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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5월 14일 10시 38분 등록

4월 스승의 추모식을 마치고 돌아오던 길, 나를 오래 알던 그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제 그만해도 될 것 같은데. 그 정도 했으면 이미 충분한 것 같은데. 여기서 더 가는 것은 누구에게도 이롭지 않은 것 같은데. 이제 그만 너 자신으로 살 때가 온 것 같은데.

 

그런 거 아니예요. 그냥 하고 싶은 일이 이것밖에 없어서 그래요. 굳이 설명하자면 내가 가고 싶은 그 길을 선생님께서 미리 가셨던 것 뿐일 거예요. 뒤따라 다니는 것 같지만 저는 그냥 제가 가야할 길을 가고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

 

진심이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알 길은 없으나 그랬다. 어쩌면 우리는 같은 샘물을 목말라하도록 디자인 되어 출고된 존재일지도 모른다고 짐작해보기도 했다. 그렇다면 오히려 스승의 안내를 외면하는 것이 부자연스러운 거 아닐까? 정확히 그와 같은 판단으로 스승으로부터 필사적인 도망을 시도했던 적이 있었던 나였기에 어떻게든 그를 안심시켜주고 싶었다. 하지만 귀가길이 겹치는 짧은 시간동안 여기에 이르기까지의 파란만장한 스토리를 공유할 길에 없었기에 그저 적어도 내가 어떤 상황이라는 거 다 알고 있다는 것 정도를 확인시켜주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오랜 시간 깊이 알아온 인연이니 그도 오래지 않아 내 마음을 헤아려 주리라 믿어 보기로 했다.

 

엘렉트라는 자신의 소중한 삶과 감정들을 죽은 아버지에게 모두 바쳤다. 죽은 아버지가 그녀를 지배하고 있었다.

구본형의 그리스인 이야기285

 

그리고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아 스승의 책을 읽다 이 부분에서 휘청거리는 나를 느꼈다. 역시 그랬던 건가? 여전히 그런 건가?



 

아빠는 나의 영웅이었다......그러나 영악하게도 나는 영웅이라는 환호에 절묘한 장치를 걸어두고 있었다. ‘절대로 아픔을 드러내지 마세요!’ 고마워할 줄은 알았지만 되갚아야 한다는 것은 잊고 있었다. 뒤늦게 알아차렸을 때 이미 그는 내 곁에 없었다.

2010.7 Me-Story 중에서

 

어쩌면 저는 이미 눈치채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가족을 향한 더운 사랑과 굳은 책임감 속에도 늘 소리없이 흐느끼셨던 아빠의 아픔을. 하지만 아는 척하고 싶지 않았어요. 아니 어떻게 아는 척해야할지 난감하기만 했습니다. 그러다 그가 혼자서 몸으로 감당해오던 그 아픔이 암이라는 병이 되어 모습을 드러냈을 때 저는 오히려 화를 내고 있었습니다. ‘바보같이, 누가 혼자서만 그렇게 끙끙거리래? 그렇게 참다가 이제 와서 이렇게 감당할 수 없는 형태로 쏟아내면 도대체 어쩌란 말야?’ 저는 끝까지 아빠의 아픔을 보듬어드리지 못하고 그를 보냈습니다.

 

아직도 저는 잘 알지 못합니다. 어떻게 했어야 세상에 대한 그의 원망을, 가족에 대한 그의 애증을 씻어드릴 수 있었을지. 하지만 분명한 것은 모른 척 해서는 안 되었다는 겁니다. 설사 그의 분노의 몸부림에 상처투성이가 될지라도, 그리고 그렇게 상처를 입는다고 그의 마음의 응어리가 다 풀리지 못할 걸 알았다 해도 저는 온몸을 던져 그를 안아드려야 했던 겁니다.


2010.8 연구원 칼럼 중에서  


 


아버지에 대한 상처를 품은 채 스승을 만났다. 책을 통해 교감이 있었다고 해도 그리도 쉽게 마음을 흠뻑 다 내어놓을 수 있었던 것은 분명 내 안의 가장 쎈 어떤 힘의 작용덕분이었을 거다. 스승은 아버지의 빈자리를 훌륭히 대신해주셨고 그렇게 어린 시절 아빠의 품에서 누렸던 에덴동산은 성공적으로 복원된 듯했다. 나는 그 충만감을 상처가 치유되고 있다는 징후로 해석했다. 그러나 정말 그러했을까?

 

영웅은 우리가 아는 세계에서 암흑의 세계로 들어간다. 이 암흑의 세계에서 영웅은 그 모험을 완성할 수도 있고, 거기에 갇힘으로써 우리들로부터 사라져 버릴 수도 있고, 엄청난 위험에 직면할 수도 있다.

영웅의 귀환은 그 저승에서의 귀환을 말한다. 이승과 저승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 하나의 세계다. 신화나 상징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는 바로 이것이다. 신들의 세계는 우리가 아는 세계의 잊혀진 부분이다.

우리가 영웅의 행위를 이해하자면 이 잊혀진 부분의 탐험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일상생활에서 중요하게 보이던 두 세계의 가치나 차이는, 지금까지 전혀 다른 것으로 인식하던 <타자><자아>를 동화시키는 동시에 사라져 버린다.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281

 

아버지로부터, 스승으로부터 사랑을 받기만 하고, 그들의 아픔과 고단함을 보듬어드리지 못한 것이 내내 마음의 짐으로 남아있었다. 다른 누군가에게라도 빚을 갚고 싶었던 것은 마음의 짐을 덜고 싶은 욕망이었는지도 모른다. ‘교육팀을 꾸릴 용기를 내었던 것도 그 욕망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스승께 받은 사랑을 되갚지는 못해도 내리 전하기라도 해야겠다. 더불어 이 기회에 각자의 세상에서 리더이자 스승으로 살고 있는 도반들이 현장의 고단함을 치유받을 수 있는 장을 만들어 낼 수 있으면 좋겠다.’ 생각했다. 그럴 수만 있다면 이제 정말 홀가분히 내 길을 갈 수 있을 것 같다고도. 그리고 벌써 세 달이 흘렀다. 남편의 지지와 격려 덕에 여한없이 몰입하는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보람있는 시간이었지만 드는 에너지도 만만치 않았기에 식구들, 특히 남편에게 소홀해지는 것까지는 어쩔 수가 없었다. 미안하긴 하지만 그리해서라도 마음의 묵은 짐들을 덜어내는 것이 결국은 오래 함께 할 남편에게도 좋은 일이라며 합리화를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오늘 새벽, 어제 저녁 결혼기념일이라고 무리해 서울로 올라왔다 이른 출근준비를 하는 남편의 뒷모습을 보며 깨달았다. 내가 마음의 빚을 갚아야 할 사람은 다른 누가 아니라 여기 내 눈앞의 이 남자였구나. 내 아이들의 아버지이자 가정의 리더인 그의 고단함을 알아보고 또 보듬어줄 힘을 주기 위해 아버지와 스승은 내게 그리도 넘치는 사랑을 주셨던 거였구나. 다른 방식으로는 가눌길 없는 충만감 때문이었을거다. 가만히 일어나 남편의 등을 안고 한참을 머물렀다. 체온과 감촉으로 내 안의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전하고 싶은 마음에 완전히 동의한 몸의 표현이었다. 

 

남편, (미안해. 몰라봐서. 아니 자꾸만 까먹어서 미안해.) 사랑해. 그리구 고마워. 내가, 그리고 아이들이 이렇게 편안하고 행복한 거 다 당신 덕분인 거 알지?”


영문 모르는 남편, 순간 놀란 듯했지만 곧 몸을 돌려 나도 고마워. 당신이 내 옆에 있어줘서.” 이 세계와 저 세계가 만나는 순간이었다. 또 하나의 전리품을 획득하는 순간이었다. 늘 기대했던 이상의 승리가 기다리는 모험. 도저히 모험을 그만 둘 수 없도록 하는 엄청난 희열!

 

그렇다. 어쩌면 여전히 나를 움직이는 것은 상처입은 엘렉트라인지도 모른다. 소중한 삶과 감정들을 죽은 아버지에게 모두 바치고 있는 병리적인 패턴을 재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제는 알고 있다. 죽은 아버지에게 쏟은 나의 사랑이 사라지는 것이 아님을. 그렇게 나를 둘러싼 두 세계가 화해하는 시간을 늘려나가는 것이 내가 내 세상을 열어가는 방식이라는 것을.


하고 싶은 대로 하면 그 게 네 길일 것이니 그렇게 운명을 찾아갈 것이라던 스승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어쩌면 그 목소리의 출처는 다름아닌 내 안의 나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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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16 09:55:17 *.103.3.17

비오는 수요일, 운명의 굴레를 벗어나 신화가 될 엘렉트라의 앞날이 기대되는 아침입니다~~ 토요일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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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27 16:16:37 *.130.115.78

그리고 다시 맞는 일요일이네요. 세월은 정말 빠르기도 하죠?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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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17 11:19:31 *.48.44.227

이 세계와  저 세계가 만나는 순간!  삶은 아름다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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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27 16:16:01 *.130.115.78

그 아름다움의 맛을 잊지 못해 늘 길 위에 머물게 되는 것 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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