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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양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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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4월 18일 00시 05분 등록

1. 저자에 대하여

조셉 캠벨의 <신화의 힘>, <신화와 인생>에 이어 세 번째 책을 읽게 되었다. 앞의 두 권의 책은 캠벨의 저서가 아닌 대담집과 역서이다. 따라서 이번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이 내가 접한 최초의 그가 직접 쓴 책이다. 이 책은 1949년 발간된 캠벨 최초의 단행본이기도 하다. 캠벨은 이 책으로 전 세계 수많은 신화의 원형을 정리하여 제시함으로써 사회적으로 명예를 얻게 된다. 앞의 두 권의 책을 통해 저자에 대한 조사는 어느 정도 되었다고 생각되므로, 개인적인 관심사인 그의 종교관과 신화로의 연결점에 대해서 간단히 살펴보고자 한다.

<조셉 캠벨의 종교와 신화>

그의 종교적 모태는 카톨릭이다. 어려서 그는 아메리카 인디언의 신화에 빠져 지냈고, 얼마지 않아 인디언 신화 속에 학교에서 수녀 선생님에게 들은 것과 똑같은 모티브가 있는 것을 알고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힌두교에 관심을 가졌을 때도 같은 이야기를 발견했고, 대학 졸업 논문을 중세의 아더왕 이야기를 다루었는데 거기에도 같은 이야기가 있었다고 한다.(신화의 힘, 39-40쪽) 거기서부터 다양한 신화의 원형이라는 것이 있을 것이라는 본 책의 가설이 태동되었던 것이다.

캠벨은 1924년 유럽 여행을 떠나게 된다. 그는 인도의 종교가 지두 크리슈나무르티를 만나 힌두교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유럽에서 그는 현대 예술을 만나게 된다. 제임스 조이스, 피카소, 몬드리안 등이었다. 독일에서는 산스크리스트어를 공부하면서 힌두교를 공부하게 되었고, 융을 발견하게 된 것도 독일에서였다.(신화와 인생, 86쪽) 그때부터 그는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고 고백한다. 그는 신화연구자로서 카톨릭 교회로부터 떠나게 된다. 그 시대 많은 젊은이들이 그랬었다. 그는 미국에 돌아와 자신이 카톨릭 신자가 아님을 밝힐 수밖에 없었다. 그가 찾은 세계는 카톨릭의 배타성이나 자연정복 사상, 인격신에 대한 믿음, 성경의 문자주의적 해석(문자그대로를 믿는 것), 제의의 상징성을 무시하고 교파적 의례만을 중요시하는 것 등과 양립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에게 이는 비판의 대상일 뿐 아니라 이단이라는 멍에를 씌울 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세계대전 후 기독교가 가진 식민주의적 야만성과 '너 죽고 나죽자'식 전쟁의 선수”(세계의 영웅 신화, 대원사,154쪽)같은 기독교에 대한 인류적 반성이 이루어졌고, 그것이 많은 지식인들과 젊은이들의 공감을 얻을 수 있었기에 캠벨은 그의 영역을 지킬 수 있었다. 뉴에이지 문화가 기독교로부터 비판받고 있지만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그는 단순히 종교를 떠나 신화를 연구하는 학자였을 뿐인가? 그는 말한다. "예수가 인간의 모습을 취해 하강한 신이라고 믿어질 경우, 예수라는 영웅은 묵상해야할 하나의 상징이다. 신적인 존재란 ,우리 모두의 내부에 있는 전능한 자아의 계시다... 말하자면 '이러저러하게 행동해서 선함을 얻는'것이 아니고 '이를 앎으로써 신이 되는 것'이다." (세계의 영웅 신화, 대원사, 309쪽) 그는 종교 속에 있는 신화를 찾아내었고 그것을 묵상해야 할 상징으로 읽었다. 자신의 내적 신성을 찾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는 인터뷰에서 신을 믿는냐는 질문에 '나는 신을 압니다'라고 대답했다. 자신의 일생을 통해 자신의 신성을 발견한 것이다. 그는 학자이기 전에 구도자였다. 역설적으로 캠벨은 종교를 떠남으로써 죽어가는 종교를 되살릴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캠벨은 1987년 하와이에 있는 성 프란시스 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이 세상을 떠났다. 그의 병실에는 그리스도의 승리를 상징하는 청동상이 벽에 걸려있었다고 한다. 환희에 차 팔을 벌리고 있는 그리스도의 모습이었다. 캠벨의 부인인 진 에드먼은 그의 마지막 순간을 이렇게 표현했다. 그는 그 순간을 기다리며 기대감에 차 있었다. 그에게 그 순간은 아버지와 하나 되는 상태를 나타내는 그리스도의 신비적 의미였기 때문이다.”  (http://www.bhgoo.com/zbxe/269532)

 캠벨은 종교라는 틀을 깨뜨리고 나가 신화를 발견했고, 그 신화에서 건져 올린 살아있는 상징을 통해 다시 종교적 의미를 살아나게 할 수 있었다. 그가 말한 신화의 목적은 "개인의 의식과 우주적 의지를 화해시킴으로서 그러한 무지를 추방하는데 있다."(세계의 영웅 신화, 대원사, 235쪽)이다. 나는 이것이 종교가 말하는 구원과 해방, 깨달음이 지시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본다.

※ 여기서 리뷰한 책은 지금은 절판된 대원문화총서06_<세계의 영웅 신화>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것이다. 책 내용은 1999년 민음사에서 재출간된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과 같다.

2. 내 마음을 무찌른 글 귀

대원동서문화총서 6 (1989년 4월 13일)

세계의 영웅 신화 -아폴로, 신농씨 그리고 개구리왕자까지-

원제 : The hero with athousand faces. 1st Edition 1949

머리말

5. "종교 교의에 녹아 들어 있는 진리는 대개가 변형된 데다 체계적으로 위장되어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진리로 알아보지 못한다. ......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들려 줄 때 진리의 상징적 치장을 피하고 아이들의 지적 수준에 맞추어 사건의 진상을 알게 하는 데 인색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

5. 이 책의 목적은, 종교와 신화의 형태로 가려져 있는 진리를 밝히는 데 있어 비근한 실례를 잇대어 비교함으로써 고대적 의미가 스스로 드러나게 하는 데 있다.

6.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상징의 문법을 터득해야 할 터인데, 저자가 알기로는 이 문을 여는 열쇠로 정신분석학만한 현대적 길잡이는 따로 없을 듯하다.

6. 인류의 심성에 대한 근본적 보편적 관심에 치중한 나머지, 종족의 심리적 다양성이 무시되는 모든 연구서 및 해부 역시 같은 반론에 부딪칠 수도 있다. 많은 신화나 인류의 종교가 서로 다르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이 책이 다루는 것은 유사성이지 상이성은 아니다.

6. 저자가 바라기로는, 이러한 저자의 비교 해석이 이 세계의 통합을 완성시키려는 작품의 경향에 대한 종교적 혹은 정치적 제국의 이름으로서가 아닌, 인류의 상호 이해라는 측면에서 그리 초라하지 않은 하나의 기폭제가 되었으면 하는 것이다.<베다경>은 일러서, "진리는 하나되, 현자는 여러 이름으로 이를 언표 한다"고 했다.

☞ 저자의 의도가 성공했는지, 내가 제대로 이해했는지 꼭 짚고 넘어가자.

프롤로그 / 단일신화

1. 신화와 꿈

11. 신화의 상징은 영혼의 부단한 생산물로서 이 하나하나의 상징 속에는 그 바탕의 근원적 힘이 고스란히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11. 프로이트와 융과 그 후계자들은 영웅과 신화의 행적이 현대로 계승되었음을 여지없이 증명해 냈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일반 신화학은 없어도, 개인적이며 외부에 인정받지 못한 미성숙 단계에 있다뿐이지 그래도 우리의 내부에는 속으로 알찬 꿈의 판테온이 있다.

15. 이러한 것들은 우리에게 감지되지 않은 책 그대로 눌러 있지만 혹 한 마디 말, 주위의 냄새, 차 한 잔의 맛, 또는 어느 사람의 시선에 촉발되면 무서운 사신으로 우리 머릿속에 나타나기 시작한다.

16. 한 차례의 통과 제의가 있은 다음에는 다소 느슨한 휴지 기간이 뒤따르는데, 이 기간에는 인생을 살아갈 당사자를 새로운 시대의 형식과 적절한 감정 상태로 유도하는 절차가 있다. 그래서 마침내 정상적인 생활로 되돌아올 때가 되었을 때 입회자를 거듭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17. 신화와 제의의 주요 기능은, 과거에다 묶어 두려는 경향이 있는 인간의 끊임없는 다른 환상에 대응하여 인간의 정신을 향상시키는 데 필요한 상징을 공급하는 것이었다.

18. 우리는 아직도 남아 있는 유아기의 이미지에 발목이 잡혀 있고, 따라서 어른으로 가는 길을 애써 좇으려 하지 않는다... 삶의 목표가 어른이 되는 데 있지 않고, 청년으로 머물러 있는 데 있으며, 어머니로부터 떨어져 나오는 데 있지 않고, 어머니와 유착되는 데 있다고 믿는 현상이 그것이다.

19. 자궁의 무덤에서 무덤의 자궁까지 우리는 완전한 순환 주기를 산다.

19. 사회에서는 왕비를 몹시 비난했다. 그러나 왕은 자기에게도 자기 몫의 죄가 있음을 깨닫고 있었다. (미노스왕)

20. 전통적인 통과 제의가 개인에게 과거를 향해서는 죽고 미래를 향해서는 거듭날 것을 가르쳤듯이, 저 왕위서임 의식은 그의 개인적인 성격을 벗기고 신명이라는 망토를 입혀 주었다... 그러나 제의를 거부하는 신성 모독 행위로 개인은 사회라고 하는 거대한 조직으로부터 하나의 단위로 떨어져 나올 수 가 있었다. 이 하나가 부서져 여럿으로 분열하면서 각개 충돌로 치달았고, 이렇게 되면 이를 통제할 수 있는 길은 힘뿐이었다.

22. 영혼의 분열, 사회적 무리의 분열은 세월 좋던 시대로 돌아간다는 계획으로도, 이상적으로 설계된 미래를 보증하는 예정표로도, 심지어는 악화된 요소를 다시 접합시키기 위한 가장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작업으로도 해결될 수 없다. 오직 탄생만이 죽음을 정복할 수 있다.

22. 창조 작업의 회복을 가능케 하기 위해서는 보다 높은 정신적 차원을 위한 위기가 따르는데, 토인비 교수는 이 위기를 묘사하는데 '이탈'과 '변용'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23. 우리가 상실해버린 이 전체성의 일부라도 나날의 현실로 끌어올릴 수 있다면 우리의 능력은 놀라운 수준까지 신장될 것이며, 아울러 생기 넘치는 재생의 순간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23. 요컨대 영웅이 첫 단계에서 하는 일은, 하찮은 세상이라는 무대로부터 진정한 어려움이 도사리고 있는 심성의 인과가 시작되는 곳으로 물러앉는 일이다. 그리고 난관을 헤쳐 나감에 있어서 그는 자기 식으로 그 난관의 뿌리를 뽑고 한달음에 쳐들어가 C.G융의 소위 '원형 심상'과의 동화작용을 시도한다. 힌두와 불교 철학에서는 이 과정을 '비베카' 곧 분별의 기간이라고 한다.

25. 꿈은 인격화한 신화고 신화는 보편화된 꿈이며, 꿈과 신화는 상징적이되 정신 역할의 동일한 일반적 시각에서 보아 그렇다.

26. 우리는 어둡고 궃은 길을 가야 마침내 평화의 강 혹은 우리 영혼의 목적지로 통하는 탄탄대로를 발견하게 되는 모양이지요.

27. 꿈꾸는 사람은 조그만 상자의 도움을 받아 강을 건넌다. 이 꿈에서 이 상자는 전마선이나 다리 이상의 역할을 해낸다. 이것은 그녀 자신의 특별한 재능이나 미덕을 상징하는 것인데, 그녀는 이 두 가지에 힘입어 세상의 물을 건널 수 있었던 것이다.

28. 사람들은 비교적 무의식적으로 시민 및 종족으로서의 정례를 따름으로써 대부분 위험 부담이 적은 길을 택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들 역시 구원을 받기는 마찬가지다... 아무리 맹세하고 서원해도 절망적일 수밖에 없는 사람은, 내부의 소명도 외부의 교리도 모르는 사람이다.

☞ 나의 모습이 보인다. 교회도 떠났고 아직 내부의 소명도 찾았다 말할 수 없는 절망의 상태, 내 직업이 나의 소명이라 말할 수 없는 상태, 그렇다고 의지할 신도 스스로 떠난 상태. 어떻게 하나.

29.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란 얼마나 하찮은 물건이가! 그러나 이나마 없으면 미궁에 들어간다는 것은 아무 희망도 없는 모험과 다름없는 것이 아닌가.

29. 수세기 동안 다이달로스는 장인 및 과학자, 기이할 정도로 냉담하고 거의 악마적인 현상의 상징, 자기 예술의 도덕률에만 봉사하는 인간 유형을 대표해 왔다.

29. 모든 시대의 영웅들은 우리에 앞서 미궁으로 들어갔고, 미궁의 정체는 모두 벗겨졌으며, 영웅이 깔아 놓은 실만 따라가면 된는 데도 그렇다. 추악한 것이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곳에서 우리는 신을 발견할 것이고, 남을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던 곳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죽일 것이며, 밖으로 나간다고 생각하던 곳을 통해 우리는 우리 존재의 중심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고, 외로우리라고 생각하던 곳에서 우리는 세계와 함께 하게 될 것이다.

☞ 추한 것, 추함이 어떤 것일까. 나에겐. 내가 피했던 것. 디오니소스적 축제, 쥐, 마음을 열어 보이기, 비정상, 장애인, 권위

비극과 희극

32. 우리는 실패와, 상실과 환멸과, 냉소적 무위의 쓰라림이 이 세상의 선망받는 자들의 피를 말린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 그러나 행복을 다루는 동화는 진지하게 받아들여질 수 없다.

32. 동화, 신화, 그리고 영혼의 신곡에 나오는 해피 앤딩은 모순이 아닌 인간의 보편적 비극의 초절성으로 읽혀야 한다.

33. 중요한 것은 이 땅 위에서 이러저러한 일이 있을 수 있었다는 것이 아니고, 이 땅에 이러저러한 일이 있기전에 보다 중요하고 보다 본질적인 것이 우리가 알고 있고 더러 꿈속에서 찾아가기도 하는 미궁 안에서 일어났어야 했다는 것이다.

34. 행복한 가정이 다 그렇듯이 소생한 신화와 세계는 비슷한 모습을 보인다.

영웅과 신

34. 영웅이 치르는 신화적 모혐의 표준 궤도는 분리-입문-회귀의 확대판이다.

35. 고타마 싯타르타의 깨달음의 순간: 무시무시한 신 마라는 코끼리를 탄 채 1천 개의 손에 각기 무기를 들고 나타났다. 그는 자기 군대를 거느리고 있었는데 ... 만상을 지키는 신들은 모두 도망쳤으나 미래의 부처는 나무 아래서 움직이지 않고 남아 있었다. 이윽고 마라는 그를 공격하여 정신을 흐트러 놓으려 했다.

36. 고타마의 성도의 법력에 의해 천상의 꽃과 티끌로 화했다. 이렇게 되자 마라는 세 딸 욕망과 괴로움과 욕정을 관능적인 시녀와 함께 풀었으나 존자의 마음은 흐트러지지 아니했다. 마침내 신은 그 부동의 자리에 앉아야 하는 것은 자기라고 주장하면서 날카로운 원반을 던져, 자기를 옹위하던 군대가 암산처럼 그에게로 무너지게 헸다. 그러나 미래의 부처는 한 손을 움직여 손가락 끝으로 대지에 갖다 댐으로써 땅의 여신에게 거기 앉을 권리가 자신에게 있음을 확인시키려 했다... 이 싸움에서 승리를 거둔 정복자는 초저녁에 자기의 전생을 알았고, 한밤중에는 사물을 두루 꿰뚫는 혜안을 얻었으며, 새벽녘에는 인과를 깨쳤다. 그는 날샐 무렵에 완전히 정각을 얻었던 것이다.

37. 주 : 제의, 신화, 그리고 형이상학은 초월적인 조명 가까이까지 인도받는 것은 가능하나 거기에 접근하는 마지막 단계는 갱인의 조용한 체험으로써만 가능하다.

39. 영웅의 모험은 위에서 말한 핵 단위의 유형, 다시 말하면 세계로부터의 분리, 힘의 원천에 대한 통찰, 그리고 귀행의 형식으로 이루어진다.

39. 동양 전체는 고타마 붓다가 깨친 은총의 축복을 받았듯이 서양은 모세의 십계명의 축복을 받아 왔다.

40. 영웅이 자신의 뜻으로 안전하게 사회로 귀환하면 그가 도우려던 사람으로부터 오해받고 무시당하게 되어 결국 그의 행적은 무위로 돌아가고 만다.

☞ 가장 적절한 예로 예수의 십자가형이 있지 않은가. 누가 그를 죽였는가. 그가 도우려던 무리들이 아니었던가.

42. 영웅이 애써 찾아 다니고 위기를 넘기면서 얻어 낸 신적인 권능은 처음부터 영웅의 내부에 있었던 것으로 드러난다.

42. "...나는 본질적으로 인간이며 신의 은총을 입음으로써 신이라." -성자 시므온-

42. "... 나는 너고, 너는 나다. 네가 어디로 가건 나는 거기에 있다. 나는 없는 곳이 없으니, 원하면 언제든지 나를 찾으라. 나를 찾는 것은 곧 너를 찾음이라."

43. 이 분류는 보이지 않는 원천, 우주라는 상징적 원의 중심인 입구, 불교에서 말하는 부동의 자리에서 흘러나오는데, 세계는 이곳을 중심으로 순환한다.

44. 세계의 배꼽은 연속적인 창조의 상징, 모든 사물 안에서 약동하는 소생의 연속적인 기적이 일어나게 하는 세계 보존의 신비인 것이다.

47. 추한 것, 아름다운 것, 죄악과 미덕, 쾌락과 고통이 모두 이 세계의 배꼽의 공평한 산물이다... "신에게는 모든 것이 공정하고 정당하지만 인간은 어떤 것을 그르다고 하고, 어떤 것을 옳다고 한다."

47. "닮지 않은 것이 상합하고, 서로 다른 것에서 가장 아름다운 조화가 이루어지며, 모든 것은 다툼에 의해 생겨난다." -헤라클레이토스-

49. 신화의 제신이 웃는 웃음은 적어도 현실 도피자의 웃음이 아니라 삶 자체만큼이나 무자비한 웃음이다.

49. 이 무자비함은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이 고통에 의해서는 손상되지 않는 끈질긴 힘의 그림자일 것이라는 언질로 균형을 회복한다. 그러므로 이야기란 무자비하면서도 공포를 느끼게 하지 않는다.

☞ 엽기적인 신화속의 이야기들이 추한것으로만 느껴지지 않는 이유. 그저 삶의 한 면으로 보여지는 이유. 깊이 생각해 보자.

제1부 영웅의 모험

제1장 출발

모험에의 소명

52. "옛날 옛적, 간절하게 소원을 빌면 더러 이루어지는 것도 있던 시절에, 예쁜 딸을 여럿 둔 왕이 살았다. 왕의 딸 중에서도 막내딸은 하도 예뻐서, 세상 구경이라면 할 만큼 한 태양도 이 막내딸의 얼굴을 비출 때면 오히려 제 얼굴을 붉혔을 정도였다."

☞ 재미있는 도입부

54. 이러한 실수는 우연히 생긴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욕망과 갈등이 억압된 결과로 나타난 것이다.

54. 실수는 운명의 시작에 해당되는 수도 있다.

54. 작은 용인 개구리는, 머리로 세계를 버티는 심연의, 생성적 조물주적 힘을 상징하는 지하 세계 뱀의 유아기적 대응물이다.

55. 분리와 탄생의 시간은 불안을 야기시킨다.

56. 소년은 고슴도치를 잡고 싶은 생각이 사라졌는데도 땅에도 너무 높이 올라간 게 무서워 내려울 생각은 못하고 자꾸만 올라갔다. 아래서 보면 조그만 점 하나로 보일 만한 높이까지 올라간 소녀는 고슴도치와 함께 마침내 하늘에 이르렀다.

59. 노인으로 둔갑시켜 미래의 부처 앞에 나타나게 하되, 오직 태자와 마부만 이를 볼 수 있게 하였다.

60. 이 신화적 여행의 첫 단계에서 우리는 이를 '모험에의 소명'으로 불렀다. 이는 운명이 영웅을 불렀고, 영웅의 영적 중심이 그가 속한 사회에서 미지의 영역으로 옮겨졌음을 암시하고 있다.

60. 동화에 나오는 공주가 그랬듯이, 모험은 우연한 실수로 시작될 수도 있다. 혹 우연한 현상이 방랑자의 눈길을 사람의 내왕이 빈번한 길에서 엉뚱한 길로 돌려 버림으로써 모험 당사자는 무익한 방랑만을 일삼는 수도 있다.

소명의 거부

61. 세계 전역의 신화와 민화는, 거부한다는 것은 결국 제 이득으로 취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62. 개인이 자기 자신의 신이기를 고집하면 신의 의지 곧 자신의 자기 중심적 체계를 파괴할 수 있는 힘인 신 자신은 괴물로 변하는 것이다.

63. "기도가 끝나는 순간 그녀의 사지는 굳어졌고, 부드럽던 옆구리는 보드라운 나무껍질로 덮혔다. 이어 머리카락은 잎이 되고, 팔은 가지가 되었다. 그처럼 날래던 두 발엔 뿌리가 뻗어나고 머리는 나무 꼭대기가 되었으나 그 아름다움만은 여전했다." 참으로 답답하고 한심한 결말이 아닐 수 없다.

64. "나는 먼저 아버지로부터 벗어나야겠다."

65. 모욕을 당한 구세주는 그를 돌아다보며, "나는 간다만 너는 내가 돌아올 때까지 이 땅에서 나를 기다려야 하리라"

65. 주저한다고 다 길을 잃는 것은 아니다. 마음은 많은 비밀을 여축으로 간직하고 있다. 이러한 비밀은 드러나지 않는다고 해서 막혀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소명의 거부에 따르는 부정적인 상태가 뜻밖의 해방의 원리에 대한 행운의 계시일 수도 있다.

69. 부정적인 길을 따르는 영웅이나 여걸, 그리고 아시아 대륙의 이 두 예화에서 운명지워진 이 한 쌍의 결합을 완성시키는 데에는 기적이 필요하다. 얼마를 기다려야 삶을 부정하는 마법을 깨울 힘이 생겨 두 아버지의 분노를 삭일 수 있게 될까?

69. 문제는 어떤 기적의 힘이 이를 가능케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초자연적인 조력

71. 노파가 알려준 마법의 주문 : '네 발을 꽃가루처럼 내려놓아라, 네 손을 꽃가루처럼 내려놓아라, 네 머리를 꽃가루처럼 내려놓아라. 그럼 네 발은 꽃가루, 네 손은 꽃가루, 네 몸은 꽃가루, 네 마음은 꽃가루, 네 음성도 꽃가루, 길이 참 아름답기도 하고, 잠잠하여라.'

73. 숲속의 난장이, 마법사, 은자, 목동, 혹은 대장장이... 고급신화에서는 스승, 나룻배의 사공, 영혼을 내세로 안내하는 안내자로 발전한다. 그리스로마 신화에서 이러한 안내자는 헤르메스 머큐리이고, 이집트에서는 토트이며, 기독교 문화권에선 성령이다.

77.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자기 삶을 거부하던 카마르 알차만의 운명은 의식적인 의지의 협력이 없이도 완성되기 시작했다.

79. 미지의 땅(황야, 밀림, 심해, 타향 등)은 무의식의 내용물이 자유롭게 투사되는 무대다.

81. 플루타크는 키벨레의 황홀경, 디오니소스의 박쿠스적 광란, 뮤즈에 의한 시적인 광란, 아레스의 전투적인 광란, 그리고 이성을 뒤집어 엎고 파괴적, 창조적 비밀을 방출하는 신에 대한 '열광'의 실례 가운데서도 가장 격렬한 사랑의 광란을 열거하는데, 이 판비밀제의 황홀경도 그 중의 하나로 꼽고 있다.

83. 자기 생활권이라는 벽에서 한 발이라도 밖으로 나가는 영웅은 반드시 이런 괴물과 만나야 한다.

85. 어리석은 대상 우두머리는 도깨비의 말을 좇아 항아리를 모조리 부숴버리고 수레의 짐을 덜어 준 다음 앞으로 내몰았다.

86. 도깨비는 왕자의 도착에 즈음해서 제 몸을 키웠는데, 키는 종료나무만 했고, 머리는 종형의 뾰족탑이 있는 큰 집만 했으며 눈은 바라문이 탁발하는 바리, 두 개의 송곳니는 굵은 기둥을 방불케 했다. 도깨비의 입은 매의 부리 같았고, 배는 부스럼으로 덮여 있었고, 손발은 푸르뎅뎅했다.

☞ 이 이미지에서 뭔가를 시작하고 싶다. 내안의 도깨비는 어떤 모습이일까.

87. "젊은이여, 왜 두려워하지 않는가? 죽음이 목전에 이르렀는데 어찌해서 겁을 먹지 않는 것인가?" 왕자가 대답했다. "도깨비여, 왜 내가 두려워하겠는가? 태어나면 어차피 한번은 죽게 되어 있는데 두려워할 까닭이 없지 않은가? 더구나 내 뱃속에는 벼락이라는 무기가 하나 더 있다. 그대가 나를 먹는다고 하더라도 벼락은 삭이지 못할 것이다. 이 벼락은 그대 뱃속에서 그대를 갈가리 찢어 필경은 그대 목숨을 빼앗을 것이다. 결국 그대가 나를 먹으면 우리는 둘 다 죽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무엇을 두려워하겠는가?

88. 그가 자기 뱃속에 있다고 한 무기는 다름 아닌 '지혜'라는 무기였다. 실제로 이 젊은 영웅은 전생의 부처, 바로 그분이었다.

90. 현상계의 마력이 무너지자 그(도깨비)는 자기를 부정하게 된다. 자기를 부정함으로써 그는 신이 된다. 종국적인 이름과 형태가 아닌, 마음속의 이름과 형태를 초월한 단순한 이름과 형태를 알게 될때 세상이 그렇게 되듯이 그 역시 신적인 존재가 된 것이다.

90. 자아는 끈끈이 터럭에다 붙여 두고 영웅은 제 갈 길을 가는 것이다.

고래의 배

91. 영웅은 그 관문을 지키는 세력을 정복하거나 그 세력과 화해하는 대신, 그 미지의 힘에 빨려들어 겉보기엔 죽은 것으로 나타나곤 한다.

93. 아난다 쿠마라스와미 박사는 "존재를 그만두지 않고는 어떤 생명체든 보다 높은 차원의 존재를 획득할 수 없다."고 썼다.

제2장 입문

시련의 길

95. 어쩌면 모험 당사자가 자신의 초인간적 여행 도정의 도처에 자비로운 권능이 있어서 자기를 도와준다는 사실을 깨닫는 시기가 바로 이 시기인지도 모른다.

☞ 난 입문 했는가? 시련의 길을 걷고 있는가? 어디쯤 와있을까? 귀환의 길에서 입구를 잃어버린 듯한 느낌.

96. 인간의 무리는 집단의 이상에 따라 행동하는 법인데, 이 집단의 이상이라는 것은 항상 유아기 상태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99. 우리의 꿈에는 아직까지도 시대를 초월한 위험, 괴물, 시련, 정체 불명의 조력자, 그리고 우리에게 유익한 인물이 끊임없이 나타난다.

102. 우리의 선조들이, 신화적 종교적 유산의 상징적 정신적 의식에 힘입어 극복해 왔던 심리학적 위험들을 오늘날 우리가 혼자서 혹은 시험적, 즉흥적으로, 더러는 도움이 될 만한 지침도 없이 맞서야 한다는 데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

102. "그런데 앞서간 자들이 당했던 시련도 겪지 않고 너희는 지복의 낙원에 들어가려 하느냐."

105. 영웅은 자신의 자존심, 미덕, 아름다움, 삶을 팽개치고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이 적대자에게 절을 하거나 복종한다. 이윽고 영웅은 자신과 적대자가 사실은 둘이 아닌 하나임을 깨닫게 된다.

106. 그 동안 영웅은 몇 차례의 예비적인 승리를 거두고, 일시적이긴 하나 무아의 경지를 체험하며, 이상향을 엿보게 된다.

108. '내 맹세코 이르거니와, 여기서 좀 쉬기로 하겠소.' 왕자는 이렇게 말하고는 침대로 올라가 엿새 밤낮을 거기에서 떠나지 않았다.

여신과의 만남

113. 여신은 자궁이며, 무덤이며, 제 새끼를 먹는 돼지다.

113. 여신의 숭배자는 이 두 휴형의 어머니를 똑같이 조용히 묵상해야 한다. 이러한 수행을 통해 숭배자의 정신은 유치하고, 어울리지 않는 감상과 증오로부터 스스로를 정화한다.

113. 이 여신은 다름아닌, 절대 절멸의 공포와, 비인격적이지만 모성적인 평화를 하나로 조화시키는 우주적인 권능, 우주의 전체성, 대립물의 조화였다.

☞ 나의 키워드는 조화

115. 노파의 몰골은 보기만 해도 구역질이 날 정도로 추악했다. 왕자가 수작을 걸었다.

116. "나는 왕도라고 합니다... 처음에는 그대 역시 이 몸을 추악하고, 야비하고, 욕지기가 나는 노파로 보았다가 이윽고 아름다움을 보셨습니다. 왕도 또한 이와 같습니다. 왕도란 싸움 없이, 치열한 전쟁을 치르지 않고는 손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왕의 그릇은, 무슨 일이 있든지 이를 이기고 왕도를 가는 것입니다."

116. 여신은, 악타이온의 동물적 욕망으로도, 퍼거스의 결벽에 가까운 혐오감으로도 파악되지 않았다. 오직 니알의 부드러움에 의해서만 그 정체가 드러났다.

유혹자로서의 여성

119. 여성이 곧 삶인데, 영웅은 이 삶을 알게 되었고 이를 완성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119. 도깨비들이란, 자신의 인간성 가운데 해결되지 않은 수수께끼가 투영된 것일 뿐이다. 그렇다면 이상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개개인이 자기 삶을 파악하는 징후인 것이다.

아버지와의 화해

127. "두려워 말라, 모두가 신 안에 거하리니. 오고 가는 형상은 춤추는 내 팔다리의 한순간 휘저음이다.

127. AUM : A는 깨어나는 의식 상태, U는 꿈의 의식, M은 꿈꾸지 않는 잠을 뜻하는데, 이 신성한 음절을 싸고도는 침묵은 언표되지 않는 초월성이다.

128. 화해란, 스스로 만들어 낸 두 마리의 괴물을 포기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134. 자식에 대해 지나치게 관대한 이 부모의 이야기는, 입문이 잘못되었을 때 입문자의 삶에는 혼란이 올 수 있다는 옛사람들의 생각을 확인시켜준다.

134. 이상적으로 말하자면, 입문의 영광을 입는 자는, 자기 인간성을 모두 박탈당하고, 비개인적인 우주적 힘을 대표하는 사람이 된다. 그는 이제 거듭난 자이며, 그 자신이 곧 아버지다. 그는 끊임없이 삶의 싸움판에 나서야 하고 입문의 사제, 안내자, 태양을 향한 문 노릇을 해야 한다.

137. "원주임들은 기독교의 성찬식에 특히 관심을 보였다. 선교사들로부터 성찬식 이야기를 들은 그들은 대뜸 자기네들의 흡혈 의식과 비교하는 것이었다."

142. <코란>은 "어리도 돌아서든, 거기엔 알라 신이 계시도다"라는 말로 이를 암시하고 있다. 힌두교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 만물 속에 숨어 있어서 그 영혼이 빛을 발하지 않으나, 뛰어난 지력을 가진 명민한 자의 눈에는 보인다." 그노시스파의 격언에 따르면 "지팡이를 쪼개어도 예수님이 거기 계신다."

145. 인간의 범주 밖에 있는 중심에서 비롯되는 하느님의 의지는 인간의 힘으로는 측량할 수 없다는 것이다.

147. 옴 마니 반메 훔 (연화 속에 보석이 있다)

신격화

150. 이 때 체득되는 것은, 찰나와 영원이, 같은 경험에 대한 두 가지 측면들 곧 동일의 비이원적이고, 표현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두 가지 층면들이라는 사실이다.

153. 아버지-어머니적인 모든 '선한'요소는 집단의 평화로 수렴되고 '악한' 모든 것은 외부로 투사된다.

154. 세계는 서로 싸우는 무리들로 가득 차 있다. 이 모두가 토템, 국기, 그리고 집단의 숭배자들이다. 심지어는 기독교 국가라고 불려지는 나라들도 지엄하신 그들의 주가 가르친 에고, 에고의 세계, 그리고 에고의 종족 신의 정복과 동의어라고 할 수 있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실천하기보다는, 식민지주의적 야만성과, '너 죽고 나죽자'식 전쟁의 선수로 역사에는 더 잘 알려져 있다.

156. 그분은 은혜를 모르는 자들과 악한 자들에게도 인자하시다. 그러니 너희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누가 6:36-

156. 구세주가 전해 주었고, 많은 사람들이 듣고, 기뻐하고, 힘써 전파했지만 실천만은 끝내 꺼렸던 복음은 하느님은 사랑이며, 하느님은 사랑을 받을 수 있고, 받아야 하며, 모든 인류는 예외 없이 그의 아이들임을 가르치고 있다.

162. 보살에 대한 첫 번째 경이로움은 바로 보살이라는 존재의 양성 구유적 성격이다... 신화의 대립적인 모험이란 여신과의 만남, 그리고 아버지와의 화해다... 남성과 여성은 둘이 아니라 '쪼개진 완두의 두 쪽'임을 깨닫고...

162. 두 번째 경이로움은, 보살이 삶과 삶으로부터의 해탈의 차이를 없애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보살이 열반을 단념한다는 사실로 상징되고 있다.

164. 그는 일어나 그들에게로 돌아와 에고를 초월한 중심으로서 그들과 함께 거한다. 에고를 초월한 그를 통하여 '공'은 자체를 현현한다. 이것이 바로 그의 위대한 '대자대비로운 행위'다. 왜냐하면 이 행위로 인해 중생은 자신의 욕망과 적의와 미망이라는 세 겹의 불을 끄고, 이 세상이 바로 열반임을 깨닫기 때문이다.

165. "요가로 자아를 통일하고 만사 평등하게 보면, 일체 만유 속에서 자아를 보고 자아 속에서 일체 만유를 본다... 절대의 마음으로 만유안에 있는 나를 우러러 섬기는 사람, 그런 사람은 세속의 삶이 어떠하든지 신 안에서 사는 사람이다.

168. 통제된 단순성에 의해 지배되는 극히 단순한 분위기는 신비스러운 아름다움 안에서 무한한 존재의 비밀을 안은 침묵으로 일관된다.(다도)

170. 대립물의 벽이 허물어지고 입문자가, 당신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내되 남자와 여자로 지어 낸 신의 시계 안으로 받아들여진다는 위대한 모순에 대한 진술이다.

궁극적인 선물

176. 세상을 온통 경건하게 만들어 버리는, 유치한 행복에 젖어 있는 무리와 진정으로 자유로운 무리 사이에는 엄청난 심연이 존재한다. 여기에서 상징은 무너지고 초월당한다.

179. 무의 경지에서 보면 삼엄한 신학적 교리는 교육적인 미끼에 지나지 않는다.

179. "눈에 보이는 이 모든 신들은 정도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사상을 표상하는 상징에 지나지 않는다."

187. 길가메쉬가 잠들어 있을 동안 뱀이 그 풀의 향내를 맡고 다가와 풀을 물어가 버렸다. 이 풀을 먹은 뱀은 권능으로 허물을 벗고 젊음을 되찾았다.

188. 불로불사는 현실로서 체험된다. "그것이 여기에 있다. 그것이 여기에 있다"의 경지

189. 은총이란, 특수한 경우의 발원에 내려지는 삶의 에너지의 상징에 지나지 않는다. 신의 은총을 입고 있는 영웅이 완전한 깨달음의 은총을 구한다면 몰라도 그가 장수의 은혜와, 이웃을 시해할 무기 혹은 자식의 건강 등을 구하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 일이다.

제3장 귀환

귀환의 거부

192. 영웅의 임무가 수행되었다고 하더라도, 모험 당사자인 영웅은 아직 생을 역전시키는 전리품을 가지고 귀환하는 모험을 치러야 한다.

193. 무로부터 인간이라는 종족과 문명과 세계가 태동하여 다시 무로 돌아갔지만, 이 만세 전의 왕은 무의식 상태의 천복 안에서 만세 전과 다름없이 자고 있었다.

195. 인간이 나고 죽기를 여러 번 할 동안 저는 어디에서 멈추어야 할지, 어디에서 쉬어야 할지도 모르는 채 그저 뛰고 괴로워했습니다.

195. 당신의 실재를 피난처로 삼아 이 모든 것에서 자유롭게 하소서. -무추쿤다가 크리슈나에게-

196. 무추쿤다는 회귀하는 대신 이 세상으로부터 한 차원 더 떨어진 곳으로 물러서기로 마음먹었다. 누가 감히 그의 결심이 무분별하다고 할 것인가?

불가사의한 탈출

198. 영웅이 도망치는 대목은 민간전승에서 즐겨 다루는 부분이다. 이 부분은 갖가지 생생한 형태로 발전해 왔다.

202. 심연의 권능에는 섣불리 도전하면 안 된다. 동양에서는 엄격한 지도와 감독 없이 심리적으로 해이해진 상태에서의 요가 수련은 몹시 위험하다고 가르친다.

205. 두 세계의 상호 관계를 불가능하게 하는 것은 언제나 사소한 실수 곧 인간의 약점이라는, 사소하나 치명적인 증세이다. 그래서 인간은, 사소한 일만 피하면 모든 것이 잘 풀려 나갈 것이라는 터무니없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206. 단일 신화가 완성될 수 있으려면 우리는 여기에서 인간적인 실패나 초인간적인 성공이 아닌, 인간적인 성공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

외부로부터의 구조

206. 그가 속했던 사회는 사회를 떠나 있는 자를 질투하여, 영웅이 안주하고 있는 집 문을 두드리기 마련이다... 영웅이 어떤 장애물 때문에 문을 두드리는 무리들의 요구에 응하지 못하는 경우에는 문을 두드린 자들이 구체적인 행동을 취하고 이로써 영웅은 그들 사회로 귀환한다.

210. 그 때 힘이 센 신이 손을 잡아 아마테라스를 끌어냈고, 다른 신이 문에다 밧줄을 걸며 소리쳤다.(시메나와) "이제 더는 들어가시지 못합니다."이리하여 고처원과 갈대 평원은 다시 밝아졌다.

211. 다시 나타난 여신뒤에다 친 밧줄인 '시메나와'는, 빛의 귀환이라는 기적의 자비로움을 상징한다.

212. 시메나와는 귀환의 문턱에 있는 세계의 원기 회복을 의미한다. 기독교의 죽음의 심연을 향한 신화적 통로를 뜻하는 웅변적인 상징이라면 시메나와는 부활의 소박한 상징이다.

214. 외부로부터 구조를 받았든, 내적 충동에 따라 살아났든, 신들의 안내를 받았든, 그에게는 오래 잊고 있던 곳으로 애써 얻은 전리품을 가지고 돌아가야 할 단계가 남는다. 뿐만 아니다. 천신만고 끝에 얻은 재생의 영약을 가지고 돌아가 원래 속해 있던 사회와 맞서면서 그들의 까다로운 심문과 서릿밭 같은 증오를 받아야한다. 뭐가 뭔지 영문을 모르는 선한 사람들까지 설득시켜야 한다.

216. 오로지 감각의 배타적 증거에만 급급하는 일반인에게 어떻게 저 만유의 근원인 공을 설명한단 말인가?

222. 신성한 인물이나 터부가 되어 있는 인물은 이 신성성, 주술력이 방전, 고갈되지 않도록 땅과 접촉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226. 기억 속에서 자기 영혼의 다른 부분과 만났음을 상기시키는 신비스러운 반지는 영웅이 그곳에 간 적이 있음을 시사한다... 이 반지는 두 세계를 통합하려는 영웅의 희망을 상징한다.

227. 카마르 알차만의 기나긴 이야기가 우리에게 상기시키는 것은 운명이 일상의 삶으로 구체화되는 완만하면서도 놀라운 역사다. 그러나 이 운명이 모든 이에게 다 구체화되는 것은 아니다. 오직 안으로 뛰어들어 이를 체험하고, 반지를 얻어 다시 현실로 귀환한 영웅에게만 가능하다.

두 세계의 스승

227. 니체는, 우주적인 춤의 신은, 한 곳에 붙박혀 있지 않고 이곳저곳에 가볍고 유쾌하고 떠돌아다닌다고 주장한다.

228. 우리는 립 반 윙클, 카마르 알차만 혹은 예수 그리스도가 실재로 존재했는지 여부에 대해 관심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주의를 끄는 것은 그들의 '이야기'다.

233. 상징이란 의미 소통의 '수레'에 불과하다... 상징을 투명하게 닦아 우리에게 오는 진리의 빛이 이에 가리지 않게 하는 일이다.

233. "하느님이, 인간의 생각이 미칠 수 없는 높은 곳에 계신다는 믿음만 가지고 있다면, 우리도 하느님을 진정으로 알고 있는 셈이다." -토마스 아퀴나스

233. "아는 것은 알지 못하는 것이요. 알지 못하는 것은 아는 것이다." -케나 우파니샤드-

234. 이것은 모든 종교적 관행이 좇고 있는 바다. 심리적 훈련을 통하여 개인적인 한계, 독특한 습관, 희망, 공포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진리를 깨닫고 거듭나는 데 필수적인 자기 적멸에 대한 저항을 버리면, 개인은 위대한 하나됨 곧 자기 화해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사는 자유

235. 자기 삶을 영위하려면 죄악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는 것은 참으로 구역질나는 것이다.

235. 신화의 목적은 개인의 의식과 우주적 의지를 화해시킴으로서 그러한 무지를 추방하는데 있다. 이러한 목적은 덧없는 시간적 현상과, 삶과 죽음이 혼재하는 불멸의 삶과의 진정한 관계를 자각해야 달성될 수 있다.

235. "그러므로 애착을 떠나 마땅히 해야 할 바를 행하라... 너의 모든 일을 나에게 맡기고, 네 생각을 가장 높은 자아에 모으고, 원망과 이기심에서 벗어나되, 흐트러지지 말고 나가 싸우라." -바가바드 기타 2:22-24

240. 탈리에신은 마귀를 두려워했지만 바로 그 마귀에 의해 삼켜졌고, 그래서 재생한 것이었다. 자기의 자아가 죽음으로써 새로운 자아로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것이다.

241. "원래의 형태를 보존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위대한 재생의 손길인 자연은 부단하게 형상에서 형상을 만들어 나간다. 온 우주 안에서 사라지는 것은 하나도 없음을 알라. 오직 변화하고, 새로운 형상으로 재생될 뿐이다." 이렇게 해서 한순간은 다음 순간으로 이어진다. 영원이라는 왕자가 세계라는 공주에게 입 맞추었을 때 공주의 저항은 끝나고 만다.

245. 신화가 전기나 역사나 과학으로 읽혀질 때 그 명은 거기에서 다한다. 살아있는 이미지들이 옛날 다른 하늘 아래서 있었던 까마득한 사실들로 전락하는 것이다.

246. 신화의 이미지를 생생하게 되살리려면, 이를 현대의 문제에 적용시키려 할 것이 아니라, 영감으로 살아 숨쉬던 과거의 형태에서 암시를 읽어내야 한다.

☞ 내가 오해하는 부분. 신화를 현대의 문제에 그대로 적용하려는 욕심.

247.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누구든지 새로 나지 아니하면 아무도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없다."...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나지 않으면 아무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요한 3:3-5

제2부 우주 발생적 순환

제1장 발산

심리학에서 형이상학으로

250. 정신분석학자들의 연구가 있은 이후, 신화가 꿈의 내용물로 이루어져 있으며, 꿈이란 정신 역동의 증후라는 사실에는 별 의혹의 여지가 남아 있지 않다.

☞ 정신분석학을 통해 저자가 얻은 것

250. 동화와 신화의 패턴 및 논리가 꿈의 패턴 및 논리와 일치한다는 발견과 더불어 오랫 동안 의혹의 대상이 되어 왔던 고대적 인간의 기괴한 환상은 극적으로 현대인 의식의 표면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252. 그러나 이러한 자료의 가치를 충분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먼저 신화가 꿈과 정확하게 대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252. 최근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상징적 심상들은 인간의 삶을 버티고 철학, 시, 그리고 예술의 영감을 자극해 왔다.

252. 따라서 우리에게 전승된 신화학적 표상의 가치를 제대로 파악하려면, 우리는 이러한 표상들의 무의식의 징후일 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정신적 원리의 통제되고 의도된 진술임을 이해해야 한다.

253. 이 힘은 모든 구성물의 생성 원리이고, 그들이 이 세상에 현현해 있을 동안 그들을 채우며, 그들을 지탱하고, 궁극적으로 그들이 돌아갈 귀소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과학에서는 에너지라고 부르고, 멜라네시아인들은 '마나', 수우족 인디언들은 '와콘다', 힌두교도들은 '샤크티', 기독교들은 '하느님 능력'이라고 부르는 것, 정신분석가들은 심성에 나타나는 이러한 존재를 '리비도'라고 부른다.

253.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이 현상계 저쪽 세계로 들어가 적멸에 드는 것이다.

254. 정신분석학자에 의하면, 천국, 지옥, 신화적 시대, 올림푸스산 및 그 밖의 신들의 거처는 모두 무의식의 징후라는 것이다.

254.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타락이라는 이미지의 의미는 초의식이 무의식 상태로 흘러갔음을 뜻한다.

255. 신은 인간의 삶을 떠맡고, 인간은, '대립물의 합일'하는 순간 곧 신과 인간이 서로의 먹이로 각각 하강하고 상승하는 길목으로서의 태양의 문턱에서 만나는 순간에, 제 내부에 있는 신을 방면한다.

우주의 순환

256. 신들은 밤이 영원히 계속된다는 의미로 영원한 것은 아니다. 인생이 너무나 짧기 때문에 우주 발생적 시간의 회전이 영원한 것처럼 보일 뿐이다.

258. 자아나 교도들은 시간을 끊없는 순환으로 이해한다.

260. 동양 철학의 기본 개념은 이러한 회화적 양상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신화가 원래 철학적 공식의 설명인지, 아니면 철학이 신화로부터 추출된 것인지 지금으로서는 말할 수 없다.

공의 바깥-공간

264.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선언 : "무릇 현자의 이름에 값할 수 있는 자는 우주의 끝을 헤아리고, 그 끝이 곧 시작임을 아는 자이다." 모든 신화 체계의 기본 원리는 끝과 시작이 함께 한다는 바로 이 원리다.

271. 우주적인 알의 껍질은 공간에 떠 있는 세계의 뼈대요, 그 안에 있는 풍요한 생식력은 식을 줄 모르는 자연계 생명력의 역동성을 나타낸다.

273. 그는 두려웠다. 사람이 혼자 있으면 두려워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생각햇다. '내가 대체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나 이외엔 아무것도 없는데'하고 . 그러자 두려움이 사라졌다.

274. 이러한 신화 체계에 따르면 우주에 있어서는 개체이든 창조적인 어버이든 그 영속적인 근본은 하나이며 따라서 동일하다.

276. 남녀간의 사랑의 신비에 따르면, 애정의 궁극적인 경험은 곧 이원성이라는 환상의 배후에 '둘은 곧 하나'라는 등식의 깨달음이 있다. 이 자각은, 우주의 만상은 하나라는 자각으로 확대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애정의 체험은 우주적 체험으로 확산되고, 이 자각에 이르게 한 애인은 창조의 거울로 확대된다. 이러한 것을 체험한 남성이나 여성은 쇼페하우어의 이른바 '도처에 널린 아름다움'을 손에 넣은 셈이다. 그는 "먹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먹고, 원하는 모습으로 둔갑하며 이 세상을 향유하며, "오, 놀랍도다, 놀랍도다"로 시작되는 우주적 합일의 노래를 부를 수도 있다.

여럿으로 갈라지는 하나

278. 타네 마후타는 몸을 구부리지 않는다. 부모의 원망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아래로 아래로 땅을 누르고, 위로 위로 하늘을 밀어 올리는 것이다.

282. 현실이란 중심점에서 보면 티아마트의 육신은 자발적으로 이에 응한 것이다. 따라서 그 육신을 도륙한 손은, 희생자 자신의 의지를 따르는 대리인의 손에 지나지 않는다.

283. 근원적인 시각에서 보면 세계는 존재하고 폭발하고 해소되는 형식의 조화를 이루고 있다.

286. "그것 보아라, 네 운명을 네가 골랐다. 인간에겐 끝이 있을 것이다."

289. 민간 신화들은 인간의 상황을 평가한다는 본질적인 점에 있어서 위대한 신화들과 차이가 없다. 특징, 행적, 불가사의한 세계는 위대한 계시의 세계, 곧 깊은 잠과 깨어 있는 의식 사이에 놓인 세계와 시간, 하나가 여럿으로 갈라지고, 여럿이 하나와 화해하는 지대와 그대로 일치하는 것이다.

제2장 처녀 잉태

어머니 우주

290. 조금 더 추상적으로 말하자면 그녀는 자가 번식하는 절대자를 움직여 창조의 행위를 유발하는 유혹자인 것이다.

운명적인 모체

297. 날이 밝자, 마사시는 해산하기 시작했다. 마사시는 풀을 낳았다. 마사시는 덤불을 낳았다. 마사시는 나무를 낳았다. 마사시는, 온 땅에 풀과 덤불과 나무가 가득 차기가지 출산을 멈추지 않았다.

☞ 이 세상이 환상의 세계임을 보여주는 신화, 마야의 세계, 이미지로서의 세계

속죄의 자궁

300. 끌 수 없는 욕망은 마침내 오랏줄을 받는다. 곧 행동의 시작이다.

300. 결국 그가 단순한 인간에게 넌더리를 내고 윤택했던 아내에게로 돌아가고 싶어하자 세계는 그의 충격적인 반응 때문에 한 차례 몸살을 앓았지만 곧 여기에서 풀려나 자유를 얻었다. 주도권은 아이들의 사회로 넘어갔다. 상징적이고 몽상적이었던 부모의 모습은 원초의 심연으로 함몰했다. 풍요한 대지에는 오직 인간만 남았다. 순환은 계속 진행되었다.

☞ 신(부모)이 사라지고 인간만이 남는다. 우리 고대의 신화인 단군신화도 그렇지 않은가. 환웅이 천상세계에서 내려오고 인간과의 사이에서 낳은 단군이 세상을 다스린다.

303. "시바는 파괴의 신입니다. 시바는 세계의 파괴자입니다. 시바가 좋아하는 것은, 시체의 악취가 풍기는 무덤 안에서 명상하는 것입니다. 그는 썩은 시체를 좋아합니다. 썩은 시체는 그의 살벌한 가슴과 같은 것입니다. 시바의 옷은 살아 있는 뱀으로 짜여져 있습니다. 시바는 가난뱅이입니다. 더구나 시바의 근본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처녀가 대답했다. "그분은 당신과 같은 인간의 마음 저쪽에 있습니다. 가난뱅이인지는 모르나 그분은 부의 원천입니다. 무서운 분인 동시에 자비의 근원이십니다. 뱀으로 만든 옷이든 보석으로 수놓은 옷이든, 입는다면 마음대로 벗기도 할 것입니다. 비실재의 창조자이신데 근본이 어떻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시바는 내 사랑이십니다." 그러자 청년은 본색을 드러냈다. 그가 바로 시바였다.

☞ 시바의 추함, 파괴의 겉모습을 넘어 부의 원천이자 자비의 근원임을 본 처녀가 시바를 만난다.

미혼모의 민화

제3장 영웅의 변모

최초의 영웅과 인간

306. 첫째는, 비실재적 실재의 직접적인 발산에서 신화적 시대의 유동적이나 시간을 초월한 존재에 이르는 단계, 둘째는 이 실재적 실재에서 인류의 역사의 영역에 이르는 단계

307. 정열의 절제, 예술의 폭발적인 발달, 경제 구조의 태동, 문화적인 기관의 대두를 통한 인간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시대가 온 것이다. 이제 인간에게 요구되는 것은 월우의 화신이나 운명의 팔괘라는 초월적 지혜가 아니라, 자신의 필요와 희망에 따라 행동하는 완전한 인간 정신이었다.

인간적인 영웅의 어린 시절

309. 예수는 엄격한 고행과 명상으로 지혜를 터득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가 하면, 인간의 모습을 취해 하강한 신이라고 믿어질 수도 있다. 전자의 견해를 따르는 사람은 예수와 같은 초월적 구원을 경험하기 위해 그의 행적을 글자 그대로 흉내내는 수가 있다. 그러나후자의 견해를 따를 경우, 예수라는 영웅은 글자 그대로 본이 되는 전형이라기보다는 묵상해야할 하나의 상징이다. 신적인 존재란, 우리 모두의 내부에 있는 전능한 자아의 계시다. 삶에 대한 묵상은 따라서 정확한 모방에 이르는 전주곡으로서가 아니라 자기의 내재적인 신성에 대한 명상의 형태여야 한다. 말하자면 '이러저러하게 행동해서 선함을 얻는'것이 아니고 '이를 앎으로써 신이 되는 것'이다.

☞ 신을 믿느냐는 질문에 '나는 신을 압니다'라고 대답했던, 조셉 캠벨의 인터뷰가 생각난다. 나에게 예수는 상징인가 역사적 인물인가?

311. 영웅의 첫번재 과업은, 우주 발생적 순환의 그 전 단계를 의식적으로 체험하는 것이다. 두번째 과업은, 심연에서 일상의 삶으로 귀환하여 조물주적 잠재력을 가진 인간적인 변환 자재자가 되는 것이다.

312. 실재 역사적 인물의 행위가 영웅적인 것이었다면, 이 전설을 만드는 사람은 그를 위해 영웅의 모험과 그 심도가 유사한 정도의 모험을 만들어 낸다. 이러한 모험이 바로 초자연적인 영역으로의 여행인데 이 여행이 독자에 의해서 한편으로는 마음이라는 밤 바다로의 여행, 다른 한편으로는 각자의 삶으로 구체화하는 인간의 운명의 측면 혹은 영역으로 해석되는 것이다.

313. 문제의 영웅이 위대한 족장, 요술장이, 선지자 혹은 위대한 존재의 화신일 경우 기적은 얼마든지 일어난다.

315. '이 역시 신이 아니다. 어디엔가 저들을 움직이는 분이 계실 것이다."

316. 민담에는 추방을 당했거나, 신체가 온전하지 못한 자 곧 버림받은 아들딸, 고아, 양자, 미운 오리 새끼 혹은 미천한 종의 주제와 더불어 도망의 주제가 자주 등장한다.

317. 문제의 숙명적인 아기는 기나긴 암흑의 기간을 견디어야 했다. 이 기간은 극히 위험하고 장애가 많은 상황이며 치욕을 당하는 기간이다. 그는 자기 내부로 깊이 혹은 미지의 세계인 외부로 던져졌다. 어느 경우든 그를 당혹케 하는 것은 미지의 암흑이다. 이곳은 의외의 존재, 자비로운 동시에 심술궃은 존재의 영역이다. .. 신화는 그러한 체험을 견디고 거기에서 살아 나오는 데는 범상하지 않은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데 동의한다.

319. 크리슈나 "모든 것은 자연의 법칙과 마음에 달린 것입니다"

320. 유아기의 이야기는 영웅의 귀환 혹은 그의 정체가 드러남으로써 그 결론에 이른다.

전사로서의 영웅

325. 영웅이 탄생하는 곳 혹은 영웅이 도피 또는 추방당했다가 보통 인간들 사이에서 성인으로서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떠나오는 머나먼 땅은, 세계의 중심 혹은 세계의 배꼽이다.

326. "... 그들과 사귀어 그들 식으로 살아 보고 싶기도 합니다. 원컨데 저를 축복하소서, 저의 기도를 들어주소서..."

☞ 평범하게 살고 싶다는 욕망, 나도 제대로 된 직장한번 다녀보자는 욕망, 그것인가.

328. 폭군은 자만한다. 그리고 자만은 바로 폭군이 파멸하는 씨앗이다. 폭군은 자기 힘을 자기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자만한다.

328. 영웅의 기본적인 임무는, 그러한 괴물과 폭군을 퇴치하고 그 인간의 삶의 무대를 정화하는 것이다.

329. 그는 위험하다는 소문이 있는 길을 택했다.

애인으로서의 영웅

332. 영웅이 세계의 군주라면 그녀는 세계며, 영웅이 전사라면 그녀는 명예다. 그녀는, 영웅이 감옥으로부터 해방시켜야 하는 영웅 자신의 운명의 이미지다. 그러나 영웅이 자기 운명을 인식하지 못하거나 엉뚱한 사상에 현혹될 때, 영웅은 아무리 노력해도 장애물을 극복할 수 없다.

334. 여자 전사인 스카타크에겐 딸이 하나 있었다. 이 처녀는 어머니의 고도에서 생전 처음으로 쿠훌린 같은 헌헌장부를 보고 얼굴을 붉혔다.

☞ 메데이아가 떠오른다. 신화에 나오는 괴물, 적에겐 이런 이쁜 딸이 하나씩 있더라.

336. 이 세상에는 그의 힘으로 되지 않는 일이 없다. 예기치 못한 조력자의 도움을 얻고, 시간과 공간의 기적을 경험한 그는 마침내 자기 과업을 완수한다. 곧 운명 자체(곧 처녀)가 그에게 힘을 빌려 준다.

336. 눈에 보이는 표면적인 것에 대한 감상에 현혹되지 않고, 과감하게 자기 본성의 부름에 응답할 수 있는 자 앞으로는-니체의 말을 빌면, '스스로 구르는 바퀴'인 사람 앞으로는-어려움이 비켜나고 뜻밖의 탄탄대로가 나타나는 법이다.

☞ 황홀한 기쁨을 좇아가라. 그리하면 우주가 문을 열어줄 것이다. 라는 캠벨의 사상의 씨앗이 되는 문장이 아닌가.

337. 단순한 민화라도 사생아가 어느 날 문득 자기 어머니에게, 내 아버지가 누구냐고 물으면, 이 민화는 갑자기 의미심장해진다.

338. "내가 네 아버지라는 걸 어떻게 아느냐?" "어른이 제 아버지라는 걸 압니다."

340. 자기 치적의 은총을 초월적이며 근원적인 존재의 은혜로 돌리지 않고, 황제는 마땅히 자기가 누릴 바를 누린다는 입체적인 환상을 품는다. 이런자는 더 이상 두 세계의 중재자일 수 없다.

구세주로서의 영웅

340. 첫번째 단계에서 아들은 사자가 되어 귀환하지만, 두번째 단계에서는 '나와 아버지는 결국 하나'라는 통찰과 함께 귀환한다.

343. 형제는 경기장 한복판으로 나아갔다.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각기 크리슈나에게서 자기의 모습들을 보았다.

343. "모두들 슬퍼하지 말아요. 죽지 않고 영생하는 인간은 있을 수가 없어요. 자기가 무엇을 소유하고 있다는 생각부터가 틀린 것입니다. 아버지, 어머니, 아들은 존재하지 않아요. 존재하는 것은, 오직 생과 사의 끝없는 순환일 뿐입니다." -크리슈나

344. 영웅의 임무는 아버지의 부정적인 측면을 살해하고, 우주의 자양이 될 생명의 에너지를 그 굴레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다.

344. 아버지는 우리 삶이 걸린 죽음이다. '죽음은 하나인가, 여럿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이렇다. '그가 거기에만 잇는 한 그는 하나지만, 여기 자식들 안에 있을 때는 여럿이다."

344. 어제의 영웅은, 오늘 '스스로를 십자가에 달지 않으면 내일의 폭군이 된다.

345. 골육상잔의 끔찍한 광경을 완화시키기 위해 전설은 아버지를, 잔인한 숙부 혹은 포악한 니므롯으로 출현시킨다. 아들은 아버지를 시해하지만, 결국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다. 수수께끼 같은 인물들은 원초적인 혼돈 속으로 해소된다. 이것이 바로 세계 종말 그리고 재개의 비밀이다.

성자로서의 영웅

345. "내가 쓰는 시대는 끝났다. 나는 나에게 계시된 것을 써 왔고, 가르쳐 왔지만, 내가 보기엔 참으로 하잘것없다. 이제 바라건대, 내가 가르치는 시대가 끝났듯이 내 삶 또한 그러하기를." -토마스 아퀴나스-

영웅의 죽음

347. 영웅의 전기 마지막 장은 영웅의 죽음 혹은 떠남의 장이다. 여기에서는 그의 전생애가 요약된다. 말할 필요도 없이 죽음에 겁을 먹는다면 그 영웅은 영웅이 아니다. 영웅은 마땅히 무덤과 화해할 수 있어야 한다.

354. "비구들아, 내 이제 너희를 떠난다. 존재의 제법은 무상하다. 정진하여 해탈에 이르도록 하여라."

제4장 소멸

소우주의 끝

356. 놀랄 만한 권능을 가진 막강한 영웅은 바로 우리들 개개인이다. 거울에 비추어 볼 수 있는 육체 자체로서가 아니라 우리들에 내재하는 왕으로서다. 크리슈나는 이렇게 선언한다. "나는 모든 피조물의 가슴 안에 있는 실재다. 나는 모든 존재의 시작이며, 중간이며, 끝이다."

358. "혼령은 들으세요. 그대는 이승의 삶이라는 수고로운 시련을 다 치러 내고 승리했던 분입니다. 이제 우리 주님이 그대를 데려갔으니 이 아니 기쁜 일입니까? 우리 역시 영원히 이승에 있는 것은 아니에요. 잠시 다녀가는 것뿐입니다. 우리 삶이란 햇볕에 몸을 덥히는 것 같은 것이지요. 주님 은덕으로, 우리는 서로를 알고 사귀게 되었습니다.

362. 어느 때, 어느 시든 내가 바로 레(Re)다. 나는 폭력에 물러서지 않고, 내손으로도 폭력을 휘두르지 않는다.

대우주의 끝

364. '여보게들, 십만 년이 흐르면, 우주 순환 주기가 다시 시작된다네. 이 세계는 파멸에 들 것이고, 바다는 마를 것이네. 이 넓은 땅, 산들의 왕인 수메루산이 불에 타, 브라마의 세계는 하나도 남김없이 파괴될 것이네. 그러니 여보게들, 선의를 이 땅에 넘치게 하소. 연민과, 기쁨과, 평등이 여기에 넘치게 하소. 어머니와 아버지를 공경하고, 집안 어른들을 섬기소.'

☞ 종말이 현재의 삶에 보여주는 힘이 이런 것이 아닐까. 선의, 연민, 기쁨, 평등, 공경이란 가치에 온몸을 던질 수 있게 하는 동기가 되는 것.

367. 그러나 끝까지 참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다. 이 하늘 나라의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어 모든 백성에게 밝히 알려질 것이다. 그리고 나서야 끝이 올 것이다.

367. 그러므로 사람들이 그리스도가 광야에 나타났다 해도 믿지 말아라. 동쪽에서 번개가 치면 서쪽까지 번쩍이듯이, 사람의 아들도 그렇게 나타날 것이다. 시체가 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모여드는 법이다.

368.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모든 일들이 일어나고야 말 것이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날과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모르고,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이 아신다. -마태복은 24:35-36

☞ 왜 마태복음이 이 말로 책을 마무리 했을까. 대우주의 끝을 보여주는 상징, 서양인들이 가장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성경의 이야기라서?

에필로그

변신자재자

370. 프로테우스로부터 배우기를 바라는 삶의 항해자는, "그에게 바싹 달라붙어 그를 조여야 한다. 그러면 그는 온전한 형상으로 나타난다.

371. 신화 체계는 현대의 석학들에 의해 여러가지로 정의되었다. 프레이저는 자연계를 설명하려는 원초적인 서툰 노력이라고 했고, 뮐러는 후세에 오인되고 있는, 선사 시대로부터의 시적 환상의 산물이라고 했으며, 뒤르케임은 개인을 집단에 귀속시키니 위한 비유적인 가르침의 보고라고 했고, 융은 인간의 심성 깊은 곳에 내재한 원형적 충동의 징후인 집단의 꿈이라고 했으며, 쿠마라스와미는 인간의 심오한 형이상학적 통찰을 담은 전통적인 그릇이라고 했고, 교회에서는 하느님 백성에 대한 하느님의 계시라고 정의 했다. 갖가지 판단은 판단자의 견해에 따라 결정된다. 신화가 무엇이냐는 관점이 아니라, 신화가 어떻게 기능하고 과거에 어떻게 인간에 봉사해 왔으며, 오늘날 어떤 의미를 갖느냐는 관점에서 검토해 보면, 신화는, 삶 자체가 개인, 종족, 시대의 강박관념과 요구에 대해 부응하듯이, 신화 자체도 그에 부응할 것으로 비친다.

신화, 제의, 명상의 기능

371. 개인은 인간 전체 이미지의 단편이며 일그러진 형상일 수밖에 없다.

371. 개인은 이 모두일 수가 없다. 따라서 개인의 전체성은, 개별적인 구성인자로서가 아닌 사회라는 공동체 안에서만 누릴 수 있다... 개인이 실제든, 상상이나 느낌을 통해서든, 그 사회로부터 자신을 단절시킨다는 것은 존재의 근원과의 절연을 의미할 뿐이다.

☞ 인도에 다녀와 새롭게 직장을 구해야 겠다고 마음먹었을 때가 떠오른다. 다시 사회로 들어가자, 평범한 직장에 들어가보자, 뭔가 그 톱니바퀴속에 들어가보고자 하는 욕망이 일었던 기억. 그렇게 해서 지금 다니는 직장에 들어오게 되었고, 5년이 되어간다. 벌써 장기재직휴가가 나왔다. 무엇을 배웠는가. 나에게 좋았던 점과 나빴던 점은 무엇인가. 이제 자유로운가. 욕구가 충족되었는가. 그렇다면 다음 단계는 무엇인가.

372. 살아 있는 몸 안에서 무명의 세포가 사라지듯이, 개인이 속한 세대는 사라지고 시간을 초월한 형상만 남는다.

372. 맡는 역할이 비록 하찮다고 하더라도 개인은 이 인간의 , 아름다운 축제의 이미지에서 자기 역할이 바로 자기의 본질이었음을 깨닫는다.

372. 사회적인 의무를 통해 개인은 축제를 정상적인 일상의 생존으로 수렴할 것을 배운다. 이로써 개인의 정체가 확인된다. 거꾸로 말하면 무관심과 반항은 개인과 사회를 단절시킨다. 사회라는 단위에서 볼 때 그 단위에서 단절된 개인은 아무것도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쓰레기다. 남자든 여자든, 정직하게 자신이 맡은 역할에 충실했다고 고백할 수 있는 사람만이 '존재한다'는 동사에 값하는 인물 일 수 있는 것이다.

☞ 청교도의 소명의식이 엿보인다. 2차세계대전을 겪은 후인 1949년에 이 책이 발간되었다. 이 책을 통해 캠벨은 미국사회에 어떤 메세지를 던지고 싶었을까. 개인과 사회의 연결을 찾아내고 시대에 만연한 반항과 무관심의 뿌리를 끊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그 매개체로 신화를 발견한 것이고, 그게 다양한 문화로 확대되어 신화의 원형을 찾아내는 일로 확대되어, 인류 전체에 대한 메세지로 승화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

372. 진정으로 종교적인 제의의 가장 중요한 동기는 피할 길 없는 운명에 순종한다는 것이었다.

373. 겨울이 오는 것을 막겠다는 부족적 의식이 전해진 적이 있던가? 오히려 모든 의식은, 자연의 휴식과 더불어 오는 이 혹한의 계절을 견디어 낼 수 있도록 사회의 구성원들에게 준비를 촉구한다.

☞ 적절한 예, 기억하라.

373. 그러나 다른 길도 있다. 사회적인 의무와 대중적 제의와는 정반대로 향하는 다른 길이 있는 것이다. 의무의 길이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사회에서 추방된 자는 아무것도 아닌 쓰레기다. 그러나 다른 관점에서 보면 이 추방은 탐색 모험의 첫 단계일 수 있다. 모든 사람은 이 두 가지 길을 동시에 간직하고 있다. 따라서 이 길은 자기 내부에서 탐색되고 또 발견되어야 한다. 성별, 연령별, 직업별 차이는, 우리 인간의 특질상 입고 있는 옷 같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374. 우리의 핵은 무엇일까? 우리라고 하는 존재의 기본적인 성격이란 어떤 것일까?

374. 자기 자신을 위대한 인간으로 발견할 모모 씨는 내성적이며 초연적 인간이 된다.

374. 개인의 본질, 세계의 본질... 이 둘은 하나다. 이 때부터 은거, 은둔은 필요없다. 영웅이 어디를 떠돌든, 그가 무슨 짓을 하건 그는 자기의 본질적 실재에 머문다.

374. 사회적 참여가 결국에는 개인의 내부에 있는 전체를 깨닫게 하듯이 추방으로 인한 유랑이 영웅을 전체에 내재하는 자아에 이르게 한 것이다.

오늘날의 영웅

375. 시간을 초월해서 존재하는 상징의 우주는 무너져 버리고 말았다.

375. 사회의 구성 단위는, 이제 종교적 내용물의 전달자가 아니라 경제적, 정치적 조직이다.

375. 진보한 사회 안에서도, 제의, 도덕률, 예술이라는 고대 인류 유산의 흔적은 조락의 길을 면치 못하고 있다.

☞ 신화의 위기

376. 오늘날 집단 속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세계도 그렇다. 모든 것은 개인에 귀착된다. 그러나 여기서 의미란 완전히 무의식적이다. 인간은 자기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인간은 어떤 동인에 의해 추진되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인간 심성의, 의식적인 부분과 무의식적인 부분의 교류 통로는 단절되고, 우리는 둘로 찢기고 말았다.

376. 오늘날의 사회는 지구요. 경계선에 갇힌 국가가 아니다.

376. 국기로 장식된 채 곳곳에 나붙어 공식적인 성화로 채택된 이른바 애국자들이야말로 영웅이 극복해야 하는 첫번째 시련인, 관문의 문지기일 뿐이다.

377. 차라리 그것보다 필요한 것은 전체 사회 질서의 진화다.

377. 의식은 오늘 밤의 꿈을 통제할 수도 예언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효과적인 상징을 발명할 수도, 예언할 수도 없다. 모든 일은, 현대 세계의 살아 있는 심성의 심층에서는 물론, 전 지구가 한 덩이로 맞붙은 거대한 전장에서 길고 무서운 과정이라는 전혀 다른 단계에서 이루어진다.

377. 인간이 되려면, 놀라우리만치 다양한 인간의 얼굴로 바뀌어 있는 신의 얼굴을 알아보아야 한다.

378. 하늘에서 땅으로의 하강한 서양 학문, 그리고 오늘날의 인간 자체에 대한 관심 집중은, 인간의 경이라는 초점의 놀라운 이동로를 닦았다. 동물의 세계도 아니고 식물의 세계도 아니고 천체의 기적도 아닌, 이제는 오직 인간만이 결정적인 수수께끼다. 인간은 아득한 존재와 더불어 끝나야 하고, 이 아득한 존재를 통해 자아는 십자가에 못 박히고 부활해야 하며, 이 사회의 이미지 전체가 개선되어야 한다. 인간은 그러나 '내'가 아닌'너'로 이해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어떤 종족, 민족, 대륙, 사회적인 지위 혹은 세기의 이상과 세속적 관습도 우리 모두의 내부에 살아 있는 불멸의, 놀라운 신적인 존재의 척도가 될수 없기 때문이다.

378. 현대 영웅은 자기가 속한 사회가 자만심과 공포와 자기 합리화된 탐욕과, 신성의 이름으로 용서되는 오해의 허물을 스스로 벗어던지기를 기다릴 수 없고, 기다려서도 안 된다. 니체는, "그 날이 도래한 듯이 살라"고 하고 있다. 창조적인 영웅을 이끌고 구원하여야 하는 것은 사회가 아니다. 아니 사회를 지키고 구원하여야 할 사람이 바로 창조적 영웅이다. 그리하여 우리 각자는 그 영웅의 족속이 대승을 거두는 그 빛나는 순간이 아니라, 그가 개인적으로 절망을 느끼고 침묵을 지킬 때 그가 겪는 모진 시련을 나누어 부담하는 것이다.

☞ 마지막 문장. 엑기스. 니체의 말로 마무리를 돕고 있다. 그 날이 도래한 듯이 살라. 그리하여 각자가 영웅의 시련을 나누는데 동참하라. 도발적이고 동기부여적인 마무리다. 캠벨이 젊은날 우리에게 전하고 싶었던 것은 쉽게 말해 더 이상 사회가 만들어 놓은 대로 살지 말고 스스로 자신의 인생을 개척하라는 의미가 아니었을까. 용기를 가지고 자발성의 단계로 올라가라! 그리하여 사랑, 기쁨, 평화, 깨달음의 진보를 얻으리라.

역자 후기

381. 어린 시절 아메리카 인디언의 민화를 접하고, 문화적 접촉이 전혀 없었던 이들 민화와 아더왕 전설의 상징 체계가 놀라우리만치 유사한 데 착안, 모든 문화권 신화를 두루 꿰는 신화의 본을 찾아내고자 노력했다. 이 연구를 집성한 노작이 바로 4부작으로 된 그의 주저, <신의 가면>인데 본서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은 바로 이 주저의 서곡인 셈이다.

381.<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은 융파 심리학의 입장을 원용하면서 다양한 영웅 전설을 통해 인간의 정신 운동을 규명하는 한편, 현대 문명에 대한 하나의 재생 원리까지 제시하려는 야심적인 작품이다.

381. 그의 견해에 따르면 모든 신화는 꿈과 동일한 문법을 갖는다. 가령 프로이트의 이른바 '꿈의 작업' 곧 축, 치환, 형상화 작업은 신화 형성에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382. 그는... 하나의 영웅, 그러니까 모든 영웅 신화의 본이 되는 하나의 영웅을 떠올린다.

382. 엘리아데, 융, 짐머, 케레니 같은 이들의 글을 대하면 의식과 인식의 구조물이 켜를 이루고 있다기보다는, 행간을 직관으로 건너는 듯한 시적 분위기가 엿보이는데, 캠벨의 글도 예외는 아니다. 이것은 어느 수준에서는 언어가 무색해지는 이 분야 학문의 특수성 때문인 듯하다.

☞ 그 때문에 설득력은 많이 떨어진다. 논증이 되지 못하고 이야기를 통한 상징으로 표현된다. 그것을 읽어내기가 쉽지는 않다.

382. 다른 이들의 믿음, 다른 이들의 종교라면 듣도 보도 않고 흰 눈을 하는데, 그럴 것이 아니라 그들에 대한 바른 이해가 주체적인 종교 정신을 곧추세우는 데 밑바탕 삼을 수 있다면, 남의 집(종교)도 좀 기웃거려 보는 데 인색해서야 되겠느냐는 뜻에서다.

3. 내가 저자라면

<융과 캠벨>

한 블로거는 이 책에 대해 이렇게 썼다.

"이 책은 융 심리학 이론의 ‘증거’에 가까운 책이다. 그냥 신화 모음집이 아니라 꿈에 대한 융의 통찰을 증명할 수 있는 증거물 모음집이기도 하다."

http://blog.yes24.com/document/2664491

내가 찾은 이 주장의 근거는 "프로이트와 융과 그 후계자들은 영웅과 신화의 행적이 현대로 계승되었음을 여지없이 증명해 냈다."(11쪽), "꿈은 인격화한 신화고 신화는 보편화된 꿈이며, 꿈과 신화는 상징적"(25쪽), 융의 집단무의식의 개념이 보이는 부분은 "신화에서는 문제와 해결책이 모든 인류에게 직접 뚜렷이 제시되는 데 비해, 꿈속에서는 꿈꾸는 사람이 안고 있는 문제에 따라 내용이 달라진다."(25쪽) 고 말한 부분에서 찾을 수 있다. 프로이트의 치유적 꿈해석이 아니라 융의 집단무의식에서 신화와의 연결점을 찾은 것이다. 캠밸과 융의 사상적 유사성을 실제로 느낀 것은 도서관에서 캠벨의 저서인 <신화의 이미지, 1974>와 융의 글이 실린 <인간과 상징, 1996>를 보았을 때였다. 너무나 유사한 내용과 심지어 편집, 들어간 사진까지 비슷해 보였다. 굳이 논증하려 하지 않고, 굳이 설명하려하지 않는 스타일 도 닮았다. 캠벨은 그가 찾은 영웅의 여정처럼 지하세계로 상징되는 무의식속에 들어가 신화라는 선물을 세상에 가지고 귀환한다. 분명히 융의 집단무의식의 개념이 들어가 있다. 캠벨이 말한 "보편화된 꿈"은 융의 "집단 무의식"과 통한다. 그렇다고 이 책을 융 심리학의 증거물 모음집으로만 보아서는 부족하다. 그가 신화를 가지고 세상에 돌아온 이유는 명확하다. 세상에 선물이 되기 위해서다. 신화는 모든 것이 개인화한 시대에, 의미를 잃어버린 세대에, 의식과 무의식의 교류가 단절되어 갈 길을 잃은 세대에 주는 선물이다.

<내가 저라라면>

앞서 읽은 <신화의 힘>과 <신화와 인생>의 '내가 저자라면'을 쓸 때 생각했던 ‘영웅의 여정을 따르는 순서로 목차를 잡는 방법’이 이 책에서 그대로 적용되었다. 캠벨은 크게 3가지, 출발, 입문, 귀환으로 영웅의 여정을 나누고, 각 부분을 총 17개의 단계로 정리했다.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로 시작과 마무리를 명확히 하고 있다. 전에 리뷰할 때는 이렇게 하면 캠벨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잘 전달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왜일까? 문장들과 예시된 이야기들이 머릿속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나의 집중력의 문제일까 생각했는데 그것만은 아니었다. 그가 제시한 원형신화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기 위해 Monomyth에 대한 영어 원문을 해석하려고 하면서 알게 되었다. 신화학에 대한 배경지식이 부족할 뿐더러 심리학, 문화인류학까지 맞닿아 있는 내용들을 한국어로 옮기면서 생기는 단어 선택의 문제가 있었을 것이다. 국내에서 신화학에 대한 전문적인 연구가 부족했기 때문에 단어 선택이 임의적일 수밖에 없고 각 단어의 정립된 개념이 없다는 것이 이해를 어렵게 만든 것이다. 게다가 이 책은 힌두, 불교, 기독교 철학 등 세계 각지의 종교와 문화를 다룬다. 엄청난 배경지식을 요구하는 책이다. 구체적인 이야기가 나올 때는 이해가 쉽다. 배경지식이 있는 것도 있고 문맥상 이해가 쉽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체 주제와 연결시켜 생각하기는 쉽지 않았다. 게다가 '친모복합', '원형 심상' '핵단위', '우주발생적 순환', ‘변신자재자’ 같은 단어를 만나면 머리 속이 하예지고, 한자어를 자주 사용한 번역이 많아 개인적으로 이해가 어렵기도 했다.

내가 쓰고 싶은 책은 조영남이 쓴 '현대인도 못 알아먹는 현대미술' 같이 어려운 것을 쉽게 설명하는 책이다. 조영남은 개인적인 관심과 뉴욕에서의 공부의 시간을 통해 현대미술을 자기의 것으로 소화해 내고 자신의 언어로 풀어냈다. 어렵게 쓰는 것이 미덕인 학문서적이 아니라, 어려운 개념은 풀어쓰고, 모호한 개념을 다시 한번 살펴보고 비유를 들고 예시하는 그런 책을 쓰고 싶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쓰고자 하는 분야의 완전한 이해가 필요하다. 그리고 자신의 언어로 다시 풀어내는 노력과 기술 또한 필요하다.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스타일에 대한 고민도 있다. 캠벨과 융처럼 논증하지 않고, 설명하지 않는 직관적인 방법으로 설득할 것인가, <신>의 저자인 김용규님처럼 논증하고 설명하는 방법을 사용할 것인지는 아직 명확하게 정립되지 않는다. 신화학의 성격상 논증과 설명이 불가능 한 것인지, 캠벨이 일부러 이해의 폭을 넓히기 위해 직관적인 방법을 사용한 것인지 알지 못한다. 개인적인 앎이 부족하기도 하고 직접 시도 해보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저자라면 아마도 글은 쉽게 논증과 설명, 예시로 독자를 설득하고 이미지나 사진을 사용해 직관을 자극하여 이해의 폭을 확장시키는 방법을 사용할 것 같다.

<첨부자료>

398px-Heroesjourney_svg.png

                            출처: http://en.wikipedia.org/wiki/Monomyth

1. Monomyth, 원형신화의 17 단계, 조셉 캠벨

1.1 출발

The Call to Adventure 모험에의 부름

․ Refusal of the Call 소명의 거절

․ Supernatural Aid 초자연적 능력의 도움

The Crossing of the First Threshold 첫 관문의 통과

Belly of The Whale고래의 뱃속

1.2 입문

The Road of Trials 시련의 길

The Meeting With the Goddess 여신과의 만남

․ Woman as Temptress 유혹하는 여자

Atonement with the Father 아버지와의 화해

․ Apotheosis 신격화(절정기)

The Ultimate Boon 궁극적인 선물

1.3 귀환

․ Refusal of the Return 귀환의 거부

․ The Magic Flight 불가사의한 탈출

․ Rescue from Without 외부로부터의 구조

․ The Crossing of the Return Threshold 귀환 관문의 통과

․ Master of Two Worlds 두 세계의 스승

․ Freedom to Live 살 자유

2. Phil Cousineau 필 쿠지노(<The Hero's journey>의 저자)의 여덟 단계

모험에의 부름

․ 시련의 길

․ 비젼의 탐색

․ 여신과의 만남

․ 선물

․ 불가사의한 탈출(Magic Flight)

․ 귀환 관문

․ 두 세계의 스승

3. David Adams leeming 데이빗 아담스 리밍의 영웅의 여정 여덟 단계

☆ <Mythology>의 저자

기적적인 수태와 탄생

작은 영웅의 입문

명상 또는 준비를 위한 사회로부터의 이탈

시련과 탐색

․ 죽음

․ 지하세계로 하강

․ 부활과 재생

․ 승천과 속죄

※ 영웅의 여정은 관점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다. 무조건 일반화하려 하지 말자.

IP *.111.5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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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미
2011.04.18 04:30:45 *.23.188.173
한글만으로도 버겁다 생각했는데
저도 원형신화는 잘 이해가 가지 않더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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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경
2011.04.18 06:15:37 *.35.19.58
그러네. 배경 지식이 부족하니 한글로 쓰여있어도 뭔소리인지 모르는거였어.
경인 북리뷰에서 보니 이윤기 선생님은 인문학에 너무 쉽게 쓰여 있다고 문제제기를 하셨다네.
하지만 나도 쉬운 글을 쓰고 싶다. 현학적 허세로 어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까 싶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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