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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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로서 마음편지를 쓴 지 꼭 3년이 되었습니다. 하여 이 편지가 제가 보내는 마지막 마음편지입니다. 무슨 말을 쓸까 일주일 내내 고민했는데, 끝까지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아 그냥 생각나는대로 편하게 쓰려고 합니다.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처럼요. (글로 만난 사이지만, 3년을 봤으면 친구아입니까!)
제가 썼던 편지를 돌아보니 대부분 '오늘 하루를 잘 살아있기 위한 생각'들이더군요. 유래가 없었고 앞으로를 예측할 수 없던 팬데믹 기간을 보내며, 먼 미래가 아니라 '오늘살이'에 더 집중했던 것 같습니다.
오늘살이하니 얼마전 유퀴즈 방송프로그램에서 본 이지선씨의 인터뷰가 생각납니다. 이지선씨는 대학생이던 시절 음주교통사고로 심한 화상을 입고 온 몸의 피부가 녹아내렸던 사람입니다. 당시 입은 심각한 부상으로 곧 죽을 수도 있다는 진단을 받았는데요, 기어코 살아남았습니다. 지옥같은 고통을 겪어내면서도 의연하게 하루하루를 살아내며 자신의 투병기를 담아 책 <지선아, 사랑해> 을 출간했고 많은 사람들에게 감명을 주었습니다. 저도 중학교땐가, 고등학교땐가 그 책을 읽고 깊은 감동을 받았었죠.
그녀는 사고로 많은 걸 잃었지만 주변의 도움과 사랑, 본인의 꿋꿋한 의지로 자신만의 삶을 개척해오고 있었는데요, 그 뒤로 학업에 매진해 현재는 이화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녀에게서 고통을 극복하고 스스로 다시 일어난 자가 가지는 여유와 힘이 그대로 느껴졌습니다. 오늘만 산다는 그녀가 인터뷰에서 그러더군요.
"저는 사고를 당했다가 아니라 '사고를 만났다'고 말해요."
사고를 당했다고 말하면 ‘나는 음주 교통사고의 피해자입니다’라고 말하는 것 같은데, 그녀는 그 사고로 많은 걸 잃은 만큼 많은 걸 얻었기 때문에 사고를 당한 게 아니라 사고를 만났다고 힘주어 말했습니다. 스스로를 피해자로 놓지 않으면서, 진정으로 그 사고와 헤어질 수 있었다고 말입니다. 그 사고를 계기로 이전의 이지선의 삶은 끝났지만 새로운 이지선의 삶이 시작됐기 때문이죠.
자신을 거의 죽음으로까지 몰아간 사고조차 의연하고 당당하게 대하는 그의 태도를 보면서 저를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말로는 '주도적으로 살아야 한다, 나는 내 삶의 주인이다' 라고 하지만, 과연 나는 얼마만큼 그런 태도를 지니고 있었나? 일이 잘 풀리면 주체적인 태도를 가지기 쉽습니다. 하지만 일이 잘못되거나 안 풀리면 쉽잖죠. 그 책임을 다른 누군가에게 돌리고 싶어지고 그를 비난하고 원망하는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 돌아보면 제가 딱 그짝이더군요. 저 같은 가짜는 정말로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진짜를 만나는 순간, 들통이 납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십년도 더 전에 본 영화가 생각납니다. 재미는 별로 없었지만 마지막 장면이 매우 인상깊었죠.
보험 회사 사장으로 모든 걸 다 누리고 살던 중년의 남자, 존이 있습니다. 그는 얼마 전 구입한 포도주 라벨에 흠집이 난 걸 발견하고 주류점에 바꾸러 갑니다. 점원 (어기 로즈)이 포도주 창고로 간 사이 강도가 들이닥칩니다. 목숨이 오가는 절체절명의 위기. 그때 창고에 갔던 점원이 다시 돌아오는데… 그에 놀란 강도가 점원을 쏘고 달아납니다. 존은 간신히 죽을 고비를 넘겼지만 자신 때문에 점원이 죽었다는 자책감에 빠집니다. 그래서 점원의 시신과 모든 유품을 정리하고 혈육이 없는 그를 위해 장례까지 지내줍니다. 그러면서 존의 심경에 변화가 생기게 됩니다. 이후 존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정리하고 점원의 삶을 살기 시작합니다.
"비극적인 건, 내가 어기로 살아갈 때 너무 편하다는 거에요."
영화 마지막 장면에 그가 장례를 지내준 점원의 묘비가 비춰집니다. 묘비에 적힌 이름은 죽은 점원이 아닌 그의 이름이었죠. "존 놀란" 그는 스스로를 묻어버리고, 새로운 삶을 선택한 겁니다.
영화를 보고 여러 생각을 했습니다. 왜 존일 때보다 어기일 때 더 편했을까? 숨이 붙어있는 채로 나와 결별한다는 건 대체 어떤 느낌일까? 만약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다면 어떤 일이 생기게 될까?
마지막 편지, 이지선 교수, 존이 아닌 어기의 삶. 여기까지 써놓고 보니 뭔가 퍼즐처럼 하나로 꿰어 맞춰집니다. '이전의 삶을 끝내고 새롭게 시작하는 것. 그 계기를 마련하는 것'. 이들은 큰 사고를 당하고 자신의 이전 삶을 끝냅니다. 하지만 그런 사건 사고 없이도 삶을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면, 어떨까요? 그럼 여러분은 무엇을 끝장내고 무엇을 시작하고 싶나요?
오늘 편지를 보내며 그런 계기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쩌면 이 편지가 그 계기가 될 수도 있겠고요. 솔직히 고백하면 3년동안 마음편지를 쓰며 매우 부담스러웠습니다. 매주 오늘은 무슨 이야기를 써야하나 고민했는데 그렇게라도 매주 한 편씩 글을 쓰면서 많은 걸 느끼고 배울 수 있었습니다. 마음편지가 끝나고도 앞으로 어떤 글을 쓸까, 이 고민은 계속 할 것 같습니다. 쇼팽콩쿠르의 최연소 우승자이자 촉망받는 세계적 피아니스트인 조성진씨가 이런 이야기를 하더군요. "제 꿈은 엄청 커요. 저는 귀한 연주를 하는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어요."
귀한 연주라니… 뭔가 울림이 있었습니다. 저의 꿈도 큽니다. 제 이름자 '귀한자식'의 뜻처럼 귀한 글을 쓰고 싶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저의 마음이 움직여지는 그런 귀한 뭔가를 만들어내고 싶습니다. 그럴 수 있도록 멈추지 말고 계속해서 나아가봐야겠습니다. 끝은 또 다른 시작을 내포하니까요.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끝까지 가는 겁니다. 어쨌든 우리에겐 뭔가를 끝장내고 뭔가를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힘이 있으니까요.
여러분의 오늘을 변함없이 응원하며,
글리's 라이프충전소는 여기서 일단락 짓습니다.
그간 함께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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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의 마음편지는 여기서 마무리되지만, 저의 글은 브런치와 블로그 등에서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