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진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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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너는 이제 강으로 가라”
두려움 숨길 수조차 없는 준엄함이었다. 눈을 뜨지 못했다. 더는 물러설 곳 없는 절벽 끝에 선 등을 떠밀었다. 아릿한 갯내음이 스쳐갔다. 파도소리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그리고 소란이 일었다.
햇볕이 부서져서 바닥까지 쏟아져 들어오는 시간. 비수 같던 달빛에 피를 토해내던 제 조상들. 붉어진 몸뚱아리.. 때가 되었다. 되돌아 갈 수도, 되돌이킬 수도 없는. 이제 거슬러 올라야만 한다.
마흔 넷. 흔들리지 않는 나이, 불혹이라던데. 내게 마흔은 ‘불혹이 되어야 하는 나이’였다. 나는 물어야 했다. 나를 키워 온 강물에 제 아비의 삶을 들어야 했고, 끊임없이 거슬러 오르라는 부름에 갈 길을 물어야 했다.
강은 ‘경계’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스튁스 강은 산자와 죽은 자의 구분이다. 한 번 건너면 다시 돌아올 수 없다. 이제 레테의 강을 건넌 자에게 이승의 기억은 더 이상 없다. 기원전 49년,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군대를 이끌고 루비콘 강을 건넜다. 그것은 로마의 국법을 어기는 일이었고,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길이었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기원전 206년, 중국 한(漢)나라의 한신이 강을 등지고 진을 쳤다. 병사들이 물러서지 못하고 힘을 다하여 싸웠고, 조(趙)나라의 군사를 물리쳤다.
1592년 임진왜란, 신립 장군은 북상해오는 왜군을 맞서 충주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쳤지만, 끝내 패했다. 그는 부하장수와 함께 강물에 몸을 던지고 말았다.
이듬해 7월, 진주 남강에서 논개는 술에 취한 왜장과 함께 목숨을 떨구었다. 백제의 몰락은 삼천궁녀를 벼랑 끝으로 몰아세웠고, 백마강에는 붉은 꽃잎들이 흩어졌다. 기억하기도 어렵게 오래 전 백수광부의 아내는 사랑하는 이를 좇아 강물에 몸을 맡겼다.
강은 치유다. 예수는 세례자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요르단 강이었다. 지금도 갠지스 강에서는 몸을 씻는 영혼들이 있다. 죄를 씻고, 새로이 태어나기 위함이다.
강은 풍요다. 이집트의 번영은 정기적인 범람이 가져다 주던 나일강의 선물이다. 패전 후의 독일에게 라인강은 젖줄이었고, 보릿고개를 넘어야 했던 우리에게 한강은 기적이었다.
강은 또한 두려움이다. 순리를 거스르면, 모든 것을 집어 삼키는 분노에 찬 용龍이다. 그리고 강은 시간이다. 흐르는 강물처럼 유년시절의 추억을 더듬어 가게도 하고, 그랜드 캐년에 지구의 연대기를 깎아 짓는 타임캡슐이기도 하다.
넘어서면 안 되는 경계.. 두려움이자 한없이 감싸 안고 도는 것.. 젖줄.. 포용.. 치유.. 제 몸이 썩어지도록 세상의 온갖 것들이 다 흘러들어 하나로 섞이고, 다른 생명들을 품어 키우는 존재. 막힐수록 감싸 안아 돌고, 막아서면 가득 채워 넘고 그렇게 세상의 가장 낮은 곳을 향해서 흐르는 江. 이 모든 것들이 하나로 이어지는 단어가 있다. 언제든 돌아가고 싶은 여인의 품... 바로 어머니였다.
때가 되면 법수치法水峙 계곡에 연어들이 모여들 듯, 흐름에 제 몸을 맡기지 않고 끊임없이 헤엄쳐 오르는 것은 오직 살아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태어난 곳, 자신의 꿈을 찾아가는 본능의 힘이기도 하다. 나는 다만 거스르지 못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