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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0월 5일 09시 41분 등록

“피터 드러커 자서전” – 피터 드러커 지음/ 이동현 역/ 한국경제신문사

 

 

저자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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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드러커(Peter Ferdinand Drucker, 1909. 11. 19 ∼ 2005. 11. 11)는 작가, 교수이자 경영 컨설턴트로서 실전적 경험과 풍부한 이론으로 현대 경영학의 기초와 기틀을 마련하였으며, 학계는 물론 산업계에서도 존경 받는 경영학의 대부로 불리운다. 뛰어난 통찰력과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비범한 시각, 그리고 문필력을 이용하여 일생동안 40여권의 책을 저술하였다. 그는 ‘지식 노동자’라는 개념을 1959년 처음 제안하였으며, 이후 지식 노동자의 생산성과 활용 방안에 대한 연구는 그의 저술의 주제가 됨과 아울러 20세기 후반, 21세기 초반 경영학의 주요 화두가 되었다.

 

그는 1909년 11월 19일 오스트리아 수도 빈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 스티브 앤더슨 드러커는 변호사로서 후에 오스트리아의 재무성 장관을 지냈고, 어머니 캐롤라인은 의학을 공부하였는데, 특히 정신분석학의 시조인 프로이트의 제자였다고 한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다음해인 10세가 되던 1919년, 그는 빈 짐나지움에 입학하였다. 독일의 함부르크대학 법학부에 입학했으며, 1929년에 프랑크푸르트 대학으로 이적하여 1931년 국제법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드러커는 1933년 영국의 런던으로 건너가 런던의 보험회사 및 은행에 근무했다. 그는 런던에서 근무하던 중 도리스 슈미트(Doris Schmidt) 여사와 만나 1937년 초 결혼했는데, 그 후 드러커 부부는 4명의 자녀를 두었다. 이 시기에 드러커는 두 명의 경제학자에게서 큰 학문적인 영향을 받는데, 한 명은 조셉 슘페터로서 그에게서 혁신과 기업가 정신의 중요성에 대해 배웠으며, 다른 한 명은 존 메이나드 케인즈로서 그의 강의에서 소비와 소비자 행동의 중요성에 대한 통찰을 얻게 된다. 1937년 미국으로 건너간 드러커는 1939년 뉴욕교외의사라 로렌스 여자대학에서 시간강사를 시작했으며, 이후 시간 강사와 경영 분야 자유기고가, 경영 컨설턴트로 활동하였다 1942년 버몬트에 있는 소규모 대학인 베닝턴 대학의 전임교수가 되었으며, 1949년까지 7년 동안 이 대학에 근무하였다. 1943년 드러커는 미국 국적을 취득하였다.

 

드러커가 GM의 조직을 연구하기 위해 초빙된 것은 1943년이었는데, 그가 진정한 의미의 경영학자로서 역량을 발휘하게 된 것은 이때부터이다. 이 해에 드러커는 처음으로 GM에서 경영컨설팅 활동을 시작한 뒤 여러 회사에 대한 크고 작은 컨설팅을 했고, 1951년에는 GE에 대해서도 컨설팅을 했다. GM에서의 컨설팅 때 드러커는 2년간 모든 이사회 미팅에 참여하였고, 직원들을 인터뷰 하였으며, 생산 및 주요 의사 결정 활동을 분석하였다. 그러한 작업의 결과로서 ‘기업의 개념’이라는 책과 또한 많은 연구 논문을 저술하게 되었고, GM의 컨설팅 경험을 기반으로 더 많은 컨설팅 업무를 맡게 되었다. 그 뒤 드러커는 컨설팅 대상을 대기업과 중소기업, 정부기관, 그리고 비영리단체로 넓힐 수 있었고 또한 여러 나라 예를 들면, 영국, 유럽, 남미 그리고 아시아 특히 일본을 상대로 활동 영역을 확대할 수 있었다.

 

드러커는 1950년 뉴욕대학교 경영대학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 이후 드러커는 교수로서 그리고 컨설턴트로서 산업과 기업의 문제에 관심을 기울였다. 컨설턴트로서의 일의 영역은 점차 국제적으로 넓어졌고(GE, 코카콜라, 시티은행, IBM, 인텔, 토요타 등), 그와 함께 드러커의 명성은 세계적인 것으로 되어 갔다. 1971년부터 2003년까지 캘리포니아 클레어몬트 경영대학원의 사회과학 및 경영학부 석좌교수로 재직하였으며, 이 때 그는 처음으로 경영진을 위한 MBA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운영하였다. 후에 이 경영대학원은 피터 드러커 경영대학원으로 불리게 되었는데, 그는 2002년 92세의 나이에도 수업을 맡아 강의를 하였다. 40여 권에 이르는 그의 저서는 20개국 이상의 나라에서 번역되고 또한 600만 권 이상이 판매되었고, 2002년에는 부시 대통령으로부터 미국 시민에게 수여하는 최고 훈장인 대통령 자유훈장을 받았다. 드러커 비영리 재단(Peter F. Drucker Foundation for Non Profit Management)의 명예 이사장을 역임하였으며, 2005년 11월 11일 자택에서 숙환으로 별세하였다. 유족으로는 부인과 네 명의 자녀가 있다.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개정판을 내며

 

나는 인간이 다양성과 다원성을 가지며, 모든 인간은 나름대로 독창성을 갖고 있다고 믿는다. 이미 50여 년 전에 나온 첫 번째 작품에서부터 내 모든 책 속에 내재돼 있는 핵심은 바로 이런 신념이다.[12]

 

이 책은 단편적인 이야기들을 모아놓은 것이고 각각의 이야기는 서로 연관성이 없다. 하지만 이 책은 사회적 초상화를 제공하기 위한 시도이기도 하다. 이런 시도를 통해 나는 어떤 본질과 분위기, 느낌 등을 포착해서 전달하려고 하는데, 그 내용은 현 시대의 사람들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것들이 될 것이다. … 훌륭한 컬러 사진이 여름 햇살에 반짝이는 초원의 경험을 전달하지 못하는 것처럼, 통계수치로는 인간이 무엇을 보고 무엇에 따라 행동하는지 표현할 수 없는 법이기 때문이다. 오직 한편의 ‘사회 초상화’만이 그 역할을 담당할 수 있다. 그 초상화는 사회를 개인들 속에 반사하기도 하고 개인들을 통해 사회를 굴절시키기도 한다.이 책에 기술한 인물들은 내게 중요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선택됐다. 그들이 내게 중요했던 것은 자신들이 속한 사회를 내게 반사하거나 굴절시켜 보여주었던 방식 때문이었다.[19]

 

프롤로그 : 한 사람의 구경꾼, 탄생하다

 

이 책은 ‘우리 시대’의 역사가 아니며, 그렇다고 ‘나의 시대’의 역사도 아니다. 그보다는 일종의 자서전이다. 여기서는 주로 내가 살아온 삶의 순서에 따라 인물들이 등장한다. 이것은 결코 ‘나 자신’에 관한 책이 아니다. 이 책에서 내 경험과 삶, 연구 성과들은 단지 부속물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 책은 대단히 주관적인 작품이다. 일급 사진가가 항상 주관적이고자 노력하는 것처럼 말이다. 여기서 다루는 사람이나 사건들은 내게 강한 느낌을 주었으며 여전히 그 영향이 사라지지 않고 있는 것들로, 기록하고 검토하고 재현해 볼 만한 가치가 있는 것들이다. 나는 그런 사람과 사건들을 기존의 경험에 의해 형성된 사고유형에 적용하고, 서로 분리된 채 단편적으로 존재하는 내 시각에 끼워 맞춰야 했다. 그런 과정을 통해 나는 내 주변세계와 내면의 세계를 보았다.[21, 22]

 

1부 사라진 제국 아틀란티스

 

할머니 : 인간에 대한 예의를 깨우쳐 준 유쾌한 사람

 

드러커를 다방면에 박식한 르네상스 지식인으로 키운 사람은 그의 할머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할머니는 그에게 피아노와 음악, 그리고 사회생활에서의 예의를 가르쳤고, 드러커는 할머니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드러커의 할머니는 젊은 시절에 피아니스트였으며, 클라라 슈만의 제자였다. 스승의 요청에 따라 요하네스 브람스를 위하여 피아노를 친 것이 생애 최대의 자랑이었던 드러커의 할머니는 끊임없이 사람들에게 얘깃거리를 제공하는 유쾌한 사람이었다. 순박하고 고지식한 드러커의 할머니는 하인, 점원, 창녀까지도 모두 똑같이 대했고 누구나 드러커의 할머니를 좋아했다. 드러커의 할머니는 똑똑하지는 않았지만 다른 사람들보다 앞서서 직관적으로 20세기를 이해는 ‘지혜’를 지니고 있었으며, 사물을 판단하는 능력이 뛰어난 명쾌한 사람이었다.[36]

 

“하지만 할아버지가 떠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안 해보셨어요?”

“조금도 안 했지. 할아버지는 저녁식사 때는 늘  집에 돌아왔단다. 나는 그저 멍청한 늙은 여편네에 불과했지만, 남자에게는 위장이 성기나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알 정도의 머리는 있었지.”[45]

 

할머니가 손녀들에게 해주는 약간 불가사의한 충고도 이야깃거리다. “얘들아, 밖으로 나갈 때는 항상 깨끗한 속옷으로 갈아 입거라.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란다.”

손녀들 가운데 한 명이 반쯤은 우습고 반쯤은 기분이 상해서 할머니에게 말했다. “하지만 할머니, 전 그런 종류의 여자가 아니에요.”

그러자 할머니는 이렇게 대꾸했다. “네가 어떤 종류의 여자인지는 그때 가서 보지 않고서는 결코 알 수 없지.”[51]

 

헤메와 게니아 : 경영의 귀감으로 삼은 괴짜 부부

 

헤메와 게니아는 독특한 부부다. 헤메는 심술궂고 고집 센 독설가였으나 사물의 핵심을 꿰뜷어 보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를 무뚝뚝하고 신랄하다고 여겼으나 그는 옳다고 믿는 일에 온몸을 바쳐 싸우는 용기를 지니고 있는 인물이었다. 관료제적 국가체제를 이상으로 삼은 그는 관리로서 뛰어난 면모를 보여 오스트리아 금융재정을 책임지는 재정황제의 지위에까지 올랐다. 그의 아내 게니아는 여학생의 입학을 거부하는 오스트리아의 대학제도를 타파하고자 직접 학교를 설립한 대담한 성격의 소유자다. 게니아는 전략을 수립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데 능했다. ‘사람들에게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묻지 말고 할 일을 지시하라’는 게니아의 좌우명은 훗날 드러커의 경영이론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71]

 

나는 항상 추상적인 관념보다는 인간에게 관심이 더 많았고, 관념이란 철학자들이 범주화를 목적으로 사용하는 사고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인간은 내게 흥미롭고 다양성을 가진 존재였을 뿐만 아니라 관념보다 훨씬 더 의미 있는 대상이었다. 그들은 발전하고, 새로운 모습을 드러내며, 변화를 일으키면서 무엇인가로 바뀐다.[72]

 

아버지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는 꼭 필요한 사람이었지. 다루기 힘든 문제가 생길 때마다, 그러니까 누군가 겁이라고는 모르는 사람이 필요하거나 문제가 너무 복잡해서 그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경우에 그건 전부 헤메의 일이 됐지. 그리고 그는 언제나 기대에 부응했어. 그는 문제의 핵심을 볼 수 있는 능력을 가졌고 기꺼이 불쾌한 상황과 대면할 수 있는 배짱도 있었으니까.”[96]

 

게니아는 학교와 관련된 모든 직책을 포기하고 몇 시간의 대리수업에 대한 강의료 조차도 받지 않았다. 그녀는 사람을 가르치는 일에 관심이 많지는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학교를 운영하는 일은 분명 그녀의 취향이 아니었다. 그녀가 학교를 설립한 이유는 그것이 여성에게 대학교육의 기회를 제공할 수 있는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목적이 달성되자 학교는 더 이상 관심을 가질 만한 대상이 될 수 없었다.[116]

 

하지만 게니아는 자신이 알고 있는 사람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언제나 최고의 인사에게 바로 달려들었다. 그녀는 자신이 정확하게 어떤 조치를 원하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전화기를 들었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다른 사람에게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묻지 마라. 항상 그들에게 할 일을 지시하라.” 이것이 그녀의 좌우명이었다. “만약 그것이 잘못됐거나 더 나은 방법이 있다면 그들은 그 사실을 지적해 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그들에게 무엇을 하라고 말해 주지 않으면, 그들은 행동보다는 연구에 몰두할 것이다.”[119]

 

“당신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일이 있어서 전화했습니다. 아마 당신은 컴퓨터 때문에 골치를 썩이고 있을 겁니다. 제가 그 문제를 깨끗하게 처리해 줄 사람을 알고 있습니다. 당신이 신속하게 움직인다면 그 사람을 채용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 사람은 누구누구라는 해군 중령인데, 마레 섬 해군 정비창에 컴퓨터를 설치하는 일을 얼마 전에 끝마쳤죠. 그럼요, 아마 한 시간 뒤면 그가 당신 사무실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군요. 제가 당신에게 도움이 돼서 정말 기쁩니다.” 이런 방법은 거의 실패를 모른다. 하지만 실패했다고 해도 대화는 다시 이런 식으로 이어지게 마련이다. “잠깐만요. 당신이 말한 사람은 제 친구가 원하는 인물 같군요....”[122]

 

“통계치를 다룰 때는 명심해. 절대로 그것을 신뢰하지 마. 그 통계를 집계한 사람이 네가 아는 사람이든 모르는 사람이든, 어떤 경우에도 통계수치는 의심해 봐야 해. 내가 직접 경험해 본 일이야. 난 거의 12년 동안 오스트리아의 수출현황에 대한 통계를 담당하고 있었어.”[140]

 

게니아가 매섭게 쏘아붙였다. “그것이 인간의 희생을 요구한다면 원칙이란 내게 전혀 필요 없는 물건이야.” 이는 절대주의의 세기에는 대단히 위험한 이단이다. 교육과 심리, 환경, 경제, 정치, 심지어 인종에 이르는 모든 분야에서 이상적인 미래나 ‘절대 다수를 위한 선’이라는 망상을 위해 인간이 희생해야 한다는 사상이 판을 치고 있었으니 말이다.[146]

 

엘자와 소피 : 교육의 길을 제시한 노처녀 자매 선생님

 

미스 엘자와 미스 소피는 드러커의 어린 시절 학교 선생님이다. 이들은 자매였지만 자매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상이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미스 엘자는 절대적인 권위의 소유자로, 어린이에게 별다른 관심은 없었지만 담임으로 취임한 날 아이들의 이름을 모조리 외우고 학생들의 성격을 파악하는 완벽한 성격의 교사였다. 반면 미스 소피는 아이들을 무릎에 앉히기 좋아하고 아이들을 흥미롭게 만드는 재주를 지닌, 프뢰벨식 교육을 채용한 교사였다. 미스 소피는 아이들에게 깨달음과 학습을 제공하고 미스 엘자는 아이들에게 기술과 비전을 제공했다. 미스 소피가 교사였다면 미스 엘자는 교육자였던 것이다. 이들은 드러커가 교육자의 길로 들어선 후 수업 방식의 기준을 설정하도록 사례를 제공한 사람들이기도 하다.[157]

 

“그리고 너는 네 장점 가운데 하나를 살리지 못하고 있는 게 있는데 그게 뭔지 아니?” 나는 머리를 가로 저었다. “너는 작문에도 능해. 하지만 별로 연습을 하지 않는 것 같더구나. 너도 동의하니?” 이때는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됐다. 그럼 그것을 목표로 삼자. 일주일에 두 개씩 작문을 해서 제출하렴. 하나는 네가 쓰고 싶은 내용을 마음대로 쓰고, 나머지 하나는 내가 주제를 정해 주마.”[160]

 

우리는 그녀를 사랑하지는 않았다. 우리는 그녀를 숭배했다. 50년 뒤 여성 해방 운동가들이 신은 여자라고 선언했을 때 나는 별로 놀라지 않았다. 그런 일이 벌어지기 훨씬 전부터 내 머리 속에는 신이 미스 엘자를 대단히 많이 닮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167]

 

미스 소피는 결코 야단을 치지 않았으며 비평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정말 질렸을 때는 이단아의 옆에 앉아서 그 녀석의 손을 자신의 두 손으로 부드럽게 감싸고 말없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그런 후에는 이단아도 다시 작업을 시작해서는 보통은 우수한 작품을 만들었으며, 적어도 이전 것보다는 나은 작품을 만들어 냈다.[[175]

 

사실 지금까지 어떤 과목도 눈에서 반짝반짝 빛이 날 정도로 나의 흥미를 끌지 않았던 적은 없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선생들은 그것을 얼마나 지루하게 만든단 말인가. 그렇게 되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 불쌍한 사람들은 스스로 수업을 끔찍하고 지루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신이 그 정도로 능력이 떨어져서 일어나는 현상일 수도 있고, 학생들이 제대로 알아듣지 못해서 그런 경우도 있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되자 미스 엘자와 미스 소피를 회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반적인 선생들과 그들 사이의 엄청난 차이가, 그들이 가르친 것이 로마사 같은 과목보다 훨씬 흥미로워서 생긴 차이는 아니라고 나는 확신한다. 지적 수준은 그들이 가르쳤던 과목이 오히려 더 낮았다. 하지만 미스 엘자는 결코 그것을 지루하게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수업도 흥미롭게 이끌어갈 수 있었다. 미스 소피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망치로 못을 똑바로 박는 방법을 열정적으로 보여주었던 것이다. 학생인 내가 결코 그 방법을 습득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181]

 

나는 음악가가 될 수 있을 정도로 잘 들었던 적이 결코 없었다. 하지만 그 순간 나는 내가 언제나 성과를 통해 학습을 해왔으며, 효과가 있거나 성과를 거두는 사람을 찾아 그것을 배우는 것이 내게 알맞은 학습방법이란 사실을 갑작스럽게 깨닫게 되었다. 그 동안 나는 실수를 통해서 배운 것이 없었다. 성공만이 내게 가르침을 줄 수 있었다. 그러나 내가 그 사실을 완전히 이해하게 됐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몇 년이 더 걸렸다. 아마 그것은 마르틴 부버의 초기 저서였던 어떤 책에서 이런 글을 읽은 다음의 일이었을 것이다. “신께서 인간을 창조할 때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실수를 저지르게끔 만드셨다. 그러니 다른 사람의 실수를 통해 배우려고 하지 마라. 다른 사람이 뭔가를 올바로 했을 때 그것을 보고 배워야 한다.”[186, 187]

 

슈나벨의 연습실에서 깨달음의 순간을 가진 이후로 나는 진정으로 가르칠 수 있는 선생을 찾아 다녔다. 그런 사람들을 찾아서 관찰하고 그들의 방식을 즐기기 위해 가끔 나는 내 본연의 길에서 잠시 벗어나기도 했다. 어떤 사람이 뛰어난 선생이라는 소문을 들을 때마다 그들의 강연장이나 교실에 숨어 들어 그들의 수업을 직접 확인하려고 애썼다.... ‘선생 관찰’은 오랫동안 내게 커다란 즐거움을 주었다. 나는 이것을 일종의 스포츠 관람처럼 다른 사람에게도 권할 수 있다. 스포츠처럼 여기에서도 끊임없이 놀라운 일들이 벌어진다. 나는 아직도 선생 관찰을 멈추지 않고 있다.[187]

 

하지만 오랜 시간에 걸쳐 나는 다른 종류의 선생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들은 학생들을 학습하도록 이끄는 방법을 사용해 가르침을 전수한다. 이런 사람들은 내가 초등학교 4학년이던 시절 미스 엘자가 썼던 방법을 사용한다. 그들은 개개의 학생이 가진 장점을 찾아내고 그들의 장점을 개발하기 위한 단기 목표와 장기 목표를 설정한다. 이 작업을 끝낸 뒤에 비로소 그들은 학생들의 단점에 신경을 쓰기 시작한다. 그런 단점은 학생들이 자신의 장점을 완벽하게 발휘하는 데 제한사항으로 등장하게 마련이다. 그들은 학생들의 성취에 항상 피드백을 제공함으로써 학생들이 자제력을 발휘하고 스스로를 이끌어가게 한다.[193]

 

이런 선생들은 비난보다 칭찬을 많이 사용한다. 하지만 매우 드물게 칭찬하기 때문에 칭찬이 학생의 동기를 유발하는 능력을 상실하게 되거나 학생이 스스로 느껴야만 하는 성취감과 만족감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는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주의한다.[194]

 

마사 힐은 미스 엘자가 초등학교 4학년 생들에게 적용했던 방식과 똑같은 방법을 사용했다. 그녀는 학생들을 며칠 또는 몇 주일 동안 관찰하면서, 학생 각자가 할 수 있는 것과 앞으로 성취해야 할 것의 관점에서 그들을 생각했다. 그녀가 각각의 학생에게 적절한 계획을 수립하면 학생이 스스로 그것을 실천했으며, 힐은 진척상황만 감독했다. 그녀는 학생이 이미 잘하고 있는 부분을 더 완벽한 수준으로 끌어올리도록 강요하고, 또 하고, 또 했다. 그녀는 학생들을 친근하게 대했지만 칭찬을 많이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학생의 실력이 좋아질 때마다 언제나 그 사실을 확실하게 표현했다.[197]

 

소크라테스의 시대 이후로 거의 2000년의 세월 동안 우리는 가르침과 학습이 ‘인지적’인지 또는 ‘행동적’인지를 놓고 논쟁을 벌여왔다. 그것은 잘못된 논쟁이다. 가르침과 학습은 인지적이며 동시에 행동적이다. 하지만 그들은 뭔가 특별한 요소를 더 갖고 있다. 그들은 또한 열정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선생의 열정에서부터 시작한다. 교육자는 학생들의 깨달음에 같이 도취됨으로써 열정을 얻는다. 학생의 얼굴에 떠오르는 깨달음의 미소는 어떤 마약이나 약물보다 중독성이 강하다. 교실에 만연된 무시무시하고 학생을 고사 시키는 전염병인 교사의 권태감을 치유하는 것이 바로 열정이다(교사의 권태감은 가르침과 학습을 완벽하게 가로막는 장애 요인이다).[200]

 

선생의 열정은 자기 자신에게 있고, 교육자의 열정은 학생들의 내면에 존재한다. 하지만 가르침과 학습은 언제나 열정이고, 그 열정은 자신이 태어날 때부터 갖고 있거나 다른 사람의 열정에 자신이 중독되는 것이다.[201]

 

진정한 선생과 진정한 교육자에게는 게으르다거나 열등하다거나 멍청한 학생은 절대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선생이 잘했거나 능력이 없었을 뿐이다.[201]

 

프로이트 : 프로이트에 대한 프로이트적 분석

 

프로이트는 자기 동정을 혐오하는 아주 냉철한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에 대한 세 가지 허상을 만들어내고 스스로 그 허상을 믿었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문화와 예술에 창의적인 자극제가 되었다는 점에는 논란의 여지가 없었으며, 모두들 그 점을 인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자신의 이론이 이루어낸 그런 성과를 거부했다. 그는 정신분석학이 과학으로 인정 받기를 갈망했지만, 그에 대한 논의는 거부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없는 주장들을 함으로써 물의를 일으켰다. 이 글에서 드러커는 전통적인 허상에 등장하는 프로이트보다 훨씬 흥미로운 현실의 프로이트를 프로이트적으로 분석하고 있다.[202]

 

내가 프로이트에게 소개된 것은 여덟 살인가 아홉 살 때였다…내가 그를 만난 건 그때 분이다. ‘오늘 일은 잊어선 안된다. 넌 방금 오스트리아에서, 아니 아마 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을 만난 거야’ 라는 말을 부모님이 내게 했기 때문에 이 때의 일만은 생생히 기억한다. “황제보다 더 중요한 사람인가요?” “그래, 황제보다 더 중요한 사람이야.”[204]

 

현재 대부분의 사람들, 특히 영어권에 사는 사람들은 지그문트 프로이트에 대한 세 가지 ‘사실’을 거의 아무 의심 없이 받아들인다.... 이 세 가지 ‘사실’은 모두 완전한 허상이다. 어린 시절 프로이트는 유복했으며, 젊은 시절에 처음 의사생활을 시작할 때부터 수입이 좋았다. 또 프로이트가 세상을 떠나기 몇 해 전 히틀러가 그를 망명 보내기 전까지는 인종차별로 고통을 받은 적도 결코 없었다. 오스트리아 의학사에서 프로이트만큼 일찍 공식인정과 학위를 받은 사람도 드물다. 제다가 그는 오스트리아의 엄격한 기준에 따르면 자격이 되지 않는데도 젊은 나이에 그런 인정을 받은 것이었다.[205, 206]

 

당시에도 유대인들을 비롯해서 돈을 추구하는 의사들은 많이 있었다. 당시 이런 이들은 ‘칼 쓰는 사람’이라고 불리기도 했다….하지만 ‘칼 쓰는 사람’이라는 말에는 경멸감이 담겨 있었다. 아주 악명 높은 ‘칼 쓰는 사람’조차도 병원의 원장이나 대학 임상학과의 부서장이 되어 빈곤한 환자들을 돌보곤 했다. 그래도 그들은 자신의 탐욕 때문에 바라는 것 없이 베푼다는 치료사로서의 전통적 윤리를 어긴 셈이었다. 하지만 그런 윤리를 경멸한 프로이트는 가장 심층적이고 가장 중요시되는 치료사라는 유대인 전통에 정면으로 도전했다. 그는 의학을 ‘장사’로 만들었다. 게다가 프로이트가 옳을 수도 있다며 동조하는 의사들이 생겨났다. 적어도 감정이나 정신장애에 대해서는 상당한 진료비를 요구하는 것이 치료효과가 있을 수 있고, 대가 없는 치료는 해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211]

 

프로이트는 의사가 환자에게서 감정적으로 분리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의사는 동정심을 버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의사가 환자를 인간적으로 대하면 환자는 의사에게 의존하게 되고, 그러면 회복과 치료가 더뎌질 수밖에 없으므로 의사는 고통을 받는 환자를 형제가 아닌 사물로 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의사를 치료사에서 기계공으로 강등 시키는 것과 같았다. 빈의 모든 유대인 의사들은 물론, 유대인이 아닌 의사들에게 이는 의사가 되고자 했던 이유에 대한 정면부정이자 자신과 자신의 소명에 대한 자부심을 모욕하는 것이었다. 그들의 심기를 한층 더 불편하게 만든 것은, 이번에도 많은 사람들이 프로이트가 맞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는 거이다. 적어도 정신분석학자에 관해서는 말이다.[212,213]

 

토마스 만은 프로이트의 여든 살 생일축하 자리의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정신분석은 소설이라는 예술에 그 누구보다도 큰 공헌을 했습니다."…많은 사람들은 그가 오랫동안 굳게 닫혔던 영혼에 창을 냈다는 점은 기꺼이 인정한다.[219]

 

프로이트 자신은 빈 사회의 ‘성적 억압’ 가능성에 대해 한 번도 언급한 적이 없었다. 그런 설명은 훨씬 나중에 나왔으며 미국이 만들어낸 것이다. 빈 사람이라면 그런 주장에 넘어갈 일이 없었을 것이다. [223]

 

프로이트가 주장한 억압과 신경증을 일으키는 성적 욕구는 문화나 사회적 관습과는 상관이 없다. 그것들은 특정 사회의 남성과 여성 사이의 관계에 대한 것이 아니라 성인과 아이의 관계에 대한 것이다… 프로이트의 저서에 일관되게 나타나는 주제가 성적불안, 성적 불만, 성기능 장애이기는 하지만 거기에는 19세기 말 빈의 다른 모든 기록에서 강조됐던 한 가지 신경증이 빠져있다. 바로 ‘금전 신경증’이다. 프로이트 시대 빈에서 억압의 대상이 됐던 것은 성이 아니라 돈이었다. 돈이 이미 압도적 우위를 차지한 상태였지만, 동시에 언급돼서는 안될 대상이기도 했다.[224]

 

프로이트가 정신분석학에 발을 들인 건 당시 퍼지고 있던 계몽시대의 합리주의가 감정변화의 동역학을 설명하지 못한다는 걸 깨달으면서였다. 하지만 그는 세상 사람들의 생각을 즉 과학적인 세계관을 저버리지는 못했다. 프로이트는 죽는 날까지 정신분석학이 엄격히 과학적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마음의 작용을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용어로, 또 화학 및 전기적 현상으로, 또 물리학의 법칙으로 설명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은 과학적인 합리성과 비합리적인 내면의 경험이라는 두 세계를 하나의 종합이론에 담으려는 거대한 시도였다. 그것은 계몽시대가 낳은 극단적으로 합리적인 프로이트와, ‘영혼의 어두운 밤’을 꿈꾸는 몽상가이자 시인인 프로이트를 한 개체에 담으려는 거대한 시도였던 것이다. 이런 통합으로 정신분석학은 그 중요성을 인정 받게 되지만, 동시에 그만큼 허약해지기도 했다.[230, 231]

 

프로이트는 자신이 위태롭지만 세심하게 잡아 놨던 종합의 균형을 유지해야만 했다. 그러지 않으면 골상학자나 전기막대를 사용하는 최면술사들처럼 신앙요법 치료사의 마법과 다름없는 방법이나, 18세기 극단적 합리주의자가 낳은 아주 무익한 기제를 가지게 될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프로이트는 하나의 주장에 치료를 위한 과학적 방법과 우주론 모두를 담아야만 했다. 그 균형상태가 얼마나 위태했던지는 현재 우리가 아는 것과 같다. 그 붕괴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231, 232]

 

완공된 건물이 공개되기 전의 준비작업 틀을 프로이트만큼 정교하게 해체한 사상가는 없다. 그는 통합이 필요하다는 것과 비판자들이 제기하는 물음을 논의하게 되는 그 순간 그것이 무너질 것이라는 사실을 오직 무의식적으로만 알고 있었다. 방법론에 대한 문제, 결과에 대한 정의와 대조군 실험의 문제, 완전히 신비적인 방법을 비롯해 모든 심리요법의 치료성과가 똑같다는(혹은 비슷하다는) 등을 논의하는 순간 말이다. 그리고 과학적 이론 및 치료법과 인간의 인성 및 철학이라는 신화를 한데 포함하고 있는 정신분석학의 이중적 특성을 논의하는 순간에 말이다. 그는 이런 질문을 무시함으로써만 통합체제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자기 자신이 빈 의사들을 무시하기 위해 빈 의사들이 자신을 무시하는 척해야만 했던 것이다.[233]

 

현실의 프로이트는 전통적인 허상에 등장하는 프로이트보다 훨씬 더 흥미로운 사람인 것 같다. 허상보다는 현실에서 더욱 위대한 그는 비극적 영웅이기도 하다. 불편한 모든 질문을 무시해 버림으로써만 데카르트의 합리주의 세계와 영혼의 암흑세계 사이의 통합을 유지할 수 있었던 프로이트의 이론은 종국에는 무너져버리고 말 약한 이론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인간의 본성을 드러내는 좀더 매혹적인 이론인 동시에 인간적 감동을 주는 이론이기도 하다.[233]

 

트라운 트라우네크 : 전쟁에서 살아남은 사회주의자의 고백

 

당시에는 견습사원으로 직장생활을 한다는 것이 반드시 대학 공부를 포기한다는 의미도 아니었다. 정규직 사원으로 직장생활을 하면서 박사학위까지 취득하는 것도 가능했는데, 특히 법학 쪽에서 그런 경향이 두드러졌다. 나는 주변에서 그런 사람들을 심심찮게 만났다. 사실 전업이든 시간제든 직장을 갖지 않고서는 도저히 하루를 보낼 수 없을 정도로 법학은 공부할 내용이 적었다.[248]

 

하지만 학문의 세계에서는 학자나 연구자로서 일류가 돼야만 했다. 내게 글쓰기 재능이 있다는 사실은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지만, 과연 내게 연구나 학문적 사고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는 의문이었다. 나는 대학에 진학해 학문의 길을 가기 전에 내 능력을 검증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만약 부족한 면이 발견된다면 미련 없이 취업하는 것이다.[252]

 

나는 그분에게 법철학에서 가장 어려운 문제가 무엇인지를 물었다. ‘형벌의 이유를 설명하는 문제’라는 것이 삼촌의 답이었다. 그래서 나는 불과 열 여섯 살의 나이에 범죄의 형벌에 대해 연구하고, 그것에 대한 명쾌한 내용의 책을 써보겠다고 결심했다. 그래서 나는 매일 학교 수업이 끝나면 도서관에 가서 법철학자와 사회학자들의 저서를 탐독했다. 내가 사회학자들의 주장을 처음 접했던 시기가 바로 이때였다. 그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깊었고 오랫동안 지워지지도 않았다.[253]

 

그 무렵 나는 논리적 사고가 그리 뛰어나지 못했다. 물론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하지만 고된 독서를 통해 이들 위대한 사상가들이 엉뚱한 문제에 집착하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는 데 불과 몇 주밖에 걸리지 않았다. 만약 수 십 가지 설명들이 모두 전적으로 다르지만 자명한 사실을 전제로 해서 똑같은 결론에 도달한 뒤에 기초적인 논리를 주장한다면, 그것은 설명이 아니라 합리화이고 결국 요점을 벗어나게 마련이다. 내가 보기에 요점은 형벌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명백하게 형벌은 사회 속에서 인간이 존재하는 방식에 관한 하나의 사실이고, 그것을 정당화하기 위한 시도가 있든 없든 상관없이 모든 사회에 만연된 현실이었다. 진정 설명이 필요한 것은 범죄의 존재였고, 그것은 내 능력의 한계를 크게 초월하는 분야였다.[254]

 

전쟁이 가져온 가장 큰 피해는 새로운 세상을 건설할 수 있다는 우리의 희망을 파괴했다는 게 아니야. 그건 전쟁이 유럽을 구원할 수 있는 사람들을 전부 죽여버렸다는 거야. 전쟁으로 한 세대의 지배계층이 사라져 버렸어.[265]

 

“피터, 그거 아니? 오스트리아에 공화국이 성립하면서 사회주의자들이 정부를 구성했을 때, 그들이 내게 교육부 장관직을 제안했다는 사실 말이야. 그건 내가 늘 꿈꿔오던 자리였고, 게다가 나는 그 일을 맡을 준비도 되어 있었지. 하지만 나는 그 일을 맡을 수 없었어. 나는 단지 내 어린 시절의 친구들, 그리고 같은 이상을 갖고 있던 동지들의 죽음을 대가로 성공을 거둘 수는 없었던 거야. 때때로 나는 쓸모 없이 부서진 내 육체와 함께 아직도 살아서 돌아다니고 있다는 생각에 너무 심한 죄책감을 느낀 나머지 기꺼이 생을 마감하고 싶어질 정도니까. 단지 마리아가 아직도 나를 원하지만 않았다면....”[267]

 

사회주의는 1914년8월의 총성과 함께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때 사회주의 대중들은 프롤레타리아의 단결을 포기하고, 그 대신 열광적으로 민족주의를 수용하면서 동지들 간의 상장인 전쟁을 택했던 것이다. 그것은 신학으로서 마르크시즘의 끝이 아니었다 신학은 신앙보다 더 질겼다. 그것은 또한 정치세력으로서 사회주의자들의 끝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은 미래의 이상으로서 사회주의의 종말이었다. 비록 영원히 끝은 아닐지라도 적어도 하나의 세대 전체에 관한 한 말이다.[268]

 

오늘날 제1차 세계대전이 얼마나 심각하게 유럽의 지도층을 제거했는지 알고 있는 사람은 별로 없다. 트라운 트라우네크 백작의 말에도 불구하고 나 역시 몇 년이 더 흐른 뒤에서야 그것을 깨달았을 정도니 말이다. 나는 20대 초반에 커다란 신문사의 편집장이 됐는데, 내 능력이 그만큼 뛰어나서가 아니라 단순히 내 앞의 세대가 없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내가 스무 살이 됐을 때 주변에 30대는 거의 없었다. 이런 현상은 독일에서도 마찬가지였음이 틀림없다.[270]

 

영국의 몰락이 빅토리아 여왕이나 에드워드 7세 시절부터 시작됐다고 주장하는 것이 요즘의 유행이다.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을 통한 지도층의 전멸과 생존자의 의욕상실이 가장 중요한 요인임은 틀림없다. 영국은 젊은 장교들의 사망률이 다른 나라들보다 더 컸는데, 다른 나라의 지도층은 신사도에 얽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국식 신사도는 약간 무모한 행동을 요구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 결과 영국에서는 유럽의 다른 나라들보다 교육 받은 젊은이의 수가 훨씬 더 부족해졌다.[270]

 

트라운 트라우네크 백작과 마리아 뮐러도 탈출했다. 독일 군대가 위풍당당하게 빈으로 행진해 왔던 바로 그날, 그들은 조용히 동반자살했다.[275]

 

2부 명멸하는 시대의 사람들

 

폴라니 가 : 새로운 사회를 꿈꾸던 흥미로운 가족

 

그 커다란 목소리로 어찌나 빠르게 말을 뱉어내는지 마치 화산에서 돌맹이들이 튀어나오는 것 같았다.[281]

 

네 사람 모두 나를 쳐다보며 합창이라도 하듯이 동시에 말했다. “아주 훌륭한 생각이군요. 월급을 자신을 위해 쓰다니! 우리는 그런 소린 생전 처음 들어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대부분 그렇게 살아요.” 나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카를의 아내인 일로나가 단호하게 말했다. “우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니에요. 우리는 논리적인 사람들이죠. 빈은 헝가리 피난민들로 넘쳐 나고 있어요. 공산주의를 피해서 온 사람들과 공산주의에 이어진 백색 테러를 피해서 온 사람들이에요. 그들 가운데 상당수는 생계를 유지할 능력이 없지만 카를은 돈을 벌 수 있는 능력이 있어요. 그러니 카를의 월급은 다른 헝가리 사람들에게 넘겨주고, 우리가 나가서 필요한 돈을 벌어오는 것이 논리적인 일이죠.”[285]

 

그들은 19세기를 극복하려 했다. 자유를 추구하되 부르주아적이거나 자유주의적이지 않은, 번영을 이루되 경제에 종속되지 않는, 공동체를 지향하되 마르크스주의의 집산주의가 아닌 새로운 사회를 추구했던 것이다. 아버지와 다섯 형제는 각자 독자적인 길을 걸었지만 결국 똑같은 목표를 추구했다. 나는 그들에게서 똑같은 성배를 찾아 각기 다른 방향으로 길을 나선 원탁의 기사를 떠올렸다. [286]

 

협동조합 국가란 나라를 위해 공통적으로 헌신하는 여러 계급이 결속하고, 그 때문에 묶은 나뭇가지, 즉 영광스러운 로마 공화정의 유물인 속간처럼 부러지지 않는 강력한 국가를 의미한다.[290]

 

그러나 카를 자신은 크게 절망한 사람이었다. 그에게 선사학과 문화인류학은 존속 가능한 대안, 즉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를 뛰어넘는 좋은 사회에 대한 탐구에 뒤따르는 부차적인 것이었다. 그가 경제사에서 발견하고 싶었던 것은 미래에 대한 해답이었다. 하지만 그는 점점 더 수수께끼 같은 과거 속으로 들어갔다. 선사시대로, 원시경제로, 고전고대와 고전기 이전의 고대로 파고들면 들수록 시장이 없는 좋은 사회는 더욱 더 찾기 어려워졌다.[305]

 

그는 노예무역이 오랫동안 알려져 왔던 것처럼 자유를 사랑하고 화목하게 사는 흑인 종족사회에 사악한 외부인(동양의 아랍인, 서양의 백인)이 우격다짐으로 강요한 일이 아님을 발견했다. 실제로는 흑인 왕과 추장들이 노예상인을 불러들여 노예투매를 조직하고 지휘하고 지원했던 것이다. 그 이유 가운데 일부는 자기 부족이나 왕국 외부의 경쟁자나 적을 파멸시키거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서였고, 또 다른 일부는 자기 부족에 대한 통치권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총 같은 물건과 교환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대부분은 호혜와 재분배를 기초로 공동체의 안정성을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306]

 

그러나 그들이 특별한 이유는 그들의 삶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품었던 이상과 실패 때문이었다. 폴라니 가의 사람들은 각자 많은 것을 이루어냈다. 그들은 모두 사회의 구원에 의한 구원을 믿었다. 하지만 그 후에 사회에 대해 단념하고 절망했다.[309]

 

크레머 : 키신저를 만든 외교정치 고문

 

비스마르크는 ‘외교할 때는 절대로 영리하게 보이지 말라. 단순하고 정직하라’는 오랜 규칙을 거만하게 무시했다.[337]

 

위대한 인물이 없으면 비전도 리더십도 우수함과 업적의 기준도 없다. 또한 공적인 일에서 평범함은 살아 남지 못한다. 그러나 예술이나 과학과는 달리 공적인 일에서는 개인적인 성취 외에도 연속성이 필요하다.[338]

 

스스로 힘을 갖고 있으며 뒤에 힘을 남겨놓는 지도자, 즉 진정으로 ‘위대한 사람’이자 진짜 ‘지도자’는 일반적인 통념과는 전적으로 다른 모습이며 다르게 행동한다. 그는 사람들을 카리스마로 이끌지 않는다. 카리스마는 언론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가짜다. 진정으로 강한 사람은 노력과 헌신으로 이끈다. 모든 것을 자기 손아귀에 집중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팀을 구성한다. 조종이 아닌 성실성으로 지배한다. 영리한 것이 아니라 단순하고 정직하다.[339]

 

헨슈와 셰퍼 : 나치즘이 불러온 개인의 비극

 

“베르톨르, 난 한 가지는 알아. 만일 나치가 정권을 잡게 되면 나는 독일에 있지 않을 거야.” 그때까지 나는 그 문제에 대해 제대로 생각해본 일이 없지만 제 자신이 말하는 것을 듣고 이미 내가 마음을 그렇게 정했다는 것을 알았다. 또 내가 마음속으로는 나치가 정권을 잡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음을 알았다.[345]

 

나치의 대량학살 책임자였던 아이히만에 관한 책에서 독일계 미국인 철학자인 한나 아렌트는 ‘악의 평범함’에 대해 말한다. 하지만 이는 아주 적절하지 않은 표현이다. 악은 절대 평범하지 않다. 악행을 하는 사람이 평범할 뿐이다. 아렌트는 스스로 ‘위대한 죄인’이라는 낭만적인 환상에 빠져버렸다. 그러나 세상에는 수많은 이아고, 엄청난 죄를 짓는 평범한 사람들, 그리고 약간의 맥베스 부인이 있다. 악은 극악무도하고 사람은 평범하다는 그 사실 때문에 악은 헨슈나 셰퍼같은 사람을 통해 작용한다. [363]

 

악은 절대로 평범하지 않지만 인간은 평범한 경우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어떤 조건으로든 악과 흥정해서는 안 된다. 그 조건은 언제나 악의 조건이지 인간의 조건은 아니기 때문이다. 헨슈처럼 악을 자신의 야망에 이용하겠다고 생각할 때 인간은 악의 도구가 된다. 그리고 셰퍼처럼 더 나쁜 것을 막기 위해 악과 손을 잡을 때 인간은 또한 악의 도구가 된다.[364]

 

나는 가끔 이 둘 가운데 어느 편이 더 해로울까를 생각한다. 괴물일까, 어린 양일까? 그리고 권력을 탐한 헨슈의 죄와 셰퍼의 자기과신과 오만의 죄 가운데 어느 편이 더 나쁜 것일까를 생각한다. 그러나 가장 커다란 죄는 아마도 이 두 가지 고전적인 죄가 아닐 것이다. 가장 커다란 죄는 20세기에 새로 나타난 무관심의 죄, 아무도 죽이지 않고 거짓말을 하지도 않았지만 오래된 찬송가 구절처럼 “그들이 내 주를 십자가에 못박았다”고 증언하길 거부한 저명한 생화학자의 죄가 아닐까?[364]

 

브레일스포드 : 영국의 마지막 반체제자

 

노엘 브레일스포드는 절대로 권력자가 아니었다. 그는 양심이었다. 그는 딱 한 번 하원의원에 입후보한 적이 있었지만 완전하게 패배했다. 그래서 오히려 구제될 수 있었다. 정치가가 됐다면 그는 6개월도 안 돼 파멸했을 것이다. 그는 영국의 마지막 ‘반대자’였으며, 그 때문에 중요한 사람이 됐다. 그가 실제로 어떤 사람인가보다는 그가 무엇을 대표하느냐가 더 중요했다.[367]

 

그는 완전한 외톨이었다. 그는 오래된 영국의 전통을 대표했다. 그것은 프롤레타리아의 결속 보다는 동정심에 호소하는 전통, 부자에 대한 보복보다는 가난한 자를 위한 전통, 정부의 행동보다는 개인적 변화, 그리고 번영보다는 존엄성의 전통, 힘보다는 양심의 전통이었다. 근본적인 소수의견과 전통이었다. 브레일스포드는 기인이나 괴짜가 아니었다. 그는 양심이었다.[375]

 

브레일스포드는 정직성을 의미했다. 독립성을 의미했다. 이기적이지 않음을 의미했다. 특히 당시(늘 그렇듯이) 정치와 정치인을 신뢰하지 않던 젊은이와 지성인에게 그는 그런 의미였다.[388]

 

브레일스포드의 힘은 언제나 그가 양심의 결과를 생각하지 않는다는 데 있었다. 그것이 언제나 반대자의 힘이었다. 그러나 자신이 한 일을 원상 복귀시키는 것 역시 반대자의 힘이라는 것을 브레일스포드는 잘 알고 있었다.[390]

 

찰스 디킨스의 작품 가운데 가장 강하고 어두운 소설인 ‘어려운 시절(1854)’의 주인공이자 반대자인 스티븐 블랙풀은 자신이 양심이 권력과 야합하지 못하게 했기 때문에 의심 받고 추방당해 파멸에 이른다. 그의 죽음조차도 실패였다. 그가 죽었어도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고 아무런 동요도 없었으며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다. 디킨스의 19세기형 반대자는 순교자조차 아니었다. 그는 단지 사상가였을 뿐이다.[395]

 

20세기 현실의 반대자인 노엘 브레일스포드는 효과를 위해 자신의 양심을 권력에 맞추려고 노력했다. 그러자 그는 더 이상 쓸모가 없어졌다.[396]

 

프리트베르크 : 19세기의 탁월한 개인금융업자

 

“말도 안 되는 소리!” 프리트베르크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어떤 정부든 반드시 훌륭하고 바른 일을 해야 한다고 믿지 말게. 정부란 일반 서민을 속여서 돈을 뜯어내기 위해 생긴 거야. 정부가 반드시 지켜야 하는 법이란 그들이 깨뜨릴 수 없는 자연의 법칙뿐이지.”[411]

 

프리트베르크의 말에 내가 항의했다. “하지만 사장님, 루이스는 부기부서에서도 가장 어린 직원 아닙니까? 그리고 며칠 전에 보셨다시피 좀 멍청해요.” “바로 그거야. 그가 자네의 제안서를 이해하면 그대로 할 걸세. 그가 이해하지 못하면 그건 자네 제안서가 너무 복잡하다는 뜻이야. 어떤 일이든 반드시 멍청한 사람이 다룰 수 있어야 해. 결국 일은 늘 멍청한 사람들이 하게 마련이거든.”[412]

 

“우리는 이 회사의 공동경영자를 위한 일종의 비서로서 자넬 채용한 거야. 그런데도 자넨 회사에 도움이 될 일을 해서 봉급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도통 생각하지 않는군. 오늘이 금요일이니까 다음 주 화요일까지 자네의 계획표를 서면으로 제출하게. 자네에게 맡겨진 일을 더 잘 해나가려면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잘 생각해 보란 말이야.” 내가 화요일에 목록을 만들어가자 그는 한 번 쭉 훓어 보더니 말했다. “80퍼센트 정도는 됐군. 하지만 아직 20퍼센트가 부족해.” “부족한 점이 무엇인지 말씀해 주십시오.” 주말 내내 그 일에 매달려 있었고, 결과물에 상당히 만족했던 나는 그렇게 물었다. 피노키오를 닮은 코 끝에 반달모양 돋보기를 걸친 그는 딱딱하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것까지 일일이 알려주려면 봉급은 왜 주나?”[416]

 

소매에는 오직 두 가지 원칙만 있네. 첫 번째 원칙은 '2 센트 에누리에 안 넘어오는 고객은 없다' 이고, 두 번째 원칙은 '진열해 놓지 못한 상품은 팔 수 없다'는 거지. 나머지는 모두 노력이야.  어리석은 고객은 없어. 단지 상인이 게으른거지. 고객이 자기 생각대로 행동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들이 어리석다고 말해서는 안 돼. 고객을 ‘재교육’시키려고 해서도 안 돼. 그건 상인이 할 일이 아니거든. 상인이 할 일은 고객을 만족시키고 그들이 다시 찾고 싶게 만드는 것이지. 만일 고객이 어리석게 행동하는 것 같다면, 밖으로 나가 고객의 입장에서 상점과 상품을 살펴보는 거야. 그러면 그들이 합리적으로 행동한다는 것을 알게 되지. 단지 그들의 현실이 상인의 현실과 다를 뿐인 거야.”[424]

 

“재무제표 따위는 볼 필요도 없다. 난 네가 태어나기 훨씬 전부터 그런 것들은 원하는 대로 조작했으니까. 이번에 그 체인에서 10여 명의 구매자들과 얘기를 해보았다. 그들은 아주 영리하더구나. 하지만 다들 회사를 위해 싸게 구매하고 있었지. 고객을 위해 싸게 구매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건 잘못된 일이야. 고객을 잃고, 매출을 잃고, 수익을 잃게 된다는 의미다.”[427]

 

나는 좋은 예술가난 좋은 과학자의 마음과 마찬가지로, 좋은 상인의 마음은 헨리 아저씨의 마음이 움직이는 식으로 가장 분명하고 가장 구체적인 것에서 시작해서 일반화에 이르게 된다는 사실을 배웠다.[428]

 

지금 우리는 다시 헨리 아저씨와 찰리 켈스타트가 필요하다. 우리는 너무 멀리 가버렸다. 검증되지 않은 수량화에 의존하고, 경험보다는 가정에 근거한 논쟁을 하고, 대칭적이고 형식적일 뿐인 모델을 만들고, 구체성을 지닌 견고한 현실을 다뤄보지도 않는 채 관념에서 관념으로 움직인다.[430, 431]

 

우리는 지금 서양에서 체계적인 분석과 사고가 막 시작됐을 때 플라톤이 자신의 가장 아름답고 감동적인 두 개의 대화편, 즉 인생을 시작하는 젊은이 파이드로스와의 대화를 담은 <파이드로스>와 소크라테스가 죽는 날 아침에 나눈 대화를 담은 <크리톤>에서 가르친 것을 망각하는 위험에 직면해 있다. 그 두 개의 대화편은 우리에게 논리의 시험을 거치지 않은 경험은 '웅변'이 아니라 잡담이며, 경험의 시험을 거치지 않은 논리는 '논리'가 아니라 부조리라고 가르친다.[431]

 

 “우리에게 정식으로 소개시켜 달라고 하지 그러셨소? 그 회사와 회장을 다 알고 있는데 말이오. 영국에서는 제대로 된 소개가 없으면 비즈니스를 하지 않아요.” 프리트베르크가 말했다. “바로 그 점 때문에 부탁드리지 않은 겁니다. 전 다른 사람이 하는 방식대로 일하지 않습니다.”[438]

 

사람은 돈을 벌기 위해 일할 때 가장 순수하다.- 새무얼 존슨[448]

 

로베르트와 파르크 하슨 : 사업가에 여성이 미친 영향

 

여성 혐오자이면서 성을 적대시했던 톨스토이가 나타샤와 안나 카레리나를 유럽 소설 가운데서 가장 여성적이고 매력적인 두 여인으로 묘사한 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461]

 

3부 순수의 절정기

 

헨리 루스 : <타임>, <포춘>, <라이프> 잡지 왕국의 제왕

 

내가 아는 최고의 편집자는 모두 자신의 출판물에 들어가는 것은 한 자도 빠짐없이 읽고 손질하고 다시 쓴다. <뉴욕>의 해럴드 로스가 그랬고, <새터데이 이브닝 포스트>의 호레이스 로리머가 그랬고, <맨체스터 가디언>의 스콧, <베를리너 타게블라트>의 테오도어 볼프, <1870년대 런던의 <이코노미스>의 월터 배젓이 그렇게 했다. 좋은 편집자는 관대하지 않다. 그들은 동료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 ‘신문이 해야 할 일’을 하게 만든다. 위대한 편집자는 인정사정 없는 지독한 독재자다. 그에 반해 루스의 집단 저널리즘은 개개의 기사를 기계적으로 통일시켜 신문을 비인간적인 것으로 만들려고 했다.[470]

 

나는 글을 쓰는 일이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는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책을 내는 것은 공격해 달라고 청하는 것이다. 게다가 내 책은 논쟁을 불러일으키게 되어 있었다.[474]

 

루스는 타임, 라이프, 포춘에 능력있는 사람들을 무척 많이 고용했다. 그러나 일단 직원이 되고 나면 대부분이 일생동안, 심지어는 회사를 떠나고 나서도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다. 돈을 많이 주고 호사를 시킨 루스의 친절이 그들을 망쳐버린 것이다. 과연 내게 그런 것을 버틸 만한 꿋꿋함과 성숙함이 있었는지는 지금도 의문이다. [475]

 

그러나 한편으로 나는 루스가 권모술수가가 아니라 훨씬 더 흥미로운 인물이라는 것도 깨닫게 됐다. 그는 중국인에 가까웠다. 나는 헨리 루스가 사람을 다루는 방법을 연구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중국의 고대 한나라부터 내려온 조직운영방식을 적용했다. 헨리 루스가 잡지를 운영하는 방식대로 마오쩌뚱은 정권과 당을 운영했다. 파벌을 조성하고, 직함과 책임이 있는 사람을 피해 일하고, 하급자들이 자기에게 오도록 장려하지만 상급자에게는 말하지 않게 이르고, 반목과 상호불신과 반대파가 유지되게 하는 것이었다.[489]

 

지식인은 더 이상 여러 분야의 아마추어가 아니라 자신의 전문분야를 지식의 영역과 결부시킬 능력이 있는 전문가다.[493]

 

20세기 초반에 <새터데이 이브닝 포스트>를 미국의 가장 성공적인 잡지로 만든 호레이스 로리머는 ‘잡지수입은 광고에서 나오며 구독은 기본적으로 광고수입을 얻기 위한 판촉’이라고 역설했다…로리머의 원칙은 후에 미국의 출판업자와 미국잡지 투자자 사이에서 하나의 신조가 되었다…그러나 이는 헛소리다. 구독(가두판매)에서 수지가 맞지 않는 잡지는 소멸하게 마련이다.[495]

 

맥루안이 ‘인쇄된 말은 죽었다’고 한 말은 맞지 않는 이야기다. 죽은 것은 우편으로 배달되는 말이다. 편집자와 독자에게 중요한 건 메시지일 뿐 전달자가 누구인가가 아니다. [496]

 

나는 누구보다 잡지를 높게 평가한다. 잡지는 현대문명의 중요한 업적이다. 특히 무한한 개성을 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497]

 

풀러와 맥루안 : 테크놀로지의 위대한 예언자

 

맥루안에게 기술이란 인간의 자기 완성이며, 인간이 자신을 변화시키고 성장시켜 완성해 가는 수단이다. 다시 말하면, 동물이 자연적인 진화를 통해 특정 기관을 새롭게 발달시켜 다른 동물이 되는 것처럼, 인간은 새로운 도구를 개발해서 자신을 성장시키고 다른 인간이 된다는 것이다. [508]

 

맥루안의 가장 중요한 통찰력은 “미디어는 메시지다”가 아니라, 기술이 ‘단순한 수단’이 아니라 ‘인간의 확장’이라고 본 것이다. 기술은 ‘인간의 주인’은 아니지만,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을 변화시킨 바로 그만큼 인간과 인간의 본성, 그리고 인간의 정체성을 변화시켰다.[524]

 

버키 풀러와 마셜 맥루안은 내게 한 가지 목표에 정진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지를 실례로 보여준 사람들이다. 한 가지 일에만 전념하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어떤 것을 이룰 수 있다. 나를 포함해서 나머지 사람들은 좀 더 다양한 재미를 즐기기는 하겠지만 시간을 그저 흘려보낸다. 하지만 풀러나 맥루안 같은 사람은 ‘사명’을 수행한다. 어떤 일이 달성될 때마다 나는 그것이 사명감을 갖고 한 가지에 정진하는 사람들이 해낸 일이라는 것을 배웠다. 버키는 자신을 따르는 추종자도 없이 황무지에서 40년을 보냈다. 그러나 그는 동요하지 않고 자신의 비전에 헌신했다. 맥루안은 비전을 찾는 데 25년을 소비해서 마침내 비전이 그를 붙잡았다. 그 역시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그리고 두 사람은 모두 자신의 시대가 왔을 때 영향을 주었다.[526]

 

앨프레드 슬론 : 절대적 권위로 GM을 이끈 전문경영인

 

지금으로부터 불과 40년도 안 되는 과거에는 고등교육이 제조업에서 뿐만 아니라 금융업계와 심지어 공직에서조차 자산이라기보다는 장애였다는 사실은 오늘날 믿기 힘든 일이다. 정식교육을 받은 사람이 ‘비실용적’이라고 치부되는 것, 슬론의 세대를 특징짓는 이 같은 선입견은 오늘날 학위취득에만 미친 사람들이 성실히 일하는 젊은이들을 무시하는 편견보다는 덜 해로웠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세대가 가지고 있던 편견에 대해 비난하지 않고 GM 기술연구소를 대중에게 알리기를 거부하던 슬론의 태도가 오늘날 가능하면 오랫동안 일하지 않고 여러 개의 학위를 취득하는 데만 열중하는 풍조에 어느 정도의 책임이 있다는 생각을 가끔씩 해보게 된다. 그 당시 미국 산업계는 그가 이끄는 곳으로 따라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 슬론이 GM 기술연구소를 대중화시키는 선례를 세우기만 했더라도 오늘날 우리는 노동과 교육에 있어 좀 더 바람직한 균형을 이룰 수 있었을 것이다.[539, 540]

 

이 책은 경영학(이전에는 사람들에게 알려지지도 가르치지도 않았던)이라는 학문분야를 세우는 성과를 거뒀다. <<기업의 개념>>이 지난 30년 동안 지속됐던 ‘경영학 선풍’을 일으킨 것은 내겐 행운이었다. 나는 우연히 그런 시류의 선구자격인 사람이 됐다. 어쨌든 경영학이라는 학문의 주요한 관심사인 조직과 사회적 책임, 개인과 조직의 관계, 최고경영자의 기능과 정책결정 과정, 관리자의 양성, 노사관계, 집단관계, 소비자관계(심지어는 환경까지도) 등이 모두 <<기업의 개념>>에서 다루어졌을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주제들은 이 책에서 처음으로 다뤄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543]

 

그 문제에 확신이 서지 않았던 나는 그에게 솔직하게 말했다. 윌슨이 1950년에 자신의 연금계획을 통과시켰을 때 나는 그 계획을 ‘연금의 신기루’라고 명명하며 신랄하게 비평하는 기사를 <하퍼스 매거진>에 실었다. 나는 회사의 연금은 개인의 유동성을 구속하고, 연금을 주는 것, 다시 말해 근로자에게 자기들의 연금에 대해 기득권을 갖게 하는 것은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높은 연금 부담을 가중시킬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나는 그런 계획이 규모가 적고 힘들게 운영되는 영세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에 비해 돈이 많고 성공한 기업에서 일하는 근로자들에게 불공평한 이득을 주는 결과를 낳게 된다고 주장했다. 또한 진보적인 세금 과세에 기초한 보편적인 정부연금정책을 지지한다고 주장했다.

 

내가 내세운 주장들을 결국 옳았지만 현실과 동떨어져 있었다. 윌슨의 계획은 세상에 널리 퍼져서 지금까지 미국에는 50만여 종류의 개인 연기금이 있다. 예상대로 이것들은 모두 나름의 결함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 연기금들은 미국 경제를 조정하고 미국의 대기업, 또는 중견기업의 주식자본의 3분의 1을 소유하고 있다. 또한 머지 않은 미래에 고용인이나 그들의 대리인은 연기금 위원회에서 막강한 발언권을 행사함으로써 근로자가 현실을 좌지우지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내가 1950년 <하퍼스 매거진>에서 예언했듯이 연기금은 바닥이 날 수도 있다. 하지만 연금은 이미 미국의 근로자들을 자본가로 탈바꿈시켜 놨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은 모형제작소 노조지부장이자 유진 데브스를 신봉하던 사회주의자이며 GM의 회장이자 위대한 자본주의자인 찰리 윌슨이 진정으로 원하던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575, 576]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당신이 실패하면, 드레이스타트 씨, 당신은 캐딜락에거 직업을 잃게 되겠죠. 캐딜락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될 테니까요. 하지만 GM이 있는 한, 내가 이끌고 가는 한, 자기 책임을 다하고, 솔선수범하며, 용기와 상상력이 있는 사람을 위한 자리는 언제나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슬론 씨는 계속 이렇게 말했어요. ‘당신은 캐딜락의 미래를 걱정하세요. 하지만 GM에서의 당신의 미래는 내가 걱정하겠소.’”[577]

 

그는 자기가 한 약속대로 내 연구를 인정하지도 않았고, 한 번도 그것이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끝까지 지원해 주고 내가 최고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579]

 

우리가 사람들을 배치하고 적절한 자리에 임명하는 사안에 대해 네 시간씩 사용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아마 우리의 실수를 처리하느라 4백 시간을 소비해야 할 거고 내겐 그럴 만한 시간이 없어요.[582]

 

슬론은 이렇게 말했다. “어떤 사람들은 혼자 있기를 좋아하지만 난 항상 좋은 친구들을 곁에 두고 싶어하죠. 하지만 나는 직장에서 친구를 만들지 않아야 할 의무가 있어요. 나는 공평해야 하고 누군가를 편애하는 모습조차도 내 비쳐서는 안 돼요. 사람들이 어떻게 업무를 달성하느냐 하는 것이 바로 내가 할 일이죠. 그들의 의견과 그들이 자신의 몫을 완수하는 방법을 찬성하느냐 마느냐가 내 임무는 아닙니다.” 그는 특정 인물에 대해 개인적인 의견을 말한적이 한 번도 없다. 늘 그들의 성과에 대해서만 논했다.[588, 589]

 

슬론은 째째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미국 경제와 산업의 역사에서 자신의 위치를 높이 평가했다. 하지만 검소했고 개인적인 허례를 싫어했다. 그가 있는 사무실은 황무지와 다름없었다. 디트로이트에 머무는 동안 그는 호텔 스위트 룸이나 별도의 아파트도 없이 GM 빌딩의 꼭대기 층에 있는 아무것도 갖춰지지 않은 방에서 잤다. 그는 개인 식당을 사용하지 않고 간부용 카페테리아에서 식사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내가 필요한 건 침대가 전부예요.”[590]

 

슬론은 결정을 내릴 때 사람 수를 세거나 투표를 통해서 하는 적이 거의 없었다. 그는 이해를 통해서 결정을 내렸다.[595]

 

전문가란 자신의 관심사와 신념과 사생활을 공적인 업무와 분리할 수 있는 사람을 뜻했다. 슬론에게 개인적으로 중요한 것은 어떤 것이라도 개인적이라는 이유만으로 전문적으로 주의해야 할 대상이 됐다.[602]

 

"권위와 책임은 반드시 일치해야 하고, 서로 균형이 잡혀야 합니다. 만약 당신이 권위를 원하지도, 그것을 가져야 할 필요도 없다면, 책임에 대해서는 말하지 맙시다. 또한 당신이 책임을 원하지도 않고 책임질 이유가 없다면 권위에 대해서 논하지 맙시다." -앨프레드 슬론[605]

 

그들은 항상 ‘공적 책임’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들 스스로 ‘전문적’인 것에만 제한하려는 고집 때문에 공격을 받았다. 우리가 살고 있는 복잡한 사회에서 조직들은(그리고 그 조직을 관리하는 ‘전문인들’까지도) 반드시 공공복리를 위한 책임을 져야 한다. 그것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전문경영자밖에 없다. 모든 역사는 다원론의 사회가 분쟁과 공공의 복리를 만들어내고 공익을 위해 봉사하기 위한 특별한 ‘관심사’들의 분쟁과 합류에 의지할 수 없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다.[606, 607]

 

그 밖의 사람들 : 대공황 시기 미국 사회에 대한 스케치

 

서로가 도우면서 살아가는 자세는 대공황에 대한 미국인만의 대처법이었다. 다른 나라에서는 그와 같은 현상이 없었고, 오히려 대공황으로 인해 의심과 무뚝뚝함, 두려움, 질시만 더 깊어졌다. 대공황에 대응하는 미국인의 방식은 자연재해를 극복할 때와 똑같은 방식이었다. 지진이나 홍수, 태풍이 지나간 뒤에 그렇듯이, 공동체는 서로의 간격을 좁히고 각자가 상대방의 구원자가 됐다. [621]

 

경제적으로 경기 침체는 ‘재앙’이 아니라 일종의 ‘새로운 정상상태’다. 하지만 ‘중심을 유지하지 못하겠다’고 느꼈던 유럽과는 달리 미국은 ‘중심’을 유지했다. 사회와 공동체가 건전하고 활력이 넘쳤으며, 사실 의기양양하기까지 했다 나는 이것이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진정 놀랍고 진정 역사적인 성취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따라서 그의 경제정책이 형편없는 실패작이었다는 사실은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627]

 

흑인 소작농을 밀어낸 것은 바로 풍요의 경제학이었다. 흑인이 구시대 남부에 대해 향수를 품게 된 것은 한 세대가 지나 최근에야 발생하기 시작한 현상이다.[643]

 

아메리카 합중국은 다른 나라들처럼 하나의 국가나 제도가 아니라 가치관이다. 뉴딜 정책에 대한 논쟁의 핵심쟁점은 이런 또는 저런 정책이 옳은지의 여부에 관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미국적이냐 아니냐에 관한 것이었다.[674]

 

 

 

 

내가 저자라면

 

책의 주제와 구성

 

이 책은 ‘피터 드러커 자서전’으로 번역되었지만, 원제 ‘Adventures of Bystanders’에서 느낄 수 있는 것처럼 피터 드러커와 동시대를 살았던 주변 인물들의 특이한 삶과 행적을 통해 드러커가 파악하고 통찰한,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시대적 생활 및 사고의 방식, 관념의 틀을 제시한 책이다. 즉, 기존의 자서전처럼 자신의 살아온 행적을 통해 자신이 살아온 방식과 시기별 사고의 흐름을 나타내는 방식이 아니라 자신이 공감하거나 통찰을 느낄 수 있도록 했던 자신의 주변 사람들의 행적을 통해 자신이 이해하거나 주장하고자 하는 바를 기술한 독특한 형태의 자서전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자서전적인 특징은 다음과 같이 드러커가 기술한 설명에 잘 드러나 있다:

l       “이 책에 기술한 인물들은 내게 중요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선택됐다. 그들이 내게 중요했던 것은 자신들이 속한 사회를 내게 반사하거나 굴절시켜 보여주었던 방식 때문이었다.”

l       “이 책은 단편적인 이야기들을 모아놓은 것이고 각각의 이야기는 서로 연관성이 없다. 하지만 이 모든 이야기를 한데 합치면, 개인들과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사회가 구성된다는 사실이 드러날 것이다.”

 

이 책은 일반적인 피터 드러커의 책과는 참 많이 다르면서 또한 일관성을 가지고 있다. 차이점은 실제 역사적 인물들을 소설적으로 서술하고 있다는 점이고, 일관성은 사람들에 대한 관심을 통해 그들의 삶을 관통했던 인간과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과 그들의 행적(기실은 이것이 바로 경영일 것이다)을 통해 드러커 자신이 영향을 받거나 혹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경영 철학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경영 이론을 인간 행위와 관계에서 시작한다는 점에 커다란 일관성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내가 받은 긍정적 영향

 

우리는 자신의 자서전, 즉 나의 행적 혹은 개인사를 통해서만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이야기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런데 드러커는 자신의 인생에서 만났던 독특하지만 개성과 관념이 있는 ‘의미있는 타인’들을 통해 자신이 중요하다고 느낀 철학, 사상, 행동 양식을 기술하고 있다. 참으로 창의적이면서 공감이 가는 서술 방식이면서 동시에 타인에 대한 관심과 이해, 세밀한 관찰과 공감의 기록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이 책을 통해 다시 한 번 자신의 시대와 주변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주도적 관찰 및 기록’의 중요성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되었다. 또한, 의미있는 타인을 통해 사고 방식의 다양성과 변화 과정을 더 심도 있게 이해할 수 있음도 깨닫게 해 주었다.

 

그밖에도 등장 인물들의 시대적 배경인 20세기 중반의 유럽과 미국의 역사와 사회에 대해서 할머니, 사회주의자, 학자, 금융업자, 기술전문가, 전문경영자 등 일반적이면서도 나름의 독특한 개성과 특징을 갖는 사람들을 통해 이해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 주었다. 또한 그 안에 숨어있는 사고와 패러다임의 변화를 소설적인 서술을 통해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기억하고 싶은 문장들

 

다른 드러커의 책과는 달리 이 책에서는 등장하는 인물의 개성을 살펴볼 수 있는 위트 있는 문장들을 만나는 기쁨이 상당했다. 여기에서는 이런 문장들을 골라 봤다.

 

“얘들아, 밖으로 나갈 때는 항상 깨끗한 속옷으로 갈아 입거라.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란다.” 손녀들 가운데 한 명이 반쯤은 우습고 반쯤은 기분이 상해서 할머니에게 말했다. “하지만 할머니, 전 그런 종류의 여자가 아니에요.” 그러자 할머니는 이렇게 대꾸했다. “네가 어떤 종류의 여자인지는 그때 가서 보지 않고서는 결코 알 수 없지.”[51]

 

à 남녀와 상관없이 인간의 행동의 불확실성을 꽤 뚫은 참으로 통렬한 지적이 아닐 수 없다. 이 말은 쓸데없는 혹은 근거 없는 자신감의 허무성과 동시에 결국 인간은 그 순간에 자신의 의지로 행동을 결정하는 것이 인간임을 다시 한 번 상기시켜 주는 글이라고 생각된다.

 

“다른 사람에게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묻지 마라. 항상 그들에게 할 일을 지시하라.” 이것이 그녀의 좌우명이었다. “만약 그것이 잘못됐거나 더 나은 방법이 있다면 그들은 그 사실을 지적해 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그들에게 무엇을 하라고 말해 주지 않으면, 그들은 행동보다는 연구에 몰두할 것이다.”[119]

 

à 일이 중심사가 되는 팀 혹은 모임에서 반드시 필요한 자세라고 생각된다.

 

“그것이 인간의 희생을 요구한다면 원칙이란 내게 전혀 필요 없는 물건이야.”

 

à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다. 이 책에서 가장 나의 뇌리를 때린 중요한 말이다. 경구처럼 다가왔다.

 

“그리고 너는 네 장점 가운데 하나를 살리지 못하고 있는 게 있는데 그게 뭔지 아니?” 나는 머리를 가로 저었다. “너는 작문에도 능해. 하지만 별로 연습을 하지 않는 것 같더구나. 너도 동의하니?” 이때는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됐다. 그럼 그것을 목표로 삼자. 일주일에 두 개씩 작문을 해서 제출하렴. 하나는 네가 쓰고 싶은 내용을 마음대로 쓰고, 나머지 하나는 내가 주제를 정해 주마.”[160]

 

à 이 말은 보면서 현재의 선생님과 연구원인 우리의 관계가 떠올랐다. 시간이 지난 후 우리는 이 글처럼 지금 이 시간을 기억하게 될 것이다.

 

스스로 힘을 갖고 있으며 뒤에 힘을 남겨놓는 지도자, 즉 진정으로 ‘위대한 사람’이자 진짜 ‘지도자’는 일반적인 통념과는 전적으로 다른 모습이며 다르게 행동한다. 그는 사람들을 카리스마로 이끌지 않는다. 카리스마는 언론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가짜다. 진정으로 강한 사람은 노력과 헌신으로 이끈다. 모든 것을 자기 손아귀에 집중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팀을 구성한다. 조종이 아닌 성실성으로 지배한다. 영리한 것이 아니라 단순하고 정직하다.[339]

 

à 두고두고 새겨야 할 리더십의 명문이라고 생각된다. 또한 향후 창조적 소수를 얻는 방법의 핵심 원칙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머지는 모두 노력이야.  어리석은 고객은 없어. 단지 상인이 게으른거지. 고객이 자기 생각대로 행동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들이 어리석다고 말해서는 안 돼. 고객을 ‘재교육’시키려고 해서도 안 돼. 그건 상인이 할 일이 아니거든. 상인이 할 일은 고객을 만족시키고 그들이 다시 찾고 싶게 만드는 것이지. 만일 고객이 어리석게 행동하는 것 같다면, 밖으로 나가 고객의 입장에서 상점과 상품을 살펴보는 거야. 그러면 그들이 합리적으로 행동한다는 것을 알게 되지. 단지 그들의 현실이 상인의 현실과 다를 뿐인 거야.”[424]

 

à 만약에 장사 혹은 사업을 한다면 두고 두고 새겨야 할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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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희향
2009.10.06 15:21:52 *.206.74.156
나두 작문 부분보면서 그런 생각했는데~
오빤 이미 그런 리더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걸~ ^^

근디 오빠야. 바쁘다며 어째 이리 충실한 리뷰가 나온겨...?
참말로 대단대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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