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연구원

북

연구원들이

  • 미나
  • 조회 수 2245
  • 댓글 수 0
  • 추천 수 0
2011년 4월 24일 19시 35분 등록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조셉캠벨 <두 번 읽기>

1.     저자에 대하여

<책에서 찾은 조셉 캠벨>

즉 근원적인 말씀이 평화, 모든 존재에 대한 평화를 지향하는 부처의 우주적 친교에 관심해야 하는 것이다. p208”

      앞에서 기독교에 대한 비판에 이어 바로 이어지는 부분에서 조셉 캠벨의 인생에 궁극적으로 영향을 끼친 종교와 교리가 불교임을 알 수 있다.

그 주제나 흐름이 어찌나 똑같았던지 초기의 기독교 선교사들은, 악마가 이 기독교 성경 이야기를 위작하여 도처에다 뿌려둔 것이라는 터무니없는 생각까지 했다. p390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알 수 있는 대목

 

2. 내가 저자라면

(1) 읽으면서 좋은 부분

- 신화의 이야기를 하고, 이야기에서 나오는 각각의 상징들이 의미하는 바를 설명해주는 부분 덕분에 쉽게 신화를 해석할 수 있다.(p226-227)

- 신화나 민간전승에서 자주 다루어지는 부분이 어떻게 발전되어 왔는지에 대한 사실을 실제 다양한 이야기를 예로 들어 보여줌으로써, 변화되어 온 모습을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이처럼 사실과 그에 따른 예시를 다양한 이야기로 적절하게 선택해서 독자에게 들려준다.(p260)

- 각기 다른 신화에서 비슷한 캐릭터들의 비교 : 아마데라스가 고대 수메르의 최고 여신인 이난나의 동양판이라고 알려주는 부분에서, “아하!!” 이런 느낌이 들었다. 조셉캠벨이 다양한 신화들을 모두 머리 속에 집어넣고, 정리가 되어있구나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니 비슷한 내용을 얘기하는 각기 다른 곳의 신화를 연결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p277)

 

3.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머리말>

아이는 우리가 말하는 내용 중 변형된 부분만을 알아듣고는 속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어른에 대한 아이들의 불만과 면역성이 종종 이러한 부정적 인상에서 유래한다는 사실을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p5

저자의 비교 해석이 이 세계의 통합을 결실시키려는 작품의 경향에 대해, 종교적 혹은 정치적 제국의 이름으로서가 아닌, 인류의 상호 이해라는 측면에서 그리 초라하지 않은 하나의 기폭제가 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베다 경은, <진리는 하나되, 현자는 여러 이름으로 이를 드러낸다>고 했다. p7

 

<프롤로그>

1.원질신화

1) 신화와 꿈

이런 이야기들은 우리에게 도전적이리만치 끈질긴 암시를 던진다. p13

신화는 인간의 육체와 정신의 활동에서 나타날 수 있는 모든 것에 대해 살아 있는 영감을 불어넣었다.

모두가 이 은밀한 통로를 지나 인류의 문화로 현현한 것들이다.

(28) 시간을 초월한 이 환상의 비밀은 무엇일까? 그것은 정신의 어느 심연에서 유래하는 것일까? 신화는 왜 어느 곳에서 채집된 것이든 그 다양한 의상 아래로는 똑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일까? p14

→ 신화가 모두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는 것은 사람 사는 세상이 알고 보면 다 똑 같기 때문일 것이다. 명언이나 진리처럼 시간이 바뀌어도 예나 지금이나 공감할 수 있는 것도 어쩌면 신화와 비슷한 것 같다. 어디에 있든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의 감정이란 비슷하니 말이다.

인간이 가진 심성 중에 가장 끈질기게 남는 성향은, 동물 중에서도 인간이 가장 오랫동안 어머니 젖가슴에 매달려 있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p16

양친이 곁에 없는 기간이 길어지면 유아는 긴장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공격 충동을 일으킨다. 어머니의 속박을 받아도 유아는 공격적인 반응을 보인다. p17

성생활의 병리학적인 모든 혼란은, 발육이 억압당했기 때문에 야기된 것으로 보아도 좋다. p18

우리가 지었고, 우리가 그 속에 살고 있고, 우리가 내적으로 지니고 있는 세계의 파멸……

꿈을 읽는 현대 과학인 정신분석학은 우리에게 가르치기를, 이 같은 비현실적 이미지에 유념하라고 했다. p21

한 차례의 통과 제의가 있은 다음에는 다소 느슨한 휴지 기간이 뒤따르는데, 이 기간에는 인생을 살아갈 당사자를 새로운 시대의 형식과 적절한 감정 상태로 유도하는 절차가 있다. 그래서 마침내 정상적인 생활로 되돌아올 때가 되었을 때 입문자 initate를 거듭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참으로 놀라운 것은, 상당수의 제의적 시련과 이미지가, 정신분석을 의뢰한 환자가 유아기 고착 상태를 떨치고 미래를 향해 발돋움을 시작하는 순간 꿈에 나타나는 이미지와 일치하고 있다는 점이다. p22

만일 이 이미지들이 신화와 제의를 통해 외부에서 들어오지 않으면, 꿈을 통해 내부에 나타나게 된다.

즉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이 빛나는 태양이 마침내 그 고도를 떨어뜨리고 무덤이라고 하는 밤의 자궁 속으로 사라지기 위해 기를 꺾어야 하는 시기를 말한다. 우리의 욕망과 공포의 정상적인 상징이 인생의 오후에 해당하는 이 시기에는 반대되는 것으로 전화한다. 왜 그런가 하면 이 시기에 오는 것은 삶이 아니라 죽음이기 때문이다. p25

왕이 된 이상 한 개인일 수 없는데도 그는 공적인 사건을 개인적인 이익으로 취했던 터였다.

이를 자기 소유로 하는 행위는 이기적인 자기 강화에의 충동을 나타낸다.

전통적인 통과 제의가 개인에게 과거를 향해서는 죽고 미래를 향해서는 거듭 날 것을 가르쳤듯이, 저 왕위 서임 의식은 그의 개인적인 성격을 벗기고 선명이라는 망토를 입혀주었다. p27

권력망자(세습에 의하지 않고 힘으로 정권을 잡은 참주)는 세계의 신화, 민간 전승, 전설, 심지어는 악몽에도 익히 등장하는데 그 특징은 어디서건 동일하다. 그는 막대한 재산의 소유자다. 그는 <내 것>이라는 탐욕스러운 권리에 걸신들린 괴물이다. 그가 저지른 황폐의 참상은 그의 세력권 안에 두루 널려 있는 것으로 신화와 동화는 한결같이 그리고 있다. p28

무엇에 대한 복종인가? 이것은 바로 오늘날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 하는 수수께끼이며, 영웅의 바탕되는 미덕과 역사적 행위가 풀었어야 하는 문제다.

오직 탄생(낡은 것의 새로운 태어남이 아닌, 새로운 것의 탄생)만이 죽음을 정복할 수 있다. p29

영웅이 첫단계에서 하는 일은, 하찮은 세상이라는 무대로부터 진정한 어려움이 도사리고 있는, 심성의 인과가 시작되는 곳으로 물러앉는 일이다. p30

잠잘 때나 꿈속에서 우리는 인간성의 사고를 꿰뚫어 체험한다. 내 말은, 수천 년 전에 인간이 깨어 있는 상태에서 했던 것과 같은 방법으로 꿈속에서 사유한다는 것이다. p31

신화에서는 문제와 해결책이 모든 인류에게 직접 뚜렷이 제시되는 데 견주어, 꿈속에서는 꿈꾸는 사람이 안고 있는 문제에 따라 내용이 달라진다.

영웅은, 현재의 붕괴되어 가는 사회나 정신에 대해서가 아니라 사회 재생의 심원한 원리에 대해 많은 것을 시사한다. 영웅은 현대인으로 죽었지만 영원한 인간으로 다시 태어났다. p33

대속자들에 의해 아득한 옛날, 인류에게 주어져 수천 년간 계승되어 온, 사회의 상징적 도움이라는 미덕, 통과 제의, 은총으로 입은 성사를 통해서 구원받는 것이다.

우리를 자유의 길로 이끌어줄 안내자, 저 아름다운 처녀 아리아드네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p37

(29) 그는 실타래를 만드는 데 필요한 아마를 인간의 상상력이라는 들판에서 거두었다. 수세기에 걸친 경작, 수십 년에 걸친 채집, 수많은 가슴과 손의 힘겨운 작업…… 이 실을 만들기 위해서는 아마를 훑고, 간추리고 헝클어진 실무더기에서 실을 자아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런데도 우리는 혼자서는 이 모험길에 들어서지 못하고 있다. 모든 시대의 영웅들은 우리에 앞서 미궁으로 들어갔고, 미궁의 정체는 모두 벗겨졌으며, 우리는 단지 영웅이 깔아놓은 실만 따라가면 되는데도 그렇다. p39

→ 미궁의 모험길. ‘미궁이라는 말이 깊숙히 와 닿는다. 한치 앞이 보이지 않고, 양옆은 벽이다. 이 길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 아무도 알 수 없다. 길은 오로지 둘 뿐이다. 앞으로 가거나 뒤돌아 가거나. 되돌아 가는 것도 쉽지는 않다. 되돌아 간다고 해서 제대로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믿고 이 길을 따라 앞으로 나아가는 것 뿐이다.

 

2. 비극과 희극

그리스의 비극과 마찬가지로 현대의 소설도 의절의 비의를 찬양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시간 속에 있는 인생이다. p39

대학살의 참상에 불만을 토로하는 자연스러운 충동을 억압당한 곳에서, 비난도, 만병 통치약을 외칠 수도 없는 곳에서 비극 예술의 중요성은 그리스인들이 생각하던 것 이상으로 유효하다.p41

우리는 실패와, 상실과, 환멸과, 냉소적 무위의 쓰라림이 이 세상의 선망받는 자들의 피를 말린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p42

신화와 동화 고유의 사명은, 비극에서 희극에 이르는 어두운 뒤안길에 깔린 특수한 위험과 그 길을 지나는 기술을 드러내는 일이다. p43

(30) 영웅의 행위가 완성되면, 삶은 더 이상 도처에 도사린 재앙의 가혹한 단죄와 시간에 의한 마손이나 막막한 공간의 두려움 앞에서 무방비 상태로 고통받는 일이 없게 된다. p44

→ 영웅의 행위가 완성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미궁 속에서 빠져나오는 것일까? 미궁에서 빠져나와 천복을 찾는 것? 어찌되었든, 두려움 앞에서 고통 받는 일이 없게 된다는 것은 참 매력적이다. 한편으로는 조급증이 생긴다. 영웅의 행위가 빨리 완성되었으면 좋겠다.

일상적인 삶의 세계에서 초자연적인 경이의 세계로 떠나고 여기에서 엄청난 세력과 만나고, 결국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고, 영웅은 이 신비스러운 모험에서, 동료들에게 이익을 줄 수 있는 힘을 얻어 현실 세계로 돌아오는 것이다. p45

영웅의 모험은 위에서 말한 핵 단위의 패턴, 다시 말하면, 세계로부터의 분리, 힘의 원천에 대한 통찰, 그리고 황홀한 귀향의 패턴으로 이루어진다. p50

(31) 대개 동화 속의 영웅은 자신이 속한 문화권의 소우주적 승리를 거두고, 신화의 영웅은 세계사적, 대우주적 승리를 거두는 게 보통이다. 또 전자(젊은이, 아니면 막강한 힘을 행사할 수 있게 되는 경멸 당하는 아이)는 자신을 압제하던 상대를 이겨내는 데 그치는 반면, 후자는 모험을 통하여 자기가 속한 사회 전체의 소생에 필요한 수단을 가지고 돌아온다. p53

→ 이것이 바로 영웅의 행위가 완성되는 것이겠지? 모험을 통하여 홍익을 위한 전리품을 가지고 일상으로 귀환하는 것.

영웅은, 우리 모두가 내장하고 있되 오직 우리가 이 존재를 발견하고 육화시킬 때는 기다리는 신의 창조적, 구원적 이미지의 상징이다. p54

위대한 영웅은 위대한 행적을 통해, 이 다양한 얼굴이 사실은 하나임을 알고, 또 남들에게 알리게 된다. p55

 

4. 세계의 배꼽

영웅의 성공적인 모험의 의미는, 생명의 흐름을 풀어 다시 한번 세계의 몸 속으로 흘러들게 하는 데 있다. p55

한 문화가 신화 안에서 인간 존재의 면면이나 그 문화의 면면으로 키워나갈 때, 그 문화는 상징적인 암시와 함께 싱싱하게 살아난다. p60

초월적인 힘은, 이 모든 것을 통하여 모든 것 안에 사는 자, 모든 것 안에서 훌륭한 자, 모든 것 안에서 우리의 섬김이 타당한 자에게 감득되는 것이다.

닮지 않은 것이 상합하고, 서로 다른 것에서 가장 아름다운 조화가 이루어지며, 모든 것은 다툼에 의해 생겨난다. p62

도덕 군자가 의분을 금치 못할 대목에서, 비극 서사시인이 연민과 공포를 동시에 느낄 대목에서, 신화는 장엄하고 무시무시한 신곡을 향해 온전한 모습으로 피어난다. 신화의 제신이 웃는 웃음은 적어도 현실 도피자의 웃음이 아니라 삶 자체만큼이나 무자비한 웃음이다. 우리는 이것을 신, 즉 창조자의 무자비함이라고 보아도 좋을 듯하다.

제때에 나고 죽는, 자기 중심적이며 투쟁하는 자아를 응시하는 탁월한 정체 불명의 기쁨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다. p65

 

1.                   영웅의 모험

1.                   출발

1.       영웅에의 소명

부지중에 저지른 실수는 극히 드문 것이긴 하지만 뜻밖의 세계를 드러내고, 당사자는 이해하기 어려운 세력과의 관계 속으로 끌려들어간다. 프로이트가 밝혔듯이 이러한 실수는 우연히 생긴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욕망과 갈등이 억압된 결과 나타난 것이다. 그것은 부지중에 표출된, 삶의 표면에 잡힌 주름이다.

(32) 실수는, 운명의 시작에 해당되는 수도 있다. p71

→ 실수가 운명의 시작일 수 있다는 말에 깊이 공감. 내 삶에는 어떤 운명적 실수가 있었는지 생각 해 본다. 어쩌면 대학교를 항공쪽으로 지원하지 않았던 것이 내 인생을 크게 바꿀 수 있었던 절대 절명의 실수가 아니었을까?

전령관은 귀한 역사적 사명의 수행을 촉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비의에서 알 수 있듯이, 전령관의 등장은, <자아의 각성>이라고 불리는 단계를 암시하고 있다.

(……) 이러한 소명은 언제나 변용의 신비 mystrery of transfiguration, 완성되면 곧 죽음과 탄생에 이르는, 정신적 통과 의례 혹은 순간을 개막한다.

바야흐로 또 하나의 문턱을 넘어야 할 때가 도래한 것이다. p72

분리와 탄생의 순간은 불안을 야기시킨다.

즉 징그러운 동물은 무의식 심층(<하도 깊어서 그 바닥이 보이지 않는)을 상징한다.p73

전령관은 우리 내부의 억압된 본능적 다산성의 상징인 야수(동화에서처럼), 또는 미지의 베일에 가려진 신비스러운 존재로 나타나기도 한다. p75

변형의 때가 무르익은 정신은 끊임없이 이런 전령관을 산출하는데 아래에 소개하는 두 삶의 꿈이 이를 드러내 보이고 있다. p76

꿈에서든, 신화에서든 갑자기 한 사람 생애의 새로운 시대, 새로운 단계를 암시하면서 이런 모험에 등장하는 인물은 더할 나위없이 매력적인 분위기를 갖는다.

이때, 주인공은 이전에 자신이 의미를 부여하던 사물이 이제 무가치하게 되어버리는 상황을 경험한다. 막내 공주의 세계에서처럼, 황금 공이 샘 속으로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p77

낙원일 수도 있고 위험의 도가니일 수도 있는 이 운명적인 영역은 여러 가지 형태로 다양하게 표상된다.

이곳에는 항상 변환 자재하는 존재, 다형태를 취하는 존재, 뜻밖의 고통, 초자연적인 행위, 그리고 초현실적인 환희가 있다. p80

 

2.       소명의 거부

타성이나, 힘에 겨운 일, 혹은 <문화>의 장벽 때문에, 모험의 주체는 의미 심장한 긍정적 행동력을 잃고, 구원의 대상에서 제외되어 버리는 것이다. 모험의 주체가 누리던 화려한 세계는 메마른 돌멩이가 구를 뿐인 황무지가 되고, 그의 삶은 무의미해진다. p81

세계 전역의 신화와 민화는, 거부한다는 것은 결국 제 이득으로 취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33) 개인이 자기 자신의 신이기를 고집하면 신의 의지, 즉 자신의 자기 중심적 체계를 파괴할 수 있는 힘인 신 자신은 괴물로 변하는 것이다. p82

→ 이런 사례들은 일상에서도 많이 볼 수 있는 것 같다. 자아를 버리지 못하고 그것에 얽매이면서 욕망은 나의 더 큰 욕망으로 키운다. 그리고 그 욕망은 어느새 나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하게 만들고, 이로 인해 타락하거나 스스로를 파괴하게 된다.

(34) 신은 희망에 차서 달렸고, 처녀는 공포에 질려서 달렸다. p84

→ 이 처녀는 처녀의 소명을 거부하는 것이다. 소명을 받아들이지 않기 위해, 도피한다.

주저한다고 다 길을 잃는 것은 아니다. 마음은 많은 비밀을 여축으로 간직하고 있다.

소명의 거부에 따르는 부정적인 상태가 뜻밖의 해방의 원리에 대한 행운의 계시일 수도 있다.

고의적인 내향성은 창조적인 정신의 고전적인 방편 중의 하나이고, 이를 효율적인 장치로 응용할 수도 있다. 이 방편은 심적 에너지를 몰아 무의식적 유아기의 이미지 및 원형적 심상이라는 잃어버린 대륙을 활성화시킨다.

인격이 이 새로운 힘을 흡수하고 통합할 수 있으면 당사자는 자기 의식의 초인간적인 단계 및 완전한 통제의 경지에 이를 수 있게 된다. p87

이 자장에서 문제는 어느 한 순간 마침내 풀릴 수 있는 것이다.

신경증적인 유형과 생산적인 유형을 비교해 보면 전자는 자기 자신의 충동적인 삶에 대한 과도한 관심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자기를 현재 그대로 받아들이는 평균적인 유형은, 의지력으로써 자기 자신을 새로운 형태로 다듬는 경향이 있다는 점에서 다르다. p88

부정적인 길을 따르는 영웅이나 여걸, 그리고 아시아 대륙의 이 두 예화에서 운명지워진 이 한 쌍의 결합을 완성시키는데 기적이 필요하다. p92

 

3.       초자연적인 조력

영웅을 도와주는 노파나 요정 노파는 유럽의 민담에 자주 등장한다. p95

이러한 존재는 자비로운 힘, 즉 숙명적인 보호 세력을 표상하고 있다. 영웅이 빠져드는 환각은 곧 안식처이며, 낙원의 평화에 대한 약속이다.

이러한 약속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여러 단계에 이르는 삶의 문턱을 넘으면서, 그리고 삶을 자각하면서 무산의 위기를 겪지만 보호 세력은 항상 영혼의 지성소에, 심지어는 이 세상의 낯선 사건에 내재하거나 그 배후에 존재한다. p96

동화에서, 영웅에게 나타나 영웅에게 필요한 호부(액막이)를 주거나 충고를 해주는 것은 숲속의 난장이,마법사, 은자, 목동, 혹은 대장장이인 것이 보통이다. 고급 신화에서는 이 역할을 맡는 조력자는 스승, 나룻배 사공, 영혼을 내세로 안내하는 안내자로 발전한다. p97

(35) 그런 조력자를 맞는 영웅은, 소명에 응답한 영웅일 경우가 보통이다. 실제로 소명은, 통과 제의의 사제가 접근하고 있음을 알리는 첫번째 통고다. p97

→ 소명에 응답하면 신기하게도 그 소명을 다하기 위해 조력자가 생겨난다는 것은 참 신기한 일이다.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까지 엄청난 고민을 하게 된다. 하지만 고민을 접고, 그 일에 뛰어들면 물론 그것이 될 일이라면, 즉 소명이라면- 신기하게도 고민했던 부분들이 하나 둘 해결 되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조력자라는 것은 사람일수도, 상황일수도 있고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4.       첫 관문의 통과

자신을 안내하고 자신을 도와줄 운명을 인격화함으로써 영웅은 모험의 영역으로 한 걸음 더 들어가 이윽고 한 단계 어려운 영역의 입구에서 <관문의 수호자>를 만나기에 이른다. p105

모험 당사자는 특정 구역의 수호자에게 도전하지 않는 게 좋다. 그러나 살아서든 죽어서든 새로운 경험역을 지나려면 같은 세력의 파괴적 측면을 극복하고 이 특정 구역을 넘어서지 않으면 안된다. 안다만 제도의 피그미 족 언어에서 <오코주무 okojumu(<꿈꾸는 자, 꿈을 통해서 말하는 자>)라는 단어는, 초자연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어서 동류들과는 달리 대단한 존경과 경외의 대상이 되고 있는 자를 일컫는다. p111

이 기지의 세계와 미지의 세계를 가르는 경계선의 수호자는 극히 위험한 존재다. 그들과 만난다는 것은 그만큼의 위험 부담을 안아야 가능하다. 그러나 능력과 용기를 갖춘 사람 앞에서는 능력과 그 꼬리를 감추고 만다. p112

이 두 이야기는 영웅이 겪는 복잡한 관문 통과의 다의성과, 영웅의 공포는 완전한 정신적 무장 앞에서 사라지겠지만, 자기 능력을 과신하는 무모한 영웅이 이 관문을 통과에는 실패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p113

도깨비야, 내 이 숲으로 들어설 때 이미 각오하고 있었다. 허나, 그대가 나를 공격하는 것은 그대 뜻이니 어쩔 수 없다만, 그대 역시 각오는 해야 할 게다. p116

우리가 오감으로 집착하고 있는 세계의 상징, 그리고 육체적인 어느 기관에 의해서는 벗어날 수 없는 세계의 상징인 그 도깨비는 미래의 부처가 덧없는 이름과 물리적인 성격의 다섯 가지 무기로 더 이상 자신을 지키지 못하고 최후의 수단으로 이름할 수 없고, 보이지도 않는 여섯번째의 무기로 바꾸어 대항하자 조복한 것이다. 이 여섯번째 무기가, 명과 형이라는 현상계 너머에 존재하는 초월적인 원리의 지혜라는 천상적 벼락인 것이다.

종국적인 이름과 형태가 아닌, 마음속의 이름과 형태를 초월한 단순한 이름과 형태를 알게 될 때 세상이 그렇게 되듯이 그 역시 신적인 존재가 된 것이다. p119

한 짝을 이루는 대립물은 여행자를 향해 서로 부딪쳐 오는 바위 Symplegades이며, 영웅은 항상 이 길을 지난다. 이것은 세계 전역을 통해 익히 알려진 모티프다.

 

5.       고래의 배

마법의 문턱을 넘는다는 것이, 곧 재생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이라는 관념은, 세계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고래의 배라는 자궁 이미지가 상징적으로 나타난 것이다. 영웅은, 그 관문을 지키는 세력을 정복하거나, 그 세력과 화해하는 대신, 그 미지의 힘에 빨려들어, 겉보기엔 죽은 것으로 나타나고는 한다. p121

관문의 통과가 적별의 형태를 취한다는 교훈을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는 영웅이 외부로의 관문, 즉 가시적 세계의 한계를 넘는 대신, 다시 태어나기 위해 안으로 들어간다.

신도는 이 신전 안에서, 자신은 불멸의 존재가 아니라 티끌에 불과하다는 자기 정체를 깨닫게 된다. 신전 안, 고래의 배, 세계라는 한정된 공간 건너 위, 아래로 보이는 천상적 공간은 결국 하나다.

이러한 괴수들은, 한 차원 심화된 내적 침묵과 만날 준비가 되지 않는 자들을 지켜주는 관문의 수호자들이다. 이들은, 인습 세계를 특징짓는 존재들로서 존재의 위험한 측면을 보여주는 예비적인 경고의 화신이다. 이들은, 신자가 신전으로 들어가는 순간 변형을 체험한다는 사실을 나타내 보인다. 이 순간 신도의 세속적 성격은 사라진다.

침입자가 이 성전을 제대로 거치지 못하는 한 얻은 것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p123

존재를 그만두지 않고는 어떤 생명체든 보다 높은 차원의 존재를 획득할 수 없다. p124

미노스 왕이 지내기로 되어 있는 수소의 희생제는 8년 주기의 마지막 해에, 전통에 따라 미노스 왕 자기 자신이 희생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36) 미노스가 괴수 미노타오로스가 되고, 자기를 희생시켜야 하는 왕이 폭군이 되고, 모두가 왕의 역할을 수행하던 제정 일치 국가가 사리 사욕만 아는 상업 국가가 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이것이 바로자아에의 집착을 끊지 못해 생기는 현상이다.

 

2.                   입문

1.       시련의 길

영웅은 이곳에서 거듭되는 시련을 극복하고 살아남지 않으면 안 된다.

영웅은 거듭나는 데 필요한 충고와 호부(액막이), 그리고 이 영역에 이르기 전에 만났던 초자연적인 조력자의 밀사로부터 도움을 받는다. 어쩌면 모험 당사자가 자신의 초인간적 여행 도정의 도처에 자비로운 권능이 있어서 자기를 도와준다는 사실을 깨닫는 시기가 바로 이 시기인지도 모른다. p129

우리는 모든 원시 종족에서 주술사가 사회의 중심을 이루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인간의 무리는 집단의 이상에 따라 행동하는 법인데, 이 집단의 이상이라는 것은 항상 유아기 상태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p132

이 유아기 상태란 성장의 과정이 진행됨에 따라 수정되고 역전되다가 현실에 적용될 필요가 있을 때 재수정된다.

주술사는, 그 사회 성인들의 심성에 내재하고 있는 상징적 환상 체계를 출몰시키는 역할을 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

어떤 사회에 속하는 사람이든지, 고의적으로든 타의에 의해서든 자기 정신의 미궁이라는 미로로 내려가 어둠 속을 헤매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저 시베리아의 <푸닥>과 성산에 못지않는 상징적인 것들(능히 여행 당사자를 삼켜버릴 수도 있는)에 둘러싸여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것은, <자기정화>에 이르는 길의 두번째 단계에 해당한다. 즉 감각이 <정화되고, 스스로를 낮추어> 모든 에너지와 관심이 <초월적인 것에 집중 될> 때인 것이다. p133

우리의 선조들이 신화적 종교적 유산의 상징적 정신적 의식에 힘입어 극복해 왔던 심리학적 위험들을 오늘날 우리가(비신자인 경우, 아니면 신자라고 하더라도 계승받은 믿음으로 현실적인 삶의 문제를 납득할 수 없을 경우) 혼자서 혹은 시험적, 즉흥적으로, 더러는 도움이 될 만한 지침도 없이 맞서야 한다는 데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 이것이, 모든 신들과 악마들의 존재를 이성의 이름으로 부정한 <개화된> 현대인인 우리가 알고 있는 문제다

그런데 앞서간 자들이 당한 시련도 겪지 않고 너희는 지복의 낙원에 들어가려 하느냐. p139

고대의 상징 체계에 따르면 빛과 어둠을 표상하는 자매, 즉 이난나와 에레쉬키갈은 두 얼굴의 여신이다. 그리고 그들의 반목은 어려운 시련의 길을 의미한다.

(37) 영웅은 적대자를 발견하고 삼키거나 그에게 삼켜짐으로써 이 적대자(뜻밖에도 그 자신의 자아)를 통과시킨다. 하나씩 하나씩 장애는 차례로 사라진다. 영웅은 자신의 자존심, 미덕, 아름다움, 삶을 팽기치고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이 적대자에게 절을 하거나 복종한다. 이윽고 영웅은 자신과 적대자가 사실은 둘이 아닌 하나임을 깨닫게 된다.

→ 가장 큰 시련은 자기 내부의 공포나 소명을 거부하고자 하는 마음일 것이다. 이것을 극복하지 못하면 영웅의 여정은 완성될 수 없다.

자아가 스스로를 죽음에 내어맡길 수 있느냐는 질문이다. p143

 

2.       여신과의 만남

모든 장애물이 극복되고 도깨비가 퇴치되었을 때 영웅이 치르는 마지막 모험은, 승리한 영웅과 세계의 여왕인 신비스러운 혼례로 표상된다. 이로써 영웅은 천저, 천정, 혹은 땅 끝, 우주의 중심점, 신전의 성소, 혹은 마음속의 가장 어두운 방 속에서 위기를 맞는다. p144

잠자는 여성은, 동화나 신화에 곧잘 여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잠자는 여성은 미인의 본보기 중의 본보기며, 모든 욕망에 대한 응답, 모든 영웅의 지상적, 비지상적 모험의 은혜로운 최종 목표다.

세상에 유혹하는 것, 기쁨을 약속해 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잠자는 여성이 지향하는 존재의 예조에 해당한다.

유혹과 약속은 (……) 우리가 깊이 잠들어 있을 때 찾아온다. 왜 찾아 왔을까? 그녀의 존재가 바로 완전성이라는 약속의 화신이며, 조직화된 불완전한 세계 속에서 오랜 방황을 끝낸 영혼의 안식이며, 한때 인류가 맛보았다가 언젠가 다시 맛볼 은혜이기 때문이며(……)

이런 어머니는 아르테미스처럼 우아하면서도 고약한 여신으로 존재한다.

정신과 육체의 차단된 욕망의 상징 안에 얼마나 엄청난 공포가 도사리고 있는지 확인히 보여준다. p148

만유의 어머니의 신화적 표상은 우주에 대해, 그 우주의 존재를 윤택하게 하고 지켜주는 최초의 여성적 속성을 부여한다. 환상이란 원래 저절로 생기는 것이다.

많은 종교 전통에는 자신을 정화하고, 안정을 유지하고, 마음을 가시적 세계의 자연 속으로 입문시킬 목적으로, 이러한 원형적 심상을 의식적으로 통제하는 교육적인 이용 방법이 전해져 왔다. p151

여신은 또 때가 되면 죽는 모든 것의 죽음이기도 하다. 나서 사춘기, 성년기, 장년기를 거쳐 무덤에 들어가기까지 전 존재의 순환은 여신의 지배 아래서 이루어진다.

이렇게 해서 여신은, 개인적인 어머니는 물론 우주적 어머니에 이르기까지, 어머니의 두 유형을 드러내면 서 <> <>을 통합한다. 여신의 숭배자는 이 두 유형의 어머니를 똑같이 조용히 묵상해야 한다. 이러한 수행을 통해 숭배자의 정신은 유치하고, 어울리지 않는 감상과 증오로부터 스스로를 정화하고, 유치한 인간이 자신의 행, 불행에 연결지어 멋대로 가른 <> <> 따위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본성의 법과 상으로 존재하는 불가해한 실재를 향해 그 마음을 열게 된다. p152

영웅이 삶의 다른 형태인 입문의 과정을 진행함에 따라 여신의 형상은 그에게 일련의 변형 과정을 체험하게 한다.

여신은 그를 유혹하고, 인도하고, 그의 발목에 채인 족쇄를 깨뜨리게 한다.

여성은 감각적인 모험의 정점으로 영웅을 인도하는 안내자다. p153

여신은 자기 존재를 알아 보는 자에 의해 해방된다.

여신이 바라는 친절하고 침착한 상태에서 그 여신의 정체를 알아볼 수 있는 영웅은, 여신이 창조한 세계의 왕, 즉 인간으로 화신한 신일 수 있는 것이다. p154

처음에는 그대 역시 이 몸을 추악하고, 야비하고, 욕지기가 나는 노파로 보았다가, 이윽고 아름다움을 보셨습니다. 왕도 또한 이와 같습니다. (……) 왕의 그릇은, 무슨 일이 있든지 이를 이기고 왕도를 가는 것입니다. p156

여신(모든 여성에게 현현되는)과의 만남은 사랑의 은혜(자비, 즉 운명에의 사랑)를 얻기 위해 영웅이 맞는 마지막 재능의 시험 단계다. 이 사랑의 은혜는 바로 우리 삶이 누리는 영원성의 그릇과 같은 것이다. p157

 

3.       유혹자로서의 여성

세계의 여왕인 여신과의 신비적인 결혼은 영웅의 삶 전체가 완성되었음을 상징한다. 즉 여성이 곧 삶인데, 영웅은 이 삶을 알게 되었고, 이를 완성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이 자각의 위기를 통해 영웅의 의식은 증폭되고, 어머니 상의 파괴자, 즉 천생연분의 신부를 전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시련을 받는 당사자는 자기와 아버지가 동일하다는 사실과, 자기가 곧 아버지의 입장이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세계 도처에 널린 영웅 신화에 나오는 영웅의 모험은 일반적인 양식으로, 어떤 계층에 속하는 사람에게든 그대로 적용된다.

도깨비들이란, 자기 인간성의 미해결 수수께끼가 투영된 것이지 다른 것이 아니다.

(38) 이상적인 삶에 대한 의식적 견해가 실제의 현실적 삶과 잘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본질을 이루는 것, 우리 친구들에게 내재해 있는 것, 우리 자신의 본질을 이루는 것, 우리 친구들에게 내재해 있는 것, 우리가 추구하는 것, 자기 방어적이고, 악취가 나고, 탐욕적이고 음탕한 흥분 상태, 즉 우리 조직 세포의 본질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 나 자신을 아는 것은 정말 힘들다. 그런데 어렵게 알게된 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도 참 힘들다. 계속해서 진짜 내 모습이 아닌 이상적인 나-내가 원하는 모습의-’를 상상하게 된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 우리가 행하는 것에는 어차피 육욕의 냄새가 나게 마련이라는 것을 깨닫거나, 다른 사람을 통해 깨우치게 되었을 때 우리는 예외 없이 낭패의 순간을 경험한다. p160

삶의 배후에 있는 삶을 찾아나서는 모험가는 그녀의 유혹을 물리치고, 현실 세계 너머에 존재하는 에테르 속으로 날아 들어가야 한다. p161

원래 타성적이고 추악한 존재인 이 육체의 모든 제약을 떨쳐버리라! p162

 

4.       아버지와의 화해

죄인을 화살에서, 홍수에서, 불길에서 지켜주는 <하느님의 의지>는 전통적인 기독교 용어에 따르면 하느님의 <자비>, 하느님의 <은혜>인 심정의 변화를 일으키게 하는 <성령의 위대한 권능>이다. p168

보기보다는 무섭지 않은 것임을 알려주는 인간의 자위 수단이다.

아버지의 무섭고 잔인한 측면은, 피해자의 에고가 투영된 것이다. 즉 지난날 존재했던 예민한 유아기의 장면이 전면으로 투사됨으로써 나타난 것이다.

당사자는 아버지가 자비로우며, 이 자비를 믿을 수 있다는 신념을 가져야 한다.

이렇게 되면 믿음의 중심은 마음을 어지럽게 하는 신의 족쇄 바깥으로 이동하고, 믿음의 중심이 이동하면 무섭고 잔인한 측면은 사라진다.

영웅이, 조력자인 여성에게서 희망과 자신을 발견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시련을 통해서다. 여성의 마법 덕분에 영웅은, 자아가 송두리째 흔들리게 하는 아버지의 무서운 입문 의식 경험으로부터 보호를 받는다.

지원을 보장받은 영웅은 위기를 견디어 나가고, 결국에 가서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서로를 투영하고 있지만 사실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p171

갖가지 시련을 다 치른 자를 집안으로 용납하는 아버지 입장이 얼마나 어려우며, 얼마나 주의를 요하는가는, 그리스의 유명한 이야기에 등장하는 파에톤의 불행한 행적이 잘 그려내 보이고 있다. p173

아버지는 아들에게 있어서 미래 세계의 상징요, 딸에게 있어서는 미래 남편의 상징이다. 알든 모르든, 그리고 사회의 지위가 어떻든 아버지란 존재는, 자식이 더 넓은 세계로 나갈 때 마땅히 거쳐가는 입문식의 사제다. p177

입문에 대한 전통적 인식은, 부모의 이미지에 대한 정서적 관련성을 철저하게 바로잡아주면서 그가 살아갈 삶의 기술과 의무와 특권을 소개하려는 의도를 수렴하고 있다.


(39) 이상적으로 말하자면, 입문의 영광을 입는 자는, 자기 인간성을 모두 박탈당하고, 비개인적인 우주적 힘을 대표하는 사람이 된다. 그는 이제 거듭난 자이며, 그 자신이 곧 아버지다.

→ 그 자신이 곧 아버지이자, 신이다. 라고 이해했다. 비개인적인 우주적 힘을 대표하는 사람이라니 뭔가 대단한 사람인 것 같다.

선악에 대한 유아기 환상을 떨치고, 희망과 공포에서 놓여나 평화롭게 존재의 계시를 이해하고 우주 법칙을 엄숙하게 경험하는 세계로 들어갈 수 있도록 입문자를 인도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p178

죽음을 당했다 부활한 디오뉘소스의 비문이기도 한 이 <디튀람보스>라는 말을, 그리스인들은 <두 문을 지난 사람>, 즉 재생의 무서운 관문을 통과한 사람을 뜻하는 말로 이해했다. p185

이 단일한 신은 모순되는 개념, 즉 선 악, 생과 사, 고통과 쾌락, 증여와 박탈을 두루 지니고 있다. p190

비라코챠는 이런 식으로 자기가 어디에나 존재하고 있음을 천명하면서 지고한 만유의 신들에 동참한다.

태양의 문을 통해 우주로 쏟아져 들어오는 은혜는, 다른 존재를 징벌하고 스스로를 지키는 벼락의 에너지와 동일함을 뜻한다. 불멸의 존재가 내뿜는, 망상을 쫓는 빛은, 창조하는 빛과 동일하다는 뜻이다.

자기 손이 창조한 생명의 고뇌를 익히 자각하고 혹심한 고통, 머리를 터뜨리는 듯한 미망의 불길, 자기가 창조한 자기 참해적이고, 쾌락적이고, 분노에 떨고 있는 우주를 생생하게 의식하는 이 신은 삶이 삶을 점화시키는 행위를 승인한다.

그러나 이를 사출하는 것은 우리가 아는 세계를 창조하기 위함이다.

창조의 역설, 영원으로부터의 시간이라는 양식의 도래는 아버지가 지니는 근원적인 비밀이다.

영웅은 자기 몸에 박힌 가시(약점)를 통해 삶을 초월하여, 한순간이나마 그 근원을 투시한다. 그는 여기에서 아버지를 만나고, 아버지와 자기가 화해에 이르렀다는 것을 깨닫는다. p192

아들이 아버지를 알 나이가 되면 시련의 고뇌가 이미 그의 내부에 태동해 있다. 세상은 더 이상 눈물의 골짜기가 아닌, 행복이 기다리는 현존의 완전한 현현이다. p194

 

5.       신격화 apotheosis

부처 자신처럼, 이 신과 같은 존재는 인간적인 여웅이 마지막 무지의 공포를 초월하고 획득하는 신적인 상태 divine state의 한 본보기다. p196

세상에는 도처에 보살(존재와 본질이 대각에 이른 자)이 있고, 보살의 광명을 받고 있지만, 세상이 보살을 안고 있는 것은 아니다.

(40)고통과 쾌락은 그를 구속하지 못한다. p197

→ 고통과 쾌락을 구속하지 못할 정도의 경지에 오르려면 얼마나 많은 시련과 고통을 겪어야 가능한 것일까?

합리적인 마음에 의해 자각된 이 구별은, 한 쌍의 대립물을 초월한 마음에 대한 완전한 지식 안에서 용해되어 버린다. 이때 체득되는 것은 찰나와 영원이, 같은 경험에 대한 두 가지 측면들, 즉 동일의 비이원적이고, 표현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두 가지 층면들이라는 사실이다. p198

즉 영원성이 시간성으로 발전하고, 하나가 둘에 이어 다수로 분열하며, 둘의 재결합으로 새 생명의 세대가 나타나는 것이다. 이 이미지는, 우주 발생적 순환 cosmogonic cycle의 시작에 해당하는데, 영웅의 모험이 막바지에 도달하여 낙원의 벽이 허물어지는 순간, 신의 형상은 다시 나타나고, 지혜는 다시 원상으로 회복된다. p200

피가 흘러내란다는 것은 곧 피를 흘린 아버지가 삶의 원천과 자양을 내부에 지니고 있음을 나타낸다. p203

즉 근원적인 말씀이 평화, 모든 존재에 대한 평화를 지향하는 부처의 우주적 친교에 관심해야 하는 것이다. p208

남을 능히 섬겨 내면 나를 만날 수 있으리라. 나를 만나면 불성에 이르리라. p209

무한한 사랑이며, 전능한 보살인 관세음이 지각 있는 모든 존재를 포용하고, 굽어보고, 또 그 존재 안에 거하기 때문에, 모든 존재의 마음 안에는 평화가 있다. p210

도깨비는 우리 기를 꺾지만, 유능한 후보자인 영웅은 <사나이답게> 입문한다. 보라, 그 도깨비가 바로 아버지였다. 우리는 그의 안에 있고, 그는 우리 안에 있다.

새 생명, 새로운 탄생, 새로운 존재의 지식이 우리에게 주어졌다. 저 아버지가 바로 어머니, 즉 재생의 자궁이었던 것이다.

양성적인 신의 요체가 바로 이것이다. 양성적 신은, 입문 의식이라는 주제의 궁극적 요체다. p212

보살에 대한 첫번째 경이로움은 바로 이것, 즉 보살이라는 존재의 양성구유적 성격이다. 이 보살과 만남으로써 분명히 신화의 대립적인 모험이 서로 만난다. 신화의 대립적인 모험이란 여신과의 만남, 그리고 아버지와의 화해다.

(41)보살 신화에서 주목해야 할 두번째 경이로움은, 보살이 삶과, 삶으로부터 해탈의 차이를 없애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보살이 열반 Nirvana을 단념한다는 사실로 상징되고 있다. 열반이란 말은, <탐욕과 성내는 것과 어리석음이라는 세 겹의 불을 끈다.>는 뜻이다. p213

→ 보살신화라는 단어가 낯설지만, 새롭고 좋다. 종교도 하나의 신화로 읽고 있기 때문에 이런 단어가 나올 수 있는거겠지? 탐욕과 성내는 것과 어리석음이랄는 세 겹의 불을 끄면 열반에 도달 할 수 있다니, 놀랍다. 역시 쉽지는 않다. 성내는 것은 컨트롤이 가능할 것 같은데, 탐욕과 어리석음은 어떻게 꺼야하는 것일까?

종교적인 가르침의 목적은 개인을 일반적인 미망의 상태로 되돌려놓는 것이 아니라 그 미망으로부터 떼어놓는 것이다. p215

기존의 자기 확신, 자기 방어, 자기 중심적 에고의 미망을 억눌렀기 때문에, 그는 같은 적별의 안팎을 안다. p216

세상으로부터의 출발은 오류가 아니라 여행의 첫 출발이다. 이 먼 여로에서, 우주 순환의 심오한 적멸을 깨치면 깨달음에 이르는 것이다.

절대의 마음으로 만유 안에 있는 나를 우러러 섬기는 사람, 그런 사람은 세속의 삶이 어떠하든 신 안에서 사는 사람이다. p217

보살 신화의 세번째 경이로움은, 첫번째 경이로움(양성적인 형상)이 두번째 경이로움(찰나와 영원의 동일성)의 상징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어머니 안에서 배태되어, 아버지로부터 격리된 채 산다. 그러나 우리가 때가 와서 그 시간의 자궁을 빠져나오면(영원으로의 탄생이다) 우리는 아버지의 손으로 넘어간다.

어쩌면 남성상은 입문의 원리와 방법의 상징을 의미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 경우 여성상은 입문 의식의 목적이 된다.

말하자면 이 양자는 같은 것이고, 각자가 그 둘이며, 이원적인 형상 yab yum으로 보이는 것은 환상 때문이지만 이것이 또한 깨달음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p223

 

6.       홍익

보통 영웅 같으면 모진 시련을 겪을 터인데도 선택된자는 별 방해도 받지 않고, 또 실수도 저지르지 않는다. 샘은 세계의 배꼽이고, 불타는 물은 파괴할 수 없는 존재의 본질이며, 돌고 있는 침대는 세계의 축이다. 만상이 잠드는 성은, 꿈속에서 의식이 도달하는 궁극의 심연이다. 꿈은 개인의 삶이 미분화 에너지 속으로 해소되는 시점이다. 해소되어 버리면 곧 죽음이다.

그러나 세상을 온통 경건하게 만들어버리는, 유치한 행복에 젖어 있는 무리와 진정으로 자유로운 무리 사이에는 엄청난 심연이 존재한다. p232

상상의 세계 너머에 존재하는, 말로 다할 길 없는 천복의 가르침은, 어린 시절에 상상했던 것과 비슷한 옷으로 위장하고 우리에게 다가온다. p233

<눈에 보이는 이 모든 신들은 정도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사상을 표상하는 상징에 지나지 않는다.> p236

그들과의 만남을 통해 영웅이 얻으려는 것도 그들 자체가 아니라 그들의 영광, 말하자면 그들의 불로 불사적 존재를 가능케 하는 권능이다. 이 기적적인 에너지 본질만이 불멸적인 존재이며, 도처에서 이 에너지를 현현시키고 나누어주고 표상하는 신들의 이름과 형상은 가변적인 것이다. p237

(42)길가메쉬가 부득부득 고집을 부리자 시두리 사비투는 그에게 관문의 통과를 허락하고 도정의 위험을 일러주었다. 뱃사공은 길가메쉬에게 절대로 물을 건드리면 안 된다고 일렀다.

피안의 주인은 뱃사공 우르사나피에게, 손님을 어느 연못에서 목욕 시키고 새옷을 갈아 입히라고 일렀다. p243

→ 시두리 사비투, 뱃사공, 피안의 주인은 길가메쉬가 영웅의 모험을 하며 만나게 되는 조력자이다. 이들의 도움으로 결국 길가메쉬는 영웅의 여정을 완성하게 될 것이다. 이런 이들을 만날 수 있는 것도 길가메쉬가 용기있게 영웅의 여정을 출발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영원을 아는 것은 깨달음이요, 영원을 깨닫지 못하면 혼란과 마가 인다.

신의 은총을 입고 있는 영웅이 완전한 깨달음의 은총을 구한다면 몰라도 그가 장수의 은혜와, 이웃을 시해할 무기, 혹은 자식의 건강 등을 구하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 일이다. p248-249

 

3.                   귀환

1.       귀환의 거부

(43) 원질신화의 규준인 완전한 순환 체계는 영웅에게 지혜의 시문, 황금 양털, 혹은 사회, 국가, 그 천체, 아니면 일만 세계를 재생시키는 데 환원될 것이기 때문이다. p253

→ 일만 세계를 재생시키는 데 환원되는 것이 바로 여행의 전리품을 가지고 홍익을 위해 일상으로의 귀환이다.

왕의 권능, 지상의 소유, 부와 권력, 벗과 자식들, 아내와 추종자들 이 모든 존재는 제 오감을 홀렸습니다. 저는 이 모든 것을 원했습니다. 이런 것들이 저에게 복을 준다고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제 것이 되는 순간부터 이 모든 것들은 그 본성을 벗고 불길이 되었습니다.

이제 원하옵건대, 당신의 실제(끝없고 자비로운)를 피난처로 삼아 이 모든 것에서 자유롭게 하소서 p256

 

2.       불가사의한 탈출

만일 전리품이 그 수호자의 의지에 반한 상태에서 영웅의 손에 들어갔거나, 영웅의 귀환 의사가 신이나 악마의 찬성을 얻지 못할 경우에는 이 신화 주기의 마지막 단계에서는 격렬한 때로는 익살스러운 추격전이 벌어진다. 마법의 장애물이 신비스러운 것이면 신비스러운 것일수록, 영웅의 도피가 교묘하면 교묘할수록, 이 탈출과 저지의 양상은 그만큼 복잡해진다. p257

영웅이 도망치는 대목은 민간 전승에서 즐겨 다루는 부분이다. 이 부분은 갖가지 생생한 형태로 발전해 왔다. p260

심연의 권능에는, 섣불리 도전하면 안 된다.

(44) 수련자의 명상은 그 발전 단계에 따라 통제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야 수련자의 상상력은 데바타(devata : 수련자의 수준에 알맞은 신성)에 의해 각급 단계에서 보호를 받을 수 있다. 이러한 단계를 거쳐 정신을 수련한 다음에야 수련자에게는 홀로 초월의 경지로 나아갈 수 있는 순간이 온다. p263

통제라는 말이 참 어렵게 느껴진다. 스스로의 욕망 등을 통제하는 것. 이것이 있기에 수련의 과정이 의미가 있는 것이겠지만, 그것을 벗어나는 순간이 조력자의 보호에서 벗어나는 순간이 된다.

두 세계의 상호관계를 불가능하게 하는 것은 언제나 사소한 실수, 즉 인간의 약점이라는, 사소하나 치명적인 증세이다.

그러나 단일 신화가 완성될 수 있으려면 우리는 여기에서 인간적인 실패나 초인간적인 성공이 아닌, 인간적인 성공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 귀환의 문턱에 도사리고 있는 위기가 중요한 문제일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p269

 

3.       외부로부터의 구조

외부 세계가 이렇게 하는 것은, 지칠대로 지친 영웅에게, 힘겹게 도달한 지복의 땅을 포기하는 것은 쉬운 노릇이 아닐 터이기 때문이다. p269

만일 영웅이 거부하면, 문을 두드린 무리는 영웅의 거부를 배신으로 여기고 반격하는 것도 사양하지 않는다. p270

언젠가 세계로 널리 확산되었을, 남신이 아닌 여신으로서의 태양 모티프는 고대 신화에서 찾아보기가 그리 쉽지 않다. p275

거울과 칼과 나무의 의미는 분명하다. 여신의 모습을 반영시켜, 비현현의 은거 상태에서 밖으로 이끌어낸 거울은 세계, 곧 반영된 형상의 장을 상징한다. 거울을 통하여 신은 자신의 영광을 보고 기뻐하는데 이 기쁨은 현현 혹은 <창조>의 행위를 유발시키는 자극제가 된다. 칼은 벼락에 해당한다. 나무는, 열매를 맺고 소원을 성취시킨다는 의미에서 <세계의 축>이다. 이 나무는, 기독교들이 동지에 가정에 장식하는 나무와 같은 것이다. 동지는 태양의 귀환하는 순간, 혹은 재생하는 순간이다.

최고신의 은거로 뒤죽박죽이 되었던 세계가, 바로 그 최고신의 재등장으로 활기를 되찾게 된 것이다.

이 시메나와는, 귀환의 문턱에 있는 세계의 원기 회복을 의미한다.(p277)

영웅은 의식을 잃고 무의식의 상태에서 원래 그가 살던 세계로 되살아난다.

영웅은 자아를 지키는 대신 자아를 잃어버린다. 그러나 조력자의 은혜로 영웅은 자아를 되찾는다.

말하자면, 신화 영역에서 일상 현실로 귀환하는 영웅의, 역설적이고 험난한 관문 통과의 서곡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45) 원래 속해 있던 사회와 맞서면서 그들의 까다로운 신문과 서릿발 같은 증오와 맞서야 한다. 뭐가 뭔지 영문을 모르는 선한 사람들까지 설득하지 않으면 안 된다. p280

→ 영웅의 여정이란 끝까지 힘들다. 귀환을 해도 또 다른 시련들이 남아 있구나. 하지만, 귀환의 단계까지 이르면 이런 과정들을 충분히 겪을 수 있을 정도로 단단해져 있을 테니 상관은 없겠지?

 

4.       귀환 관문의 통과

두 세계, 곧 신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는, 삶과 죽음, 밤과 낮처럼 서로 다르다는 말로밖에는 설명할 수 없다.

이 암흑의 세계에서 영웅은 그 모험을 완성할 수도 있고, 거기에 갇힘으로써 우리들로부터 사라져 버릴 수도 있고, 엄청난 위험에 직면할 수도 있다. 영웅의 귀환은, 그 저승에서의 귀환을 말한다. 이승과 저승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 하나의 세계다. 신화나 상징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는 바로 이것이다. 신들의 세계는 우리가 아는 세계의 잊혀진 부분이다.

그러나 정상 상태로 깨어 있는 의식의 관점에서 보면, 심층에서 솟아난 지혜와, 속세에서 유용한 분별 사이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모순이 존재한다. 그래서 미덕에서 득실 계산이 파생하고 그 결과 인간의 존재는 타락한다. p281

귀환하는 영웅이 당면하는 첫번째 문제는, 성취의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운 체험을 겪은 이후에 덧없는 기쁨과 슬픔, 삶의 범용과 소란한 외설스러움을 현실로 받아들이는 문제다. p282

이 다른 세상의 조건이 좋은 상황 때문에 그에게 부과되는 귀환의 어려움은 그만큼 더 컸다. 그의 전인격은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영역의 형식과 형상에 동화되어 벌니 다음이어서, 시간이 존재하는 곳의 형식과 형상의 충격 때문에 좌절한 것이다. p286

천국에서의 1년이 지상에서의 백년에 해당한다는 등식은, 신화에 자주 등장하는 모티프다. 백 년이라는 주기는 전체성을 의미한다.

(46) 인간의 눈으로 보면 이러한 세계는 변화와 죽음으로 보이고, 신들의 눈으로 보면 불변하는 형상, 곧 끝없는 세계일 뿐이다. p288

→ 신이 보는 끝없는 세계, 이것이 바로 우주적 순환이다.

여자의 욕정은 남자의 욕정보다 더 사나운 법. 이윽고 공주는 자기가 품었던 욕정을 깨닫고 자기 자세를 수습했다. p293

덧없는 만남과 헤어짐, 이것이야말로 전형적인 사랑의 고통이 아닌가. 한 영혼이 제 운명을 저주하고, 운명의 장난에 저항할 때 그의 고통은 더욱 고통스러워진다.

기억 속에서 자기 영혼의 다른 부분과 만났음을 상기시키는 신비스러운 반지는 영웅이 그곳에 간 적이 있음을 시사한다.p 294

 

5.       두 세계의 스승

세계의 경계를 넘나드는, 말하자면 시간을 초월한 세계인 저승과, 일상적인 세계인 이승을 두루 돌아다니는 자유는 거장들의 재능에나 어울리는 자유다. p297

신화란 신화는 이 한순간의 이야기 속에 모두 들어 있다. 예수는 안내자이며, 초월적인 세계, 귀환의 동반자다. p298

여기에는 두 시계의 문턱을 넘나드는 훌륭한 통로가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는 여기에서 심연을 꿰뚫어보는, 심오한 참으로 심오한 안식을 발견할 수 있다.

지금 우리가 관심 갖는 것은 상징 체계이지 역사성은 아닌 것이다.

실제로 존재했는지 여부에 대해 관심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주의를 끄는 것은 그들의 <이야기>.

이런 이야기에서 역사성을 강조하면 혼란이 생길 뿐이다. 즉 암시적 메시지를 어지럽게 할 뿐인 것이다. p299

내재적이면서도 초월적인 우주를 상징하는 인물의 혈통 및 능력은, 의미론적이라기보다는 다분히 역사적인 요소에 따라 결정된다. p304

(47) 신의 성격, 혹은 일련의 성격을 최종적인 의미로 읽거나 해석하려 해서는 안 된다. 신학자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상징을 투명하게 닦아 우리에게 오는 진리의 빛이 이에 가리지 않게 하는 일이다.

→ 상징을 상징 자체로 보지 않는 것, 그것이 담고 있는 의미를 제대로해석하고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의미를 실어나르는 수레를 의미 자체로 오해하면 헛된 잉크뿐만 아니라 헛된 피까지 흘리게 된다.

스승에 대한 철저한 자기 부정에 의해 <인생>, <개인적인 팔자>, <숙명>이 제거된 지 오래인 사람들에 의해 목격되었다는 사실이다. p305

나를 위해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생명을 얻을 것이다.

이제 의미는 분명해진다. 말하자면 이것은 모든 종교적 관행이 좇고 있는 바다. 심리적 훈련을 통하여 개인적인 한계, 독특한 습관, 희망, 공포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진리를 깨닫고 거듭나는 데 필수적인 자기 적멸에 대한 저항을 버리면, 개인은 위대한 <하나 됨>, <자기 화해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개인적인 야망을 무화시킨 개인은 살려고 바둥거리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일이 닥치건 거기에 몸을 맡겨버린다.

은자의 숲에 은거하는 현자와 운수행각의 탁발승은 동양의 삶과 전설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 p306

무대 의상을 입고 있든, 벗고 있든 배우는 배우 이전의 그 자신이듯이 불멸의 지혜를 깨친자는 늘 그 불멸의 경지 안에 거한다.

 

6.       삶의 자유

영웅이 지난 전장은, 모든 피조물이 다른 피조물의 희생으로 삶을 영위하는 삶의 현장을 상징한다.

이 세상의 예외적인 존재로서 자기 입장을 합리화하고 허위적인 자기 이미지를 드러내는 사람도 있다.

이러한 자기 합리화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물론, 인간과 우주에 대한 본질에 이르기까지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이 목적은 덧없는 시간적 현상과, 삶과 죽음이 혼재하는 불멸의 삶과의 진정한 관계를 자각해야 달성이 가능하다.

(48) <사람이 마치 계절에 따라 헌 옷을 벗고 새 것을 입는 것처럼, 이 몸 속에 와 계시는 그실재도 낡은 몸뚱이를 버리고 새 것으로 옮겨가신다.

→ 낡은 몸뚱이를 버리는 것은 영웅의 여정에서 자아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것, 죽음 등과 맞닿아 있다. 새 것으로 옮겨 간다는 것은 새로운 자아를 찾는 것, 새로 태어남(부활)과 같다.

애착을 떠나 마땅히 해야 할 바를 행하라.. p308

탈리에신은 마귀를 두려워했지만, 바로 그 마귀에 의해 삼켜졌고, 그래서 재생한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자기 자아의 죽음을 통하여 새로운 자아로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것이다.

변화가 영속성을 파괴할 때도, 다음 순간(혹은<다른 사물.)을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원래의 형태를 보존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위대한 재생의 손길인 자연은 부단하게 형상에서 형상을 만들어나간다. p313

 

4. 열쇠

귀환의 관문에서 초월적인 권능의 소유자는 뒤에 남아야 한다. 영웅은 혼자서 그 무서운 왕국에서 귀환한다.(귀환, 부활). 그가 가져온 전리품(홍익)은 세상을 구원한다.

(49) 한 문화가 자기네 신화를 이런 식으로 변역할 때 그들의 삶은 고갈되고 그들의 사원은 박물관이 되며, 과거와 미래의 끈은 끊어지고 만다.

→ 상징을 상징으로만 보고, 그것의 의미를 제대로 해석하지 못했을 때 이런 일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식당에 가서 메뉴판의 음식 이미지만을 보고, 실제로 그것의 맛을 보지는 않고 그냥 나오는 것과 같다.

이러한 신화의 이미지를 생생하게 되살리려면, 이를 현대의 문제에 적용시키려 할 것이 아니라, 영감으로 살아 숨쉬던 과거의 형태로부터 암시를 읽어내야 한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서만이 빈사 상태에 빠진 성화는 그 영원히 인간적인 의미를 다시 드러낼 수 있는 것이다. p320

기독교를 향한 우리들의 입문 의식이었던 이 세례식의 의미를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2. 우주 발생적 순환

1.                   유출

1.       심리학에서 형이상학으로

동화와 신화의 패턴 및 논리가 꿈의 패턴 및 논리와 일치한다는 발견과 더불어 오랫동안 의혹의 대상이 되어왔던 고대적 인간의 기괴한 환상은 극적으로 현대인 의식의 표면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신화체계란, 전기나 역사, 그리고 우주론으로 오독되어 온 심리학이다.

이러한 자료의 가치를 충분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먼저 신화가 꿈과 정확하게 대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 신화가 수면의 산물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이 양자는 동일하지 않다. p326

그들의 효과적인 입문 의례 양식의 연구, 경험, 이해를 통해 젊은이들은 새로운 세계를 배워왔고 노인들은 지혜를 얻어왔다.

우리에게 전승된 신화학적 표상의 가치를 제대로 파악하려면, 우리는 이러한 표상들이 무의식의 징후일 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정신적 원리의 통제되고 의도된 진술임을 이해해야 한다. p327

그런데 바로 이것이 마음의 기능을 제한하고 있기 때무넹, 다채롭고 유동적이고 변화 무쌍하고 복잡한 현상계 너머에 존재하는 것은 느낄 수도, 볼 수도 없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이 현상계 저쪽 세계로 들어가 적멸에 드는 것이다. p330

말하자면 신들은, 우리 마음을 움직이고 마음을 깨우며, 우리 마음을 겨냥할 상징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현대의 심리학적 해석 체계의 열쇠는 바로 <형이상학적 영역-무의식>이라는 등식이다.

개인의 탄생, , 죽음은 무의식으로의 하강 및 회귀로 볼 수 있다. p331

자기 자신의 영혼을 깨우는 영웅은, 그 자신이 자기 소멸의 편의수단일 뿐이다. 영혼을 깨이는 신은, 그 영웅과 죽음을 함께 한다.

이러한 상징이 인간의 운명, 인간의 희망, 인간의 믿음, 인간의 어두운 신비의 메타포를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2.       우주의 순환

개인의 의식이 잠이 들어 밤의 바다로 하강하고, 다시 거기에서 깨어나는 것처럼 신화의 메타포에서도 우주는 시간을 초월한 배후에서 떠오르고, 원기를 회복하다 다시 소멸된다.

(50) 이 시대의 인간은 자기 중심적이고, 공정하지못하며, 난폭하고, 탐욕스럽고, 자만심이 강하며, 욕심이 많다. p336

→ 나 역시 이 시대의 인간이다. 지극히 자기 중심적이다. 탐욕스럽고, 자만심이 강하다. 욕심은 때에 따라서 많다. 영웅의 여정을 거치고 나서 귀환하게 되면 좀 다른 인간이 되어 있기를 기대 해 본다.

분명한 것은 신화가 지금부터 아득히 먼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이며, 이 점은 철학도 마찬가지다.

첫번째 단계에서 우리는 삶에 관한 교훈적인 체험과 만나고, 두번째 단계에서는, 이러한 것들이 소화되어 꿈을 꾸는 당사자의 내적인 힘에 동화되며, 세번째 단계에서는, 내부적 통제자가 들어앉은 방 안, 모든 것의 근원이자 끝인 상태, <마음속에 있는 공간> 안 에서 모든 것을 즐기고 의식할 수 있게 된다.

우주발생적 순환은, 비현현의 숙면 영역에서 비롯, 꿈을 통하여 깨어나 있는 대낮, 그리고 다시 꿈을 통하여 시간을 초월한 어둠에 이르는 보편적 의식의 통로로 이해되어야 한다.

잠의 심연 속에서는 에너지가 재충전되지만 일을 하다보면 이 에너지는 고갈된다. p339

신화 체계는 마음을, 가시의 세계 너머에 존재하는 비현현의 세계로 향하게 한다. p340

 

3.       허공에서공간

우주의 끝을 헤아리고, 그 끝이 곧 시작임을 아는 자라야 현자라고 불릴 만하다.

모든 신화 체계의 기본 원리는, 끝과 시작이 함께 한다는 바로 이 원리다.

우리의 참 존재를, 파멸하는 형상이 아닌 다시 태어나는 불멸의 존재라는 측면에서 보면 신화 체계는 그리 비극적인 것도 아니다. p342

 

4.       공간의 내부에서생명

생명은 남성과 여성이라는 이원적 형태 아래 자가 생산을 위해 양극화했다는 것이다. p348

우주적 알이 깨지면 그 안에서 인간의 형상을 한 무서운 물체가 부풀어오르는 예는 드물지 않게 신화에 나타난다. p353

이러한 창조 신화는 아득한 옛날 일을 그리고 있으면서도 사실은 현재 및 개인의 근본을 말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p356

 

5.       하나에서 여럿으로

신화 속에서는 부동하는 원동력, 즉 살아 있는 전능자가 관심의 중심으로 떠오를 때마다 우주의 조형에 대한 초자연적인 자발성이 뒤따른다. p358

그러나 차옺의 현실이란 중심점에서보면, 티아마트의 육신은 자발적으로 이에 응한것이다. 따라서 그 육신을 도륙한 손은, 희생자 자신의 의지를 따르는 대리인의 손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에 신화의 근본적인 모순, 즉 이중초점의 모순이 있다. p365

 

6.       창조의 민화

민간 신화들은 인간의 상황을 평가한다는 본질적인 점에 있어서 위대한 신화들과 차이가 없다. p373

 

2.                   처녀잉태

1.       어머니 우주

2.       운명적 모태

우주적 여신은, 여러 가지 가면을 쓴 모습으로 인간에게 나타난다. 왜냐하면 창조의 결과란 다양하고 복잡한 데다, 창조된 세계의 관점에서 경험할 때면 상호 모순적이기 때문이다. p380메소포타미아의 영향권 안에 있던 곳에서는, 여신의 특징은 늘 이 변화하는 별빛의 영향을 입었다.

바이나뫼이넨이 제 힘으로 자궁에서 빠져나온 것처럼 이월인도 심연에서 솟아오른다. p383

창조 이후의 세 단계는 각각 세계의 발달 시기를 나타내고 있음에 분명하다. 이 발달 과정의 패턴은 이미 알려져 있었다. p388

 

3.       구세주를 낳는 자궁

신화는 어느 곳에든, 갖가지 얼굴로 존재한다.

그 주제나 흐름이 어찌나 똑같았던지 초기의 기독교 선교사들은, 악마가 이 기독교 성경 이야기를 위작하여 도처에다 뿌려둔 것이라는 터무니없는 생각까지 했다. p390

 

4.       미혼모의 민화

즉 이 이야기는 처녀 잉태, 아버지를 찾기 위한 여행의 출발, 시련, 아버지와의 화해, 미혼모의 정실확정 및 입적, 사칭자들이 당황하는 사이에 영웅이 친자로 확인되는 등의 ,전형적 영웅의 모티프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p393]

 

3.                   영웅의 변모

1.       최초의 영웅 인간

이제 우주 발생적 순환은, 보이지 된 신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모습을 갖춘 영웅에 의해 지행되어야 한다. 세계의 숙명은 바로 이 영웅들을 통해 실현된다.

우주발생적 주기는, 다가오는 시대의 인군의 전형이 될 인간의 형상을 한 황제의 손으로 넘어갔다. p398

 

2.       인간적인 영웅의 어린 시절

영웅이란 성취되는 것이 아니고, 운명지워진다는 관점과 일치한다. p400

이 세상으로 화신한 내재적인, 신적 원리의 특수한 현현, 그리고 이어서 영웅이 자기 운명의 길을 감당하는 갖가지 삶의 양상은 바로 이 범상하지 않은 시절을 통해서 드러난다.

영웅의 첫번째 과업은, 우주 발생적 순환의 그 전단계를 의식적으로 체험하는 것이다.

두번째 과업은, 심연에서 일상의 삶으로 귀환하여 조물주적 잠재력을 가진 인간적인 변환 자재자가 되는 것이다.

개인적 주기의 제2단계에 나타나는 영웅의 행적은, 1단계인 하강 주기 행적의 심도에 비례한다.

실제 역사적 인물의 행위가 영웅적인 것이었다면, 이 전설을 만드는 사람은 그를 위해 영웅의 모험과 그 심도가 유사한 정도의 모험을 만들어낸다. 이러한 모험이 바로 초자연적인 영역으로의 여행인데 이 여행이 독자에 의해서 한편으로는 마음이라는 밤바다로의 여행, 다른 한편으로는 각자의 삶으로 구체화하는 인간의 운명의 측면, 혹은 영역으로 해석되는 것읻. p402

이러한 전설적인 전기들은 유형화한 유아기의 도피와 귀환의 주제를 상당히 다양하게 다루고 있다. 이것은 또 모든 전설, 민화, 그리고 신화에서 두드러지는 양상이기도 하다.

문제의 영웅이 위대한 족장, 요술쟁이, 선지자, 혹은 위대한 존재의 화신일 경우, 기적은 얼마든지 일어난다. p405

이 어린 세상의 신참자는, 헤아리고 이름 붙여질 수 있는 세계 너머에 존재하는 권능이 있음을 배운다.

이런 이야기에 등장하는 아이들은 대개가 힘이 세고, 영리하고, 또 지혜롭다. p410

유아기 이야기는 영웅의 귀환 혹은 그의 정체가 드러남으로 그 결론에 이른다. 즉 오랫동안 묻혀 지내던 영웅의 암흑기가 끝나고 그의 진정한 성격이 노출되는 것이다.

그러나 재난이 지나가면 새로운 권능의 창조적 진가가 드러나고 세계는 다시 영광의 새 형상을 얻는다. p413

저 아이의 분노를 제대로 삭여내지 않으면 에마니아의 젊은이는 하나도 살아남지 못하겠구나

꼬마 저사는, 벌거벗은 수많은 여자들의 나체에 당혹, 혹은 압도되어 고개를 돌리다 군사들의 손에 붙잡혀 차가운 물통 속으로 처박혔다. p417

그는 무서운 다중적 형상, 말하자면 전혀 낯선 인간이 되었다.

이 핏줄기는 연기의 장막과 흡사한 불가사의한 안개를 형성했는데, 이 장막은 궁전을 덮어, 왕은 겨울이 가까워오는 줄 알았을 정도였다. p418

 

3.       전사로서의 영웅

영웅이 탄생하는 곳, 혹은 영웅이 도피 또는 추방당했다가 보통 인간들 사이에서 성인으로서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떠나오는, 머나먼 땅은 세계의 중심, 혹은 세계의 배꼽이다. p419

영웅이자 방랑 시인의 시구가 신통력이 있는 마법의 주문으로 울린다. 이와 비슷하게, 영웅이자 전사의 칼날이 창조적인 근원의 에너지로 빛난다. 이 칼날 앞에서 낡은 것의 껍질이 떨어진다.

신홪거인 영웅은 <이루어진> 사상의 옹호자가 아니라 <이루어지는> 사상의 옹호자다. 그의 손에 살해되는 용은, 현상이라는 괴물 바로 그것이니, 괴물은 쇠사슬 같은 과거의 옹호자이다.

폭군은, 자기 힘을 자기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자만한다. 따라서 그는 그림자를 본질로 오인하는 광대역을 맡고 있는 셈이다.

한 시대의 위대한 형상은 부서지고, 토막나고, 이윽고 흩어지기 위해 존재한다. 요컨대 도깨비-폭군은 불길한 사상의 옹호자이며, 영웅은 창조적 삶의 옹호자다.

(51) 더구나 인간의 탈을 쓴 폭군들은 이웃의 선의를 짓밟고 일어서 학정을 일삼는다. 이 폭군들 역시 이땅에서 사라져야 한다. p422

→ MB가 생각난다.. 사라져야 한다..

 

4.       애인으로서의 영웅

이 여성은, 수많은 용을 죽인 영웅의 애인이며, 질투심이 강한 아버지로부터 유괴되어 온 신부며, 부정한 애인으로부터 구출된 처녀다. <영웅과 영웅의 사대역인 여성은 곧 하나>이기 때문에, 처녀는 영웅 자신의 <다른 한쪽>이다. 영웅이 세계의 군주라면, 처녀는 세계이며, 영웅이 전사이며 처녀는 명예다.

그러나 영웅이 자기 운명을 인식하지 못하거나, 엉뚱한 사상에 현혹될 때, 영웅은 아무리 노력해도 장애물을 극복할 수 없다. p428

이러한 패턴의 이야기에서 처녀의 부모는, 영웅을 구속하는 족쇄 역할로 등장한다. 이 과제에 대한 영웅의 해결책은 용을 살해하는 모티프와 조응한다.

예기치 못한 조력자의 도움을 얻고, 시간과 공간의 기적을 경험한 그는 마침내 자기 과업을 완수한다.

영웅이라는 당당한 존재 앞에서 갖가지 장벽, 족쇄, 깊은 구멍은 차례로 정복된다. p431

 

5.       황제로서, 폭군으로서의 영웅

행동하는 영웅은 우주 순화의 주체이며 처음으로 이 세계를 움직였던 추진력을 생생한 사건을 우리에게 들려준다.

원형적인 괴수 퇴치가 그렇듯이 영웅은 마땅히 지나야 할 관문을 지난 데 불과하다.

두번째 모험의 유형은 종교적인 성인전의 패턴과 일치한다. p432

이제 근원에 접한 영웅은 중심의 정적과 조화를 가시적인 것으로 만든다. p434

이제 그에게서 은총이 만방으로 퍼져나간다. 그의 언어는, 생명의 바람이다.

그러나 아버지로 대표되는 성격에 부정적인 변화가 생기는 수도 있다. p435

자기 치적의 은총을 초월적이며 근원적인 존재의 은혜로 돌리지 않고, 황제는 마땅히 자기가 누릴 바를 누린다는 입체적인 환상을 품는다. 이런 자는 더 이상 두 세계의 중재자일 수 없다.

 

6.       구세주로서의 영웅

첫번째 단계에서 아들은 사자가 되어 귀환하지만, 두번째 단계에서는 <나와 아버지는 결국 하나>라는 통찰과 함께 귀환한다. 이 두번째의 보다 높은 자각에 이른 영웅은 구세주, 한 차원 높은 의미에서의 이른바 지고한 존재의 화신이다. 그들의 신화는 우주적인 조화를 지향한다. 그들의 언어는, 권위의 홀장과 율법서의 영웅이 뱉어낸 어떤 말 이상의 권위를 갖는다. p437

영웅의 행위가 위대한 것은 사람들이 상상 속에서나 할 수 있으리라고 헤아리던 일을 현실적으로 바로 눈앞에서 해치우는 데 있다. p438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각기, 크리슈나에게서 자기의 모습들을 보았다.

죽지 않고 영생하는 인간은 있을 수가 없어요. 자기가 무엇을 소유하고 있다는 생각부터가 틀린 것입니다.

심령에 의한 조형(유출)과 무로의 소멸, 젊음과 늙음, 탄생과 죽음, 형상을 창조하는 생명력과 타성적인 죽음의 중압은 영원히 갈마드는 것이다.

현명한 황제가 통치하는 황금기는 삶의 순간순간의 충동에 따라, 폭군이 지배하는 황무지 시대가 되게 마련이다.

무섭고 잔인한 폭군은 그가 폐위시킨 예전의 세계 군주나 그를 제거할 영리한 영웅뿐 아니라 아버지까지도 표상한다. 영웅이 변화를 가져오듯이, 무섭고 잔인한 폭군은 한 가지 편견에 고착된 인간을 표상한다.

영웅의 임무는, 아버지의 부정적인 측면을 살해하고, 우주의 자양이 될 생명의 에너지를 그 굴레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다.

용의 살해자와 용, 제관과 제물은, 뒤집어보면 결국 하나다. 이 하나인 세계에서는, 대립물의 양극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용은 우리 삶이 걸린, 죽음이다. p441

어제의 영웅은, 오늘 <스스로>를 십자가에 달지 않으면 내일의 폭군이 된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이 무서운 예언과 맞설 준비가 되지 않은 살마들을 보호하기 위해, 신화는 이 궁극적인 계시를 희미한 장막으로 가려놓았다.

폭군인 아버지를 제거하고 스스로 왕위에 오르는 구세주적 인물은 그 아버지의 운명에 한걸음 다가선다.

아들은 아버지를 시해하지만, 결국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다. 수수께끼 같은 인물들은 원초적인 혼돈 속으로 해소된다. 이것이 바로 세계 종말 그리고 재개의 비밀이다.

 

7.       성자로서의 영웅

아버지를 찾아가는 신화 패턴에서, 영웅이 가는 곳은 세계의 드러나는 측면이기보다는 드러나지 않는 측면이다. 이곳으로 들어갈 때, 영웅은 보살이 버린 세계로 발을 들여놓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귀환이 있을 수 없다. 이곳은, 이원적인 시각의 모순이 아니라, 불가시적인 존재의 궁극적인 요구가 도사리고 있다. 자아는 여기에서 불타 버린다.

그러나 이 십자가의 관문 너머에 신 안에서의 천복이 있다. 십자가는 끝이 아니라 길이어서 그렇다. p445

 

8.       영웅의 죽음

이 두 이야기는 주인공이 자기 능력을 모르고 있어서 재미있다. p454

그런데 저 비구가 세존의 앞을 가로막아, 최후의 순간이 가까워왔는데도 우리는 여래를 친견할 수가 없구나. p455

제행이 무상하구나. 태어난 것, 모습을 나타낸 것, 죽기로 마련된 것들이 어찌 이를 피할 수 있겠는가? 어쩔 수가 없구나.

 

4부 소멸

1.       소우주의 끝

나는 모든 피조물의 가슴 안에 있는 실재다. 나는 모든 존재의 시작이며, 중간이며, 끝이다.

이것은 바로 개인이 소멸되는 순간, 사자의 머리맡에서 들려주는 기도다. 즉 개인은, 생전에 자기 가슴에 반영되어 있던, 세계를 창조하는 신에 대한 근원적인 깨달음으로 되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 따르면, 사자는 자신이 신과 함께하게 된다고 노래한다.

이러한 요소들은, 영혼의 여행 마지막 단계를 보여주는 신화 체계에서 의미 심장하게 전개되고 있다.

그들이 이 세상 삶의 수고를 어떻게 치러낼지. 우리 역시 머지않아 당신이 있는 그곳에 가게 될 겁니다. p461

창조된 것은 내 손 안에 있고, 아직 창조되지 않은 것이 내 몸 안에 있음이라. p464

<명계에서 공기로 사는 장>. <명계에서 뱀 레레크를 쫓는 장>에서 영혼은 여행을 계속, 이윽고 <명계에서 자행되는 대학살을 피하는 장>에 이른다. p465

이어서 <명계에서 영혼이 그 육신으로부터 떨어져 나가지 못하게 하는 장>, <명계에서 물을 마시되 불길에 타지 않는 장>이 끝나면, 이윽고 절정이라고 할 수 있는 <명계의 날이 밝는 장>에 이른다. 여기에서 영혼과 우주는 결국 하나임이 드러난다. p466

 

2.       대우주의 끝

개인이라는 창조된 형상이 결국은 소멸되고 말듯이 우주 역시 소멸된다.

인간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이 기간 동안, 보다 작은 단위의 주기들은 결국에 가서 종말에 이르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영원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이 오랜 세월에서 몇 년 정도의 차이간 난들 어떠랴? p469

한 민족이 일어나 딴 민족을 치고, 한 나라가 일어나 딴 나라를 칠 것이며, 또 곳곳에서 기근과 지진이 일어날 터인데, 이런 일들은 다만 고통의 시작일 뿐이다. p471

그런 재난의 기간이 지나면 곧 해가 어두워지고, 달은 빛을 잃을 것이며, 별들은 하늘에서 떨어지고 모든 천체가 흔들릴 것이다.

그때에 사람들은, 사람의 아들이 하늘에서 구름을 타고 권능을 떨치며 영광에 싸여 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모든 일들이 일어나고야 말 것이다. p473

 

<에필로그>

신화와 사회

1.       변신 자재자

이 교활한 신은 아무리 재주 있는 질문자에게라도, 그 질문자에게 자신의 지혜의 전부를 드러내는 법이 없다.

신화 체계는 현대의 석학들에 의해, 여러 가지로 정의되었다.

2.       신화, 제의, 명상의 기능

개인이 실제든, 상상이나 느낌을 통해서든, 그 사회로부터 자신을 단절시킨다는 것은 존재의 근원과의 절연을 의미할 뿐이다. p479

맡는 역할이 비록 하찮다고 하더라도 개인은 이 인간의, 아름다운 축제의 이미지에서 자기 역할이 바로 자기의 본질이었음을 깨닫는다.

입문 의식이나 취임식은 개인과 집단은 어쩔 수 없이 하나라는 교훈을 베푼다.

계절적인 축제가 통상, 자연을 통제하기 위한 주민들의 노력의 일환으로 해석되어 왔다. p480

계속성의 상징 체계는 신화 체계적인 전승을 통해 지식을 전달하는 사회면 어느 곳에서든, 얼마든지 발견된다. p481

사회적인 의무와 대중적 제의와는 정반대로 향하는 다른 길이 있는 것이다. 의무의 길이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사회에서 추방된 자는 아무것도 아닌 쓰레기다. 그러나 다른 관점에서 보면 이 추방은, 탐색 모험의 첫 단계일 수 있다. p481

사회적 참여가 결국에는 개인의 내부에 있는 전체를 깨닫게 하듯이 추방으로 인한 유랑이 영웅을 전체에 내재하는 자아에 이르게 한 것이다.

 

3.       오늘날의 영웅

과학적인 연구 방법의 발달이 인간의 삶을 변형시킨 나머지 저 유서 싶은, 시간을 초월해서 존재하는 상징의 우주는 무너져버리고 말았다.

전승의 굴레인 과거의 마력은 확실하고 강력한 타격을 받아 산산조각이 되었다. 483

오늘날에 이루어져야 하는 영웅의 업적은(……) 현대 영웅의 위업은 영혼이 균형을 이루고 있던 잃어버린 아틀란티스 대륙의 불을 다시 밝히는 것이어야 한다.

현대 생활이라는 상황을 통하여 남자와 여자를 성숙한 인간으로 만들 수가 없다면 문제는 아무것도 아니다.

토템의 깃발을 날리는 국가 개념은, 유아기의 상황을 지우기는커녕 유아적 자아를 강화, 확대시키고 있다.

오늘날 위대하다고 일컬어지는 세계적 종교도 일반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한다. 이러한 종교들도 선전과 자화자찬의 도구로서, 갖가지 도당짓기의 요인과 결탁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짜 신앙은 제대로 기능하는 세계에는 필요한 것이 아니다. p486

곧이곧대로의 모방의 행위를 통해 인간의 자아에 대한 효과적인 제거 작업이 자행되었고, 사회는 응집력이 있는 기관으로 되어갔다. p487

인간은 아득한 존재와 더불어 끝나야 하고, 이 아득한 존재를 통해 자아는 십자가에 못박히고 부활해야 하며, 이 사회의 이미지 전체가 개선되어야 한다. p488

 

<역자후기>

신인적 본성은 심리학적 관심과 무관하지 않고, 심리학적 관심은 신화에의 관심과 무관하지 않다. p490

그의 견해에 따르면 모든 신화는 꿈과 동일한 문법을 갖는다. 즉 응축, 치환, 형상화 작업은 신화 형성에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캠벨은 무대가 다르고 사건이 다르고 의상이 다르지만, 인간의 무의식이 투사된 영웅, 말하자면 인간의 집단이 그려낸 영웅 신화는 거의 일정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서로 접촉이 없는 세계 각 문화권의 무수한 영웅신화와 심층 심리학의 꿈 해석에서 재발견되는 영웅의 상징 체계를 분석,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들 가운데서 하나의 영웅, 그러니까 모든 영웅 신화의 본이 되는 하나의 영웅을 떠올린다. p491

IP *.158.65.110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

VR Left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2792 북No.5 - 사마천 '사기열전' file 유재경 2011.05.01 5755
2791 5. 사기열전 1 _ 시마천 file 미선 2011.05.01 3150
2790 [북리뷰 005] 사마천 <사기열전1> file [4] [2] 김경인 2011.05.01 5121
2789 4th Review <두번 읽기>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 조셉 캠벨 file 사샤 2011.04.25 6883
2788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 조셉 캠벨(두번읽기) [1] 루미 2011.04.25 2116
2787 04.<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_두번째> 조셉캠벨 강훈 2011.04.25 2116
2786 [리뷰4] '신화의 힘'_깊이읽기 양경수 2011.04.24 2499
2785 4. 조셉 캠벨《신화의 힘》 두번읽기 file 미선 2011.04.24 2298
2784 북 No. 4 - 조셉 캠벨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두번읽기> 유재경 2011.04.24 3808
2783 [북리뷰 004] 조셉캠벨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두 번 읽기 file [1] 김경인 2011.04.24 5391
» 04. <두번 읽기>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 조셉 캠벨 미나 2011.04.24 2245
2781 52.<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조셉 캠벨 [4] 박미옥 2011.04.22 2689
2780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조셉캠벨 file 사샤 2011.04.18 2550
2779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 조셉 캠벨 [3] 루미 2011.04.18 1894
2778 3.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조셉 캠벨 [6] 미선 2011.04.18 1982
2777 [리뷰3]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_조셉캠벨 file [2] 양경수 2011.04.18 4537
2776 3.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 조셉 캠벨 file [2] [1] 미나 2011.04.17 9386
2775 [북리뷰 003] 조셉캠벨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file [3] 김경인 2011.04.17 5108
2774 03.<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조셉캠벨 file [4] 강훈 2011.04.17 3506
2773 북 No. 3 – 조셉 캠벨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file [2] 유재경 2011.04.17 34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