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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4월 30일 11시 51분 등록

 


엘렉트라에게서 온 편지

 

엘렉트라는 미케네의 왕 아가멤논과 클리타임네스트라의 딸이다. 그녀에겐 그리스 전역에 막강한 힘을 발휘하던 미케네의 왕인 아버지 아가멤논과 스파르타의 왕인 삼촌이 있었으며, 또한 그리스 전역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일컬어지던 이모 헬레네와 어머니 클리타임네스트라도 있었다. 더욱이 사랑하는 언니 이피게네이아와 어린 남동생 오레스테스까지 생각하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소녀였다.

 

그러나 엘렉트라의 운명은 그녀를 결코 행복하게 놔두지 않았다. 그녀의 불행은 아버지 아가멤논이 삼촌을 따라 트로이로 납치된 헬레네를 되찾으러 떠나는 그날부터 시작되었다. 아버지의 손에 언니를 잃은 어머니는 아버지가 떠나기가 무섭게 情夫를 왕궁으로 끌어들이더니 결국 10년 만에 전장에서 돌아온 아버지를 처참하게 죽여 버렸다.

 

엘렉트라는 자신의 욕망에 눈이 멀어 남편과 자식을 내팽개친 어머니를 용서할 수 없었다. 어머니에 대한 증오가 깊어갈 수록 엘렉트라는 점점 난폭해졌다. 누가 위로라도 할라치면, “내버려두세요. 나의 고통은 치료할 수 없는 것에 속하니까요. 어서 비켜주세요.”라고 악을 쓰며 물리치곤 했다. 결국 아무도 그녀를 가까이 하지 않게 되었고, 그녀는 더욱 불행해졌다.

 

자신의 모든 불행의 원인을 어머니에게 돌리며 악담과 저주를 뿜어대던 그녀는 남동생 오레스테스를 부추겨 어머니를 살해하도록 한다. 그리하여 클리타임네스트라는 엘렉트라의 염원대로 자신의 아들 손에 피를 토하며 쓰러지게 된다. 죄책감으로 고통스러워하는 동생을 지켜봐야하는 아픔이 있었지만 다행히 그가 점차 평정을 찾아가면서 엘렉트라의 불행은 서서히 막을 내리는 듯 했다.


게다가 엘렉트라는 포키스의 왕자 퓔라데스와 결혼하여 아이들도 낳았다. 그녀는 더 이상 부족한 것이 없었다. 가슴에 사무쳤던 아버지의 복수도 이루어졌고, 이제 자신도 결혼하여 늠름한 남편과 사랑스런 아이들까지 얻었다. 부정한 어머니가 망쳐버린 행복한 가정을 스스로의 힘으로 복원해 낸 것이다.

 

그런데 과연 엘렉트라는 더 이상의 여한없이 여생을 즐길 수 있었을까? 그녀는 나이 들어가면서 여자의 삶이란 도대체 무엇인가에 대해 갖가지 회한을 느꼈다. 그동안 애써 외면해왔던 어머니의 기구한 사연이 가슴으로 다가오면서 어머니를 너무나 이해하게 되었지만, 이미 어머니는 세상에 없었다. 이제 불쌍한 어머니를 한 번도 사랑해드리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그녀를 끝없는 고통의 나락으로 몰아넣었다. 어린 시절 어머니를 향해 겨누던 증오의 활은 이제 스스로를 과녁 삼아 시위를 당겨대고 있었다.

 


제가 엘렉트라를 제 신화의 주인공으로 선택한 것은 당연히 그녀의 이야기에서 저를 찾아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녀의 비극적인 가족사의 골격을 빌려 와 이름만 바꿔 넣었더니 저의 가족사가 그대로 복원되었습니다. 그렇게 애써 왔지만 이가 빠진 불완전한 기억밖엔 건져내지 못하고 있었는데.. 뜻밖에도 3000년여 전에 살았던 미케네 공주가 혼수상태에 빠졌던 제 기억을 소생시켜주었던 것입니다끔찍하게도 그녀의 인생은 제게서 그대로 재현되고 있습니다.



엄마가 되고 나서야 알았다. 박미옥이라는 이름대신 엄마라는 호칭으로 불리우기 위해 치러야할 것들의 무게가 상상을 초월한다는 것을. 여기에 대책없이 용감한 박미옥이 그리도 갈망하던 훌륭한이라는 형용사를 붙이고 나면 사태는 더더욱 심각해져버리고 만다. 그냥 엄마가 앞치마를 두르고 늘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가족들의 필요에 대응하는 존재였다면, 여기에 폼나는 정도의 사회경제적 기여를 더할 수 있어야 훌륭한 엄마라고 생각했다.

 

엄마는 내게 늘 부족한존재였다. 7남매의 장녀로 글자보다 가마솥에 밥짓기를 먼저 익혔다던 엄마. 몸이 약하신 외할머니 대신 집안일을 돌보아야했던 엄마는 학교 보다 부엌과 논밭에서 더 많은 시간 보내셨단다. 딸들은 가르쳐봐야 소용없다는 확고한 교육관을 갖고 계신 외할아버지 아래에서 큰딸인 엄마는 그야말로 살림밑천 역할을 제대로 해내신 셈이었다.

 

가정환경조사서의 엄마 학력란을 고졸로 채워넣는 아빠를 보며 생각했다. 엄마가 정말 고졸이 아닌 건 부끄러운 거구나. 언젠가부터 아빠에게 묻지 않고도 가정환경조사서를 작성하게 되면서 나는 비밀엄수의 책임감까지 물려받게 되었다.

 

엄마는 평생을 배우지 못한 설움과 함께 사셨다. ‘십원 한 장도 못 벌어오는 주제에부모님의 부부싸움은 늘 이 한 마디로 종결되었다. 엄마의 마음 따위는 고려의 대상조차 되지 않았다. 그저 부족한 자신을 거둬주는 남편과 아이들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는 것만이 엄마가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아무도 엄마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았다. 엄마가 답답한 마음을 터놓을 만한 친구로 선택한 것은 알콜이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던 무렵부터였다.


하지만 그 친구가 엄마에게 준 위안의 대가는 잔혹했다. 엄마가 술을 마시기 시작하면서 나는 더 철저히 아빠편이 되었다. 부녀에게 지켜야할 비밀이 또 하나 생긴 셈이었다. 어떻게든 엄마의 취한 모습을 남들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노심초사하며 유년기를 보냈다. 아빠가 불쌍했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열심히 공부하는 것 뿐이었다. 나의 성적표만이 아빠의 불행을 지우는 유일한 지우개였으니까.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렇게나마 유지되던 집안이 갑자기 휘청거리기 시작한 건 대학1학년 때였다. 고대하던 승진 후 연수중이시던 아빠가 갑자기 쓰러지신 거다. 아빠는 바로 병원으로 호송되셨고 입원한지 일주일만에 퇴직명령이 떨어졌다. ‘간암. 더 이상 근무를 계속할 수 없음이라는 판정과 함께. 아빠나이 마흔 셋의 일이었다. ‘갑자기라고 표현했지만 사실 아빠의 병이 시작된 것은 한참전의 일이었다. 하지만 아빠는 행여 누군가 낌새를 알아차릴 새라 더욱 일에 매달리셨다. 이대로 아프다는 사실이 밝혀져 퇴직이라도 하게 되면 당장 식구들의 생계가 막막하다고 생각해, 알면서도 병을 키워 오신 거다.

 

퇴직 후 아빠의 분노는 다시한번 엄마를 향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너만 만나지 않았어도 내가 이렇게 되진 않았을 거다. 너만 만나지 않았어도...’ 엄마는 한마디 변명도 없이 아빠의 원망을 온몸으로 다 받아내셨다. ‘맞아. 다 엄마 탓이야. 엄마가 다 책임져야 해.’ 입 밖으로 낸 적은 없었지만 분명히 나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이후로도 13년이나 계속되었던 그 모진 투병생활을 지켜보면서도 단 한번 아빠의 병실을 지키지 않았던 것도 이 모든 재앙의 책임이 엄마에게 있다는 걸 분명히 하고 싶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부모님의 평탄치 않은 결혼생활을 지켜보면서도 한 치의 두려움 없이 결혼을 할 수 있었던 건 나는 엄마와는 다르다는 믿음 때문이었을 거다. 엄마가 아빠의 마음에 흡족한그런 아내였더라면 우리 가족의 운명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자신 있었다. 나정도면 아빠가 말씀하시던 바로 그 자랑스런 엄마의 역할을 해내기에 충분하다는. 그래서 딱 아빠 같은 남자를 골라 결혼했다. ‘부족한엄마가 망쳐버린 행복한 가정을 스스로의 힘으로 복원해 낸 것이다. 하지만 결혼생활이 내게만 그리 간단할 리 있을까?

 

원하던 직장에 들어왔고, 원하는 결혼을 했으며, 딱 좋은 시기에 아이도 낳았다. 하지만 기대했던 충족감은 오지 않았다. 직장도, 가정도 밑빠진 독처럼 한없이 많은 것을 요구해댈 뿐이었다. 직장이 좀 편안하다 싶으면 가정이 삐걱거렸고, 집에서 좀 숨을 돌렸다 싶으면 회사가 가시방석이 되었다. 가끔은 양쪽 모두가 퉁퉁 부어 볼멘소리를 해댔다. 처음엔 내가 좀 더 부지런을 떨면 어떻게든 꾸려나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더 독하게 나를 몰아붙였다.


하지만 24시간을 쉴 새 없이 종종거려도 상황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어디에다 하소연할 데도 없었다. ‘너 왜 그래? 너는 다르다면서? 엄마가 평생을 묵묵히 해내신 일이야. 그렇게 잘난 척 하더니 이것도 못 견디겠다는 거야?’

 

몸이 부서져라 일을 하고도 조직에서 버림받은 아빠. 마음을 다 바쳐 헌신하고도 가족들에게 인정받지 못한 엄마의 모습이 자꾸만 나의 모습과 오버랩되었다. 내가 그렇게나 벗어나고 싶어하던 부모님의 인생이 나에게도 어김없이 되풀이 되는구나. 엄마와 달라지기 위해 그렇게 집착하던 사회적 인생은 나를 구해줄 구명줄이 아니라 오히려 나를 더 단단히 옭아맬 올가미였던 거구나.


 그렇다면 내가 꿈꾸던 훌륭한 엄마란 이루어질 수 없는 헛된 망상이었던 걸까? 혹여 기적이라는 게 일어나 내가 그 훌륭한 엄마를 성취한다고 한들 내 인생은 정말 그것만으로 괜찮은 걸까? 역시 결혼이란 사랑을 미끼로 여자의 인생을 망가트리는 덫인 걸까? 정말 '희망'은 없는 걸까?



여기서 제 신화를 만들기 위한 첫 번째 질문인 모험을 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은 분명해집니다. 엘렉트라 덕분에 몸에 저장되어 있던 감정의 기원을 추적할 수 있게 되었으니 이제 더 이상 치유를 망설일 필요가 없습니다. 고통을 방치하는 만큼 고스란히 감수해야할 테니까요. 그리고 그 아픔은 제 몫의 통증까지 더해져  제 아이들에게 대물림되겠지요. 그러면 저는 죽어서도 엘렉트라와 클리타임네스트라, 아가멤논과 오레스테스의 삶을 끊임없이 오가며 신음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지켜봐야 할 겁니다. 그럴 순 없습니다. 저와 아이들에게도 분명히 행복할 권리가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다음 질문은 ‘뿌리깊은 고통을 치유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하는가?’입니다.

 

우선 엘렉트라와 제가 시공을 초월한 공감을 가질 수 있었던 본질적 공통점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해야할 듯합니다. 엘렉트라가 아버지의 손에 사랑하는 아이들을 잃고, 아버지의 관습적인 선택들 때문에 고통받아 온 엄마의 사연을 알면서도 철저히 아버지의 딸로서만 어머니를 바라보며 아빠편을 고집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우리는 둘 다 엄마라면 무조건 남편과 자식에게 희생해야 한다고 믿었던 것 같습니다. 엄마에게도 한 인간으로서의 삶이 있다는 사실은 까맣게 잊은 채 엄마는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강요하며 그러한 기대가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상처받고 원망하기만 했습니다. ‘어머니의 이름을 가진 그녀들은 한없이 강해서 우리들이 아무리 억지를 부려도 끄떡없다고 여겼었나 봅니다. 그래서였는지 어머니가 우리에게 주었던 한없는 사랑에도 불구하고 그녀들을 위해 우리에게 허락된 참을성은 참으로 보잘 것 없는 것이었습니다.


스스로 어머니가 되어서야 어렴풋이 알게 되었습니다. 그녀들이 얼마나 서러웠을지...그런데 속상하게도 안스럽고 미안한 마음 한편으로 관성처럼 남아있는 아이시절의 이기심이 여전히 그녀들을 포근히 감싸 안기를 거부합니다. 어떻게 해야 이 철없는 모순이 극복될까요? 아마도 그 극복의 과정이 고스란히 제게 주어진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이 될 것입니다.

 

그럼, 사랑하는 아들 딸을 제2의 오레스테스와 엘렉트라로 만들지 않기 위해 저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우선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그들에게 엄마도 저희들과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려줘야 할 듯합니다. ‘너희에게 그렇듯 엄마에게도 엄마만의 즐거움이 필요하단다. 너희와 아빠는 엄마에게 무엇보다 소중한 존재이지만 엄마를 너무 몰아세우지 말았으면 한다. 엄마도 너희들처럼 세상의 전부가 다 <나>였던 시절이 있었단다. 엄마가 되었다는 이유로 별안간 그 전부를 박탈당한다면 아무리 사랑스러운 너희라해도 조금은 원망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 원망은 분명 어딘가에 쌓이기 마련이고 그렇게 쌓인 원망은 나 자신에게나 너희에게 독화살로 박힐 것이다. 누구도 바라지 않는 일이지. 이렇게 말하는 엄마를 섭섭타 하지 마라. 엄마가 이리 할 수 밖에 없는 것은 너희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얼마나 이해해 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역시 아이들에게 이야기하는 수 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이야기하다보면 적어도 아이들과 마음을 나누는 소통법을 터득하게 될 테니까요. 처음부터 완전히 엄마를 이해하지는 못하더라도 끊임없이 소통할 수만 있다면 조금씩 더 서로를 알아가게 될 테니 극단적인 비극은 막을 수 있으리라 믿으니까요.


이와 더불어 엄마가 행복할 때 자신들도 함께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려주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아이들이 긍정적 에너지로 빛나는 엄마의 아우라속에 함께하는 기쁨을 느낄 수 있도록 매 순간 그 느낌을 찾아가는 연습을 소홀히 하지 말아야 겠습니다.

 

이렇게 과거로부터 얻은 제 상처를 치유하고, 미래에 아이들에게 올지도 모르는 위협을 제거하고 나면 저와 아이들의 삶은 어떻게 달라지게 될까요다시말해 욱신거리는 통증을 가라앉혀 제 至福을 찾는 감각을 회복하여 매순간 그곳에 머물면서도 아이들과 남편 역시 스스로 자신의 至福을 향해 나아가도록 도와줄 수 있다면 말이죠.


그렇게만 된다면 ~!! 매일 이대로만!’ 하며 천상의 미소로 세상을 마주할 수 있을 것 같죠? 필요한 이들과 저와 가족의 경험과 지혜를 기쁘게 나누면서요. 상상만해도 가슴과 눈이 다 시원해집니다. 그 순간이 오면 바로 써먹을 수 있도록 세상을 다 얻은 듯한 천상의 미소를 틈틈이 연습해 놓아야 겠습니다. ^^

 

2010.5 ‘나의 신화 창조오프과제 중에서


그 이후 8. 아버지의 불행은 모두 엄마가 책임져야한다며 바보같은 떼를 부리던 엘렉트라도, 삶에 대한 오해와 원망을 에먼 남편에게 뒤집어 씌우고 그를 못살게 굴던 클리타임네스트라도 모두 내게 진짜 삶을 찾아주기 위해 찾아온 고마운 손님들이었다는 것을 이해하는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녀들 역시 아물지 않은 상처로 고통스러워하는 나의 분신들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나자 그녀들을 용서하고 품어낼 수 있는 용기를 낼 수 있게 되었다. 쉽지 않은 시간이었으나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있는 힘을 다할 수 있었다.




라미아, 흡혈마녀에서 풍요와 번영의 여신으로

 

라미아(Lamia)는 동방국가 벨로스의 착하고 아름다운 공주로 제우스의 사랑을 받아 아기를 여럿 낳았으나 헤라의 질투로 아이를 모두 잃게 된다. 비탄에 잠긴 라미아는 다른 어머니에게서 어린아이를 납치해서 산 채로 잡아먹는 식인괴물로 변해버렸다. 라미아는 아름다운 여인으로 변하여 젊은 시인을 유혹하기도 하였는데, 시인 존 키츠는 여기에서 영감을 받아 장편시라미아를 지었다고도 한다. 이런 연유로 라미아는 요부나 괴물을 뜻하는 일반명사처럼 쓰이게 되었다.

 

이채로운 것은 그리스에서 이처럼 무서운 괴물로 여겨지는 라미아도 그보다 오래 전인 바빌로니아 시대의 리비아에서는 여자의 머리를 한 뱀으로서 사람들로부터 숭배를 받고 있었다. 그녀는 바빌로니아의 대지모신 라마슈투의 화신 가운데 하나였으며 풍요와 번영을 관장하는 여신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숭배는 그리스의 신들이 세력을 점차 강화함에 따라 쇠퇴해갔다. 게다가 그리스 신화가 씌어 질 무렵에는 라미아가 여신이었다는 사실조차 완전히 잊혀지고, 이교의 신들이 악마로 바뀌는 것처럼 그녀 또한 무서운 괴물로 전락해버렸다. 결국 무자비한 흡혈귀라는 그녀의 이미지는 세력다툼에서 밀려난 자에게 주어진 오명이었을 뿐 그녀의 본질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녀는 사람과 마음의 길을 내는 방법을 모르고 있었다. 그녀에게 사람은 그녀와 비슷한 유전자를 가진 자원에 불과했다. 그녀는 사람들에게서 자신에게 필요한 무언가를 발견하고 그것을 취하는데 놀라운 성취를 보였다. 물론 그녀에게 나쁜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녀에게 끌림은 자신의 결핍을 채워줄 무언가에 대한 본능적인 반응이었다. 그녀는 본능의 지시에 따라 그 끌림에 솔직하게 반응했을 뿐이다. 문제는 그 결핍이 충족되면 끌림도 해제되어 버린다는 것.

 

사랑이라는 이름의 영악한 거래를 지속하면서 그녀는 알뜰히 자신을 채워갈 수 있었지만 그 충족감 뒤에서 스스로에 대한 무서운 의심도 함께 커져갔다. ‘관계의 흡혈귀...생존을 위해 사랑하는 사람들의 피를 마셔야하다니, 이런 삶이 죽음보다 나을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스스로에 대한 의심의 농도가 짙어질수록 그녀의 외로움은 깊어만 갔다.

 

2010.7 Me-story 중에서

 

나는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진심으로 기도했다. 그녀가 어서 흡혈귀의 오명을 벗고 풍요와 번영의 여신이라는 본래의 자기를 되찾게 되기를. 復權의 과정이 내게도 의미있는 지도가 되어주기를.

 

여행 내내 그녀의 이야기는 내 가슴가를 맴돌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처음과는 다른 생각을 하게 되었다. 라미아는 내게 풍요와 번영의 여신으로의 복귀라는 키워드를 준 것만으로도 이미 제 역할을 다 한 게 아닐까? 더 이상 그녀에게 바라는 건 뻔뻔스러운 거야. 이제는 내가 그녀에게 무언가를 주어야할 차례야. 그 무엇은 물론 바로 復權의 지도겠지? 내가 만들어 보자. 그래서 그녀가 나의 지도를 통해 진짜 그녀를 회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도록 하자!

 

2010.8 ‘연구원 칼럼, 그리스 여행기중에서



실마리가 풀려가는 느낌이다. 그래서 나는 다시 이 자리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던 거구나. 바로 이것이 내가 이 엄청난 모험을 다시 시작할 수 밖에 없었던 진짜 이유였구나!


8년전 선택한 신화를 바탕으로 자신만의 신화를 만들어보라는 과제의 의도를 이해했으면서도 도무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완성된 이미지에 대한 힌트도 없이 떠안은 커다란 퍼즐판과 수를 가늠할 수도 없을 만큼 엄청난 양의 퍼즐 조각들을 가지고 밑도 끝도 없이 이야기를 만들어내라는 주문이 그야말로 미션임파서블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내 자신도 믿지 못하는 황당한 이야기를 만들어내서 어디다 써먹을 거야? 처음부터 이상했다니까. 빨랑 작가가 되고 싶은데, 그것도 우아하고 명료한 장르의 작가가 될 내가 왜 난데없이 난잡하기 이를데 없는 신화 속에 빠져서 시간을 낭비해야 하느냐구?'하는 투덜이 스머프의 목소리도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래도 스스로의 삶을 살고자 하는 이라면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과제라는 것까지는 부정할 수는 없었다. 삶을 알면 알아갈수록 스승이 왜 연구원 과정의 첫번째 관문에 '신화'를 배치했는지가 더욱 사무치게 이해가 되기도 했다. 돌아보니 이후 8년은 내가 받은 퍼즐조각들을 하나하나 살펴보고 판위에 이리저리 맞춰가는 시간들이었던 것 같다. 어느 조각 하나 수월하게 제자리를 찾아가는 법이 없을 만큼 파란만장한 세월이었지만 덕분에 퍼즐판의 절반정도는 채워낼 수 있게 되었다.


한발짝 떨어져 들여다보고 알았다. 스스로에게조차 사랑받지 못하던 가여운 여인이 자신을 이루는 모든 것을 축복으로 받아들여 가는 변신이야기가 지금까지 맞춰낸 그림의 주제였다는 것을. 엘렉트라로, 클리타임네스트라로 불리며 사회구조, 혹은 '숙명'이라는 시나리오를 수동적으로 연기하던 그녀들이 자신들 안의 목소리를 따라가며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해가는 과정은 흡혈마녀로 오해받던 라미아가  풍요와 번영의 여신이라는 본래의 모습을 찾아가는 여정에 다름이 아니었던 거다.


'남아있는 절반의 퍼즐판을 어떤 이야기로 채우고 싶으냐? 어렵게 복원해 낸 존재의 힘을 무엇을 위해 쓰고 싶으냐? ' 8년만에 다시 마주한 스승의 질문, 이제는 더이상 도망치지 않는다.  



위대한 신화의 대부분은 남자들이 만들었죠 . 여자들은 너무 바빴습니다 . 할 일이 너무 많아서 이야기를 쓰면서 앉아 있을 시간이 없었던 거죠 .

조셉 캠벨의블리스 , 내 인생의 신화를 찾아서 198



"오랜 상처의  시간을 견디고 비로소 맞이한 진짜 저의 시간은 여인의 신화를 발굴하고, 나누는 데 쓰고 싶습니다. 같고도 다른 아픔으로 고통받는 이 시대의 어머니와 딸들이 기쁨으로 걸어갈 수 있는 길을 만들어 내는데 허락된 시간을 다 쓰고 싶습니다!"


차마 말로 하지 못한 그 한마디까지 들으셨던 걸까? 그윽한 눈빛으로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시는 스승의 숨결이 느껴지는 듯하다. 또 하나의 피스가 제자리를 찾아가는 소리가 들린다. 삶은 참 아름답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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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30 12:54:35 *.130.115.78

그 전에

과하게 욕심내다

막판에 와서야 허덕허덕 글을 조합해내는 이 파괴적인 습관의 고리부터 끊어내야할 듯합니다.

월욜마다 수명이 한움큼씩은 빠져나가는 듯한 느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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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30 13:17:05 *.48.44.227

'어머니가 우리에게 주었던 한없는 사랑에도 불구하고 그녀들을 위해 우리에게 허락된 참을성은 참으로 보잘 것 없는 것이었습니다'

'사람과 마음 길을 내는 일'

'여인의 신화를 발굴해내고 만드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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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02 12:24:26 *.103.3.17

선배님의 5월 오프과제 '나의 신화창조'가 기대되는 글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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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04 14:17:20 *.130.115.78

저도 흥미진진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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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02 15:10:58 *.179.207.34
여인의 신화에 관심이 많으시군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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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04 14:18:42 *.130.115.78

신화가 삶의 지도라고 믿는 저로서는.

제 자신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라서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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