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양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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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회사에는 두 개의 노동조합이 있다. 하나는 기존의 민주노총 소속 발전노조이고, 다른 하나는 민노총을 탈퇴한 동서노조이다. 조합원 비율은 25 대 75 정도로 동서노조가 많다. 얼마전 언론화되어 국회에까지 공개되었던 '플랜B'라는 문건에 따르면, 동서노조는 회사의 작품이라는 것이 공식적으로 밝혀졌다. 사실 '플랜B'라는 문건까지 갈 필요도 없이, 현장에서는 모두들 새로운 노조 탄생이 회사의 분열 작전이라는 것을 잘 안다. 노골적인 회유와 압박을 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사고과와 승진, 사업소이동 등 회사가 칼자루를 휘둘러 대부분의 직원들이 기존 노조를 탈퇴하였다. 언론화 되기 전에는 90%이상이 탈퇴했었다. 잘못됐다는 것을 알면서도 '조직사회라는게 그런거지' 하며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따라가는 분위기가 된 것이다.
과반수를 넘긴 동서노조는 얼마전 회사와 단체협약과 임급협상에 도장을 찍고, 현장 인력 감축과 퇴직연금이라는 바람을 불고 왔다. 몇 일전에는 모든 엘리베이터 앞에 CCTV까지 설치되었다. 직원들은 더욱 움츠러들었다. 조합 집행부인 나조차 연구원활동을 핑게로 지켜만보고 있는 상태다. 할 수 있는 것도 별로 없고, 괜히 나섰다가 혼자 피해볼 필요 없다는 생각에서다. 그동안의 회사생활을 통해 절실히 느낀점은 조직의 힘은 개인의 힘보다 월등히 세다는 것이다. '이래도 한 세상 저래도 한 세상'의 현실주의적 사고와 '나만 아니면 돼!'라는 버라이어티 '1박2일'의 유행어가 사람들의 사고방식이 되었다. 이렇게 생각없이 적응하며 살아온게 개인적으로도 오늘의 일만은 아니다. 학창시절엔 "왜 이 과목을 공부해야 하고, 객관식 시험으로 등수를 매겨야 하지?" 라는 근본적인 질문은 원천봉쇄 되었다. 전공과 대학을 선택할 때도 대충 점수에 맞추어 들어갔다. 취업을 하려면 학점을 따야하고 토익 점수가 높아야 하니, 별 의문없이 점수에 매달렸다. 세상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누가 이런 시스템을 만들었는지 모르지만 살아남으려면 주어진 일은 '뭐든 열심히' 해야 했다.
갑자기 어디선가 들었던 그 사람의 얘기가 떠올라 찾아보았다. 그는 고등학교도 졸업 안하고 친척의 도움으로 취직해서 5년을 다녔다. 일하기는 싫어하는 그를 회사는 전근을 보내려고 한다. 그때 주변에서 "친위대 들어올래?"라고 묻자, 생각없이 "그러지 뭐"라고 대답한다. 이 사람은 유대인 600만명을 가스실로 보낸 독일 친위대 중령 '아돌프 아이히만'이다. 이왕 밥벌이를 할 바에야 승진하는게 낫다는 보통의 생각을 가진 아이히만은 맡은바 업무를 최선을 다해 수행한다. 게다가 남들 다 받는 뒷돈도 받지 않는 윤리의식까지 보여준다. 그도 사람인지라 히틀러가 제시한 해결책이 '가스실 학살'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노동의 기쁨을 상실했다고 회상했다. 그러나 그는 한 집안의 가장(家長)이었기에 실직을 당할 수는 없었다. 실직 안 당할꺼면 제대로 일해서 승진하는게 좋다. 그는 이 모든 과정을 합법적으로 처리하려고 최선을 다했다고 한다. 이 정도면 유대인학살이 시대의 조크Joke가 된다. 이 평범한 직장인은 인류 최대의 '학살'을 저질렀다. 훗날 아이히만은 이스라엘 재판정에 서서 사형을 선고 받고 교수형에 처해진다. 그런데 이 직장인의 행동이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있는 현대인이 얼마나 될까? 아이히만의 이런 사연을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이란 책에 쓴 '한나 아렌트'는 "그는 그리 대단한 사람이 아니었다"고 말한다. 그는 그저 처음부터 악마로 낙인찍혔을 뿐이지, 평범한 사람에 불과했다. 그렇다면 그의 잘못은 뭘까? 그 잘못의 시작은 '생각없이 살았다는 것'이다. 최소한 남을 해치는 것과 직장 상사의 명령 중 어떤 것이 우선인지 생각했어야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아이히만이 열심히 일하던 그 유대인 수용소에서 극적으로 탈출에 성공한 할아버지의 책이 요즘 인기다. 그 분은 프랑스의 레지스탕스였고, 현재 93세의 '스테반 에셀'이다. 그의 짧은 책, <분노하라>라는 연설문이 프랑스에 이어 우리나라에서도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무관심하게 있지 말고 분노를 표현하고, 현실에 저항하라!"는게 이 책의 메시지다. 그런데 '분노'는 감정이고, 잘 살펴보면 이 감정은 '생각'이라는 사고과정을 거쳐 나온다. 그가 분노하는 이유는 이 사회가 국제 금융시장의 독재에 휘둘리고 있다고 생각해서이고, 우리 개인은 독재로부터 자유롭게 살아야 한다는 의지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분노하기 전에 깊게 사유(思惟)하는 것이다. 최소한 행동하기 전에 스스로의 의지로 '생각'해야 한다. 고대 철학자 소크라테스와 현대의 러셀이 말했듯이 "인간에게 성찰하지 않는 삶은 정말로 살 만한 가치가 없는 것"이다. 난 레지스탕스가 아니라고 생각하기를 회피하지 말자. 나도 모르게 아이히만이 되지는 말아야 하지 않겠는가. 우린 대부분 조직에 빌붙어 생계를 유지하고 있는 월급쟁이에 불과하고, 현대의 돈 버는 조직들이 나치보다는 아니겠지만 착한 마음을 가졌을리 없다. 아니 마음 자체가 없다. 그러니 뭐든 열심히 하기 전에 끊임없이 자신의 행동을 사유(思惟)하자! 문제는 나만 열심히 한다고 해결할 수 있는게 아닐 수 있다. 물론 밥벌이라는 문제에 부딪히면 모든 사유가 힘을 잃는다는 것을 체험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밥만 먹고 사는게 사는건가?" 라고 물을 수 있다면, 행동할 수 있는 때가 올 것이다. 그 때를 기다리며 사유의 칼을 갈아보자.
<칼럼사진/양경수>
녹도 필요하다. 예리함 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은 언젠가 말할 것이다 - '너는 너무 어리다'
고통도 하나 보다는 둘이 견디기 쉽다.
하나는 너무 아퍼 굴복하게 하고, 둘은 생각하게 하기 때문이다.
눈과 마음이 시들지 않기를 원한다면
태양을 향해도 그늘 속을 걷도록 해라.
그 길이 네 길이 아니라면 어째서 그곳에서 그리 헤매고 있느냐 ?
네 길이라면 어째서 행동하지 않느냐 ?
네 길이 무엇인지 아직 찾지 못했다면 길가다 만난 옆 집의 송사에 연루되어 너무 오래 매여 있는 것이 아닌지 물어 봐라. 착하기만 하고 옹졸한 넋에는 아무 것도 머물 수없다. 거기는 선도 악도 서 있을 곳이 못된다. 부끄러움 만이 있을 뿐이다. 무엇이 자유인지 아느냐 ? 자기 자신에게 더 이상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 것.

당신은 다른사람에게 비인간적인 행위를 가할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 없다. 92%
결과는 35%만이 거부하고
나머지 65%는 스스로 불합리하다 생각했던 행위를
타인의 죽음 위에서도 행하게 된다라는 것이다.
<권위>에 대해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밀그램의 실험이다.
65%의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내가 왜 그런 무자비한 일을 했을까요?"
"제 자신이 이해가 안 갑니다."
"시켜서 한 것 뿐이에요"
우리는 스스로 뒤집어쓴 어떤 것의 지배를 받고 있는 듯 하다.
메트릭스의 가상과 현실은 어느 것이 진실인지 헛갈릴 때가 많다.
어떻게 사는 것이 진짜의 세상을 사는 것인지,
스스로 뒤집어 쓰고 있는 헛개비 같은 것을 언제쯤 치워버릴 수 있는 것인지.
너의 고민과 사유를 응원한다. 늑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