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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0월 28일 21시 28분 등록
과감하게 나의 언어로 써 내려간 글을 외출시키기로 했다. 먼저 ‘반짝이는 주관의 글’이라는 이름표를 달아준다. 그들이 내 손을 떠난 뒤의 걱정은 하지 않기로 나의 마음을 단단히 붙잡아 매었다. 뭇매를 맞든 박수갈채 속에 휩싸이든 나는 멀리서 지켜만 볼 작정이다.
그러나 반쯤 써내려가다 보니 어느새 나의 글에 대해서 잔소리를 해대고 있다. 거칠면 부드러워지라고 한다. 날카로우면 ‘찌르기 쉽다’고 둥글둥글해지라고 주문을 한다. 글이 외출을 하기도 전에 벌써 얼어붙었다. 나서보기도 전에 포기다. 그러나 언어들을 달래고 마음을 녹여야 한다. 외출은 의무다.
‘그래. 까짓것, 내 마음 흐르는 대로 쭉쭉 써 내려가는 거야. 나의 색깔을 거침없이 나타내는 거지. 내 나발을 힘껏 불어보자.’ 마음을 누그러뜨리고 다시 쓰기를 시도한다. 생소하지만 나의 언어들과 생각들이 일렬로 늘어섰다. 나름대로 산뜻한 목소리도 가졌다. 흡족하다. 이제 내 글을 앞세우고 대문 앞까지 가서 배웅만하면 끝이다. 그런데 출발 전 거울 앞에 잠깐 세워 본 것이 말썽이다. 거울 속에 선 내 글이 영 낯설다. ‘양복에 중절모라니’ 가당찮다는 생각이 앞을 또다시 가로막는다.
‘길가는 사람들이 모두 쳐다보겠지? 다시 갈아입어라. 할 수 없다. 그래야 내 마음이 편하다. 무릇 요즘 세상엔 눈에 띄면 위험하느니라. 살금살금 기어서 다니거라’

나는 왜 주관적인 글쓰기가 두려운가? 왜 나서기도 전에 떨고 있는가?

우선 ‘일탈’이 두렵다.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끝없는 일탈을 시도하지만 그것은 단지 ‘바람’에 불과하다. 세상은 이러한 형태로 ‘존재하는 것’에 익숙하다. 모든 사고와 행동, 언어들이 길들여져 있으며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 세상은 이미 보이는 저 길 하나뿐이라는 것‘이 내 정신을 지배하고 있음이다. 수많은 군중들이 허우적거리며 걸어가고 있는 저 길을 나도 그냥 따라가야만 안심이 된다.

다음은 나의 언어들을 지나치게 치장하려하는 욕심에서다. 개성적이기보다는 대중의 흐름에 따르려고 한다. ‘나의 글’이 되기에 앞서 타인의 글이 될 것이라고 단정 지음으로 출발한다.
소중한 내 분신이라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 결론짓고 어느 집 ‘며느리가 되고 사위가 될 것이고 어느 누구의 지아비가 되고 가장이 될 것을 미리 염려함이다.

덧붙일 것이 하나 더 있다면 나는 오직 2개의 눈으로만 세상을 바라본다는 것이다. 두 개의 눈에 비친 세상은 틀 속의 그림이다. 새는 짹짹거리며 울고 하늘은 높이 떠 있고 바다는 짙푸를 뿐이다. 수많은 물상 뒤의 천의 얼굴을 두 개의 눈으로는 볼 수가 없음이다.

종합해 보건데 나의 주관적 글쓰기의 두려움은 외출을 하기도 전에 미리 겁먹음에 연유한다. ‘번뜩이어야 함’에 대한 부담감이 앞섰고 ‘한없이 날카로워야 함’에 자신을 잃었다. 번뜩이자니 바닥이 드러나고 날카로워지자니 공격이 두려웠던 것이다.

그러나 알고보면 주관적 글쓰기가 그렇게 두려운것만은 아니다. 그의 속성을 알면 생각외로 쉬운 것일 수도 있다. 주관의 속성인 번뜩거림과 날카로움의 한 번 자세히 들어다 보자.

번뜩거림은 ’일탈‘을 아비로 두었다.
일탈은 두려움이 없다. 두려움 없음은 단순한 허세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옷을 과감하게 벗어던지는 것에서 시작한다. 사물이 지닌 본성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그것들이 내뿜는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내면의 소리는 고요함에 속에 있고 고요함은 ‘깨어있음’에 둥지를 틀고 있다. 그러므로 일탈은 늘 깨어있음과 같은 것이다.
또한 번뜩거림과 깨어있음의 어미는 ‘부지런함’이라는 사실도 염두에 둘 일이다. 자식의 어미인 부지런함은 ‘독서’의 끈을 놓지 않는 속성을 지녔다. 번뜩이는 주관은 수많은 주관들 사이에 오롯이 숨어 있기에 주관의 집인 책을 샅샅이 뒤질 일이다.

이제 내 거친 언어들을 다시 외출시킨다.
다시 일탈을 시도한다. 과감한 일탈은 ‘폭발성’이 있기 때문에 사소한 일탈에서 시작한다.
먼저, 나를 조이고 있는 끈을 느슨하게 풀어 놓는다. 다음은 여유로운 마음으로 사물 바라보기다. 새는 단지 짹짹거리며 울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바다를 향한 비상의 몸짓’을 하고 있음이 비로소 보인다. 파도는 ‘철석거리고 있음’ 과 동시에 군중의 함성이며 하늘과 바다의 합일점을 찾는 진지한 대화라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내가 적당하게 꾸미고 외출을 하든 한껏 멋을 내고 나가든 사람들은 그렇게 예민하게 굴지 않는다는 것도 알아차린다. 나의 언어가 거칠고 뾰족한 촉수를 드러내더라도 그들은 적당히 피해서 잘도 걸어간다. 현명하게도 그들은 간혹은 아주 가끔은 내가 드러낸 그 뾰족함으로 구멍을 파헤쳐보기도 하고 흙을 메우기도 하는 도구로 적절히 사용한다. 내가 염려했던 것들을 그들은 현명하게도 ‘유용함’으로 변형시킨다.
나의 언어들이 주관의 날개를 달고 외출을 시도함은 바로 나의 일탈이다 . 비록 내 언어들이 상처를 입고 넘어지고 깨어지더라도 그것은 축복의 매 맞음이 분명하기에 무엇을 두려워 하랴.
IP *.86.177.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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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지깽이
2007.10.29 09:39:58 *.128.229.81
주인공이 너무 많이 등장하면 독자가 헤깔리지.

한 페이지의 글에 사유가 너무 많아요. 추상적이고 모호한 단어들이 몰려들어 서로를 보완해 주는 대신 서로를 해체하고 있어 촛점이 잡히지 않아. 따라가다 안개 속으로 빠져 이내 글이 없어지고 독자도 그쯤에서 집중을 포기하게 돼.

구체적 이야기를 끌어 들이고, 추상적 단어를 1/3로 잘라내 피로도를 줄이고, 끝까지 촛점을 유지하도록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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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제
2007.10.29 14:41:48 *.114.56.245
네 알겠습니다. 사부님 .
그 버려야할 것들을 과감하게 버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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