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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5월 13일 07시 20분 등록
춘추전국시대 예양은 진晉나라 사람으로 지백이라는 사람을 주군으로 섬겼다. 지백은 그를 매우 존경하고 남다르게 아꼈다. 지백은 조나라의 제후인 조양자와 전쟁을 벌였고, 결국 조양자는 한나라, 위나라와 함께 일을 도모하여 지백을 멸망시키고, 지백의 후손까지 모조리 죽였다. 게다가 조양자는 지백에 대한 원망이 너무 큰 나머지 지백의 두개골에 옻칠을 해서 큰 술잔으로 썼다. 예양은 지백의 원수를 갚기 위해, 조양자의 암살을 시도했으나 번번이 실패하고 조양자는 옛 주군에 대한 충정에 감동하여 사로잡힌 예양을 매번 풀어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양은 끈질기게 기회를 노렸고 결국 어느날 다리밑에 숨어있던 예양을 사로잡은 조양자는 용서는 이미 충분했으며 이제 더이상 그를 놓아주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에 예양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신이 듣건대 '현명한 군주는 다른 사람의 아름다운 이름을 기리지 않고, 충성스러운 신하는 이름과 지조를 위하여 죽을 의무가 있다'고 합니다. (...) 오늘일로 신은 죽어 마땅하나 모쪼록 당신의 옷을 얻어 그것을 칼로 베어 원수를 갚으려는 뜻을 이루도록 해주신다면 죽어도 한이 없겠습니다."
이 말을 들은 조양자는 그의 의로운 기상에 감탄하고 사람을 시켜 자기 옷을 예양에게 가져다 주도록 하였다. 예양은 칼을 뽑아 들고 세번을 뛰어올라 그 옷을 내리친 후 "지백에게 은혜를 갚게 되었구나"라는 말을 남기고 스스로 칼에 엎어져 목숨을 끊는다.

후세사람들은 예양의 의로움과 충정을 높이 기리지만, 그의 행동은 인간의 보편적인 삶과는 괴리가 있다. 예양의 삶을 지탱한 것은 주군에 대한 복수라는 단 하나의 목표뿐이었다. 예양이 만약 실제 조양자의 암살에 성공하고, 자신은 살아남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단언컨데 예양은 복수를 이룬 후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것이다. '의로움'이라는 단어의 동격으로 칭송되는 이런 극단적인 행태는 춘추전국시대애는 그리 드문 일이 아니였다.

 춘추전국시대 사공자 중 으뜸으로 평가되는 위나라 신릉군(위무기)에게는 후영이라는 걸출한 상객이 있었다. 위무기는 후영을 극진히 대접했으며, 후영 또한 좋은 계책들로써 위무기를 섬겼다. 위나라 안희왕 20년에 진나라 소왕이 조나라 군대를 장평에서 깨뜨리고, 군사를 휘몰아 조나라 수도 한단을 포위했다. 절대절명의 순간, 조나라는 위나라에 도움을 청했으나, 위나라 왕은 진나라의 후환이 두려운 나머지 군사를 진격시키지 못했다. 이에 의리를 중히 여기는 위무기는 홀로 조나라를 구원하러 갈것을 결심하고, 후영은 위나라 장군 진비가 지휘하는 위나라의 10만 대군을 위무기의 손에 쥐어줄 수 있는 계책을 마련한다. 위무기가 10만 대군을 인수하기 위해 출발하는 날, 후영은 이렇게 말한다.
"저도 마땅히 따라가야 하지만 늙어서 갈 수 없습니다. 그렇더라도 공자의 일정을 헤아려, 공자께서 진비의 군대에 이르는 날에 북쪽을 항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으로 대신하겠습니다."
위무기가 진비의 군대에 이르렀을 무렵에 후영은 정말로 북쪽을 향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두 이야기 모두 사마천이 쓴 <사기열전>에 나오는 일화들이다. 사마천은 젊은 날부터 사관이었던 아버지 사마담의 유지를 이어받아 <사기> 집필에 매진하던 중, 불가항력으로 흉노에 투항한 장군 이릉을 변호했다는 이유로 황제의 분노를 사게 된다. 사형을 면하는 유일한 방법은 생식기를 제거하는 궁형을 받는 것이었다. 사마천이 죽음보다 더한 궁형의 치욕을 선택한 이유는 필생의 과업이었던 <사기>의 완성을 위해서였다. 옥중에서도, 그리고 사면을 받고 나서도 사마천은 <사기>의 집필에 몰두한다. 사마천은 <사기>를 완성하고 약 2년 후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죽음의 원인은 다시 황제의 분노를 샀기 때문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사기>를 통해 알 수 있는 인간 사마천은 불의를 누구보다 싫어하는 꼿꼿한 신념을 가진 사람이였다. <사기>가 완성되기 전까지 사마천을 괴롭게 만든 것은 고자라는 세간의 놀림보다는 혼탁한 세상에 자기 성정대로 바른 말을 쏟아낼 수 없는 현실이었을 것이다. 그에게 있어 <사기>의 완성은 목표의 부재에 다름 아니였다. 더 이상 구차한 삶을 지속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다시 황제의 분노를 일으킬만한 언사의 숨겨진 배경이었을 것이다.

 사마천 본인과 사마천이 사기에서 의롭게 추켜세웠던 예양과 후영 모두 자신들이 추구했던 바를 이룬후 극단적으로 생을 마감했다. 이들에게 불행의 원인은 목표를 삶의 목적으로 간주한 것에 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되거나 무엇을 이루면 행복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시험에 합격하면, 의사나 공무원이 되면, 결혼을 하면, 아이를 낳으면 삶이 지금과 달라질 거라고 믿는다. 좋아질 것이라고 낙관하는 것이다. 목표는 삶에 필수적이며 때론 삶을 지탱해주는 수단이 되지만, 그것 자체가 삶이 되어서는 안된다. 목표는 삶의 마디마디를 이루는 일종의 마일스톤(milestone)일 분이다. 사다리 끝까지 올라간 후에야 잘못된 곳에 이르렀음을 깨닫는 것처럼 허망한 일은 없다. 설령 원하는 곳에 이르렀다고 해도, 성취감은 잠시 뿐이다. 그런 인생을 지속하는 방법은 또다른 곳에 사다리를 놓고 또 열심히 올라가는 행위의 반복뿐이다. 목표에 너무 집착하고, 오직 그것으로만 삶의 의미를 부여하지 말고, 삶의 경험 자체를 소중히 여기는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박웅현은 기필을 버리라는 말로 이를 이야기한다. 살면서 늘 기필코 무엇인가를 이루어내야 한다는 강박관념은 흔하다. 하지만 인생은 기필코 되는 것이 아니며, 흘러보내야 하는 때도 있는 법이다.

<죽음의 수용소에서>의 저자 빅터 프랭클이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죽음보다 더 끔찍한 삶을 버틸수 있었던 것은 사마천이 <사기>의 집필을 위해 구차한 삶을 선택한 것과 다르지 않았다. 아우슈비츠의 혹독한 수용소 생활을 견뎌내고, 가족들을 모두 잃는 아픔에도 그가 삶의 물음에 예라고 대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수용소 생활 이전부터 그의 삶에 골수로 자리잡은 로고테라피와 그에 대한 저서집필의 절실함 때문이었다. 하지만 자유의 몸이 되고, 필생의 과업이었던 로고테라피 저서 집필을 끝낸 후의 빅터 프랭클의 삶은 사마천과는 달랐다. 필생의 소명을 완수한 그의 삶은 또다른 가능성과 소명들, 그리고 일상의 행복으로 채워졌다. 그에게 필생의 목표는 삶의 종착역은 아니였던 셈이다. 그에게 삶은 살아짐으로써 빛나는 별이 되었다.

삶은 어떠한 목적이 아니다. 목적(Vision)은 지금 걷고 있는 방향일 뿐이고, 목표(Milestone)는 그 길에서 만나고자 하는 이정표일 뿐이다. 삶은 바로 지금 이 순간이다. 삶은 목적과 목표, 난관의 극복, 때론 무위의 흐름, 일상의 충실함과 사소한 순간순간, 그 모든 것이 만들어내는 앙상블이다. 앞만 바라보고 달리는 삶은 결코 행복을 약속해주지 않는다. 무용함이 많아질수록 인생은 더 맛있어진다는 스승의 말은 되새길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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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13 11:20:54 *.48.44.227

'살아짐으로 빛나는 별'이 된 빅터 프랭클  소명으로 행복한 삶을 산 프랭클, 그리고 일상의 행복

삶은 어떤 경우에도 아름다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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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16 09:47:00 *.103.3.17

아름다운 삶을 위해 오늘 하루도 화이팅입니다! 아직 베트남에 계시겠네요, 좋은 시간 되시고 주말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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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26 12:08:22 *.130.115.78

삶을, 그리고 자신을 '목표'의 도구로 쓰지 않겠다는 경종씨의 다짐!

제게도 고마운 울림이 되었네요.


존재 그 자체로 의미와 가치가 되는 시간,

함께 찾아가는 여정이 되면 좋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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