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香山 신종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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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가 참으로 기막히다. 대부분 '기막히게' 다음에 '맛있다'라거나 '재미있다'와 같은 말이 한 마디쯤 따라 붙을 만도 한데, 이건 그냥 기가 탁 막힌다. 씨줄과 날줄처럼 교묘하게 얽힌 비유와 상징 너머에 무언가 분명히 있는 것 같기는 한데 한껏 손을 뻗어보아도 도무지 거기에 닿을 수가 없다.
하긴 성경 다음으로 많은 언어로 번역되었다는 노자가 그리 만만하리라고는 처음부터 기대하지도 않았었다. 그런데 또 가만 생각해보면 이상한 부분이 없지 않다. 이렇게 이해하기 어려운 노자에 왜 이리 많은 이들이 환호하는 것일까? 다들 알고 있는 쉽고 명료한 노자의 가르침에서 나만 홀로 소외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뻔한 대로를 놔두고 혼자 먼 길을 돌아가고 있는 것 같은 불안감이 밀려든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다니는 길이라고 해서 옳은 길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이 상황에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오히려 분명하다. 내 나름의 방식으로 노자에게 다가가는 과정을 만끽하는 것, 그것이 바로 내가 고를 수 있는 유일하고도 가장 가치 있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마음을 다잡고도 문제는 고스란히 남는다. 수많은 사람들을 통해 흐르고 쏟아졌을 서로 다른 버전의 노자 속에서 어떻게 참 노자에 다가갈 수 있을까?
이런 질문을 안고 노자를 바라보니 일단 판본의 문제가 앞을 가로 막는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노자의 도덕경은 위나라의 사상가였던 왕필이 주석을 달아놓은 왕필본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그렇지만 널리 읽혔다고 해서 이를 원음에 가깝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외에 하상공이 쓴 하상공본, 1973년에 발굴된 마왕퇴본(백서갑본과 백서을본) 그리고 1993년에 발굴된 곽점본(죽간본) 등이 시대적으로 노자와 가까우며 그 양적인 면에서도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이 주요한 4가지의 판본을 제외하고도 훨씬 많은 수의 서로 다른 판본이 존재한다. 이렇게 여러 종류의 판본이 존재한다는 것은 서로 다르게 풀어진 번역본들이 있다는 것과는 의미가 다르다. 하나하나의 판본은 제각각 서로 다른 노자인 동시에 그것들이 뭉쳐 다시 하나의 노자가 되기 때문이다. 그 중에 어느 것이 진짜 노자인가를 밝히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거니와 별다른 의미도 없는 일이다. 우리는 그저 그 수많은 판본을 통해 노자의 도덕경이 노자 한 사람의 작품이 아니라 오랜 시간에 걸쳐 여러 사람의 노력으로 이루어졌음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지금 번역하고 있는 'Change your thoughts, Change your life'의 저자 웨인 다이어는 이 쉽지 않은 상황에 고춧가루를 뿌린다. 책의 서문에서 그는 자신이 노자의 도덕경을 나름대로 구성한 방법을 간략하게 적어놓았다. 그는 조금 오래된 번역본 다섯 권과 비교적 최근에 나온 번역본 다섯 권을 사서 읽고 자신의 생각이 흐르는 대로 짜깁기를 했다고 한다. 거기까지면 그냥 쓴 웃음을 지으며 넘어갈 만도 한데 거기에 더해 군데군데 자신의 느낌을 더했다고 하니 노자의 원음은 고사하고 어디까지가 노자이고 어디서부터가 웨인 다이어인지조차 구분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이쯤 되고 보니 번역을 하며 노자의 원음에 다가가겠다던 나의 바램은 허황되게 느껴질 지경이다.
이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넋두리가 이어지는 김에 도덕경 안으로 조금 들어가보자. 도덕경은 총 81개장으로 이루어져있는데 그 중에서 10장의 한 구절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載營魄抱一 能無離乎(재영백포일 능무일호)?
이렇게만 써놓으면 무슨 의미인지 알 수가 없으니 왕필의 해석을 살펴보자.
"사람이 머무는 집에 거처하면서 하나의 맑은 정신을 껴안고 있다고 해서 분리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무슨 뜻인지 느낌이 오는가? 이번에는 홍석주가 풀어낸 것을 한번 보자.
"밝게 빛나는 백을 태우고 일一을 껴안아 떨어지지 않도록 할 수 있는가?"
두 가지 해석이 같은 원문에서 비롯된 것인지조차 의심스럽다. 박세당의 해석도 한 번 보자.
"영을 백에 싣고 하나를 껴안아 분리되지 않게 할 수 있겠는가?"
이건 또 무슨 소리란 말인가? 뒷부분의 해석은 대체로 비슷한 것 같은데 앞부분인 재영백포일(載營魄抱一)에 대한 해석은 달라도 너무 다르다. 너무 많은 감이 없지 않지만 이왕 보는 김에 도올 김용옥의 생각도 한번 들어보자.
"하늘의 기운과 땅의 기운을 한 몸에 싣고 하나를 껴안는다. 능히 떠남이 없을 수 있겠는가?"
한글의 맛을 잘 살린 최고의 번역이라고 일컬어지는 도올의 문장도 아름답긴 하지만 여전히 모호하다. 그러나 서로 다른 번역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이 모호함을 노자의 도덕경이 갖는 고유의 것으로 받아들여서는 곤란하다. 이렇게 여러 가지 풀이 속에서 헤매고 있는 중에 만난 박영규의 해석에 나는 손뼉을 치고 말았다.
"혼백을(혼백만 남은 죽은 육신)을 (수레에) 싣고 부둥켜안고 있다 한들 떠나 보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렇게 해석함으로써 이 문장은 그 다음에 이어지는 "專氣致柔 能嬰兒乎(전기치유 능영아호) - 제아무리 기운을 부드럽게 만들어도 갓난 아이와 같아질 수 있겠는가?"와 적절한 댓구를 이루며 맞아 떨어진다. 그럼 이제 내 입맛에 맞는 해석을 찾았으니 앞서 살펴본 네 가지 해석은 버릴 수 있을까? 내가 고른 하나의 해석이 참 노자의 뜻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질문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웨인 다이어는 이 부분을 다음과 같이 영어로 풀어내고 있다.
Carrying body and soul
and embracing the one,
can you avoid separation?
나는 이 문장을 다시 우리말로 이렇게 풀어놓았다.
혼백을 싣고
그 하나를 부둥켜안고서
떠나 보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는 영어 문장의 구조를 가능한 건드리지 않는 범위 내에서 내 마음에 든 번역의 일부를 빌어다가 덮어쓰기를 시도했다. 여기까지는 나름대로 좋았는데 다시 문제가 생기고 말았다. 10장은 본래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지 않는 지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데 원문에서는 별다른 의미가 없었던 '일(一)'자에 웨인 다이어가 일치, 통일, 하나됨의 의미를 부여하면서 이 글자가 도덕경 10장 전체의 가장 중요한 단어가 되어버린 것이다. 덕분에 10장은 '하나되는 삶(Living Oneness)'이라는 제목을 갖게 되었다. 이걸 어쩌면 좋단 말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번역을 내 마음대로 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니던가? 결국 나는 수많은 판본과 더 많은 번역 속을 이리저리 떠돌다가 결국 웨인 다이어의 한 마디에 주저 앉고 말았던 것이다. 이것이 번역자로서의 내 한계인 셈이다.
번역이 예상보다 늦어지는 것에 대한 변명을 하려고 시작했던 글은 아닌데 처음의 뜻과는 달리 또 앓는 소리를 하고 말았다. 지난 모임 때 사부님께서 입가에 미소를 띄우며 하셨던 말씀이 끊임없이 귓가에 울린다.
"번역은 잘되고 있는 거냐?"
에고~ 그래도 한 바탕 털어놓고 나니 마음이 시원해졌다. 다시 밝아오는 새벽, 도덕경을 붙들고 울어야겠다.
IP *.109.84.204
하긴 성경 다음으로 많은 언어로 번역되었다는 노자가 그리 만만하리라고는 처음부터 기대하지도 않았었다. 그런데 또 가만 생각해보면 이상한 부분이 없지 않다. 이렇게 이해하기 어려운 노자에 왜 이리 많은 이들이 환호하는 것일까? 다들 알고 있는 쉽고 명료한 노자의 가르침에서 나만 홀로 소외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뻔한 대로를 놔두고 혼자 먼 길을 돌아가고 있는 것 같은 불안감이 밀려든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다니는 길이라고 해서 옳은 길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이 상황에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오히려 분명하다. 내 나름의 방식으로 노자에게 다가가는 과정을 만끽하는 것, 그것이 바로 내가 고를 수 있는 유일하고도 가장 가치 있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마음을 다잡고도 문제는 고스란히 남는다. 수많은 사람들을 통해 흐르고 쏟아졌을 서로 다른 버전의 노자 속에서 어떻게 참 노자에 다가갈 수 있을까?
이런 질문을 안고 노자를 바라보니 일단 판본의 문제가 앞을 가로 막는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노자의 도덕경은 위나라의 사상가였던 왕필이 주석을 달아놓은 왕필본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그렇지만 널리 읽혔다고 해서 이를 원음에 가깝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외에 하상공이 쓴 하상공본, 1973년에 발굴된 마왕퇴본(백서갑본과 백서을본) 그리고 1993년에 발굴된 곽점본(죽간본) 등이 시대적으로 노자와 가까우며 그 양적인 면에서도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이 주요한 4가지의 판본을 제외하고도 훨씬 많은 수의 서로 다른 판본이 존재한다. 이렇게 여러 종류의 판본이 존재한다는 것은 서로 다르게 풀어진 번역본들이 있다는 것과는 의미가 다르다. 하나하나의 판본은 제각각 서로 다른 노자인 동시에 그것들이 뭉쳐 다시 하나의 노자가 되기 때문이다. 그 중에 어느 것이 진짜 노자인가를 밝히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거니와 별다른 의미도 없는 일이다. 우리는 그저 그 수많은 판본을 통해 노자의 도덕경이 노자 한 사람의 작품이 아니라 오랜 시간에 걸쳐 여러 사람의 노력으로 이루어졌음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지금 번역하고 있는 'Change your thoughts, Change your life'의 저자 웨인 다이어는 이 쉽지 않은 상황에 고춧가루를 뿌린다. 책의 서문에서 그는 자신이 노자의 도덕경을 나름대로 구성한 방법을 간략하게 적어놓았다. 그는 조금 오래된 번역본 다섯 권과 비교적 최근에 나온 번역본 다섯 권을 사서 읽고 자신의 생각이 흐르는 대로 짜깁기를 했다고 한다. 거기까지면 그냥 쓴 웃음을 지으며 넘어갈 만도 한데 거기에 더해 군데군데 자신의 느낌을 더했다고 하니 노자의 원음은 고사하고 어디까지가 노자이고 어디서부터가 웨인 다이어인지조차 구분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이쯤 되고 보니 번역을 하며 노자의 원음에 다가가겠다던 나의 바램은 허황되게 느껴질 지경이다.
이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넋두리가 이어지는 김에 도덕경 안으로 조금 들어가보자. 도덕경은 총 81개장으로 이루어져있는데 그 중에서 10장의 한 구절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載營魄抱一 能無離乎(재영백포일 능무일호)?
이렇게만 써놓으면 무슨 의미인지 알 수가 없으니 왕필의 해석을 살펴보자.
"사람이 머무는 집에 거처하면서 하나의 맑은 정신을 껴안고 있다고 해서 분리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무슨 뜻인지 느낌이 오는가? 이번에는 홍석주가 풀어낸 것을 한번 보자.
"밝게 빛나는 백을 태우고 일一을 껴안아 떨어지지 않도록 할 수 있는가?"
두 가지 해석이 같은 원문에서 비롯된 것인지조차 의심스럽다. 박세당의 해석도 한 번 보자.
"영을 백에 싣고 하나를 껴안아 분리되지 않게 할 수 있겠는가?"
이건 또 무슨 소리란 말인가? 뒷부분의 해석은 대체로 비슷한 것 같은데 앞부분인 재영백포일(載營魄抱一)에 대한 해석은 달라도 너무 다르다. 너무 많은 감이 없지 않지만 이왕 보는 김에 도올 김용옥의 생각도 한번 들어보자.
"하늘의 기운과 땅의 기운을 한 몸에 싣고 하나를 껴안는다. 능히 떠남이 없을 수 있겠는가?"
한글의 맛을 잘 살린 최고의 번역이라고 일컬어지는 도올의 문장도 아름답긴 하지만 여전히 모호하다. 그러나 서로 다른 번역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이 모호함을 노자의 도덕경이 갖는 고유의 것으로 받아들여서는 곤란하다. 이렇게 여러 가지 풀이 속에서 헤매고 있는 중에 만난 박영규의 해석에 나는 손뼉을 치고 말았다.
"혼백을(혼백만 남은 죽은 육신)을 (수레에) 싣고 부둥켜안고 있다 한들 떠나 보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렇게 해석함으로써 이 문장은 그 다음에 이어지는 "專氣致柔 能嬰兒乎(전기치유 능영아호) - 제아무리 기운을 부드럽게 만들어도 갓난 아이와 같아질 수 있겠는가?"와 적절한 댓구를 이루며 맞아 떨어진다. 그럼 이제 내 입맛에 맞는 해석을 찾았으니 앞서 살펴본 네 가지 해석은 버릴 수 있을까? 내가 고른 하나의 해석이 참 노자의 뜻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질문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웨인 다이어는 이 부분을 다음과 같이 영어로 풀어내고 있다.
Carrying body and soul
and embracing the one,
can you avoid separation?
나는 이 문장을 다시 우리말로 이렇게 풀어놓았다.
혼백을 싣고
그 하나를 부둥켜안고서
떠나 보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는 영어 문장의 구조를 가능한 건드리지 않는 범위 내에서 내 마음에 든 번역의 일부를 빌어다가 덮어쓰기를 시도했다. 여기까지는 나름대로 좋았는데 다시 문제가 생기고 말았다. 10장은 본래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지 않는 지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데 원문에서는 별다른 의미가 없었던 '일(一)'자에 웨인 다이어가 일치, 통일, 하나됨의 의미를 부여하면서 이 글자가 도덕경 10장 전체의 가장 중요한 단어가 되어버린 것이다. 덕분에 10장은 '하나되는 삶(Living Oneness)'이라는 제목을 갖게 되었다. 이걸 어쩌면 좋단 말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번역을 내 마음대로 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니던가? 결국 나는 수많은 판본과 더 많은 번역 속을 이리저리 떠돌다가 결국 웨인 다이어의 한 마디에 주저 앉고 말았던 것이다. 이것이 번역자로서의 내 한계인 셈이다.
번역이 예상보다 늦어지는 것에 대한 변명을 하려고 시작했던 글은 아닌데 처음의 뜻과는 달리 또 앓는 소리를 하고 말았다. 지난 모임 때 사부님께서 입가에 미소를 띄우며 하셨던 말씀이 끊임없이 귓가에 울린다.
"번역은 잘되고 있는 거냐?"
에고~ 그래도 한 바탕 털어놓고 나니 마음이 시원해졌다. 다시 밝아오는 새벽, 도덕경을 붙들고 울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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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지깽이
이 글은 네 번역본의 중요한 일부가 될 것이다. 틈틈히 간간히 이런 고민과 차이와 오류에 대한 규명의 노력을 실어 보아라, 책이 훨씬 살아 날 것이다. 원작에 치중하여 번역하라. 그러나 저자가 헤매는 곳에서는 별도의 이런 장릉 달아 그 모호함과 부정확함에 이의를 제기하여 독자를 도와 주어라.
" (저자와 역자가) 섞이면 혼합되어 뜻이 없어지니 섞어 하나가 되게 하지 말고 서로 분리하여 놓아 두거라. " 이 뜻이 또한 載營魄抱一 能無離乎 에대한 또 하나의 해석이 되니 우연한 일이겠느냐 ?
배움 서로 통하는 것이고 과거의 것이 현재에 창조적으로 활용되는 것이다.
VR Lef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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