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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월 28일 03시 03분 등록
지난주 목요일(1.24)에 경인지방에 근무하는 세무대학 동기들을 만났다. 1987년에 세무대학에서 처음 만난 우리는 같은 기숙사와 강의실에서 같이 지냈다. 20년이 훌쩍 넘긴 사이이고 그것도 대부분 같은 부처에 근무하여 개개인의 사정을 훤히 안다. 20년의 세월은 행동이나 말이 아닌 순간적인 느낌이 작동한다. 형제 이상의 정으로, 아내부터 아이들의 이름까지 훤히 꿰뚫다 보니 별도로 말을 하지 않아도 마음까지 들여다보인다. 워낙 허물없이 지내다 보니 가끔 문제가 생기기도 한다. 공무원 아파트에 살게 되면 동기간의 정보다 더 빨리 드는 것이 아내들끼리의 관계다. 몇 집이 근방에 모여 살게 되면 바깥양반들의 일거수일투족이 몽땅 아내들의 레이더 망에 걸리게 된다. 가끔 비자금 용도로 생기는 출장비나 수당도 아내들이 먼저 계산을 하여 금액을 맞출 경우도 있다. 한번은 간이 조금 큰 동기 한 녀석이 10여년 이상 조성한 비자금이 들통 나서 싹싹 빌고 소정의 추징금까지 납부한 사실이 있었다. 그 다음부터는 이상하리만치 부부 모임이 줄어들었다.

1989년 3월 2일 60명의 동기들이 공무원 생활을 같이 시작했다. 공부를 잘해서 경인지방에 근무하던 친구도 있고, 나처럼 운 좋게 제주도까지 가야했는데, 5월에 군대가는 녀석이 자원하는 바람에 부산에 남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 군대가면서도 전국에 근무하던 동기들과 다 만나고 군대를 보냈다. 맨 처음 군대를 간 동기는 30여명이 넘는 성대한 환송식을 거쳐 갔다. 그 해 겨울까지 머리를 깎고 다시 군대로 갔다. 나는 네 명의 동기들과 해운대 바닷가에서 쓸쓸한 입대식을 가졌다. 3년이 지나 제대를 하고 다시 직장으로 돌아왔다. 입대식과 반대로 제대식은 갈수록 축하해주는 동기들이 늘어났다. 진급을 하고, 마찬가지로 결혼을 하였다. 결혼식도 전국을 쫓아다니면서 축하해주었다.

어느새 중년의 모습으로 변한 우리들, 아직도 마음은 대학교 다닐 적에 맞춰 있는데, 새치가 난 친구도 있고, 머리가 휑하니 빠져 더 나이가 들어 보이는 친구도 있다. 중학교에 올라가는 아들 녀석이 있는 동기가 있는가 하면, 아직 배필을 찾고 있는 동기도 있다. 벌써 진급을 하여 계장 직위를 가진 녀석도 있고, 번번이 진급의 문턱에서 떨어지는 녀석도 있다. 술잔이 돌고 분위기가 왁자지껄해지면서, 주제는 자연스럽게 정권교체와 정부조직 개편 얘기를 하게 되었다. 전봇대로 회자되는 공무원들의 무사 안일한 태도도 그렇고 인원 감축 얘기도 슬슬 불안감을 더해지고 있다. 나를 제외하고는 다들 근무하는 조직은 무사하였다.

친구들의 걱정과 위로로 기분이 많이 좋아졌다. 흥겨운 기분을 살려 노래방으로 직행했다. 옛날 학교 다닐 때 불렀던 노래를 같이 하고 건배를 하였다. 언제나 그렇듯이 우리는 정말 좋은 친구들이었다. 어두웠던 마음이 다시 환해졌다. 쨍하고 해뜨는 날처럼 친구들의 힘이 바로 이런 것이었구나. 맥주를 한잔 더 마시고 지하철 5호선을 탔다. 종로3가에서 갈아타면 집에 가는 막차를 탈 수 있는 시간이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꾸벅 꾸벅 졸기 시작했다. 몇 정거장씩 끊어지다가 갑자기 조금 많이 지나간다는 느낌이 들었다.

갑자기 지하철에서 사무실로 시야가 바뀌었고, 사람들이 웅성웅성 게시판 앞에 모여있다. 급히 사람들 틈을 헤집고 가보니, 구조조정 정리자라는 제목 밑에 내 이름 석자가 보인다. 이게 무슨 일인가, 옆 사람들이 이것저것 물어보기 시작하고, 전화가 사정없이 울린다. 아내, 동기들, 부모님의 전화를 연속으로 받는다. 뭔가 잘못된 일이라고, 사실이 아니라고 큰 소리로 해명을 하였다. 그래도 전화가 계속 왔다. 전화 통화중에 과장님이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사정이 그렇게 되었으니 후배들을 위해서 고분고분 나가달라는 것이었다. 어! 이건 아니야, 아니야 하고 눈을 떠보니 내가 처음 와보는 생소한 지역이었다. 지하철이 정차하고 있었고, 밖을 바라보니 아차산 역이었다. 아차..지나쳤구나.

졸다가 꿈을 꾼다고 종로3가를 지나쳐서 한참을 온 것이다. 안도의 한숨이 나왔고 아직 건재하다는 것이 그리 좋을 수가 없었다. 좀 멀리 왔지만, 그래도 아차산역에서 내릴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비몽사몽, 정신없이 택시를 잡아타고 왔다. 공무원 감원에 강박관념이 꿈으로 나타났다. 그래도 기분은 좋다.
IP *.118.10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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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화
2008.01.31 10:47:50 *.180.46.11
꿈에서만 겪었지 아닐겁니다. 걱정하지 마셔요.
그나저나 새로운 부서로 가시면 또 고생이 많으시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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