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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재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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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3월 29일 14시 23분 등록


그의 책 <심연에서 De Profundis>를 원문으로 읽어보면, 그의 동성애인이었던 알프레드 더글러스 경에 대한 언급을 최대한 절제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책에서 알프레드 더글러스 경은 킌즈베리 후작의 셋째 아들로 옥스퍼드 재학생이며, 대학시절부터 동성애의 경험이 있었고, 그 애인의 협박을 피해 오스카와일드와 만남이 시작된 것으로 묘사된다. 귀족신분과 시인으로서의 자질도 무시할 수 없었지만, 그의 수려한 외모에 반한 오스카 와일드는 알프레드의 전 애인의 방패막이 되어달라는 청을 거절 할 수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BBC 방송이 제작한 오스카와일드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보면, 알프레드의 아버지인 퀸즈베리 경에 대한 재미있는 사실들을 증언한다. 그는 후작이라는 신분에도 불구하고 자기 아내를 학대하고 자식들과도 항상 부딪히는 성격이었다는 것이다. 알프레드와 오스카와일드의 관계가 있기 전, 큰 아들인 프란시스가 외무성의 로즈베리경의 개인비서로 임용되었을 때도, 그 아버지는 두 사람 사이를 의심했다. 사실 여부는 확인 할 수 없으나, 두 아들의 동성애에 관한 사건들로 인해 귀족 사이에서도 언제 어떤 다이너마이트를 터트릴지 모르는 위험한 인물로 통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다큐멘터리는, 알프레드경의 손녀와 오스카와일드의 손자가 오스카와일드 탄생을 기념해 문인들과 오스카 와일드가 자주 갔었던 카페인 축배를 드는 모습을 보여준다. 가정이 있는 유부남과 연인관계였던 꽃미남 청년의 후손들은 과연 그들의 조상을 어떻게 바라볼까.

어느 날, 더글러스와 오스카 둘이 카페에 함께 있는 모습을 본 아버지 킌즈베리 후작은 협박 편지를 보내기 시작한다. 둘의 관계를 다 알고 있으니 앞으로 밖에서 둘이 함께 있는 모습이 두 번 다시 띄기라도 하면 가만 두지 않겠다는 내용이다. 알프레드는 아버지가 오스카에게 보낸 편지를 보고 권총을 사올 정도로 아버지에 대한 적개심이 강했다.

결정적으로 사건이 터지게 된 것은 킌즈베리 후작이 알프레드의 양복주머니에서 오스카가 보낸 편지를 본 후였다. 후작은 그 편지를 보낸 이후로 지속적으로 협박성 편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아마도 협박성 편지는 단순한 협박을 넘어 선, 신변에 관한 수치심을 포함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그들의 갈등이 고조되어가는 도중, 뜻밖의 사건이 벌어졌다. 바로, 알프레드의 형이 우연한 총격사건에 휘말려 목숨을 잃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이에 알프레드는 엄청난 충격으로 오스카 와일드에게서 위로를 받기위해 며칠 동안 함께 머물게 되었던 것이다.

아들을 잃은 슬픔과 더불어 작은 아들은 다른 남자와 함께 기묘한 동거가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후작을 더 성나게 만든다. 퀸즈베리 후작은 <진지함의 중요성>이 초연되던 날, 관중들 앞서 오스카와일드의 도덕성에 대해서 공개적으로 비난을 하려고 했던 것이다. 생각해보라. 연극이 공연되기 전, 한 사람이 모든 관객들 앞에서 이런 행위가 경찰에 의해 수포로 돌아가자, 오스카 와일드와 알프레드는 퀸즈베리 후작은 명예훼손으로 고발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정작 이 사건을 이성적으로 바라 본 것은 오스카 와일드의 전 애인이었던 로즈로스 Rose Ross였다. 그는 이번 사건은 100% 오스카와일드에게 불리하다는 것을 이미 감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진심으로 오스카에게 소송을 취하할 것을 권유하였지만, 이미 알프레드는 오스카와일드를 이용해 아버지를 소송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로즈 로스를 비롯한 프랭크 해리스, 그리고 버나드 쇼까지 재판까지 가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일러주었다. 진정으로 퀸즈베리 후작이 오스카 와일드에게 한 행동은 자신의 아들을 위한 행동이었을까. 그보다 중요한 것은 알프레드는 오스카 와일드와의 관계보다는 아버지에 대한 증오심이 더 컸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후작은 경찰에 체포되었지만, 이내 풀려나게 되었고, 이제 반대로 후작이 오스카 와일드를 고소하게 되었다. 죄명은 동성애. 그는 오스카와일드의 동성애적 성향을 증명해 줄만한 사람들에게 회유와 협박을 통해 증언을 받아 고소하기에 이른다. 그의 죄목을 입증해줄만한 결정적인 증거는 그의 작품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 The Picture of Drian Grey>이었다. 그 소설은 부도덕하고 외설적인 소설로 취급받았고, 그 작품을 쓴 오스카 와일드는 악행과 타락을 조장하는 괴물로 몰아갔다. 죄를 입증할 만한 확실한 증거가 있었다기보다는, 후반부의 오스카와일드의 법정에서의 행동이 오히려 문제가 되었다. 일종의 심리전에 걸려든 것이다. 그의 행동은 사회적 지위에 있는 사람들의 관습을 무시하고 그러한 사회적 지위의 구분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긴 그의 행동이 오히려 설득력을 잃어갔다. 연이어 법정에 증인으로 서게 된 호텔보이나 신문팔이들의 동성애적 경험을 증언할 때 그의 입지는 좁아져 갔다. 오스카 와일드의 변호사는 사실 여부를 떠나 증인들이 증언을 채 마치기도 전에 패소할 것을 알았다.

퀸즈베리는 상당히 심리전에 능통한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변호사를 시켜 재판과 관련된 모든 증언을 판결이 나기도 전에 각 언론사와 검찰총장에 보내기에 이르렀다. 언론사들은 앞 다투어 그의 동성애적 성향을 보도하기에 이르렀고, 그의 작품이 올려 진 극장으로 가 배우들과 연극 연출가들에게 그와 혹시모를 관계가 있을지 여부를 집요하게 캐묻기 시작했다. 판결이 난 당일 저녁, 그는 체포되었고 보석신청도 기각되었다. 3주일 후에 그에 대한 재판은 배심원의 평결불인치로 끝나버렸다. 그 재판에서 그는 동성애자라는 죄목으로 유럽에서 첫 번째로 2년간의 중노동과 함께 징역을 선고받았다. 사실 그의 죄목 이면에는 그에 대한 보복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빅토리아 시대가 상징하는 가식과 위선을 향해 도전하는 영국사회의 반항아이자 위험인물이었던 것이다. 그의 말과 행동은 당시 영국사회가 받아들일 수 있는 인내의 한계까지 닿아있는 상태였던 것이다.

오스카 와일드는 런던 북부의 펜톤빌에서 2년형을 선도 받고 몇 달 뒤 런던 남부의 원즈워스로 이송된 뒤 마지막 기간까지 레딩감옥에 갖혔다. 원즈워스에 있는 동안 그의 아내는 아이들을 데리고 외국으로 도망쳐야했다. 퀀즈베리의 소송비용 청구로 급기야 파산에 이르렀다. 그의 죄목은 유럽최초로 행해진 것으로 위생시설 없는 독방에 배정되었고, 처음부터 글을 쓸 수 있는 자유를 거부당했다. 후에 종이와 필기구를 얻게 되어 알프레드 더글러스 앞으로 편지를 썼고, <심연에서>라는 제목으로 출판하게 되었다.

그는 단 하루의 감형도, 구류기간동안의 선처도 없이 꽉 채운 형기를 마치고 1987년 5월 19일에 석방되었다. 그는 풀려나자마자 프랑스로 떠났고, 다시는 영국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러나 감방에서의 생활은 와일드의 정신과 육체를 완전히 망가뜨렸다. 그는 무일푼 상태에서 프랑스로 이주해 ‘세바스티안 멜모스 Sebastian Melmos'라는 가명을 사용하면서 친구들의 도움에 의지해 생활했다. 그러나 감옥에 있었을 당시, 그는 바닥에 쓰러져 두개골에 금이 간 사건이 있었다. 그는 감옥에서 풀려난 뒤 그 사고 이후 생긴 만성 두통을 없애기 위한 수술을 받았다. 의사는 와일드의 아버지가 처음 시도한 일종의 유양돌기 절제술을 사용하면서 그 유명한 ’와일드 절개술‘을 이용했다. 하지만, 수술은 실패로 끝났고 와일드는 뇌막염에 걸렸다.

***

오스카 와일드의 가족들은 어떠한 삶을 살았을까. 그에 대한 답은 그의 둘째 아들인 비비안 홀랜드는 <오스카 와일드의 아들 Son of Oscar Wilde>을 통해 대답해 준다.

오스카 와일드가 체포되었을 때, 그의 아들인 비비안 Vyvyan 과 시릴 Cyrill 은 각 8살과 9살이었다. 아버지의 이중생활을 알 턱이 없었던 두 소년의 어린 시절은 행복했다고 회고한다.

“아버지는 항상 독특하고 멋진 옷차림에 웃음기가 가득한 거인이었다. 우리와 같은 마룻바닥을 기어다니며 장난을 치던 아버지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아버지는 항상 짙은 담배연기와 향수 속에 묻혀 있었다.”

아버지는 노래도 불러주고 옛날 이야기도 해주던 자상한 아버지로 기억한다. 그러나 1895년 와일드가 감옥에 갇힌 뒤, 아이들은 아버지를 다시 볼 수 없게된다. 아내인 콘스탄스는 남편이 소송에서 패소해 지게 된 빚을 갚기 위해 아이들이 가지고 놀던 장난감까지 전부다 경매처리해야할 상황에 놓이게 된다. 그리고 영국 최초로 소송에 의해 확인된 ‘동성애자 1호’에 대한 매스컴을 피해 스위스로 도망가야했다. 그러나 처음 들어간 호텔부터 숙박을 거절당해야했다. 콘스탄트는 즉시 성을 ‘홀랜드 Holland'로 바꾸었다.

시릴과 비비안은 각각 독일과 모나코에 있는 기숙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1898년 어머니 콘스탄스가 죽자, 두 아이들은 이모 할머니가 있는 영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또 다른 기숙학교에 보내진다.

비비안은 그로부터 2년뒤 아버지의 사망소식을 듣고 매우 놀라게 된다. 당시 14살이던 비비안은 그때까지 아버지가 죽은 줄로만 알았던 것이다. 당시까지 아버지가 무슨 사건에 연루되었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자신들의 정체를 숨기며 지냈던 것은 기억하고 있었다.

“그토록 유명했고 존경받던 아버지, 그런 아버지의 존재를 하루 아침에 부정해야했다. 그에 얽힌 모든 기억도 지워야 했다. 그건은 아직 어렸던 우리가 견기기에는 너무 가혹하고 무거운 짐이었다.”

비비안이 사건의 진상을 알게 된 것은 그로부터 4년이 지난 18살 때였다.

“뭐? 겨우 그게 다인가? 난 또, 아버지가 남의 돈이라도 훔친 줄 알았다.”

그는 오스카 와일드와같이 재치가 넘쳤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장남인 시릴은 처음부터 아버지의 스캔들을 알았다. 그는 신문 가판대에서 아버지에 대한 기사를 읽었고, 아버지의 과거와 성적성향에 대해 괴로워했다. 1914년, 시릴은 비비안에게 편지를 썼다.

“최근 몇 년 동안 말야. 나는 이 오명을 깨끗이 지워버리겠다는 생각밖에 없었어. 잃어버린 우리 와일드 가의 명예를 가능하다면 내 힘으로 되찾고 싶어. 이 땅에서 치욕스런 그 이름 말이야. 그래서 말인데, 생각 끝에 확신을 얻었어. 난 우선, 당당한 사나이가 되겠어. 이제는 데카당트한 작가의 울부짖음이 들리지 않아. 나약한 탐미주의자이자 성도착자였던 아버지를 이제는 잊을 수 있을 것도 같아. 비비안! 난 말야, 이 영광스러운 전쟁에 참여하기로 했어. 조국을 위해서!”

시릴은 영국군 장교로 인도에서 복무했다. 1차 대전이 발발하자, 프랑스 지원병으로 입대했다. 그리고 1915년 5월 9일, 독일 저격병이 쏜 총을 맞고 죽었다. 29살이었다.

둘째 비비안은 아버지의 명성이 회복하는 것을 직접 볼 수 있었다. 비비안의 후견인은 와일드의 작품에서 나오는 인세를 비비안이 받지 않도록 했다. 불명예스러운 돈이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러나 그 후견인이 죽고, 오스카와일드의 첫 번째 동성애인이자, 작품관리자인 로버트 로스는 비비안을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었다. 그를 런던 사교계에 소개도 시키고, 그의 작품을 세계문학사의 한 획을 긋는 작품으로 격상되도록 출판에도 힘을 기울였다. 아버지의 작품이 격상되자, 비비안은 매년 약 10,000파운드에 해당하는 인세를 받을 수 있었다.

1914년 그는 결혼을 했다. 결혼과 동시에 그는 본인이 오스카 와일드의 아들임을 세계에 알렸다. 그리고 그 배후에는 로스가 있었다. 그러나 결혼 4년 만에 아내가 죽는 비운을 맞이하였지만, 1943년 재혼을 하고, 2년뒤인 29세에 아들 에를린을 낳았다.

비비안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작가의 길을 걸었다. 그는 2차 세계대전에는 BBC 방송국에서 일도하고, 아버지에 대한 회고록도 세 편이나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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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2010.03.29 21:47:14 *.36.210.230
emoticon 죽은 자의 명성도 회복시킬 만큼 진정한 사랑의 힘은 정말정말 위대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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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엽
2010.03.30 09:17:19 *.216.38.10
그의 희곡 <윈더미어 부인의 부채>에 나오는 장미 같습니당^^

그쵸? 죽은 자의 명성도 회복시킬 만큼의 문학작품.. 그리고 모욕을 준 아버지에 대한 사랑...

저 또한 리서치 과정을 거치며 많은 것을 배우고 있습니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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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해
2010.03.29 21:49:03 *.67.223.107
점점 더 재미있어지는군요.
그 비비안 홀랜드가 쓴 아버지에 관한 글이 어디에 있나요?

영문학 전공자가 아니면 사실 오스카 와일드를 잘 알 수가 없었는데...
그의 삶 못지않게  가족의 삶도 또 한편의 드라마 같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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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엽
2010.03.30 09:19:27 *.216.38.10
저도 이번에 리서치 하면서 amazon에서 헌책으로 구입을 했습니다. 책 제목은

Son of Osacar Wilde by Vyvian Holland 입니다. 꽤 쉬운 영어로 되어있어서 읽는데도 별 무리가 없었습니다. 

혹시 국내 번역 안되어있으면 제가 함 해볼까, 하는 욕심도 살짝 들더라구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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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희향
2010.03.29 22:20:10 *.70.143.153
저의 문학적 무식함이 선배의 칼럼으로 조금씩 씻어지는 것 같아요.
단비같은 칼럼 계속 기대하겠슴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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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엽
2010.03.30 09:20:45 *.216.38.10
정말 여기 싸이트를 종횡무진,

그리고 오프라인 모임에서도 성실하고조직적으로 준비하는 수희향의 에너지를 보면...

우와~~ Long Live The QU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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