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철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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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정의 북’을 울려라.
일어나고 또 일어나라! 양이 사자가 될 때까지!
2. 목표
100일에 이어 나는 “새벽(04시30분 ~ 06시30분) 글쓰기”를 계속하겠다.
숨을 고르고 다시한번 내 붉은 피의 온도를 높이리라.
이제 레벨을 높여 나는 100일(20고개) 동안,
첫째 20권의 책 읽기와,
둘째 10개의 꼭지 글을 쓴다.
그리고 첫 책의 초고를 완성한다.
3. 중간목표(20고개)
20고개 |
예정일 |
목 록 (도서목록은 꼬리물기에 따라 변경가능) |
마침일 |
1 |
~ 9.10 |
낯선 곳에서의 아침 |
9.8 |
2 |
~ 9.15 |
유토피아 |
9.14 |
3 |
~ 9.20 |
신과 나눈 이야기 |
9.20 |
4 |
~ 9.25 |
필살기 |
9.22 |
5 |
~ 9.30 |
유능한 관리자 |
9.27 |
6 |
~ 10.5 |
역사를 바꾸는 리더십 |
10.2 |
7 |
~ 10.10 |
프로페셔널의 조건 |
10.7 |
8 |
~ 10.15 |
행복의 건축 |
10.12 |
9 |
~ 10.20 |
신곡 |
10.14 |
10 |
~ 10.25 |
블루오션 전략 |
10.17 |
11 |
~ 10.30 |
풍요한 사회 |
10.21 |
12 |
~ 11.4 |
헝그리 정신 |
10.31 |
13 |
~ 11.9 |
사모아의 청소년 |
11.3 |
14 |
~ 11.14 |
카오스의 아이들 |
11.9 |
15 |
~ 11.19 |
사기열전 |
11.11 |
16 |
~ 11.24 |
나와 너 |
11.16 |
17 |
~ 11.29 |
장자 |
11.20 |
18 |
~ 12.4 |
남자의 인생지도 |
12.2 |
19 |
~ 12.9 |
우리 같은 영웅들 |
12.10 |
20 |
~ 12.14 |
기업혁명 |
12.13 |
4. 예상되는 난관과 극복방안
① 단군의 여정 100일 수행 때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그러나 1번의 지각이 있었다. 그것을 돌이켜보니 역시 그날 약간의 긴장을 늦추었던 날이었다. 익숙한 그 놈은 그 날을 바로 타고 들어와 나를 붙들었다.
한 순간도 긴장을 늦추지 말 것.
������ 돈키호테 처럼 단순하게 갈 것... 무념정진.
② 4회차에는 추석명절로 리듬이 깨질 우려가 있다.
������ 현지에서 지혜롭게...
5. 목표달성 시 일어날 긍정적인 변화
첫째 ‘꿈지기의 겨드랑이’(첫 책) 초고 완성
둘째 글의 자신감 획득
셋째 삶의 터닝포인트가 된다.
6. 목표를 달성했을 때 나에게 줄 보상
: 홀로 남도여행을 떠난다.
“매일 하면 오래 가고, 함께 가면 멀리 간다.”

단군이를 통한 새벽글쓰기는 나의 천복을 쫓는 행위이다. 의식이고 예배다. 하루의 삶에서 물리적 수면 시간을 줄였다. 방법은 새벽 단잠을 없애는 것이다. 그 시간에 나는 내 모습을 그렸고 꿈을 꾸었다. 매일새벽은 내가 꿈을 꾸고 그것을 이루어 가는 시간이다. 하루 중 두 시간을 온전히 나에게 끌어다 놓았다.
새벽에 깨어있음으로 수면의 절대시간을 줄이고 새벽을 충만한 즐거움으로 채우는 것은 나를 찾는 물리적 시간의 증가 이전에 정신의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것이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자지 못하는 것에 대한 아쉬움조차도 사라졌다. 그렇게 구한 새벽의 두 시간은 온전히 내 손으로 들어왔다. 어떻게 쓰든지 내 것이다. 누구도 이 경계를 넘어오지 못한다. 즐거움과 함께 서서히 자신감으로 충만해졌다.
창의성은 자유로움에서 비롯된다. 형식과 원칙을 버려라. 틀 속에 가두어 놓은 생각은 창의적일 수 없다. 길들여진 자유, 길들여진 힘은 자신을 넘지 못한다. 자신의 틀조차도 불필요한 것일 뿐이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나’라는 틀은 얼마나 견고하고 높은가.
자유롭게 바람에 떠밀려 닿는 곳에서 사냥을 하고 몸을 누이기 위하여 고민하면서 자신을 보호하는 능력은 내 안의 거친 야생성으로 키워진다. 이것이 강해지는 것이고 자신을 찾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창의적 방법들이 창안될 것이다. 자기를 세워 당당하게 기존의 방법과 규칙에 맞서게 해야 한다.

지식기반사회의 본질은 기술력에 달려 있다. 이 기술을 통제하는 자들은 조직의 5% 내외이다. 이들이 기업 내 핵심기술을 독점하고 정보의 등급을 만들어 낸다. 이들은 걸러진 정보를 일반에 흘려보내고 고급정보는 자신들의 손에서 통제한다.
당신이 회사에서 바쁜 이유는 무엇인가? 나만이 그 일을 할 수 있어 바쁜 것인가? 내가 없어도 내 일을 누군가 대신할 수 있다면 그 일은 기계화 하여도 될 것이고, 컴퓨터를 시키더라도 해 낼 것이다.
회사에 충성하는 조직의 95%는 아직 도래하지 않았지만 컴퓨터와 그들을 사이에 두고 고민하는 보이지 않는 손에 자신의 밥그릇의 운명을 맡긴 것과 다르지 않다. 그들의 충성은 자신의 시간으로 빵을 맞바꾸고 있는 것이다. 그들에게 아량을 기대하지 마라. 더 심하게 말하자면 결국 그들의 충성은 5%의 위치에 있는 자들만 더 견고하게 해 줄뿐이다.

기업에게 좋은 프로세스란 무엇인가? 효율성과 효과성 사이에서 어떤 것을 선택하는가는 CEO의 몫이다. 부하 사원의 외근이 눈에 보이지 않아 생기는 불안과, 사무실에서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으나 당신의 눈을 피해 시간만 때우고 있는 창조적이지 못한 평범한 효율성 사이의 선택의 문제이다. 어떠한 것을 선택하든 그것은 관리자의 몫이겠지만 좋은 프로세스를 위해서 때론 마음의 불안을 극복하는 자세도 견지되어야 할 것이다.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적절한 효율성에서 얻는 높은 효과성이다. 선택의 문제 이것은 개인에게도 마찬가지다. 하루를 어떻게 살 것인가? 개인에게 좋은 프로세스는 하루라는 시간의 기초단위에 어떠한 프로세스를 갖고 사는가가 좋은 프로세스를 결정짓는 분수령이다. 이것은 시간과 비용관리의 문제이기도 하다.
피차간의 서로 다른 연봉의 차이가 월급쟁이 인생을 결정지을 만큼 큰 차이를 갖지는 못하다. 연봉보다 우선적으로 개선되어야 할 프로세스의 단적인 예는 퇴근 후 누구를 만날 것인가? 어떠한 것들을 할 것이며, 귀가는 몇 시에 하게 되는가? 이것이 한 달에 얼마나 반복되는가! 이다. 이러한 것들의 선택방식이 개인의 삶의 프로세스가 된다. 앞의 예가 갖고 있는 긍정성과 부정성이 자신을 만들어내는 조건들이다.

전문가란 무엇인가? 그들은 고객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자들이다. 입으로만 외치는 고객만족과 혁신이 아니라 고객의 입장에서 불편함을 생각하는 입체적 사고를 한다. 무엇이 불편하게 만드는지를 생각하고 고객의 방식에서 접근하려는 자세를 가진 자이다. 고객이 넉넉하지 않은 지갑을 열 때 같은 고민을 여러번 반복한다는 고객의 마음을 아는 자이다. 그 마음을 헤아려, 쪼개고 쪼갠 돈으로 선택한 상품의 실패 확률을 낮추고자 고민하는 자이다. 혹 잘못된 선택으로 마음 아파하고 후회 할, 순진함을 가진 고객의 마음까지 헤아리려 노력하는 자가 전문가다.

난 'ISTJ' 이다. 이것은 융의 분석심리학을 바탕으로 한 MBTI의 16가지 성격유형중 하나다.
상상보다 이성이 앞선다. 상황을 사실적이고 체계적으로 기억하려는 성향이 있다. 신중하고 책임감이 뛰어나다. 그래서 가끔 책임감에 스스로 매이게 된다. 그것은 곧 자신이 자유롭지 못하게 되는 원인이기도 하다. 살다보면 얼렁뚱땅 넘길 일도 많이 있으나 그것이 참 쉽지 않다.
그때그때 풀지 못하고 쌓아둔다. 그리고 한번에 푼다. 이것은 긍정의 감정이든 부정의 감정이든 그렇다.
여러사람이 모인 장소에 가면 에너지를 빼앗긴다. 나서지 못하고 상황을 그저 즐긴다.
말보다 글에 익숙하고 순발력보다는 지구력을 즐겨 사용한다. 내가 단군이를 흔들림없이 하는 것도 생각해보면 이런 기질이 있어서가 아닌가 싶다.
난 변질 'ISTJ'이다. 상상이 앞서기도 하는데 그것은 내 꿈을 그릴때이다. 풍광을 그릴때 난 상상이 앞섰고 그 길로 걷고 있다. 상상이 좋다. 해야할 일에 대해서 때론 나몰라라 하고 은근 뒤로 빠진다. 힘에 부치고 쉼이 필요할 때 그렇다. 일부러 교통신호를 어겨본다. - ISTJ에게는 쉽지 않은 행동이다. 우리는 법과 약속, 체계 뭐 이런 것은 눈 감고도 지킨다...^^ (다들 그러나...) - 잠깐 모든 것을 놓아둔다. 출근하다 돌연 연차휴가를 낸다. 그리고 조조 영화를 보러간다던지 계양산으로 빠져 버린다. 이것은 용기다. 그러나 한번 두번 해보면 은근 중독된다. 한량의 기질이 있어야 한다. 내가 없어도 크게 대란이 일어나지 않는다. 이게 좋은건지 나쁜건지는 모르겠다. 나를 찾기 위한 노력의 결과이다. 뜬금없이 자유롭고 싶은 마음. 오로지 그것을 잠깐 즐길뿐이다. 곧 현실로 돌아오니 문제없다.
아직도 훈련되지 못한 그러니까 변질이 덜 된 것이 여러사람이 모인 장소에서다.
에너지를 빼앗긴다. 풍덩 빠지지 못하고 살짝 살짝 손도 담갔다, 발도 담갔다만 한다. 언젠가는 풍덩 빠져보리라.
난 ISTJ 이다.

자신의 삶은 스스로 구원해야 한다. 우리가 뽑아준 정치 리더들이 나를 구해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거의 확실하다. 그럴 수 밖에 없는 피하지 못할 이유는 그들 역시 스스로 자신을 구원해야 하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그들은 얼마나 자주 스스로 입증하고 있는가! 그들이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저지른 일들은 언론에 얼마나 많이 다루어지고 있는가. 그들 역시 자기 몸하나 구제하기 어려운 시대이다. 경제학자나 사회운동가 역시 그렇다.
이론으로는 허기를 달랠 수 없다. 자기경영이 필요한 이유다. 앞에서 언급한 사회의 권력과 책임을 짊어진 사람들이 나를 구원해주기를 기대하다 보면 내 순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이것이 스스로를 구원해야 하는 명백한 이유다. 더 이상 누구의 손에도 내 밥그릇을 채워주기를 기대하지 마라.

사회인들이 갖고 있는 재산이 다르고 누리는 권력이 다르다면 법이 평등해야 하는가? 토마스 모어는 그럴 경우 처음부터 적용될 법은 차이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회적으로 누리는 권력이 다르다는 것은 사회에서 받는 이익이 다르다는 것이며 이것은 사회에 기여하는 바가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동일법에 대하여 차등적 무게를 두자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법의 '합리적 차별'이라 하고 싶다. 공평의 개념에 가깝다. 법이 평등하게 적용되려면 사회적 구성원들의 조건도 동일해야 한다. 사회적으로 누리는 혜택도 같아야 한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그러니 이제는 법의 합리적 차별을 고려해야 한다. 그것은 한 수준 높은 사회라 생각한다. 게임의 규칙이 동등하게 적용되어야 할 스포츠에도 합리적 차별은 존재한다. 그것은 스포츠에서 advantage룰의 모습으로...

세번째 고개의 시작을 앞두고...
강물이 끊임없이 흐르듯 내면의 욕망이 끊임없이 흐르도록 하라. 욕망은 강물과 같은 생명력을 갖고 있어야 한다. 흐르는 강물 주위로 사람들의 삶은 모이고 발전했다. 물은 인류의 형성과 발전의 중심이다. 물이 있는 곳에서 생명이 시작되듯 한 번도 멈추지 않은 강물은 사람들에게 삶의 터전을 허락하였고 발전을 허락하였다. 변함없이 매일 흐르는 것은 강물의 본모습이다. 그것이 생명이다. 이처럼 욕망의 강물은 내면에서 흐른다. 그것이 멈추지 않도록 해야 한다.

우리의 삶이란 얼마나 다양한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인생의 길을 ‘이 길 아니면 저 길’ 정도의 이분법적 차원에서 접근하려 한다. 물론 그렇게 된 데에는 이미 우리가 그렇게 교육받았고 또 그것이 맞는 것으로 아무 장애없이 생각하도록 사회가 고착화 된 것도 한 몫 한다. 그러나 인생이란 얼마나 다양한가. 예를들어 직업의 세계를 보자. 얼마나 많은 일들이 직업이 되어 있는가. 저마다 그러한 일들을 통해서 삶을 살아가고 있으니 인생의 길은 이것 또는 저것의 두 가지 길이 아니다.
야구선수 중에도 던지는 것을 일로 하는 선수가 있는가 하면 그것을 받아주는 것이 일인 선수도 있다. 꽃 장사도 살아있는 예쁜 꽃을 파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꽃을 죽여 말리는 것을 일로 하는 사람이 있다. 직업을 통한 세상은 다양하다. 그것을 보는 눈과 본 것을 느끼고 생각하는 훈련이 되어 있어야 한다. 교육이 가야 할 길이다. 느끼고 생각하는 것은 경험이다. 이 경험을 표현할 수 있을 때 삶의 다양성을 수용할 수 있다.

나는 느끼기 시작했고 그 느낌을 최대한 잃지 않으려고 온 몸을 사용하여 구석구석으로 잘 저장해 두려하였다. 느낌은 곧 체험이다. 체험을 통해서 느낀 것이야말로 내 것이 된다. 그리고 말과 글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다. 인간의 문화가 발전한 것은 말과 글의 힘으로 가능하였다. 느낌의 저장과 표현이 세상을 변화시켰다.
그러나 이미 신은 우리가 사용하는 말의 힘을 알고 계셨을까? 그래서 언어에 장벽을 세우고 경계를 나눈 것인가. 그것마저 없었다면 세상은 자유로운 느낌의 공유와, 끊임없이 발전하는 과학적 소통으로 해서 더 큰 발전을 이루었을 것이다. 신은 넘어선 안 될 영역까지 오는 것을 원치 않았던 것이다. 신은 인간과의 경쟁을 원하지 않았는가 보다.

113일차 단군일지 (9/18) :
욕심을 간단히 하자면 ‘바라는 마음’ 정도가 된다. 무언가를 바라는 마음이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런데 우리는 욕심 하면 부정적인 느낌이 더 많이 드는 것은 왜 일까?
욕심은 나에게 없는 것, 즉 자신의 ‘결핍’에 대한 반증이기도 하다. 결핍. 나에게 없는 것이다 보니 그것을 채우려 하는 방법이 중요하다. 생각해보면 채우고자 하는 마음에는 반성, 성찰, 노력 등을 통하여 자신의 부족한 내면을 채우고 몸을 바로 세우고자 하는 발전적 채움(欲求)이 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이미 다른 곳에 자리하고 있는 타인의 것으로 나를 살찌우기 위해서 내 소유로 채우는 타인을 아프게 하는 채움(慾求)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욕심하면 부정적 느낌을 더 많이 떠올리는 데에는 전자의 발전적 욕심보다는 후자의 개인의 주관에서 시작된 타인을 아프게 하는 욕심을 더 많이 보아 온 연유는 아닐까?

살면서 무언가를 하고자 할 때‘기회가 평등’하여야 하고‘조건이 평등’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나서 얻는 결과가 다르다면 일정 개인의 책임일 수 있다. 그러나 출발이 다르고 조건이 달라서 얻게 되는 결과의 불평등과 빈곤은 남 탓하기에 얼마나 좋은 핑계꺼리가 되겠는가. 이것이 국민들이 정책을 신뢰하지 못하는 이유가 된다. 조건의 평등이란, 같은 사회구조 속에서 ‘갖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보다는 반대로 무언가를 소비할 수 없는 상태’에 놓이는 것. 즉 ‘갖고 있지 못하고 이미 박탈된 상태’의 문제이다. 아무리 훌륭한 정책이라도 신뢰받지 못하는 정책은 진정성을 의심받을 수밖에 없다. 그 결과로 국민들은 결국 상대적 빈곤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대중은 평범하다. 대중이 모두 특별해 질 수는 없다. 정책이 평범해야 하고 일반적이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창의성은 자유로움에서 비롯된다. 형식과 원칙을 버려라. 틀 속에 가두어 놓은 생각은 창의적일 수 없다. 길들여진 자유, 길들여진 힘은 자신을 넘어서지 못한다. 자신의 틀조차도 불필요한 것일 뿐이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나’라는 틀은 얼마나 견고하고 높은가. 자유롭게 바람에 떠밀려 닿는 곳에서 사냥을 하고 몸을 누이기 위하여 고민하면서 자신을 보호하는 능력은 내 안의 거친 야생성으로 키워진다. 이것이 강해지는 것이고 나를 찾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창의적 방법들이 창안될 것이다. 자기를 세워 당당하게 기존의 방법과 규칙에 맞서게 해야 한다.

한 가지 일을 오래 했다거나 한 직장에서 오래 근무했다는 것은 칭찬 할만하다. 20세기까지는. 그러나 다른 한편으론 이미 그는 습성에 젖어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 습성이 일관성의 모습이나 또는 자신의 원칙, 틀 정도로 고착화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것은 절대로 바뀌지 않는다. 적어도 내,외적인 강제나 불가항력적 환경의 변화없이는 변하지 않는다. 더 부정적으로 말하면 그것은 게으름이고 정신적 불균형 즉 성장정체이다. 이것을 진단하고 빠르게 수용하여 변화하려는 노력이 없으면 그의 도태는 예정된 것으로 보아도 무리는 아니다. 단지 도래하지 않았을 뿐이다. 왜냐하면 세상은 앞서 변하고자 하는 자들로 꽉 차 있고 그들로 해서 세상은 조금씩 변해가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안정되다 생각되고 알량한 것으로 큰소리 칠 수 있을지 모르나 과학과 기술의 발전으로 우리의 인생은 길어진 반면 직장과 현업에서의 수명은 지금도 짧아지고 있다.

118일차 단군일지 (9.23) : 연휴 마지막날 긴장을 풀어봅니다.
생각은 글로 표현하고 언어로 꺼내는 순간 사실이 된다. 생각은 머릿속에 담아 두었을 때 더 이상 자라지 못한다. 고인 물이 썩듯이 생각 역시 그렇다. 그러나 그 생각을 글로 표현하기 위해 펜을 잡고 공책을 펼치면 묵은 생각일수록 미끄러지듯 글이 되어 나간다. 생각은 표현할 때 더 풍성해지고 다듬어진다. 무질서했던 것들이 서서히 앞과 뒤, 길고 짧음으로 질서를 찾게 되고 이내 문장과 글로 정리되는 것을 확인한다. 생각이 글이 되고 글이 글을 이끌어간다. 내가 자주 다니는 연수도서관의 지하 계단에는 나를 자극하는 글이 붙어있다. “글은 품으면 덕이 되고 밖으로 꺼내면 업적이 된다” 이글은 나를 자극하였다. 내가 글을 쓰는 동안 내내 나를 자극하고 이끌어 갈 것이다.

인간의 발달 특성을 연구한 학자들 중에 에릭슨은 인간의 생애를 8단계로 특징지었다. 그 중 청소년기는 다섯번째에 해당된다. 에릭슨의 주장대로 보면 청소년기는 대상관계가 1차관계에서 2차관계로 확대되기 시작하는 단계이며 이때 자아정체감이 형성된다고 보았다. 자아정체감은 전단계인 아동기때 부모나 친구로부터 받는 동일시의 경험에서 시작된다. 청소년기 자아정체감의 형성은 스스로 자신을 느끼며 형성되는 정서적 발달이다. 그러나 또래집단에게서 받는 영향으로 사회적 발달이 동시에 일어나기 때문에 외부으이 조건들로부터 자아정체감의 혼란이 동반되기도 하다.

네째 고개를 넘는다. 그렇게 단군이를 시작한지 벌써 120일. 올해의 1/3을 단군이로 단련하고 있다. 무엇을 원하는지 알것 같기도 하고 모를 것 같기도 하다. 나는 무엇이 되고자 함인가! 심연에서 걸어나와 영웅의 길을 걷고자 했고, 나는 대견하다 생각했다. 무질서에서 체계를 잡아가고 혼란에서 질서를 찾아, 내 길로 들어섰다. 이제 달리면 된다. 그러나 속도를 경계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풍광을 즐길 것이다.
그렇게 생각을 하고 봄, 여름, 그리고 가을을 맞고 있다. 그리고 시간은 나를 겨울의 어느날로 데려다 줄 것이다. 꿈을 꾼다. 내모습. 또 다시 불안이 찾아든다. 그러나 그 불안은 무언가 예정된 긍정의 불안이고 에너지가 나온다. 세상의 모든 기운은 균형을 맞추려는 속성이 있다고 했던가. 에너지가 나갔으니 그 자리에 다시 에너지가 들어오리라. 흔들리지 말자. 그리고 이 시간들을 기억하자.
5일에 책 한권과 꼭지글 하나. 버겁다. 그러나 그 시간이 추억되리라. 즐겨라...

관리자의 자리가 힘든 것 중 하나는 팀원들의 숨은 재능을 찾아내는 일이다. 그리고 찾아낸 재능을 팀내 역할과 연결해주는 일이다. 그러나 이것이 쉽지 않은 이유는 팀원의 숨은 재능을 찾아내는 것도 어려운 일이지만 그 이전에 팀원 자신조차도 자기의 재능을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하다는 것에 있다. 팀원의 재능을 찾아주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자신감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자신이 재능 있다고 생각하고 맡는 일과 나에게 이런 재능이 있을까 의심을 품고 맡는 일의 차이는 과정보다 결과에서 더 큰 차이를 나타낸다.

'유능한 관리자' 이 책은 마커스와 커트의 공저 'First, Break all the rules'의 개정판이다. 몇년전에 이 책을 읽었다. 그리고 개정판으로 나온 유능한 관리자를 어제 마쳤다. 내용은 크게 바뀐것이 없고 목차가 서로 바뀌었다. 그러니 같은 책을 두번째 본 것이다. 그런데 처음 읽었을때의 느낌과 이번의 느낌이 전혀 다르다. 처음에는 '쿵'하는 느낌으로 읽었던 생각이 든다. 전통적으로 갖고 있던 관리자의 개념과 많은 부분에서 다른 주장들이었기 때문이다. 정서가 틀려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수용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내용의 실제성과 현실성에서 그러했다. 이번에는 그 느낌보다는 내용의 수용도가 더 높았다. 그 동안 세사이 바뀌고 우리나라의 기업문화도 바뀌고, 또 내가 변한데서 오는 느낌이다. 역시 새롭다.
열정이란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다. 끊임없이 차오르는 생각을 끊임없이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열정이란 일차적으로 끊임없이 차오르는 생각에서 시작되고, 행동은 열정의 이차적 산물이 된다.

流水之爲物也 不盈科不行(유수지위물야 불영과불행)
흐르는 물은 웅덩이를 채우지 않고는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법이다.
- 맹자, [盡心 上]
'불영과불행'(不盈科不行)도 우리가 특히 명심해야 할 좌우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科는 학과學科라고 할 때의 그 과입니다. 원래 의미는 '구덩이'입니다. 물이 흐르다 구덩이를 만나면 그 구덩이를 다 채운 다음에 앞으로 나아가는 법이지요. 건너뛰는 법이 없습니다. 건너 뛸 수도 없는 것이지요. 첩경捷徑에 연연하지 말고 우직하게 정도正道를 고집하라는 뜻입니다. 무슨 문제가 발생하고 나면 그제야 "기본을 바로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고 "원칙에 충실하라"고 주문하기도 합니다. 그동안 건너뛰었다는 뜻이지요.
신영복, [나의 동양고전 독본, 강의] p. 245
'불영가불행'이라는 말이 있는데, 물이 흐르다 구덩이를 만나면 그 ‘구덩이를 다 채운 다음에야 앞으로 흘러가는 것’을 뜻한다. 건너 뛰고, 지름길에 연연해 하지 않고, 정도를 걸으며 우직하게 앞으로 나아가는 고집이 바로 훌륭한 전문가에 이르는 방식임을 알아야 한다. 기본을 중시하고 원칙에 충실한 독학이 스스로를 필요한 인재로 만들어 가는 방식이다.
구본형, [사람에게서 구하라] p. 166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저를 정신 차리게 한 명언입니다. 일어날 일이라면 반드시 일어나겠지요. ^^

나의 삶의 전환 역시 어느 날의 예기치 못한 질문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새벽을 다듬기 시작하였고, 단군 프로젝트를 통해서 분명 나는 달라졌다. 그것은 하루라는 시간이 주는 의미의 변화에서 시작된다. 그러면 종국에 나는 무엇에 이르고자 함인가? 그 이전에, 단군 프로젝트를 통해서 얻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간단하다. 세상에 스스로 서기 위한 힘을 키우는 것이다. 내 힘으로 직립하고 보행하기 위함이다. 무엇이 되고자 하는가의 모습을 분명하게 그리고 있지 못하면 단군이의 시간도 그리 선한 동기는 못될뿐더러 경제적으로 유용한 행동이라 할 수 없다. 그러므로 목표에 대한 분명한 그림을 갖고 있지 못하면 어떠한 동기적 행동도 선하다 할 수 없다.

조직이 발전하기 원한다면 두 가지를 개선해야 한다. 첫 번째는 시스템을 바꾸어야 한다. 변화될 결과에 대하여 불투명하고 조직의 안전을 담보할 수 없지만 나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이다. 근본을 바꾸지 않고 도입하는 방침들은 모래성을 쌓는 것과 같다. 그리고 그에 맞는 사람을 골라 태우는 것이 두 번째다. 이것은 짐 콜린스가 동의한 주장이기도 하다. 그러나 보통의 조직들은 조직의 안전을 담보하고 나서 변화를 꾀하려 하다 보니 시스템은 그냥 두고, 먼저 사람을 바꾸는 방법을 선택한다. 그러니 저항이 따르는 것 아닌가.

127일차 단군일지(10.2) :
‘필요는 충족될 수 있지만 욕망은 결코 충족되지 못한다.’ 프랑스의 사상가 자크 라캉의 말이다. 시장을 형성하고 그것을 움직이는 힘의 뿌리는 욕심에 있다. 시장은 자신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 모여드는 곳이다. 필요함에서 시작된 속내는 시장에서 표현된다. 그리고 그 터 위에서 노출되는 파는 자와 사는 자의 간격은 영원한 평행선이다. 서로는 상대를 추켜세우지만 그 진짜는 서로를 유혹하거나 상대의 마음을 훔쳐 자신의 목적을 채우는데 있다. 본래 필요는 순수하다. 그것은 절제가 가능하고 다스려 질 수 있으나 필요함에서 출발한 욕심은 다스려지지 않는다.

수업이 있는 날이면 오후에 일찌감치 올림픽대로에 오른다. 이 시간대면 도로는 아직 밀리지 않는다. 올림픽도로에서 시계가 좋은 날은 멀리 남산이 선명하고 인왕산도 선명하다. 달리는 동안 내내 보인다. 그러나 관악산은 건물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왼편으로 한강을 두고 차는 시속 80Km를 유지한다. 물론 특별함이 없는 날 그렇다. 때때로 어떠한 이유로 올림픽도로가 밀려도 한강물은 멈춘적이 없다. 1학기. 내리 비추는 태양의 열기를 가르고 차는 서울로 달린다. 2학기. 차창에 부딪치는 찬 기운이 사람의 마음까지 얼어붙게 만든다. 도로의 차들은 항상 바쁘다. 어딘가의 목적지로 쉴 새 없이 움직인다. 라디오를 듣기도 하고 CD를 작동시키기도 하며 서울로 향한다.
가끔 아주 가끔 등교하는 차 안에서 이 좋은 햇빛이 사람을 울컥하게 한다. 무엇을 위함인가? 무엇 때문에 이 시간에 나는 복잡한 서울로 가고 있는가? 다른 사람들은 서서히 일과를 정리할 시간에 뭐 대단한 것을 기대하고 3년을 이리 살고 있는가! 조직속에서 적당한 승진과 연봉을 올리는 것에 나는 왜 만족하지 못하고 이리 사는가! 이 시각에 서울은 뭐고 늦은 귀가에 이어진 새벽은 또 무언가! 쉬고 싶다. 정시에 퇴근을 하여 동료들과 저녁을 먹으며 어울림이 주는 즐거움을 누리고 싶고, 새벽단잠이 주는 그 늘어지는 맛을 느끼고 싶은 때가 여러 날이었다. 이 나이에 뭘 배우겠다고, 얼마나 잘 살아보겠다고 친구들의 비아냥을 들으며 스스로 왕따를 시켜가고 있는가! 더구나 전공도 아니고 업무와도 전혀 상관없는 헛짓을.
때때로 의지가 무너지고 자신이 끝없는 벼랑으로 몰리는 것을 느낀다. 그런 날이면 서울로 올라가는 도로가 더욱 길게만 느껴진다. 그러나 삶은 그렇게 공을 들이고, 잠시 쉬면서 떠가는 하늘의 구름 한 조각을 즐기며, 다시 깨끗이 잊고 일상을 맞는 것의 연속이다.

시장의 가격 결정력은 수요와 공급의 상호 교환비율에 의해 정해진다. 일반적으로 두 곡선의 교차점을 ‘가격’이라 한다. 미시경제학에서 이야기하는 생산3요소는 ‘노동·자본·토지’이다. 물론 전통적인 관점에서 토지는 생산 활동이 이루어지는 일종의 생산 현장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제는 장터의 범위가 더 넓어져서 교환이 이루어지는 온라인 대륙도 넓은 의미의 시장으로 확대되었다. 시장. 이 터에서 생산 활동은 완성된다. 생산된 물건에 가치를 담아 물건이 필요한 자와 돈이 필요한 자의 쌍방의 이익이 충족되는 순간이 생산활동의 목적이 달성되는 때이다.
소위 생산이란, 무언가가 만들어져서 생성되는 것이다. 아울러 ‘터’의 역할은 노동·자본·토지를 기반으로 생산된 것을 거래할 목적으로 모이게 하는 시장의 역할로 대체된다. 그 변화가 시장과 자본을 상당부분 같은 의미로 전환시킨다. 나아가 앞으로의 시장은 지식이 지배하고 소통할 것이다. 소통은 이야기를 풍성하게 하고 오래 지속되게 한다. 소통은 거래이며 이것이 원활할 때 기업은 오래 남는다. 소통은 단 둘이 산 속의 오솔길을 걷는 것이다. 시골의 한적한 외길을 걸으며 나누는 주고받음이다. 그러나 어쩌다 대충 아는 사람이나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과 어쩔 수 없이 함께 걷는 길은 얼마나 지루하고 어색한가. 같은 공간에서 말없이 둘이 있기란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가. 소통은 상대의 이념과 나의 정신이 닮아가는 과정이다. 닮아가는 과정에서 서로는 깍이고 덧붙어 상대에게 적절한 모습으로 다듬어 진다. 과거의 시장은 거래의 소통이 있었다. 그러다보니 터 위에서 흥정이 연출되었다. 그러나 지금의 시장은 마이웨이다. 지금 시장에서의 소통은 변화를 달리하고 있는데 그것은 같은 목적을 주고받는 소통이라기보다 서로가 자신의 지식을 전달하려는 쌍방향적 통행에 지나지 않다. 생산자는 그저 내 길을 가려는 일방적 통행을 선호한다. 미래의 시장은 더 이상 장소가 필요하지 않다. 교환의 패러다임이 바뀌고 거래방식의 변화는 터의 역할을 줄여놓았다. 이제 파는 자는 더 이상 상품의 실물을 준비하지 않는다. 그것을 이미지화 한 그림을 보여준다. 마찬가지로 사는 자도 현금을 준비하지 않는다. 거래의 개념이 바뀐 것이다. 상품대신 이미지를 팔고 현금이 아닌 숫자로 대가를 지불한다. 과거에 터가 필요했던 시절에 가치는 보이는 것, 즉 실물안에 담겨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보이지 않는 것에 더 높은 가치를 둔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소비자가 이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된 집단적 합의와 인터넷의 발달이라는 시대적 상황이 맞아 떨어진 것이다.

멈추지 않고 자가 진화 한 21세기 시장은 이제 암수가 한 몸이다. 시장은 이제 언제든 자가 번식과 생산이 가능하다. 이것은 끝없는 무한 복제를 의미한다. 나아가 원본과 복제의 구별이 무의미해졌다. 복제된 것들은 현실공간에서 실체는 없고 서로 합의된 이미지만으로 또 다른 가능성들을 만들어낸다. 즉 사이버 공간에서의 시장은 실제는 있으나 실체가 없는 고도의 자기진화 방식을 스스로 터득하였다.
앞으로 시장은 스스로 모든 것을 다스리며 자신이 모든 관계의 기준이 될 것이다. 이른바 물건과 돈, 이 서로의 것을 쥔 양측이 지배하던 과거의 시장과 달리, 21세기 시장은 시장 스스로가 물건과 돈을 모두 지배하게 될 것이다. 지식과 자본은 같은 가치로 소통될 것이며, 자본은 노동을 지배하고 토지를 지배하여 결국 시장을 움직일 것이다. 시장은 자신의 법을 만들고, 스스로 윤리가 될 것이다. 모든 사상의 기준이 되며 나아가 자유경제의 척추와도 같은 민주주의 위에 우뚝 설 것이다. 그 위의 자본은 이념까지도 길들이고 자신의 새로운 기준을 만들 것이다. 미래의 시장은 이념을 초월하지만 결국 또 다른 이념을 만들어 낼 것이다. 이것이 경제의 불황과 극복의 반복적 주기를 만들어내는 원인이 된다. 이와 비슷한 설명을 경영의 구루라 불리우는 피터 드러커의 ‘경영혁명’에서 찾을 수 있다. 그것은 세계 2차대전의 종전 이후에 등장하기 시작하였으며 그 이전의 산업혁명과 생산성혁명의 시대에 생산의 3요소(노동·자본·토지)가 시장의 주류적 개념이었다면 그것에 ‘지식’이라는 것이 추가되어 경영혁명의 시대를 맞게 될 것이라고 설명하기도 하였다.
시장은 이제 세계의 국경을 무너뜨려 그 경계를 뛰어 넘고 무의미 한 것으로 떨어뜨릴 것이며, 이미 국경은 지도상 경계를 표시한 한 폭의 그림에 지나지 않다. 시장의 힘은 흔들림이 없다. 땅속의 자원조차 기술과 마케팅을 선점한 나라로 집중시키고 있다. 원료는 한편으론 신성한 권한일 수 있는데 자본의 힘에 복종되고 있다. 이미 국경이 의미가 없다고 하지 않았는가. 자신에게 유리한 룰을 만들고 이것을 이용하여 자연스럽게 흘러 들어오게 하거나 강제가 가능한 새로운 관계로 성장할 것이다.

시장을 생각하면 사람들의 생각은 더욱 자유로워질 것이다. 시장에서 통용되는 욕심에 의해서 세계의 다양했던 가치들이 정리되어 모두를 위한 ‘일반화’된 새로운 기준들이 생겨 날 것이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인터넷의 역할에 있다. 부정할 수 없이 인터넷은 이미 모두의 삶이고 도구이다. 서로 다른 공간에 거주하면서도 동일한 시장에서 서로의 생각을 통하게 만든다. 시장의 힘이다.
문화와 언어조차도 시장의 힘에 의해서 새로운 사용방식의 룰로 정리되는 때가 오지 않을까 조급한 예측을 해본다. 그러나 이미 신은 우리가 사용하는 말의 힘을 알고 계셨을 것이다. 그래서 이미 언어에 장벽을 세우고 경계를 나눈 것이다. 그것마저 없었다면 세상은 더 자유로운 휴머니즘적 생각과 느낌의 공유가 가능했을 것이며, 끊임없이 급진하는 과학적 소통으로 해서 더 거대한 세상을 이 땅에 만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신은 우리가 넘어선 안 될 영역까지 오는 것을 원치 않았다.

네트워크는 상생과 소통을 가장 필요로 하나, 아이러니하게도 통신은 지극히 개인주의적으로 변화 발전하고 있다. 마치 화려한 백화점과 같이 모든 것을 움직이지만 실상 그들은 아무것도 없다. 그들이 소유한 유일한 가치는 터이다. 터는 광장이다. 광장은 많은 것들을 모으는 힘이 있다. 그들은 자유롭게 모여 확인하고 나뉘었다 다시 손을 잡는다. 분리와 화합이 자유롭다. 나누어 동아리를 만들기도 하고 다시 모여 연대를 이루어간다. 네트워크는 그 터의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고 있다. 이 터에서 작은 능력의 개인들이 연대하여 통신네트워크를 통해서 모든 가능성을 위한 신대륙을 만들어 이끌어가고 있다.

법은 정확하다. 그러나 ‘법대로 해!’ 이 말은 그 정확함도 내게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란 생각이들 때 하는 자신 넘치는 말이다. 물론 요즘엔 ‘배째라’의 의미가 있기도 하다. 그러나 어찌됐든 법이 정확하려면 내게 불리하더라도 법대로 하라는 말이 나와야 한다. 유,불리를 떠나서 정확한 법은 그 자체로 기능한다. 아무튼 법대로 해 이 말에는 뭔가 알 수 없는 당당함이 들어있다. 법치의 발전이 부족한 사회에서의 법은 정확하고, 선진사회의 법은 오히려 공정하다. 법에도 눈물이 있다고 하던가. 생각해보면 임대인과 임차인의 관계, 고용인과 피고용인의 관계, 갑과 을의 관계는 정말로 평등한 관계인가? 거기서 이루어지는 계약은 얼마나 공정한가? 이 분명하지 않은 그러나 누구나 묵과하고 넘어가는 불평등한 관계를 평등하다고 믿고 사회는 돌아간다. 쌍방이 수평적 관계에서 합의하에 이루어진 계약이라지만 어찌 그것을 공정하다고 볼 수 있겠는가? 소액임차인우선변제권, 임금채권보장법 등은 약자를 보호하는 우리 사회의 좋은 예이다. 여러 가지 사회보험제도도 사회적 약자와 빈자를 위하여 기능하는 정책이다. 그러나 더 나은 복지사회로 가기 위해서는 이처럼 빈자들의 묵언(默言)과 눈물을 닦아 줄 수 있는 법과 제도들이 더욱 다양해져야 한다. 그리고 공정함 위에 운영의 묘가 있어야 한다. 사회전체가 그것을 수용하고 인정하여야 한다. 그것이 선진사회의 모습일 것이다. 그것이 공정한 사회에서 심판자가 하여야 할 일이다. 우리의 법이 폭력으로부터 물리적 약자를 보호하거나 정신적 약자를 보호하듯, 가난한 이들에게도 그리해야 한다. 그에 반해 사회의 권력과 혜택을 받는 자들에게도 그리 되어야 한다. 그 갑과 을의 관계에서 법은 빈자를 우선하고 그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공정하기 힘든 ‘기울어진 공정성(?)’을 찾아야 한다. 그것이 민주사회이다. 복지사회는 구성원들이 그 기울어진 선을 찾으려 합심하여 노력하는 사회이다. 유리한 자가 법대로 해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불리한 자가 법대로 해를 주장하는 사회가 행복을 가까이 둔 사회다. 서로가 약간의 기울어짐을 공정한 것으로 믿는 사회다. 아이러니컬하게도.

134일차 단군일지(10.9) :
스포츠가 흥미를 더 하는 것은 경쟁 때문이다. 그러면 단적으로 보아 ‘경쟁’은 단점인가? 장점인가? 경쟁이란 근본적으로 결과를 놓고 비교하고자 하는데 목적을 둔다. 비교는 이것과 저것의 ‘차이’와 ‘닮은 점’을 알아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경쟁심’은 단점이나 장점을 찾기보다 경쟁하려는 마음의 자세에 더 무게를 두고 보아야 할 일이다. 그러나 경쟁심이란 단어에서 받는 느낌이 언뜻 편안하지만은 않은 이유는 비교를 통해서 닮은 점 보다는 차이를 더 찾으려 하는 데 있다. 비교를 전제로 한 경쟁. 경쟁에서 우월하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능력의 우수성을 인정받는 것이어서 이것은 장기적인 측면에서 유리하다. 조직에서 우수한 평가를 받는 것은 적절한 보상으로 조직에서 위로 올라갈 수 있겠지만, 한편으론 끝을 빨리 앞당기는 것이다. 어차피 조직에서 승진으로 올라갈 수 있는 자리는 한정되어 있고 위로 갈수록 더 능력있는 경쟁자들과, 계속해서 경쟁선상에 놓여 있다는 점은 변함이 없다. 그렇다고 해서 승진과 보상을 부정적으로 보는 것은 아니다. 단지 조직 속에서 우리가 갖고 있는 경쟁이라는 가치에 대하여 점검하자는 것이다. 우리는 경쟁에서 일반적으로 우월한 가치보다는 상대적으로 우월한 가치를 찾아야 한다. 이것을 달리 말하자면 더 장기적인 차원에서 생각하면 동일한 공통분모 속에서의 경쟁보다는 그 분야에서 전문가라는 평가를 받고 자신의 재능을 더 강화해 가는 것이 개인에게는 유리하다. 이것을 차별성이라 한다. 차별적 가치는 개인에게 생명력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