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혁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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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단히 위험천만한 여행에 참가할 사람 모집합니다.
“급여는 쥐꼬리 만함
혹독한 추위ㅡ 수개월 계속되는 칠흑 같은 밤과 어둠
끊임없이 다가오는 위험, 그리고 무사귀환이 의심스러운 여행임
물론 성공할 경우에는 커다란 명예와 인정을 받을 수 있음”
위 글은 어니스트 섀클턴이라는 탐험가가 “남극횡단 탐험대”를 모집하는 광고문구입니다.
섀클턴이 탐험 계획을 발표하자 함께 가겠다는 지원자가 3명의 여자를 포함하여 무려 5천여 명이나 몰렸다고 합니다. 아마도 인터넷이 잘 발달된 오늘날이라면 과연 얼마나 몰렸을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선발된 27명 대부분은 순수한 모험정신으로 지원을 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지불되는 급여는 수고비 정도가 고작이었고, 그나마도 대다수의 경우는 탐험이 끝난 뒤에 지불한다는 조건이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과학자, 선원, 지리학자, 해군, 요리사, 목수, 의사등 탐험과는 전혀 관계없는 사람들도 수없이 지원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평소에 무엇이 부족했길래 그 험한, 아니 목숨을 잃을 수 있는 모험에 도전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어니스트 섀클턴은 위대한 탐험가입니다. 또한 그와 함께 했던 선원들의 ‘남극 탐험 이야기’는 절로 감탄할 만큼 긴장감과 흥분을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저의 관심은 그들의 사건에 머물러 있지는 않았습니다. 나라면, 아니 우리들이라면 이런 탐험대 모집광고를 보고 흥분하였을까? 아직도 우리에게 이런 ‘욕망’이 살아 있을까? 혹독한 추위, 배고픔, 목숨을 잃을수도 있는 모험에 이들처럼 뛰어들 수 있을까? 저는 ‘창조적 소수’를 규정하는 단어로 ‘탐험’과 '인내'라는 단어를 주저없이 꼽고 싶습니다. 섀클턴의 말과 그들의 모험담을 통해서 제 나름대로의 생각을 밝히려고 합니다.
어니스트 섀클턴에게 탐험이란 이런 것이었습니다.
“ 우리는 성공하거나 아니면 죽을 것입니다 ”
저는 단 한번도 이런 도전을 해본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늘 남보다 조금 더 나아지기 위해, 조금 더 벌기 위해 뛰었을 뿐입니다. 목숨을 거는 위험한 도전이 과연 좋은 것인가?를 이야기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단지 이 세상을 살아오면서 단 한번이라도 제대로 살아보았느냐 를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꿈이 당신의 목숨을 걸만큼 간절 하였느냐! 하는 것이지요.
과연 나는 단 한번이라도 ‘남극’를 품어 본적이 있나?
그렇게 가슴뛰는 목표가 있느냐?하는 것입니다. 늘 그저그런 방법으로 그러그런 사람들과 그저그런 목표를 가지고 살아오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저그런맹맹한 삶을 살아가나 봅니다. “당신을 지배하는 욕망에 따라 당신은 보잘것없는 사람이 될 수도 있고, 위대한 사람이 될 수도 있다”-제임스 앨런
어쩌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도전하는 것에 도전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안정만큼 달콤한 것도 없는 듯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탐험’이라는 단어는 위험 그 자체로 여겨집니다. 우리가 안정이라고 생각하는 지금의 위치도 달리 보면 부빙위에 떠있는 ‘안정감’인지도 모릅니다. ‘안정’도 탐험처럼 위험한 단어로 여겨지는 시대입니다. 제가 ‘탐험’이라는 단어에 집착하는 이유는 탐험이 가지고 있는 무모한 도전 즉 모험심이야 말로 이 사회를 이끌어 나가는 소수들의 ‘생존 경쟁력’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아무나 쉽게 꿈꿀 수 없는 일, 아무나 쉽게 도전하기 어려운 일을 해 보는 것, 평생 한번뿐이라고 생각하는 일에 뛰어드는 것, 그들이 ‘창조적 소수’라고 생각합니다.
“ 1인치 앞으로 나아갈 때마다 삶이 가까워진다.”
섀클턴과 27명의 선원들이 탄 배는 남극 대륙 횡단에 도전합니다. 그러나 바다 위를 떠다니는 부빙(얼음덩어리)에 부딪혀 배는 웨들해 한가운데서 난파됩니다. 그리고 그들은 혹독한 고난앞에 서게 됩니다. 현재의 곤경에 처하게 만든 일련의 재앙들, 말하자면 극지에서 추위와 견디며 겪게된 그리운 것들에 대한 ‘향수병’, 시속 100km가 넘는 바람, 햇빛에 의해 쪼개져 나가는 부빙들, 거기에 서 있는 그들, 동상, 과식하는 것을 꿈꾸는 것은 악몽이었습니다. 그들에겐 꿈만 있었던 것은 아니였습니다
“그들의 탐험선 인듀어런스 호가 영국에서 출항할 당시만 해도 탐험대는 각기 다른 개성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이질적인 집단이었다. 그들의 면면도 케임브리지 대학의 강사에서 요크셔의 어부까지 천차만별이었다. 그러나 9개월 동안 같은 공간에서 더불어 먹고 작업하며 부대끼는 동안 대원들은 서로간의 차이점을 이해하고, 같은 경험을 가진 집단으로 형성하였다.
남극의 밤이 시작되면서 대원들 간의 마찰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그들은 서로 한 가족이 되어 있었다.”-섀클턴의 위대한 항해 본문중
배의 이름은 원래 ‘북극성’이었습니다. 그러나 배를 인수한 섀클턴은 그의 집안 가훈인. ‘Fortitudine vincimus’(우리는 인내로 정복한다)와 의미가 비슷한 ‘Endurance’라는 단어로 배의 이름을 바꿨습니다. 그가 새겨 넣은 ‘인내’라는 의미는 ‘위대한 꿈’을 이루기 위해서 무엇이 ‘창조적 소수’에게 필요한지 일러줍니다.
그들은 예상치 못한 어려움 속에서도 서로가 서로에게 ‘희망’과 ‘자신감’이 되어 주었습니다. 1인치라도 앞으로 나아가는 것만으로도 그들에겐 ‘희망’으로 보여졌던 것입니다. 나아가고 있다는 것 자체가 ‘자신감’을 심어 주었습니다.
이런 이유들로 저는 ‘창조적 소수’에 관한 책에서의 첫 느낌이 탐험대의 그것과 닮았으면 합니다. ‘창조적 소수’로서의 꿈이 남극탐험을 꿈꾸듯이 새로운 도전의식을 고취시켰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창조적 소수’에 관한 책을 구상하면서 2가지 의무를 갖게 되었습니다.
첫째는 ‘창조적 소수’에 관한 책을 본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 나름의 남극을 꿈꾸게 하는 계기가 되어 주어야 한다는 의무감과 둘째로 ‘창조적 소수’는 끊임없는 인내가 필요할지도 모른다는 경각심을 반드시 일깨워 주어야 한다는 의무감이 그것입니다.
따라서 ‘그들 나름의 남극을 꿈꾸게 하는 일’은 현재 기업과 조직 그리고 개인들이 이 사회가 얼마나 급격하게 변화되고 있고 그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하면 얼마나 위험해 질 수 있는지 소개하는 개념을 부빙위의 삶으로 비유하여 이해시키고,오늘날의 시기에 개인들이 탐험대가 되어 능동적으로 자신들의 꿈을 개척해 나가는 것이 위대한 일의 시작이고, 왜 그것이 이 시대적 요구사항인지 알려보고자 합니다.
저는 아래와 같이 '창조적 소수'를 모집하고 싶네요.
대단히 위험천만한 여행에 참가할 ‘창조적 소수’를 모집합니다.
“급여는 쥐꼬리 만함
끝없는 밤샘ㅡ 수개월 계속되는 아이디어 회의와 실행
꿈을 향한 끊임없는 도전 그리고 인내심 요구, 성공에 대한 보장은 없음.
물론 성공할 경우에는 커다란 부와 동지와 평생의 명예로운 직업을 얻게 됨.
무엇보다 나이 들어 죽을때 환하게 웃을 수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