조금 난감한 상황이었다.

그때 나는 일본어를 못하고 한자도 많이 몰랐다. 일본에서는 영어가 거의 안 통한다고 하던데 잘 다닐 수 있을까? 1년 전에 호주에서 몇 달 살면서 어학연수를 했던 경험은 있지만, 해외여행은 처음인데, 2주간이나 혼자서 괜찮을까? 나도 취소할까 했다가 이미 쇼핑 리스트까지 작성했던 터라 그냥 가기로 했다. 겨우 15일인데, 어떻게든 되겠지. 안 되면 할 수 없고.

 

돈 없으면 몸이 고생

당시 학생이었던 나는 비용이 가장 적게 드는 방법으로 여행하기로 했다. 도쿄가 아니라 오사카로 입국하기로 한 것도 비행기 티켓이 훨씬 저렴했기 때문이었다. 겨울방학에 연말인지라 도쿄로 가는 비행기 티켓은 5,000마일을 넘어서 초과비용을 부담해야 했다. 반면에 오사카는 4,000마일 정도면 티켓을 구할 수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나머지 1,000마일은 제주도에 다녀오면 되겠다 싶어서 별 고민없이 오사카를 선택했다. 그런데 오사카에서 도쿄로 가는 교통비가 만만치 않았다. 일본 여행자들이 주로 선택하는 JR 패스의 경우, 우리나라의 KTX에 해당하는 신칸센을 이용해서 빠르고 편리하게 오사카와 교토를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너무 비쌌다. 거의 비행기표에 육박하는 가격이니 굳이 오사카로 들어가는 의미가 없어졌다. 어떡할까 고민하던 중에 청춘(靑春)18 티켓이라는 꿀템을 알게 됐다.

이름에서 풍기듯이 청춘18 티켓은 돈이 없는 젊은이들이 싼 비용으로 여행할 수 있도록 저렴하게 판매하는 기차표였다. 인터넷이 아직 널리 이용되지 않던 1996년에 한 PC통신 여행 동아리에서 이 표에 대한 정보를 발견했다. 그런데 이용해본 사람이 별로 없는지 이런 표가 있고 가격이 얼마다 정도의 간단한 정보만 있지, 사용한 사람의 후기라든가 어떻게 이용하는지 자세한 정보는 PC통신의 세계에서도 가이드북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심지어 청춘(靑春)을 일본어로 어떻게 읽는지 발음 정보도 없었다. 그래도 한자로 써서 보여주면 통하겠지하는 마음으로, 일본 밖에서만 구할 수 있는 여행자용 할인 JR 패스를 구매하지 않고 일본 여행길에 올랐다. 

 

오사카역에 도착해서야 내가 얼마나 대책없이 왔는지 깨달았다. 그 넓은 오사카 기차역에 청춘18티켓에 대한 안내나 가격, 시간표 등의 정보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직원들 중에서도 이 티켓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이 없는 것 같았다. 어떻게 된 일이지? PC통신에서 잘못된 정보를 본건가. 일본어를 못하니 답답할 뿐이었다. 

오사카에 도착하자마자 도쿄로 떠날 예정이었기 때문에 첫날의 숙소는 도쿄에 예약을 해두었다. 그날 안에 도쿄로 꼭 떠나야 하는데망연자실한 모습으로 오사카역 앞에 앉아서 애꿎은 가이드북만 원망하고 있을 때, 그녀가 나에게 말을 건 거였다. 내가 너무 절망적으로 보여서 불쌍했다고 했다. 한국 사람인 것 같은데 도와주고 싶었다고.

야수코라는 이름과는 달리 귀엽고 작게 생겼던 동갑내기 친구. 원조 한류 팬이라고 할까. 아직 우리 대중문화가 다른 나라에서 인기를 끌기 전인 90년대 중반이었는데, 야수코는 한국 문화에 관심이 많았고, 한국에 몇 번 와본 적도 있다고 했다. 이유를 물으니 남자친구가 한국 사람이라고 했다. 어쩐지

 

도쿄행 기차에서 눈물 젖은 밥을 먹다

사정을 말하고 그녀의 도움으로 청춘18 티켓을 알아 보기로 했다. 야수코도 청춘18 티켓은 처음 들어봤다고 했다. 청춘18 티켓, 정말 있기는 한 건가. 누가 장난으로 올린 정보는 아니었는지, 걱정이 커가던 중에 다행히도 그녀의 활약으로 청춘18 티켓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다. 직원 중에서도 몇몇만 알고 있는 그 티켓, 아마도 서비스를 시작한지 얼마 안 되었던 것 같다. 학생들이 저렴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방학이 있는 여름과 겨울에만 한정적으로 판매한다고 했다. KTX, 무궁화호, 새마을호처럼 기차 종류를 말하는 게 아니라, 일반기차를 일정 기간동안 횟수에 제한없이 이용할 수 있는 자격같은 거였다. 직행은 거의 탈 수 없고, 2~3회 정도 갈아타는게 다반사라 정말 돈이 없는 사람들을 위한 서비스 티켓 같은 거란다. 주로 일본 대학생들이 방학 때 고향 방문이나 국토 여행 등을 위해 이용하는 티켓으로, 외국인 중에 이를 이용하려는 사람은 처음 봤다고. 그래서 영어는커녕 일본어로 된 정보도 찾기 어려웠던 거였다.

 

예전 전화번호부 책만큼이나 두꺼운 기차 노선 정보책을 한참이나 뒤진 후에 겨우 오사카에서 도쿄로 가는 루트를 짤 수 있었다. 직원의 말대로 세 번을 갈아타야 했다. 처음은 오사카에서 얼마 안 지난 역에서 갈아타지만 두번째와 세번째는 도쿄에 거의 다 간 새벽에 갈아타야 했다. 야수코는 갈아탈 역의 한자와 일본어 발음을 꼼꼼하게 적어줬다. 기차를 탄 후에는 직원에게 내릴 곳을 보여주고 도착 즈음에 말해 달라고 부탁하라고도 했다. 그러면서 도쿄에 도착해서는 꼭 전화를 하라고 한다. 중학생 아이를 혼자 여행 보내는 엄마의 마음이 이럴까? 그녀가 없었더라면 도쿄에는 가보지도 못하고 오사카에만 있을 뻔 했다며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는데, 기차 안으로 야수코가 들어왔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며내가 첫번째로 내릴 역이 그녀의 집 방향이라고 했다. 첫 기차는 같이 타고 가겠다고. 괜찮다며 극구 사양했지만 어차피 그 쪽으로 가는 방향이라며, 집 근처에서 내리겠다고 내 옆에 앉았다. 그녀가 내릴 역이 다가오자 다시 한번 갈아탈 역들을 확인하더니 가방에 있던 꾸러미를 내게 건냈다. 저녁으로 먹으려고 산 도시락이라고 했다. 자기는 집에 가서 먹으면 되니까 나보고 먹으라며 준다. 아 이렇게까지 하면 안 되는데진심으로 괜찮다며 사양했지만 그녀는 도시락을 나에게 떠넘기고 내렸다. 문 옆에 있던 직원에게는 아까 내게 말했던 것처럼 OO역에서 나를 꼭 내려 주라는 부탁도 잊지 않았다. 기차가 출발할 때까지 서서 인사를 하던 그녀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갑자기 외로움이 몰려왔다. 만난지 3시간도 채 안됐는데 베스트 프렌드랑 헤어진 것처럼 쓸쓸해졌다.

 

잠시 후에 직원이 와서 내릴 역이라며 알려줬다. 친구가 얼마나 단단히 부탁을 했는지, 다음 기차를 타야 하는 플랫폼까지 데려다 주면서 보여줬다. 아무래도 내가 전생에 나라를 구했던 것 같다. 아니 일본사람들이 그냥 다 이렇게 친절한 건가.

기차를 갈아 탄 후에 그녀가 준 도시락을 먹었다. 요즘 일본 기차에서 판매한다는 화려한 도시락이 아닌 간단한 주먹밥과 채소 절임 정도였지만, 나에게는 최고의 만찬(晩餐)이었다.

정말 야수코가 없었더라면 어떻게 했을까? 2주간 오사카와 그 근처만 돌아다니다가 일본 여행을 망쳐버렸겠지? 일본 별 볼 것 없고 사람들도 다 불친절하더라며 청춘18, 에잇 18 이라고 욕이나 하지는 않았을지이름도 모르는 그녀의 남자 친구가 다 고마워졌다.

주먹밥을 먹다가 목이 메이며 눈가가 촉촉해 졌다. 남자 친구와 같은 나라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처음 본 외국인에게 아무 조건없이 베푼 그녀의 친절에 감동이 밀려왔다. 처음으로 나도 누군가에게 이렇게 감동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에서 먹었던 첫번째 음식은 소박하고 특별할 것 없는 주먹밥과 채소 절임이었다. 하지만 이후에 난 일본의 어떤 유명한 맛집이나 비싼 식당에서도 이 소박한 주먹밥보다 감동을 주는 음식을 먹은 적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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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04 05:26:19 *.106.204.231

1996년 오사카. 잊혀질수 없는 추억이네요. 여행의 매력은 낯선 곳을 보는 것도 있지만 이렇게 낯선 사람을 만나는 것 또한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진짜 여행 많이 하셨네요. 호주에 일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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