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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4월 24일 22시 36분 등록

1. ‘저자에 관하여’

캠벨.jpg
이번 저자에 관하여에는 책 안에서 캠벨이 말하고 있는 자신의 이야기를 모아보았다.

어린 시절
 
캠벨은 뉴욕에서 소년 시절을 보내면서 인디언 토템 기둥과 가면에 매료당한다. 그는 그런 것들을 보면서 상념에 잠긴다. 누가 만들었을까? 대체 무슨 뜻일까? 그는 겨우 열 살 때 이 방면의 공부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캠벨은 로마 카톨릭 가정에서 자라났다. 그는 로마 카톨릭 가정에서 자란 이점 중 가장 큰 것은 신화라는 것을 진지하게 검토하고, 신화를 삶에 적응시키고, 신화 모티프와 유사한 삶을 사는 방향으로 교육받을 수 있었다는 것이라고 하며, 카톨릭 가정의 아이는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탄생하고, 무리를 가르치고, 십자가에 매달리고, 부활하고, 하늘나라로 돌아가는 이 순환적인 주기를 계절적으로 체험하면서 자라게 되는데, 말하자면 1년 내내 계속되는 의례가 가변적인 존재의 불변하는 핵(核) 같은 것을 어린아이의 마음속에다 새겨놓는 것이라고 한다. 이렇게 자라는 아이에게 죄악이라는 것은 그러한 조화의 관계에서 이탈하는 행위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다가 그는 아메리카 인디언에 빠지게 되었는데, 당시 버팔로 빌이 뉴욕의 메디슨 스퀘어 가든에 해마다 와서 하는<와일드 웨스트 쇼> 공연을 보고는 그만 인디언을 짝사랑하게 되었다. 인디언을 좀 더 알고 싶었고. 그의 부모님 또한 너그러운 분들이었기 때문에 그는 아메리카 인디언 신화를 읽기 시작하게 된다. 이로부터 오래지 않아 그는 아메리카 인디언 신화에, 어릴 때 학교에서 수녀 선생님에게 들은 창세, 사망과 부활, 승천, 처녀수태과 같은 것과 똑같은 모티브가 있는 것을 알고는 약간 충격을 받게 되었고, 이것이 바로 그를 신화에 관한 한 세계 최고의 석학이자 우리 시대의 가장 화끈한 스승으로 만든 계기가 되었다.
이미 어린 시절에 자주 숲을 드나들면서 “와, 살아도 많이 살았겠고, 알아도 많이 알겠다.”는 생각에서 숭배하는 느낌이 들어 나무를 바라보며 자연과 소통했던 캠벨은 자신의 천복이 이끄는 데로 자연스럽게 그 길로 들어서게 된 것이다.

조력자들
 
어릴 때 그는 고집이 세서 누가 무슨 말을 하건 듣지 않고 하고 싶은 대로 했다고 한다. 그의 가족은 늘 그를 도와주었고, 언제 어디에서든 그가 하고 싶어 하는 일, 그가 몰두할 수 있는 일을 하게 해주었다.
아버지는 사업가였고, 물론 그의 아버지 역시 그가 자기 일을 이어 받아주었으면 했었겠지만, 그가 아버지의 일을 도와 준지 두 달 만에, 캠벨은 ‘이건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고, 아버지도 순순히 놓아주셨다. 밖으로 나가 홀로 날기를 해야 할 즈음에 그렇게 시험을 당해보는 시기가 있었기에 마음속에 그의 천복이 더욱 확실하게 자리매김 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는 유럽에서 공부하다가 1929년 월스트리트가 무너지기 3주일 전에 미국으로 돌아왔기 때문에 일자리 같은 게 있을 턱이 없었지만 그에게 그 시절은 정말 멋진 시절이 되었다.
돈이 없다는 건 느꼈지만 가난하다는 느낌은 전혀 경험해보지 못했다고 말하는 그는 그 당시 문득 이 양반이다 싶은 프로베니우스를 발견했고 프로베니우스가 쓴 것은 모조리 읽겠다고 결심하게 된다. 돈이 없었던 그는 뉴욕의 서적상에게 편지를 보냈고 그 서적상을 통해 그가 바라던 책을 모조리 읽을 수 있게 된다. 또한 뉴욕의 우드스톡에 1년에 20달러 정도의 임대료로 예술을 공부하는 가난뱅이 학생들에게 빌려주는 멋진 노인이 있었기에 그는 이 집에서 기본 독서와 공부는 거의 다 할 수 있었다. 그는 그 시절을 정말 멋진 시절이라고 하며, “나는 내 천복을 좇고 있었던 겁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어린 시절 그에게 죄악은 조화관계를 이탈하는 것이었고, 그는 “용서할 수 없는 죄악은 방심하는 죄악, 깨어 있지 않는 죄악인 태만을 방기하는 죄악이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우리가 우주와 조화를 이루지 않고 우리의 천복을 찾고 있지 않는 것 자체가 죄악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또한 삶을 살아가다 보면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사람들도 그는 천복을 늘 마음속에 품고 있었기에 그에게는 조력자가 될 수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안 되는 모든 이유의 요인이라고 돌릴 수 있는 대공황이라는 상황 속에서도 상황을 탓하지 않고 그에게 맞는 삶의 방식을 선택했기에 그 시절을 멋진 시절이라 회고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민담과 인류학에 나오는 해골에게 생명을 불어넣음으로써 천복을 따라 신화 같은 삶을 살아갔기 때문에 매 순간 순간이 절정의 순간이었으리라. 그렇기에 절정의 순간에는 여러 미사여구가 섞인 말이 아닌 이 한마디, “아.......” 이 한마디 밖에 할 수 없다고 하지 않았을까 추측해 본다.

2.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빌 모이어스의 서문

‘참 지혜라고 하는 것은 사람들에게서 아득히 떨어진 채 절대고독 속에 은거(隱居)하는데, 이 참 지혜에는 오로지 고통을 통해서만 이를 수 있다. 버리는 것과 고통스러워하는 것만이 세상으로 통하는 마음의 문을 열게 할 수 있는데, 사람들은 이것을 모르고 있다.’ [9]

“영웅은 자신을, 자신이 경험한 어떤 인격이나 권능과 동일시하지 않습니다. (...)

구도(求道)의 궁극적인 과녁은 자기만을 위한 해탈이나 몰아(沒我)가 아닌, 동아리를 섬기기 위한 지혜와 권능을 얻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의 말에 따르면, 고명한 구도자와 영웅은 다른 점이 많은데, 그 다른 점 중에서도 가장 다른 점은 구도자는 자기만의 삶을 누리기 위해 도를 닦지만 영웅은 사회의 구원을 위하여 행동한다는 점이다. [12]

“운명은 앞서서 뜻 있는 자를 인도하지. 뜻 있는 자의 멱살을 잡아끄는 것은 아니라오.”

캠벨의 책에서, 용서할 수 없는 죄악은 방심하는 죄악, 깨어 있지 않는 죄악인 태만을 방기하는 죄악이다. [18]

→ 깨어 있지 않음 이란 바로 이 순간을 살고 있지 않음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겠지. 나는 얼마나 많은 순간들을 죄악인 상태로 살아가고 있나 자문해 본다.

1. 신화와 현대세계

삶이란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니까요. 그저 우리 몫의 삶을 살면 신화 같은 것은 필요하지 않지요. [25]

완전한 것은 비인간적입니다. 보고 듣는 사람에게 초자연적인 인간이나 불사신이라는 느낌을 주는 대신, 아슬아슬한 것, 인간이라고 느끼게 하는 인간미······. 이게 사랑스러운 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데 몹시 힘이 드는 사람이 생기는 게 다 이것 때문입니다. 하느님에게는 불완전한 데가 없거든요, 하느님에게 두려움을 느낀다면, 그 느낌은 진정한 사람으로 연결될 수 없어요. 그러나 십자가에 매달린 그리스도는 사랑스럽지요. [29]

나는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은 살아 있음에 대한 경험이라고 생각해요. 따라서 순순하게 육체적인 차원에서의 우리 삶의 경험은 우리의 내적인 존재와 현실 안에서 공명(共鳴)합니다. 이럴 때 우리는 실제로 살아 있음의 황홀을 느끼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 어떤 실마리의 도움을 받아 우리가 우리 안에서 찾아야 할 것이 바로 이것이랍니다. [29]

→ 꼭 어떤 특별한 경험이 아니더라도 그것을 각자의 내적인 존재와 어떻게 공명시키느냐에 따라 다른 방식으로 느끼게 되겠지. 그런 과정 안에서 황홀경을 지속적으로 느끼게 된다 면 우리의 경험하나하나가 소중하게 다가올 것이다. 그렇게 되면 현재에 깨어있지 않을 수 없으리라.

우주의 의미는 무엇이던가요? 벼룩의 의미는 무엇이던가요? 모두 그저 거기에 있을 뿐이지요. 그겁니다. 모이어스 씨, 당신이라는 분의 의미는 그저 거기에 있다는 것뿐입니다. 외적 가치를 지닌 목적에만 너무 집착해서 움직이는 바람에, 우리는 가장 중요한 것이 내적 가치임을, 즉 살아 있음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삶의 황홀이라는 것을 그만 잊어버리게 되었지요. [30]

결혼이 무엇이냐 하면 결혼하는 두 사람 사이의 영적 동일성을 인식하는 일입니다. 결혼은 연애 같은 것과는 달라요. 연애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것이에요. 결혼은 경험이 지니는 또 하나의 신화적 차원입니다. (...) 결혼은 영적인 동일성을 인식하는 일입니다. 삶을 온당하게 산 사람이라면, 이성(異性)을 웬만큼만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마음의 소유자라면 온당한 남성 혹은 여성 상대자를 찾는 일은 어렵지 않아요. (...) 제대로 된 상대와 결혼해야 우리는 육화(肉化)한 신의 이미지를 재건할 수 있게 되는데, 이게 바로 결혼이라는 것입니다. [31]

결혼으로 맺은 관계를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관계로 치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결혼을 아직 하지 못한 겁니다. 결혼은 원래 하나였던 것이 지어내는 둘의 관계, 둘이 하나의 육(肉)을 이루는 관계입니다. 어느 한쪽에서 시시각각으로 변덕을 부리는 대신, 결혼의 관계가 충분히 오래 계속되고, 그러한 관계에 묵시적으로 동의하게 되면 그걸(둘은 실제로 둘이 아니라 하나임을) 깨닫게 됩니다. [32]

결혼은 관계이지요. 우리는 대개 결혼을 통해서 한두 가지씩은 희생을 시킵니다. 그러나 결혼이라는 관계를 위해서 희생시켜야지, 상대를 위해서 희생시켜서는 안 됩니다. [33]

→ 결혼 안에서 서로에게 어느 정도의 무조건적인 희생을 바라는 것을 사람들은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살고 있지 않을까? 이혼률이 높아지는 것도 결혼이 관계라는 것으로 이어져 있다 는 것을 잊은 채 서로의 역할만을 따지기 바쁘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젊은이들은 의례를 통하여 한 겨레 혹은 한 사회의 일원이 되어야 하는데, 사회가 젊은이들에게 의례를 베풀어주지 못한다는 것이군요. 사실입니다. 모든 아이는 거듭날 필요가 있습니다. 모든 아이는 지금의 세상에서 이성적으로 기능하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야 어린 시절을 떠날 수 있어야 합니다. [35]

→ 아프리카에서 이루어지는 성인식을 보면서 잔인하다는 생각밖에 하지를 않았었는데 그 의례 과정을 거치기가 힘들었던 그 만큼 그들은 진정한 성인으로서 거듭나게 되는 것임을 보면서 지금 우리 사회에 신화의 필요성을 다시금 느낀다.

위대한 신화가 젊은 남녀로 하여금 세계와의 관계를 알게 하거나, 가시적인 사회 이면에 존재하는 또 하나의 세계를 이해하게 해주어야 했다는 것이지요. [36]

어떤 문화권이든지 우리가 문화권이라고 부르는 모듬살이에는 삶의 규범이 될 만한 룰, 그 문화권 사람들 사이에 묵시적으로 이해되는 불문율 같은 게 있는 법이지요. 그런 문화권에는 에토스라고 할 수 있는 것, 삶의 양식이라고 할 수 있는 것, ‘우리는 그런 식으로 하지 않는다’라고 하는 어떤 묵시적 양해 사항이 있어요. 정리되지 않은 신화라고 할 수 있겠지요. 우리가 포크와 나이프를 쓰는 것과 비슷해요. 우리는 포크와 나이프를 쓰는 것처럼 사람들을 대하지요. 포크와 나이프를 어떻게 써야 한다는 것은 책에 나와 있지 않잖아요. 그런데 이 미국에는 온갖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다 모여 살고 있어요. 그러자니 이 나라에서는 법이 대단히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잖아요. 그래서 법과 법률가들이 우리를 꽉 잡고 있어요. 여기에는 에토스가 없어요. [36]

전문화에는 전문가가 관심을 두는 문제의 범위를 한정시키는 속성이 있어요. 하지만 나같이 전문가가 아닌 잡학가(雜學家)는 여기에서는 이 전문가에게 한 수 배우고, 저기에서는 저 전문가에게 한 수 배우기 때문에 문제를 일단 위에서 내려다 볼 줄 알지요. 그러나 내가 말한 그 전문가들은 어떤 현상이 왜 이 분야에서도 나고 저 분야에서도 나타났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잡학가는 전문화한 문화보다도 훨씬 인간적이라고 할 수 있는 다른 문제의 영역으로 뛰어들기도 하는 것이지요. [38]

신화는 우리 삶의 단계, 말하자면 아이에서 책임 있는 어른이 되고, 미혼 상태에서 기혼상태가 되는 단계의 입문 의례와 상당히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이런 의례가 곧 신화적인 의례인 것이지요. 우리는 바로 이런 의례를 통해 우리가 맡게 되는 새로운 역할, 옛것을 벗어던지고 새것, 책임 있는 새 역할을 맡게 되는 과정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합니다. 판사가 법정으로 들어오면 사람들은 모두 일어서지요. 사람들은 그 친구를 보고 일어서는 게 아니라, 그 친구가 입고 있는 법복, 그 친구가 맡고 있는 역할에 경의를 표하기 위해서 밀어서는 것입니다. 판사로 하여금 자신의 역할에 가치를 부여하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 역할로써 판사가 지니게 되는 완전무결함, 즉 그 역할의 원리로 대표되는 완전무결함이지, 저마다 나름대로 생각과 편견을 지닌 판사들의 무리가 아니라고요. 그러니까 우리가 일어서서 경의를 표하는 대상은 판사자체가 아니라 신화적인 인격인 것이지요. [42]

→ 의례가 의미하고 있는 바가 얼마나 큰 것인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단지 어떤 형식으로 만 보아왔던 것들 그 내면에는 한 집단을 이끌 수 있는 생각 이상의 힘이 들어있음을 말이다.

신문을 한번 보세요. 엉망진창입니다. 신화는, 바로 지금 이 시각에 우리가 사는 삶과 구조에 어울리는 수준으로도 삶의 본을 제공해줍니다. (...) 세월의 흐름이 따라 삶의 모습이 얼마나 빨리 바뀌는지, 50년 전에는 온당했던 것이 지금은 온당하지 못한 것이 되고 말았어요. 과거에는 미덕이던 것이 오늘날에는 악덕이 되었고요. 과거에는 우리가 악덕이라고 하 던 것들이 오늘날에는 필요악이 되어 있는 경우도 수없이 볼 수 있어요. 도덕적인 질서는 지금 바로 이곳에서 우리가 사는 실제적인 삶의 도덕적 필요성과 발이 맞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형편은 그렇지 못해요. 구시대의 종교는 다른 연령층, 다른 족속, 다른 가족 체계, 다른 우주에 속한 것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입니다. 자꾸만 뒷걸음질을 치다 보니 이제는 역사와도 발이 맞지 않습니다. 우리의 어린 세대는 앞 세대에게서 배운 종교에 대한 믿음을 잃고, 정작 들여다보아야 할 내면은 무시한 채 엉뚱한 내면만 기웃거리고 있어요. [44]

신화는 이 세상의 꿈이지 다른 사람의 꿈이 아닙니다. 신화는 원형적인 꿈입니다. 인간의 어마어마한 문제를 상징적으로 현몽(現夢)하고 있는 원형적인 꿈입니다. [48]

한 인간이 다른 사람들에게 삶의 본이 될 경우, 그는 신화화(神話化)하는 차원으로 들어가지요. [48]

소년은 새에게 먹이를 주자고 아버지를 조르지요. 아버지는 새 따위에게는 먹이를 줄 수 없다면서 새를 죽여버리고요. 이 전설은 그 사내는 새를 죽이고, 새를 죽임으로써 새의 노래를 죽이고, 노래를 죽임으로써 제 자신을 죽인다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이로써 그 사내는 죽는 것이지요. 완전히, 그리고 영원히 죽는 것이지요.

환경의 파괴는 결국 세계의 파괴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겠지요? 자연의 파괴는 곧 자연에 의한 계시를 파괴하는 것일 테니까요.

인간은 자연만이 아니고 자기 본성도 파괴합니다. 노래를 죽이니까요. [59]

→ 자연이 우리에게 종속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그 기만으로 인해 우리 스스로를 죽이고 있 다는 생각도 못한 채 자연을 파괴하고 있다. 우리는 과연 언제까지 이런 멍청한 짓을 끊임없이 하고 있을까?

신은 인간의 삶과 우주에 기능하는(개인의 육신과 자연에 기능하는) 동기를 부여하는 힘, 혹은 가치 체계의 화신(化身)입니다. 신화는 인류 안에 있는 영적 잠재력을 비유적으로 나타낸 것입니다. 우리 삶의 기운을 북돋우는 힘은 이 세계의 생명의 기운을 북돋우기도 하지요. [61]

성서적 전승은 사회 지향적 신화학입니다. 여기에는 자연은 쫓겨납니다. 19세기 학자들은 신화나 의례를 자연을 통제하려는 기도(企圖)라고 생각했지요. 그거야 마술이지 어디 신화나 종교이겠어요? 자연 지향적인 종교는 자연을 통제하려는 대신 사람을 도와서 자연과 조화를 이루게 합니다. 그러나 자연이 악마로 간주되는 순간부터 사람은 자연과 조화를 이루려고 하는 대신 통제하려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긴장과 불안이 조성되면서, 삼림을 베어내고 토인을 몰살시키는 등의 일이 일어납니다. 여기에 이르면 사람은 자연과 헤어집니다. [62]

하느님과의 관계를 가능케 하는 것은 이성입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은 이성의 존재를 인식하기 때문에 이 세상 모든 사람에게는 어떤 것이든지 가능합니다. 모든 사람은 이성의 존재를 인식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민주주의의 기본적인 원리이지요. 모든 사람의 마음은 진정한 지식에 접근할 수 있기 때문에, 특별한 권위나 앞으로는 이러저러하게 될 것이라는 식의 특별한 계시 같은 것도 소용없습니다. [65]

이성을 파괴하는 것은 열정입니다. 정치에서 열정은 곧 탐욕입니다. 탐욕은 이성을 타락케 합니다. [71]

이성은 생각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사물에 관해서 생각한다고 해서 반드시 이성이 작용했다고 볼 수는 없어요. 우리는 어떻게 하면 저 벽을 뚫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은 이성이 아니지요. 새앙쥐가 코를 내밀어 밖을 내다보고는, 응, 여기라면 나가도 되겠구나, 하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어떻게 하면 저 벽을 뚫을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이성이 아니지요. 존재의 바탕, 우주의 근본적인 구조를 고려에 넣고 무엇을 생각해야 비로소 이성이라고 할 수 있는 거지요. [73]

→ 이성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이 상징적인 틀을 넘어서서 우주적인 구조에서 이루어지는 것 이라면 우리가 이성이라고 생각하는 대부분의 것들이 단순히 개인의 생각이 지나지 않을 까 사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우리는 또한 얼마나 많은 오해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일까?

개인은 자기 삶과 관계된 신화의 측면을 자기 나름대로 찾아야 합니다. 신화라고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네 가지 기능을 지닙니다. 첫째는 신비주의와 관련된 기능입니다. (...) 신화는 신비의 차원, 만물의 신비를 깨닫는 세계의 문을 엽니다. 그런 세계를 잃은 사람에게 신화는 있을 수 없지요. 만물에서 신비를 읽을 때, 우주는 한 폭의 거룩한 그림이 됩니다. 그러면 우리의 몸은 비록 이 땅에 발을 붙이고 살아도 초월한 신비로부터 끊임없이 메시지를 받으면서 살 수 있게 됩니다.

신화의 두 번째 기능은 우주론적 차원을 연다는 것입니다. 과학이 관심을 두는 영역이 바로 이 차원입니다. 그러나 과학은 우주의 모습을 보여주지만, 신화는 신비의 샘으로서의 우주를 보여줍니다. 현대인들에게는, 과학이 모든 답을 내렸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현자들은 “해답은커녕 질문도 미처 다 하지 못했다. 우주가 어떻게 운행되는가는 우리도 안다. 하지만 우주가 무엇인데? 하고 반문합니다. (...)

신화의 세 번째 기능은 사회적 기능입니다. 신화는 한 사회의 질서를 일으키고 그 질서를 유효하게 합니다. 신화가 곳에 따라 많이 다른 것은 바로 이 기능 때문입니다. 중혼(重婚)의 신화도 있고, 단혼(單婚)의 신화도 있는 것은 이 기능 때문입니다. 중혼이든 단혼이든 상관없습니다. 사는 곳에 따라 다르니까요. 신화의 기능 중에서 우리 세계를 가장 폭넓게 지배하고 있는 기능이 바로 이 사회적 기능입니다. (...)

도덕률을 말하는 겁니다. 좋은 사회라면 마땅히 지켜져야 한다고 믿어지는 우리 삶의 법 같은 것 말이지요. [75]

신화의 네 번째 기능이 있어요. 오늘날 우리가 한번 음미해보아야 할 것이 바로 이 기능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이 삶을 이 특정한 상황에서 어떻게 살아낼 것인가 하는 문제와 관련된 교육적 기능입니다. 신화는 사람들에게 그걸 가르쳐줄 수 있어요. [76]

우리를 어딘가에서 이쪽으로 던져진 존재가 아니고, 이 땅에서 나온 존재라고 생각해 보세요. 그러면 우리가 곧 이 땅이요, 우리가 곧 이 땅의 의식이라는 인식에 도달하기가 쉬울 겁니다. 이것이 곧 이 땅의 눈이요, 이것이 곧 이 땅의 음성입니다. [77]

미래를 생각하게 하는 신화 중에서 가치 있는 신화는 어떤 도시, 어떤 동아리에 관한 신화가 아니라 이 땅에 관한 신화입니다. 모든 인류가 사는 이 땅에 관한 신화여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미래의 신화가 어떻게 될 것이냐는 질문 앞에 내밀 수 있는 나의 중심 사상입니다. 이러한 신화는 다른 모든 신화가 다루었던 문제를 고루 다루어야 합니다. 말하자면 유아기에서 성장기를 거쳐 성인기에 이르고, 성인기에서 이 세상을 하직하기까지의 모든 문제, 심지어는 이 사회와의 관계, 이 사회가 지니는 자연의 세계와 우주와의 관계까지 고루 다루어진 신화여야 한다는 겁니다. 이것이야말로 신화가 한결같이 하는 이야기, 이야기가 한결같이 반영하는 신화인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앞에서 말한 사회 역시 이 지구라는 사회에 관심을 기울일 수 있는 사회여야 합니다. 그렇게 되기까지는 신화는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78]

→ 내가 이 땅으로 나오기 위해 이 땅위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났었는지 그리고 내가 이 땅 위에 나온 이후로 난 어떤 보호를 받고 있으며 어떤 해택으로 누리고 있는지 그리고 우리 는 이 땅과 어떤 관계로 맺어져 있는지에 대해 마음으로 알 수 있다면 지금과는 다른 우리를 볼 수 있지 않을까?

내 나라의 눈이 아닌 이성의 눈, 내가 속하는 종교 사회의 눈이 아닌 이성의 눈, 내가 속하는 언어 집단의 눈이 아닌 이성의 눈······. 아시겠지요? 이렇게 태동한 신화는 이 집단, 저 집단, 그 집단의 철학의 아닌 이 땅의 철학이 될 것입니다.

달에서 지구를 보면 국경 같은 게 안 보이잖아요? 미래 신화를 위한 대단이 중요한 상징 같습니다. 우리가 세워야 하는 나라가 이러한 나라이고, 우리가 한 겨레가 되어야 하는 나라가 바로 이러한 나라인 것이지요. [78]

우리가 이 땅의 일부이듯, 그대들도 이 땅의 일부올시다. 이 지구는 우리에게 소중합니다. 이것은 그대들에게도 소중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한 분뿐이라는 것을 압니다. 홍인종이 되었든 백인종이 되었든 인간은 헤어질 수 없다는 것도 압니다. 우리는 결국 형제인 것입니다. [81]

2. 내면으로의 여행

신화라는 하는 게 말이지. 내가 혼자 막연하게 알고 있던 것, 그러면서도 내가 진실일 거라고 믿던 것을 그대로 그려내고 있단 말이야. [83]

신화의 이미지는 아득한 옛날부터 앞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거의 무의식 상태에서 전수된 것이겠군요. [85]

이것이 무서운 까닭은 사물에 대한 우리의 고정관념을 깡그리 부수기 때문이고, 이것이 놀라운 까닭은 이것 자체가 우리 자신의 본성이자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85]

신화에는, 심연의 바닥에서 구원의 음성이 들려온다는 모티브가 있어요. 암흑의 순간이 진정한 변용의 메시지가 솟아나오는 순간이라는 거지요. 가장 칠흑 같은 암흑의 순간에 빛이 나온다는 겁니다. [86]

→ 여명이 오기 직전이 가장 어둡다는 말처럼 신화 역시도 우리가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더 이상 어찌 해야 할지 알 수 없을 때 그 때 한 줄기의 빛처럼 우리의 삶으로 들어와 우 리에게 답을 제시해 준다는 말인데 그 의미를 어떻게 하면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일까...

천국과 지옥이 다 우리 안에 있지요. 모든 신도 우리 안에 있지요. 이것은 기원전 9세기에 성립된 인도<우파니샤드>의 위대한 깨달음이기도 합니다. 그래요. 모든 신들, 모든 천국, 모든 세계가 다 우리 안에 있어요. 이러한 개념이야말로 확장된 인류의 꿈이고, 꿈은 서로 갈등하는 우리 몸속의 에너지가 이미지 형태로 현현한 것이지요. 신화는 우리 몸의 서로 갈등하는 각 기관의 에너지가 상징적인 이미지, 은유적인 이미지로 현현한 것이지요. 우리 몸의 각 기관이 갈등한다고 한 까닭은, 이 기관은 이것을 원하고 저 기관은 저것을 원하는 식으로 각각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두뇌도 이러한 기관의 하나입니다. [86]

꿈은 우리 의식적인 삶을 지탱시키는 깊고 어두운 심층에 대한 개인적인 체험입니다. 반면 신화는 사회가 꾸는 집단적인 꿈입니다. 그러니깐 신화는 공적인 꿈이요, 꿈은 사적인 신화라고 할 수 있겠지요. 어떤 개인이 꾸미는 사적인 신화인 꿈이 그 사회의 꿈인 신화와 일치한다면, 그 사람은 그 사회와 무난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고 보아야겠지요. 그렇지 않다면 앞에서 기다리는 캄캄한 숲 속에서 한바탕 모험을 해야 합니다. [89]

→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지구촌에 사는 사람모두가 동시에 손을 잡고 같은 기도문을 외운다면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모든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하는. 신화 역시도 그런 기능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의식을 한데로 모을 수 있다면 거기서 나오는 에너지들은 동일한 목표점을 향해 나갈 수 있을 테니깐.

그러니까 개인의 사적인 꿈이 공적인 신화와 조화를 이루는 사람이라면 좀 더 건강하게 사회에 적응할 수 있을 거라는 말씀이시군요. [89]

시련을 극복하고, 기왕에 해석되어 있는 경험에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 새로운 가능성의 세계를 열어주는 용기, 이게 바로 영웅의 용기입니다. [90]

삶은 죽여서 먹음으로써, 남을 죽이고 자신을 달처럼 거듭나게 함으로써 살아지는 것입니다. 이 상징적이고 역설적인 이미지들이 나타내려고 하는 것은 바로 이 신비입니다.

대부부분의 문화에서 뱀은 긍정적인 의미로 해석됩니다. 인도에서는 가장 강한 독을 지닌 코브라조차 신성한 동물로 여겨지지요. 신화에 나오는 ‘사왕(蛇王)’은 부처님 다음 자리를 차지해요. 뱀은 시간의 장(場), 죽음의 장이면서도 영원한 생명의 장에서 기능하는 생명력을 상징합니다. [97]

대극이라는 것은 죄악에서 비롯되지요. 다른 말로하면, 죄악으로 인하여 인류는 낙원의 동산이라는 신화적인 꿈의 시간대에서 쫓겨납니다. 초시간대(超時間帶)인 이 시간대는 시간이 없는 곳, 남성과 여성이 저희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모르는 곳입니다. 이 낙원에서 남성과 여성은 그저 피조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느님과 인간도 실제로 같습니다. 하느님은 석양의 서늘한 바람을 쏘이려고 이 남성과 여성이 있는 곳으로 터벅터벅 걸어 들어옵니다. 그런데 이 남성과 여성이 사과를 먹습니다. 이 사과가 바로 대극에 관한 인식입니다. 이 사과를 먹음으로써 둘은 대극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지요.

대극을 인식할 수 있게 되고 보니, 저희가 서로 다르다는 것도 인식하게 되었지요. 그래서 황급히 부끄러운 곳을 가립니다. 보세요. 그전에는 서로가 대극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어요? 여기에서 대극은 남녀뿐이 아닙니다. 남성과 여성은 대극의 하나에 지나지 않아요. 또 하나의 대극은 인간과 하느님입니다. 하느님과 악마는 제3의 대극입니다. 그러나 역시 가장 중요한 대극은 남성 · 여성의 대극, 신인(神人)이라는 대극입니다. 이 대극을 인식하게 되자 선악의 분별이 생깁니다. 그러니까 아담과 이브는 단지 이원성(二元性)을 인식했다는 죄로, 초시간적인 융합의 낙원에서 쫓겨나는 겁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나와 살자면 대극이라는 문맥에 따라 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101]

이 세상의 만물은 대극으로 이루어져 있지요. 하지만 신화는 우리에게 이 이원성의 이면에는 일원성의 세계가 있어서, 대극이 서로 꼬리를 물고 있음을 암시하지요. [102]

속세의 근원은 영원입니다. 영원은 스스로 이 세상으로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신에 관한 기본적인 신화적 관념이 바로 영원입니다. 신은 하나여도 속세에 내려와서는 여럿으로 나뉘어 우리 안에 거하게 되지요. 인도에서는 내 안에 있는 신을 육체에 ‘사는 자’라고 한답니다. 이 신을 우리의 영원불멸하는 측면과 동일시하는 것은 곧, 우리 자신을 그 신과 동일시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영원이라는 것은 모든 생각의 범주 너머에 있습니다. 동양의 대종교(大倧敎)에서 이러한 관점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생각하고 싶어하지요. 하느님은 생각입니다. 하느님은 이름입니다. 하느님은 관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느님이라는 존재가 모든 생각을 초월하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존재의 궁극적인 신비는 모두 생각의 범주 너머에 있습니다. [103]

→ 여럿으로 나뉘어 각자의 마음에 거하게 되는 신을 우리는 인정하지 않고 어떤 하나의 형상을 만들어 놓은 채 그것만이 진실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느님을 찾기 위해서는 먼저 다른 이들의 마음안에 있는 내가 생각하는 하느님과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하느님을 인 정할 수 있는 마음부터 가꾸어 놓는 게 필요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최상의 것은 생각을 초월해서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언표(言表)될 수 없습니다. 차상(次上)은 오해됩니다. 왜냐, 생각될 수 없는 것을 생각이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로 좋은 것이 바로 우리가 언표하고 있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신화는 절대적으로 초월적인 존재가 언표되는 장(場)이랍니다. [103]

이 세상으로 태어나기 직전에 자궁의 율동이 시작되는데 이때 어마어마한 공포를 느낀답니다. 그러니까 ‘나’라는 것이 생기기 전에 경험하게 되는 것이 공포인 셈입니다. 이어서 태어나기 위한 무시무시한 단계, 산도(産道)라는 아주 험한 길을 지나면, 드디어 이 세상의 빛을 보는 것이지요. [106]

‘자기’가, “내가 있다”고 진술한 직후에 공포를 느낀다는 신화가 그대로 되풀이 되고 있으니 놀라운 일 아닙니까? 일단 ‘나’만으로 외로움을 느끼면 ‘자기’는 다른 것과 함께 있고 싶다는 욕망을 느끼게 되고, 그런 욕망을 느끼게 되면 이 ‘자기’는 둘로 나뉩니다. 이것이 바로 빛의 세상이 비롯됨이요, 한 쌍의 대극이 비롯됨 입니다. [106]

이 금제를 깨뜨림으로써 아담은 자기 삶에 입문하게 됩니다. 삶이라고 하는 것은 금제에 불복하는 순간에 시작되는 것이지요. [106]

한 가지 설명은 인간의 마음이라는 것은 그 인간이 세계 어디에 살든 기본적으로 같다는 설명입니다. 마음은 인간의 육체가 하는 내적인 경험입니다. 같은 기관, 같은 본능, 같은 충동, 같은 갈등, 같은 공포를 가졌으니 인간은 같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바로 이 공통되는 바탕에서, 융 박사의 이른바 원형(原型)이 산출된다는 것입니다. 원형은 인간이 공유하는 신화의 관념이라는 것이지요. [107]

‘바탕되는 관념’이라고 불러도 좋은, 근본적인 관념입니다. 융 박사는 이런 관념을 무의식의 원형이라고 했지요. (...) 융이 말하는 무의식의 원형은 생물학적입니다.

세계 전역에서 그리고 인류 역사를 통하여 이 원형 혹은 근본적인 관념은 각기 서로 다른 옷을 입고 나타났습니다. 옷이 이렇게 다른 것은 환경적, 역사적 조건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107]

→ 신화로 하나가 될 수 있다는 의미가 무엇이었는지 이제야 이해가 된다.

내 생각으로 우리가 신화를 다루면서 노리는 것은 세계 체험의 한 방법이 아닐까 싶군요. 초월의 이미지를 열어줄 세계인 동시에 그 안에 살 우리의 모습을 빚는 세계에 대한 체험이라면 어떨까요? 시인이 원하는 것이 바로 이것 이지요. 우리의 영혼이 요구하는 것도 바로 이것이고요. [109]

우리가 신화를 다루는 것은 신의 실재를 경험할 수 있게 하는 일종의 지침을 얻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109]

시간의 장으로 현현한 것으로서 인간은 원래 한 존재의 바탕에서 왔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시간의 장이라는 것은 초시간적인 바탕에서 벌어지는 영극(影劇)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이 영극 마당에서 영극 놀이를 하면서 있는 힘을 다해 우리가 지닌 극성(極性)의 측면을 조종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우리는, 원수라고 하는 것도 사실은 다른 각도에서 보이는 우리의 다른 측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압니다. [113]

이 세계라는 대교향악단과 조화를 이루려면 우리 개인의 하모니를 이 큰 하모니에 맞추어야 하는 거지요. [113]

만일 어떤 사람이 자기는 궁극적인 진리를 발견했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틀린 것입니다. 산스크리트어로 된 시 중에 자주 인용되는 시가 있는데, 이게 중국의 <도덕경>에도 나옵니다. 이렇습니다. “스스로 안다고 생각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 알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자는 실은 알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안다는 것은 실은 모르는 것이고 모르는 것은 아는 것이다.” [114]

라마크리슈나는 늘 죄만 생각하는 사람은 죄인이라고 했습니다. [114]

지금 생각해 보니, “저를 축복해주세요, 신부님. 제가 워낙 귀한 존재라서 그런지 지난 한 주일 동안 제가 한 것은 좋은 일뿐입니다” , 이럴 걸 그랬다 싶군요. 자신을, 부정적인 것과 동일시할 것이 아니고 긍정적인 것과 동일시해야 할 것 같다는 겁니다. [115]

→ 죄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죄가 된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 죄에 지나 치게 나를 묶어 두는 것이 더 큰 죄가 되지 않았을까 한다. 신은 인간이 스스로 만든 죄 인이라는 틀 안에 갇혀 있는 것을 원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시다시피 종교라는 것은 제2의 자궁 같은 것입니다. 종교는 인간의 삶이라는 극도로 복잡한 것을 우리 안에서 익게 하도록 만들어져 있습니다. 이렇게 익으면 스스로 동기도 유발시킬 수 있고, 스스로 행동하는 것도 가능해집니다. 그러나 죄악이라는 관념은 우리를 평생 처참하게 만들어버립니다. [115]

셰익스피어는, “예술은 자연을 비추는 거울”이라고 했습니다. 바로 그겁니다. 자연은 곧 우리의 본성이고, 신화에 등장하는 이 멋진 시적 이미지는 바로 우리 안에 있는 것을 반영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외부적인 이미지에 갇혀 있어서, 신화적 이미지를 읽으면서도 그것을 우리 자신과 관련시키지 못하면 제대로 읽을 수가 없는 것이지요. 내면의 세계는, 외면의 세계와 접하는 우리의 요구와 희망과 에너지와 구조와 가능성이 반영된 세계입니다. 외계는 우리가 드러나는 세계입니다. 우리의 자리가 바로 이 외면의 세계입니다. 우리는 내면의 세계, 외면의 세계와 함께 발을 맞추어야 합니다. 노발리스가 말했듯 ‘영혼의 자리는 외면의 세계와 내면의 세계가 만나는 자리’인 것입니다. [116]

메시지, 메시지에 이르는 단서를 간취(看取)하기 위해서는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체험이 없으면, 어느 누가 진리를 말해도 귀에 들리지 않는 법입니다. [124]

체험한 사람은 체험한 것을 최선을 다하여 이미지에 투사시켜야 합니다. 제가 보기에 우리 사회는 이미지로 생각하는 기술을 잃어버린 것 같습니다. 정말 잃어버렸지요. 우리의 생각은 막연합니다. 언어적이고 단선적(單線的)입니다. 언어의 현실보다는 이미지의 현실이 훨씬 더 풍부한데 말이지요. [124]

시간과 공간은 우리의 경험을 한정시키는 감각 능력을 형성시킵니다. 우리의 감각은 시공의 장에 갇히고, 우리의 마음은 생각의 범주라는 틀에 갇힙니다. 그러나 우리가 접촉하려고 하는 궁극적인 존재(이것은 사물이 아닙니다)는 갇혀 있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가 생각을 하려고 함으로써 이것을 가둘 뿐입니다. [126]

초월자는 사유의 모든 카테고리를 초월합니다. 존재한다. 존재하지 않는다 - 이것은 카테고리입니다. ‘하느님’이라는 말은 모든 사유를 초월해 있는 존재를 일컫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 ‘하느님’이라는 말 역시 사유를 통해서 생긴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정말 많은 방법으로 인격화 할 수 있습니다. 신이 한 분이던가? 신이 여러 분이던가? 이렇게 묻는 것 자체가 생각의 카테고리에 묶여 있음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말하려는 존재, 생각하려는 그 존재는 이 모든 것을 ‘초월’합니다. [127]

죽음에만 고통이 없을 뿐이에요. 사람들이 나에게, “이 세상 일을 낙관하십니까” 하고 묻습니다. 그러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지요. “그래요. 인생은 이대로도 굉장해요. 당신은 재미가 없나 보군요. 인생을 개선한 사람은 없어요. 그러니까 이보다 나아지지는 않을 겁니다. 이 대로 일 테니까 받아들이든지 떠나든지 하세요. 바로잡는다거나 개선할 수는 없을 테니까.” [133]

우리는 사악한 일에도 참여하고 있어요. 참여하지 않으면 살아가지 못합니다. 우리가 잘한다고 하는 일이 어느 누구에게는 반드시 사악한 일이 됩니다. 이 세상 피조물이 피할 수 없는 아이러니이지요. [133]

어느 한쪽에 선한 것은 그 반대쪽에는 악한 것이지요. 인생이라는 게 참혹한 것임을 알면 물러서지 않고 자기가 맡은 역할을 해낼 수 있어요. 그러나 그것만 알아서는 안 됩니다. 이 참혹함이 바로 신비, 무섭고도 놀라운 신비의 바탕이라는 것까지 알아야 합니다. [133]

세속성(상실하고, 상실하고, 상실하는 것으로 인한 슬픔의 원인) 이 개입되어 있지 않은 삶은 삶이 아니지요. 그러니깐 우리는 삶을 긍정하고, 이대로도 훌륭한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반드시 의도가 이러한 것이었으니까요. [134]

이대로가 즐거운 겁니다. 나는 누가 이런 식으로 되기를 의도했다고는 믿지 않습니다. 어쨌든 이렇게 되어 있잖아요? 제임스 조이스의 한마디가 기억납니다. 그는 “역사는 내가 헤어나려고 몸부림치는 악몽”이라고 했지요. 그러니깐 이 악몽에서 헤어나는 길은, 두려워하지 않고 지금 이대로의 모습 자체가 만물을 창조한 무서운 힘의 현현임을 깨닫는 일입니다. 사상(事象)의 끝은 늘 고통스러운 법입니다. 그러나 고통 또한 세상이 존재하는 까닭의 일부입니다. [134]

“시합에도 참가하겠다. 시합이라는 것은 멋진 것이다. 다치지만 않는다면······.”, 이런 태도가 되겠지요. 단언(斷言)은 어려워요. 우리는 늘 조건을 붙여가면서 단언하지요. 나는, 산타클로스가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하던 것과 똑같이 조건을 붙이면서 단언하지요. 하지만 그런 식으로 단언하는 것, 그것도 실은 어려운 거예요. 그래서 의례가 있는 겁니다. 의례를 통해서, 사람들은 가장 은밀한 행위에 무리를 지어 참가하지요. 은밀한 행위가 무엇일까요? 삶에 필요한 행위, 즉 다른 생명을 죽여서 먹는 행위지요. 우리는 이런 짓을 무리지어 합니다. 그게 삶인 것이죠. 영웅이 이러한 여느 사람과 다른 점은 개인적인 원한이나 절망이나 복수로서가 아닌, 자연의 방법으로 용감하게, 그리고 아름답게 삶에 참가한다는 점입니다. 영웅의 행동반경은 초월적인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 선악이 있는 시간의 장, 대극이 있는 곳입니다. [135]

우리 인생에서 견딜 수 없는 일 중 하나는, 속으로는 구역질나는 타인, 혹은 타인의 행동, 혹은 타인의 조건에 대해서도 ‘옳다’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136]

우리는, 우리가 정한 원칙에 어긋난다고 해서 ‘아니’라고 할 것이 아니라, 이 삶의 기적 앞에서 고개를 끄덕거려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형이상학적 차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138]

3. 태초의 이야기꾼들

신화와 의례는 마음을 몸에다 조화시키기 위한 수단, 자연이 가르치는 대로 삶을 자연에 조화시키기 위한 수단입니다. [141]

인간의 발달 단계는 고대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어린 시절에는 이 세상의 질서와, 복종하는 법을 배웁니다. 이 시기에는 다른 사람에게 기대어서 살지요. 그러나 성숙하면 이 모든 것을 뛰어넘어야 합니다. 그래야 부모에게 의존하지 않고 자기가 책임지는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지요. 이 문턱을 넘어서지 못하면 신경증이 생깁니다. 그리고 이 세상을 내것처럼 사는 시절이 지나면, 이윽고 세상을 남에게 양보하는 때가 옵니다. [142]

죽음은 최종적인 해방입니다. 그런데 신화는 두 가지를 두루 섬깁니다. 즉 젊은이를 이 세상의 삶과 만나게 할 때도 신화가 끼여들고(여기에서 바로 종족특유의 관념이 기능합니다.), 이 삶에서 해방될 때도 신화가 개입합니다. 말하자면, 종족적 관념은 인류의 근본적인 관념의 껍질을 벗기는데, 이 근본적인 관점이 바로 우리를 내적인 삶으로 안내해준답니다. [142]

우리 자신과 사회를 연결시키는 신화, 다시 말해서 부족 신화는 우리에게, 우리가 현실의 조직보다 훨씬 더 큰 조직의 한 기관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을 심습니다. 현실 사회는 그 부족의 목적지에 있는 큰 조직의 한 기관에 지나지 않지요. 의례의 중심적인 목적은 한 개인을, 그 개인의 육신보다 훨씬 큰 형태론적 구조에 귀속시키는 것입니다. [145]

인디언들은 살아 있는 모든 것을 ‘그대’라고 불렀어요. 들소는 물론이고 심지어 나무, 돌 같은 것도 그렇게 불렀지요. 사실 이 세상 만물을 다 ‘그대’라고 부를 수 있어요. 이렇게 부르면 우리의 마음 자체가 달라지는 걸 실감할 수 있지요. 2인칭인 ‘그대’를 보는 자아는 3인칭 ‘그것’을 보는 자아와 다를 수밖에 없어요. 어떤 나라와 전쟁에 돌입하게 될 때, 언론이 노출시키는 가장 중대한 문제는 적국(敵國)의 국민을 순식간에 ‘그것’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랍니다. [155]

소년은 사냥하는 법도 배워야겠지만, 짐승을 두렵게 여겨 존중하는 법도 배워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의례도 배워야 하고, 이제 자신이 더 이상은 소년이 아니라 어엿한 남자가 되었다는 것도 배워야 합니다. 아시다시피, 사냥은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이 동굴은, 의례를 통해 소년에게 더 이상은 어머니의 아들이 아니라 이제 아버지의 아들이 되었음을 깨우쳤던 그 시대 사람들의 성소(聖所)였던 것입니다. [160]

원시 입문 의례에서 아이는 소년 시절에서 격리됩니다. 바로 이렇게 격리된 상태에서 아이는 할례를 당하거나, 몸의 한 부분에 상처를 입는데, 이러한 시련은 곧 아이의 몸이 희생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희생이 치러지면 입문자의 몸은 어른의 몸이 됩니다. 이런 의례를 치른 이상 옛날로 되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162]

오늘날에는 그런 의례가 없지 않습니까? 유감스럽게도 그렇지요. 그래서 젊은이들은 제 손으로 그 의례를 만듭니다. 그래서 불량배들이 작당을 하여 설치고 다는 등의 일이 일어나는 겁니다. 젊은이들이 불량배의 동아리가 되는 등의 형태는 결국 입문 의례와 비슷한 의미입니다. [162]

의례의 마당은 신화가 드러나는 마당입니다. 의례에 참가하나는 것은 곧 신화에 참가한다는 것이지요. [163]

고대의 의례가 지닌 중요한 역할은 개인을 부족의 한 구성원으로, 한 지역 사회의 구성원으로, 한 모듬살이의 구성원으로 통합시키는 것이었어요. 그런데 서구 문명은 개인을 사회로부터 끊임없이 분리시켜왔습니다. 그래서 결국, ‘나’먼저, 개인 먼저가 되어버렸지요. [165]

→ 소속감이 없어졌기 때문에 ‘나’위주로 세상이 돌아가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나’의 어떤 행동이 다른 이에게 피해를 주는 것에 대해 전혀 개의치 않게 되는 것이구나.

세계의 중심점은 움직임과 정적(靜寂)이 함께 하는 점입니다. 움직임은 시간이지만 정적은 영원입니다. 우리 삶에서 이것을 깨닫는다는 것은 곧 영원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일시적 체험에서 그 일시적 체험이 지닌 영원한 측면을 체험하는 것, 이거야말로 신화 체험인 것입니다. [174]

신은, 중심은 도처에 있으나 주변은 없는, 이해가 가능한(감각이 아니니, 마음으로만 이해가 가능한) 구체(球體)라고 하는 정의가 그것입니다. 그런데 그 중심은 바로 모이어스 씨가 앉아 있는 그 의자입니다. 내가 앉아 있는 이 의자이기도 하고요. 그리고 우리 둘 다 이 신비의 드러남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누구이고 우리가 무엇이냐는 질문의 해답이 될 수 있는 놀라운 신화적 자각일 수 있습니다. [175]

우리가 이 자리에서 가지고 있는 것은 모두 개인주의라고 번역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를 깨닫지 못하면, 중심은 언제나 다른 사람 안에서 우리와 마주보고 있을 뿐입니다. 이게 바로 신화적인 홀로 서기입니다. 우리가 곧 중심에 있는 산이고, 이 중심에 있는 산은 도처에 있는 것입니다. [175]

4 희생과 천복(天福)

우리에게 여백, 혹은 여백 같은 시간, 여백 같은 날이 있어야 합니다. (...) 바로 이 여백이야말로 우리가 무엇인지, 장차 무엇일 수 있는지를 경험할 수 있는 장소입니다. 이 여백이야말로 창조의 포란실(抱卵室)입니다. 처음에는 이곳에 있어도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이곳을 성소로 삼게 되는 순간부터 여기에서 대단히 중요한 일이 일어납니다. [179]

초원의 사냥꾼들에게는 세계 전체가 성소였어요. 그러나 우리 삶의 겨냥은 지나치게 경제화, 실용화에 맞춰져 있습니다. 그래서 나이를 먹어갈수록 순간순간의 요구가 어찌나 집요한지, 우리는 우리 자신이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 우리가 참으로 의도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이런 세태를 살다보면 우리는 늘 우리에게 요구된 일만 합니다. 우리 천복(天福)의 정거장 어디에 있느냐······. 우리는 이것을 찾아야 합니다. [179]

모든 땅이 다 성지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모든 땅에서 삶의 에너지의 상징을 찾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183]

→ 내가 선 그 자리가 바로 성지라 생각한다면 그 곳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에 충실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 같다. 만약에 천복을 찾은 사람이라면 어느 장소에 있던 자신의 천복을 위한 행위를 하리라.

읽고 또 읽는 겁니다. 제대로 된 사람이 쓴 제대로 된 책을 읽어야 합니다. 읽는 행위를 통해서 일정한 수준에 이르면,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마음이 즐거워지기 시작합니다. 우리 삶에서 삶에 대한 이러한 깨달음은 항상 다른 깨달음을 유발합니다.

마음에 드는 작가가 있으면 붙잡아서, 그 사람이 쓴 것은 모조리 읽습니다. 이러저러한 게 궁금하다. 이러저러한 책을 읽고 싶다······. 이런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베스트셀러를 기웃거려도 안 됩니다. 붙잡은 작가, 그 작가만 물고 늘어지는 겁니다. 그 사람이 쓴 것은 모조리 읽습니다. 이렇게 읽으면 우리는 일정한 관점을 획득하게 되고, 우리가 획득하게 된 관점에 따라 세상이 열리게 됩니다. 그러나 이 작가, 저 작가,로 옮겨 다니면 안 됩니다. 이렇게 하면, 누가 언제 무엇을 썼는지를 줄줄 외고 다닐 수 있어도, 진정한 의미에서의 도움은 안 됩니다. [190]

신 관념은 항상 문화적 조건에 따릅니다. 선교사가, 자기가 생각하는 하느님, 자기의 신을 어느 땅에 들여온다고 한들 그 신은 그 땅 사람들이 상상할 수 있는 신으로 변모합니다. [193]

현존하는 모든 세대는 다음 세대가 오게 하기 위해서는 죽어야 한답니다. [201]

“땅에 쓰러진 고목과 떨어진 잎에서 새싹이 나온다. 이것은, 죽음에서 생명이 솟고 죽음으로부터 새 삶이 비롯됨을 깨닫게 한다. 어설프게 결론을 내려 보자면, 생명이 늘어나려면 죽음이 늘어나야 한다. 이 지구의 적도대(赤道帶) 문화의 특징은 희생 제물(식물, 동물, 혹은 인간)을 바치기에 광분해 있다는 데 있다.” [201]

만일에 우리가 우리 삶을 두려워하면 동산 안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자아’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난 상태에서, ‘자아’라고 하는 것이 더 크고 영원한 전체성의 한 기능임을 깨닫는다면, 작은 것이 아닌 큰 것을 섬긴다면, 이런 문지기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무사통과 할 수 있는 것이지요.

→ 내가 정말 두려워해야 할 것은 나 자신을 보려 하지 않는 것과 내 안에 있는 것들을 버리지도 새로 채우지도 않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우리는 공포와 욕망 때문에,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반드시 우리 삶의 선(善)이어야 한다는 데서 생긴 공포와 욕망 때문에 낙원에서 쫓겨난 겁니다. [204]

일상의 삶과 이 환희의 순간이 다른 점은 전자는 낙원 밖에서 사는 삶이고 후자는 낙원 안에서 사는 삶이라는 것이지요. 다시 낙원으로 들어가려면 우리는 공포와 욕망이라는 이 한 쌍의 대극을 극복해야 합니다. [204]

초월해야 한다는 뜻이지요. 이것은 모든 깨달음에 반드시 수반되어야 하는 경험입니다. 육(肉)으로는 죽고 영(靈)으로는 다시 나야 하는 겁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우리 의식과 동일시합니다. 이러 삶에서 육신은 의식을 나르는 수레에 지나지 않아요. 수레로 죽고, 의식과 이 수레에 실려 있는 것은 동일시해야 합니다. 이 수레에 실려 있는 것, 그것이 곧 신입니다. 농경 문화권에서 우리가 만나는 것은, 표면적인 이원성의 이면에 존재하는 동일성 관념입니다. 이 모든 드러남의 이면에는 빛으로 만물을 비추는 하나의 광원(光源)이 있어요. 예술의 기능은 창조 작업을 통해 이 광원을 드러내는 일입니다. 잘 짜여진 예술 작품을 볼 때마다 우리는, 아, 하고 감탄하고는 합니다. 이렇게 감탄하는 까닭은 이 작품이 우리 삶의 질서를 드러내고, 종교가 회복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하기 때문이겠지요. [205]

죽음과 삶의 균현을 잡아주어야 하는 거지요. 이 양자는 한 사상(事象), 즉 ‘존재’의 두 측면이니까요. [205]

영웅이란 자신의 물리적인 삶을 이러한 진리 인식의 질서에다 바친 사람을 말합니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은, 우리를 바로 이러한 진실에 던져 넣으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웃을 사랑하건 사랑하지 않건, 일단 진실에 대한 깨달음에만 이르면 목숨을 거는 일도 곧잘 하게 됩니다. [211]

시간이 존재하면 고통이 있게 마련입니다. 과거 없이 미래를 맞을 수는 없는 법입니다. 아무리 현재를 사랑해봐야 현재는 곧 과거가 됩니다. 상실, 죽음, 탄생······상실, 죽음, 탄생······ 삶은 이렇게 돕니다. 십자가를 명상한다는 것은 곧 삶의 신비의 상징을 명상하는 것입니다. [213]

우리가 죽어야 하는 죽음은 영적인 죽음입니다. 이 죽음을 통해서 더 큰 삶의 길로 다시 태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214]

우리가 순종하지 않아야 하느님 자비가 수용에 닿게 됩니다. 순종하면 하느님에게 찬스가 생기는 않는 거예요. 루터는, 하느님의 자비가 얼마나 되는지 궁금하거든 “용감하게 죄를 지어보라”로 했어요. 그러니깐 큰 죄인은 연민하는 하느님을 크게 깨달음 자인 셈입니다. 이것은 도덕의 역설과 삶의 가치와 밀접한 관련을 지니는 아주 근본적인 관념입니다. [220]

자기 천복과 관계가 있는 이야기가 나오면 눈빛이 달라지든지 낯빛이 달라지든지 하지요. 삶의 가능성은 바로 여기에서 열립니다. [224]

“내 의식이 제대로 된 의식인지, 아니면 엉터리 인지 모르겠다. 내가 아는 존재가 제대로 된 존재인지, 아니면 엉터리 존재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어떤 일에 천복을 느끼는지 그것은 안다. 그래, 이 천복을 물고 늘어지자. 이 천복이 내 존재와 의식을 데리고 다닐 것이다.” [226]

천국에서는, 하느님을 우러러보는, 생전 안 하던 경험을 하니 대단하긴 하지요. 하지만 우리 자신의 경험은 바로 이곳에서 하는 것이지, 천국에서 하는 것이 아니에요. [227]

늘 보이지 않는 손이 나를 따라다닌다고 생각을 하기 때문에 나에게는 굳게 믿는 미신이 하나 있습니다. 지금도 내가 하는 생각은 이렇습니다. 천복을 좇으면, 나는 창세 때부터 거기에서 나를 기다리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내가 살아야 하는 삶은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삶입니다. 이걸 알고 있으면 어디에 가든지 자기 천복의 벌판에 사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이 문을 열어줍니다. 그래서 나는 자신 있게 사라들에게 권합니다. “천복을 좇되 두려워하지 말라. 당신이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있어도 문은 열릴 것이다.”

영원한 생명수가 옆에 있다고 하시는데, 그게 대체 어디에 있습니까? 그게 어디가 되었든, 우리가 있는 곳에 있습니다. 자기 천복을 좇는 사람은 늘, 그 생명수를 마시는 경험을, 자기 안에 있는 생명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이지요. [227]

→ 천복을 찾게 되면 어떻게는 중요한 것이 아닌 것 같다. 그 다음에는 그저 나를 이끄는 대로 가기만 하면 되니깐. 중요한 것은 나의 천복에 대한 믿음이 아닐까 한다.

5 영웅의 모험

우리는 이제 영웅이 이 길에다 깔아놓은 실을 붙들고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알게 된다. 무서운 괴물이 있어야 하는 곳에서는 신을 만나게 되고, 남을 죽여야 하는 곳에서는 저 자신을 죽이게 되며, 외계로 나가야 하는 곳에서는 우리 존재의 중심으로 되돌아오게 되고, 외로워야 할 곳에서는 온 세상과 함께 하게 될 것임임을······. [229]

‘영웅’이라는 말은 자기 삶을 자기보다 큰 것에 바친 사람을 일컫는 말이지요. [229]

보통, 영웅의 모험은 무엇인가를 상실한 사람, 자기 동아리에게 허용되어 있는 정상적인 경험에는 무엇인가 모자라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 의해 시작됩니다. 이 사람은 이렇게 모험에 뛰어들어 보통 사람으로서는 상상도 못할 고난을 겪으면서도, 자기가 상실한 것, 혹은 생명의 불사약 같은 것을 찾아 헤맵니다. 영웅의 모험에는, 출발과 귀환 사이에 일종의 주기(週期)가 있지요.

그런데 이러한 모험의 구조와, 모험이 지니는 영적인 요소는 태고의 성인식(成人式)에서 충분히 예고된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바로 이 성인식을 통하여 아이는 아이의 시절을 포기하고 어른이 되기를, 혹은 유아기의 인격과 정신을 버리고 책임 있는 어른이 되기를 강요당하지요. 이것은 모든 사람이 거쳐야 하는 일종의 기본적인 과정이며 정신적인 변모 과정입니다. [230]

이 심리적인 미성숙 상태를 박차고 자기 책임과 자기 확신 위에서 영위되는 삶의 현장으로 나오려면, 죽음과 재생의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보편적인 영웅 여행에서 기본이 되는 모티브입니다. 즉 이 여행을 마쳐야 한 인간은 어떤 상황을 떠나 삶의 바탕이 되는 것을 찾아내고는 더욱 풍성하고 성숙한 인간 조건에서 살게 되는 것이지요. [230]

자신을 버려서 자신을 더욱 높은 목적, 혹은 타인에게 준다는 겁니다. 이것만 알면 이 자체가 바로 궁극적인 시련이라는 걸 깨달아낼 수 있지요. 우리가 우리 자신의 문제를 진정으로 참구한다면, 진정으로 자기를 보존할 방법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이미 의식의 영웅적 변모의 과정에 든 거나 다름없습니다. 결국 모든 신화가 다루고 있는 것은 의식의 변모입니다. 전에는 이렇게 생각해왔지만 지금부터는 저렇게 생각해보는 것······. 의식의 변모는 이로써 시작되는 것이지요. [233]

영웅은 무엇인가를 위해서 자신을 희생합니다. 이것이 바로 도덕적인 것이지요. 물론 반대 입장에서 보면, 영웅이 자신을 희생시켜가면서까지 옹호하려는 관념이 반드시 옳은 것일 수만은 없지요. 하지만 이것은 반대편 입장에서 보아서 그럴 뿐입니다. 반대 입장의 견해가 영웅이 이룬 업적이 지닌 교유의 영웅적 속성을 훼손시킬 수는 없는 겁니다. [235]

우리 삶이 우리 기질의 잠을 깨웁니다. 우리 자신에게서 무엇인가를 계속해서 찾아볼 필요가 있어요. 현실로 드러나는 우리 모습 이상의 무엇을 촉발시킬 만한 상황으로 자신을 던져넣을 필요가 있는 것은 이 때문이지요. 우리는 현실로 드러나는 우리 이하의 무엇으로 떨어져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 라는 말이 있는 겁니다. [239]

과학기술상으로 약진을 이루는 일이든, 이웃의 도움 없이 혼자서 꾸려나가야 하는 삶의 문제이든 상관없이, 우리는 우리에게 생소한 이런 모험을 할 때는 늘 위험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 위험은 우리가 너무 열광한 나머지 과학기술적인 측면을 완전히 무시해버리면 언제든지 이런 위험에 빠질 수 있지요. 이 위험을 극복하지 못하면 추락합니다. ‘위험한 길’은 이런 것입니다. 이런 위험한 길을 갈 때는 자기 욕망과 열정과 감정을 따르되 마음을 다스림으로써, 위험이 우리를 다리 밑으로 밀어버리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244]

무덤에서 끝난다고 해서, 인생이라는 것이 정말 아무짝에도 쓸 데가 없는 것이라 할 수는 없어요. 핀다로스의 시에 우리에게 영감을 주는 대목이 있어요. 퓌티아 경기의 씨름 대회에서 챔피언이 된 젊은이를 핀타로스는 이렇게 노래하고 있어요.

“광명의 아들이 아닌가?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랴! 인간은 꿈같이 덧없는 존재. 그러나 하늘의 선물인 태양이 비치면, 광명한 일광이 머무르면, 아, 아름다워라!”

“헌되도다,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 이런 끔찍한 말이 있지요? 하지만 이 말에서도 모든 것이 헛된 것만은 아니랍니다. 이런 말이 나오는 순간은 헛된 순간이 아니라 승리의 순간, 열락의 순간인 것이지요. 승리의 순간에 맞게 되는 이 완전성의 정점에 가해지는 악센트, 대단히 그리스적이지 않습니까? [248]

많은 영웅이 목숨을 내어놓지요. 그러나 신화는, 내어놓는 목숨에서 새 생명이 비롯된다는 메시지도 전하고 있어요. 중요한 것은 영웅의 목숨이 아니라 새 생명, 새로운 존재, 혹은 ‘육화(肉化)’의 길일 겁니다. [248]

젊은이들에게 세계는 더 만나야 하는 것, 더 살아야 하는 것, 더 사랑해야 하는 것, 더 배워야 하는 것, 더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신화가 필요하지요. [254]

아기에게는, 그 조그만 몸에서 나오지 않는 의도라고는 없어요. 말하자면 아기의 몸은 제 모든 의도를 뿜어내죠. 그래요, 삶이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아기의 삶은 생명의 충동으로 이루어져 있어요. 그런데 아기가 자라감에 따라 마음이 모양을 갖추어나갑니다. 즉 내가 원하는 이것은 무엇인가, 어떻게 하면 이것을 손에 넣을 수 있을까······. 이런 식으로 마음이 자라는 것이지요. [261]

어떤 젊은이가 모종의 장벽에 부딪쳤을 경우에는, 거기에 해당하는 특정 신화 대응물을 통해서 해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젊은이의 경우는, 문턱 넘기 의례와 관련된 사회 대응물을 찾아야 하는 것이지요. [262]

신화는 어떻게 하면 이 진짜 ‘자기’를 만날 수 있다고 가르칩니까?

신화가 암시하는 첫째 방법은 신화 자체, 또는 영적인 지도자나 스승을 따르라고 가르칩니다. (...)좋은 스승은 제자가 하는 양을 가만히 보면서 그 제자에게 무엇이 가능한가를 알아냅니다. 좋은 스승은 충고를 할 뿐 명령은 하지 않습니다.(...) 이따금씩 말을 해줌으로써 실마리가 될 만한 것을 던져주어야 합니다. 만일에 그런 말을 들려줄 스승이 없으면 스스로 창안한 방법으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즉 자기에게 어울리는 바퀴를 발명해야 하는 것이지요.

또 하나 좋은 방법은, 자기가 다루고 있는 문제와 같은 것을 다루고 있다 싶은 책을 이용해서 배우는 겁니다. 책 역시 실마리를 던져줄 수 있습니다. [263]

영웅은 기왕에 살던, 자기에게 버릇 들어 있는 곳, 일정한 수준의 힘을 행사하던 곳을 떠나 한 세계와 다른 세계 사이의 문턱에 이릅니다. 이 문턱이 말하자면 호수나 바다의 가장자리이지요. 이 문턱에서 심연의 괴물이 영웅을 기다립니다. 여기에서부터 두 가능성이 생깁니다. 요나 이야기 같은 유형의 모티브에서 고래는 영웅을 삼키지만, 영웅은 고래의 뱃속이라는 심연에서 되살아나옵니다. 즉 죽음과 부활의 테마가 변형된 것이라고 볼 수 있지요. 바로 여기에서 의식적인 인격은 통제 불가능한 무의식적인 에너지의 충전을 받습니다. 여기에서부터 영웅은 시련을 겪지 않으면 안 됩니다. 시련을 겪으면서 무서운 밤바다를 여행해야 합니다. 이 무서운 밤바다 여행에서 이 어둠의 에너지를 극복할 방법을 깨닫게 되면 마침내 새 생명으로 부활하는 것이지요. [269]

우리 의식이라고 하는 것은 말이지요, 사고를 하기는 하되 가게를 운영하는 것처럼 사고를 해요. 하지만 의식은 우리 인간 존재의 부수적인 기관일 뿐 이예요. 그러므로 이 의식이 우리의 존재를 통제하게 하면 안 됩니다. 의식은 기가 한풀 꺾인 상태에서 우리 인간성을 섬겨야 하는 존재이지, 우리의 주인 노릇을 해도 좋은 존재는 아닌 것이지요. [270]

이 세상에는 자기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사람이 너무 많아요. 이 세상에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지, 삶의 가치를 어디에 두어야 할 것이지를 남의 말에 따라 결정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요. [270]

나날이 경제적 관심과 육신의 안락에 갇히지 않은, 진짜 삶의 가치를 인식할 수 있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든 이런 능력이 있어요. [272]

신화에는 개인이 지닌 완전성과 무한한 힘의 가능성을 깨닫게 하고 그 세계를 날빛 아래도 드러내는 힘이 있어요. 괴물을 죽인다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어둠을 죽인다는 것입니다. 신화는 우리를 사로잡되, 우리 심층에 있는 것을 거머쥡니다. [272]

우리 자신을 구하면 세상도 구원됩니다. 생명력이 있는 인간의 영향력이 다른 사람들에게 생명을 부여한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영혼이 없는 세계는 황무지입니다. 사람들에게는 무엇 무엇을 바꾸고, 법을 바꾸고 하다 보면 세상이 변할 것이라는 생각이 있는데, 천만에요! 어떤 세상이든지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세상은 나름대로 유효합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여기에 생명을 부여하는 일입니다. 생명을 부여하기 위해서는 그 생명이 우리 안 어디에서 나왔는가를 알아내어야 하빈다. 연후에 우리 자신을 튼튼한 삶을 사는 겁니다. [273]

→ 나와 사람들이 갑자기 극적으로 변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나의 시각을 조금만 바꾸어도 세상은 달리 보일 수 있다. 변하지 않는 세상을 원망하기 보다는 내가 가지고 있는 틀에 대해 좀 더 집중해 보는 시간들이 우리에게는 필요하다.

심리학적으로 말하자면, 용은 다른 것이 아니라 자아에 속박된 ‘자기’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용 우리에 갇혀 있어요. 분석 심리학은 용을 쳐부수고 무너뜨림으로써 우리를 더 넓은 관계의 마당으로 이끌어내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궁극적인 용은 우리 안에 있어요. 우리를 엄중히 감시하고 있는 우리의 자아, 이게 바로 용입니다. [273]

우리가 욕망하는 것, 우리가 믿으려 하는 것, 우리가 다스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우리가 사랑하려는 것, 우리를 옥죄고 있다고 생각되는 것······ 이게 바로 자아랍니다. 이건 아주 조그만 것일 수도 있는데도, 어떨 때는 우리를 아주 꼼짝 못하게 합니다. 이웃의 말에 따라 행동하다 보면 조만간 꼼짝 못하게 되는 상황이 옵니다. 이 경우 이웃이 바로 우리의 내면에 비치는 용일 수 있어요. [273]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실뿐인데도, 우리는 우리를 구해줄 재물, 우리를 구해줄 권력, 우리를 구해줄 사상(思想)을 찾아 엉뚱한 곳을 헤매지요.

그 실이라는 게 찾기가 쉬운 게 아닙니다. 그러니까 실을 찾는 데 필요한 실마리가 될 만한 것을 가르쳐줄 사람이 옆에 있으면 좋은 거지요. 선생님 소리를 듣는 사라들이 해야 하는 일은 사람들이 이 아리아드네의 실을 찾을 수 있게 도와주는 일입니다. [275]

스승이 할 수 있는 것은 암시입니다. 스승 되는 사람은 등대와 같지요. “ 이 너머에는 암초가 있으니까 키를 똑바로 잡아라, 저 너머에 해협이 있다”, 이렇게 가르치는 등대와 같지요. 젊은 사람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가능성을 암시하는 ‘본’을 만나는 일입니다. [276]

서구인들은 ‘나’ 안에 잠재해 있는 삶의 과녁이자 이상을 살지, 절대로 남의 안에 있는 가능성을 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나는 이것이 위대한 서구적 진실이라고 믿어요. 우리가 각기 나름대로 독특한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가 만일 세상을 향해 무엇인가를 줄 수 있을 때도, 주어지는 것은 어느 누구의 것도 아닌, 바로 우리 개개의 경험과 우리 개개인이 지닌 잠재력의 발현이 되는 겁니다. 그러나 동양의 전통적인 사회, 거의 모든 전통 사회를 보면 개인은 기계로 찍어낸 과자 같아요. 이런 사회 구성원의 의무는 정확한 용어로 정확하게 정의되어 부과된 것이기 때문에 여기에서 벗어날 도리가 없지요.

영적인 문제의 도움을 받으러 스승을 찾아갈 경우, 이 스승은 그 제자가 전통적인 길 어디쯤에 와 있는지, 다음에는 어디로 가야 할지, 거기에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도 압니다. 그러면 스승은 무엇을 주는고 하니, 바로 자기가 구상한 바를 일러줍니다. 그러니 제가가 스승 비슷하게 될 수밖에요? 서구의 교수방법은 이와 판이하게 다릅니다. 우리는 학생들에게 그들 나름대로 구상하게 하고 그렇게 구상한 방향으로 발전하도록 인도해주지요. 그러니깐 학생은 자기 나름의 자기 길을 찾아야 하지요. 그러니까 그 길은, 자기만의 독특한 경험을 향한 잠재력, 다른 사람은 체험해보지 못한 것, 다른 사람에 의해서는 체험될 수 없는 것일 수밖에 없지요. [277]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면 인생은 전처럼 다시 즐거워집니다. 죽음을 받아들여야, 삶의 반대 개념으로서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삶의 한 측면으로서의 죽음을 받아들여야, 우리는 무조건적인 긍정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삶이라고 하는 것은 어차피 죽음으로, 죽음의 순간에 끝나는 법입니다. 공포를 정복하면 용기 있는 삶의 길이 열리지요. 모든 영웅이 경험하는 모험 중 아주 중요한 통과의례는 바로 공포의 극복입니다. 공포가 극복되어야 비로소 영웅적인 업적의 성취가 있는 거지요. [278]

“죽기에 좋은 날이다!”, 이겁니다. 이게 그들의 구호(口號)였지요. 죽기에 마침 좋은 날이라고 생각하는 인디언에게 삶에의 집착이 있을 리 없지요. 이게 바로 신화가 전하는 대단히 중요한 메시지라고 할 수 있어요. 나 자신을 잘 알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만, 지금 내가 지니고 있는 이 모습은 ‘나’라는 존재의 궁극적인 모습이 아니에요. 우리는 우리가 이미 성취한 자기성(自己性)을 끊임없이 버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279]

→ 결국 죽는다는 것은 나를 끊임없이 버리는 것을 말하는 것이구나. 나를 버리는 것에 대 한 두려움이 없어야 긍정을 체험할 수 있고 그래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구나.

니체는 이 책에서 일종의 우화 수법으로 이른바 ‘영혼의 세 가지 변모’에 관한 이야기를 합니다. 그 첫 번째가 낙타
의 변모, 즉 어린이와 소년의 변모입니다.
낙타는 무릎을 꿇고, “내게 짐을 실으라” 고 말합니다. 책임 있는 삶을 살
기 위해서는 사
회가 요구하는 교육과 수업을 받아야 하는 복종의 시절이 있는 법입니다. 낙타가 무릎을 꿇는 것은
바로 이것을 말합니다.
짐이 실리면 낙타는 일어나 비틀거리면서 광야로 나가는데, 낙타는 여기에서 사자로 변모
합니다. 등짐이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사자의 힘은 그만큼 강해집니다. 이 사자가 해야 하는
일은 용을 죽이는 일인
데, 용의 이름은 ‘그대의 미래’입니다. 이 괴물의 비늘이라는 비늘에
는 하나도 빠짐없이 ‘그대의 미래’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지요. 그 중에는 4천 년 전에 씌여
진 것도 있고 바로 오늘 아침에 씌어진 것도 있습니다. 낙타, 즉 아이는
‘그대의 미래’에 사
로잡혀 있는 반면에, 사자, 즉 청년은 이것을 벗어던지기 때문에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 것입니
다.
그런데 용이 완전히 제압되면, 다시 말해서 ‘그대의 미래’가 완전히 극복되면 사자는 다시 그 사나운 본성을 버
리고 아이로 변모를 합니다. 흡사 굴대를 떠난 바퀴처럼 말이지요. 이
제 이 아이에게는 복종해야 할 법이 없습니
다. 역사적인 필요에서 제정된 법률도 없고, 지
역 사회를 위해 제정된 법률도 업습니다. 들꽃처럼, 그저 충동에 따
라 살기만 하면 되는 것
이지요. [284]

아이의 자기 성취를 방해하는 것이면 모두 다 아이가 버려야 할 ‘그대의 미래’이지요.(...)
청년기는 자기 발견의 시대, 사자로 변모하는 시기입니다. 이 청년기에는 법률이 적용되기는 하되, 강압적인 ‘그대의 미래’에 복종시키는 방향으로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의지를  갖게 하는 방향으로 적용됩니다. [284]

진짜 행복한 상태, 그윽한 행복의 상태를 말합니다. 이렇게 행복을 관찰하는 데는 약간의 자기 분석 기술이 필요합니다. 무엇이 나를 행복하게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나오면, 남이 뭐라고 하건 거기에 머물면 되는 겁니다. 내 식으로 말하자면, ‘천복을 좇으면 되는’ 겁니다. [287]

우리에게 맡겨진 역할을 가볍게 생각하거나 무시하는 일은 악마와 결혼하는 것만큼이나 위험한 일이지요. 그러나 희망도 있어요. 우리를 부름으로써, 우리에게 구원의 손길을 던짐으로써, 여행을 상상 밖의 영광으로 승화시키는 노인은 도처에 있으니까요. 그런 여행을 떠나지 않고 집에 가만히 있으면, 어머니의 자궁 속에 가만히 들어앉아 있을 수 있으면 좋을 텐데요. 좋기는 하겠지요. 그러나 그러면, 자기 나름의 모험에서 공급되는 삶의 에너지가 없기 때문에 생명은 곧 말라버려요. [292]

신화는 우리에게, 어떻게 하면 그 고통을 직면하고, 이겨내고, 다른 것으로 변용시킬 수 있는가를 가르칩니다. [296]

부처가 된 석가는 고통에서 헤어날 길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가 말하는 피난처가 바로 니르바나(涅槃)인데, 이 열반은 천국 같은 어떤 ‘곳’이 아니라, 욕망과 고통을 해탈한 마음의 심리적 상태를 말하지요. [296]

“고통에서 놓여나고 싶거든 고통이 곧 삶이라는 것을 부정하지 말고 용감하게 인정하세요. 우리는 오로지 고통을 통해서만 고상한 존재가 될 수 있답니다. [297]

우리가 우리 삶의 어떤 한 측면에 대해서 만이라도 아니라고 할 수 있으면 만사는 해결됩니다. 더구나 우리가 처한 상황이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우리에게 동화시키기가 까다로우면 까다로울수록 이것을 성취한 인간은 그만큼 더 위대해지는 거랍니다. 믿어지지 않겠지만 우리가 삼켜버리는 악마가 그런 우리에게 권능을 부여합니다. 삶의 고통이 크면 클수록 돌아오는 상(賞) 또한 그만큼 큽니다. [298]

당신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왜냐하면 설사 하느님이 그렇게 했다고 하더라도 그 하느님은 당신 안에 있는 하느님이기 때문이다. 당신 자신이 바로 당신의 창조주라는 것을 잊으면 안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일이 생기게 한 것이 당신의 내부 어디쯤인지 알아야 한다. 이걸 알아내면 당신은 이것과 함께 살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당신 삶의 일부로 즐기면서 사는 것도 가능하다. [298]

→ 모든 일들이 나로 인해 비롯됐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그 원인을 남에게 돌리면서 시간을 낭비하지도 않을 것이고 엉뚱한 곳에서 그 해결책을 찾기 위해 애쓰지도 않을 것이다. 어쨌든 변하지 않는 것은 내가 내 삶의 주인이고 내 안의 신이 나에게 가장 좋은 답을 줄 것이라는 것이다.

삶의 궁극적인 배경은 우연입니다.(...)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도 이걸 통해서 와요. 중요한 것은 이걸 탓하거나 이걸 설명하려고 하지 말고 여기에서 생기(生起)하는 삶과 대결하는 겁니다. 어디에선가 전쟁이 터지면 젊은이들은 징집을 당하겠지요. 그러면 바로 이 우연지사와 함께 5~6년은 족히 썩어야 하겠지요. 이런 경우에 내가 충고해주고 싶은 것은, 징집 당했다고 여기지 말고, 자발적으로 참여한 것으로 ‘여기라’는 겁니다. 이렇게 하면 우리 의지의 참여를 유도하는 것도 가능해집니다. [299]

우리가 이르러야 할 궁극적인 목적지는 바로 우리 안에 있어요. (...) 우리 안에 정점이 있다는 건 거의 확인된 셈입니다. 우리는 이 정점을 찾아내어 우리 의지로 장악해야 합니다. 이 중심을 잃으면 긴장이 생기고 긴장이 생기면 우리의 주의는 분산됩니다. [299]

니르바나는 인생이라는 소용돌이 바로 그 안에 있는 것이지 밖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니르바나 상태는, 욕망이나 공포나 사회적인 인연에 쫓기면서 살지 않게 될 때, 자기 안에서 내적인 평화의 중심을 발견하고 그것을 선택하는 행위를 통해 달성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중심에서 나온 자발적인 행위, 이것이 바로 보살의 길, 말하자면 이 세상의 슬픔에 기꺼이 참여하는 삶인 것이지요. 여기에 이르면 우리는 어떤 것에 붙잡힌 상태를 벗어납니다. 욕망, 공포, 의무 같은, 우리를 붙잡는 것에서 우리가 바로 우리 자신을 풀어놓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을 성취한 사람, 이것이 바로 이 세상의 통치자입니다. [300]

깨달음이란, 만물을 통해 영원성의 찬연함을 인식하는 일이지요. 이 만물이라는 것은 이승에서는 선한 것으로 판별될 수도 있고 악한 것으로 판별될 수도 있는 것인데, 바로 그 이면을 꿰뚫어보아 버리는 것이지요. 여기에 이르면 속세적 욕망이나, 잃은 것에 대한 두려움에서 완전히 놓여납니다. 예수는, “비판을 받지 않으려거든 남을 비판하지 말라”고 합니다. 블레이크는, “지각의 문전이 깨끗하면 만물이 그 자체로 영원하다는 것을 보아낼 수 있다”고 씁니다. [301]

사람은 다 삶의 경험에서 기쁨을 느끼는 나름의 방법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은 마땅히 그것을 인식하고 그것을 계발하고, 그것과 사귀어야 합니다. [301]

신화는 시, 신화는 메타포일 뿐이에요. 신화가 궁극적 진리에 버금가는 진리라는 말은 신화를 정말 잘 나타낸 말입니다. 이게 왜 ‘버금’이냐 하면, 궁극적인 것은 결국 언어로 드러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언어로 드러난 진리 중에는 으뜸이라는 뜻이지요. 신화의 진리는 말씀 너머, 이미지 너머, 불교에서 말하는 전륜의 테 밖에 있어요. 신화는 우리의 마음을 이 테 밖으로 보냅니다. 이 테의 밖에 있는 것은 앎의 대상은 될망정 드러냄의 대상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궁극적 진리에 버금가는 진리인 것이지요. 신화 자체의 신비와 우리 자체의 신비를 알고 체험하면서 사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이런 앎과 체험은 우리 삶에 광휘를, 새로운 조화를, 새로운 빛을 더합니다. 신화의 문맥에서 생각하면 우리로서는 도저히 피할 수 없는 눈물과도 화해할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겉보기에는 부정적인 것 같은 우리 삶의 순간의 삶의 측면에서도 긍정적인 가치를 읽어낼 수 있게 됩니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우리 삶의 모험을 진심으로 반길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지요. 영웅의 모험. 즉 살아 있음의 모험이지요. [303]

6. 조화여신(造化女(神)의 은혜

아버지를 찾는다는 것은, 우리의 개성과 운명을 찾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어요. 개성은 아버지에게서 물려받고, 몸과 때로 마음은 어머니에게서 물려받는다는 말이 있어요. 그런데 그 개성이라는 게 신비로운 겁니다. 개성이라는 것은 곧 우리의 운명이니까요. 그러니깐 아버지 탐색으로 상징되는 이 운명의 탐색을 떠나는 거지요. [307]

영어에는 ‘아버지와 화해[atonement]’라는 말이 있어요. 그런데 이 화해는 곧 ‘하나 되기[at-one-ment]'랍니다. [307]

자기 삶에 집착한 나머지 남의 먹거리가 되어주지 않는 것도 삶을 거부하는 굉장히 부정적인 사고방식이지요. 그렇게 하면 생명의 흐름이 끊겨버립니다. 이 흐름을 타는 것은 매우 신비스러운 체험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희생함으로써 먹거리가 된 동물에게 감사 기도를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고 언젠가는 우리 자신을 주어야 할 거예요.

우리가 곧 자연이고 자연이 곧 우리라는 것이군요. [319]

세 번째 중심은 배꼽 높이입니다. 이곳은 의지력의 중심이기도 하지요. 이 의지력은 긍정적으로 작용하면 자기 통제와 자기 성취가 됩니다만, 부정적으로 작용하면 정복, 파괴가 됩니다. 이것이 바로 세 번째의, 공격적인 기능입니다. [319]

누가 신인지 아세요? ‘우리’가 곧 신이에요. 이 모든 신화의 상징이 수다스럽게 말하는 게 바로 이것이라고요. ‘거기’에 매달려, 모든 것은 ‘거기’에만 있는 것을 생각할 수 있어요.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예수를 생각하면 ‘거기’에서 그가 받은 고통을 떠올리고는 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고통은 우리 안에서 일어났던 거예요. 우리가 영적으로 거듭나 보았던가요? 우리가 언제 동물의 근성을 죽이고 자비로운 인간으로 화신해본 적이 있던가요? 그게 처녀와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처녀가 낳은 것은 정신이에요. 그건 영적인 탄생을 말하는 거지요. 처녀는 귀로 들어간 말씀으로 잉태를 한 거예요. 말씀이 빛줄기로 들어갔다는 것이군요. [320]

예수는 영적으로 태어난 것이지 육체적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영웅이나 반신(半神)은 자비로움이 육화된 존재로 태어나지, 성적인 욕망의 소산, 혹은 종의 보존을 위한 소산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건 어떤 의미에서는 두 번째 탄생이에요. 두 번째 태어남이란, 중심인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삶을 살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322]

이 세상 만물의 존재가 비롯된 곳은 남성과 여성이 분화되지 않은 곳, 그러니까 성(性) 너머에 있어요. 그곳은 존재와 비존재를 초월해 있어요. 그러니까 존재하는 곳인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곳입니다. 그러니깐 우리의 생각과 마음의 범주를 훨씬 초월해 있는 것이지요. [332]

만일에 예수가 우리 존재의 근원이라면 우리 모두가 곧 예수의 생각이자 마음인 것이지요. 실제로 그는 육화(肉化)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333]

중국의 음양(陰陽) 이미지를 아시지요? 원 안에 검은 물고기 비슷한 형상과 흰 물고기 비슷한 형상이 서로 꼬리를 물고 있는 이미지입니다. 그런데 검은 물고기 비슷한 형상을 자세히 보면 가운데 흰 점이 하나 있어요. 물론 흰 물고기 비슷한 형상에도 검은 점이 하나 있고요. 바로 이 점이 있기 때문에 음양은 상호 작용을 하는 겁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든, 참여하지 않으면 상호 작용을 일으킬 수 없어요. 하느님을 ‘절대타자(絶對他者)’로 보는 관념이 엉터리인 까닭이 여기에 있어요. ‘절대 타자’와 나 사이에는 상호작용이 있을 수 없지요. [333]

의례의 집전은 곧 신화의 ‘연출’입니다. 우리는 의례를 통해서만 신화적인 삶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사는 방법을 배우는 것은 바로 그런 체험에의 참여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335]

→ 의례는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의식을 변화시켜주고 그것을 구체화 시키는 그 장 이 되어주는 것이구나.

신화는 우리에게 단서를 제공하고 있어요. 신화는 우리에게 약도(略道)까지 그려주고 있어요. 우리 주위에는 이런 약도가 얼마든지 있어요. 그런데 이 약도라고 하는 게 다 같지는 않아요. [335]

우리가 우주로 나갈 때 가져가는 것은 바로 우리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변하지 않으면 우주도 우리를 변하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주에 관한 우리의 생각이 깨달음에 이르는 단서가 되기는 합니다. [336]

우리와 이 광막한 우주는 하나라는 느낌을 경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도 이 우주에서 벌어지는 이 엄청난 변화에 참가하고 있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그런 인식과 체험이 바로 여기에서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이군요. [337]

7. 사랑과 결혼 이야기

오로지 마음이 움직이는 데서만 태어나거나 시작될 뿐, 사랑은 다른데서는 태어나지도 시작되지도 않는다. 두 눈이 마음에서, 두 눈과 마음이 기쁨을 누리는 덕에, 두 눈과 마음이 그리 하기를 바라는 덕에, 사랑이 태어난다. 진정한 사랑에 빠진 자는 사랑이, 가슴과 눈과 눈에서 태어난 온전한 정성임을 알기 때문에 사랑이 다름 아닌 희망임을 알기 때문에 서둘러 연인에게로 달려간다. 그러면 눈은 꽃을 피우고, 가슴은 꽃을 성숙하게 하는데, 이 성숙한 열매에서 여무는 씨앗을 우리는 사랑이라고 한다. -귀로 드 보르네이유 [[339]

아가페적 사랑은 이웃을 사랑하라, 하는 식의 영적인 사랑이에요. 이웃이 누구이든 전혀 상관없이 사랑해야 하니, 이것도 개인적인 것일 수 없어요.

결국 에로스적 사랑이 충동에 따르는 것이니까 개인적인 열정이라고 할 수 없듯이, 아가페적 사랑도 사랑이라기보다는 자비에 가깝겠군요. [341]

자기 천복을 따를 때는, 어떤 사람의 어떤 협박에도 두려워하지 않을 자신이 있어야 합니다. 무슨 일이 생기든지 ‘내’ 삶과 행동은 나름의 가치를 지녀야 하는 겁니다. [347]

사랑은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순간은 인생에서 고귀한 순간이지요. [349]

“이 세상에 내 세상도 하나 있어야겠다. 내 세상만 가질 수 있다면 구원을 받아도 좋고 지옥에 떨어져도 좋다.”

“나의 사랑이 있어야겠다. 나의 인생이 있어야겠다.”, 이런 뜻이겠지요.

그렇지요. “이거야말로 내 인생이다, 내 인생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고통도 달게 견딜 수 있다”, 이런 거지요.

용기가 없으면 생각도 못한답니다. [349]

서구 선진 사회는, 개인을 살아 있는 실제로 인식하고 존중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그러므로 사회의 기능은 반드시 개인을 기를 수 있어야 합니다. 결국 개인을 꽃피게 하는 것은 사회의 기능이지, 사회를 꽃피게 하는 것이 개인의 기능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350]

그들에게는 사랑 놀음을 삶과 사회에 조화시키는 규칙이 있었어요. 그러니까 어떤 종류의 사랑 놀음이든, 의무와 권리를 규정하는 규칙의 체계를 따랐던 겁니다. [352]

사랑을 수용할 만한 다정한 가슴은 곧 ‘자비’를 수용할 만한 마음인 것이지요. 함께 고통을

받는다는 의미지요. [353]

눈과 눈의 만남을 통하여 사랑은 가슴을 얻는 거지요. 눈과 눈의 만남을 통하여 사랑이 가슴을 얻는 것은, 눈이 늘 가슴을 염탐하기 때문인 거지요. [355]

상처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을 사랑하는 데서 생긴 고통과 고뇌입니다. 이 세상에서 그 상처를 낫게 할 수 있는 사람은 고통과 고뇌를 안긴 사람뿐이라는 뜻입니다. [356]

성배는, 최우의 만찬 자리에 있던 술잔,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의 피를 받은 그 술잔을 말합니다.

성배의 기원에 대해서는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어요. 옛날의 어떤 작가는 이 성배를, 중립적인 천사들이 하늘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쓴 적이 있지요. 아시겠지만, 하늘에서 하느님과 악마 사이에, 선과 악 사이에 전쟁이 터졌을 때 어떤 천사 무리는 하느님을 편들고 어떤 천사 무리는 악마를 편들었다고 하지 않아요? 그런데 성배는 바로 이때 중립을 지킨 천사들이 가져온 것이라는 이야기예요. 이럴 때의 이 성배는 한 쌍의 대극(對極)의 사이, 곧 욕망과 공포의 사이, 선과 악의 사이로 난 영적인 길을 상징하는 것이지요.

성배의 이야기의 테마는 인간의 내적 관심이 떠나버린 땅이나 나라를 그 무대로 합니다. 인간의 내적 관심이 떠나버린 땅, 곧 황무지 아닙니까? 황무지의 기본적인 성격이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살기는 살되, 죽은 삶을 살고 있는 땅, 자기 삶에 대해 아무 용기도 없이 사는 땅, 남이 하는 대로, 남이 시키는 대로 하면서 사는 땅이 바로 항무지입니다. [356]

황무지의 거죽은 실제성을 표상하지 못합니다. 황무지 사람들은 죽은 삶을 살기 때문에, “나는 평생을, 하고 싶은 일은 한 번도 해보지 못하고 살았다. 나는 시키는 대로만 하고 살았다”, 이런 말을 합니다. [357]

→ 나란 존재가 어떤 존재인지 평생을 살면서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채 그저 남들의 시선에 이끌려 삶의 대극사이를 오가며 자신의 중심을 한 번도 표현하지 못한 사람들이 황 무지 사람들이 아닐까...

성배는, 뭐라고 할까······. 참 삶을 산 사람들이 획득한 것, 혹은 깨달은 것을 표상합니다. 성배는 결국, 인간 의식이 가장 고귀한 영적 잠재성의 성취를 상징하는 것이지요. [358]

영적인 삶이라는 것은 인생의 꽃이자 향기인 동시에, 개화(開化)이자 성취이자, 초자연적인 존재에 의해 주어진 미덕이 아니라는 겁니다. 따라서 삶을 삶답게 하는 것은 충동이자 초자연적인 권위에서 내려오는 율법이 아닌 것입니다. 이게 바로 성배 전설의 상징적인 의미인 것이지요. [358]

성배는, 자기의 의지력으로 사는 삶, 자기 충동의 체계로 사는 참 삶을 상징합니다. 선과 악, 빛과 어둠 등의 대극 사이로 난 길로 우리를 이끄는 것은 바로 이 참 삶인 겁니다. [359]

우리 삶의 모든 행동은 그 결과에서는 한 쌍의 대극을 낳는다는 겁니다. 가장 바람직한 삶은 빛을 향하여, 남을 이해함으로써 남의 고통에 동참하는 자비를 통해서 가능해지는 화합의 관계를 향하여 나아가는 삶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배가 의미하는 것, 이것이 바로 중세의 로망스가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인 겁니다. [359]

융 박사는 “영혼은, 그 짝을 찾지 않고는 평화를 얻을 수 없다. 그런데 그 짝은 바로 우리 안에 있다”고 한 적이 있습니다. 중세의 낭만적인 전설이 말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까?

바로 그것입니다. 신화가 말하는 것도 바로 그겁니다. [360]

→ 어쩌면 내면의 짝을 먼저 찾고 그 다음에 실질적인 짝을 찾는 것이 순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감상(感傷)은 폭력의 메아리랍니다. 그건 살아 있는 표현이 아니지요. [360]

낭만적인 이야기는 우리에게, 우리가 두 세계에 걸쳐 살고 있다고 말하고 있어요. 그런데 우리는 우리 세계에 살고 있는가 하면, 밖에서 강요하는 또 하나의 세계에 살고 있기도 하지요. 문제는 우리가 이 두 세계를 조화 있게 상호 관계시킬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나’는 이 모듬살이로 태어났으니까, 모듬살이라고 하는 울타리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모듬살이의 울타리에 살지 않겠다는 것도 우스운 일이지요. 왜냐, 살지 않으면 살아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죠.

그러나 이 모듬살이가 나에게, 이래라, 저래라, 이렇게 살아야 한다, 이렇게 간섭하고 나서는 것은 용납해서는 안 됩니다. 결국 우리는, 모듬살이의 기대에 어긋나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모듬살이가 용납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우리 나름의 삶의 모양을 빚어가면서 살아야 합니다. 삶의 어려움 중 하나는 모듬살이가 베풀어주는 마당 안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 삶을 실제로 버티어주는 것이 모듬살이가 될 때 이 삶은 그만큼 더 어려워집니다. [361]

결혼은 우리가 참가하는 엄연한 약속입니다. 우리의 결혼 상대는 글자 그대로 우리의 잃어버렸던 반쪽입니다. 이렇게 두 개의 반쪽이 모임으로써 하나가 되는 것, 이게 결혼입니다. 그러나 사랑 놀음은 그게 아니지요. 사랑 놀음은 쾌락을 겨냥한 관계입니다. 쾌락이 끝나면 사랑 놀음도 끝납니다. 그러나 결혼은 평생의 약속입니다. 평생의 약속이니까 우리 삶의 가장 큰 관심사일 수밖에 없지요. 만일에 결혼을 하고도 그 결혼을 가장 큰 관심사로 치지 않는 사람은 결혼한 사람이 아니지요. [365]

어떤 시련이나 고통이 따르더라도 진심을 다하는 것. 이러한 마음가짐에서 비롯되는 속이지 않는 태도, 약점을 따지지 않는 태도······. 이런 걸 성실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365]

결혼함으로써 사람은 자기 개인을, 그 개인보다 더 귀한 것에다 복속시킵니다. 진짜 결혼 생활, 진짜 연애는 바로 이러한 관계 안에 있어요. 우리도 바로 이런 관계 안에 있어야 하는 겁니다. [365]

음양의 상징인 태극(太極)과 같습니다. 여기에는 ‘내’가 있고, 여기에는 ‘그’가 있고, 그래서 여기에는 ‘우리’가 있는 겁니다. 가령 ‘내’가 아내에게 헌신한다면 그것은 아내라고 하는 여성에게 헌신하는 게 아닙니다. ‘나’와 아내가 이루고 있는 관계에 헌신하는 거죠. 상대에 대한 미운 감정의 노출? 이건 번지수가 틀린 거예요. 인생은 관계 속에 들어 있어요. 우리의 인생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우리 역시 이런 관계 안에 있어야 하는 겁니다. 그 관계가 바로 결혼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결혼과 연애의 차이점이 분명해집니다. 연애는 바람직한 관계 속에서, 두 사람의 동의 아래 한동안 계속되는 두 사람의 삶을 말합니다. [366]

결혼은 우리의 동일성, 즉 한 사물에 두 측면이 있음을 상징적으로 인식하게 하는 장치입니다. 그것을 인식하지 못한 상태에서의 결혼은 진짜 결혼의 초보 같은 상태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366]

사랑은 곧 신의 임재(臨在)입니다. 사랑이 결혼보다 상위 개념인 까닭이 여기에 있어요. 이게 곧 음유시인들의 생각이기도 했고요. 신이 사랑이라면 사랑은 곧 신이 아닙니까?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사랑은 고통을 모른다”고 했어요. 이 말은 트리스탄의 “사랑 때문이라면 지옥의 고통도 기꺼이 받겠다”는 말과 다르지 않아요. [370]

사랑의 고통이란 다른 고통이 아니라 곧 삶의 고통입니다. 고통이 있는 곳에 삶이 있는 거죠. [370]

사랑은 인생의 발화점(發火點)이지요. 인생이라는 게 슬픈 것이기 때문에 사랑도 종국은 슬픈 겁니다. 사랑이 깊으면 괴로움도 깊은 법이지요. [373]

8. 영원의 가면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 때면 우리 마음속에서도 전쟁이 터집니다. 우리가 내릴 가능성이 있는 결정은 네댓 가지나 됩니다. 물론 내 마음속에 있는 가장 힘센 신의 영향력이 바로 나의 결정을 주도하게 되겠지요. 그 힘센 신이 잔인하다면 나의 결정은 물론 잔인할 테지요. [376]

내게는 삶의 경이에 대한 경험이 있어요. 내게는 사랑에 대한 경험이 있어요. 나에게는 증오의 경험도 있고, 남의 턱주가리를 부셔놓고 싶다는 악의의 경험도 있어요. 상징의 이미지 화(化)와 관련된 관점에서 볼 때, 이 모든 것은 내 마음속에서 기능하는 서로 다른 힘들입니다. [377]

우리가 뛰어넘어야 하는 것은 우리의 상상력이 만들어내 예수의 이미지입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어떤 신의 이미지는 결정적인 장애, 궁극적인 장벽이 되는 수가 많아요. 자기의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은, 자기 나름의 소아병적 생각에 집착해 있는 사람은, 하느님에 대한 어마어마하게 큰 체험,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것보다 큰 체험이 접근해오는 순간에는 자기 마음속에 있는 이미지에 매달림으로서 거기에서 도망쳐버리려고 합니다. 이걸 사람들은 신앙으로 오해하고는 하지요. [379]

아시다시피 우리의 영혼은 서로 다른 중심, 혹은 서로 다른 원형적인 경험의 단계를 지나 상승합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기와와 탐욕 같은 기본적인 동물적 경험단계에서 시작하여 성욕의 단계를 지나 물질적인 것을 초월하는 단계를 이행합니다. 이런 단계가 바로 경험이 우리에게 에너지를 부여하는 단계인 겁니다.

그러나 이런 단계를 거치고, 우리 마음의 중심이 의식되기 시작하여 성욕의 단계를 지나 물질적인 것을 초월하는 단계로 이행합니다. 이런 단계가 바로 경험이 우리에게 에너지를 부여하는 단계인 겁니다.

그러나 이런 단계를 거치고, 우리 마음의 중심이 의식되기 시작하고, 다름 사람, 혹은 다른 피조물에 대한 자비에 눈뜨게 되면 문득 ‘나’와 ‘타자’가 사실은 둘이 아니라 한 생명을 나누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완벽하게 새로운 영적인 삶의 단계가 열립니다. 세계를 향한 마음의 열림, 이것이 바로 상징적·신화적 의미의 처녀 수태입니다. 이 처녀 수태는, 건강, 자손, 권력, 향락 같은 물리적인 것만을 겨냥하던 인간적·동물적 삶이 영적인 삶을 잉태하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에 몇 가지 더 다루어둘 것이 있어요. 이러한 의미에서의 자비, 화합, 타자와의 동일성, 혹은 우리 마음에 들어와 자리 잡게 된 바람직한 자아 초월적인 원리와의 동일성 체험은, 종교적인 삶과 체험의 시작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 체험을 한 사람이라야 평생을 바쳐 궁극적인 존재에 대한 완벽한 경험의 길을 찾아나서 게 됩니다. 이 궁극적인 존재를 경험하는 단계가 되면 이 세상의 모든 형상이 허깨비로 보이게 됩니다. [380]

우리의 목표는 ‘자기’를 넘어서는 것, ‘자기’에 대한 모든 관념을 넘어서는 것, 이로써 자기라는 것은 불완전한 존재의 드러남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는 것이어야 합니다. [382]

누구든 말씀의 메시지를 삶 속으로 동화시킬 수 있으면 곧 그리스도와 동등해질 수 있다. [386]

자기 삶을 가슴으로 사는 삶의 단계에 올려놓은 사람에게는 다 그렇습니다. [387]

중요한 것은 자기 삶의 중심을 우주의 중심과 일치시키려는 노력이군요. [392]

신화적인 이미지를 통해서 말이지요. 이미지는 우리를 도와 우리 자신과 상징적인 힘의 동일시를 가능하게 합니다. 자기 자신과 범용해 보이는 어떤 대상의 동일시는 쉬운 것 같아도 사실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범용해 보이는 것에 깨달음의 촉매(觸媒)라는 가치를 부여하면 이때부터는 이 범용해 보이는 것이 상당한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393]

아무리 깎아봐야 풀은 줄기차게 자라니까요. 중심의 에너지가 이 풀과 같습니다. 성배 이미지, 무궁무진한 샘, 무궁무진한 근원의 의미가 바로 이겁니다. 중요한 것은 이 근원이 베푸는, 생명을 부여하는 기능과 이로써 이루어지는 존재입니다. 이 근원이 바로 우리 안에 있는, 삶이 샘솟는 한 점인데, 모든 신화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려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비교신화학(比較神話學) 시간이 되면 우리는 한 문화권의 이미지와 다른 문화권 이미지를 비교하곤 하는데, 이렇게 하다보면 이미지의 의미가 확연해지고는 합니다. 왜냐, 한 문화권의 이미지가 한 측면을 명백하게 표현하면, 다른 문화권의 이미지는 다른 측면을 명백하게 표현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 두 이미지는 서로를 보완하면서 설명하는 겁니다. [395]

우리는 신화 이미지를 메타포라고 부르지, 사실이라고 부르지는 않거든요. 신화 이미지는 우리의 내적 체험과 삶을 위한 메시지가 됩니다. 이 메시지를 받아들이면 신화 체계는 문득 우리의 개인적인 체험이 되는 것이지요. [396]

→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어도 사람들은 어떤 상황에 처해있느냐에 따라 신화를 달리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우리에게는 새로운 신화가 필요하지 않은 건지도 모른다. 지 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현실을 직시하는 눈이고 지금까지 우리 곁에 존재하고 있으면서 끊임없이 우리에게 얘기를 걸어오는 신화에 대한 관심이 그것을 우리 삶에, 내면에 직접 접목시켜 보려는 노력이 아닐까 한다.

어떤 사고 체계를 지닌 사람에게든 사고 체계 자체가 무한한 삶의 의미일 수는 없어요. 어떤 사고 체계에 만족하고, 이만하면 정리가 된 셈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장난꾸러기 신이 끼어들면 모든 것은 난장판이 됩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 자체가 바뀌면서 거듭 태어나게 되는 것이지요. [397]

영원이 지금 여기에 있다는 것입니까?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고 지금 여기에 있지요. 아니, 없는 데가 없다고 해도 마찬가지지요. 지금, 바로 이 자리에서 경험하지 못하면 천국에 가서도 경험하지 못합니다. 천국은 영원한 곳이 아니에요. 천국은 영속하는 곳일 뿐입니다. [404]

천국은 끝나지 않는 시간입니다. 끝나지 않는 시간과 영원은 달라요. 영원은 시간 너머에 있어요. 시간이라는 개념은 이미 영원을 나타낼 수 없어요. 이 현세적인 고통과 말썽이 오고가고 하는 곳은 영원이라고 하는 심오한 경험 저 너머에 있어요. 불교에는, 기꺼이 그리고 즐거이 이 세상의 슬픔에 동참하는 것과 관련된 중요한 개념이 있어요. 이 개념은, 시간이 있는 데엔 슬픔이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합니다. 이 슬픔은 우리의 온 존재를 뒤덮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삶의 참 모습입니다. [405]

영원이라는 것은,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지상적(地上的) 관계의 체험 속에서도 그 영원을 체험할 수 있는 겁니다.

나는 부모님도 잃었고 많은 친구도 잃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문득, 나는 그들을 잃은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내가 그들과 함께 하던 시간은 영원의 체험에 견주어질 만큼 소중했지요. 그렇다면 그들은, 영원의 체험을 통하여 아직도 나와 함께 하고 있는 셈입니다. [409]

→ 그들과 함께 했던 시간은 현재 내 곁에 다른 모습으로 머물러 있기에 함께 있다고 할 수 있고 이것이 영원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기에 우리는 더욱이 지금 이 순간을 잘 보 내야 하지 않을까...

아름다움은, ‘살아 있음’의 환희의 드러남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순간 순간의 삶이 그런 체험의 연속이어야 합니다.

이러한 체험에 견주면, 내일은 어떻게 될까, 이렇게 생각하는 건 별로 중요한 게 아닐 테지요.

‘이 순간’이 바로 우리에게는 아주 중요한 순간입니다. 모이어스 씨, 우리가 지금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은 우리의 주제인 존재를, 우리 나름의 표현법을 통해서 그려내려고 하는 일에 지나지 못합니다. [410]

인생을 살면서 당한 중요한 사건은 외견상으로는 우연히 일어난 것 같지만 사실은 일관된 구성에서 빠질 수 없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한 듯 보입니다. [411]

우리의 인생도 우리 안에 있되 우리는 잘 알지 못하는 어떤 의지에 의해 구성되고 계획되는 것이 아니냐는 겁니다. 우리가 살면서 우연히 만나는 특정인은 때로 우리 삶에서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의지는 우리 모르게 그 특정인을 중요한 인물로 인식하고 상당한 의미를 부여하는 게 아니냐는 겁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가 모르는 중에 만사가 만사의 구조를 결정함으로써 우리생의 만사는 하나의 교향악단처럼 아귀가 척척 맞아들어 갑니다. 쇼펜하우어는, 우리 인생은 한 사람이 꾸는 큰 꿈, 꿈속에 나오는 인물이 또 꿈을 꾸는, 말하자면 규모가 방대한 꿈이 아니겠냐는 결론을 내립니다. 그렇게 해서 그 본질상 우주의 의지라고 할 수 있는 한 개인 의지의 동기 부여에 따라, 만사가 만사와 빈틈없이 연결되지 않느냐는 겁니다. [412]

→ 삶은 우리가 집착을 내려놓는 만큼 우리에게 선물을 주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인생은 계획대로만 되지는 않는 것이기에 때론 그 계획이 빗나감으로 인해 더 나은 삶을 맞이할 수도 있다. 계획 없이 내가 끌리는 신화약도 하나를 지니고 흐르는 대로 간다면 어느새 나는 정교하게 잘 만들어진 길을 따라가며 나의 천복을 따라 살고 있지 않을 까...

나는 인생에 목적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인생은, 확대 재생산하고 존재를 계속하려는 충동을 지닌 원형질로 이루어져 있다는 게 내 생각입니다.

적어도 목적이 있는 인생은 완전한 인생이 아니라고 할 수 있어요. 왜? 서로 다른 목적이 복잡하게 얽힌다고 생각해보세요. 그러나 우리가 체현하고 있는 어떤 존재에는 잠재력이 있는데, 우리 인생은 바로 그 잠재력을 사는 것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겠지요. 그러면 누가 나에게, “그럼 당신은 그 잠재력을 어떻게 사오?” 라고 묻겠지요. 내 대답은 , ‘천복을 따르는 것’입니다. [412]

우리의 안에는, 우리가 중심에 이르렀을 때를 아는 어떤 것이 있어요. 우리가 바른 궤도에 들어섰는지, 혹은 궤도에서 이탈했는지를 아는 어떤 것이 있어요. 만일에 돈을 벌기 위해 그 궤도를 이탈한다면 그 사람은 인생을 잃은 겁니다. 중심에 머물기 위해 돈 버는 일을 포기한다면 그 사람은 얻은 겁니다.

중요한 것은 목적지가 아니다, 여행 그 자체이다······. [413]

카를프리트 그라프 뒤르크하임은, “여행을 하고 있는데, 그 목적지가 자꾸만 멀어지고 있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이때, 여행의 목적지가 바로 여행임을 깨닫는 수가 있다”는 말을 남기고 있어요. [413]

이 세상 도처에 왕국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그때까지 이 세상을 살던 방식을 버립니다. 이 버리는 순간, 이 순간이 바로 세상의 종말입니다. 이 세상의 종말은 미래의 어떤 순간이 아닙니다. 심리적인 변화가 오는 순간, 세계를 보는 방법이 바뀌는 순간이 바로 그 순간입니다. 이런 순간을 경험하면 이 세상은 물질의 세상이 아닌 빛의 세상이 될 겁니다. [414]

절정의 순간은 이 언어 밖에 없는 것, 이 한마디, “아······.”, 이 한마디 밖에 할 수 없는 데 있는 것이지요. [415]

3. ‘내가 저자라면’

두 번 읽기를 하니 처음보다 확실히 더 많이 이해가 가는 것 같다. 처음에는 너무 어렵게만 느껴졌던 캠벨에게 이제는 내가 조금씩 다가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이 책 전반부는 신화가 어떻게 태동되었고 신화가 우리 삶에 녹아들어가게 된 방식과 그것이 어떻게 작용하게 되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해서 우리 각자는 인식하고 있지 못하지만 신화의 영역에 어떻게 들어와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으로 점점 범위를 확장시키고 있으며 우리가 천복을 찾아야 되는 필요성과 그 방법에 대해 보여주고 있다. 후반부에는 이 세상을 살아갔던 그리고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관심을 갖게 되는 영원과 사랑, 그리고 결혼에 관한 이야기 등이 신화와 함께 이야기되고 있다.

좋았던 점은 내면으로의 여행에서 창조 신화를 서로 주고받으며 읽는 부분이다. 세계 도처에 있는 신화들이 어떻게 같은 맥락으로 이루어지고 있는지 직접적으로 알 수 있었기에, 이러한 부분들이 각 장마다 있었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대담 형식으로 책이 이루어져 있어서 흐름을 따라가기가 어렵지 않았고, 모이어스가 책을 읽으면서 가지게 되는 질문을 하는 것 또한 많은 의문을 풀 수 있게 해주어서 좋았다.
좀 더 설명되었으면 하는 부분은 이성이라는 개념이 신화에서 어떻게 작용하고 그것을 우리에게 어떻게 접목시켜 신화에 이성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지에 대한 부분과 3장에서 죄의식이 신화에 의해 닦여지는 부분이다. 짧게 설명은 되어 있지만 구체인 예시가 더 주어진다면 이해하고 적용하는데 더 수월할 것 같다.
캠벨은 책 안에서 신화의 네 기능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데 그 부분을 에필로그에 넣고 신화의 네 번째 기능인 교육적인 기능에 대해서는 각 장에 나와있는 주제의 교육적인 부분을 설명하여 신화와 함께 프롤로그 부분에 넣어준다면 신화의 중요함과 필요성을 더 강하게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이 책을 읽으면서 아쉬웠던 부분은 신화에 대한 필요성에 대해서는 충분히 납득이 되는데 그것을 현실에 구체적으로 어떻게 적용할 수 있으며, 그러기 위해서는 어떤 신화들을 접목해야 하는지에 대한 부분이 구체적으로 나와있지 않아 실제로 어떻게 적용할 것인지에 대해선 습득이 어렵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저자라면 신화를 삶에 대입시키는 현실에 적용하기와 같은 부분을 책 맨 뒤에 넣어 주는 것을 시도해 보고 싶다. 먼저 신화의 네 가지 기능에 대한 설명과 우리 삶에 대응하는 신화를 어떻게 찾을 수 있을지에 대한 방법적인 부분을 시작으로, 깨달음을 터득하기, 잠재력 찾기, 나의 천복을 찾기 위해, 배우자를 찾는 것 등과 같은 소항목으로 엮어 거기에 신화와 함께 현재 우리의 삶에 어떻게 연결시킬 것이지를 설명해 준다면 신화가 우리 삶에 얼마나 필요하며 그것을 통해 우리가 얼마나 많은 것을 배울 수 있고 얻을 수 있는지 보다 직접적으로 알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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