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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5월 30일 09시 56분 등록

“숙제는?”
아이는 나를 보고 배시시 빙긋이 웃는다. 다른 아이들이 아이를 거든다. 숙제를 안 해온 것이 한 두 번이냐는 둥 그런걸 기대하냐는 둥 난리다. 아이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한다.
“숙제를 해오지 않은 적이 많다는 건 알지. 하지만 제 입으로 해 온다는 것을 안 해온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어. 그건 너도 알지? 이제 어떻게 할 거야? 보충을 할까?”
아이가 민망한 듯 웃지만 그래도 내 눈을 피하지는 않는다. 쉽게 보충을 약속할 아이가 아니다. 아이는 당당하게 나에게 말한다.
“오늘 다 풀게요.”
그래 숙제 한번 안 해 온 것으로 내 뜻대로 움직여줄 아이는 아니다.
“오늘 안에? 다른 아이들은 오늘 또 문제를 풀테고, 너는 풀 분량이 더 늘어날거야. 그런데도 그걸 다 따라잡겠다고?”
“네.”
역시 쿨한 녀석이다.
“좋아. 받아들이지. 대신 그게 끝나지 않으면 다른 아이들도 늦게 가는 거야. 네가 안 끝나서 차량이 움직이지 못할거니까.”
아이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인다. 제법 무리한 분량이다. 하지만 아이는 아직도 큰소리칠 기운이 남아 있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쉬는 시간 힘껏 뛰어놀 힘도 남아 있고, 다른 아이들의 농담에 대꾸할 여유도 남아있다. 결국 아이는 끝날 때까지 목표 분량을 채우지 못했다. 끝나기 십분 전, 아이에게 다시 말을 한다.
“네가 한 약속이야. 말한 대로 아무도 못가. 네가 이걸 다 끝낼 때까지.”
아이는 그제야 다급해진다. 오 분 전. 아이가 나를 보며 짧은 한 마디를 던진다.
“협상”
“조건은? 협상의 조건이 매력적이지 않으면 받아들이지 않겠어. 뭘 제시할껀데?”
“틀린거 고치고 한 장 반 풀어올께요.”
“남은건? 그래도 아직 진도를 따라잡지 못한 건 알지?”
“학교 끝나고 바로 가방메고 올께요. 그때 풀면 되죠. 그럼 되잖아요.”
“일찍와서 한시간 보충을 하겠다고?”
“학교가방 그대로 메고 온다고요.”
“좋아. 제법 매력적이다. 다들 가자.”
아이들이 좋다고 우르르 빠져나간다.

끝내지 못할 것은 알고 있었다. 처음부터 무리한 분량이었다. 아이의 속도로는 감당해내기 힘들 분량이었고, 시간이 많이 있었지만 그 시간을 오롯이 집중하기란 아이에게는 힘든 일이었다. 그래도 아이의 큰 소리를 믿어주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제가 할 수 있다는 데 나서서 불가능하다는 말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아이의 능력을 꿰뚫고 있는 듯 무리라는 말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옛날 제갈량은 남만을 평정하러 갔을 때 남만의 왕 맹획을 일곱 번 풀어주고 일곱 번 잡았다고 한다. 맹획은 끊임없이 자신이 이길 수 있다며 큰 소리를 쳤고 이 말에 공명은 그를 풀어주어 다시금 자신과 대결을 하게 만들었다. 그 결과는 언제나 공명의 승리였지만 맹획의 큰 소리는 항상 이어졌다. 결국 마지막에 잡혔을 때 그는 자신의 패배를 인정했고, 공명은 그에게 다시금 땅을 맡긴 뒤 북벌을 도모할 수 있었다. 전쟁은 패했으나 자신에게 마음은 허락하지 않은 장수를 진정으로 굴복시키기 위해서 공명은 일곱 번을 더 사로잡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그 방법만이 다시금 자신에게 반기를 들지 않게 하는 길임을 분명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어떤 상황으로 인하여 사람을 굴복시키는 것은 어찌보면 쉬운 일이다. 나는 강사의 입장이고 아이는 원생의 입장이니 부득부득 우기면 아이는 보충을 하러 올 수 밖에 없을 터이다. 하지만 아이는 그 보충을 하면서도 분명 필요 없는데 보충을 한다고 툴툴거릴 것이다. 짜증도 낼 것이다. 잔뜩 부은 아이를 데리고 문제를 푸는 것만큼 힘든 일도 없다. 필요성을 모르는 아이는 잔뜩 골이 난 얼굴로 그 시간에 제가 할 수 있는 다른 일들을 생각할 것이고 그리되면 1시간은 별것 아닌 시간이 되고 말 것이다. 아이와 전쟁을 하여 얻어낸 한 시간의 가치가, 질이 현저히 떨어질 수 있다. 그리된다면 아이는 보충이란 정말 쓸모없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아이는 빨리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다. 제 발로 가방메고 나타나겠다고 했지만 어떤 사정으로 나를 설득하려 할 수도 있다. 주말에 숙제를 다 하지 않은 채 나타나 다시금 호기있게 다 풀어내겠노라고 말할 수도 있다. 천재같은 귀신같은 공명도 일곱 번의 기회를 주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우러러보며 따르던 그 사람도 말이다. 아이의 큰 소리를 다시 못들어줄 이유가 무엇이 있겠는가. 이제 겨우 두 세번의 큰 소리를 들어주었을 뿐이다. 적어도 네 번은 더 들어줄 의사가 있다. 물론 종래에는 내 뜻대로 아이는 자신의 분량을 다 풀어낼 것이다. 내가 아이와 실랑이하는 시간을 더 가진다 하여도. 어쩔 수 없이 나의 시간을 더 투자하게 된다고 하여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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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훈
2011.05.30 11:11:31 *.219.84.74
군사학에서 복병전은 하책이고, 심리전이 상책이다.
심리전에서 이기려면 몇수 앞을 내다보고 기다릴 줄 아는 것이 우선책이다.
아이들과 끊임없는 심리전을 하고 있겠구나.
좋은 선생님이 되려면 상처받지 않도록 멀리 내다보는 심리전의 달인이 되어야 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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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미
2011.05.31 09:58:34 *.23.188.173
어린아이들에게는 직설적으로 말하는 것이 필요하고
그나마 컸다는 아이들에게는 살짝 돌려서 원하는 결과를 얻는 것도 필요하고
사람마다 대응법이 달라지는 듯 해요~
하지만 심리전의 달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정말 절절히......
열심히 노력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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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30 13:42:11 *.45.10.22
그래 루미야 심리전.. 
원래도 심리학에 관심이 많았지만 
요새 부쩍 더 깊이 공부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훈이 오라버니 말씀처럼 심리전의 달인
미리 연습해두어서 나쁠건 없겠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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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미
2011.05.31 09:59:45 *.23.188.173
저도 심리학에는 관심이 가게 되는 듯~
뭐... 원래 공부도 조금 했지만
애들은 상대로 연습하다니 조금 더 즐거워 질 듯 하네요~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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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30 15:06:15 *.124.233.1
근데 루미는 잘 할 것 같아.
나같은 사람은 기다리지 않고 직설적으로 내뱉기 쉬운데 말이지.
사람의 마음을 제대로 움직이려면
끝까지 듣고, 끝까지 기다리는 인내심이 필요한 것 같다.
훈이 형님의 조언은 내게도 완전 유효하다.

칠종칠금 고사와 아이들과의 일의 연결은 무척 자연스럽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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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미
2011.05.31 10:03:55 *.23.188.173
연결이 자연스럽다니 다행이예요~ㅋㅋ
사실 조금 걱정을 했더라는~겔겔겔
듣고 기다리는 인내심... 정말 필요한 듯 해요
그런데 어쩜 그리 내 말을 먼저 하고 싶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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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30 21:39:48 *.111.51.110
루미는 카리스마 넘치는 선생님같아~
아이들 이야기로 포커스 잡은겨?

칠종칠금이란 사자성어를 루미덕분에 알았다.
아~ 이 무식함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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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미
2011.05.31 10:10:31 *.23.188.173
처음에는 가는 목소리에 깜찍한 선생이었는데......
아~~~ 시간이 이렇게 만들었답니다~ㅋㅋㅋ
제가 오라버니꼐 알려드린게 있다니 영광임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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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경
2011.05.31 11:24:07 *.35.19.58
나도 이 전술을 아이들에게 써야하는데 이 놈의 성질 때문에 안되네.
루미 선생님에게 한 수 배우고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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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미
2011.06.01 05:44:34 *.23.188.173
저도 많이 욱 한답니다~ㅋㅋㅋㅋ
그래도 따라주는 아이들이 고마울 때도 있을만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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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
2011.05.31 12:20:40 *.142.255.23
루미선생님은 또 다른 카리스마가 있네.. 멋있다! 왠지 아이들이 좋아할 것 같아. 초큼은 무서워할 것 같기도 하지만.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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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미
2011.06.01 05:47:49 *.23.188.173
오옹~ 카리스뫄~~~~
하나도 안 무서워 해....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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