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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양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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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4월 24일 23시 12분 등록

1. 조지프 캠벨 연보

1904년 1세

3월 26일 뉴욕에서 태어나다.

 

1910년 7세

남동생 찰리와 함께 아버지를 다라 메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열린 <버팔로 빌의 와일드 웨스트 쇼>를 보러 갔다가 아메리카 원주민인 인디언들에 대한 그의 평생에 걸친 관심이 촉발되었다.

 

1913~1918년 10~15세

아메리카 원주민에 대해 굉장한 관심을 가졌던 캠벨은 공립 도서관 어리니 서가에 있는 인디언 신화에 관한 책을 전부 다 읽었고, 11세에 성인 도서 서가에 출입할 것을 허락받고 공부를 계속해 나간다. 14세에 병이 걸려 한동안 집아네 머물며 자연과학을 공부한다.

 

1919년  16세

뉴 로셀의 집에 화재가 발생하여, 그의 할머니가 숨지고 그가 수집한 인디언에 관한 책이나 유물들이 불타버린다.

 

1919~1921년 16세~18세

코네티컷 뉴 밀포드에 있는 캔터베리 예비 학교에 입학하였다.

 

1921년 18세

다트머스 칼리지에 입학하여 생물학과 수학을 공부하였다. 2학년때, 그는 멜레코우스키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로망스>를 읽고 인문학에 눈을 뜨게 되고, 콜럼비아 대학 영문과로 전입한다.

 

1924~1926년 21세~23세

육상팀의 주자로 0.5마일 경주에서 콜럼비아 대학과 뉴욕시의 기록을 세운다. 또한 대학의 재즈 밴드에서 색소폰을 연주하기도 하였다. 배를 타고 유럽으로 가는 길에 지두 크리슈나무르티를 만나 동양철학의 세계에 이끌린다.

 

1926년 23세

콜럼비아 대학으로 돌아와 육상팀에서 활동을 계속하며 중세문학을 공부한다. 성배에 관한 석사논문 <가슴 아픈 일격 The Dolorous Stroke>을 쓴다.

 

1927~1928년 25세

연구비를 지원받아 프랑스의 파리 대학에서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번역자인 조지프 베디에르 아래서 로망스어, 문헌학, 고대 불어, 프로방스어를 배운다. 여기서 그는 현대 미술(피카소와 브라크)과 현대 문학(예이츠, 엘리엇, 그리고 특히 조이스)을 처음 접하게 된다. 그는 뮌헨 대학으로 얾겨가 산스크리트 문학과 인도 유럽 철학을 공부하였고, 프로이트, 융, 토마스 만, 괴테 등의 작품을 접한다.

 

1929년 26세

미국 주식시장이 붕괴하기 2주 전에 귀국했다. 준비하고 있던 박사논문을 접고 여동생 앨리스와 함께 우드스탁 숲 속에 있는 일년에 20달러짜리 오두막에 세 들어 살게 된다. 그곳에서 그는 파리에서 시작한 공부를 이어, 엄청난 양의 독서를 한다.

 

1931~1932년 28~29세

진로를 구상하기 위해 혼자서 차를 몰고 그의 어머니가 운영하던 Model T Ford로 향해 간다. 가는 길에 캘리포니아 새너제이에 들러 그의 오랜 친구이며 영양사인 아델 데이비스를 만났다. 그는 캠벨에게 존 스타인백과 캐롤 스타인백 부부와 그들의 이웃이었던 생물학자 에드 리켓을 소개해 준다. 에드 리켓과 캠벨은 알래스카의 브리티쉬 콜럼비아까지 해안을 따라 여행하며 조수간의 동물군을 수집하는데, 이 여행은 신화학과 생물학 사이의 관계에 대한 그의 믿음을 재확인시켰다.

 

1933 30세

85개의 대학들에 지원을 한 끝에 그이 모교였던 캔터베리 예비학교에 취직하여, 역사, 영어, 불어, 독어를 가르치는 한편, 슈펭글러, 토마스 만, 융, 조이스에 대해 공부한다. 그는 그해 말에 퇴직하고 다시 우드스탁으로 돌아와 독서와 집필에 열중한다.

 

1934년 31세

사라 로렌스 대학에서 교수로 초빙된 그는 이후 38년간 이 대학 문학부에 재직한다.

 

1938년 35세

그의 학생이었으며 마사 그레이엄 무용단 단원이었던 진 어드먼과 결혼한다.

 

1941년 38세

인도연구자 하인리히 침머를 만난다. 침머는 캠벨을 볼링겐 시리즈의 설립자 폴 멜론과 메리 멜론에게 소개시켜준다. 캠벨은 볼링겐 시리즈의 첫 번재 책이자 그이 첫 번재 출판물인 제프 킹 글, 모드 오크스 그림의 <그 두사람이 아버지에게 온 곳: 나바호족의 전쟁의례>라는 주석본을 만들게 된다.

 

1942년 39세

이후 3년 동안 스와미 니키라난다와 함께 <스리 라마크르슈나의 가르침>과 <우파니샤드>의 번역과 편집을 진행한다.

 

1943년 40세

침머가 폐렴으로 갑자기 사망하자, 그의 부인이 캠벨에게 침머의 유작들의 편집을 부탁한다. 캠벨은 이 작업을 12년 동안 하여, 1946년 <인도의 예술과 문명>, 1948년 <왕과 시신>, 1951년 <인도철학>, 1955년 <인도 아시아의 예술>을 출판한다.

 

1944년 41세

헨리 모튼과 함께 쓴 <피네간의 경야를 여는 곁쇠>가 출간된다. <그림동화>의 주석을 쓰고, <댄스 옵서버>지의 편집진에 참여했다.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의 집필을 시작한다.

 

1949년 46세

두 곳의 출판사에서 수정 요구 및 거절을 받은 후, 볼링겐 시리즈에서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이 출간된다. 이 책은 국립예술문자협회상을 받는다.

 

1953년 50세

크리에이티브 영화 재단의 대표가 되었고, 스위스 아스코나에서 열린 에라노스 협회에서 20여 년 동안 나온 회보를 모은 <에라노스 연감 회보>의 편집을 맡았다. 그는 이 일로 스위스에서 칼 융, 미르치아 엘리아데, D.T. 스즈키 등을 만난다.

 

1954년 51세

안식년을 맞아 인도, 스리랑카, 타이, 버마, 홍콩, 일본 등을 여행한다.

 

1956년 53세

워싱턴 D.C 의 국무부 외교연수원에서 강의를 시작한다.

 

1957년 54세

그가 편집한 에라노스 협회의 첫 번째 회보, <의미없는 상징>이 출간된다.

 

1959년 56세

그는 에라노스 협회에서 <원시시대 사냥꾼과 농부의 재생 신화와 의례>를 출간하고, 캠벨의 저서 <신의 가면>시리즈의 1권이 출간된다.

 

1967년 64세

'예술, 종교, 현대 문화 학회'의 운영진이 된다.

 

1969년 66세

<야생 수거위의 비행: 신화적 차원의 탐색>이 출간된다.

 

1972년 69세

뉴욕  시의 쿠퍼 유니온에서 행한 강연을 모은 강연집, <신화와 함께 하는 삶>이 출간된다. 캠벨은 사라 로렌스 대학에서 퇴임하고 '종교학회' 회장이 된다. 아이슬란드와 터키를 여행하고, 아내인 진 에드먼과 뉴욕 시에 '열린 눈 극장 Theater of the Open Eye'을 세운다.

 

1974년 71세

<신화의 이미지 The Mythic Image>가 출간된다.

 

1976년 73세

종교적 자유에 대한 공헌으로 멜셔 상을 수상하고 이집트와 그리스 여행을 안내한다.

 

1978년 75세

뉴욕 브루클린에 있는 프랫 연구소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는다.

 

1982년 79세

하와이로 이사한다.

 

1983년 80세

<세계 신화의 역사 지도: 1권. 동물적 힘의 길>이 출간된다. 영화감독 조지 루카스와 친분을 맺고, 캠벨 저작에서 영감을 얻어서 만들어졌다는 <스타워즈> 3부작을 보기 위해 스카이워커 랜치에 초대된다.

 

1984년 81세

80세 생일 파티가 샌프란시스코 미술관에서 열린다. 여기에는 샘 킨, 스탠리 캘러먼, 바브라 마이어호프, 마리자 짐부타스, 로버트 블라이 등을 포함하여 천 명의 하객이 참석하였다.

 

1985년 82세

<동물적 힘의 길>로 뉴욕 국립예술회에서 문학 명예 메달을 받았다.

 

1986년 83세

<바깥 세계의 내적 접근 : 은유와 종교로서의 신화>가 출간된다.

 

1987년  84세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새로운 감독/새로운 영화 축제에서 <영웅의 여정 : 조지프 캠벨의 세계>의 시사회가 열린다. 10월 30일, 조지프 캠벨은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사망한다. 12월에 PBS에서 빌 모이어스와의 대담 '신화의 힘 The Power of Myth'이 방영된다.

 

1988년

사라 로렌스 대학교에 '비교신화학의 조지프 캠벨 강좌'가 개설된다.

 

1991년

조지프 캠벨 제단 Joseph Campbell Foundation이 설립되었다.

www.jcf.org : 조지프 캠벨의 생애나, 저작, 강연기록 등에 관한 정보

 

 

<국내에 번역, 소개된 저작들 (가,나,다 순)>

<네가 바로 그것이다 Thou Art That>, 박경미 옮김, 해바라기, 2004

 

<신의 가면 1 : 원시신화 The Masks of God Vol. 1 : Primitive Mythology>, 이진구 옮김, 까치, 2003

 

<신의 가면 2 : 동양신화 The Masks of God Vol. 2 : Oriental Mythology>, 이진구 옮김, 까치, 2003

 

<신의 가면 3 : 서양신화 The Masks of God Vol. 3 : Occidental Mythology>, 이진구 옮김, 까치, 2003

 

<신의 가면 4 : 창작신화 The Masks of God Vol. 4 : Creative Mythology>, 이진구 옮김, 까치, 2003

 

<신화와 함께 하는 삶 Myths to Live By>, 이은희 옮김, 한숲출판사, 2004

 

<신화의 세계, Transformations of Myth Through Time>, 과학세대 옮김, 까치, 1998

 

<신화의 힘, The Power of Myth>, 이윤기 옮김, 이끌리오, 2002

• 1992년 고려원에서 같은 제목으로 소개되었다.

 

<신화의 이미지 The Mythic Image>, 홍윤희 옮김, 살림, 2006

• 캠벨의 주저 중 거의 최종판이라 할 수 있는 이 책을 도서관에서 발견했을 때, 칼 융의 <인간과 상징>과 비슷한 편집과 내용에 깜짝 놀랐다. 자유로운 체제와 이미지를 중심으로한 저술, 직관적인 서술, 굳이 주제를 설명하려 하지 않는 스타일이 캠벨을 느끼게 해준다. 천천히 이미지를 감상하며 읽어야 할 책. 아쉬운 점은 이미지들의 인쇄 상태가 작품의 디테일을 드러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캠벨의 신화에 대한 해석을 알고 싶은 독자들에게 적극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 "시각 예술을 매개로 이 책은 꿈과 삶과 신화의 바다를 항해한다. 우리는 책을 펼치는 순간 비슈누 신과 함께 잠든다. 그리고 내내 세계의 꿈을 꾸게 될 것이다. 그리고 책의 마지막에 이르러 우리는 잠에서 깨어난다. 하지만 꿈을 꾸고 난 당신은 더 이상 꿈꾸기 전의 당신이 아니다. 깨어나서 우리는 우리가 신화 속에 살고 있음을, 꿈을 살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옮긴이의 말 중-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The Hero with a Thousand Faces>, 이윤기 옮김, 민음사, 1999

• 이 책은 1980년대에 평민사에서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으로 국내에 첫 선을 보였다가, 이후 대원사에서 '세계의 영웅신화'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고, 1999년 다시 민음사에서 원래 제목대로 바로잡아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으로 출간되었다. 국내에 소개된 조지프 캠벨의 첫 저작이다.

 

2.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 귀

보라색 : 두 번째 읽기에서 무찔러 든 문장

빨간색 : 첫 번째, 두 번째 읽기 모두 무찔러 든 문장

진한색 : 가장 좋아하는 문장 (소감과 해석을 함께)

0.  빌 모이어스의 서문 :  우주의 노래, 천구의 가락

<서문에서 "큰따옴표"안의 말은 조셉 캠벨의 말이다. 나머지는 빌모이어스의 글이다.>

9. "모든 고통의 씨앗은 가장 중요한 인간 조건이라고 할 수 있는 인간의 유한성이랍니다. 인생이라는 것을 알면 이것을 부인할 도리는 없는 것이지요

9. 이그쥬가르쥬크는 '참 지혜라고 하는 것은 사람들에게서 아득히 떨어진채 절대고독 속에 은거하는데, 이 참 지혜에는 오로지 고통을 통해서만 이를 수 있다. 버리는 것과 고통스러워하는 것만이 세상으로 통하는 마음의 문을 열게 할 수 있는데, 사람들은 이것을 모르고 있다'는 말을 했지요.“

9. "...우리의 사회라고 하는것은 우리로 구성되어 있는 살아 있는 사회 구조가 아닌가요..."

10. 그리스 신들 따위가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것은 우리에게는 익숙한, 대단히 현대적인 견해이다. 그러나 그가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은, 부서진 질그릇 부스러기가 문화 인류학의 박물관에 진열되어 있듯이 '신화 따위'의 잔재가 우리의 믿음이라는 내면적 체계의 벽에 진열되어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구조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와 인연이 있는 이러한 '따위'는 아직도 어떤 에너지로 작용한다. 그리고 의례가 바로 이 에너지를 촉발한다.

 <그리스 신들>을 <예술>이나 <철학>으로 바꾸어 보아도 이 문장은 마음에 와닿는다. 예술따위가 우리 삶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 예술이 밥먹여주냐! 철학이 뭔 소용이냐! 먹고살기 바쁜데, 소는 누가키우냐! 인간의 삶은 먹고 사는 문제 이상의 신비로 가득차 있지 않은가.

11. "... 우리의 컴퓨터, 우리의 연장, 우리의 기계만으로는 넉넉하지 못하다는 겁니다. 우리는 우리의 직관, 우리의 참 존재에 기대어서 살아야 한다는 겁니다."

      "...부정적인 열정을 극복함으로써, 영웅은 우리에게도 우리 내부의 비합리적인 야만을 극복할 능력이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답니다."

12. "...구도의 궁극적인 과녁은 자기만을 위한 해탈이나 몰아가 아닌, 동아리를 섬기기 위한 지혜와 권능을 얻는 것이어야 합니다."

       구도자는 자기만의 삶을 누리기 위해 도를 닦지만 영웅은 사회의 구원을 위하여 행동한다는 점이다. 조셉 캠벨은 인생을 모험이라고 확신한다.

 인생은 모험이라고 확신하는 조셉 캠벨의 인생을 알고 싶다. 그대의 모험은 무엇이었나요? 그대를 영웅으로 만든 모험은 무엇이었나요?

12. 그는 문화인류학, 생물학, 철학, 예술, 역사, 종교 책 속에 파묻혀 살았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세계로 난 가장 확실한 길은 인쇄된 책의 갈피에 나 있음을 깨우쳤다.

  나도 책속에 파묻혀 살고 싶다. 그러나 책만 아는 바보가 될까 두렵다. 삶을 모른채, 멍하니 나만의 시각에만 갇혀있는 개똥철학자가 될지 무섭다. 그래서 도반과 소통을 위한 공동체가 필요하다. 지금은 그게 변경연이다. 도반들은 나를 내 세계에서 건져줄 조력자이다. 난 우주와 연결되어 그 길을 갈 것이다. 제대로 책을 읽자. 조셈캠벨의 세계에서 진주를 건져올리자.

 13. 뉴욕의 자연사 박물관에서 있었던 그의 영결식장을 본 사람이면 누구나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75년전 캠벨 소년의 상상력을 자극했던 자리, 바로 그 자연사 박물관에서 거행된 영결식장에는 많은 사람이 모여 캠벨에 대한 추억에 경의를 표했다.

 이 부분에서 이 책이 나오게 된 배경이 나온다. 저널리스트인 빌모이어스는 박물관에서 조셉캠벨과 두개의 프로그램을 만드는데 시청자들의 열광적인 반응을 경험하고 그의 사상을 전반적으로 조감하는 프로그램을 만들기로 했다. 캠벨이라는 인간이 지닌 보물을 만인에게 나누자는 빌모이어스의 희망이 PBS시리즈로 방송되었고, 이 책으로 정리된 것이다.

14. 세간에는, 저널리스트들은 날마다 새로운 것을 배워나갈 수 있는 희한한 면허증을 가진 자들이라고 하는 말이 있다. 그렇다. 우리 저널리스트들은 평생교육의 전당에서 세월을 보내도 좋은, 참으로 재수가 좋은 사람들이다.

    "운명은 앞서서 뜻 있는 자를 인도하지, 뜻 잇는 자의 멱살을 잡아끄는 것은 아니라오." 그는, 큰 스승들이 그러하듯 예증을 통하여 가르친다.

 <저널리스트>라는 직업을 선택했다면 어땠을까. 나에게 잘 맞지 않았을까. 사진기자나 잡지사기자에 도전해보지 못한것이 아쉽다. 지금 저널리스트가 되는 방법은 무엇일까. 내 나이 서른여덟. 내 분야가 있는 파워블로거. 내 분야는 예술과 신화, 사진, 비평. 스스로 기사를 기획하고 취재하고 블로깅을 한다. 책으로 축적된 기획기사를 책으로 갈무리한다. 사진과 일상이라는 주제의 워크샵과 강연을 한다. 만족스런 삶의 풍광이다.

 15. "목사들이 범하고 있는 오류는, 말로써 사람을 믿음에 이르게 하려고 애를 쓴다는 것이오. 자기가 보았던 빛을 신도들에게 넌지시 보여주기만 하면 될텐데 말이오."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이군요? 라는 질문에 조셉캠벨은 대답한다. "아니지, 그게 아니오, 살아 있음의 '경험'을 찾는 것이지요."

  <삶의 의미 >와 <살아있음의 경험>은 어떤 차이인가? 삶의 의미는 지적인 앎을 지시하는 말이다. 관념이란 말이다. <살아있음의 경험>이란 말도 이 자체로는 단어에 불과한 관념이지만 이 말이 지시하는 것은 '삶' 자체인것 같다. <살아가는 것>전부를 지시하는 손가락이다. 직관적으로 이 말이 지시하는 것을 알 수 밖에 없을 듯 하다. 신화의 이미지, 종교의 상징들이 이것을 가리키고 있다.

16. '삶의 본질은 죽이는 것과 먹는 데 있다는 사실 그리고 신화가 다루어야 하는 위대한 신비가 바로 이것임'을 깨닫게 된다. (죽음에서 새 삶이 생긴다는 진리)

17. "그 아이를 사랑하고 다독거리는 그 몸짓에, 신을 사랑하고 섬기는 몸짓이 깃들여 있답니다." _성자 라마크리슈나를 찾아갔던 고달픈 한 여자의 이야기

18. "진리는 하나이되, 현자는 여러 이름으로 이를 언표한다."-힌두경전- , 신화는 가시적인 세계의 배후를 설명하는 메타포이다.

19. 그의 주장에 따르면, 과학의 발달은 인간을 타락하게 하기는커녕 이 온 우주가 '우리의 내적 자연이 확대, 투사된 것'임을 인식하게 함으로써, 우리를 '고대와 만나게 했다'.  말하자면 과학이 우리를 깨우쳐, 우리 자신이 실은 우리의 내적인 자연의 귀이자 눈이자 사고이자 그 말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했다는 것이다.

21. 캠벨의 무엇이 나를 그토록 끌었을까? 그렇다 지혜이다. 그는 대단히 지혜로운 사람이었다. 그리고 박식한 사람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만이 아니었다. 이야기에는 그에 걸맞은 표현의 방법이 있다.

21. 그렇다. 캠벨도 춤을 추었다. 우주의 가락에 맞추어 춤을 추었을 뿐이다.

1.  신화와 현대세계 <빌 모이어스의 말 앞에만 '빌'이라는 표시를 달았다. 나머지는 조셉 캠벨의 말이다.>

26. 우리에게는 앞에서 말한 것 같은 문학을 대신할 만한게 없기 때문이지요. 인류의 삶을 떠받쳐오고, 문명을 지어오고, 수천 년 동안 종교의 틀을 지어온 고대의 정보는 심원한 내면의 문제, 내면의 신비, 내면적인 통과의례의 문턱을 넘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어요.

28. 이어서 토니오는 "작가는 진실에 진실해야 한다"고 씁니다. 그런데 토니오가 진실에 진실하면서 애정을 기울이는 사람은 살인자입니다. 왜냐, 인간을 지실하게 그려내는 유일한 방법은 인간이 지닌 불완전함을 그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불완전 함을 감추려 하지 말자. 완전한 개체가 어디있겠는가? 완전한 전체라면 모를까.

26. 빌: 우리는 세계와 관계를 이루기 위해, 우리 삶을 현실과 조화시키기 위해 옛 이야기를 하고, 읽는다는 말씀이군요?

28. 완전한 인간은 사람들의 흥미를 끌지 못합니다. 세상을 떠날 즈음의 석가가 어떠했습니까? 석가의 모습은 우리가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불완전한 모습이었습니다. 불완전한 인간은 작가가 진실한 언어의 창을 던지면 상처를 입고 맙니다. 그러나 그 창은 사랑의 창입니다.

  나의 불완전함을 감추려 하지 말자. 위선이 될 뿐이다. 내 겉모습만을 꾸미려 하지 말자. 불완전한 그대로 삶에 부딪히자. 그 수밖에 없지 않은가.

28. 완전한 것은 비인간적입니다.

29. 하느님에게 두려움을 느낀다면, 그 느낌은 진정한 사랑으로 연결될 수 없어요. 그러나 십자가에 매달린 그리스도는 사랑스럽지요.

29. 사람들은 우리 인간이 궁극적으로 찾고자 하는 것은 삶의 의미라고 말하지요. 그러나 나는 우리가 진실로 찾고 있는 것은 그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나는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은 살아 있음에 대한 경험이라고 생각해요.

 서문에도 나오는 문장이다. 의미는 내가 부여하는 것에 불과하고, 살아있다는 느낌이 중요하다! 그의 사상의 특징이 잘 드러나는 문장이다.

30. 우주의 의미는 무엇이던가요? 벼룩의의미는 무엇이던가요? 모두 그저 거기에 있을 뿐이지요. 당신이라는 분의 의미는 그저 거기에 있다는 것뿐입니다. 외적 가치를 지닌 목적에만 너무 집착해서 움직이는 바람에, 우리는 가장 중요한 것이 내적 가치임을, 즉 살아있음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삶의 황홀이라는 것을 그만 잊어버리게 되었지요.

  너무나 강렬한 문장이다. 삶의 황홀, 사부님이 말씀하시는 '특별한 하루를 사는 것'이 떠오른다. 나는 특별한 하루를 매일 살고 있는가? 외적 가치를 지닌 목적에만 매달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30. 빌 : 그런 경험을 어떻게 하실 수 있었습니까?

신화를 읽었지요. 신화는 사람들에게 내면으로 돌아가는 길을 가르쳐줍니다. 자, 다른 민족의 신화를 읽어야 하지, 자기 종교와 관련된 신화를 읽는 것이 아니랍니다... 다른 문화권의 신화를 읽으면 메시지를 느끼게 됩니다. 남의 신화를 읽으면 경험이 무엇인지 배우게 됩니다.

31. 빌 : 제대로 된 상대라고 하셨는데, 어떻게 해야 제대로 된 상대를 고를 수 있는 것입니까?

가슴이 말해줍니다. 반드시.

32. 결혼으로 맺은 관계를 인생의 가장 중요한 관계로 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결혼을 아직 하지 못한 겁니다. 결혼은 원래 하나였던 것이 지어내는 둘의 관계, 둘이 하나의 육을 이루는 관계입니다.

33. 우리는 대개 결혼을 통해서 한두 가지씩은 희생을 시킵니다. 그러나 결혼이라는 관계를 위해서 희생시켜야지, 상대를 위해서 희생시켜서는 안 됩니다. 결혼은 단순한 연애가 아니지요. 결혼은 시련입니다. 이 시련은 '관계'라는 신 앞에 바쳐지는 '자아'라는 제물이 겪는 거이지요. 바로 이 '관계' 안에서 둘은 하나가 됩니다.

  결혼이라는 관계를 통해 희생한 것이 무엇인가? 살림, 육아, 관계에 필요한 절대적 시간과 밥벌이를 최고의 우선순위로 삼게되는것. 하지만 돌아보면 그것들이 내 삶을 풍요롭게 했다. 순간순간은 벗어버리고 싶은 순간도 있지만 말이다.

34. 중요한 것은 영적 수련입니다. 사회는 사람들로 하여금 깨달음에 이르게 해야 하는 것이고요. 사람은 사회를 섬겨야 하게 되어 있지 않아요. 사회가 사람을 섬겨야 하지요. 사람이 사회를 섬기게 되면 우리는 괴물이나 다름없는 상태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사회가 사람을 섬기게 하는 방법 : 새로운 사회조직과 구성, 새로운 기업, 새로운 공동체, 새로운 자아경영 프로그램 등의 블루오션이 우릴 기다린다. 사람들은 그것을 원하고 있다.

37. 많은 교수들 역시 자기가 가르치는 학문이 삶의 가치와 어떤 관계가 있느냐고 물으면 고개를 갸우뚱한다는 겁니다.

 학창시절 수없이 떠올랐던 질문이 이것이다. 내가 배우고 있는 이 과목이 내 삶과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인지 당신은 알고 있는지? 결국 앎은 삶으로 검증되어야 한다. 끊임없이 앎과 삶이 어우러져야 한다.

38. 잡학가는 여기에서는 이 전문가에게 한 수 배우고, 저기에서는 저 전문가에게 한 수 배우기 때문에 문제를 일단 위에서 내려다볼줄 알지요. 잡학가는 전문화한 인간보다는 훨씬 인간적이라고 할 수 있는 다른 문제의 영역으로 뛰어들기도 하는 것이지요.

빌 : 그렇다면 저널리스트와 비슷한 셈이군요?

39. 카톨릭 가정의 아이는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탄생하고, 무리를 가르치고, 십자가에 매달리고, 부활하고, 하늘 나라로 돌아가는 이 순환적인 주기를 계절적으로 체험하면서 자랍니다.

 마을공동체가 없어진 현대사회를 살면서 내 아이가 학교에 가게되면 성당이나, 절에 같이 다니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이유가 계절에 따라 순환적인 주기를 체험하고 종교적인 의례를 경험시키고 싶어서다. 종교가 죄의식을 심어주지만 않는다면...

40. 힌두교에도 관심을 가지고 이것저것 읽게 되었는데, 아, 거기에도 같은 이야기가 있더군요. 나의 대학 졸업 논문은 중세의 아더왕 이야기를 다룬 것이었는데, 거기에도 같은 이야기가 있는 겁니다.

41. 빌 : 선생님께서는 사라 로렌스 대학에서 38년간이나 신화를 가르쳐왔습니다... 캠밸 : 젊을 사람들은 덥석 집더군요. 신화는 문학과 예술에 무엇이 있는지를 가르쳐줍니다.

  안정적인 직장(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셨다. 꿈을 꾸기 위해서도 안정적인 경제적 기반은 필요한 것인가?

43. 젊은 시절의 저에게는 제가 지향하는 방향을 가리키는 붙박이별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붙박이별의 영원성은 저에게 엄청난 위로가 되었습니다. 붙박이별은 저에게 삶의 지평을 알게 해주었습니다. 저에게, 저 우주 어는 곳에는 늘 저의 일에 관심을 두시고 언제든지 맞아들일 차비를 마치신 채 저를 내려다보시는, 자애롭고 다정하고 공정한 아버지가 계시다는 것을 일러준 것도 이 붙박이별입이다.

44. 해리의 증세를 보이는 사람이 기계적인 방법을 통하여 신비 체험에 빠져드는 것은 신비가 헤엄치고 있는 물에 빠져죽는 것이나 다름없어요. 신비 체험에는 준비가 필요한 법입니다.

46. 의식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온몸에 두루 존재합니다. 이 의식은 의식을 하는 주체에게 살아 있는 세계에 관한 모든 정보를 제공합니다.

나는, 의식과 에너지는 어떤 점에서는 같은 것이라는 생각을 지닌 사람입니다. 삶의 에너지를 찾아볼 수 있는 데엔 반드시 의식이 있습니다.

47. 삶이라는 것은 곧 명상입니다. 많은 사람이 명상이라는 것을 하기는 하되, 돈이 들어올데, 돈이 나갈 데에 관해서만 명상을 합니다. 부양할 가족이 있는 사람은 가족의 문제에만 관심을 둡니다... 그래서 신화가 필요한 겁니다. 신화는 영적인 의식의 차원으로 우리를 이끌어줍니다... 그러면 영적인 의식이라고 하는 걸 어디에서 얻어야 하겠습니까? 그래서 신화가 필요한 겁니다. 신화는 영적인 의식의 차원으로 우리를 이끌어줍니다.

 현대인에게 더욱 신화가 필요한 이유는 일상에서의 명상을 위해서다. 내 아이에게 신화와 상징을 알려주기 위해서 교회나 성당, 절이라도 다녀야 할까? 어려서의 의례의 경험이 그의 삶에 토대가 될수 있을까? 교육적 차원에서 신화를 삶으로 가져오기 위한 방법에 대해 고민해보자. 동화책, 그림책, 어린이책? 예술교육, 발도르프... 자연에 가까운 삶.

48. 기도나 명상이라고 하는 것은 의식의 수준을 오르락내리락 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어떤 의식의 수준을 일정하게 유지시키기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48. 신화는  이 세상의 꿈이지 다른 사람의 꿈이 아닙니다. 신화는 원형적인 꿈입니다.

52. 우리 지구의 온도가 50도로 올라가서는 떨어지지 않고 그대로 있다면 이 지구에는 어떤 생물도 살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온도가 영하 100도쯤으로 떨어져 더 이상 올라가지 않아도 역시 이 지구에는 어떤 생물도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고도, 말하자면 이 균형이라는 것이 얼마나 섬세한 것인지 알고, 지구에서 물이라고 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도 알고, 생명을 안아준 우리 환경 주변에서 일어나는 많고 많은 일을 염두에 두고도 어떻게 우리가 아는 이러한 생물이 이 우주의 어떤 행성에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상상할 수 있겠어요? 하고많은 별들이 거느리는 위성이 아무리 많다고 한들 나는 상상할 수 없어요.

 표현이 좋다. 우리 삶이 온통 신비임을 보여주는 문장이다. 내가 지금 여기 있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신비이다. 숨쉬는 것, 바라보는 것, 파란하늘, 심장의 두근거림... 지금 내가 경험할 수 있는 것들이 얼마나 신비로운가. 러브록의 '가이아이론'과 장회익의 '온생명'이라는 개념이 나온것도 삶의 신비를 바라보면서 과학자들이 깨달은 것들이 개념화한 것이 아닌가.

53. 가령 비행기가 나는 것은 이 세상에서 놓여나고자 하는 인간의 상상력의  산물입니다.

54. 현대의 테크놀로지 신화에서도 우리는 여전히 싸우고 있습니다.

56. 그런데 어머니의 길을 통해서 아버지에게 이르려 한다고 칩시다. 그러자면 인도의 칼리 여신 등을 통해 여신을 찬송함으로써 이르는 편이 나을 테지요. 이것은 우리 삶의 신비에 이르는 또 하나의 다른 방법일 뿐입니다. 그러니까 각 종교는 정해진 명려이 신호를 입력시켜야 접근이 가능한 일종의 소프트웨어라는 걸 이해해야 합니다.

57. 6세기에 유태인들이 바빌론에서 귀양살이를 할 때, 문득 이 세계의 구주라는 관념이 생기면서 성서의 신은 새로운 차원으로 발돋음합니다.

58. 현대의 진정한 공포의 도가니를 베이루트에서 봅니다. 거기에서는 서양의 3대 종교, 유태교, 기독교, 이슬람교가 한 덩어리로 어울려 치고 받고 합니다. 왜? 성서에 나오는 같은 신을 서로 다른 이름으로 부르기 때문입니다.

59. 인간은 자연만이 아니고 자기 본성도 파괴합니다. 노래를 죽이니까요.

61. 내가 아는 한, 지구라는 행성의 신화학에 가장 가까운 것은 불교입니다. 불교는 세상의 모든 존재를 부처로 보지요. 문제는 어떻게 이러한 인식에 이를 것이냐 하는 겁니다. 문제는 만유라고 하는 존재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 그리고 형제애로써 이 만유에 반응하는 방법을 찾아내는 일입니다.

61. 어떤 범주에 구속된 사회에서는 공격성이 밖으로 투사되지요.

61. 신은 인간의 삶과 우주에 기능하는 동기를 부여하는 힘, 혹은 가치 체계의 화신입니다. 신화는 인류 안에 있는 영적 잠재력을 비유적으로 나타낸 것입니다. 우리 삶의 기운을 북돋우는 힘은 이 세계의 생명의 기운을 북돋우기도 하지요.

63. 이런 짓을 하고 있는 자들은 종교의 관념을 저희가 사는 사회에만 적용시킬 줄 알지, 이 시대의 삶, 이 시대의 인류에게 적용시킬 줄은 모르고 있어요.

64. 우리에게는 개인을 그가 속한 지역적 동아리와 동일시하게 만드는 대신, 지구라는 이 행성과 동일시하게 만드는 신화가 필요해요.

  새로운 신화, 우리시대의 신화->가이아이론, deep ecology, 신과학(양자역학) 등의 과학이론이 새로운 신화로 등극했다. 우리나라의 보다 대중적인 신화는 무엇일까? 비틀즈, 서태지, 아이돌, 영화스타... 돈! 박정희와 이명박, 노무현, 억대 연봉, 성공신화. 우리에게 필요한 신화는 무엇일까? 난 무슨 신화를 건져내는 일에 참여할까.

65. 모든 사람은 이성의 존재를 인식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민주주의의 기본적인 원리이지요. 모든 사람의 마음은 진정한 지식에 접근할 수 있기 때문에, 특별한 권위나 앞으로는 이러저러하게 될 것이라는 식의 특별한 계시 같은 것도 소용없는 것이지요.

69. 이렇게 만들어진 삼각형의 한가운데 있는 점은 창조적 중심을 상징합니다. 바로 여기에서 우주와 만물이 생성합니다.

71. 정치적으로, 역사적으로, 우리는 서로 입씨름을 벌이는 두 패거리 중 한 패거리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정점에 있는 눈의 원리를 상징하지 못합니다. 우리의 관심은 정치나 경제에 쏠려 있지, 더 이상 이성의 소리에는 쏠리지 않습니다.

71. 인류는 기원전 5백 년 경에 큰 전기를 맞습니다. 이 시점은 석가, 피타고라스, 공자 그리고 노자가 살던 시점입니다. 바로 인류의 이성이 크게 깨어난 시기입니다.

71. 이성을 파괴하는 것은 열정입니다. 정치에서 열정은 곧 탐욕입니다. 탐욕은 인간을 타락케 합니다.

73. 존재의 바탕, 우주의 근본적인 구조를 고려에 넣고 무엇을 생각해야 비로소 이성이라고 할 수 있는 거지요.

74. 앞으로도 우리는 신화를 가질 수 없을 겁니다. 세상은 신화를 낳을 사이도 없이 너무 눈부시게 변하고 있어요.

74~76. 신화의 기능 첫번째, 신비주의와 관련된 기능, 두번째, 우주론적 차원을 연다는 것, 세번째 사회적 기능입니다. 세번째 기능은 시대착오적. 네번째 우리에게 주어진 이 삶을 이 특정한 상황에서 어떻게 살아낼 것인가 하는 문제와 관련된 교육적 기능입니다.

76. 성서에 바탕을 둔 우리 서구의 이야기는 선사 시대의 우주관 위에 서 있어요. 이런 이야기는 인간의 존엄성이라든지, 우주에 관한 오늘날의 개념과는 맞지 않아요. 이건 그 시대 사람들의 것이지 더 이상 우리 것은 아닙니다... 만유신론을 비방하는 사람들의 주장에 따르면, 오로지 인신만 이 세상에 살아야 합니다. 한지만 신(divinity)이라는 관념은 그게 아닙니다.

77. 미래를 생각하게 하는 신화 중에서 가치 있는 신화는 어떤 도시, 어떤 동아리에 관한 신화가 아니라 이 땅에 관한 신화입니다. 모든 인류가 사는 이 땅에 관한 신화여야 합니다.

77. 미래의 신화는 다른 모든 신화가 다루었던 문제를 고루 다루어야 합니다. 말하자면 유아기에서 성장기를 거쳐 성인기에 이르고, 성인기에서 이 세상을 하직하기까지의 모든 문제, 심지어는 사회와의 관계, 이 사회가 지니는 자연의 세계와 우주와의 관계까지 고루 다루어진 신화여야 한다는 겁니다.

 내 삶으로 이런 <미래의 신화>를 쓸 수 있다면 좋겠다는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말이다. 우리 현대인들에게 <미래의 신화>를 쓰라는 과제를 던지고 있는 것이다. 인생과 사회, 자연, 우주와의 모든 관계를 다루는 발전된 신화를 꿈꿔보자! 종교와 예술, 이성의 눈이 그 길을 도울 것이다.

78. 달에서 지구를 보면 국경 같은 게 안 보이잖아요? 이것은 미래 신화를 위한 대단히 중요한 상징 같습니다. 우리가 세워야 하는 나라가 이러한 나라이고, 우리가 한 겨레가 되어야 하는 나라가 바로 이러한 나라인 것이지요.

81. 시애틀 추장의 글 "... 우리는 나무 껍질 속을 흐르는 수액을 우리 혈관을 흐르는 피로 압니다...  우리가 이 땅의 일부이듯, 그대들도 이 땅의 일부올시다. 이 지구는 우리에게 소중합니다. 이것은 그대들에게도 소중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한 분뿐이라는 것을 압니다. 홍인종이 되었든 백인종이 되었든 인간은 헤어질 수 없다는 것도 압니다. 우리는 결국 형제인 것입니다."

  그런데 현대사회는 왜 이렇게 되었나. 왜 괴물이 되었나. 물신숭배, 맘몬주의, 신자유주의, 먹고살기 힘든 사회시스템, 현대판 노예제도... 결국 사회를 바꾸는 것은 깨어난 개인들이 온몸으로 저항하는 일일 것이다. 개인들의 연대, 그러게 100번째 원숭이가 채워지면 일순간 그전의 사회는 무너지고 말것이다. 패러다임의 변화이다.

 2.  내면으로의 여행83. 우리는 3만년 전에 살았던 크로마뇽인의 몸과 그 기관이 독같고 에너지도 도같은 몸을 지니고 있어요. 이 뉴욕이라는 도시에서 인간의 삶을 살건, 동굴에서 인간의 삶을 살건 우리는 똑같은 삶의 단계를 거칩니다.

85. 어떤 사람이 내적인 신비, 내적인 삶, 영원한 삶 같은 것을 생각하기 시작할 경우, 그 생각을 확장이켜줄 이미지가 처음에는 그렇게 많아 보이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까 다른 관념 체계에서 제시된 이미지를 가지고 시작하는 게 좋겠지요.

86.  천국과 지옥이 다 우리 안에 있지요. 모든 신도 우리 안에 있지요... 그래요. 모든 신들, 모든 천국, 모든 세계가 다 우리 안에 있어요. 이러한 개념이야말로 확장된 인류의 꿈이고, 꿈은 서로 갈등하는 우리 몸속의 에너지가 이미지 형태로 현현한 것이지요.

87. 사람은 다 어떤 종류의 문턱을 넘어야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꿈속에서 시험이 이러한 보편적인 것을 반영하게 될 경우에 이것은 개인적인 단계의 꿈이 아닙니다. 이런 꿈을 원형적인 꿈이라고 합니다.

89. 원초적인 경험이라고 하는 것은 아직은 해석되어 있지 않은 것이에요. 그래서 이것에 범접하려면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이것은 받아들이든지 받아들이지 않든지,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것입니다

91. 개인적인 꿈은 그 개인의 연상을 통하여 해석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꿈이 그 사람 삶의 어떤 것을 표현하고 있느냐, 그 개인의 문제와 어떤 관련을 맺고 있느냐, 이런 것을 알면 해석이 가능하다는 거이지요. 그런데 때로는 꿈이 신화의 테마를 드러내면서 순수한 신화 세계의 이미지, 예를 들면 우리 내면의 그리스도 같은 이미지를 전해올 때도 있습니다.

97. 삶은 죽여서 먹음으로써, 남을 죽이고 자신을 달처럼 거듭나게 함으로써 살아지는 것입니다. 이 상징적이고 역설적인 이미지들이 나타내려고 하는 것은 바로 이 신비입니다.

  우리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나와 너, 나와 부모, 나와 친구, 나와 나무, 나와 숲, 나와 하늘, 나와 바다...

98. 결국 여자가 이 세상에다 삶을 일군 겁니다. 으브는 이 속세의 어머니입니다. 인류가 에덴 동산에서 살던 꿈 같은 낙원은 시간도 없고 탄생도 없고 죽음도 없는 곳입니다. 그것만 없습니까? 삶도 없어요.

102. 삶의 신비는 인간이 만든 모든 개념 너머에 있어요... 속세의 근원은 영원입니다.

103. 하느님은 생각입니다. 하느님은 이름입니다. 하느님은 관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느님이라는 존재가 모든 생각을 초월하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존재의 궁극적인 신비는 모든 생각의 범주 너머에 있습니다. 최상의 것은 생각을 초월해서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언표될 수 없습니다. 차상은 오해됩니다. 왜냐, 생각될 수 없는 것을 생각이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정리했던 신 증명과 비교해보자. 이성적인 논증으로 언표할 수 없는 신을 증명할 수 있을까. 종교와 과학의 길이 다르지만 결국 같은 정상을 향한 길이다는 관념으로 생각할 수 있을까. 추후 <신>의 유일신 설명 부분과 비교.

104. 밀교에 따르면, 한 개인이 일련의 입문 의례를 통하여 자기의 깊은 곳을 하나 하나씩 드러내다 보면, 이윽고 자기는 영생불사하는 존재인 동시에 필멸의 팔자를 타고난 인간이며, 남성인 동시에 여성이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 온다고 되어 있습니다.

105. 이 세상으로 태어나기 직전에 자궁의 율동이 시작되는데 이때 어마어마한 공포를 느낀답니다. 그러니까 '나'라는 것이 생기기 전에 경험하게 되는 것이 공포인 셈입니다. 이어서 태어나기 위한 무시무시한 단계, 산도라는 아주 험한 길을 지나면, 드디어 이 세상의 빛을 보는 것이지요. 상상할 수 있겠어요?

106. 삶이라고 하는 것은 금제에 불복하는 순간에 시작되는 것이지요.

  제도 _김승희

아이는 하루종일 색칠공부 책을 칠한다.

나비도 있고 꽃도 있고 구름도 있고

강물도 있다

 

아이는 금 밖으로 자신의 책칠이 나갈까봐

두려워한다

 

누가 그 두려움을 가르쳤을까?

금 밖으로 나가선 안된다는 것을

그는 어떻게 알았을까?

 

나비도 꽃도 구름도 강물도

모두 색칠하는 선에 갇혀있다.

 

엄마, 엄마 크레파스가 금 밖으로

나가면 안되지? 그렇지?

아이의 상냥한 눈동자엔 겁이 흐른다

 

온순하고 우아한 나의 아이는

책머리의 지시대로 종일 금 안에서만 칠한다.

 

내가 엄마만 아니라면

나 이렇게 말해버리겠어

 

금을 뭉개버려라, 랄라. 선 밖으로 북북 칠해라.

나비도 강물도 구름도 꽃도 모두 폭발하는 것이다.

살아있는 것이다. 랄라.

선 밖으로 꿈틀꿈틀 뭉개뭉개 꽃 피어나는 것이다.

위반하는 것이다.

범하는 것이다. 랄라.

나 그토록 제도를 증오했건만

엄마는 제도다

나를 묶었던 그것으로 너를 묶다니!

내가 여자이고 총독부다.

엄마를 죽여라! 랄라.

109. 내 생각으로 우리가 신화를 다루면서 노리는 것은 세계 체험의 한 방법이 아닐까 싶군요. 초월의 이미지를 열어줄 세계인 동시에 그 안에 살 우리의 모습을 빚는 세계에 대한 체험이라면 어떨까요? 시인이 원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지요. 우리의 영혼이 요구하는 것도 바로 이것이고요.

111. 인류는 의례를 통하여 자기네끼리, 혹은 우주와의 조화를 이루면서 살아가는데, 큰 신화는 바로 이 의례를 설명합니다. 이런 이야기는 은유로 알고 해석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112. 빌 : 신화가 인간에 관한 큰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고 하시는데 그 큰 이야기는 무엇인지요?

113. 신화의 장으로 현현한 것으로서 인간은 원래 한 존재의 바탕에서 왔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원수라고 하는 것도 사실은 다른 각도에서 보이는 우리의 다른 측면에서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압니다.

113. 내가 '시'라고 하는 것은 언어로 된 것이 아니고 행위와 모험으로 이루어진 것을 말합니다.

115. 나는 토요일마다 신부님께 고해를 했습니다. 그러자니 토요일만 되면 한 주일 동안 짓지 않을 수 없었던 시시콜콜한 죄를 모두 생각하게 되지요. 지금 생각해보니, "저를 축복해주세요, 신부님. 제가 워낙 귀한 존재라서 그런지 지난 한 주일 동안 제가 한 것은 좋은 일뿐입니다." , 이럴 걸 그랬다 싶군요. 자신을, 부정적인 것과 동일시할 것이 아니고 긍정적인 것과 동일시 해야 할 것 같다는 겁니다.

   아름다움을 따르고, 추함은 직시함으로써 사라지게 하라. 내가 캠벨에게서 건진 두가지 메타포!

116. 은유라는 것은 드러내기는 드러내면서도 사실 본듯은 다른 데 있는 표현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문자를 초월한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이지요.

117. 예수가 들어간 곳은 외계가 아니고 내부의 세계인 겁니다. 그는 모든 존재가 비롯되는 곳으로 들어간 겁니다. 만물의 근원이 되는 의식 속으로, 우리 안에 있는 천국으로 들어간 겁니다. 이미지는 외향적입니다만 그 본 뜻은 내향적입니다

  이미지는 외향적인 표현이다. 그 본 뜻은 내향적인 것이다. 사진은 이미지이다. 그러므로 사진은 내부의 세계를 상징한다. 방법이 필요하다. 개인적으로는 한 장의 사진으로 끝내기 보다는 이야기 형식의 배열 또는 논리적인 배열을 통해 내부세계를 들춰내는 방식을 사용하고 싶다. 내가 사진으로 하고싶은 일이다.

117. 세익스피어는, "예술은 자연을 비추는 거울"이라고 했습니다. 바로 그겁니다. 자연은 곧 우리의 본성이고, 신화에 등장하는 이 멋진 시적 이미지는 바로 우리 안에 있는 것을 반영합니다.

119.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이것이다, 라고 하지만 사실 우리는 그것 이상의 어떤 것이지요. 우리의 삶은, 지금 우리가 여기에 살고 있으면서 알고 있는 것 이상으로 깊고 넓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은, 정말 우리 안에 있는 존재, 우리에게 생명을 주고 숨결을 주고 깊이를 주는 존재의 몇 분의 1의 깊이밖에 안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이 깊이 밖에는 살지 못합니다. 이 깊이밖에 살지 못한다는 것을 절실한 느낌으로 경험할 때 홀연히, 모든 종교가 바로 이점을 지적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120. 보통 사람은 신화의 단층을 건드리지 못합니다. 예언자와 인도 사람들이 말하는 '리쉬스'는, 신의 음성을 '듣고' 경전을 썼지요. 귀를 여는 것은 누구에게나 가능하지만, 귀라고 해서 다 경전을 불러주는 신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요. 창조적인 글을 써본 사람은, 마음을 열고 자신에게 복종하노라면 써야 할 것이 스스로 말을 하면서 제 자신을 이루어나간다는 것을 압니다... 영감이라는 것은 무의식에서 솟아나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사회 구성원들의 무의식이라고 하는 것은 대개 비슷한 것이기 때문에, 샤먼이나 선견자가 하는 말은 그 사회의 구성원들이 기다리고 있는 말인 경우가 많은 것이지요.

121. 샤먼이나 선견자가 하는 말을 들으면서 구성원들은 서로 이런 반응을 보입니다. "아니, 이건 내 이야기가 아니냐?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도저히 해낼 수 없어서 못하던 내 이야기가 아니냐?"... 사회의 구성원들이 듣고 싶어하지 않는 것을 듣는 선견자는 선견자 노릇을 하지 못합니다. 이런 선견자는 사회에서 추방당하기도 하지요.

 이런 반응을 들을 수 있는 글을 쓰고 싶다. 모두와 연결된 무의식에 귀를 기울이고 살아야 겠다. 왠지모르게 난 예언자의 피를 타고난듯싶다. 그렇다고 잘난척은 말아라. 독선을 경계하라.

123. 만일 상징과 은유가 예술을 통해 되살아나지 못한다면, 삶은 신화에서 떨어져나가 버립니다... 은유는 신의 가면입니다. 이 신의 가면을 통해 사람들은 영원을 경험하지요.

124. 신비 체험을 한 사람은 상징적인 드러냄이 말짱 헛것이라는 것을 압니다.

빌 : 체험한 사람은 체험한 것을 최선을 다하여 이미지에 투사시켜야 합니다. 제가 보기에 우리 사회는 이미지로 생각하는 기술을 잃어버린 것 같습니다.

정말 잃어버렸지요. 우리의 생각은 막연합니다. 언어적이고 단선적입니다. 언어의 현실보다는 이미지의 현실이 훨씬 풍부한데 말이지요.

 사진이라는 매체를 즐기면서 '이미지로 생각하는 기술'을 익혀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다. 삶의 체험을 이미지(사진)으로 표현하자.

126. 우리가 접촉하려고 하는 궁극적인 존재는 갇혀 있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가 생각을 하려고 함으로써 이것을 가둘 뿐입니다.

127. 무엇이든 궁극적인 실재는 존재와 비존재의 모든 범주를 초월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있느냐, 없느냐는 시비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겁니다.

  말로 할 수 없는 체험의 세계, 시, 음악, 사진, 미술, 책... 명상으로 갈 수 있는 세계?

130. 아무리 현자라도 질문을 받지 않으면 가르쳐주지 않아요. 알고 싶어하지 않는데 억지로 입을 열게 하고 집어넣어 줄 수 없는 거지요.

132. 우리 모두 어떤 의미에서는 금생을 사는 인드라일 것입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숲으로 들어가 명상에 빠질지, 속세에 남아 있을지는 우리가 선택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두가지 일, 왕으로서 세상을 다스리는 일과 아내와 가족을 사랑하면서 사는 일은 모두 다 금생에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133. 인생을 개선한 사람은 없어요. 그러니까 이보다 나아지지는 않을 겁니다. 이대로일 테니까 받아들이든지 떠나든지 하세요. 바로잡는다거나 개선할 수는 없을 테니까.

133. 우리는 사악한 일에도 참여하고 있어요. 참여하지 않으면 살아가지 못합니다. 인생이라는게 참혹한 것임을 알면 물러서지 않고 자기가 맡은 역할을 해낼 수 있어요. 그러나 그것만 알아서는 안 됩니다. 이 참혹함이 바로 신비, 무섭고도 놀라운 신비의 바탕이라는 것까지 알아야 합니다.

134. 이대로가 즐거운 겁니다. 제임스 조이스는 "역사는 내가 헤어나려고 몸부림치는 악몽"이라고 했지요. 그러니까 이 악몽에서 헤어나는 길은, 두려워하지 않고 지금 이대로의 모습 자체가 만물을 창조한 무서운 힘의 현현임을 깨닫는 일입니다. 사상의 끝은 늘 고통스러운 법입니다. 그러나 고통 또한 세상이 존재하는 까닭의 일부입니다.

  내가쓴 두번째 칼럼의 모티브라 할 수 있다. 선과 착함, 아름다움, 추함, 두려움을 넘어서라. 이 세상의 슬픔에 참여하라.

135. 말하자면 "나는 중심을 알고 있다. 나는 선과 악이라는 것은 이 속세의 착각일 뿐이요, 하느님 보시기에는 아무 차이도 없는 것임을 안다" , 이러한 인식과 함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138. 영원이라는 것은 시간과 아무 상관도 없는 것입니다. 영원이라는 것은 세속적인 생각을 끊는 바로 지금의 이 자리에 있습니다.


3.  태초의 이야기꾼들

141. 우리 육신의 신경은 우리의 기억을 운반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우리 신경계통의 조직을 일정한 상태까지 빚어낸 것이 바로 우리의
기억입니다.

 기억이 DNA란 말인가? DNA안에 새겨진 염색체 고리를 만든것이 기억이라는 것인가? 그렇다면 기억은 무엇이지?

141. 고대의 신화는 몸과 마음을 조화시킬 목적으로 빚어진 것입니다.

142. 우리가 삶의 한 단계에서 다른 단계로 들어갈 때는 입는 것도 달라지고 이름도 달라집니다. 교수직을 은퇴하고 난 나의 삶에 대한 나의 사고방식을 바꿨습니다. 말하자면 삶에 관한 관념 자체를 바꾼 겁니다.

  작가로서의 삶을 살겠다고? 그렇다면 모든 것을 바꾸어라. 입는것, 이름, 삶에 대한 관념 자체를...! 난 작가다.

155. 의례를 통해 삶은 다른 차원으로 들어갑니다. 이 새로운 차원에서 생명은 다른 차원으로 들어갈 수도 있고 그 들어간 곳을 통해 나올 수도 있게 됩니다.

156. 사실 이 세상 만물을 다 '그대'라고 부를 수 있어요.이렇게 부르면 우리의 마음 자체가 달라지는 걸 실감할 수 있지요.

 우리집에는 금붕어 세마리가 살았다. 아들 민호가 태어나기 직전에 항아리에 키우기 시작했는데 우린 각 금붕어에게 이름을 지어주었다. 큰 순서대로 '진일, 진이, 진삼이'라고. 민호가 태어났고 매일 아침 이름을 불러주며 밥을 주었고 민호와 함께 나이를 먹어갔다. 민호가 다섯살이 되었을때 금붕어들이 순서대로 죽었다. 민호는 진일이, 진이, 진삼이라 불러온 금붕어의 죽음을 보고, 그들을 땅에 묻어주면서 어렴풋이 죽음이란 느낌을 가졌던 것같다. 어쨋든 우린 다시 금붕어 세마리를 사왔다. 삶이 계속 되는 것처럼. 이름도 같게 붙였다. 대신 제일 작은 놈에게 진일이라 이름붙여주고 가장 큰 놈은 진삼이라 부르고 있다. 한 사오년후엔 다시 죽음이 찾아오겠지만 말이다.

157. 어느 단계까지가 우리가 '미학'이라고 부르는 예술가의 의도이고, 어느 단계까지가 아름다움을 간직한 심성의 자연스러운 발로인지, 어느 단계까지가 그들이 습득한 바를 드러내는 것인지 궁금해지는 겁니다.

160. 어머니의 젖으로 자라난 아이가 여기에서는 사람의 피를 마시는 겁니다. 이로써 아이는 어른이 됩니다.

166. 이들은 의례의 기능이 우리를 늘 있었던 자리로 감싸들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밖으로 내던지는 데 있다는 것을 잊은 거지요.

168. 신화를 살아나게 해야 합니다. 이것을 살아나게 할 수 있는 사람들은 여러 방면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들입니다. 예술가의 기능은 마땅히, 환경과 세계를 신화화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 문장을 읽으니 사진가 강운구(71)의 다섯번째 개인전이자 단행본 제목인 <오래된 풍경>이 각별하게 다가온다.

   관련기사 : 사진작가 강운구(71)가 경주의 능(陵)과 경주 남산의 불교 유적, 그리고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장소들을 찍어온 사진들을 모은 사진집 '오래된 풍경'(열화당)을 펴냈다. 책은 1987년 출판한 '경주 남산'과 1999년 선보인 '사진과 함께 읽는 삼국유사', 2000년 출판한 '능으로 가는 길'에 수록된 사진들을 한데 묶은 것으로 총 104점의 컬러 사진이 수록됐다. 저자는 책의 사진들을 1970년대 강원도의 황골과 인제군의 용대리, 전북 장수의 '수분리'를 찍은 사진들로 이뤄진 '마을 삼부작'에 이은 '역사 삼부작'으로 부르며 "머나먼 옛날에 역사의 흐름 속에 잠겨버린, 이 땅의 사람들이 새긴, 이 땅의 지문(指紋)을 찾아헤맨 결과"라고 말한다.

168. 전통 문화는 엘리트의 경험, 특별한 재능을 타고난 사람들의 경험에서 나옵니다. 이들의 귀는 우주의 노래에 열려 있어요. 이들이 민중에게 이야기하면 민중에게서 반응이 생기는데, 이 작용과 반작용이 상호작용을 하는 겁니다. 민중의 문화를 빚겠다는 최초의 충동은 위에서 생겨나는 것이지 아래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173. "귀신을 몰아낸답시고 그대 안에 있는 가장 귀한 존재를 몰아내지 않도록 주의하라", 이런 말을 한 사람이 니체였지요, 아마?

175. 우리가 이를 깨닫지 못하면, 중심은 언제나 다른 사람 안에서 우리와 마주보고 있을 뿐입니다. 이게 바로 신화적인 홀로 서기입니다. 우리가 곧 중심에 있는 산이고, 이 중심에 있는 산은 도처에 있는 것입니다.   개인주의와 공동체주의의 균형, 밸런스, 조화의 영감이 떠오른다. 깨달음의 자리는 이렇게 풍성하구나.4.  희생과 천복178. 조그만 땅다람쥐와 커다란 올빼미가 사는 숲 속에서 자라난다는 것은 아예 다른 세계에서 자라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 모든 것은 생명의 힘과 권능과 마술적인 가능성을 표상하는 존재로서 우리 주위에 있습니다. 이 생명의 힘과 권능과 마술적인 가능성은 우리의 것은 아닙니다만, 그것들이 삶의 일부분이 되면 우리에게로 열리게 됩니다.

   교육환경을 생각하게 된다. 어디서 살까. 어떤 교육을 제시할 수 있을까. 루소의 말처럼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메세지가 필요한가.

179. 우리에게는 여백, 혹은 여백 같은 시간, 여백 같은 날이 있어야 합니다. 그날 조간에 어떤 기사가 실려 있는지도 모르고, 친구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내가 남에게 무엇을 빚졌는지, 남이 나에게 무엇을 빚졌는지 모르는 그런 여백이 있어야 합니다. 바로 이 여백이야말로 우리가 무엇인지, 장차 무엇일 수 있는지를 경험할 수 있는 장소입니다.

179. 우리 천복의 정거장은 어디에 있느냐... 우리는 이것을 찾아야 합니다. 오디오를 틀어놓고 좋아하는 음악을 올려 놓아도 좋습니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시시한 음악을 올려놓아도 좋습니다. 좋아하는 책을 읽어도 좋겠지요. 바로 이 성소에서 다른 삶을 '그대'라고 부르는 것을 체험하는 겁니다. 초원에 살던 사람들이 이 세상의 만물에 대해 그렇게 했듯이 말이지요.

   일상의 삶속에서 성소를 가지자. 나에게는 집 거실, 개심사 신선당, 미황사 앞마당...

183. 하지만 모든 땅이 다 성지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모든 땅에서 삶의 에너지의 상징을 찾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옛날의 전통은 그랬어요. 그래서 그들은 자기네 땅을 성별했던 것입니다.

183. 프랑스의 조그만 마을 샤르트르를 내 고향 교회로 여깁니다.

   전라남도 해남 땅끝마을 아름다운 절 미황사, 병풍같은 산이 뒤로 있고, 부도전 가는 산책길과 푸른 남해바다. 내 마음의 고향이다. 누구나 그런곳 한곳쯤은 가지고 있는게 좋지 않나.

187. 왜 우리가 새삼스럽게 신화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까? 신화는 우리 삶의 요체인 영적인 삶의 원형과 만나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의례를 접하는 것. 이것이 우리 삶의 질서를 온전하게 바로잡아줍니다.

 실천방법 : 아침 108배, 식사 묵상, 서로 안아주기, 향 피우기... 의례를 만드는 것. 교회든 절이든 일년의 주기에 따라 의례를 행하는 곳에 적을 두는 것도 좋은 방법일듯.

189. 빌 : 오늘날 자연의 본성인 신성은 누가 해석합니까? 누가 우리의 샤먼입니까? 우리를 대신해서,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으로 해석해주는 이는 누구입니까?

그것은 예술가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예술가들이야말로 오늘날에도 신화와 교감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내가 말하는 예술가는 신화와 인간성을 이해하는 예술가이지, 대중에게 봉사하기를 좋아하는 사회학자는 아닙니다.

   재주도 없는 내가 예술가가 되고싶은 이유도 이런것이다. 내 안의 신화와 교감하고 싶고, 내 안의 신성을 만나고 싶고, 표현하고 싶은 것이다. 그런 예술가를 찾아내 소개하는 역할도 괜찮을 듯 싶다. 비평과 평론의 방식으로 대중에게 그들을 소개하자.

190. 방에 앉아서 읽는 겁니다. 읽고 또 읽는 겁니다. 제대로 된 사람이 쓴 제대로 된 책을 읽어야 합니다. 읽는 행위를 통해서 일정한 수준에 이르면,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마음이 즐거워지기 시작합니다. 우리 삶에서 삶에 대한 깨달음은 항상 다른 깨달음을 유발합니다.

마음에 드는 작가가 있으면 붙잡아서, 그 사람이 쓴 것은 모조리 읽습니다. 붙잡은 작가, 그 작가만 물고 늘어지는 겁니다. 그 사람이 쓴 것은 모조리 읽는 겁니다.

그런 다음에는, 그 작가가 읽은 것을 모조리 읽습니다. 이렇게 읽으며 우리는 일정한 관점을 획득하게 되고 우리가 획득하게 된 관점에 따라 세상이 열리게 됩니다.

 캠벨의 독서법이라 할 수 있는 이 방법은 변경연 연구원에서 사용하는 방법과 비슷하다! 다른점은 연구원은 베껴쓰고, 자기글을 쓰는것을 병행한다는 점이다.

193. 사회라는 것은 언제나 부계적입니다. 그러나 자연은 항상 모계적입니다.

198. 서남 아메리카 문화권의 신화에 따르면 최초의 인간은 대지에서 나옵니다. 이들은 대지에 뚫려있는 구멍을 통해 나오는데, 이  구멍은 지금도 성소가 되어 있습니다. 즉 축이 되는 중심인 거지요. 이 중심은 대개 어떤 산과 밀접한 관계를 맺지요.

  우리에게도 비슷한 신화가 있다. <제주도의 삼성혈 신화>

 제주도의 고(高)·양(梁)·부(夫)씨의 3시조 격인 고을나(高乙那)·양을나(良乙那·梁乙那)·부을나(夫乙那) 세 신인(神人)이 각각 솟아났다는 신화가 전하는 유적으로 모흥혈(毛興穴)이라고도 한다. 3신인은 수렵생활을 하다가, 지금의 온평리 바닷가에 떠밀려온 나무궤짝 안에서 나온 벽랑국(碧浪國)의 세 공주를 각각 맞이하여 혼인하고, 세 공주가 가지고 온 오곡(五穀)의 씨앗, 송아지, 망아지를 가지고 농경생활을 시작하면서 오늘의 제주도를 이루었다고 전한다.

 

201. 현존하는 모든 세대는 다음 세대가 오게 하기 위해서는 죽어야 한답니다.

203. 삶의 모습 자체는, 반드시 삶의 행위를 통해서 깨달아야 한다는 거지요.

204. 절에 가보면 두 문지기 중 하나는 입을 벌리고 있고, 하나는 입을 다물고 있어요. 이것은 두 대극, 즉 공포와 욕망을 상징합니다. 에덴 동산으로 들어가려고 하면 이 두 문지기가 우리를 위협합니다. 만일에 우리가 우리 삶을 두려워하면 동산 안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자아'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난 상태에서, '자아'라고 하는 것이 더 크고 영원한 전체성의 한 기능임을 깨닫는다면, 작은 것이 아닌 큰 것을 섬긴다면, 이런 문지기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무사 통과할 수 있는 것이지요.

   도깨비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이유. 도깨비를 사라지게 하는 방법을 떠올리자. 절에 가서 일주문을 지날 때마다 이 상징을 기억하자.

205. 모든 드러남의 이면에는 빛으로 만물을 비추는 하나의 광원이 있어요. 예술의 기능은 창조 작업을 통해 이 광원을 드러내는 일입니다.

잘 짜여진 예술 작품을 볼 때마다 우리는, 아, 하고 감탄하고는 합니다. 이렇게 감탄하는 까닭은 이 작품이 우리 삶의 질서를 드러내고, 종교가 회복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하기 때문이겠지요.

  이런 예술작품을 만들자! 이런 예술작품을 드러내서 세상에 소개하자.

206. ... 목을 잘리는 거지요. 삶에서 승리한 자만이 제물이 될 수 있다. 이게 바로 희생과 관련된 옛날의 관념입니다.

209. 죽는다는 것은 다시 태어난다는 것이라는 근본적인 테마를 드러내고 있어요.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죽어야 한다는 겁니다.

211. 우리의 진정한 실재는 모든 생명을 동일시하고 통합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213. 시간이 존재하면 고통이 있게 마련입니다. 과거 없이 미래를 맞을 수는 없는 법입니다. 아무리 현재를 사랑해봐야 현재는 곧 과거가 됩니다. 상실, 죽음, 탄생......상실, 죽음, 탄생...... 삶은 이렇게 돕니다. 십자가를 명상한다는 것은 곧 삶의 신비의 상징을 명상하는 것입니다.

217. 미로는 앞길을 막는 존재인 동시에 영생으로 들어가는 길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신화의 궁극적인 비밀입니다. 삶의 미로를 뚫고 지나가면 삶의 영적인 가치를 접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신화가 드러내고자 하는 진실입니다.

   미로는 무엇을 상징하는가. 주변사람들의 선입관, 사회구조, 밥벌이, 돈... 후~ 다 날려버리자.

218. 중세 신화에서 가장 위대한 순간은 인류의 마음이 연민의 가슴으로 열린 순간, 즉 '열정(passion)'이 '연민(compassion)'으로 변모한 순간입니다.

220. "하느님이 순종치 아니 하는 모든 사람을 거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라는 이 대목입니다. 우리가 순종하지 않아야 하느님의 자비가 소용에 닿게 됩니다. 순종하면 하느님에게 찬스가 생기지 않는 거예요. 루터는, 하느님의 자비가 얼마나 되는지 궁금하거든 "용감하게 죄를 지어보라"고 했어요.

209.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죽어야 한다.

221. "나는 평생 하고 싶은 일은 하나도 해보지 못하고 살았다". 이런 사람은 자기의 천복을 쫓아보지 못한 사람입니다.

222. 나는 학생들에게 늘,  너희 육신과 영혼이 가자는 대로 가거라.  이런 소리를 합니다. 일단 이런 느낌이 생기면 이 느낌에 머무는 겁니다. 그러면 어는 누구도 우리 삶을 방해하지 못합니다.

   너무도 강력한 메세지. 그 느낌에 머물라~!

225. 부모가 시켜서 선택하는 삶은 바퀴테를 붙잡는 삶입니다. 굴대를 붙잡아야 천복을 누리며 살 수 있어요.

226. 내 의식이 제대로 된 의식인지, 아니면 엉터리 의식인지 모르겠다. 내가 아는 존재가 제대로 된 존재인지, 아니면 엉터리 존재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어떤 일에 천복을 느끼는지 그것은 안다. 그래. 이 천복을 물고늘어지자, 이 천복이 내 존재와 의식을 데리고 다닐 것이다.

 그렇다. 나를 이끄는 그 느낌에 머물자. 어차피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그것뿐이지 않는가? 누구도 방해할 수 없도록 깨어있자.

 사트(존재), 취트(의식), 아난다(천복 혹은 황홀)

227. 천복을 좇으면, 나는 창세 때부터 거기에서 나를 기다리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내가 살아야 하는 삶은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삶입니다.

이걸 알고 있으면 어디에 가든지 자기 천복의 벌판에 사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이 문을 열어줍니다.

  내가 찾은 이 책의 주제문. 번역가 이윤기는 '당신의 천복을 쫓으라' 로 번역했지만, 영어 원문은 'Follow your bliss' 라고 한다. 박중서는 'bliss'를 단순히 '기쁨'이라고 보는 것이 더욱 타당하지, 굳이 이것을 '천복'이라 옮겨 '하늘의 축복'을 연상시켜 오해를 살 필요는 없다고 주장한다. 사실 天福 이라는 단어는 이 책에서 처음 보았다. 한자를 해석해서 의미를 되씹지 않고 그저 문맥상 의미를 느끼며 읽어왔기에 크게 오해하지는 않았지만 박중서의 말대로 '당신의 기쁨, 희열을 따르라'로 읽으면 쉽게 그 의미가 전해진다. 이윤기씨는 너무 쉽게 이 책의 주제가 전해지는 것을 경계했던 것일까? '아난다'라는 말이 뭔가  단순한 '기쁨' 이상의 것이라 여겼기에 '천복'이란 말을 사용했을 수도 있다.

 

5. 영웅의 모험 229. '영웅'이라는 말은 자기 삶을 자기보다 큰 것에 바친 사람을 일컫는 말이지요.

 자아가 우리의 중심이 아니라는 것을 이미지로 보여준다.

235. 물론 반대 입장에서 보면, 영웅이 자신을 희생시켜가면서까지 옹호하려는 관념이 반드시 옳은 것일 수 만은 없지요. 하지만 이것은 반대편 입장에서 보아서 그럴 뿐입니다. 반대 입장의 견해가 영웅이 이룬 업적이 지닌 고유의 영웅적 속성을 훼손시킬 수는 없는 겁니다.

   전태일VS정주영, 노무현VS박정희, 이상VS피카소 누가 영웅인가?

239. 우리 삶이 우리 기질의 잠을 깨웁니다. 우리 자신에게서 무엇인가를 계속해서 찾아볼 필요가 있어요. 현실로 드러나는 우리 모습 이상의 무엇을 촉발시킬 만한 상황으로 자신을 던져넣을 필요가 있는 것은 이 때문이지요.

  내가 변경연 연구원에 도전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글쓰는 재능도 없는데 어찌 책을 내나? 라는 의문에 휩싸여 있지만 지금의 모습 이상의 것을 상상하며 연구원이라는 과정에 나를 던져넣으려는 것이다. 그리고 272쪽의 캠벨의 말이 힘을 준다.

240. 영웅이 대적하러 달려나가던 세계는 기계적인 세계가 아니라 살아 있는 세계, 영웅의 영적인 준비에 반응하는 세계였어요. 그런데 이 세계가 지금은, 우리의 물리학, 마르크시스트 사회학, 행동심리학 등을 통해 해석되는 순전히 기계적인 세계가 되고 말았어요.

  그렇다고 물리학자, 사회학자, 심리학자들을 기계적인 사람이라 편견을 가지진 말자. 영웅적인 물리학자, 사회학자, 심리학자도 분명 있다.

241. 가족을 부양하는 많은 사람의 삶은 대단히 고단합니다. 이건 정말 끝없는 소모전이지요.

242. 고대 그리스 문화권의 최고 기술자였던 다이달로스... 산업이나 과학이 비난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가엾은 이카로스는 바다에 떨어져 죽었지만, 바다와 태양의 중간을 날았던 다이달로스는 바다를 건너 다른 나라 해변에 착륙하지 않았습니까?

   과학문명에 대해 이야기할때 다이달로스의 예를 들면 좋겠다. 결국 인간이 문제다. 인간이 해결의 실마리다.

 244. 과학은 바야흐로 신비주의의 차원으로 넘어 들어오고 있어요. 과학은 머지 않아 신화가 이야기하고 있는 세계로 밀고 들어올 겁니다. 벼랑으로 접근하고 있지요.

245. 분열 증세를 보이는 이 모든 경향을 한곳으로 모아 바람직한 목표를 향하게 할 수 있는 별자리 같은 이미지가 필요한 거지요.

248. "헛되도다,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 이런 끔찍한 말이 있지요? 하지만 이 말에서도 모든 것이 헛된 것만은 아니랍니다. 이런 말이 나오는 순간은 헛된 순간이 아니라 승리의 순간, 열락의 순간인 것이지요. 승리의 순간에 맞게 되는 이 완전성의 정점에 가해지는 악센트, 대단히 그리스적이지 않습니까?

   가보지도 않고 인생무상, 헛됨을 얘기하지 말자. 일단 가보자. 정상에 오르자. 내인생의 정점으로! 어차피 인생은 꿈이 아니던가.

251. 이 새로운 것을 세우기 위해서 영웅은, 기왕에 살던 땅에서 새로운 것을 싹 틔울 잠재력이 있는 씨앗을 찾아 떠나야 합니다... 우리 삶 역시 탐색의 여행에서 나온 것입니다.

   난 어디로 떠나야 하나. 이곳저곳 기웃거린 곳은 많은데, 거기에 머물지 못하고 떠나왔네. 하지만 다시 시작할 수밖에... 우선 변경연을 통해 책속으로 여행을 떠나자.

252. 소년은 먼저 어머니에게서 떨어져야 하고, 삶의 에너지 전부를 자기에게 쏟을 수 있어야 합니다.그래야 어른이 됩니다.

253. 십자가 중에는 '승리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십자가도 있어요. 이 십자가에 달린 예수는 고개를 숙이고 있는 예수, 피를 흘리고 있는 예수가 아니라, 흡사 자진해서 십자가까지 온 사람 모양으로 고개를 꼿꼿이 세우고, 눈을 뜨고 있는 예수랍니다.

   캠벨은 1987년 하와이에 있는 성 프란시스 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이 세상을 떠났다. 그의 병실에는 그리스도의 승리를 상징하는 청동상이 벽에 걸려있었다고 한다. 환희에 차 팔을 벌리고 있는 그리스도의 모습이었다. 캠벨의 부인인 진 에드먼은 그의 마지막 순간을 이렇게 표현했다. “그는 그 순간을 기다리며 기대감에 차 있었다. 그에게 그 순간은 아버지와 하나 되는 상태를 나타내는 그리스도의 신비적 의미였기 때문이다.” 

554. 나이가 들고, 우리가 알던 사람, 우리와 함께 사는 사람들이 우리에게서 사라지고, 세계 또한 사라져가는 것처럼 느껴질 때, 그때 비로소 '마야'의 신화가 가슴에 와 닿지요. 그러나 젊은이들에게 세계는 더 만나야 하는 것, 더 살아야 하는것, 더 사랑해야 하는 것, 더 배워야 하는 것, 더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신화가 필요하지요.

   그렇다면, 마야에 관한 칼럼은 마지막 부분으로 넣도록 하자. 상징과 암시를 사용해서. 지금은 젊은이를 대상으로 한 글쓰기를 시도하자.

255. 이야기는, 우리 곁에 없는게 아니라 이렇게 있어요. 종교에 있어요.

258. 내게는 일이 있기 때문에 죽음이 두려운 거예요. 책을 완성해야 한다는 욕망이 없다면 죽는 거야 언제 죽어도 좋아요.

 이 책이 나오고 2년뒤에 캠벨은 죽음을 맞이했다.

261. 한 인간이, "쇼를 연출하는 게 나 자신이 아니구나" , 이런 걸 깨닫는 시기가 바로 사춘기에요.

263. 아이들이 달력을 보면서 휴일을 손꼽아 기다리는 것은 휴일이 되어야 저 자신에게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263. 신화가 암시하는 첫째 방법은 신화자체, 또는 영적인 지도자나 스승을 따르라고 가르칩니다. 만일에 그런 말을 들려줄 스승이 없으면 스스로 창안한 방법으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책 역시 실마리를 던져줄 수 있습니다.

   내 인생의 스승들, 장길섭목사님, 금강스님, 요가를 알려주신 김제창선생님, 그리고 지금 만난 구본형 사부님. 난 참 좋으신 분들을 많이 만났구나.

265.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보아야 합니다. 이 조직은 우리를 식물인간으로 만들어,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인간성을 부정하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 조직이 과연 우리 인류의 목적을 이루게 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이 조직과 어떻게 관계되어 있는가? 이 조직을 더 이상 섬기지 않을 도리가 없게 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 생각의 체계에 맞게 이 조직을 바꾸고자 하는 것은 헛수고입니다. 이 조직의 배후에 작용하는 역사적인 힘은, 그 정도의 행동은 의미도 없을 만큼 거대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지요?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인간으로서 우리가 속한 시대의 역사를 사는 법을 익히는 일입니다.

우리의 이상을 움켜 안고, 루크 스카이워커처럼, 조직이 가해오는 비인간적인 압제에 저항함으로써요.

 공기업이라는 조직속에서 내가 할 일. 참된 나자신을 잃지 않고 비인간적인 압제에 저항하라! 나의 화두다. 캠벨도 압제에 저항했을까? 종교적인 이유로 많은 핍박과 누명을 썼을 법 싶다. 스스로 강해져야 한다. 아니 물처럼 부드러워져야 한다. 나답게.

266. 너는 가슴으로 사는 사람, 인간성을 섬기는 사람이겠느냐, 아니면 음험한 세력이 요구하는 대로 하며 사는 사람이겠느냐, 이렇게 묻고 있는 겁니다.

270. 의식은 기가 한풀 꺽인 상태에서 우리 인간성을 섬겨야 하는 존재이지, 우리의 주인 노릇을 해도 좋은 존재는 아닌 것이지요. 의식이 통제하게 될 때 <스타워즈>의 다스 베이더 같은 인간이 생깁니다. 이런 인간은 의식적이고 의도적인 것만 편들지요.

272. 괴물을 죽인다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어둠을 죽인다는 것입니다. 신화는 우리를 사로잡되, 우리 심층에 있는 것을 거머쥡니다. 내가 인디언 이야기를 읽고 그랬듯이 모이어스 씨도 그랬군요.

272. 천복을 찾아내되, 천복 따른 것을 절대로 두려워하면 안 됩니다. 만일에, "아니, 내가 그걸 어떻게 할 수 있어?" , 이렇게 생각한다면 이게 바로 우리 안에 갇혀 있는 용입니다. "안 돼, 나는 작가가 될 수 없을 거야"라든지... "나는 아무개가 하는 일을 도저히 할 수 없을거야", 이런다면 이게 바로 우리 안에 갇혀 있는 용입니다.

   내가 어떻게 사진작가가 될 수 있겠어? 사지비평가는 더욱 안되지, 언어적 재능도 부족하고, 공대나온 엔지니어가 뭐 그런걸 할 수 있겠어. 내가 위대한 사람이 된다고? 아이고 평범하게 살기도 힘들다. 내가 회사를 그만두고 뭔가를 한다고? 말아먹기 쉽상이지. -내 안의 용의 속삭임-

273. 우리 자신을 구하면 세상도 구원됩니다. 생명력이 있는 인간의 영향력이 다른 사람들에게 생명을 부여한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사람들에게는 무엇 무엇을 바꾸고, 법을 바꾸고 하다 보면 세상이 변할 것이라는 생각이 있는데, 천만에요! 어떤 세상이든지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세상은 나름대로 유효합니다. 우리가 해야하는 일은 여기에 생명을 부여하는 일입니다. 생명을 부여하기 위해서는 그 생명이 우리 안 어디에서 나왔는가를 알아내어야 합니다. 연후에 우리 자신의 튼튼한 삶을 사는 겁니다.

274. 자기가 지키고 있는 것이 어디에 소용이 될는지도 모르고 그저 지키기만 하는 거지요. 사람들 중에는 그런 사람이 있지요? 우리는 이런 사람을 자린고비라고 부릅니다. 이들에게서는 나오는 삶이 없어요. 주는 삶이 없어요. 그저 남에게 빌붙어 돌면서도 죽자고 자기 삶의 방식에만 매달립니다.

   주는 만큼 받을 것이다. 내가 세상에 무엇을 줄수 있을까 고민하고 실천하자.

275.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아리아드네의 실뿐이지요. 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실뿐인데도, 우리는 우리를 구해줄 재물, 우리를 구해줄 권력, 우리를 구해줄 사사을 찾아 엉뚱한 곳을 헤메지요.

 미로에 들어갈 때 실타래를 가지고 들어간 아리아드네의 이야기를 말한다. 실을 따라 나오면 미로를 나올 수 있다. 여기서 실은 '천복', '황홀' , '기쁨'을 상징하는 것이다. 선생님 소리를 듣는 사람들이 해야할 일이 이 아리아드네의 실을 찾을 수 있게 도와주는 일이라고 캠벨은 말한다.

276. 수련하기를 가르치는 스승도 있습니다만, 글쎄요, 수련으로는 될 것 같지 않군요. 스승이 할 수 있는 것은 암시입니다.

278. 죽음을 이해할 수는 없어요. 죽음과 화해하는 법을 배워야 하는 것이지요... 죽음을 받아들여야, 삶의 반대 개념으로서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삶의 한 측면으로서의 죽음을 받아들여야, 우리는 무조건적인 긍정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공포의 극복!

   도깨비를 사라지게 하는 방법. 받아들임.

279. 지금 내가 지니고 있는 이 모습은 '나'라는 존재의 궁극적인 모습이 아니에요. 우리는 우리가 이미 성취한 자기성을 끊임없이 버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285. 새끼 새들은 날때가 되었다는 것을 알고 실제로 나는데 틀림이 없어요. 새끼 새들은 나뭇가지에 앉아 나는 방법을 연습하고는 날아갑니다. 내 생각에는, 사람에게도 안에는 이런 것이 있지 싶어요.

285. 스승 소리를 듣는 사람은 마땅히, 제자에게 날 준비가 되어 있는지 여부를 먼저 알고 때가 되면 날게 해주어야 합니다.

286. 우리는 자기가 어디에 와 있는가를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야 하는 삶은 딱 하나뿐입니다. 주의를 기울이는 수밖에 없지요.

286. 행복을 찾으려면, 행복하다고 느껴지는 순간을 잘 관찰하고 그것을 기억해두어야 합니다. 내가 여기에서 '행복'하다고 하는 것은, 들떠서 행복한 상태, 흥분해서 행복한 상태를 말하는게 아닙니다. 진짜 행복한 상태, 그윽한 행복의 상태를 말합니다. 무엇이 나를 행복하게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나오면, 남이 뭐라고 하건 거기에 머물면 되는 겁니다. 내 식으로 말하자면, '천복을 좇으면 되는' 겁니다.

 연구원 1차 관문인 개인사를 쓸때, '내인생의 가장 인상깊었던 장면 3가지'에 썼던 장면들이 떠오른다. 내 인생의 절정경험, 그윽한 행복의 상태 였던 그 순간에 머물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행동하자. 옹달샘 공부방을 만들때의 경험, 인도에서 요가학교를 중단하고 여행을 떠나던 순간, 다시 한국 사회에 직장인으로 자리잡던 순간을 기억하라.

287. 그런데 어머니가 정해준 범위를 넘어서지 않으면, 기존의 질서를 부수지 않으면, 기존의 법을 어기지 않으면 창조적인 행위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쩐다. 나는 기존 질서의 수호자로서의 신념이 강하지 않은가. 생각은 그렇지 않지만 난 규칙을 옹호하는 보수주의자이기도 하다. 어떻게 항아리를 걷어찰 수 있을까. 그 순간에 깨어있으리라.

296. 살면서도 고통을 당하지 않을 수 있다고 하는 신화는 읽어본 적이 없어요.

297. "고통에서 놓여나고 싶거든 고통이 곧 삶이라는 것을 부정하지 말고 용감하게 인정하세요. 우리는 오로지 고통을 통해서만 고상한 존재가 될 수 있답니다." 더구나 우리가 처한 상황이 어려우면 어려울 수록 우리에게 동화시키기가 까다로우면 까다로울수록 이것을 성취한 인간은 그만큼 더 위대해지는 거랍니다.

297. 나라는 인간에게 고통의 기억이라고는 고작 치통의 기억밖에는 없지 않은가!

298. 조이스는 "인생이라는 게 우리가 히 세상에 흔적을 남겨야 할 만큼 가치 있는 것인가?" , 이런 질문을 남겼어요.

299. 우리가 이르러야 할 궁극적인 목적지는 우리 안에 있어요... 우리는 이 정점을 찾아내어 우리 의지로 장악해야 합니다. 이 중심을 잃으면 긴장이 생기고 긴장이 생기면 우리의 주의는 분산됩니다.

 캠벨은 탓해야 할 것은 우리 자신밖에 없다고 말한다. 외부로 쏠려있는 에너지를 내면으로 돌리라는 강한 메시지다. 하지만 전쟁터에 징집당한 젊은이들에게 해주는 말에서는 의문을 일으킨다. "징집당했다 여기지 말고, 자발적으로 참여한 것으로 여기라" , 이런 조언은 전쟁을 옹호하는 듯 들린다. 지금의 사회가 혼란스럽고, 부조리한 것은 당연한 것이니 사회를 바꾸려 하지 말고 당신 자신의 내면 탐구나 하시오! 라고 들린다. 보수적인 할아버지의 잔소리 처럼 들리기도 한다.

301. 진정한 예술가는, 조이스의 이른바 만물의 '광휘'를, 그 자체가 가진 진리의 드러냄으로 인식하고 해석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나는 보통 사람이라는 게 있다는 사실 자체도 믿지 않아요.

 빌 모이어스를 진정한 예술가라고 표현하고 싶은 마음을 내게 했던 문장. 왜냐하면 캠벨이라는 사람이 가진 '광휘'를 드러내어 해석해주었으니까. & 우리 모두가 특별한 재능을 가지고 있고, 모두가 진정한 예술가가 될 수 있다.

302. 내가 추천하고 싶은 두 방법이 종교와 예술을 통해 이르는 방법입니다. 삼엄한 철학으로는 이를 수 있을 것 같지 않아요. 학문이라는 것은 개념이 정교하게 얽힌 숲 같은 것이니까요. 그러나 타인에게 자비의 문을 열고 온 가슴으로 사는 삶은 누구에게나 가능하지요.

303. 신화는 시, 신화는 메타포일 뿐이에요. 신화가 궁극적 진리에 버금가는 진리라는 말은 신화를 정말 잘 나타낸 말입니다...가장 중요한 문제는 우리 삶의 모험을 진심으로 반길 수 있는냐, 없느냐 하는 것이지요.

   신화를 언어로 풀어서 진리를 보여줄 수 있을까? 신화자체가 가진 은유 그대로 읽게 해도 좋겠지. 언어로 풀어서 설명하고 사진과 글로 직관적인 표현을 더하는 방법도 좋을 듯 하다.-->칼럼의 형식 고민

6. 조화여신의 은혜307. 개성은 아버지에게서 물려받고, 몸과 때로 마음은 어머니에게서 물려 받는 다는 말이 있어요.

315. 오늘날 이 지구에는 무리 외적인 이방인이라는 게 더 이상 있지 않아요. 오늘날의 종교에서 중요한 것은 전 인류 사회를 향하여 그런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는 겁니다.

319. 자기 삶에 집착한 나머지 남의 먹거리가 되어주지 않는 것도 삶을 거부하는 굉장히 부정적인 사고방식이지요. 그렇게 하면 생명의 흐름이 끊겨버립니다. 우리도 언젠가는 우리 자신을 주어야 할 거에요.

   나는 무엇을 줄까? 나 자신의 삶. 글과 사진으로 '광휘'를 드러내주는 예언자. 사진 워크샵을 통해 삶의 중심을 찾게 도와주는 교육자. 유스호스텔을 운영하며 삶의 여행자들에게 도움을 주는 운영자.

320. 언제 동물적인 인간에게서 영적인 인간이 탄생하나 : 우리 가슴 가까이 있는 중심을 깨닫고 자비를 실천할 때, 곧 함께 슬퍼할 수 있을 때, 다른 사람의 고통에 참여할 수 있을 때 생깁니다. 바로 이 중심에서 인간성이 비롯됩니다. 종교적인 명상도 바로 이 중심에서 이루어집니다.

320. 누가 신인지 아세요? '우리'가 곧 신이이에요. 이 모든 신화의 상징이 수다스럽게 말하는 게 바로 이것이라고요.

 캠벨이 수다스럽게 이야기 했던 것도 바로 이것이다. 결국에 참지 못하고 직접적으로 얘기해버리셨다. 이 책의 좋은 점은 바로 이것이다. 신화로 애둘러 얘기하지 않고, 직접적인 주제로 들어가는 점.

333. 우리는 어떤 경우에든, 참여하지 않으면 상호 작용을 일으킬 수 없어요. 하느님을 '절대 타자'로 보는 관념이 엉터리인 까닭이 여기에 있어요. '절대 타자'와 나 사이에는 상호 작용이 있을 수 없지요.

   기독교 신학에서 '성부,성자,성령'이라는 삼위일체 개념이 나오게 된 것도 하느님과 우리의 상호작용을 설명하기 위해서라고 알고있다.

336. 우주와 우리가 별개가 아니라 결국은 하나라는 인식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 이것이 신화인 것입니다.

   하나라는 인식 후의 삶은 어떤것일까?

336. 우리가 우주로 나갈 때 가져가는 것은 바로 우리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변하지 않으면 우주도 우리를 변하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주에 관한 우리의 생각이 깨달음에 이르는 단서가 되기는 합니다.

   인도여행을 할때의 느낌이 떠오른다. 하루종일 기차를 달려 어느 곳을 가던지 떨어지지 않던 '나'라는 느낌, '내 시야', '내 마음'이라놈은 절대로 떨어지지 않더라.

337. 우리는 이런 데 살고 있어요.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닫는 사람은, 이 광막한 우주의 마이크로비트에 지나지 않는 우리가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가 하는 것도 깨달을 수 있을 겁니다. 그래요. 우리와 이 광막한 우주는 하나라는 느낌을 경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도 이 우주에서 벌어지는 이 엄청난 변화에 참가하고 있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7.  사랑과 결혼 이야기
 

343. 빌 : 결국 사랑을 경험하겠다는 용기가 전통에 반하는, 다시 말해서 교회 전통에 반하는 자기만의 경험에 뛰어들게 했겠군요. 그런데 이게 어째서 서구 문화에 기여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까?

바로 그 용기 덕분에 서구 문화에서 개인이 중요해지는 겁니다.

344. 사람은 죄악을 생각하다 보면 정말 죄인 비슷하게 되니까요. 삶의 의지를 이렇게 짓밟아놓는 것, 이게 바로 '크레도'라는 겁니다.

347. 자기 천복을 따를 때는, 어떤 사람의 어떤 협박에도 두려워하지 않을 자신이 있어야 합니다. 무슨 일이 생기든지 '내' 삶과 행동은 나름의 가치를 지녀야 하는 겁니다.

   천복을 따르는것도 쉽지가 않구나. 아름다움을 좇는 일이 즐겁고 행복한 것만은 아니구나. 신화로부터 삶을 배운다.

350. 서구 선진 사회는, 개인을 살아 있는 실재로 인식하고 존중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그러므로 사회의 기능은 반드시 개인을 기를 수 있어야 합니다. 결국 개인을 꽃피게 하는 것이 사회의 기능이지, 사회를 꽃피게 하는 것이 개인의 기능은 아니라는 겁니다.

 캠벨의 서구사회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한 듯하다. 277쪽에서 캠벨은 동양의 전통적인 사회, 거의 모든 전통 사회를 기계로 묘사했다. 개인은 그 기계에서 찍어낸 과자와 같다고 말한다. 서구사회 이외의 전통사회가 이렇게 폄하되어도 되는가? 서양과 동양의 소통의 문제는 이 책을 넘어서는 문제이므로 깊게 따질 필요는 없지만, 개인적으로 탐구해보고 싶은 부분이다.  동양은 어디를 말하는가? 서양과 동양의 문화가 비빔밥처럼 섞인 한국사회를 사는 개인으로서 나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서양과 동양의 범주를 넘어서는 다양한 문화들 또한 많은데 그 의미는 무엇인가?

354. 음유시인들의 가슴속에는 없는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게 바로 권력에의 의지에요. 그들의 가슴에 있었던 의지는 개인적인 경험에의 의지와 이 경험을 통한 자기 존재의 승화에의 의지에요.

358. 영적인 삶이라는 것은 인생의 꽃이자 향기인 동시에, 개화이자 성취이지, 초자연적인 존재에 의해 주어진 미덕이 아니라는 겁니다. 따라서 삶을 삶답게 하는 것은 자연의 충동이지 초자연적인 권위에서 내려오는 율법이 아닌 것입니다. 이게 바로 성배 전설의 상징적인 의미인 것이지요.

   영적인 삶에 대한 의미가 새롭게 다가온다. 이제는 캠벨의 사상이 내 속에 자리잡은 느낌이 든다. 깊이 읽기의 힘인가?

359. "싫습니다. 저는 아내를 벌겠습니다. 주어지는 아내는 싫습니다." 이게 바로 유럽의 시작입니다. 개인주의가 꽃피는 유럽, 성배 전설이 있는 유럽의 시작이라는 겁니다.

361. '나'는 이 모듬살이로 태어났으니까, 모듬살이라고 하는 울타리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모듬살이의 울타리에 살지 않겠다는 것도 우스운 일이지요. 왜냐, 살지 않으면 살아 있을 수 없기 때문이죠. 그러나 이 모듬살이가 나에게, 이래라, 저래라, 이렇게 살아야 한다, 이렇게 간섭하고 나서는 것은 용납해서는 안 됩니다... 삶의 어려움 중 하나는 모듬살이가 베풀어주는 마당 안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 삶을 실제로 버티어주는 것이 모듬살이가 될 때 이 삶은 그만큼 더 어려워집니다.

363. 요하힘 주교 : 1260년경 세번째 시대가 바야흐로 시작되려 한다고 쓰고 있어요. 세번째 시대는 성령이 개인에게 직접 말을 거는 시대라는 겁니다. 이 시대는 말씀으로 된 메시지를 육화시키거나, 그 삶으로 살아내는 사람은 그리스도와 다 동등한 존재가 된다. 이게 바로 이 세 번째 시대의 핵심입니다. 그러니까 기독교 교회가 생기면서 이스라엘이 고물이 되어버린 것처럼, 개인적인 경험이 생기면서 이번에는 교회가 고물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은 2011년. 아직도 그 시대를 살고 있는가? 교회가 필요한 시대가 도래하지는 않았나. 잃어버린 큰 이야기(종교, 신화, 공동체)가 필요한 시대가 아닌가 하는 말이다.

365. 결혼을 하고도 그 결혼을 가장 큰 관심사로 치지 않는 사람은 결혼한 사람이 아니지요.

365. '내'가 아내에게 헌신한다면 그것은 아내라고 하는 여성에게 헌신하는 게 아닙니다. '나'와 아내가 이루고 있는 관계에 헌신하는 거죠.

367. 눈은 보이지 않아도 직관만 있으면 모르폴로지, 즉 사물의 근본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겁니다.

370. 사랑의 고통이란 다른 고통이 아니라 곧 삶의 고통입니다. 고통이 있는 곳에 삶이 있는 거죠.

8. 영원의 가면

375. "해 지는 광경의 아름다움이나 산의 아름다움 앞에서 문득 걸음을 멈추고, 아! 하고 감탄하는 사람은 벌써 신의 일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이다" <우파니샤드>

377. 빌 : 이런 에너지는 어디에서 옵니까?

우리의 삶에서, 우리 몸이 지니는 에너지에서 나오지요. 우리 몸의 각 기관은 우리 몸 안에서 서로 맹렬하게 갈등한답니다.

379. 한 가지에만 정신을 집중시키면 상상력에 따라 갖가지 차원의 신비 체험이 가능해지는 것이지요.

379. 언어 밖에 있는  깨달음에 이르려면 하느님의 이미지부터 넘어서야 합니다. 분석 심리학자 융 박사는 "종교는 하느님의 체험에서 인간을 방어하는 수단"이라는 아주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 있어요.

379. 우리가 뛰어넘어야 하는 것은 우리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예수의 이미지입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어떤 신의 이미지는 결정적인 장애, 궁극적인 장벽이 되는 수가 많아요. 자기의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은, 자기 나름의 소아병적 생각에 집착해 있는 사람은, 하느님에 대한 어마어마하게 큰 체험,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것보다 큰 체험이 접근해오는 순간에는 자기 마음속에 있는 이미지에 매달림으로써 거기에서 도망쳐버리려고 합니다. 이걸 사람들은 신앙으로 오해하고는 하지요.

 대학1학년때 <예수와 만난 사람들>이라는 이현주목사님의 책을 읽었다. 그때 내가 교회에서 배운 관념들이 깨지고 진짜 예수를 만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하나님으로서가 아니라 사람 냄새 나는 길거리의 예수를 만난 충격이 컸다. 나무 위에서 멀리 예수를 찾던 삭개오의 간절한 마음이 되어 예수를 만나고, 평생 눈 먼자로 살다 예수를 만나 눈을 뜬 소경의 깨침의 순간을 느끼며 나를 감싸던 교리들도 깨지는 느낌이었다. 그 뒤로 민중교회도 다니고 절에도 다니고, 인도에 가서는 종교의 넓은 바다를 맛보니 교회에 다닌다는 것 자체가 큰 의미는 없어졌다. 하느님에 대한 체험은 교회안에서만 있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381. 그리스도는, 자기와, 자기가, ''아버지'라고 부르는 이가 사실은 하나임을 깨달은 역사적인 인물입니다.

381. 힌두교 경전에 보면, "오로지 신만이 신을 섬길 수 있다"는 말이 나와요. 신을 경배하고 신의 말씀에 따라 살자면 '나' 자신과 그 신이 표상하는 영적인 원리를 동일시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겁니다.

383. 특정한 대상을 잠재적인 적으로 만들고, 그들에 대한 우리의 공격을 정당화시키자면, 증오와 오해와 멸시의 공작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공작의 메아리가 지금 이 시간에도 도처에서 들리고 있군요.

   천안합, 연평도 사건, 북한에 대한 증오는 어느정도 공작된 것이다. 북한 사람과 남한 사람 둘 사이에 싸울일이 무엔가? 어깨걸고 함께 춤이나 추고 싶을 뿐이지 않나.

384. 나는 자비를 근본적인 종교 체험이라고 믿는 사람입니다.

386. "아버지의 왕국은 너희가 생각하는 것처럼 어느 때 오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의 왕국은 이 세상 도처에 널려 있으나 사람이 그것을 보지 못하는 것뿐이니라." <토마복음>

386. 예수는 "내 입으로 마시는 자는 나와 같이 될 거이고 나 또한 그와 같이 될 것"이라고 했지요. 누구든 그 존재와의 관계 안에서 살면 그리스도 같을 수 있다는 겁니다. 누구든 말씀의 메시지를 삶 속으로 동화시킬 수 있으면 곧 그리스도와 동등해질 수 있다. 

387. 빌 : 삶의 본원은 무엇입니까?

남의 삶에서 '나'의 삶을 인식하는 것, '나'와 남은 둘이지만 살고 있는 삶은 하나임을 인식하는 데서 출발하겠지요.

388. 상호 연결되는 상태를 드러내는 것, 이것이 곧 종교인 겁니다.

389. 원은 전체성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원은 바로 시간의 장과 공간의 장에서 완결된 완전성을 상징하는 겁니다.

392. 만달라를 그려본다는 것은 우리 삶의 흐트러진 여러 측면을 한 자리에 모으는 훈련 방법이 될 수 있어요. 이렇게 하면 중심을 찾아 여러 측면에 질서를 부여할 수 있을 테니까요. 결국 우리 자신의 원을 우주적인 원과 상호 관계를 맺게 하는 작업입니다.

   만달라의 의미

393. 신화적인 이미지를 통해서 말이지요. 이미지는 우리를 도와 우리 자신과 상징적인 힘의 동일시를 가능하게 합니다. 자기 자신과 범용해 보이는 어떤 대상의 동일시는 쉬운 것 같아도 사실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범용해 보이는 것에 깨달음의 촉매라는 가치를 부여하면 이때부터는 이 범용해 보이는 것이 상당한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신화의 이미지를 읽는법

393. 우리의 정신 안에는 인류의 공통되는 어떤 힘이 있다는 뜻이지요. 그렇지 않고는 그렇게 자세한 데까지 같을 수가 없어요... 신화의 이미지는 우리 모두의 영적 잠재력을 반영하고 있어요.

 칼융의 '집단무의식'을 이야기하는 듯하다. 제임스조이스, 토마스만, 괴테, 니체, 융 은 그의 사상의 기반이 된 거인들이다.

394. 삶의 시작에는 두려움도 없고 욕망도 없어요. 그냥 시작되는 것일 뿐이에요. 그러다 존재하게 되니까 여기에서 두려움과 욕망이 시작되는 겁니다. 두려움과 욕망을 버리고, 우리가 시작되었던 바로 그 한 점으로 돌아가보세요. 이 한 점이 바로 요체랍니다.

396. 우리는 신화 이미지를 메타포라고 부르지, 사실이라고 부르지는 않거든요. 신화 이미지는 우리의 내적 체험과 삶을 위한 메시지가 됩니다. 이 메시지를 받아들이면 신화 체계는 문득 우리의 개인적인 체험이 되는 것이지요.

397. 어떤 사고 체계를 지닌 사람에게든 사고 체계 자체가 무한한 삶의 의미일 수는 없어요. 어떤 사고 체계에 만족하고, 이만하면 정리가 된 셈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장난꾸러기 신이 끼여들면 모든 것은 난장판이 됩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 자체가 바뀌면서 거듭 태어나게 되는 것이지요.

398. 절정 경험이라는 것은 우리 삶에 실재하는 어느 한 순간에 하는 경험입니다. 존재의 조화와 나 자신의 관계를 경험하는 순간이 바로 이 순간입니다.

399. 진정한 미학적 체험은 그것을 체험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대상을 비평하지도, 거부하지도 않게 해야 합니다. 우리로 하여금 대상을 비평하고 싶게 하고 거부하고 싶게 하는 예술 작품을, 그는 도학적인 작품, 혹은 예술 자체가 지닌 사회 비평 기능이라고 부르지요.

399. 미학적 체험은 그저 그렇게 대상을 바라보는 경험이어야 합니다. 예술 작품이란 액자에 넣어 두게 하고, 처음에는 그저 바라보게 하고, 다음에는 그것이 작품임을 느끼게 하고, 다음에는 부분과 부분의 관계, 다음에는 부분과 전체, 그 다음에는 전체와 각 부분의 관계를 깨닫게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작품이 지녀야 하는 필수적인 미학적 요인입니다. 예술가가 복선으로 깔아놓은 우연한 리듬에 감동을 받을 때 우리는 여기에서 빛을 경험합니다.

 401. 예술 작품에는 다른 측면의 정서가 있어요. 즉 아름다움의 측면이 아닌 장엄함의 측면입니다. 우리가 괴물이라고 부르는 것에서도 장엄함은 경험할 수 있습니다. 왜 장엄한가 하면 이들은 정상적인 생명의 형상은 감당할 수 없는 어마어마하게 큰 힘을 표상하고 있기 때문이다. 광대무변한 우주는 장엄합니다.

402. 내가 여기에서 괴물이라고 하는 것은, 조화와 질서와 윤리적인 행동에 대한 우리의 기준을 송두리째 무너뜨려버리는 무서운 존재, 혹은 무서운 도깨비를 말합니다.

403. 수도하는 자가 자기의 자아와, 고통과 기쁨이 함께 하는 속세의 일, 그 달콤하던 삶에 연연할 경우 신이 나타나되 분노로 치를 떠는 측면을 보이면서 나타납니다. 그러나 자아를 잊고 자신을 포기하면 다 같은 부처라도 이번에는 천복을 주는 부처로 나타납니다.

404. 바로 이 자리에서 경험하지 못하면 천국에 가서도 경험하지 못합니다.

405. 시간이 있는 데엔 슬픔이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합니다. 이 슬픔은 우리의 온 존재를 뒤덮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삶의 참 모습입니다.

409. 나는 부모님을 잃었고 많은 친구도 잃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문득, 나는 그들을 잃은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았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영원의 체험을 통하여 아직도 나와 함께 하고 있는 셈입니다.

409. 빌 : 선생님께서는 삶의 모든 문제는 '존재하기'와 '되기'를 맴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존재를 느낀다고, 벽을 보며 수행만 한다고 삶이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것, 자기가 되기로 되어있는 것을 체험하면서 삶의 고리들이 이어지는 것.

410. 세상을 빚은 창조의 대폭발로 인해서 생긴 이 에너지는 만물에 시간의 단편을 나누어줍니다. 그러나 시간의 단편을 통하여 원초적인 존재의 광대무변한 힘을 체험하는 것, 이게 바로 예술의 기능입니다.

410. 예술이 '비추어내는 것'이 바로 그것이지요. 신에 대한 예술가의 생각, 신에 대한 사람들의 체험..... 그러나 궁극적인 신비, 무량의 신비는 역시 인간의 체험 너머에 있어요.

411. 시의 언어는 꿰뚫는 언어입니다. 시에서 정확하게 선택된 언어는 언어 자체를 훨씬 뛰어넘는 암시 효과와 함의의 효과를 지닙니다.

사진을 '이미지의 시'라고 표현한다면, 사진에서 정확하게 선택된 이미지는 이미지 자체를 훨씬 뛰어넘는 암시 효과와 함의의 효과를 지닌다고 바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412. 나는 인생에 목적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인생은, 확대 재생산하고 존재를 계속하려는 충동을 지닌 원형질로 이루어져 있다는 게 내 생각입니다. 적어도 목적이 있는 인생은 완전한 인생이 아니라고 할 수 있어요. 왜? 서로 다른 목적이 복잡하게 얽힌다고 생각해보세요. 그러나 우리가 체현하고 있는 어떤 존재에는 잠재력이 있는데, 우리 인생은 바로 그 잠재력을 사는 것이다. 이렇게는 말할 수 있겠지요. 그러면 누가 나에게, "그럼 당신은 그 잠재력을 어떻게 사오?"라고 묻겠지요. 내 대답은, '천복을 따르는 것'입니다. 만일에 돈을 벌기 위해 그 궤도를 이탈한다면 그 사람은 인생을 잃는 겁니다. 중심에 머물기 위해 돈 버는 일을 포기한다면 그 사람은 천복을 얻는 겁니다.

  믿음대로 되리라. 중심에 머무르자.

413. 이 버리는 순간, 이 순간이 바로 세상의 종말입니다. 이 세상의 종말은 미래의 어떤 순간이 아닙니다. 심리적인 변화가 오는 순간, 세계를 보는 방법이 바뀌는 순간이 바로 그 순간입니다. 이런 순간을 경험하면 이 세상은 물질의 세상이 아닌, 빛의 세상이 될 겁니다.

414. 괴테는 '만물은 메타포'라고 했습니다. 무상한 것은 모두 은유적인 해석의 대상입니다. 우리가 바로 그렇고요.

415. 내 인생은 '옴'입니다. 그러나 내 인생에는 침묵도 있어요. 그 침묵을 우리가 여기에서 영생하는 것으로 보아도 됩니다. 이것은 필멸의 팔자를 지닌 것, 저것은 영생하는 것, 영생하는 것이 없으면 필멸하는 것 또한 없습니다.

 A,U,M+침묵='옴'의 의미는 시작과 삶, 그리고 돌아감을 상징한다. 그리고 다시 시작되기까지의 침묵. 신화와 인생이 상징하는 것이 이것이 아닐까? 모든 종교에서 말하고자 하는 근원이 이것이 아닐까? 추상적이긴 하지만 이것을 살아내는 것이 내 인생의 몫이 아닐까?

415. 관계의 본질에 대한, 다분히 감정이 이입된 상태에서 했던 사고가 내 깨달음을 가능케 한 순간들이 있었지요. 나는 그런 순간들을 또렷하게 기억합니다. 내게는 그런 순간들이 곧 에피파니의 순간이요, 계시의 순간이요, 광명의 순간입니다... 말이라고 하는 것은 조건이 있고 제한이 있어요... 그래서 절정의 순간은 이 언어 밖에 있는 것, 이 한마디, "아......" 이 한마디 밖에는 할 수 없는데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가 선택한 것은 신화, 상징, 이미지의 직관에 따른 조합이었다. 그의 마지막 저서 <신화의 이미지>의 편집을 보라.

 

3. 내가 저자라면

추가 보강한 부분을 색깔을 주어 표시하였다.

<빌 모이어스에게서 느낀 친밀감>

첫 번째 이 책을 읽을 때 이 대담의 진행자이자 기획자인 빌 모이어스에 대해 언급했다. 이 책을 세상에 내놓은 모이어스가 가진 공헌에 대한 존경심과 그가 한 일에 대한 동경을 담은 글이었다.

지난번에도 언급했지만, 캠벨은 예술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진정한 예술가는 만물, 그 자체가 가진 진리를 드러내고 인식하고 해석할 줄 아는 사람(301쪽)이다."

그렇다면 모이어스는 캠벨이라는 대상이 가진 진리를 드러내어 세상에 알린 진짜 예술가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는 캠벨이 말로 한 것들을 되짚으면서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캠벨 사상의 중심을 드러내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나 또한 빌 모이어스 처럼 진리를 드러내는 예술가가 되고 싶다. 이건 어떤 영감같은 것이다. 빌 모이어스로부터 내가 가진 재능의 실마리를 발견해내었기에 그에게 친근한 매력을 느낀다. 난 캠벨처럼 이야기 꾼도 아니고 대大학자가 될 재능이 없다. 내 38년 인생이 그걸 말해준다. 하지만 빌 모이어스 같은 기획자나 조력자는 될 수 있겠다 싶다. 사람들로로부터 그들이 가진 삶의 잠재성을 발견하도록 돕는 일에 소명을 느낀다. 학교 동아리와 전 직장에서의 경험이 그 소명을 느끼게 했다. 내 삶의 체험은 부족하다고 느끼지만 책과 약간의 영적 경험을 통해 나와 우주의 연결성, 하나됨을 직관적으로 알고 있다. 그리고 난 여러가지 것들을 뒤섞어 조화로운 것을 만들어내는데 관심이 있다. 기획자의 자질인 것이다. 하지만 제대로된 기획자로서의 경험은 별로 없다. 캠벨의 세계에 빠져 지낸 몇 달 동안 건져올린 몇가지 사상들을 붙잡고 살아있음의 체험에 몸을 던져야 할것이다.

 

<캠벨 사상의 정수>

번역가 이윤기는, 이 책의 앞부분에 말년에 이른 노학자가 신화와 종교로부터 "긍극적인 중심에 이르려는 인간 정신의 모습을 읽어내고는 스스로를 구원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7쪽)"고 써놓았다. 신화에 대한 짧은 이해를 가진 대중들이 조셉캠벨의 저서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이나 <신의 가면>같은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내기가 쉽지는 않을 것이다. 세계의 신화와 종교를 비교하고, 공통되는 요소를 찾아내어 분석하는 것이 방대한 지적 작업이기도 하고, 번역서로서의 한계도 있기 때문이다. 신화학이 제대로 정립하지 않았던 국내 사정상 개념 잡히지 않은 단어선택, 한문을 많이 사용한 번역, 계속되는 오타 등이 해독하는 것을 힘들게 한다. 그렇기 때문에 조셉캠벨이 일생동안 수많은 신화를 정리하면서, 결국 하고 싶었던 이야기의 정수를 대담식으로 풀어낸 이 책 <신화의 힘>이 신화개론서로서 추천되고 있는 것이다.

하고싶었던 이야기를 신화적 은유로 에둘러 표현하던 그가 이 대담에서는 직설적으로 꺼내놓기도 한다.

"모이어스씨, 누가 신인지 아세요? '우리'가 곧 신이에요. 이 모든 신화의 상징이 수다스럽게 말하는 게 바로 이것이라고요.(320쪽)"

이렇게 캠벨 사상의 핵심을 만날 수 있는 책이 바로 <신화의 힘>이다. 두 번째 읽을 때는 더욱 그의 사상이 가깝게 다가온다. 칼럼 두편을 써서 그런지 그의 핵심 사상이 내 삶의 지표가 된 느낌이다. 첫번째, 아름다움과 함께 가라(천복을 따르라), 두번째, 괴물이 나타나면 죽여라(두려움을 넘어서라)가 지금 내 마음에 들어온 화두이다. 영웅의 여정으로 치면 출발단계의 두 이야기에서 내식대로 칼럼을 써나갔다. 써 놓고 나니 그 글이 내 거울이 되어 내 삶을 비추는 느낌이다. 지금 난 무엇을 따라야 할까. 내 앞에 나타난 도깨비를 어떻게 할까. 삶의 순간에 나 스스로 지침이 되는 글이 되었다. 이렇게 캠벨이 내 속에 살아 나를 인도하고 있다.

 

<전체적인 뼈대와 감상>

대담집은 8개의 장으로 나뉘는데 솔직히 장의 구분과 순서가 그리 중요해 보이진 않는다. 읽다보면 비슷한 얘기들이 계속해서 나오고 어느장 부터 읽어도 큰 차이가 없다. <1. 신화와 현대 세계>와 <6. 조화여신의 은혜>,<7. 사랑과 결혼 이야기>가 특정한 주제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눈다는 느낌이 있을 뿐이다. 신화에 대한 전반적인 얘기와 캠벨이 신화로부터 얻은 지혜들을 반복적으로 풀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각 장이 뚜렷이 구분되지는 않지만, 책 곳곳에 수많은 경구들과 법어들이 쏟아지는 느낌을 받는다. 개인적으로는 <5. 영웅의 모험>과 <8. 영원의 가면>에 캠벨의 지혜가 집중적으로 담겨 있다고 느꼈다.

<5장>에는 개인적으로 뽑은 주제문이 있는데 다음과 같다.

"천복을 좇으면, 나는 창세 때부터 거기에서 나를 기다리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내가 살아야 하는 삶은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삶입니다. 이걸 알고 있으면 어디에 가든지 자기 천복의 벌판에 사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이 문을 열어줍니다."

구본형 연구원 과정에 끌림을 느껴, 준비를 했고, 도전했다. 그때부터 나를 기다리던 길이 시작되었다. 내가 살아야 할 삶은 지금 살고 있는 삶이다. 이때 천복의 벌판에 서있는 사람들이 함께 한다. 사부님과 연구원 선배, 동기들이다. 아직 함께한 시간이 많지 않지만 서로에게 끌리는 친밀감은 사회생활에서 만난 누구보다 크다고 생각된다. 기쁨에 길에 함께 했기 때문이리라.

'천복을 좇아라'의 영문은 'Follow your bliss!'라고 한다. 그런데 이와 비슷한 말을 하는 책들이 많다. 다릴 앙카의 <가슴뛰는 삶을 살아라>라는 책은 제목 그대로고,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에는 "자네가 무언가를 간절히 원할 때 온 우주는 자네의 소망이 실현되도록 도와준다네"  같은 경구들이 반복된다. 그외 수없이 다른 표현으로 되풀이 되어 나에게 들려오는 이 메시지는 진정 누군가 나를 돕기 위한 이정표가 아닌가 싶다. 이 길로 가보라고 자꾸만 부추긴다.

구본형 선생님마저 이 책 <신화의 힘>을 선택해 나에게 전해주고 있으니 말이다.

<8장>에는 예술에 대한 이야기들이 많은데 특별히 내 마음을 '무찔러' 든다. 예술작품과 예술가가 전해주려는 세계가 신화의 세계와 같다는 것, 인간 체험 너머를 지향하는 예술의 역할에 대한 이야기들이 나를 강하게 흔들고 갔다. 삶을 예술로 살고 싶다는 내 욕망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캠벨이 우주의 가락에 맞추어 춤을 추었던 것 처럼, 나 또한 한 세상 풍성하게 놀다 갔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살짝 들썩거렸다. 그렇다면 캠벨과 모리어스의 의도가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모험을 떠나 살아 있음의 '경험'에 푹 빠지고 싶은 마음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다. 이런 마음을 가지게 된 사람이 나 뿐만은 아닐 것이라 믿는다.

 

<내가 짠 구성>

캠벨의 이야기 자체가 재미있기는 하지만, 신화에 대한 이해가 없는 사람은 이해하기가 어려운 구성이다. 게다가 이 책에는 불교, 힌두교의 배경지식이 필요한 다양한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이 책이 방송 대담을 독자들의 요청에 의해 책으로 정리해 출간한 한계가 있겠지만, 내가 모리어스라면 좀더 정리된 모습을 담았을 것이다.

일단 다양한 배경지식에 대한 주석을 달을것이다. 캠벨의 일생을 자세히 풀어서 따로 정리하고 캠벨과의 대담 한꼭지를 <캠벨의 인생과 영웅의 여정>이란 제목으로 진행할 것이다. 추가로 캠벨의 연보를 넣을 것이다.

8개의 장이 있는데, 대담을 하다보니 그런 주제가 나온것인지, 사전에 계획된 의도가 있는 구분인지 알지 못한다. 읽다보면 빠져들게 되지만, 장과 장의 구분이 갖는 의미와 목차의 흐름이 잘 와닿지는 않는다. 좀더 흐름이 독자들에게 전달될 수 있도록 목차를 짤것이다. 그리고 각 장의 하부에 질문의 내용별로 세부 목차를 넣을 것이다.

 

• 서문

• 캠벨의 인생과 영웅의 여정

• 신화와 현대세계

• 태초의 이야기꾼들 -> 신화의 형성

• 영웅의 모험 -> 영웅의 여정

• 내면으로의 여행 -> 신화의 내적 의미

• 희생과 천복 -> 종교와 신화

• 조화여신의 은혜 -> 여신의 의미

• 사랑과 결혼 이야기 -> 삭제

• 영원의 가면 -> 신화의 상징

• 캠벨 연보

• 번역에 대한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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