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산 오병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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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꿈을 자주 꾸는 편은 아니다. 어쩌다 꾼 꿈도 잠에서 깨어나면 기억으로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다. 그런데 최근에는 신발을 잃어버리는 꿈을 자주 꾼다. 절친한 동료들과 음식점에서 회식을 하다가 계산을 하고 나오는데 새로 산 구두가 없어져서 남의 낡은 구두를 신고 찜찜한 기분으로 걸어갔던 황당함은 너무나 선명해서 잊을 수가 없다. 어제 밤에는 또 꿈을 꾸었는데 신발을 잃어버렸을 뿐만 아니라 누가 내 소중한 자료가 가득 남긴 노트북 가방을 훔쳐갔다. 결국 둘 다 찾긴 했지만 신발 꿈을 자주 꾸는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제일 먼저 어릴 적 동네 친구들과 계곡에서 물놀이를 하던 기억이 난다. 그때 어머니가 어렵게 사준 새 신발을 나는 신고 있었다. 프로스펙스, 나이키가 시크한 스타일로 그 당시 학생들의 선망이었다면 나는 까만 색에 몇 개의 노란줄이 그어진, 요즘 말로 고상하게 이야기하자면 약간 빈티지 스타일의 타이거즈라는 운동화였는데 한동안 나는 새 운동화를 방구석에 고이 모셔두고 무슨 신주단지 모시듯 지극정성을 다했다. 신발은 나에게 신는 그 무엇이 아니라 내 마음을 담은 그릇이었다. 그런데 그만 수영을 하다가 신성한 신발 한 짝이 둥둥 떠내려간 것이다. 순간 당황해서 나는 신발을 좇아 물가 아래로 내려갔다. 마침 신발은 계곡 중간에 있는 덤불에 걸쳐있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신발을 잡으려는 순간 발이 깊숙이 들어갔다. 내 키보다 훨씬 높은 물 속의 깊이였던 것이다. 그 와중에서도 나는 신발을 꼭 잡고 몇 번의 자맥질을 한 끝에 간신히 기어나올 수 있었다. 천만다행이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만약 그때 신발 한 짝을 떠내려 보냈으면 어떨까라는 생뚱한 생각이 든다. 상실을 느끼며 지금보다 좀 더 내 안의 신화적인 면에 접근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리고 감동적인 이란 영화 “천국의 아이들”이 떠오른다. 오빠인 알리는 몸이 아픈 엄마의 심부름으로 시장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방금 수선한 여동생 자라의 신발을 잃어버린다. 이제 혼자 남은 오빠의 구두는 오전반 오후반 두 남매의 발을 모두 담아야 할 수 밖에 없다. 수업을 마친 여동생이 허겁지겁 뛰어오면 오빠는 골목에서 기다렸다가 동생이 신고간 구두로 바꿔 신고 학교로 뛰어간다. 알리는 이후 3등 상품인 운동화를 타기 위해서 마라톤 대회에 출전하게 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1등을 하게 되어 운동화를 받지 못하게 된다. 그러나 영화 후반에 집으로 가는 아빠의 자전거에 실린 작은 박스 두개가 화면에 비춘다. 그 박스의 틈새로 보이는 건 분명 두 켤레의 운동화이다. 아이들이 그토록 갖고 싶어하던 운동화를 아빠는 정원일로 번 돈으로 아마도 사온 모양이다. 감독은 왜 하필 ‘신발’을 영화의 소재로 선택했을까? 왜 하필 여동생의 신발을 잃어버린 것으로 문제를 설정했을까? 신발은 어디론가 떠날 때 필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신발은 지금 이곳에서 저곳으로, 현재에서 내일로, 익숙한 것에서 낯선 것으로 변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신발은 자유를 나타낸다. 신발이 없으면 밖에도 못 가고 집에서만 있어야 되기 때문이다.
신발이 주는 신화적 모티브는 많다. 신데렐라의 잃어버린 한쪽 유리구두, 콩쥐팥쥐에서 콩쥐가 두고 간 비단구두, 아버지가 놓고 간 한쪽 신을 가지고 아버지를 찾았던 테세우스 이야기가 대표적이고 대부분의 나라에서 비슷한 신화가 존재한다. <그리스 로마 신화>의 저자 이윤기는 신발은 신분 증명, 즉 자기 정체성 밝히기의 상징이라고 말한다.
신발 신화를 관통하는 핵심적인 특징은 신발 한 짝의 상실이다. 신발을 잃어버림으로써 주인공은 인생의 결정적인 전환점을 맞는다. 길을 잃어야 새 길을 만나는 것처럼 신발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자각하는 것이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될 수 있다.
우리가 회사에 취업할 때 자신의 경력을 증명하는 서류인 이력서(履歷書)를 글자 그대로 풀어보면 신발(履)을 끌고 온 역사(歷)의 기록(書)이다. 우리는 어떤 신발을 신고 걸어가는가? 혹시 남의 신발을 신고 가는 건 아닐까? 우리의 신발은 온전한가? 신발 한쪽을 잃어버린 것이 아닐까? 잃어버린 신발을 찾아 나서야 하는 건 아닐까? 그 동안 잃어버렸던 내면의 희미한 욕망과 외침에 귀 기울이는 것, 그것이 잃어버린 신발 한 짝을 찾는 것이 아닐까?
* 때마침 휴대폰 요금제 변경으로 빌려간 내 주민등록증을 아내가 분실했다. 당장 사진도 찍어야 하고 동사무소에 가서 재발급을 받아야 하고 주식 처분도 해야 하고…… 나의 사회적 정체성(Identity)은 일정기간 훼손될 것이 불 보듯 뻔한데 용돈 만원을 슬그머니 건네는 아내의 구태의연한 작태를 스폰서라는 명목으로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을 보면 나의 정체성은 이미 오래 전에 개념 상실 되었는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