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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한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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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7월 31일 01시 10분 등록

우주 고마워요. 나는 집에 돌아와 피곤을 풀기 위해 hot bath를 먼저 했답니다. 어제 주문한 책들이 벌써 도착해 있어서 아주 기뻤구요, 그 중 읽기 쉽게 쓰인 '뼛 속까지 내려가서 써라' 책을 들고 욕조에 들어가 1시간 동안 반쯤 읽었답니다. 매일 일상에서 접촉하는 것들 안에 존재하며 계속 글을 쓰는 것만이 자기 가슴을 열게 해준다는 작가 나탈리 골드버그의 주장이 참 인상적이네요.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을 연민을 가지고 바라볼 수 있는 힘을 글쓰기를 통해 얻는 그녀의 모습이 나의 모습과 교차됩니다.

우주, 오늘 아주 즐거웠어요. 아마 내 표정과 말투, 갤러리마다 뿌리고 다니던 경쾌한 발걸음에서 이미 그대는 그것을 느꼈겠지요. 오늘 아침에는 우주랑 데이트할 일이 기대되서 모닝페이지에도 언급을 했답니다. 힘든 시간을 견디고 건강하게 내면을 잘 정리한 우주, 무엇에도 매임이 없이 씩씩하고 편안하게 세상을 살아가는 우주가 저는 참 자랑스럽답니다. 아직 어린 나이에(늘 비교 기준은 내 나이랍니다) 그런 자유함에 이를 수 있다니 놀라워요.

혼자 늘상 다니며 감성의 주머니를 채우던 우주만의 루트를 한 번 따라가본다는 생각만으로도 꽤 설렘이 있었습니다. 갤러리를 돌며 좋은 작품을 보고, 가을로 넘실대는 삼청동 거리를 걸으며 낙엽을 밟고, 빈스빈스에서 맛있는 벨기에 와플을 먹고, 아기자기한 한옥 골목의 가게들을 구경하고......함께 할 일들의 그림이 머리 속에 그려졌지요. 그런데, 오늘 고속도로와 서울 시내 곳곳이 왜 그토록 막히던지, 수지에서 3시간이나 걸려 경복궁 앞에 도착했다면 믿기가 어렵겠지요? 막히는 차 안에서 유일한 위로가 있었다면, 갑자기 기온이 떨어진 도로변에 지천으로 흩날리던 낙엽들이었답니다. 바람에 쓸려 공중으로 떠오른 낙엽들이 햇빛을 반사하며 바닥으로 집단 낙하하는 모습이 얼마나 운치있든지, 조급한 맘을 잊고 감탄을 보내기 바빴답니다.

자, 그럼 지금부터 오늘 함께 한 갤러리 여행을 내 언어로 옮겨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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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앞의 은행나무 가로수, 수북히 떨어진 노랑 은행잎을 밟으며 시작된 갤러리 기행. 먼저 <갤러리 현대>. 30년간 작가의 트레이드 마크인 거친 마포에 물방울을 모티브로 한 김창열 화백의 작품들을 보다. 보는 이의 각도와 빛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물방울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유화물감으로 동그랗게 칠했을 뿐이데, 멀리서 빛을 통해 바라보면 완벽하게 입체적인 물방울들로 재탄생된다. 빛 속에서 각각의 색으로 영롱하게 빛나는 물방울들의 향연이 눈부시다.

다음은 오늘 가장 강한 임팩트로 다가온 배준성 화가의 전시회, 'The Museum', 장소는 역시 같은 <갤러리 현대>. 서양 명화를 한국 여인의 누드와 결합, 이미지를 오버랩시키기 위해 렌티큘러 기법을 활용하는 그의 아이디어가 독특하다. 렌티큘러란 골진 투명판에 여러 개의 상을 입혀, 각도를 달리해보면 보이는 이미지가 달라지는 특수인쇄를 말한다. 우리가 초등학교 때 갖고 다녔던 이중으로 그림이 보이던 책받침도 일종의 렌티큘러다.

작가는 러시아 에르미타주 박물관, 스페인 프라도 미술관 등 유럽 미술관 12곳의 전시장 모습을 유화로 그리고, 그림 속 액자 중 하나에 작가가 만든 렌티큘러를 끼워넣었다. 그의 ‘액자 속의 액자 방식’의 박물관 시리즈는 관객들에게 독특한 즐거움을 선사한다. 그림 안의 박물관의 관객이 렌티큘러를 보고, 렌티큘러 그림을 실제 관객인 우리도 본다. 재밌는 것은 그림 속 관객은 신분과 취향에 따라 옷 벗은(또는 옷 입은) 여인을 보고, 경우에 따라서는 누드에서 성장(盛裝)을, 성장에서 누드를 본다. 렌티큘러 작품은 시선을 그대로 둔 채 몸을 이동해야 한다. 이동에 따라 주인공이 옷을 걸쳤다 벗었다 하므로 마치 패션쇼장의 모델의 몸매를 훔쳐보는 느낌이다. 그의 전시회에 사람이 가장 많이 몰리는 걸 보니 관음은 인간 공통의 본능이라는 생각이 든다.

박물관 그림을 감상하는 사람들의 다양한 층위를 섬세하게 잡아내는 화가의 관찰력 역시 만만치 않아 보인다. 서양화를 하던 작가의 발상 전환이 재밌는 작품 연작을 탄생시켰다. 그의 연보를 본다. 67년생, 나보다 어리다. 또 나이에 기 죽는 순간이다. 아티스트에게 얼마나 창의성이 필요한지 그는 작품으로 말하고 있다.

다음은 <불일 미술관> 최승미 도예전, 소박하고 아름다운 전통 문양들의 퍼레이드, 다음은 김상영 화가의 기하학적 추상화 'Color Field, 삶의 창에서 바라본 풍경들', 색감이 아름다운 송관숙의 'Shadow in Time', 정연의 '동행'(그녀 그림의 재료가 특이하다. 커피 내릴 때 쓰는 페이퍼 필터를 재활용해 동그란 무늬가 반복되는 그림들을 만들었다) 등이 열리고 있는
<금호미술관>.

그리고 가장 마음이 따뜻해졌던 데이빗 내쉬(David Nash)의 나무작품 전시가 열리는 <국제 갤러리>. 나무와 대화하며 죽은 나무에 생명을 불어넣는 생태조각가 내쉬의 작품은 처음엔 '이것도 작품인가'하는 생각으로 다가갔다가 작가의 마음을 읽게 되는 마지막 순간에는 아, 하고 감탄사를 내뱉게 된다. 독일 현대작가의 아버지 보이스의 설치 미술들을 보았을 때의 느낌과 다르지 않다.

물기 머금은 나무를 길게 잘라 비뚤비뚤 칼집 낸 조각, 나무를 모닥불에 던져 넣어 새카맣게 태운 조각, 오래 보존할 수 있도록 청동으로 나무 느낌을 낸 조각 등이 다양하게 전시되어 있다. 갤러리 바닥엔 물이 흥건한데, 나무의 습도를 유지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여러 작품들 중에 작가가 가장 애착을 갖고 있는 작품은 사이프러스 나무로 만든 피라미드•구•육면체라고 한다. 세 가지 도형을 조각한 후 깊게 판 홈을 검게 그을려 빗금을 냈다. 뒤에는 조각품 모양을 그대로 드로잉해 그림자처럼 만들어두었고, 드로잉은 작품을 만들 때 생긴 숯을 이용해서 했다니 그런 생각을 한 내쉬의 고집이 재밌게 느껴진다(위의 download를 눌러 그림을 보세요).
그런데 왜 조각의 재료가 나무여야 했을까.
'돈이 없어서'라는 그의 대답이 재미있다.
돈이 생긴 지금은 오래 보존할 수 있는 청동을 이용하여 나무 조각을 하기도 한다고, 설명서에는 써 있다.

우주와 나의 눈길을 사로잡은 작품은, 거기에 없는, 아니 어디에 있는지도 알 수 없는 작품이다. 그 작품은 그곳에 없고 영상과 사진 자료로만 있다. 1978년 내쉬는 태풍에 꺾인 산중턱 떡갈나무를 큼직한 ‘나무바위(Wooden Boulder)’ 형태로 만들어 그 나무에 새 삶을 부여했다. 나무바위는 계곡을 따라 강물로 떠내려갔고, 2003년에는 강에서도 사라졌다. 아마도 바다로 흘러 들어갔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이후의 행로도 그 나무바위의 여정'이라고 작가는 생각한다. 흥미로운 건 1978~2003년에 걸쳐 25년 동안 나무의 삶과 행적을 묵묵히 지켜보면서 그것을 예술의 한 형태로 인식하고 사진과 영상으로 기록하였다는 점이다.

의도되지 않은 듯 의도된 그의 작품에 대한 도슨트의 설명까지 듣다 보니 어느새 문 닫을 시간(6시)이다. 우주 역시 내쉬에게 똑같이 끌리는 건 작품 속에 살아있는 작가의 휴머니티와, 25년 동안 긴 호흡으로 나무의 여정을 지켜본 그의 인내를 읽었기 때문이 아닐까. 같은 것에 끌리는 우리 두 사람, 데이트가 더 즐거워진다.

좋은 작품들을 고비용으로 들여다 무료로 전시회를 여는 갤러리들이 이토록 많다는 사실, 의도가 어디 있건 후원하는 회사들이 그렇게 돈을 '잘' 쓰고 있다는 사실이 고마워진다. 내쉬 전시회는 더 돈이 많이 들었을 것이다. 사이즈가 장난 아니게 큰 작품 목재들이 40개가 넘게 운반되어 왔다니 말이다.

어딘지 모르게 따뜻하게 다가오는 작가의 마음을 읽고 즐거워진 우리는 이제 북촌동 한옥 마을의 좁고 예쁜 골목으로 들어서기로 한다. 마침 눈에 띄는 꽃집에서 빨갛고 파란 포인세티아 작은 화분 두 개를 사서 우주와 나눠 갖다.
'우리 욕심내지 말고 이번 겨울만이라도 성공하자!'
화분 돌보는데 재주가 없는 우리 둘, 암묵의 눈빛을 교환한다.

북촌 한옥 마을 어느 골목 모서리에 환한 속을 다 드러낸 <와이방(Weibang) 갤러리>가 나온다.
"안에 안 들어가도 다 보이는 갤러리라 좋죠?"
그러면서도 우주는 문을 밀어본다. 아직 열려 있다. 사람은 안보이고 선명한 칼라의 그림들만 사각의 단촐한 공간에 걸려있다. 그곳에 걸린 몇 개 안되는 특이한 중국 사진들은 젊었을 때 모델이 하고 싶었던 어머니의 꿈을 이루어드리려는 착한 아들의 작품들이다. 사진들마다 노모는 도도한 포즈를 취하며 젊은 아이들 사이에서 잘 나가가는 모델이 되어있다.

다음은 더 아담하고 예쁜 한옥 갤러리 <담>. 그곳에서 여백에 자연을 듬뿍 담은 최홍선의 도자기전 '자유의 세계'를 둘러 보았다. 여러 개를 붙여 하나의 그림이 되게 한 백색 도기들 평면에 바람의 흔적이 멋지게 조각되어 있다.
"그동안 뜸했었네요..."
우주를 보자 반갑게 달려와 인사를 하시는 아담한 키의 갤러리 사장님. 2층으로 올라가니 화장실이 오픈형으로 재미있게 만들어져 있다. 올라온 김에 일 좀 보고, 담쟁이 덩쿨이 뒤덮힌 자그만 옥상 공간에 나와 서본다. 그곳에서 바라보는 북촌 한옥 지붕들의 실루엣과 단풍나무들이 곱다.

플랫폼 서울의 ‘Tomorrow 전’이 아직 진행되는 <아트 선재>, 문을 닫아 아쉽게도 들어가지 못했다. 아기자기한 먹자 골목에 젊은 사람들이 왁자하다. 몇 개의 테이블이 협소한 공간에 옹색하게 놓인 할머니 라면집과, 꼬치집은 특히 문전성시다. <아라리오 서울>이 눈에 띈다. 기대하지도 않고 문을 밀쳐 보았는데 아직 문을 열었다.오스트리아 출신의 문틴 앤 로젠브룸(Muntean & Rosenblum)의 '현대적 풍경'이 전시되고 있다. 도시적인 젊은이 군상들이 여러 공간에 독특한 분위기로 서있는, 커다란 그림들로 가득하다.

커피와 와플로 저녁 식사를 대신하러 '빈스빈스'로 가는 길, 질러 갈 수 있을 것 같은 뒷 길로 접어든다. 우주나 나나 그 길이 맞는다는 확신은 없다. 덕분에 우주도 다녀보지 않은 아주 예쁜 삼청동 골목 하나를 뚫은 셈이다. 실수는 그래서 고마운 것이다.

제법 쌀쌀해진 거리에 사람들이 많이 오간다. 식당마다, 찻집마다 사람들로 가득 찼다. ‘빈스 빈스’ 역시 예외가 아니어서 기다릴 엄두를 못내고 우리는 근처의 퓨전식 차이니스 레스토랑으로 향한다. 해물 누룽지탕에 게살수프를 시켜 먹고 긴 수다를 시작한다. 하루 놀기 좋은 서울의 코스를 여러가지로 만들어 책을 내보는 것도 재미있겠다는 의견이 나온다. 서울에 살면서도 서울의 어깨며 다리며 목덜미 곳곳을 탐험해보지 못한 것이 나이다. 우주처럼 삼청동 일대 기행을 자주하며 새로운 전시를 헌팅하는 젊은 친구들을 제외하면 누구나 그럴 것이다. 더구나 나 같이 나이든 사람들은 그 누구도 놀이로 서울의 속살을 헤집고 다닐 생각을 하지 못한다. 그런 점에서 오늘은 서울의 늘씬한 허리, 문화 존(zone)을 재발견한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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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여기서 나와 데이트한 우주는 오현정이라는 아가씨입니다.
데이트한 날짜는 2007년 11월 10일이구요 ㅎㅎㅎ
예술과 관련된 글을 올리다보니 이글도 올리게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 예술에 조금 더 관심을 갖게 된다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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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 현정
2008.07.31 14:17:57 *.128.98.93
우와..벌써 8개월이 지났다니 새삼스럽습니다.

아직도 내쉬의 작품이 생각납니다. 캠벨이 일자리를 얻지 못해서 동생 엘리스와 우드스탁 숲으로 들어갔을 때 저는 내쉬를 떠올렸습니다. 캠벨처럼 내쉬도 자신의 천복을 좇아 가난을 친구삼아 숲으로 들어 갔을 테지요. 그래서 가장 구하기 쉬운 나무라는 재료로 자신만의 세상을 창조해 내었겠지요.

그 둘을 보면 천복은 스스로 찾는 이에게 찾아 오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신이 선 자리에서 자신의 천복에 응답하다 보면 미술 작가도 되고 신화 학자도 되는 것인가 봅니다.

그러고 보니 제가 무척이나 용기가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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