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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5월 6일 10시 14분 등록
저자연구

사마천(BC 145? ~ BC 86?)
samachun.jpg
서양의 고대 역사서에 헤르도토스의 <역사 historia>가 있다면 동양에는 사마천의 <사기>가 있다. 

사마천의 일생
사마천은 섬서성(陝西省) 용문(龍門)시 하양(夏陽)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부친 사마담(司馬談)은 한나라의 태사령(太史令)을 지낸바 있으며 천문과 역학은 물론 도가(道家)까지 섭렵한 뛰어난 학자였다. 사마담은 아들의 교육에 열의를 쏟았고, 어린 사마천에게 고전 문헌을 구해다 가르쳤다, 10살때 아버지를 따라 당시 수도였던 장안에 와서 유학자 공안국, 동중서로부터 수학하였다. 사마담은 사관으로서의 자부심이 높았고, 사마천은 그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았다. 20세 무렵부터 아버지의 권유로 견문을 넓히고 역사가로서 자질을 기르기 위해 전국을 답사하기 시작했고, 벼슬살이를 시작한 후로는 한 무제를 수행하며 각지를 돌아다녔다. 이러한 현장 경험은 훗날 <사기>의 저술에 큰 도움이 되었다. 38세 무렵인 기원전 108년, 아버지 사마담은 세상을 떠나면서, 아들 사마천에게 자신이 시작한 <사기>의 완성을 부탁한다. 사마천의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사기>를 완성하는 것을 필생의 과업으로 삼게 되고, 국가의 장서가 있는 석실금궤에서 자료 수집을 시작하게 된다. 아버지 사후 2년 후 무제의 태사령이 되었고 태산 봉선(封禪:흙을 쌓아 제단을 만들고 제사를 지내는 의식) 의식을 담당하게 된다. 

태사령에 임명된 지 10년째이자 47세가 되던 해, 사마천은 뚯밖의 사건을 겪게 된다. 이른바 ‘이릉의 화’라 불리는 사건이 그것이다. 전한의 명장이였던 이광의 손자로서 흉노를 토벌하여 빛나는 공을 세웠던 장수 이릉이 전쟁터에서 어쩔 수 없이 흉노에 투항하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얼마 전까지 이릉의 승리에 환호하던 조정 대신들은 하루아침에 일제히 이릉을 비난하고 나섰다. 패배를 책임질 희생양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사마천은 그 상황에서 본인과 전혀 친분이 없는 이릉을 변호한다. 이는 이릉이 전쟁에서 승리할 때는 칭찬을 아끼지 않다가 흉노의 포로가 되자마자 무제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이릉을 비난하는 조정 대신들의 행태가 못마땅했는데, 마침 황제가 사마천의 의견을 묻기에 이릉을 변호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는 큰 오해를 불러일으키며 황제의 분노를 사게 된다. 분노한 무제는 사마천을 옥에 가두었다. 이릉이 흉노에서 벼슬까지 받고 흉노 군대에 병법을 가르친다는 소문이 들려오자 상황은 일파만파 악화되기 이른다. 이에 무제는 이릉의 가족을 몰살한 다음, 역적을 옹호했다는 죄목으로 사마천에게 사형을 내린다.

사마천이 아버지의 유언이자 필생의 과업인 <사기> 저술에 박차를 가하고 있던 시점이었다. 그는 이대로 죽음을 맞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사형을 면하기 위해서는 50만전이라는 거금이 필요했다. 그게 아니면 궁형, 즉 남자의 생식기를 잘라내는 사형보다 더 큰 치욕을 감수해야 했다. 사마천에게는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었기에 결국 그는 치욕을 감수하고 궁형을 선택했다. 그의 나이 49세 때의 일이다. 이듬해 사마천은 사면을 받아 감옥에서 풀려난다.

사마천은 옥중에서도 <사기>의 저술을 계속하였으며 그의 나이 51세에 황제의 신임을 회복하여 환관의 최고직인 중서령이 되었다. 그의 친구였던 임안의 추천을 받아 무제의 곁에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환관 신분으로 일부 사대부들의 멸시를 받았으며 운신의 폭도 자유롭지 못했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사마천은 마침내 <사기>를 완성한다.  아버지의 유언을 받든지 20년 만이었다. <사기>가 완성된지 2년 후 사마천은 불명의 죽음을 맞는다. 사마천의 사망 원인은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다. 그는 대략 55세 전후에 세상을 떠난 것으로 추정된다. 사인은 명확하지 않으나, <사기>를 완성한 후 또다시 황제의 심기를 건드려 처형당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이제 <사기>도 다 완성했겠다, 더 이상 몸 사릴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사기>에서 보여준 그의 꼿꼿함이라면 또다시 황제의 분노를 사는 것은 일도 아니였으리라.

그의 역작 <사기>에 대하여
사마천은 자신이 저서를 <태사공서(太史公書)>라고 불렀지만 후한시대에 들어와 <사기>라고 불리게 되었다. 사마천은 이 <사기>라는 작품 하나로 후세에 ‘역사의 아버지’라는 칭호까지 얻게 된다. 기전체 역사서인 <사기>는 고대 중국의 전설시대부터 기원전 122년까지 3천년이 넘는 장구한 역사를 기술하고 있는 대하 역사 드라마다.
그럼 사마천이 <사기>를 쓴 목적은 무엇인가? 
역자 김원중은 그에 대한 대답을 <사기열전>의 맨 마지막에 둔 <태사공 자서>에서 찾고 있다. 
첫째, 발분 의식의 소산이다. 궁형을 당한 것은 목숨을 이어가기 위한 구차한 행위가 아니라 글을 지어 후세에 이름을 남기기 위한 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런 이유로 <열전>에는 치욕을 견디고 세인들에게 이름을 떨친 관중이나 오자서, 경포 등에게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여 그들의 전기를 따로 마련하고 있다.
둘째, 역사적 사실의 포폄(褒贬)과 직서(直書)이다. 이는 <춘추>의 정신을 계승하려는 아버지 사마담의 견해와 일치한다. 
사마천이 그가 살다간 격동의 시대를 약 120명의 비운의 인물을 통해 그려 내었던 이유는 비단 그에게 닥친 비극뿐만이 아닌 그 시대의 암울한 현실 때문이기도 했다.
사마천은 <사기> 곳곳에서 세상의 부조리를 개탄하고, 등장인물들을 통해 자신의 억울한 심경을 직간접적으로 표출하고 있다. 부당한 권력에 저항했으며, 약자와 보통사람의 편에 섰다. 사마천은 친구인 임안에게 보낸 편지에서 사기를 저술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를 “천하에 잊힌 옛 일들을 모조리 망라하고 그것을 비교, 검토하여 성공과 실패, 흥기와 파괴의 이치를 고증하고 싶었다”라고 말한다. 또한 그는 <사기>의 저술에 있어 “하늘과 사람의 이치를 연구하고, 고금의 변화를 통달하여 스스로 일가(一家)를 이룬다”라는 목표를 세웠다고 한다.

사마천이 어떤 생애를 보냈는지, 그리고 어떤 마음으로 <사기>를 편찬했는지는, 친구인 임안에게 보낸 서신들을 통해 미루어 적잖은 것들이 짐작 가능하다. 
<사기>를 완성하기 위해 사형보다 치욕적인 형벌을 자청한 그는 친구 임안에게 보낸 편지에서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모진 치욕을 당하기로는 궁형보다 더한 것이 없소이다. ······ 내가 화를 누르고 울분을 삼키며 옥에 갇힌 까닭은 차마 다하지 못한 말을 후세에 남기기 위해서였소.”
울분화 회한으로 점철된 후반기 인생이였지만, 아무것도 <사기>의 완성에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그는 좌우고면하지 않고 필생의 프로젝트인 <사기> 130권의 완성을 위해 온 힘을 쏟는다. 궁형의 치욕을 참아내며, <사기>의 저술을 위해 세인들이 구차하다고 손가락질한 삶을 지속한 부분은 <죽음의 수용소에서>의 저자 빅터 프랭클을 연상하게 한다. 스트리아의 전도유망한 신경정신과 의사였던 빅터 프랭클 역시 그의 인생사명이었던 로고테라피와 그에 대한 저서집필의 절실함 덕분에 가족들을 모두 잃는 아픔속에서도 아우슈비츠의 혹독한 수용소 생활을 견뎌낼수 있었다. 

빅터 프랭클이 아우슈비츠에서 풀려나고 저서를 완성한 후에도 자신 앞에 놓여진 삶의 소명을 깨닫고 제 2의 삶을 시작한 것에 비해, 사마천은 많은 나이가 아니였음에도 불구하고 <사기>를 완성한지 2년만에 죽음을 맞는다. 사마천의 죽음의 이유를 황제의 횡포나 그당시 시대상에서만 찾기 어렵다고 느껴지는 까닭은 무엇일까? 삶의 절대적 목표가 있다는 것은 결코 나쁜 일이 아니지만, 그것이 사라졌을때 인생은 또 어떤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올지 모르는 일이다.



내 마음을 무찔러드는 글귀

역자 서문

p5
세계인의 고전 <사기>는 사마천이 사관인 아버지 사마담의 유언에 따르고자 궁형의 치욕을 딛고 저술한 통사체 역사서로서, 전설의 황제 시대부터 한 무제 때까지 2000년을 아우르고 있다. <사기>중에섣 <열전> 70권은 주나라 붕괴후 등장한 50개 제후국 가운데 최후까지 살아남은 전국칠웅의 흥망성쇠를 주축으로 하며, 수많은 인물들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그려 보인다.

p7
<사기 열전>은 이와 같은 격동과 파란의 시대를 치열하게 살다 간 온갖 인물 군상의 결정체이다.

해제

p13
중국 고대 역사서의 세 가지 편찬 체제인 편년체, 기사본말체, 기전체 가운데 기천체의 효시가 <사기>다. 기전체는 본기와 열전을 중심으로 구성되는데, 먼저 시대순으로 제왕의 언행과 행적을 중심으로 당시의 정치, 경제, 군사, 문화, 외교 등 중대한 사건을 서술하고, 제왕이나 제후를 보좌한 개인들의 이야기를 서술하는 구성방식을 취하고 있다.

p21
<사기 열전>의 독특한 인물의 선택, 서술 방식은 역사는 결코 지배자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시각에서 출발한다.

> 그렇다 한들, 역사는 지배계층에 대한 서술 위주로 쓰여질 수 밖에 없는 숙명을 지니고 있다. 일연은 <삼국유사>를 쓰면서 왕과 지배층의 역사만을 다루지는 않았다. 이는 <삼국유사>의 마지막 '사'자가 역사 史가 아닌 일 事인 이유이기도 하다.

p25
<사기>가 구십 년 늦게 나온 반고의 <한서>와 달리, 도가와 병가, 잡가 등 제자백가를 두루 섭렵하여 한나라의 국가이념인 유학에 배치되었다는 점도 당시 지식인 사회에서 배척되는 요인이 되었다.

> 지금도 그러한 정치적 이유 때문에 배척받고 있는 것들이 허다하다. 모름지기 시대를 잘 타고나야 하는 법이다.

백이열전
p60
공자는 "인이란 사람다움이다.", "자신을 이기고 예를 회복하는 것이 '인'이다. 단 하루라도 자신을 이기고 예를 회복한다면 온 세상 사람이 그를 어진 사람이라고 할 것이다."라고 했다. 이로부터 보면 '인'은 인간의 본질을 가리키는 개념임을 알 수 있다. 공자는 '인'의 실천 방법으로 효, 제, 충, 서, 예, 악을 제시했다.

p65
파리도 천리마의 꼬리에 붙어 천리 길을 갈 수 있다

> 속세에서는 라인을 잘 타야 하고, 태어나면서 손에 쥐는 숫가락 색깔로 미래가 결정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관안열전
p71
관중은 곤궁하여 언제나 포숙을 속였지만 포숙은 끝까지 그를 잘 대했고 속인 일을 따지지 않았다.

p72
나를 낳아준 이는 부모이지만 나를 알아준 이는 포숙이다.

> 그런 면에서 포숙은 관중의 부모이자, 스승이자, 매니져이자, 스폰서였다. 폭력적이었던 마이크 타이슨의 가능성을 귀신같이 감지한 프로모터 돈 킹과 같은 존재였던 셈이다. 위대한 인물들의 생애를 보면, 하나같이 그들의 가능성을 통찰한  조력자들이 등장한다. 신화에 있어서, 초자연적인 힘이 영웅을 위기에서 벗어나게 해주듯이 말이다.

p73
창고에 물자가 풍족해야 예절을 알며, 먹고 입는 것이 풍족해야 명예와 치욕을 알게 된다.

> 관중은 인간의 근원을 꿰뚫고 있었던 정치가였던 것 같다. 

p77
나아가서는 충성을 다할 것을 생각하고 물러나서는 허물을 보충할 것을 생각한다.

> 관중과 함께 춘추전국시대 명재상 탑 2에 빛나는 안영의 말이다.

노자,한비 열전

p81
군자는 때를 만나면 관리가 되지만, 때를 만나지 못하면 바람에 이리저리 날리는 다북쑥처럼 떠돌이 신세가 되오. 훌륭한 상인은 물건을 깊숙이 숨겨 두어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이게 하고, 군자는 아름다운 덕을 지니고 있지만 모양새는 어리석은 것처럼 보인다고 들었소. 그대는 교만과 지나친 욕망, 위선적인 표정과 끝없는 야심을 버리시오.

> 노자는 공자의 마음 속에 감추어진 출세욕과 야심을 꿰뚫어 본 것이다. 이를 인정한 공자의 도량 역시 대단하다.

p88
유세에서 중요한 것은 상대방의 장점을 아름답게 꾸미고 단점을 덮어버릴 줄 아는 것이다.

p90
이웃집 사람과 관기사가 한 말은 모두 옳았으나 심한 경우는 목숨을 잃고 가벼운 경우는 의심을 받았다. 이는 안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라 아는 것을 어떻게 쓰느냐가 어렵다는 뜻이다.

> 결과적으로 이웃집 사람은 오지라퍼였고, 관기사는 불쌍한 재물이었던 셈이다. 어떤 경우든지 당사자와 친하지 않았음이 틀림없다.

p91
미자하의 행위는 처음이나 나중이나 다를 바가 없었지만 처음에는 현명하다고 칭찬을 받고 나중에는 죄를 입게 되었다. 그것은 군주가 그를 사랑하고 미워하는 마음을 완전히 바꾸었기 때문이다.

> 굳이 춘추전국시대의 고사에서 찾을 것도 없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온통 그러하지 않은가? 아침에는 사랑스럽던 가족이 저녁에는 원수로 변하기도 한다. 우리는 상대방에게서 그 이유를 찾지만, 실상 가장 큰 원인은 우리 자신에게 있다.

용이라는 동물은 잘 길들이면 그 등에 올라탈수도 있으나, 그 목덜미 아래에 거꾸로 난 한 자 길이의 비늘이 있어 이것을 건드린 사람은 죽는다고 한다.

> 역린. 누구에게나 그런 부분이 있다.

사마 양저 열전
p101
그럭고는 그의 마부와 수레 왼쪽의 곁나무와 왼쪽 곁말의 목을 베어 전군의 본보기로 삼았다

> 예나 지금이나 이름없는 말단들의 목은 바람앞의 촛불이로구나. 정치스캔들이 터져도 재벌비리 스캔들이 터져도 처벌받는 것은 그 하수인들 뿐이니...

손자 오기 열전
p112
우리 제나라 군대가 위나라 땅에 들어서면 첫날에는 아궁이 10만개를 만들게 하고, (...) 또 그 다음 날에는 아궁이 3만개를 만들게 하십시오

> 삼국지의 제갈공명이 이를 응용하여 사마의를 격퇴한다. 후퇴하던 제갈공명은 역으로 아궁이 수를 늘려서, 추격하던 사마의를 혼란스럽게 만들어 퇴각에 성공한다.

p114
그로부터 얼마 뒤에 그 어머니가 죽었지만 오기는 끝내 돌아가지 않았다. 증자는 오기를 경시하여 그와 관계를 끊었다.

> 현대판으로 말하면 출세지향적 워커홀릭으로 가족과 부모를 일의 아래에 두는 유형의 인간이다. 일을 잘하며 직장에서의 리더쉽도 좋지만 그뿐이다. 대부분의 타인으로부터 욕을 먹고 원망을 사며, 후세의 평가도 좋을 수 없다. 그럼에도 오기가 높이 평가되는 이유는 군인, 정치가로서 탁월한 업적과 역량 때문이다.

p116
오공이 지금 또 제 자식의 종기를 빨아 주었으니 이 아이도 어느 때 어디서 죽게 될지 모릅니다. 그래서 소리 내어 우는 것입니다

> 직장에서 동료와 부하직원들을 대하듯이 가정에서 잘 한다면 워커홀릭이더라도 봐줄만 하다. 이것이 오기가 워커홀릭으로서 그의 비지니스 세계에서 성공한 이유이기도 하다.


오자서 열전
p135
나를 대신해서 신포서에게 사과하고 '해는 저물고 갈 길은 멀어 천리를 좇을 수 없었소.'라고 말해 주게

p140
내 무덤위에 가래나무를 심어 왕의 관을 짤 목재로 쓰도록 하라. 아울러 내 눈을 빼내 오나라 동문에 매달아 월나라 군사들이 쳐들어와 오나라를 멸망시키는 것을 똑똑히 볼 수 있도록 해라.

> 그리스 신화의 불세출의 장님 예언가 타이레시아스가 떠오르는 대목이다. 그의 두 눈은 미래를 정확히 보고 있었던 것이다.

중니 제자 열전
p149
안회라는 자가 배우기를 좋아하고 노여움을 남에게 옮기지 않으며 잘못을 거듭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젊은 나이에 죽었습니다. 지금은 세상에 배우기를 좋아하는 자가 없습니다.

p152
자화가 공자의 대답이 다른 것을 의아해 하며 물었다
"감히 여쭙겠습니다. 어째서 같은 질문에 달리 대답하십니까?"
공자가 말했다.
"염구는 머뭇거리는 성격이므로 앞으로 나아가게 해 준 것이고, 자로는 지나치게 용감하므로 제지한 것이다."

> 맞춤 교육의 극명한 예라 하겠다.

p157
재여는 참으로 어질지 못하구나! 자식은 태어나서 삼 년이 지나야 부모 품에서 벗어난다. 그래서 삼 년상은 세상의 합의된 예의이다

> 글쎄...유교의 예와 허례의식때문에 조선이 발전을 못 하고 우리나라가 서구문명의 침탈에 속수무책일수밖에 없었다. 20년은 지나야 부모품에서 벗어나는 현대에는 부모상을 20년을 해야 하는 것인가? 부모를 공경하는 마음과 허례는 구별되어야 한다. 

p161
자공은 이렇게 대답했다
"제가 듣기에 나라 안에 걱정거리가 있으면 강한 적을 공격하고, 나라 밖에 걱정거리가 있으면 약한 적을 공격한다고 합니다. (...) "

> 약한 적이든, 강한 적이든, 내부의 문제가 있을때 외부의 문제로 국민의 눈을 돌리게 만드는 것은 오래된 정치기법인 듯 하다.

p170
지나친 것은 미치지 못하는 것과 같다.

p173
대체로 통달한 사람은 질박하고 정직하여 의를 좋아하고, 남의 말을 잘 듣고 표정을 잘 살피며, 깊이 생각하고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낮춘다. 이렇게 하면 나라에서나 집에서나 반드시 통달하게 된다. 그러나 명망 있는 사람은 겉으로는 어진 척하지만 실제 행동은 완전히 어긋나면서도 그러한 것에 물들어 조금도 의심 없이 행동한다. 이렇게 하면 나라에서나 집에서나 반드시 이름을 얻게 된다."

p176
원헌이 말했다.
"내가 듣건대 재물이 없는 것을 가난이라고 하고, 도를 배우고도 실행하지 못 하는 사람을 병들었다고 한다고 했습니다. 저는 가난하기는 하지만 병들지는 않았습니다."

p182
도가 행해지는 것도 천명이고, 도가 행해지지 않는 것도 천명이다. 자주같은 인물이 그 천명을 어찌할 수 있겠느냐? 내버려 두어라.

> 그저 우리는 '진인사'할 뿐이다.

p187
신하는 임금의 잘못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는다.

> 굳이 군신의 관계가 아니더라도, 남의 잘못괴 허물을 다른 3자에게 말하는 것은 좋지 않다.

상군 열전
p207
조량이 대답했다.
"돌이켜 자기 마음속의 말에 귀 기울이는 것을 총聰이라 하고, 마음속으로 성찰할 수 있는 것을 명明이라고 하며, 자신을 이기는 것을 강强이라고 합니다."

> 총聰, 명明, 강强 - 자기개발계의 삼총사라 할 수 있겠다.

p211
상군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아! 법을 만든 폐해가 결국 이 지경까지 이르렀구나."

소진 열전
p220
백 리안의 근심거리를 생각하지 않고 천 리 밖을 중시한다면 이보다 더 잘못된 계책을 없을 것입니다.

p231
<주서周書>에서는 '처음에 싹을 자르지 않아 무성해지면 어떻게 하나? 터럭같이 작을 때 치지 않으면 결국 도끼를 써야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p238
만일 나에게 낙양성 주변에 밭이 두 이랑만 있었던들 어찌 여섯 나라 재상의 인수를 찰 수 있었을까?

> 먼 훗날 나 자신이 이 명대사를 패러디 할 수 있기를 바란다. "만일 나에게 여의도 빌딩 두 채만 있었던들 어찌 이렇게 멋진 사람이 될 수 있었을까?"

p258
이와 같이 진나라왕이 남을 꾸짖는 말은 둥근 고리처럼 돌고 돌며, 군사를 움직이는 것은 나는 새처럼 재빠르므로 태후도 막을 수 없고 양후도 말릴 수 없었습니다.

장의 열전
p267
나는 그가 작은 이익을 탐내어 큰 뜻을 이루지 못할까 염려스러워 일부러 그를 불러다 모욕을 주어 그의 뜻을 북돋은 것일세. 자네는 나 대신 은밀히 그를 도와주게.

> 좀 오바스럽긴 하다

p268
그 뒤 장의는 진나라 재상이 되어 격문을 써서 초나라 재상에게 알렸다
<지난날 내가 당신과 술을 마셨을 때 나는 당신 구술을 훔치지 않았건만 당신은 나를 매질하였소. 이제 당신 나라를 잘 지키시오. 나는 당신 나라의 성읍을 훔칠 것이오.>

> 장의는 이 말을 하고 얼마나 통쾌했을까? 10년 묵은 체증이 풀린다는 말은 이럴때 써야 하는 듯

p274
그러나 같은 부모에게서 난 형제끼리도 서로 재물을 다투는 일이 있는데, 간사하고 거짓을 일삼으며 이랬다 저랬다 하는 소진의 술책을 믿으려고 하니 그것이 이루어질 수 없음을 또한 명백합니다.

p282
합종을 주장하는 자들은 말을 부풀려 꾸미고 거짓말로 임금의 절개를 높이 추켜올리면서 이로운 점만 말하고 해로운 점은 말하지 않습니다.

> 합종을 주장하는 자들이나 연횡을 주장하는 자들이나 말빨을 앞세운 구라쟁이들일뿐

p288
그러나 왕을 위하여 계책을 내는 자는 모두 한때의 이익에 끌려서 백대의 이익을 돌아보지 않고 있습니다

> 한때의 이익이나 백대의 이익이 아닌 자신의 이익과 추구하고자 하는 큰 그림대로 교묘한 언변을 부리는 것에 지나지 않아 보이는구나!

p295
제후들은 장의와 무왕사이에 틈이 있다는 말을 듣고는 모두 연횡 약속을 어기고 다시 합종하였다

> 이해타산에 의해 움직이는 것은 고대나 현대나 마찬가지인데, 춘추전국 시대 유세가들의 언변만 그럴듯 하다.

p299
노비가 그 마을을 벗어나기 전에 팔리면 좋은 노비입니다. 소박 맞고 쫓겨 온 여자가 그 마을에서 다시 결혼한다면 좋은 아내입니다. 지금 신이 자기 임금에게 충성스럽지 않다면 초나라도 어떻게 신을 충성스럽다고 여기겠습니까?

> 평판의 중요성

p302

저리자 감무 열전

p312 진나라 속담에 "힘은 임비요, 지혜는 저리이다."라는 말이 있다.

p314 신은 왕께서 북을 내던진 증삼의 어머니처럼 신을 의심하지나 않을까 두렵습니다.

p317 짐승도 궁지로 몰리면 수레를 뒤엎는다고 합니다.

> 얼마전 뉴스에 나왔던 도축장에서 소가 사람들을 들이받고 탈출했던 소동이 생각난다. 소에게 공격당한 2명중 한명은 안타깝게 목숨을 잃었지만, 누리꾼들은 그보다는 소에 대해 더 많은 동정을 보내고 있다. 그냥 갑자기 생각나서 주절주절 적어봤다. 탈출한 소는 포획되었지만 그 소가 어떻게 처리되었는지에 대한 뉴스는 없다. 다시 도축장에 끌려갔겠지... 가슴아픈 일이다.

p322 감무에게 상경 벼슬을 주고 제나라에 머물게 했다. 진나라에서는 이 일로 해서 감무의 집안을 회복시켜 주고 그를 데려오려고 제나라와 경쟁하였다.

양후 열전
p341
그래서 저는 "진나라 왕은 현명하여 계책에 뛰어나고 양후는 지혜로워 일 처리에 능숙하므로, 결코 조나라에 병사 4만명을 주어 제나라를 치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편지를 읽은 양후는 나아가지 않고 병사를 이끌고 돌아왔다.

백기 왕전 열전
p349 백기는 사람들을 속여 모조리 산 채로 땅속에 묻어 죽이고, 남은 어린아이 240명만을 조나라로 돌려보냈다.

> 무려 40만명의 항복한 조나라 병사들을 산채로 생매장한 것이다. 수십년이 지난후 항우는 항복한 수십만명의 진나라 병사들에게 동일한 복수를 자행하게 된다. 끔찍한 역사는 되풀이되는 법이다.

p353 나는 죽어 마땅하다. 장평 싸움에서 항복한 조나라 병사 수십만명을 속여서 모두 산 채로 땅속에 묻었으니 이것만으로도 죽어 마땅하다

> 백기는 대혈겁을 저지른 후, 그 일을 잊지 못하고 살아갔을 것이다. 마음 한구석에 계속 간직해왔던 죄의식이 죽음에 이르러서야 그 뚜껑이 열린 셈이다.

p356 진나라 왕은 포악하고 다른 사람을 믿지 않소. 그런데 지금 진나라 군사를 모두 나에게 맡겼소. 내가 자손을 위한 재산을 만들려고 많은 논밭과 정원과 연못을 요청함으로써 다른 뜻이 없음을 보여 스스로를 안전하게 하지 않는다면 진나라 왕은 가만히 앉아서 나를 의심할 것이오."

> 현명하기 이를 데 없다. 춘추전국시대, 달콤하고 현혹스러운 언변으로 군주들을 구워 삶는 유세가들이 판을 치고, 배신과 합종연횡이 난무하는 시대였다. 어떻게 처신하느냐에 따라 목숨이 달려있는 상황이니, 처세술과 보신술이 발전할 수 밖에 없는 시대였다.

p358 세상에는 자에도 짧은 데가 있고, 치에도 긴 데가 있다. 백기는 적의 전력을 헤아려 날쌔게 대응하고 끊임없이 기이한 계책을 생각해 천하에 명성을 떨쳤지만, 응후와의 사이에서 생긴 근심은 없애지 못했다.

맹자 순경열전
p361 순자가 사회에 요구하는 것은 '예'를 기초로 해서 계층 간의 불화와 갈등을 조정할 수 있다는 믿음에서 출발한다.

p364 양나라 혜왕도 맹가의 주장을 입으로만 찬성하고 실제로는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그의 주장이 현실과 너무 동떨어져서 실제 상황에 들어맞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조직내 변화와 개혁을 이상으로만 취급하는 것은 기득권 세력의 전형적인 행태이다. 총론은 찬성, 각론은 반대라는 상투적인 변명 있지 않은가.

p370 하늘을 말하는 추연, 용을 아로새긴 듯 문장을 꾸미는 추석, 곡과를 지지는 순우곤!

맹상군 열전
p375 제나라 맹상군 전문, 조나라 평원군 조승, 위나라 신릉군 무기, 초나라 춘신군 황헐은 선비를 기르기로 이름이 널리 알려졌는데, 각기 식객 3000여명을 거느려 흔히 '전국 사공자'라고 부른다

> 수많은 팬덤을 거느린 춘추전국시대의  '꽃보다 F4'였던 셈이다.

p379 사람의 운명을 하늘에서 받는다면 아버님께서는 무엇을 걱정하십니까? 그렇지 않고 운명을 지게문에서 받는다면 지게문을 계속 높이면 그만입니다. 어느 누가 그 지게문 높이를 따라 계속 클 수 있겠습니까?"

p397 살아있는 것이 반드시 죽게 되는 것은 만물의 필연적인 결과입니다. 부유하고 귀하면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고, 가난하고 지위가 낮으면 벗이 적어지는 것은 일의 당연한 이치입니다. (...) 당신이 지위를 잃자 빈객이 오는 걸 막을 필요는 없습니다. 당신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빈객들을 대우하십시오.

평원군 우경 열전
p404 평원군은 절름발이를 비웃은 애첩의 목을 베고, 직접 문 앞까지 가서 절름발이에게 그 목을 내 주면서 사과했다. 그 뒤 문하에 다시 선비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 오늘날 이해될 수도 용납될 수도 없는 얘기이겠지만, 현대인들에게도 출세와 처세를 위해 생각해볼만한 대목이다. 자신이 가진 것을 극적으로 내침으로써, 더 많은 지지와 수하를 얻는 처세술은 현대에도 유효하다.

p406 모수가 말했다. "저는 오늘에야 당신의 주머니 속에 넣어 달라고 부탁드리는 것입니다. 만일 저를 좀더 일찍 주머니 속에 있게 하였더러라면 그 끝만 드러나 보이는게 아니라 송곳 자루까지 밖으로 나왔을 것입니다."

p421 평원군은 풍정의 그릇된 말에 빠져 조나라 장평의 사십만 병사를 산 채로 매장되게 하고 한단을 거의 멸망시킬 뻔 했다.

위공자 열전
p428 공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신의 빈객 중에 조나라 왕의 은밀한 일까지 정탐할 수 있는 이가 있습니다. 그는 조나라 왕이 하는 일마다 하나하나 신에게 알려줍니다. 그래서 신은 이번 일도 알 수 있었습니다."
그 뒤로 왕은 공자가 어질고 능력 있음을 꺼려 그에게 나랏일을 맡기려 하지 않았다.

> 그래서 자신보다 뛰어난 수하들을 알아보고 용인하는 리더들이 성공하는 것이다.

p435 저도 마땅히 따라가야 하지만 늙어서 갈 수 없습니다. 그렇더라도 공자의 일정을 헤아려, 공자께서 진비의 군대에 이르는 날에 북쪽을 향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으로 대신하겠습니다.

> 현대인의 정서로 이해할 수 없는 기괴한 보은법이지만, 그 당시에는 이런게 참 멋져 보였던 모양이다.

p436 세상일에는 잊으면 안 되는 것이 있고, 또 잊어야만 하는 것이 있습니다. 남이 공자에게 베푼 은덕은 잊으면 안됩니다. 그러나 공자가 다른 사람에게 베푼은덕은 잊으시기 바랍니다.

p439 제후들은 공자가 위나라 장군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각각 군사를 보내 위나라를 구하게 했다.

> 바로 전에 필사한 436쪽에서의 빈객의 충고를 위무기가 잘 실천한 결과로 보인다.

춘신군 열전
p461 마땅히 결단해야 할 것을 결단하지 못하면 도리어 어려움을 겪게 된다. 이는 춘신군이 주영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을 두고 한 말일까?

> 빙고!

범저 채택 열전
p470 대부의 집을 번창시킬 인재는 나라 안에서 찾고, 제후의 나라를 번창시킬 인재는 천하에서 찾는다

p485 그러나 오늘 네가 죽음을 당하지 않는 이유는 두터운 명주 솜옷을 주면서 옛정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너를 용서한다.

p487 주나라 문왕은 여상을 얻어 태공이라고 하였고, 제나라 환공은 관이오를 얻어 중보(숙부)라고 높였습니다. 지금 범선생도 과인에게 숙부와 같은 존재요.

p489 그는 남의 곤궁함을 긴급하게 여겨 공자를 의지하러 온 것입니다. 공자께서는 '어떤 인물인가?'라고 물었습니다. 사람이란 본래 알기가 힘들지만 남의 됨됨이를 아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닙니다.

> 참 부끄럽게 만드는 언사가 아닐 수 없다. 위제가 이 얘기를 듣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은 어쩌면 잘 한일인지도 모른다.

p496 만약 죽은 뒤에야 충성스럽다는 이름을 얻었다면 미자는 어진 사람이라고 할 수 없고, 공자는 성인이라 할 수 없으며, 관중은 위대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 몸과 이름이 모두 온전한 것이 가장 훌륭하며, 이름은 남의 모범이 되지만 몸을 보존하지 못하는 것이 그 다음이고, 이름은 욕되어도 몸만은 온전한 것이 가장 아래입니다.

p498 나는 용이 하늘에 있으면 덕이 있는 자를 만나기 어렵다.

p501 앞에서 말한 네 사람은 공을 이루고 물러나지 않았기 때문에 이와 같은 재앙을 입었습니다. 이른바 '펼 줄만 알고 굽힐 줄 모르며, 앞으로 갈 줄만 알고 돌아올 줄 모르는 사람'이지요. 범려는 이러한 이치를 알아 초연하게 세상을 떠나 도주공이 되었습니다.

> 월나라 문종, 진니라 백기, 오나라 오자서, 진니라 상앙을 말한다.관성의 끝에서 더 나아가는 과도함을 중국의 신들도 그리스의 신들과 마찬가지로 용납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p503 <역경>에 '높이 올라간 용에게는 뉘우칠 날이 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오르기만 하고 내려갈 줄 모르며, 펴기만 하고 굽힐 줄 모르고, 가기만 하고 돌아올 줄 모르는 자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악의 열전
p507 악의는 그 유명한 <보연왕서>를 적어 자신이 연나라 소왕과 나누었던 군주와 신하로서의 의를 서술하고 자신의 심정을 토로했다. (...) 촉나라 제갈량의 <출사표>와 비슷한 점이 매우 많은 것을 보면 이것이 <출사표>의 기초가 된 듯 하다.

p516 신이 듣건대, "옛 군자는 사람과 교제를 끊더라도 그 사람의 단점을 말하지 않고, 충신은 그 나라를 떠나더라도 자기 결백을 밝히려고 군주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는다."라고 합니다.

염파 인상여 열전
p530 신 상여와 왕 사이는 다섯 걸음도 못 됩니다. 신은 목의 피를 왕께 뿌려서라도 요청할 것입니다.

> 인상여의 기개가 하늘을 찌른다

p533 내가 염파를 피하는 까닭은 나라의 위급함을 먼저 생각하고 사사로운 원망을 뒤로 하기 때문이오.

p542 "나는 조나라 군사로서 싸우고 싶다." 염파는 결국 수춘에서 죽었다.

전단 열전
p554 싸움을 잘하는 사람은 기이한 계책을 무궁무진하게 낸다. 기이한 계책과 정공법이 서로 어우러져 쓰이는 것은 마치 끝이 없는 둥근 고리 같다.

노중련 추양 열전
p567 지혜로운 자는 때를 거슬러 유리한 기회를 놓치지 않고, 용감한 자는 죽음을 겁내어 명예를 훼손시키지 않으며, 충성스러운 신하는 자기 한몸을 앞세워 군주를 뒤로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p569 또한 제가 듣건대 작은 예절에 얽매이는 사람은 영화로운 이름을 이룰 수 없고, 작은 치욕을 마다하는 사람은 큰 공을 세울 수 없다고 합니다.

p573 이사도 충성을 다하였지만 호해는 그를 극형에 처했습니다. 기자가 미친척하고, 접여가 세상을 피해 살았던 것도 다 이런 우환을 만날까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p576 여러 사람 입은 무쇠라도 녹일 수 있고, 헐뜯는 말이 쌓이고 쌓이면 뼈라도 녹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p581 손숙오는 초나라 사람이다. 그는 세번 재상이 되었지만 기뻐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자신의 재능으로 얻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 번 재상 자리에서 쫓겨났지만 서운하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이것은 자기 죄가 아님을 알았기 때문이다. 손숙오는 이런 행동으로 재앙을 피할 수 있었다.

굴원 가생 열전
p586 무릇 하늘은 사람의 시작이며 부모는 사람의 근본이다. 사람은 곤궁해지면 근본을 돌아본다. 그러므로 힘들고 곤궁할 때 하늘을 찾지 않는 이가 없고, 질병과 고통과 참담한 일이 있으면 부모를 찾지 않는 이가 없다.

p591 온 세상이 혼탁한데 나 홀로 깨끗하고, 모든 사람이 다 취했는데 나 홀로 깨어 있어서 쫓겨났소

> 굴원은 쓰임이 있으면 나가고 쓰임이 없으면 기다린다는 공자의 출세론을 참조할 필요가 있을 듯 하다

p602 재앙이란 복이 의지하는 곳이고 복이란 재앙이 숨어 있는 곳이라

여불위 열전
p622 <논어> 안연편 "소문이란 겉으로는 인덕을 좋아하는 듯하지만 실제 행동은 오히려 그렇지 못하고, 스스로 어진 사람이라고 여기며 살면서도 그에 대한 의혹이 없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관리가 될 때도 거짓으로 명성을 취하고 집에 있을 때도 거짓으로 명성을 취한다."

자객 열전
p629 조양자는 지백에 대한 원망이 너무 큰 나머지 지백의 두개골에 옻칠을 해서 큰 술잔으로 썼다.

> 그러면 화가 좀 풀리나?

p632 그러나 지백은 저를 한 나라의 걸출한 선비로 대우하였으므로 저도 한 나라의 걸출한 섭비로 그에게 보답하려는 것입니다.

p645
이는 태자가 나를 의심한 것입니다. 대체로 일을 행할 때 남에게 의심을 사는 것은 절개 있고 의협심 있는 사람의 행동이 아닙니다.

"부디 빨리 태자를 찾아가 전광은 이미 죽었다고 말하여 일이 새어나갈 염려가 없음을 분명히 해 주십시오". 그리고 전광은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 참 사람목숨 깃털보다 가볍다고 해야 하나, 그 죽음이 후대에까지 회자되니 무겁다고 해야 하나

p649
번오기가 한쪽 어깨를 드러내고 한 손으로 팔을 움켜쥔채 앞으로 다가서며 말했다. 
"이것이야말로 제가 밤낮으로 이를 갈고 가슴을 치며 고대하던 일입니다. 이제 당신의 가르침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러고는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이사 열전
p661
관청 변소의 쥐들이 더러운 것을 먹다가 사람이나 개가 가까이 가면 자주 놀라서 무서워하는 꼴을 보았다. 그러나 이사가 창고 안으로 들어가니 거기에 있는 쥐들은 쌓아 놓은 곡식을 먹으며 큰 집에 살아서 사람이나 개를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그래서 이사는 탄식하며 말했다.
"사람이 어질다거나 못났다고 하는 것은 비유하자면 이런 쥐와 같아서 자신이 처해 있는 환경에 달렸을 뿐이구나."

p666
태산은 흙 한줌도 양보하지 않으므로 그렇게 높아질 수 있었고, 하해는 작은 물줄기 하나도 가리지 않았으므로 그렇게 깊어질 수 있었습니다.

p670
만물이 극에 이르면 쇠하거늘 내 앞날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구나

> 이사는 자신의 미래를 예감한 것이다.

p695
드디어 아버지와 아들은 소리내어 울고 삼족이 모두 죽음을 당했다

> 그리고 그 미래가 현실이 된 것이다

p698
세상 사람은 모두 이사가 충성을 다했는데도 오형을 받고 죽었다고 생각하지만 그 근본을 살펴보면 세속의 말과는 다르다. 그러지 않았더라면 이사의 공은 주공이나 소공과 어깨를 겨룰 만하였을 것이다.

몽염 열전
p704
그는 장성을 쌓으면서 지형과 산세의 기복에 따라 요새를 만들었는데 임조에서 요동까지 1만여리나 되었다.

p710
내 죄는 죽어 마땅하다. 임조에서 요동까지 장성을 만여리나 쌓았으니, 이 공사 도중에 어찌 지맥을 끊어 놓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이것이 바로 내 죄로구나

> 죽는 순간까지 현실 파악을 못하다니. 그대의 죽음은 만리장성을 쌓으면서 죽어간 수만의 원혼들 때문이겠지. 장평에서 사십만의 병사를 생매장하고 죽어가며 이를 뉘우친 백기가 불현듯 생각나는구나.

장이 진여 열전
p720
"가만히 듣건대 당신이 곧 죽을 것이라기에 조문하러 왔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나 괴통을 얻어 살 수 있게 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
"(...) 당신이 빨리 나를 보내 무신군을 만나 보게 한다면 재앙을 복으로 되돌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때가 바로 지금입니다.

> 개인적으로 <사기열전(상)>을 통틀어 괴통이라는 인물이 모사(謀士)의 으뜸으로 보인다.

p730
장이는 그 인수를 차고 진여의 부하들을 거두어들이기로 했다. 변소에서 돌아온 진여는 장이가 인수를 돌려주지 않음을 원망하며 급히 그곳을 나왔다

> 분열의 시작은 감정의 뒤틀림부터 시작되는 법이다

p733
그러자 진여가 말했다
"한나라가 장이를 죽인다면 따르겠소"

> 좋아했던 과거의 깊은 감정이 극도의 복수심으로 전환된 상황이다

위표 팽월 열전
p750
팽월은 여후에게 울면서 자신의 무죄를 호소하고 자기 고향 창읍에서 살게 해 달라고 청하였다. 여후는 이 말을 받아들여 함께 동쪽 낙양으로 왔다.
(...)
그리고 여후는 곧 팽월의 사인을 시켜 팽월이 다시 모반을 꾀하고 있다고 말하게 했다

> 여후 = 여우. 남편인 유방이 죽은 후 과거 남편이 총애하던 첩을 돼지로 만들어버린 끔찍한 여자이기도 하다.

경포 열전
p755
장년이 되어 법에 연루되어 얼굴에 먹물을 들이는 경형을 받게 되자, 경포는 너무 기뻐 웃으면서 말했다
"어떤 사람이 내 관상을 보고 형벌을 받은 뒤에 왕이 될 것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을 말한 거겠지."

> 경포의 사람됨을 알 수 있다. 일부러 범죄를 저지른 것으로 보인다.

p757
항왕은 희왕을 세워서 의제라 하고 도읍을 장사로 옮기도록 하면서 남몰래 구강왕 영포 등에게 의제를 습격하게 했다

> 항우의 그릇을 알만하다

p760

p770 
영포가 말했다 "황제가 되고 싶었을 뿐이오"

> 상남자 영포가 보인다. 슬램덩크의 강백호가 연상된다. "단지 이기고 싶었을 뿐"

항우가 구덩이에 파묻어 죽인 사람은 1000만 명이나 되지만, 영포는 늘 가장 포악한 일을 하는 자의 우두머리였고 공적은 제후들 가운데 으뜸이었다. 그래서 왕이 될 수 있었지만 자신도 세상의 큰 치욕을 피하지는 못했다. 재앙은 사랑하던 여자에게서 싹텄고 질투가 우환을 낳아 마침내 나라를 멸망하게 만들었구나!

회음후 열전
p777
한신은 소하와 자주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소하는 한신이 뛰어난 인물임을 알아보았다

> 관중과 포숙의 관계와 같다.

p781
항황이 화를 내며 큰 소리를 지르면 1000명이 모두 엎드리지만 어진 장수를 믿고 일을 맡기지 못하니 그저 보통 남자의 용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항왕이 사람을 대하는 태도는 공손하고 자애로우며 말씨가 부드럽습니다. 누가 병에 걸리면 눈물을 흘리며 음식을 나누어 줍니다. 그러나 부리는 사람이 공을 세워 벼슬을 주어야 할 경우가 되면 인장이 닮아 깨질 때까지 만지작거리며 선뜻 내주지 못합니다. 이것은 이른바 아녀자의 인일 뿐입니다.

> 다소 아부와 과장도 있겠지만, 대략적으로 항우의 인품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p797
당신이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항왕이 아직 살아 있는 덕택입니다.

> 이순신이 선조의 견제와 온갖 중상모략에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 임진왜란이라는 전란 때문이라는 것을 우리는 또한 알고 있다

당신은 항왕과 연고가 있는데 어째서 한나라를 배반하고 초나라와 손잡아 천하를 셋으로 나누어 왕이 되지 않습니까?

> 훗날 후한을 셋으로 가른 제갈공명의 위촉오 천하삼분지계의 원조가 여기에 있다. 괴통이 한신의 말을 들었다면 역사는 크게 바뀌었으리라.

p798
무릇 남이 나를 깊이 믿는데 내가 그를 배반하는 것은 상서롭지 못한 일입니다

> 한신이 토사구팽당하는 고사로부터 믿음의 대상에 대한 파익이 중요한 이유를 알 수 있다. 한신은 유방을 믿었다기보다는, 안일했다고 할 수 있다. 그가 저지른 가장 큰 어리석음이었다.

귀하게 되느냐 천하게 되느냐는 골상에 달려있고, 근심이 생기느냐 기쁨이 생기느냐는 얼굴 모양과 빛깔에 달려 있으며, 성공와 실패는 결단력에 달려있습니다.

> 귀천은 어디서 태어냐느냐에 달려있는 것이고, 근심걱정은 건강에 달려있으며, 인생의 성패는 결단력에 좌우된다는 것이다

p802
들짐승이 없어지면 사냥개는 삶아 먹히게 마련입니다.

용기와 지략이 군주를 떨게 만드는 자는 그 자신이 위태롭고, 공로가 천하를 덮는 자는 상을 받지 못한다.

p807
"폐하께서는 그저 10만명을 이끌 수 있을 분입니다."
고조가 물었다.
"그대는 어떻소?"
한신이 대답했다.
"신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습니다."
(...)
"폐하께서는 군대를 이끌수는 없습니다만 장수를 거느릴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이 폐하께 사로잡힌 까닭입니다."

> 또한 이것이 한신이 유방에게 잡아먹히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한신 노관 열전
p827
진희가 한번은 휴가를 얻어 돌아오는 길에 조나라에 들른 적이 있다. 이때 조나라 재상 주창은 진희를 따르는 빈객들의 수레가 1000여승이나 되어 한단의 관사가 꽉 차는 것을 보았다. 빈객들을 대하는 태도는 포의의 사귐과 같아 자기 몸을 낮추어 빈객들을 존경하였다. (...) 주창은 황상을 뵙자 이것을 자세하게 말했다.
"진희의 빈객은 지나칠 만큼 많습니다. 밖에서 여러 해 동안 군대를 마음대로 휘둘렀으니 무슨 변란이라도 있을까 두렵습니다."

전담 열전
p843
나는 남의 형을 살아 죽였는데 앞으로 그 동생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같은 군주를 섬겨야 하오. 비록 그가 천자의 조서를 두려워하여 나를 괴롭히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내 어찌 스스로 마음속으로 부끄러운 생각이 없겠소? 또한 폐하께서 나를 보고자 하시는 까닭은 내 얼굴을 한번 보려는 것에 지나지 않소. 폐하께서는 낙양에 계시니 지금 내 목을 베어 삼십 리를 말로 달려가면 모습이 썩지 않아 알아볼 수 있을 것이오."

> 배신과 야합이 밥먹듯이 되풀이되는 춘추전국시대에 보기 드문 경우인 듯 하다.

번 역 등 관 열전
p854
대신들은 여씨 일족과 여수의 가솔을 모두 죽이고 번항도 죽였다.

> 대단한 여후, 그 결말도 대단하다.

p869
그들이 칼을 휘두르고 개를 잡고 비단을 팔 때, 어찌 파리가 천리마의 꼬리에 붙어 천 리를 가듯이 한나라 고조를 만나 한나라 조정에 이름을 날리고 자손들에게까지 은덕을 내리게 될 줄 알았겠는가?



내가 저자라면

<사기>는 130권 52만 6500자에 이르는 방대한 역사서다. 이번 북리뷰는 그 일부인 열전이고, 그것도 전반부에 지나지 않는다. <사기열전(상)>을 읽고, <사기>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시냇물만 보고 바다를 짐작하는 필부의 어리석음일 뿐이다. 결국 북리뷰는 <사기열전(상)>에 한정될 수 밖에 없으나, 전체(사기)의 일부로서 이 책(열전)을 파악해본 이후, 책에 대해 논하는 것이 좋을 듯 하다. 

<사기>의 구조에 대해 한국고전인문연구소에 나와 있는 자료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출처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537853&cid=56777&categoryId=56777 )

130권은 ‘본기(本紀)’ · ‘표(表)’ · ‘서(書)’ · ‘세가(世家)’ · ‘열전(列傳)’ 다섯 부분으로 나뉜다. 나뉘어 있기는 하지만 이 다섯 부분은 서로 연계되어 보완하는 역할을 함으로써 엄격하면서 완벽에 가까운 체제를 이룬다. 말하자면 “one for all, all for one(각각은 전체를 위하여, 전체는 각각을 위하여)”이라 할 수 있는 유기적 체제의 전형이다. 이 체제가 바로 역사학의 신기원을 이룬 ‘기전체’다.
『사기』의 체제와 대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는 본기(本紀)로, 주로 제왕의 역사가 담겨 있다. 모두 12권이다. ‘紀’는 ‘기록한다’는 ‘記’와 같은 뜻이자 제왕의 책을 가리키는 단어이기에 ‘본기’라 한 것이다. 전설시대의 황제로부터 사마천이 살았던 시기까지 역대 제왕의 흥망과 중대한 정치적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본기는 기본적으로 제왕들에 관한 기록이지만, 제왕이 아닌 인물들도 포함하고 있다. 항우와 진시황이 그 주인공이며, 파격적으로 여성인 여후(여태후)를 편입시키기도 했다. 누가 되었든 ‘시세’와 ‘대세’를 주도한 자의 기록, 이것이 바로 본기다.
두 번째는 표(表)로 사건 위주의 본기를 알기 쉽게 이해하도록 배려한 부분이다. 사마천의 말에 따르면, 시간과 세대가 다르면 연도가 불분명해지기 때문에 표를 만들었다. ‘표’란 ‘밝힌다’는 뜻이다. 모두 10권이고, ‘세표(世表)’ · ‘연표(年表)’ · ‘월표(月表)’ 세 종류로 되어 있다. ‘표’ 부분은 왕조 순서에 따라 역사를 약간의 단계로 나누고 이를 다시 세대 · 연 · 월로 나누어, 큰 사건을 간명하게 나타내는 동시에 사건 전체를 서로 연계시키고 보완한다.
세 번째는 모두 8권으로 된 서(書)다. 서는 예의(「예서」) · 음악(「악서」) · 천문(「천관서」) · 달력(「역서」) · 수리(「하거서」) · 경제(「평준서」) · 군사(「율서」) · 종교(「봉선서」)에 관한 당시 사회의 주요 제도를 전문적으로 논술한 것이다. 당나라의 역사학자 사마정(司馬貞)은 이를 “국가의 대체(大體)에 관한 기록”이라고 했다.
네 번째 세가(世家)는 30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춘추전국시대 이래 한대에 이르는 주요 제후들의 역사 기록이 담겨 있다. 세가를 지은 의도는 본기와 비슷하다.
유학의 창시자이자 사상가인 공자와 농민봉기군의 우두머리였던 진섭(陳涉, 진승)은 제후가 아님에도 세가에 포함시키는 의미심장한 파격도 눈에 띈다. ‘세가’ 30편에 관한 종래의 일반적인 인식은 ‘제후의 기록’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세가는 5체제 중에서 상당히 복잡한 편이다. 사마천은 국가 정치와 사회역사에서 천자(황제)가 차지하는 중심적 지위를 인정함으로써 세가라는 체제를 창안할 수 있었다.
세가도 본기 등과 마찬가지로 사마천의 역사사상에서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시대의 흐름을 꿰뚫고 그 과정에서 변화를 읽어내는’ 이른바 ‘통변(通變)’ 사상을 잘 반영한다. 따라서 세가가 열국들이 발전하고 쇠퇴한 대세를 기록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지금까지 「공자세가」나 「진섭세가」에만 관심이 집중되는 바람에 30편 가운데 절반을 넘게 차지하는 열국 16편이 소홀히 취급되었다. 『사기』를 큰 통사(通史)라고 한다면 이 열국들의 세가는 춘추전국시대 각국의 작은 통사라 할 수 있다.
다섯 번째는 『사기』의 5체제 중에서도 백미라 할 수 있는 열전(列傳)이다. 왕 · 제후 이외의 인물에 관한 기록인 열전은 모두 70권으로 그 분량이 방대하다. 사회 각 계층의 수많은 인물들을 독특한 시각으로 분석하고 평가하고 있어, 사마천의 역사의식과 시대의식을 가장 잘 엿볼 수 있는 부분으로 꼽힌다.
열전은 인물을 서술하는 방식에 따라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이 네 종류로 나뉜다.
① ‘전전(專傳)’이라는 것으로, 한 사람만의 전기를 말한다. 「위공자열전」이 대표적이다.
② ‘합전(合傳)’으로, 생애나 사상 그리고 처지가 비슷한 두 사람 이상의 전기를 한 편에 합쳐 같은 비중으로 서술했다. 초나라의 애국시인 굴원과 한나라 초기의 학자 가의를 한데 묶은 「굴원 · 가생열전」이 대표적인 예다.
③ ‘부전(附傳)’으로, 이는 한 사람의 전기 뒤에 그와 관련된 사적이나 가까운 인물의 전기를 덧붙인 것이다. 「위기 · 무안후열전」이 이 경우에 속하는데, 위기후 두영과 무안후 전분의 사적을 주로 다루면서 중간에 관부의 전기를 삽입했다.
④ ‘유전(類傳)’으로, 같은 부류의 인물들을 같은 전기에 거의 같은 비중으로 다룬 것이다. ‘잡전(雜傳)’ 또는 ‘휘전(彙傳)’이라 부르기도 한다. 「혹리열전」 · 「자객열전」이 이 종류에 속한다.
이 밖에 ‘부견(附見)’ 또는 ‘부출(附出)’이라 하여 다른 사람의 행적에 그 사람의 공적과 과실 등을 붙이는 형식이 있는데, 그 사람을 위한 열전이 마련되어 있으면 부견이라 하고 열전 없이 남의 열전에 부분적으로 삽입되어 있으면 부출이라 하여 둘을 구별하기도 한다. 이 형식은 일반적으로 잘 주목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서역 개척이란 큰 공적을 남긴 장건의 행적은 위청과 곽거병 뒤에 보잘것없이 딸려 있는데, 정작 그의 자세한 행적은 「대완열전」에 따로 나와 있다. 「흉노열전」 · 「조선열전」 등 소수민족에 관한 기록들은 ‘외국열전’ 또는 ‘소수민족전’이라 하여 따로 분류해볼 수 있다.
마지막 권인 「자서」는 성격이나 특징으로 보아 별도의 열전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다. ‘자전(自傳)’이란 용어가 적절할 듯하다. 형식이나 내용으로 보아 첫 번째 유형인 ‘전전’에 포함시켜도 무방한데, 다만 『사기』를 서술하게 된 동기와 취지 및 129편 전체의 핵심과 개략적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는 점에서 별도의 유형으로 분류할 수도 있다. 

이상이 <사기> 전체의 큰 그림이자, 그 중 <열전>이 어떤 식으로 구성되었는지 알 수 있는 잘 정리된 내용이다. 앞에서도 언급된 바가 있지만 <열전>에는 사마천의 개인적인 견해가 많이 들어가 있다. 정의롭고, 권력에 아부하지 않는 자들과 그렇지 못한 자들에 대한 평가가 극명하게 대비되는 편이다. 역사학자 E.H. 카가 말한대로 과거에 대한 사실은 역사가가 그 사실에 부여한 중요성에 의해서만 역사상의 사실이 되는 셈이다.

사마천이 <열전>을 쓸 때 그 순서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는지 여부는 한 눈에 잘 드러나지 않는다. 시대순으로 기술하던지, 각 나라별로 기술하던지 했으면 어떨까 싶다. 게으른 독자에 대한 약간의 배려는 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내가 역자라면, 좀더 한눈에 들어오도록 순서를 변경해볼 듯 하다. 비록 각 열전이 독립적이지만, 같은 인물이 각기 다른 열전에 많이 등장하는 바, 조금만 더 신경쓴다면 독자에게 물 흐르듯이 이야기에서 이야기로 독서를 이어나갈 수 있는 구성이 가능하리라 생각된다.

역자인 김원중 교수는 중국고전의 전문가로 그가 엮은 <사기열전>은 번역의 정확성과 치밀함에 있어 좋은 평가를 받고 있는 책이다. 각 열전의 앞부분에 나오는 개괄적인 설명과, 각 열전의 뒷부분에 수록한 도움말/각주는 독자의 이해를 높이고 또다른 흥미를 유발시키는 약방의 감초와도 같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인명, 지명에 대한 표기 부분이다. 예를 들어 진섭(진승), 항적(항우, 항왕, 초왕) , 유방(고조, 고제, 패왕, 패공)와 같은 인명의 경우, 병기한 부분도 있고 없는 부분도 있어 번역이 일관적이지 못한 부분이 있다.

<사기>의 일부분이지만 <열전> 역시 그 내용이 방대하다. 2권으로 구분되어 있으나, 한 권의 두께는 들고 다니며 읽기에는 손목에 무리가 갈 정도이다. <사기열전(하)>는 또 언제 읽을 수 있을지... 책장에 꽂힌채로 오랜 인고의 세월을 버티어 낼 책 한권에 불현듯 사마천의 모습이 겹치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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