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범해 좌경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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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애 15 - 무제
전시회에 가끔 가보면 제목이 “무제”인 작품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다가 무제가 되었을 수도 있고, 보는 사람에게 다 맡기겠다는 마음에서 무제가 되었을 수도 있다. 나는 응애- 15 를 10번도 더 넘게 써 보았다. 쓸 때마다 호흡이 짧아 멈추고 말았다. 무슨 까닭일까? 솔직히 좀 지루하고 싫증이 났다. 언제부터인가 마음놓고 조근조근 무릎을 맞대고 얘기할 수가 없어졌다. 의심이 생기고 보람도 없어졌다. 열정과 사랑이 좀 먹히기 시작한 것이다.
사흘이 멀다하고 세상을 떠돌던 내가 나의 동굴에 스스로를 가뒀다. 온갖 간섭을 마다않던 신문기사에도 빗장을 질렀다. 기계음은 더욱 싫어서 전원을 내려놓았다. 중증 우울증이다. 자가 진단에 90점이 넘는다. 그러나 오히려 나는 이런 내가 서서히 좋아지기 시작했다.
나는 “왕따 기질”을 타고난 것 같다. 어릴 때부터 나의 고개짓은 늘 방향이 달랐다. 그런데 오늘까지 총에 맞아 죽지않고 살아있는 것을 보면 목숨은 꽤나 소중히 보존하고 싶었나보다. 젊은날 나의 놀이 문화에는 공기총 사격이 있었는데 나는 이 놀이에서 단연 두각을 드러냈다. 표적에 집중하는 그 순간이 참 황홀했다. 아니, 어쩌면 천성따라 저절로 그리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사로잡히면 테니스를 하다가도 나비를 따라 코트 밖으로 마구 따라가곤 했으니까 말이다. 사선에서 살아남았다는 건 어쩌면 자기합리화나 엄살 덕일지 모른다. 다시 우울해진다.
오래전 소개팅으로 만났던 사람이 최근에 다시 연락을 해왔다. 사는 곳도 다르고 , 언어도 다르고, 인종 또한 달랐기에 그저 그런 정도의 관심만을 갖고 있었는데, 가슴을 무찔러 들어오기 시작하니 장난이 아니다. 어쩌면 그래서 더더욱 제목없이 고독한 시간이 필요했는지 모른다. 모든 연애의 시작은 이렇게 다가오는 것이라고...이젠 확신이 쌓여 신념으로 넘어간다.
미셸 투르니에, 나의 새로운 애인이다.
그는 지금 파리 근교의 사제관에서 혼자 살고있다. 세상의 모든 아이들을 좋아하고 아이들의 일이라면 모든 일에 우선하여 찾아가고, 함께 시간을 보낸다. 그의 손바닥만한 크기의 초록색 책 <7꽁트>는 정말 내마음에 든다. 외면만이 아니라 그 내면도 참 이름답다.
그는 철학을 공부했고 프랑스와 독일을 오가며 공부를 했고 드디어 수석을 기대하며 교수자격시험을 보았다. 그런데 꼴찌로, 떨어지고 말았다. 그래서 방송국과 출판사에서 여러가지 일을 했다. 그러다가 43세에 첫 책을 냈다. 물론 3-4년 전력을 다해서 썼고 그전에 이미 내면을 숙성시킨 동굴의 시간이 있었다. 그는 첫 책에서 다니엘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를 다시 해석했다. 그래서 전혀 다른 로빈슨 크루소를 재창조했다. 그는 우리의 생각세상을 완전히 뒤집어 버렸다. 난파한 배에서, 불타는 갑판에서 뛰어내렸다. 그의 첫 책,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은 출간된 그 해에 프랑스 아카데미 프랑세즈 소설대상을 받았다.
세상의 모든 첫사랑에 행운이 있기를 빈다. 미셸 투르니에의 첫 책은 이후 수많은 불문학 박사학위에 꼬리에 꼬리를 물며 이어진다. 방드르디는 Freiday, 곧 금요일이다. 이 무인도에서 금요일에 발견한 혼혈아인 금요일이 종횡무진 신화를 써내려 간다. 방드르디에 비하면 희랍인 조르바는 훨씬 더 그리이스적이다. 프라이데이, 방드르디는 결국 카누를 타고 섬을 탈출하고 주인공 로빈손 크루소는 이번에는 죄디 곧, 목요일을 땅에서 주워 올린다.
나는 이제 나의 새 애인을 소개하며 나의 목요일을 주워 올린다. 어렵다 어렵다고 반응하며 자꾸만 미루어왔던 나의 연애질을 이제 다시 시작하려고 한다. 동시에 조근조근 말하는데다가 내용도 어렵다고 하시는 말없는 칼럼의 독자들께도 "무제"로 다시 한번 초대장을 보내본다. 목요일 아침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