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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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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7월 23일 09시 29분 등록
유년의 숲으로 향하는 오솔길을 걷는다. 쭉쭉 뻗어 하늘을 향하는 낙엽수들의 시원스러움이 좋다. 한발짝 앞서 풀짝 거리는 다람쥐가 나의 어깨에 걸린 모든 짐을 받아 멘다. 구속으로부터의 자유다.

분침과 시침이 이루는 각도 75도
새벽에 눈을 떠 바라보는 시계의 모습이 열에 아홉은 같다. 그 흔한 ‘알람’의 힘을 빌린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40대 후반에 찾아온 노화현상이라고 하기에도 근거가 미약하다. 굳이 나의 옆구리를 쳐서 ‘맞다’고 우긴다면 나는 갑자기 조로증 환자가 된다. 그것은 열 한두살부터 시작된 증세라고 진단될 것이며 명의라면 그 증상이 시작된 것은 내 나이 한자리 수 부터 시작된것임을 금방 찾아낼 것이다.

잠 깨는 시각의 근원을 찾아나섰다. 쉽지 않은 길이었다. 내 과거의 어느 모퉁이에서 먼지를 가득 둘러 쓴 채, 소 마굿간 구석에나 자리잡고 있을 그를 대면하는 일이란 힘든 일이었다. 어렴풋한 윤각으로 그가 가난이라는 형태를 지니고 있으리란 추정으로도 나에겐 충분했으니까.
그러나 유년의 숲에서 만난 그는 뜻밖에도 죽음이었다. 그는 검은 망토도 걸치지 않았으며 표정없는 얼굴도 아니었다. 햐얀 윈피스에 제비꽃으로 머리를 장식한 청순한 소녀의 모습으로 다가선, 그가 아닌 그녀였다.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나는 삶의 달콤함을 느끼거나 배우기 훨씬 이전에 죽음 뒤에 찾아오는 육체의 허망함을 먼저 배워야 했다. 그것은 은유나 미화로 다가온 것이 아니고 지극히 객관적이고 명쾌한 언어로 표현되었다.
“죽으면 썩어 없어질 몸이니라. 아끼지 말거라”
어머니의 말씀은 냉정했다. 어쩌면 엄숙했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지도 모른다. 때로는 그 냉혹한 언어의 가지 들이 조모의 가슴을 후려치기 까지 했지만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강력한 것이었다. 우리들의 새벽은 늘 어머니의 이 잠언같은 말씀과 함께 열렸고 하루의 생활은 죽음뒤를 엿보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동네에서 제일 일찍 일어난 우리는 하나같이 앞 도랑으로 향했다. 얼굴에 물을 바르면 비로소 새벽이 열린다. 계절에 관계없이 산골물은 얼음처럼 차가웠고 그들은 얼굴을 통해 우리의 온 몸 구석구석을 파고 들어 육신을 깨우고 영혼을 깨웠다. 그 다음은 우리가 깨울 차례였다. 온갖 물상을 깨운다. 뒷산 기슭의 아카시아 나무를 깨우고 논두렁 콩가지를 깨운다.
지금처럼 7월의 막바지라면 호박꽃이 일어나고 여치도 일어났다. 그와 동시에 나의 육신은 새벽의 신선함에 춤을 추고 향기로움에 흠뻑 취해 아침부터 비틀거리기까지 했다. 그 육신은 죽어 썩어짐에 앞서 온 우주를 가슴으로 맞으며 죽음이 결코 허망한 것이 아님을 전했다.
되돌아보건대, 우리들이 새벽 밖으로 내 몰리었던 것에 대해서 그 누구도 어머니를 원망한 적이 없다. 그것은 당연한 것이었으며 일종의 즐거움이었다.
“죽으면 원없이 잘 잠이니라”
이 말씀 한마디를 통해 우리는 죽음이라는 것은 영원한 안식이며 결코 두려워 할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일찍부터 알게 되었다.
이러한 어머니의 말씀이 유효했는지는 모르지만 기억하건데 나는 느긋하게 늦잠을 자거나 낮잠을 즐겨본 적이 없다. 내 육신은 썩어 없어질 몸이기에 쉼없는 노동이라는 것으로 세상을 끌어안고 나이들어감을, 그리고 늙어감을 환영하는 마음으로 맞이하고 있는 것이다.

어머니는 자신이 죽은것에 대해 두렵지가 않다고 말씀하셨다.
말씀뿐만 아니라 행동에서도 그랬고 삶을 감싸 안는 것에도 그랬다. 그칠것이 없었고 두려울 것이 없었기에 늘 당당했고 치열했다. 나를 비롯한 우리도 덩달아 경건했고 일찍 어른이되어갔다. 그믐밤의 산길을 헤쳐나가는 일도 흔한 일이였으며 얼어붙은 강을 한밤중에 건너는 일도 일상의 일이었다. 죽음은 우리에게는 따뜻하고 인정있는 대상이었으며 구원의 대상이기도 했다.
그러나 죽음앞에 그렇게도 당당하던 어머니가 죽음이 가져다 준 늪에서는 빠져 나오시질 못했다. 그 늪은 깊이를 헤아릴 수 없었으며 끝도 알 수 없었다. 두려운 것이 없었던 당신이었기에 우리는 단지 그 늪에서 정취를 즐기시는 줄 알았다. 허우적 거림이 거침없는 몸짓으로 느껴졌고 살려 달라는 구원에의 목소리는 독백으로만 들렸다. 우리는 태연했고 어머니는 고통스러웠다.

늪의 성질상 허우적 거리면 더 깊이 빠져든다. 소리도 없이 서서히 빠져 들어간다.
어머니의 상태가 심각하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은 당신의 온 몸이 늪 속으로 다 빠져 든 후에 알았다. 오직 밖으로 향하고 있던 것은 손이였다. 오른손이었다. 우리는 온 힘을 다해서 어머니의 오른손을 잡아 끌었고 늪과의 타협을 시작했다. 우리는 처음부터 늪이라는 녀석을 두려워 하지 않았기에 협상은 쉽게 끝났다. 그러나 늪에서 빠져 나온 어머니는 더 이상 그 당당하던 어머니가 아니셨다. 죽음이 두려워졌고 그를 생각의 밖으로 몰아 내고자 하셨다.
그와 동시에 우리도 혼란스러워졌다. 나의 이십대와 삼십대는 그 혼란속에서 범벅이되었고 세상과 죽음을 향해 새로운 날개짓을 시도한 시기였다.

어머니가 죽음앞에 그렇게 당당했던 것은 실상은 그것이 너무도 두려웠음이다. 타인의 죽음,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지켜보는 것이 우리 각자에게 던져진 죽음 그 자체보다 더 큰 무게였던 것이다.
내가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전무한 것은 아스라한 기억보다 더 나은 것이다. 아련함이 사람을 더 목마르게 한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사랑도 그렇고 사람에 대한 것도 그러하다.
나의 어머니는 남편의 모습이 아련할 것이고 먼저 떠난 유복자 아들은 아련함을 넘어서 애잔함일 게다. 나는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냉담함을 가장한 두려움을 통해서 죽음과 친해지는 방법을 배웠고, 노동의 즐거움을 깨달았고 새벽의 향기로움을 알았다. 그들은 나의 생활의 일부가 되어 나와 함께 뒹굴며 웃고 박장대소하며 하루를 열어나간다. 내가 하루 같이 고집하고 있는 손빨래도 어쩌면 노동에 대한 나의 희열인지 모른다.
그러나 이 한밤을 지새우며 나는 나에게 묻는다.

‘너는 죽음이 사랑스럽다고 했다. 그러나 너의 죽음을 떠난 사랑하는 이의 죽음까지도 끌어안을 용기는 있는냐’

용기가 없다.
나에게 주어진 것은 끌어안는 방법을 취하던, 타협을 하던 내 방법대로 하면 된다. 그러나 타인의 죽음, 특히 우리의 가슴 한부분을 송두리째 차지하고 있는 사랑하는 사람의 것은 어떻게 끌어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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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화
2007.07.23 16:35:40 *.72.153.12
저도 잘 몰라요. 그냥 일찍 간 그 사람이 아직도 무척 미울 뿐입니다.
그걸 알면 정말 죽음과 친해지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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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2007.07.24 10:49:33 *.75.15.205
그것도 끌어안던지 타협하던지 밀치든지 하는 거겠지요. 사부께서는 삶을 죽음에서 가져오셨듯 죽음도 삶으로 이해해보면...
살아있음의 증거, 떠난 당신의 반영, 그 모두를 아우르는 어떤 경계...

언니의 특징 하나, 사실적 묘사를 지극히 상징적으로 처리하네요. 기질이 나온다는 얘기, 그렇게 꿰맞추려는 것은 아니지만.

언니에게 휴식, 그러니까 노동의 즐거움을 약간 밀쳐두고 자신에게만 흠뻑 빠질 수 있는 고요한 시간이 좀 많이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드는데요. 고요함을 일부러 노동으로 대치해온 이유라도 있을까요?

섬에 가서 함께 갇혀서 하는 수 없이 당신이 일상의 모든 것들을 접고 막걸리와 달빛을 바라보며 독백처럼 하는 이야기를 옆에서 술잔을 채우며 듣고 싶은데요. 그날이 몽골이었는데 너무 아쉬워...

당신의 보라돌이가 미워요, 이 때 쯤이면 억지로라도 당신을 떠밀어 버렸으면 좋겠어요. 일상에서 당신을 내쫓아 우리에게 보낼 수 없을까?

삶이 바쁜 것이 아니라 정작 생각이 늘 바쁘죠, 그러면서 그걸 대다수의 사람들과 견주어 그게 보편적이거나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아요, 물론 나 역시도. 그러나 죽은 자가 현실에 없어도 우리 솔직히 너무 잘 살아왔듯, 지금 우리가 잠시 일상에서 떨어져 나가도 별 무리 없을 거에요. 요는 우리 스스로가 무언가에 갇히며 살아 있음을 증거하려는 강제 혹은 그런 허상에 빠져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마치 써니의 현실처럼 살 수 있는데 미리부터 벌벌 떠는 것 말에요. 내가 사실 이렇게 말하다니 이래서 이중적이라는 비난을 듣는 다니까요. ㅎ

암튼 우리가 삶과 죽음을 적절히 배합해서 절묘하게 살아내는 방법 그 짜릿하고 흥분된 일상에 젖어드는 그 방법을 찾아냄 재밌을 것 같은데... 생각남 알려주쇼. 혼자만 음미하지 마시구요. 히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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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제
2007.07.24 22:03:12 *.86.177.103
그 답을 찾느라 10년을 뛰었답니다. 그 때는 답을 찾기 위해 달린것이 아니라 잊기 위해 뛰었지요. 뛰는 순간, 불현듯 월명사의 제망매가 가 뇌리를 스쳤습니다. 지금까지는 그것이 답인양 살고 있지요. 그러나 가끔은 정화씨가 말한 것 처럼 밉도록 그리울때가 있습니다. 죽음과 삶을 엮다보니 관습과 타인의 눈은 우리의 삶에서 약간은 비껴 서 있지요 아니한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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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훈
2007.07.25 08:20:57 *.99.242.60
저에게도 아픈 죽음에 대한 추억이 몇개 있는데,
그것을 그냥 봉인해두었답니다.
봉인을 풀때가 바로 내가 죽을때가 아닌가 해요.
산자와 죽은자의 차이가 점점 없어지는 세상
오히려 죽은자보다 산 자들이 마음을 아프게 하기도 하고,
어쨌든 중요한 것은 오래 사는 것이 좋다고 봅니다.
먼저 간 사람은 나와 공유할 기억도 없고
또 즐거움을 나눌수 없으니까요.

최근에 사부님이 삶과 죽음을 변화경영의 초석으로 삼는다는 방식이
아주 새롭게 다가옵니다.

새벽에 대한 단상은 저하고 비슷하군요.
요즘에는 조금 몸을 함부로 써서 그러는데,
시골에서 일찍일어나는 부모님의 유전인자를 받아서 그런지
새벽이 정말 좋습니다.

새벽을 사랑하는 모임하나 만들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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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제
2007.07.26 10:21:09 *.86.177.103
선한 말들이 부족해서 세상이 이러하지 않듯이 내마음 다스림이 글과 말의 부족함 아님을 압니다. 맞습니다. 떠난 사람들은 그냥 떠난 것이 아니고 넓은 사유의 세계를 두고 떠났습니다. 새벽을 사랑하는 모임, 대 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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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윤
2007.07.26 11:49:10 *.249.167.156
“죽으면 썩어 없어질 몸이니라. 아끼지 말거라”

“죽으면 원없이 잘 잠이니라”

게으른 저를 철썩, 잠 깨우네요. 그리운 그 마음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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