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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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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4월 25일 00시 07분 등록

1. 저자 조셉 캠벨에 대하여

 

나에게 캠벨은 학자이자 현자이다.

그는 신화를 연구하여 그것의 큰 획을 신화학의 한 부분에 기여했을 뿐더러 신화를 통해 위기의 시대를 헤쳐나가는 법과 생존하는 법을 우리에게 가르치는 삶의 현자인 것이다.

그는 이야기 한다. "당신은 신화를 흡수하여 그것에 적응하고 당신의 삶의 일부로 만들어야 한다."라고. 그는 한 우물을 파는 삶에 대한 지극한 정성으로 신화를 이 세상 무엇과도 관련 있는 열정에 휩싸인 주제로 바라 본 것이다. 그는 신화에 생명을 불어넣었다.

그를 통해서 신화와 상징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지만 깨치는 것은 삶과 스스로의 인생이었다.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을 비롯하여 캠벨의 책 <신화의 힘>, <신화와 인생>을 읽었다. 저자에 대해서는 이전 북리뷰와 크게 다른 내용을 찾기가 힘들었고, 캠벨에 대한 배움을 일단락 하는 의미에서 이전의 북리뷰에서 인생 깊은 부분을 재 발췌함으로써 캠벨에 대한 스스로의 이해를 돕는다.

 

이그쥬가르쥬크. 북부 캐나다 카리부 에스키모의 샤먼이었소. 이 사람은 유럽 손님들에게 '참 지혜라고 하는 것은 사람들에게서 아득히 떨어진 채 절대고독 속에 은거하는데, 이 참 지혜에는 오로지 고통을 통해서만 이를 수 있다. 버리는 것과 고통스러워하는 것만이 세상으로 통하는 마음의 문을 열게 할 수 있는데 사람들은 이것을 모르고 있다. (신화의 힘_9)

 

그의 말에 따르면, 고명한 구도자와 영웅은 다른 점이 많은데, 그 다른 점 중에서도 가장 다른 점은 구도자는 자기만의 삶을 누리기 위해 도를 닦지만 영웅은 사회의 구원을 위하여 행동한다는 점이다. (신화의 힘12)

 

사람들은 우리 인간이 궁극적으로 찾고자 하는 것은 삶의 의미라고 말하지요. 그러나 나는 우리가 진실로 찾고 있는 것은 그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나는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은 살아있음에 대한 경험이라고 생각해요. (신화의 힘_29)

 

삶이라는 것은 곧 명상입니다. 그 명상의 대부분이 비의도적인 명상이기는 하지만요. 많은 사람이 명상이라는 것을 하기는 하되, 돈이 들어올 데, 돈이 나갈 데에 관해서만 명상을 합니다. ...그것은 물리적인 조건과 관계가 있는 관심입니다. 사람들은 그래서, 자기 자식들과 영적인 의식을 나누고자 하지만 이게 안 됩니다. 영적인 의식이 없는 사람이 자기 자식과 그것을 어떻게 나눕니까? (신화의 힘_47)

 

창조적인 글을 써본 사람은, 마음을 열고 자신에게 복종하노라면 써야 할 것이 스스로 말을 하면서 제 자신을 이루어나간다는 것을 압니다. (신화의 힘_120)

 

육신이 그 힘의 정점에 올랐다가 내리막길로 들어서는 중년의 문제는, 자기 자신을 그 나이의 육신과 동일시하지 않고 그 나이의 의식과 동일시하는데 있어요. 문제는 여기에 있어요. 중년에 이르면 육신은 내리막길로 들어서지만, 육신이라는 수레에 실리는 의식은 그렇지 않아요. (신화의 힘_143)

 

성소, 오늘날에도 모든 사람에게 절대 필요불가결한 것이지요. 우리에게는 여백, 혹은 여백 같은 시간, 여백 같은 날이 있어야 합니다. 바로 이 여백이야말로 우리가 무엇인지, 장차 무엇일 수 있는지를 경험할 수 있는 장소입니다. 이 여백이야말로 창조의 포란실입니다. (신화의 힘_179)

 

우리 천복(天福)의 정거장은 어디에 있느냐.... 우리는 이것을 찾아야 합니다.(신화의 힘_180)

 

방에 앉아서 읽는 겁니다. 읽고 또 읽는 겁니다. 제대로 된 사람이 쓴 제대로 된 책을 읽어야 합니다. 읽는 행위를 통해서 일정한 수준에 이르면,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마음이 즐거워지지 시작합니다. 우리 삶에서 삶에 대한 이러한 깨달음은 항상 다른 깨달음을 유발합니다. (신화의 힘_189)

영웅이란 자신의 물리적인 삶을 이러한 진리 인식의 질서에다 바친 사람을 말합니다. (신화의 힘_211)

 

평생 하고 싶은 일은 하나도 못해보고 사는 그 따분한 인생을 한번 생각해보세요. 나는 학생들에게 늘, 너희 육신과 영혼이 가자는 대로 가거라, 이런 소리를 합니다. 일단 이런 느낌이 생기면 이 느낌에 머무는 겁니다. 그러면 어느 누구도 우리 삶을 방해하지 못합니다. (신화의 힘_222)

 

우리 삶(남의 삶을 시늉하는 것이 아닌 우리만의 삶) 역시 탐색의 여행에서 나온 것입니다. (신화의 힘_251)

 

인생은 목적에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인생은 확대 재생산하고 존재를 계속하려는 충동을 지닌 원형질로 이루어져 있다는 게 내 생각입니다.(신화의 힘_412)

 

여러분은 숲으로 들어간다. 그것도 가장 어두운 곳을 골라서, 그곳에는 아무런 길도 없다.

만약 그곳에 어떤 길이 있다면 그것은 다른 누군가의 길이다.

그것은 여러분 자신의 길이 아니다.

만약 다른 누군가의 길을 따라간다면, 여러분은 자신의 잠재력을 깨닫지 못하게 될 것이다.

(신화와 인생 23)

 

자신이 행복해하는 것을 따른다면, 여러분은 항상 행복을 얻게 될 것이다. 돈이 있건 없건 간에. 돈을 따른다면 여러분은 돈을 잃을뿐더러, 아무것도 얻지 못할 것이다. (신화와 인생_83)

 

내 지론은 만약 여러분이 자신의 길을 가고 있으면 만사가 여러분에게 [자연스레] 찾아오게 마련이라는 것 이다. 그것이 여러분 자신의 길이고, 어느 누구도 그 길을 앞서 지나가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런 전례도 없는 것은 당연하고, 따라서 모든 것이 그야말로 뜻밖이며, 그야말로 적시인 것이다.(신화와 인생_90)

 

여러분이 떠나기를 거부한다면, 그것은 다른 누군가의 종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부름을 거부할 경우, 일종의 말라붙음, 즉 삶의 감각이 상실되는 현상이 벌어진다. (신화와 인생_112)

 

신화나 상징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는 바로 이것이다. 신들의 세계는 우리가 아는 세계의 잊혀진 부분이다. (신화와 인생_116)

 

이 중에서 가장 권할 만한 것은 점진적 출가다. 이는 여러분이 하던 일을 천천히, 그리고 단계적으로 중지하는 것이다. 하지만 정말 불가피한 경우, 여러분은 몇 가지 작은 책임을 여전히 지고 있을 수도 있다. 물론 거기 다른 책임들을 덧붙여서는 안 되지만 말이다. 여러분이 거기 다른 책임들을 덧붙인다면, 무엇이 되었든 간에 여러분의 새로운 족쇄가 될 것이다.(신화와 인생_125)

 

절대 진리, 바로 이거야! 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니체의 말마따나 '개념의 간질병'을 앓고 있는 셈이다. 즉 어떤 관념을 지니게 됨으로써 결국 미쳐 버린 사람이다. 여러분이 절대진리를 가졌다고 생각하는 것은 광기의 일종이다.(신화와 인생_190)

 

당신이 오로지 흑인이라는 사실만 갖고서 당신의 삶에 있어서 부정적인 것들을 계속 들먹이며 비난한다면, 당신은 인간이 됨으로써 얻은 다른 특권들을 깡그리 부정하는 셈입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다만 흑인에 불과할 뿐입니다. 아직 인간이 되지는 못한 셈이죠. (신화와 인생_217)

 

삶의 목표는 환희다. / 예술은 우리가 그것을 경험하는 방법이다. (신화와 인생_351)

 

예술가란 예술 작품을 완성한 사람이지 단순히 완성하려는 의도를 품었다고 해서 예술가라고 할 수는 없다. (신화와 인생_370)

 

가령 소네트를 쓰는 것을 예로 들어보자. 많은 연습을 하고 나야만 그런 종류의 구조는 단순히 뭔가 자연스레 흘러나오는 정도에 도달하게 되며, 실제로 자연스레 흘러나오는 정도가 된 다음에야 소네트 형식 없이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신화와 인생_373)

 

작가의 슬럼프는 너무 머리가 많아서 생겨난 것일 수도 있다. 여러분의 머리를 자르라.

페가수스, 곧 시[]는 메두사의 머리가 잘린 곳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글을 쓸 때에는 무모해야만 한다. 여러분의 양심이 허락하는 한 미쳐야 한다. (신화와 인생_386)

 

여러분이 가장 사랑하는 것을 내보내고 아예 죽여 버려라.

그렇지 않으면 2년 뒤에 진작 그래야 했다면 후회하리라. (신화와 인생_388)

 

분명한 교훈은 삶의 경이와 수수께끼의 지고하고도 신성한 상징에 대한 지식으로 나아가는 첫걸음은, 삶의 괴물 같은 성격과 그런 특징에 있어서의 영광을 인식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413)

 

여러분이 모든 것을 원한다면, 신들은 그것을 주리라. 하지만 여러분은 반드시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신화와 인생_425)

 

“삶의 길을 가다 보면 커다란 구렁을 보게 될 것이다 뛰어넘으라.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넓진 않으리라” (신화와 인생_426)

 

 

2.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파랑색, 붉은색 : 첫 번째 읽기에서 주목했던 글귀 및 감상

주황색 : 두 번째 읽기에서 추가된 글귀 및 감상

 

머리말

 

<종교 교의는 녹아 들어 있는 진리는 대개가 변형된 데다 체계적으로 위장되어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진리로 알아보지 못한다> (5)

 

이 책의 목적은 종교와 신화의 형태로 가려져 있는 진리를 밝히되, 비근한 실례를 잇대어 비교함으로써 옛 뜻이 스스로 드러나게 하는 데 있다. (6)

 

많은 신화나 인류의 종교가 서로 다르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이 책이 다루는 것은 상사성이지 상이성은 아니다. 일단 이런 상사성을 이해하면 상이성은 일반적으로 믿어지는 정도만큼 중요하지 않다는 것도 알게 되리라 믿는다. (6)

 

저자의 비교 해석이 이 세계의 통합을 결실시키려는 작품의 경향에 대해, 종교적 혹은 정치 적 제국의 이름으로서가 아닌, 인류의 상호 이해라는 측면에서 그리 초라하지 않은 하나의 기폭제가 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베다 경은, <진리는 하나되, 현자는 여러 이름으로 이를 드러낸다>고 했다. (6)

 

프롤로그

 

신화는, 다함 없는 우주 에너지가 인류의 문화로 발로하는 은밀한 통로라고 말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종교, 철학, 예술, 선사 인류 및 유사 인류의 사회적 양식, 과학과 기술의 으뜸가는 발견, 바닥째 흔들어 수면을 엎어버리는 꿈, 신화의 불가사의한 고리...모두가 이 은밀한 통로를 지나 인류의 문화로 현현한 것들이다. (14)

 

프로이트와 융과 그 후계자들은 영웅과 신화의 행적이 현대로 계승되었음을 여지없이 증명 해 내었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일반 신화학은 없어도, 사사롭고 드러내어 인정받지 못한 미 성숙 단계에 있다 뿐이지, 그래도 우리의 내부에는 속으로 알찬 꿈의 판테온이 있다. 최신형 오이디푸스의 화신, 미녀와 야수의 속편이 오늘 오후에도 뉴욕의 42번가와 50번가 모퉁이 에 서서 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15)

 

유아기의 희비극적 삼각관계(어머니의 사랑을 차지하기 위한 아들 대 아버지의 대치상태)에 얽힌 채 자기 사상 속의 은밀한 구석자리에 은거하고 있다. 인간이 가진 심성 중에 가장 끈질기게 남는 성향은, 동물 중에서도 인간이 가장 오랫동안 어머니의 젖가슴에 매달려 있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인간은 너무 빨리 모태를 떠난다. 미완성의 상태, 세상과 맞설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태어나는 것이다. 당연히 위험으로부터 이들을 지켜주는 방벽은 어머니이고, 이 어머니의 보호 아래 자궁 내 체제기간을 연장된다. 그래서 보호가 필요한 유아와 어머니는 출산이라는 대격변을 치르고 도 육체적으로는 물론 심리적으로도 몇 개월간이라는 이원일체 상황 dual unit 을 형성한다. (16~17)

안전에 대한 욕구야 모든 동물들이 본능적으로 가지고 있는 본성이겠지만 인간이 집을 짓고, 한곳에 정착하고, 자기의 것을 소유하는 인간의 종적 특성은 미완성의 상태로 태어나서 자신을 보호할 상대나 상황을 찾으려는 본능에 대해서 이해를 할 수 있는 구절이다.

 

유아가 최초로 적의를 갖는 대상은 최초로 애정을 투사하는 대상과 일치하고, 유아가 최초로 갖는 이상은(이때부터 유아는 축복, 진리, 아름다움, 완전함이라는 이미지를 무의식 기저 에다 간직한다)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라는 이원일체 Madonna and Bambino 상황이다. (17)

 

불행한 아버지는 다른 현실로부터, 자궁 안에서와 똑 같은 상태로 재현된 이 지상의 천국을 침범한 최초의 틈입자다. 따라서 유아는 아버지를 적으로 체험한다. 유아는, <좋은 것>, 혹 은 어머니의 <정상적인> 속성인 옆에 있고, 먹여주고, 보호해 주는 대상에게 애정을 쏟는 한편, 원래 <나쁜 것>, 혹은 <어머니가 없는 상태>에다 쏟던 공격의 화살을 아버지에게로 돌린다. 유아가 죽음(Thanatos: destrudo)과 사랑(Eros: libido)의 충동을 구분하는 숙명적인 행위는 지금은 널리 알려진 오이디포스 콤플렉스의 바탕을 형성한다. (17)

지금까지 오이디푸스 컴플렉스에 대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 구절을 읽고 나니 어느 정도 이해가 되는 듯하다. 유아의 어머니의 사랑 즉 생존에 대한 욕구와 아내를 차지하기 위한 남성, 즉 수컷본성이 충돌하는 것은 인간이 태어난 상태에서 기인하고 있다는 것을 배웠다.

프로이드의 '리비도'만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것에 이해를 얻었다.

 

프로이트_성생활의 병리학적인 모든 혼란은, 발육이 억압당했기 때문에 야기된 것으로 보아도 좋다. (18)

 

무의식은 꿈을 통해서, 혹은 벌건 대낮에, 아니면 정신 착란을 이용하여 갖가지 부질없는 몽상과 기이한 상념과 공포와 정신을 어지럽히는 허상을 마음으로 올려 보낸다. 인간이라는 왕국에서 우리가 의식이라고 부르는, 비교적 깔끔하고 비좁은 처소의 바닥 밑으로는 뜻밖에도 알라딘의 동굴이 뚫려 있다. 여기에는 보물뿐만 아니라 위험하기 짝이 없는 꼬마 정령, 그리고 우리로서는 생각해 본 적도 없거나 감히 우리 일상의 삶으로 통합하지 못했던, 불편한 혹은 억압당한 심리적인 힘이 도사리고 있다. 이러한 것들은 우리에게 감지되지 않은 채 그대로 눌러 있지만, 혹 한마디 말, 주위의 냄새, 차 한 찬의 맛, 또는 어느 사람의 시선에 촉발되면 무서운 사신(使臣)으로 우리 머릿속에 나타나기 시작한다. 무섭다고 하는 까닭은, 이것이 우리 자신과 우리 가족의 안전을 도모하는 질서의 바탕을 위협하기 때문이다. (21)

의식 : 깔끔한, 비좁음, 질서, 이성, 부분 / 무의식 : 알라딘의 동굴, 위험한 꼬마정령, 억압당한, 전체성, 무질서 등의 이미지로 정리해본다.

무의식을 의식이 살고 있는 세상, 일반적으로 내가 접하고 있는 삶의 무대로 끌어 올리는 순간 지금까지의 가치와 삶의 질서가 위협받게 되는 것이다. 좁지만 안정된 질서 위의 피상적인 삶을 살 것인가, 아니면 무변광대하고 본질적이고 커다란 나를 꼬마정령과 함께 뛰어 놀게 할 것인가? High Risk High Return은 삶의 이치에도 적용되는 것인가?

 

자기의 발견이란, 소망스럽고도 무서운 모험의 영역을 여는 열쇠를 가져다 준다는 의미에서 보면 참으로 매력적인 것이기도 하다. 우리가 지었고, 우리가 그 속에 살고 있고, 우리가 내적으로 지고 있는 세계의 파멸...(살아오면서 양육되고, 사회적 질서에 의해 억압되어 이성적으로 갖게 된 만들어 진 자아라는 생각) 그러나 그 파멸이 끝난 다음에는 보다 대담하고, 깨끗하고, 보다 푸짐한 인간적인 삶으로의 눈부신 재건, 이것이 바로 우리 속에 내재하는 신화적 영역(무의식에 주목하고 그것이 말하는 것을 잘 들음으로써 가능한 나의 타고난 본성) 에서 오는 이 심란한 밤손님의 유혹이며, 약속이며, 공포인 것이다. (21)

위험하지만 매력적인 것이다. 심란한 밤손님이지만 유혹적이고, 잘 받아들이면 약속이지만 그것을 따라가는 과정은 공포인 것이다.

 

제의의 목적이 사람들로 하여금 의식적 삶의 패턴은 물론, 무의식적 삶의 패턴까지 변화를 요구하는 변형의 문턱을 넘게 하려는 데 있다는 사실과, 실제로 그런 효과를 거두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원시 사회 생활에서 엄청나게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이른바 통과 제의(출생,명명,성인,결혼, 장례 의식 등)는 이런 단계의 마음가짐이나, 애착이나, 생활 패턴으로부터 심적으로 단절된다는 의미에서 형식상으로 특이하고 극히 가혹한 단절의 체험이 되는 경우가 보통이다. (22)

제의라고 하는 의례는 삶의 문과 같은 것이구나. 그것을 통과하고 나면 이제 새로워 집니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형식 이상의 절차인 것이구나. 11 4월 입학여행이 그런 것이구나. 그런 의미에서 나는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취하여 이곳에 있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보아야 한다. 단절을 통해서 삶의 내공이 Level up되고 새로운 시간이 요구하는 형식을 취하여 예전과 다름없는 생활 속에 있지만 예전의 내가 아닌 새로운 내가 되어야 하는 것이 생활 속 제의 인 것이다. 다만 현대 생활에서의 제의는 누군가 만들어 주기는 힘들다. 스스로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성소와 제의를 생각한다.

 

신화와 제의의 주요 기능은, 과거에다 묶어두려는 경향이 있는 인간의 끊임없는 환상에 대응하여 인간의 정신을 향상시키는 데 필요한 상징을 공급하는 것이다.

우리는 아직도 남아 있는 유아기의 이미지에 발목이 잡혀 있고, 따라서 어른으로 가는 길을 애써 좆으려 하지 않는다. (23)

캠벨은 어른의 길을 가지 않는 예로 부모의 소원이던 법률가, 실업가의 길을 무의미하게 추구하는 것, 아이 둘을 낳고서도 남편에게 사랑타령이나 하는 아내 등 정신적인 유치함을 내려놓지 못한 어른아이를 들고 있다.

우리가 삶의 단계별로 나름의 제의를 통하여 벗어남과 추구함을 달리하지 않으면 우리는 이전 단계의 삶에서 다음 단계의 삶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이다.

 

이 비의적 이미지(제의와 같은 절차들)는 우리 심성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기 때문에 만일 이 이미지들이 신화와 제의를 통해 외부에서 들어오지 않으면, 꿈을 통해 내부에 나타나게 된다. 그래야 우리의 에너지가 심해의 바닥이나 진부하고 시대에 한참 뒤떨어진 유아의 놀이방의 동화책에서 풀려날 수 있는 것이다. (24)

외부에서건 내부에서건 필수적인 절차로서 제의를 통과하여야만 유아기 고착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나에게는 이런 것이 무엇이 있었을까?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그의 저작에서 인간이 사는 삶의 순환 주기 중 전반부의 통과와 그 어려움을 강조하고 있는데 우리의 태양이 천정점으로 떠오르고 있는 시기인 유아기와 사춘기가 이 시기에 해당한다. 그러나 C.G. 융은 후반부의 위기를 강조했다. 즉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이 빛나는 태양이 마침내 그 고도를 떨어뜨리고 무덤이라고 하는 밤의 자궁 속으로 사라지기 위해 기를 꺾어야 하는 시기를 말한다. 우리의 욕망과 공포의 정상적인 상징이 인생의 오후에 해당하는 시기에는 반대되는 것으로 전화한다. 왜 그런가 하면 이 시기에 도전해 오는 것은 삶이 아니라 죽음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될 경우 인간이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것은 자궁이 아니라 남근이다. (자궁과 남근이 상징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자궁은 죽음이고 남근은 욕망, 삶을 나타내는 것인가? 아니면 어머니와 아버지를 상징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면 삶의 염증은 이미 심장을 죄고 있었을 테고 한때 사랑의 유혹이었던 지복의 약속으로 부르는 것은 삶이 아니고 죽음일 터이다. 우리는 자궁이라는 이름의 무덤tomb of womb에서 무덤이라는 이름의 자궁womb of tomb까지 완전한 순환 주기를 산다. (25)

180페이지의 비슷한 상징 - 위대한 아버지의 뱀의 몸<안에서> 어머니를 잃는 대신에 그 보상으로 얻게 될 새로운 세상을 소개받는다. 그리고 아이들은 자기 성상의 중심(즉 세계의 축)에다 젖가슴 이미지 대신 남근을 세운다. / 남근은 아버지를 뜻하는 것인 듯 하다. 두 번째 읽을 때는 이것을 염두에 두고 보도록 하자.

 

전통적인 통화 제의가 개인에게 과거를 향해서는 죽고 미래를 향해서는 거듭 날 것을 가르쳤듯이, 저 왕위 서임 의식은 그의 개인적인 성격을 벗기고 신명(神命)이라는 망토를 입혀주었다. 이것은 장인에거나 왕에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제의를 거부하는 신성 모독 행위로 개인은 사회라고 하는 거대한 조직으로부터 하나의 단위로 떨어져 나오게 되었다. 이 하나가 부서져 여럿으로 분열하면서 각개 충돌(서로 자신을 억제할 수 없는)로 치달았다. 이렇게 되면 이를 통제할 수 있는 길은 힘뿐이다. (28)

 

그는 <내 것>이라는 탐욕스러운 권리에 걸신들린 괴물이다. ...이 입지전적인 독재자의 에고는, 아무리 세상에선 성공을 거두었을지라도 사실은 자신과 이 세계에 종말을 고하는 사자(使者). 그의 손길이 미치는 곳에는 절규가 있다.(담 너머로 들리지 않는다면 모든 사람의 가슴속에서 들리는 비참한 절규다). 빛나는 칼을 든, 일격으로, 일거수로,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이 땅을 자유롭게 할 대속자인 영웅을 부르는 절규다. (28)

 

영웅이란, 스스로의 힘으로 복종(자기 극복)의 기술을 완성한 인간이다. 그렇다면 무엇에 대한 복종인가? 이것은 바로 오늘날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 하는 수수께끼이며, 영웅의 바탕이 되는 미덕과 역사적 행위가 풀었어야 하는 문제다. (29)

 

오직 탄생(낡은 것의 새로운 태어남이 아닌, 새로운 것의 탄생)만이 죽음을 정복할 수 있다. 죽음의 끈질길 재현을 저지하기 위해서는 영혼의 내부에, 사회적인 무리의 내부에 끊임없는 <탄생의 재현 palingenesia>(우리가 이 땅에서 오래 잔존하게 되어 있다면)이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갱생하지 않는다면 응보 천벌 여신 Nemesis의 복수만이 우리가 얻게 되는 승리가 될 것이기 때문이며, 파멸은 우리 미덕의 껍질부터 깰 것이기 때문이다. ...갈가리 해체되었다가 재생하는 길뿐이다. (29)

낡은 것의 새로운 태어남이 아닌, 새로운 것의 탄생!!!!!!!!!!!!!!!!!!!!!!

 

어른이 되어도 의식할 수 없는 삶의 잠재력, 우리들 자신의 또 한 부분이 여기에 있다는 것이다. 이 황금의 씨앗은 마르는 법은 없다. 우리가 상실해 버린 이 전체성의 일부라도 나날의 현실로 끌어올릴 수 있다면 우리의 능력은 놀라운 수준까지 신장될 것이며, 아울러 생기 넘치는 재생의 순간을 체험하는 것도 가능하다. (32)

어떠한 것이든 배우고 익히면 체화(體化)되고 그것의 솜씨가 늘어나듯이, 나의 무의식에 대해서 계속해서 노크하다 보면 결국은 전체성의 나를 대면하여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나와의 대화 이것을 좀 더 구체적인 일상으로 데리고 와야겠다.

 

의식을 영웅이 첫 단계에서 하는 일은, 하찮은 세상이라는 무대로부터 진정한 어려움이 도사리고 있는, 심성의 인과가 시작되는 곳으로 물러앉는 일이다. 그리고 영웅은 난관을 헤쳐나가되 자기 식으로 그 난관의 뿌리를 뽑고(즉 자기가 속한 문화권의 유아기 악마에게 싸움을 걸고) 한달음에 쳐들어가 C.G. 융의 소위 <원형 심상>과의 동화 작용을 시도한다. 힌두교와 불교에서는 이 과정을 <비베카(寂然, viveka)>, 즉 분리의 과정이라고 한다. (32)

 

꿈은 인격화한 신화고 신화는 보편화 된 꿈이며, 꿈과 신화는 상징적이되, 정신 역학의 동일한 일반적 시각에서 보아 그렇다. 그러나 신화에서는 문제와 해결책이 모든 인류에게 직접 뚜렷이 제시되는 데 견주어, 꿈속에서는 꿈꾸는 사람이 안고 있는 문제에 따라 내용이 달라진다. (33)

 

영웅은 현대인으로 죽었지만 영원한 인간으로 다시 태어났다. 따라서 두 번째 엄숙한 과업과 행위는 다른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와 재생의 삶에 대해 그가 배운 바를 가르쳐주는 것이다.(33)

 

나를 지나면 슬픔의 도시로 가는 길,

나를 지나면 영원한 슬픔에 이르는 길,

나를 지나면 길 잃은 무리 속으로 들어가는 길. 단테의 신곡_지옥편 중 (35)

 

오늘날의 우리 대부분은 가슴 안팎으로 이 미궁을 안고 잇다는 이야긴데 아, 미노타우로스와 맞설 용기를 심어주는 미궁 탈출의 단서와, 괴물을 만나 도륙한 다음 우리를 자유의 길로 이끌어줄 안내자, 저 아름다운 처녀 아리아드네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37)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란 이 얼마나 하찮은 물건인가! 그러나 이나마 없으면 미궁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아무 희망도 없는 모험과 다름 없는 것이 아닌가. (37)

모든 시대의 영웅들은, 우리에 앞서 미궁으로 들어갔고, 미궁의 정체는 모두 벗겨졌으며, 우리는 단지 영웅이 깔아놓은 실만 따라가면 되는데도 그렇다. 추악한 것이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곳에서 우리는 신을 발견할 것이고, 남을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던 곳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죽일 것이며, 밖으로 나간다고 생각하던 곳을 통해 우리는 우리 존재의 중심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고, 외로우리라고 생각하던 곳에서 우리는 세계와 함께 하게 될 것이다. (39)

무엇을 하면? 어떻게 살면? 미궁으로 들어가면?

 

신화와 꿈(13~39)에서 배움. 꿈은 우리 무의식의 이야기이다. 그러면서 삶의 제례로서 의례로서 작용한다. 인류에게 있어서 이것은 신화이다. 즉 신화는 집단 무의식의 이야기라는 것으로 자연스레 귀결된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비슷하다. 불행한 가정은 각기 그 나름의 이유로 불행하다.> 레오 톨스토이 (39)

 

<연민이란, 인간의 고통 중 엄숙하고 부단한 것에 마음을 빼앗기게 하고, 이를 고통 받는 사람과 하나가 되게 하는 감정이다. 공포는 인간의 고통 중 엄숙하고 부단한 것에 마음을 빼앗기게 하고, 이를 보이지 않는 원인과 하나가 되게 하는 감정이다.> (40)

, 우리는 비극을 통해서 이러한 감정을 확인하는 것이다. 우리들 내부에 지천으로 널려 있는 참담하게 일그러진 우리 자신의 형체들을 확인하는 것이다.

 

시공의 제약이 있는 세계에 살고 있는 인간의 하찮은 논리와 정서적 집착으로 찾아 드는 죽음,

우리들이 흙으로 돌아가려 할 때 비로소 온몸을 흔들면서 승리의 찬가를 부르는 보편적 생명에 대한 이러한 재인식, 이 생명을 향한 우리의 가파른 중심 이동,

그리고 <운명에의 사랑 amor fati>, 즉 필명의 운명에 대한 사랑,

이런 것들이 비극적 예술의 체험을 구성한다. 그 기쁨, 구원의 황홀은 바로 그 안에 있다. (41)

 

하늘의 신화가 삶의 발자국을 뒤로 남기고 밤의 문턱에 설 준비가 된 노인의 것이듯, 동화는 이 땅에 존재하지 않는 아이들 나라의 것이며, 현실로부터 보호받고 있기는 하나 조만간에 거덜날 운명에 놓여 있다. (42)

 

동화, 신화, 그리고 영혼의 신곡에 나오는 해피엔딩은 모순이 아닌 인간의 보편적 비극의 초절성으로 읽히어야 한다. 객관적 세계는 과거의 형태 그대로이나 주관이 강조되면서부터는 변형된 것처럼 보인다. 과거에는 삶과 죽음이 투쟁하던 곳에서 이제는 영속적인 존재가 그 모습을 드러낸다. 냄비 속에서 끓는 물이 거품의 운명에 대해, 우주가 은하의 생성과 소멸에 대해 그러하듯이 시간의 우유성(偶有性)에 대해 무심하게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비극이란 형체의 파편이며 형체에 대한 우리의 애착이다. 희극은, 정복할 수 없는 삶에 대한 거칠고 방만하고, 꺼질 줄 모르는 환희다. 따라서 이 양자는 서로 보듬고 서로를 엮는, 단일한 신화적 주제와 경험을 나누는 용어다. 비극과 희극은, 삶을 계시하는 전체성을 본질로 공유하며 죄악(신의 의지에 대한 거역)과 죽음(필멸의 형태에의 동화)의 오염으로부터 정화(Katharsis)되고자 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알고 사랑해야 하는 하강과 상승 kathodos and anodos인 것이다. 43

우유성(偶有性) : 사물이 지닌 성질에는 그 성질이 없어지면 사물 자체도 스스로의 존재를 잃어버리는 것과 어떤 성질을 제거하여도 그 사물의 존재에는 영향을 주지 않는 것이 있다. 후자의 성질을 가리켜 우유성 또는 우성이라고 한다. 즉 비본질적 성질을 가리키는 말이다. 역사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가 사용한 말이다.

 

이 몸뚱이는 죽어 없어지지만 이 몸 속에 와 계시는 실재 Self는 영원하며, 불멸이며, 무한이니라. (43)

 

신화와 동화 고유의 사명은, 비극에서 희극에 이르는 어두운 뒤안길에 깔린 특수한 위험과 그 길을 지나는 기술을 드러내는 일이다. 신화나 동화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환상적이며 <비실재적>이기 때문에, 이들이 표상하는 것은 심리적인 승리지 육체적 승리는 아니다. (43)

 

신화적 영웅의 길은, 부수적으로는 지상적일지 모르나, 근원적으로는 내적인 길이다. 즉 보이지 않는 저지선이 뚫리고, 오래 전에 잊혀졌던 힘이 다시 솟아 세계의 변용에 기여하는 되는 그런 심연으로 뚫린 길인 것이다. 이러한 영웅의 행위가 완성되면, 삶은 더 이상 도처에 도사린 재앙의 가혹한 단죄와 시간에 의한 마손이나 막막한 공간의 두려움 앞에서 무방비 상태로 고통 받는 일이 없게 된다. 뿐인가, 공포는 눈앞에 여전히 보이고, 고뇌의 울부짖음은 여전히 귀에 걸리나, 삶은 모든 것을 채우고, 모든 것을 견디는 사랑과 정복되지 않는 힘의 자각으로 다시 생기를 얻는다. (44)

 

영웅이 치르는 신화적 모험의 표준 궤도는 통과 제의에 나타난 양식, <분리>, <입문>, <회귀>의 확대판이다. 이 양식은 원질신화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영웅은 일상적인 삶의 세계에서 초자연적인 경이의 세계로 떠나고 여기에서 엄청난 세력과 만나고, 결국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고 영웅은 이 신비스러운 모험에서, 동료들에게 이익을 줄 수 있는 힘을 얻어 현실 세계로 돌아오는 것이다. (45)

 

영웅의 모험은 위에서 말한 핵 단위의 패턴, 다시 말하면, 세계로부터의 분리, 힘의 원천에 대한 통찰, 그리고 황홀한 귀향의 패턴으로 이루어진다. (50)

 

진정한 창조 행위는 죽어가는 것으로부터 세상으로 무엇인가를 가져오는 행위로 표현되며, 영웅의 부재중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가 거듭난 자, 위대한 자, 창조력을 얻어 돌아오는 자로 만들기 위해서는 인류 역시 한 목소리가 된다. (50)

 

따라서 이러한 이야기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를 다시 한번 확인하기 위해서는 보편적인 모험의 고전적인 단계를 두루 꿰는, 수 많은 영웅적인 인물을 따라가 보아야 할 듯하다. 이러한 작업은 당대의 삶과 관련된 이미지의 의미뿐만 아니라 야망, 권력, 영고 성쇠, 그리고 지혜로서의 인류정신의 단일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리라 믿는다.

캠벨이 그의 삶을 통해서 이야기 하고자 했던 것의 모티프일 것이다. 이 책의 중심일 것이다.

 

<회귀와 사회화의 재통합>은 정신 에너지가 세계로 흘러 들어오는 연속적인 순환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과정이고, 영웅이 속한 사회의 입장에서 보면 영웅의 오랜 후퇴에 대한 변명이 되나, 영웅 자신에게는 가장 어려운 필요 조건이 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영웅이 부처처럼 승리를 거두고 완전한 정각 상태에 들어버린다면 이 경험의 만족감이 세상의 슬픔에 대한 그의 기억과 흥미와 희망을 없앨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51)

 

대개 동화 속의 영웅은 자신이 속한 문화권의 소우주적 승리를 거두고, 신화의 영웅은 세계사적, 대우주적 승리를 거두는 게 보통이다. 또 전자(젊은이, 아니면 막강한 힘을 행사할 수 있게 되는 경멸 당하는 아이)는 자신을 압제하던 상대를 이겨내는 데 그치는 반면, 후자는 모험을 통하여 자기가 속한 사회 전체의 소생에 필요한 수단을 가지고 돌아온다. (53)

 

모험적인 여행은 성취하기 위한 노력이 아닌 재 성취하기 위한 노력, 발견하기 위한 노력이 아닌 재발견하기 위한 노력이었던 듯하다. 영웅이 애써 찾아 다니고 위기를 넘기면서 얻어낸 신적인 권능은 처음부터 영웅의 내부에 있었던 것으로 드러난다. (54)

 

영웅은, 우리 모두가 내장하고 있되 오직 우리가 이 존재를 발견하고 육화시킬 때를 기다리는 신의 창조적, 구원적 이미지의 상징이다. (54)

 

영웅의 성공적인 모험의 의미는, 생명의 흐름을 풀어 다시 한번 세계의 몸 속으로 흘러 들게 하는 데 있다. 흐름의 기적은 물리적으로 음식물의 순환, 역학적으로는 에너지의 흐름, 영적으로는 은총의 현현을 나타내는 듯하다. 이러한 이미지는 단일한 생명력의 세 단계에 걸친 압축을 나타내면서 다양하게 변한다. (55)

 

헤라클레이토스는 이르기를, <신에게는 모든 것이 공정하고 선하고, 정당하지만 인간은 어떤 것을 그르다고 하고, 어떤 것을 옳다고 한다>고 했다. (62)

 

신화도 위대한 영웅을 위대한 도덕가로는 다루고 있지 않다. 미덕 역시, 최고의 직관 앞에서는 케케묵은 훈장의 읊조림이지 다른 것이 아니다. 직관은 짝짝으로 된 상대적 반대 개념을 초월한다. 미덕은 자기 중심적인 자아를 완화시켜 범 개인적인 중심성을 지향하게 한다. 초월적인 힘은 이 모든 것을 통하여 모든 것 안에  사는  , 모든 것 안에서 훌륭한 자, 모든 것안에서 우리의 섬김이 타당한 자에게 감득되는 것이다. (63)

 

닮지 않는 것이 상합하고, 서로 다른 것에서 가장 아름다운 조화가 이루어지며, 모든 것은 다툼에 의해 생겨난다. (63)

나의 생각과 가치관과 다른 것에 대한 나의 태도,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 삶의 진리에 한발 더 나아가기 위해서...아니 뭐 그런 거창한 것은 빼고, 내가 좀더 편안히 안거하기 위해서 나는 다름을 넓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 아닌가. 경쟁이 있는 곳에 포용이 있게 하라.

 

신화의 제신(諸神)이 웃는 웃음은 적어도 현실 도피자의 웃음이 아니라 삶 자체만큼이나 무자비한 웃음이다. 창조자의 무자비함. 그러나 이 무자비함은,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이 고통에 의해서는 손상되지 않는 끈질긴 힘의 그림자이지 다른 것이 아니라는 언질로 균형을 회복한다. (65)

일자로서의 신, 이치와 섭리.

 

 

1. 영웅의 모험

 

부지중에 저지른 실수는 극히 드문 것이긴 하지만 뜻밖의 세계를 드러내고, 당사자는 이해하기 어려운 세력과의 관계 속으로 끌려들어간다. 프로이트가 밝혔듯이, 이러한 실수는 우연히 생긴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욕망과 갈등이 억압된 결과 나타난 것이다. 그것은 부지중에 표출된, 삶의 표면에 잡힌 주름이다. 그리고 이 주름의 골은 매우 깊다. 영혼 그 자체만큼이나 깊다. (71)

 

크든 작든, 삶의 단계나 정도가 어디에 이르러 있든, 이러한 소명은 언제나 변용의 신비, 완성되면 곧 죽음과 탄생에 이르는, 정신적 통과 의례 혹은 순간을 개막한다. 지금까지의 삶의 지평은 이제 너무 웃자라, 낡은 개념과 정서 패턴은 몸에 맞지 않는다. 바야흐로 또 하나의 문턱을 넘어야 할 때가 도래한 것이다. (72)

 

프로이트는, 불안한 순간은 어머니로부터 분리될 대의 고통(탄생하는 순간의 숨이 막히고, 피가 응어리지는 등의)을 상기시킨다고 지적한 바 있다. 거꾸로 말하면, 분리와 탄생의 순간은 불안을 야기시킨다. (73)

불안은 분리에서 기인한다. 어머니로부터의 분리처럼, 자궁에서 벗어나는 것처럼,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방식과 환경에서 벗어나는 것의 시작은 불안이다. 불안을 자연스럽게 맞이해야 하는 것이다. 거부하는 것은 다시 어두운 자궁 속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다. 탄생의 거부인 셈이다.

 

이 징그러운 뱀이나 개구리, 즉 징그러운 동물은 무의식 심층(하도 깊어서 그 바닥이 보이지 않는)을 상징한다. / 여기엔 ...생존의 본질이 우글거리고 있다. 이러한 것들은 수정이며, 트리톤이며, ...황금 양털의 보풀이다. 따라서 모험에의 소명을 알리는 전령관, 혹은 고지자는 어둡고, 징그럽고, 무섭고, 세상의 버림을 받은 존재인 것이 보통이다. (73)

신화를 볼 때 유념해야 할 단서이다.

 

이 신화적 여행의 첫 단계는 운명이 영웅을 불렀고, 영웅의 영적 중심이 그가 속한 사회에서 미지의 영역으로 옮겨졌음을 암시하고 있다.(80)

 

소명에의 거부는, 모험을 부정적이게 한다. 타성이나, 힘에 겨운 일, 혹은 <문화>의 장벽 때문에, 모험의 주체는 의미 심장한 긍정적 행동력을 잃고, 구원의 대상에서 제외되어 버리는 것이다. 모험의 주체가 누리던 화려한 세계는 메마른 돌멩이가 구를 뿐인 황무지가 되고, 그의 삶은 무의미해진다. (81)

 

그러나 무슨 집을 짓건, 그가 짓는 것은 죽음의 집이다. 자기의 미노타우로스를 숨기는 퀴클롭스식 미궁일 뿐이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스스로 새로운 문제를 만들어내면서 파멸을 기다리는 것 뿐이다. (81)

 

미노스 왕은 그가 속한 사회의 신의 의지에 복종한다는 의미로 희생을 드려야 하는 신의 수소를 사유물로 취했다. 그는, 자기 상상력보다는 경제적 이득을 앞세웠다. 때문에 그는 자기에게 맡겨진 생의 역할을 감당한다는 데 실패했고, 우리가 보았듯이 엄청난 불운을 겪어야 했다. 신성이 그 자신의 적이 된 것이다. 개인이 자기 자신의 신이기를 고집하면 신의 의지, 즉 자신의 자기 중심적 체계를 파괴할 수 있는 힘인 신은 괴물로 변하는 것이다.(82)

 

본질적인, 자기 삶의 중심을 잃어버리는 순간 우리는 스스로가 만든 미궁 속으로 빠져드는 것이다. 퀴클롭스식 미궁에 들어간다는 것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되었다. 욕망의 자기당착적 해석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욕망을 대변하거나 합리화해서는 안 된다. 중심의 해석, 신의 해석을 따라야 하는 것이다.

 

인간은 밤이고 낮이고, 자신의 어지러운 심성의 폐쇄된 미궁 안에 있는 살아 있는 자기의 이미지인 신적인 존재에 쫓긴다. 문을 나가는 길은 막힌 지 오래다. 출구는 없다. 인간은 사탄처럼 죽자고 자기 자신에게 매달린다. 이때 그가 있는 곳이 바로 지옥이다. 혹자는 그러다 신 안에서 마침내 파멸하기도 한다. (83)

 

소심한 영혼은 문을 열고 외부 세계로 나오는, 재생을 경험하지 못하는 것이다. (85)

 

주저한다고 다 길을 잃는 것은 아니다. 마음은 많은 비밀을 여축으로 간직하고 있다. 이러한 비밀은 드러나지 않는다고 해서 막혀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소명의 거부에 따르는 부정적인 상태가 뜻밖의 해방의 원리에 대한 행운의 계시일 수도 있다. (87)

 

실제로 고의적인 내향성은 창조적인 정신의 고전적인 방편 중의 하나이고, 이를 효율적인 장치로 응용할 수도 있다. 이 방편은 심적 에너지를 심층으로 몰아 무의식적 유아기의 이미지 및 원형적 심상이라는 잃어버린 대륙을 활성화시킨다. (87)

 

인격이 이 새로운 힘을 흡수하고 통합할 수 있다면 당사자는 자기 의식의 초인간적인 단계 및 완전한 통제의 경지에 이를 수 있게 된다. 이것은 인도 요가 수련의 기본적인 원리다. 서양의 창조적인 정신도 이런 길을 걸어 왔다. (87)

명상, 집중을 통한 자기 통제, 자기 통제는 자기 설득이다. 의식의 강력한 힘(물질적이고 세속적인 욕망과 같은 것)을 통제할 수 있는 것은 무의식에 그에 상응하는 강력한 힘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무의식의 힘을 끌어내는 훈련, 수련이 필요!!

 

소명을 거부하지 않은 모험 당사자는 영웅적인 편력 도중 첫 번째 보호자를 만난다. 노파나 노인의 모습으로 자주 등장하는 이 보호자는 모험 당사자가 곧 만나게 되는 용과 맞설 호부를 준다. (93)

 

영웅을 도와주는 노파나 요정 노파는 유럽의 민담에 자주 등장한다. 기독교의 성인전에서는 성모 마리아가 이 역할을 맡는다. 성모의 주선으로 성자는 천주의 자비를 얻는 것이다. 지주녀는 그 줄로써 태양의 운행을 통제할 수 있다. 우주 태모(cosmic Mother)의 보호를 받는 영웅은, 어떤 가해도 받지 않는다. 아리아드네의 실타래는 테세우스가 미궁의 모험을 무사히 마칠 수 있게 해주었다. 이것은 단테의 작품에서 베아트리체와 성모라는 여성의 모습으로, 그리고 괴테의 파우스트에서는 그레첸, 트로이아의 헬렌, 그리고 성모로 나타나는, 영웅의 보호령이다. (95)

 

모험을 나선 당사자가 그것을 알고 그 존재를 믿기만 하면 시공을 초월한 안내자가 언제나 나타난다. 소명에 응답했고, 용기 있게 미지의 사건에 대한 체험을 경험해 왔기 때문에 영웅은 모든 무의식의 힘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인다. 대자연Mother Nature은 항상 위대한 임무를 지원한다. 영웅의 행동이 그 사회가 예비하고 있는 것과 일치할 때, 그는 흡사 역사적 변화의 리듬을 타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러시아 원정에 즈음해서 나폴레옹은 이런 말을 했다.

나는, 미지의 종국으로 떠밀리는 느낌을 받고 있다. 내가 그곳에 이르는 순간, 내가 불필요하게 되는 순간, 나를 갈가리 찢는 데는 한 입자의 원자면 충분하다. 그러나 그때까지는, 인류가 힘을 모두 합치더라도 나를 해칠 수 없을 것이다. (96~97)

멋진 출사표! 일순간에 범인이 영웅적인 기질을 가진 것은 아니리라. 그리고 소명이라는 것도 어느날 신이 주신 신탁처럼 그렇게 다가오지도 않을 것이다. 쉽지 않은 길을 믿음을 따라 걸어가는 것 그것은 영웅이 소명을 만나고 무의식을 경험하고, 대자연의 힘을 얻는데 선행해야 하는 고난이다. 나에게 이런 것은 무엇이 있는가? 소명을 구체화할 수 있는가?

 

그런 조력자를 맞은 영웅은, 소명에 응답한 영웅일 경우가 보통이다. 실제로 소명은, 통과 제의의 사제가 접근하고 있음을 알리는 첫 번째 통고다. 그러나 <구원할 수 있는 분은 알라 신뿐>이라는 말에서 보았듯이, 영혼을 닫은 자들에게는 초자연적인 안내자가 오는 예가 있다. (99)

 

수호자는 영웅의 현재 상황, 혹은 삶의 지평의 한계를 상징하면서 사방에서 세계의 경계를 나타내고 있다. 이 수호자 뒤로는 어둠이며, 미지의 세계이며, 위험이다. 부모의 감시 밖이 아이들에겐 위험 지역이고, 사회의 보호 밖이 종족의 구성원들에겐  위험 지역인 것과 마찬가지다. 보통 사람들이면 여기에서 만족한다. 집단의 보편적 믿음이, 미지의 땅으로 첫 발을 내딛으려 하는 사람을 두려움에 떨게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105)

안전으로부터의 분리, 익숙한 것들과의 결별, 낯선 것에 대한 지향, 보편적인 믿음으로부터 한걸음 더 나아가는 것, 그것의 힘은 무엇인가? 어둠을 향해서 걸어나가게 하는 힘은 무엇인가?

나의 뒤는 어둠이다. 미지의 세계는 불안을 야기한다. 그 불안은 미래를 생각하는 것을 거부한다. 그것이 그냥 오늘과 내일만을 보게 한다. 이것이 긍정적인 작용인지, 부정적인 작용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미래를 그리기 위해서 지금의 나를 보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그것은 알 것 같다.

 

미지의 땅(황야, 밀림, 심해, 타향 등)은 무의식의 내용물이 자유롭게  투사되는 무대다. 근친 상간 리비도 libido와 부친 살해의 테스트루도 destudo, 거기에서 폭력의 위협과 가공의 위험한 환희를 암시하는 형태로, 도깨비는 물론, 신비스러운 정도로 매혹적이고 향수를 유발할 정도로 아름다운 세이레네스(사이렌)으로 개인과 사회에 다시 투사된다. (107)

결국 전체성으로의 무의식을 만나기 위해서는 미지의 땅으로 들어가야 한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특정 구역의 수호자에게 도전하지 않는 게 좋다. 그러나 살아서든 죽어서든 새로운 경험역을 지나려면 같은 세력의 파괴적 측면을 극복하고 이 특정 구역을 넘어서지 않으면 안 된다. ... 이런 초자연적인 능력은 정글에서나 꿈속에서 정령을 만나거나 죽음과 재생의 체험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111)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얻는 것이다. 성취하는 것이다.

 

모험이란 기지의 세계에서 미지의 세계로 가는 것을 말한다.

이 기지의 세계와 미지의 세계를 가르는 경계선의 수호자는 극히 위험한 존재다. 그들과 만난다는 것은 그만큼 위험부담을 안아야 가능하다. 그러나 능력과 용기를 갖춘 사람 앞에서는 위험은 그 꼬리를 감추고 만다. (112)

 

자기 생활권이라는 벽에서 한 발이라도 밖으로 나가는 영웅은 반드시 이런 괴물(몹시 위험하면서도 때로는 마법의 권능을 베푸는)과 만나야 한다. (112)

이 징그러운 뱀이나 개구리, 즉 징그러운 동물은 무의식 심층(하도 깊어서 그 바닥이 보이지 않는)을 상징한다. 여기엔 ...생존의 본질이 우글거리고 있다. 이러한 것들은 수정이며, 트리톤이며, ...황금 양털의 보풀이다. 따라서 모험에의 소명을 알리는 전령관, 혹은 고지자는 어둡고, 징그럽고, 무섭고, 세상의 버림을 받은 존재인 것이 보통이다. (73페이지의 내용과 비슷한 단서)

 

영웅이 겪는 복잡한 관문 통과의 다의성과, 영웅의 공포는 완전한 정신적 무장 앞에서 사라지겠지만, 자기 능력을 과신하는 무모한 영웅이 이 관문을 통과에는 실패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113)

아리아드네의 실을 얻어 미궁에서 미노타우로스를 죽이고 백성을 구했던 영웅 테세우스도 그의 욕망을 어쩌지 못하여 결국은 벼랑에서 생을 마감한다. 뿐만 아니라 디오니소스의 행운이 재앙이 되어버린 미다스 손이 그렇고 태양의 신 헬레오스의 아들 파에톤이 제우스의 벼락을 맞아 생을 마감하는 것도 버리지 못한 욕망의 댓가이다. 캠벨은 한평생 자신을 인도했던 신성은 욕망이 주인이 되는 순간 자신의 적이 된다. 스스로를 파괴하는 괴물이 되는 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이제 독자들도 다섯 가지 무기를 지닌 태자의 말 뜻을 헤아렸으리라. 그가 자기 뱃속에 있다고 한 무기는 다름아닌 <지혜>라는 무기였다. (118)

그리스 신화에서도 최고의 신 제우스는 광명의 신이며, 제우스의 자리에 못지 않은 영광을 눌렸던 파르테논 신전의 주인공 아테나도 지혜의 여신이 아닌가. 지혜로움을 갖는다는 것은 예로부터 최상의 능력으로 꼽히고 있다.

 

우리가 오감(五感)으로 집착하고 있는 세계의 상징, 그리고 육체적인 어느 기관에 의해서는 벗어날 수 없는 세계의 상징인 그 도깨비는 미래의 부처가 덧없는 이름과 물리적인 성격의 다섯 가지 무기로 더 이상 자신을 지키지 못하고 최후의 수단으로 이름할 수 없고, 보이지도 않는 여섯 번째의 무기로 바꾸어 대항하자 조복한 것이다. 이 여섯 번째 무기가, ()과 형()이라는 현상계 너머에 존재하는 초월적인 원리의 지혜라는 천상적 벼락인 것이다. (119)

 

태자에게 도깨비는 붙잡히는 것이 아니라 그 손에서 풀려난다. 이제 그는 영원히 자유로워진 것이다. 뿐만 아니다. 현상계의 마력이 무너지자 그는 자기를 부정하게 된다. 자기를 부정함으로써 그는 신(보시를 받을 자격이 있는 신적인 정령)이 된다. 종국적인 이름과 형태가 아닌, 마음속의 이름과 형태를 초월한 단순한 이름과 형태를 알게 될 때 세상이 그렇게 되듯이 그 역시 신적인 존재가 된 것이다. (119)

명함을 버린 나로서의 존재, 조직이 설명하는 나를 떠나서 나를 나로서 존재하게 하는 것, 그것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자기를 부정함으로써 그는 신이 된다. 종국적인 이름과 형태가 아닌 마음속의 이름과 형태를 초월한 단순한 이름과 형태를 알게 될 때 세상이 그렇게 되듯이 그 역시 신적인 존재가 된 것이다. (119)

현상계에 집착하지 않고 그 너머를 보는 것, 그것이 궁극적인 지혜 즉 진리가 아닐까?

이것은 결국 나와의 끊임없는 소통(명상)과 실천궁행을 통해서 가능한 것이리라. 가야 할 길이 멀다.

 

태양 문을 통하여 번제의 연기가 피어오르듯이, 영웅은 자아에서 해방되어 세계의 벽을 통과하는 것이다. 자아는 끈끈이 터럭에 다 붙여두고 영웅은 제 갈 길을 가는 것이다. (120)

 

세계 도처에서 채집되는 이러한 모티프는, 관문의 통과가 자기적멸의 형태를 취한다는 교훈을 강조하고 있다. (123)

괴물의 뱃속으로 들어가는 과정이 자기적멸이라면 자신의 내부에 버려야 할 대상은 괴물인 것이다. 더 큰 나를 위해서는 현재의 자아를 버려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자신의 세계에 더 깊이 뿌리 내릴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자기적멸이라는 것이, 나의 자아를 버리는 것이 어떤 것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여기서는 영웅이 외부로의 관문, 즉 가시적 세계의 한계를 넘는 대신, 다시 태어나기 위해 안으로 들어간다. 이 들어감은 신도가 신전 안으로 들어가는 것과 일치한다. 신도는 이 신전 안에서, 자신은 불멸의 존재가 아니라 티끌에 불과하다는 자기 정체를 깨닫게 된다. (123)

 

신전으로 들어가는 것과 고래의 입을 향한 영웅의 돌진은 같은 모험인 셈이다. 즉 회화적 언어로 말하자면 둘 다 생의 구심화 행위, 거듭나는 행위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123)

 

아난다 쿠마라스와미 박사는 <존재를 그만두지 않고는 어떤 생명체든 보다 높은 차원의 존재를 획득할 수 없다>고 썼다. (124)

이 책에서 '어떻게'를 찾지 못한 것은 나의 능력의 한계이다. 자기적멸, 자아를 버리는 것의 개념은 대충 마음에 와 닿지만 구체적인 이해와 그것을 생활에 적용할 만한 사례로 어떤 것이 있는지 답답하다.

 

자아에의 집착을 끊은 영웅은 왕이 자기 궁궐에서 방방을 드나들 듯이 삶의 지평을 넘나들거나 용의 뱃속을 드나들 수 있다. 스스로를 구원하는 힘은 여기에 있다. 그의 죽음과 회귀는, 모든 현상계의 대립물이 창조되지 않은 불멸의 존재임을 드러내는데 여기에 두려움이 있을 리 없다. (124)

 

미노스가 괴수 미노타오로스가 되고, 자기를 희생시켜야 하는 왕이 폭군이 되고, 모두가 왕의 역할을 수행하던 제정 일치 국가가 사리 사욕만 아는 상업국가가 된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126)

 

일단 관문을 통과한 영웅은 기묘할 정도로 유동적이고, 모호한 형태로 이루어진 꿈의 세계로 들어간다. 영웅은 이곳에서 거듭되는 시련을 극복하고 살아남지 않으면 안 된다. 신화와 모험에서 가장 흥미롭게 다루는 부분도 바로 이 국면이다. 이 국면은 기적적인 시험과 시련을 다룬 세계의 문학을 창출해 왔다. (128)

내 삶에서 스스로의 영웅이 되고자 하지만 시련으로부터는 예외이고 싶은 것이 나의 또 다른 욕망이다. 참다운 용기는 무엇인가?

 

인간의 무리는 집단의 이상에 따라 행동하는 법인데, 이 집단의 이상이라는 것은 항상 유아기 상태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 거기에는 보이지 않는 생명 충동의 유대를 강화하고 있다. 이 유대가 없다면 인간의 집단은 존재할 수가 없다. (133)

 

주술사란 이러한 유아적 놀이를 주도하고, 공통의 근심거리를 밝혀내는 지도자인 것이다. 그들은 사회의 구성원들이 사방에서 성공하고 현실적인 어려움과 싸워 이길 수 있도록 잡귀와 대리 전쟁을 치르는 것이다. (133)

스스로 자신의 삶에 대하여 주술사적 기능을 수행하는 것.

 

다음 꿈을 꾼 사람은 저널리스트로 생활비를 벌어야 하는 시인이었다. 나는 땅에 누워 있는 반 마리의 말을 보았다. 날개가 하나밖에 없어서 말은 일어나려고 애쓰는데도 일어나지 못했다. (137)

 

고대의 상징체계에 따르면 빛과 어둠을 표상하는 자매, 즉 이난나와 에레쉬키갈은 두 얼굴의 한 여신이다. 그리고 그들의 반목은 어려운 시련의 길을 의미한다. 영웅은 자신의 자존심, 미덕, 아름다움, 삶을 팽개치고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이 적대자에게 절을 하거나 복종한다. 이윽고 영웅은 자신과 적대자가 사실은 둘이 아닌 하나임을 깨닫게 된다. (143)

영웅도 적대자도 모두가 내 안에 있다. 외부에서 나를 반목하고 무시하는 힘보다도 내부에서 스스로를 믿지 못하는 어리석음이 더 무서운 적인 것이다. 영웅의 고난 극복의 길은 내부의 적대자를 물리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시련의 첫 관문의 문제를 심화시키고 질문은 여전히 미제로 남는다. 자아가 스스로를 죽음에 내어 맡길 수 있느냐는 질문이다. (143)

 

잠자는 여성은 미인의 본보기 중의 본보기이며, 모든 욕망에 대한 응답, 모든 영웅의 지상적, 비지상적 모험의 은혜로운 최종 목표다. 뿐만 아니라 어머니며, 누이며, 애인이며, 신부이기도 하다. 세상에 유혹하는 것, 기쁨을 약속해 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잠자는 여성이 지향하는 존재의 예조(豫兆_조짐이나 징후)에 해당한다. 이러한 유혹과 약속은, 이 세상의 도시나 숲에서가 아니라, 우리가 깊이 잠들어 있을 때 찾아온다. 왜 찾아 왔을까? 그녀의 존재가 바로 완전성이라는 약속의 화신이며, 조직화된 불완전한 세계 속에서 오랜 방황을 끝낸 영혼의 안식이며, 한때 인류가 맛보았다가 언젠가 다시 맛볼 은혜이기 때문이며, 위안과 자양, 그리고 우리가 아득한 옛날에 그 사랑을 받던 <좋은> 어머니(젊고 아름다운)이기 때문이다. (148)

 

아르테미스(디아나)가 젊은 사냥군 악타이온을 철저하게 파멸시킨 예는 정신과 육체의 차단된 욕망의 상징 안에 얼마나 엄청난 공포가 도사리고 있는지 확연히 보여준다. (148)

 

정신적으로 준비가 되지 않은 사람이 연신의 모습을 본다는 것은 엄청난 재앙일 수 있다. 수사슴이 된 악타이온의 예에서 우리는 이미 이런 사실을 확인한 바 있다. 악타이온은 성자가 아니었다. 정상적인(유치한) 욕망이나, 놀라움이나, 공포에 반응하는 인간으로서 엿보아서는 안 될 계시에 대해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일개 사냥꾼에 지나지 않았다.(153)

 

여신 숭배자는 이 두 유형의 어머니를 똑같이 조용히 묵상해야 한다. 이러한 수행을 통해 숭배자의 정신은 유치하고, 어울리지 않는 감상과 증오로부터 스스로를 정화하고, 유치한 인간이 자신의 행, 불행에 연결 지어 멋대로 가른 <> <> 따위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본성이 법과 상으로 존재하는 불가해한 실재를 향해 그 마음을 열게 된다. (152)

그렇다. 진리를 탐구하지 않으면, 여신의 코드를 풀어서 지혜를 깨치지 못하면 우리는 결국 자신의 어설픈 욕구에 따라 구분되어지는 세상만을 보게 되는 것이다.

 

신화학의 심상 언어에서 여자는, 알려질 수 있는 것들의 전체성으로 표상된다. 알게 되는 존재가 곧 영웅이다. 영웅이 다른 삶의 다른 형태인 입문의 과정을 진행함에 따라 여신의 형상은 그에게 일련의 변형 과정을 체험하게 한다. 여신은 항상 영웅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약속할 수 있지만 영웅보다 위대할 수는 없다. 여신은 그를 유혹하고, 인도하고, 그의 발목에 채인 족쇄를 깨뜨리게 한다. 그리고 만일 영웅의 능력이 여신에 미치면 이 양자, 즉 아는 존재와 알려지는 존재는 갖가지 제약에서 해방된다. (153)

 

여신은 자기 존재를 알아보는 자에 의해 해방된다. 지나치게 흥분한 상태에서가 아닌, 여신이 바라는 친절하고 침착한 상태에서 그 여신의 정체를 알아볼 수 있는 영웅은, 여신이 창조한 세계의 왕, 즉 인간으로 화신한 신일 수 있는 것이다. (154)

 

처음에는 그대 역시 이 몸을 추악하고 야비하고, 욕지기가 나는 노파로 보았다가, 이윽고 아름다움을 보셨습니다. 왕도(인생)또한 이와 같습니다. 왕도(인생)란 싸움 없이, 치열한 전쟁을 치르지 않고는 손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인생의 주인)의 그릇은 무슨 일이 있든지 이를 이기고 왕도(인생)를 가는 것입니다. (156)

왕도에 인생을 대입하여 본다. 우리가 찾고자 하는 성배일 것이다.

 

여신(모든 여성에게 현현되는)과의 만남은 사랑의 은혜(자비, 즉 운명에의 사랑)를 얻기 위해 영웅이 맞는 마지막 재능의 시험 단계다. 이 사랑의 은혜는 바로 우리 삶이 누리는 영원성의 그릇과 같은 것이다. (157)

 

세계의 여왕인 여신과의 신비적인 결혼은 영웅의 삶 전체가 완성되었음을 상징한다. 즉 여성이 곧 삶인데, 영웅은 이 삶을 알게 되었고, 이를 완성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영웅의 궁극적인 체험과 행위의 예비 시험이라고 할 수 있는 영웅의 시련은, 자각의 위기를 상징한다. 이 자각의 위기를 통해 영웅의 의식은 증폭되고, 어머니 상의 파괴자, 즉 천생연분의 신부를 전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시련을 받는 당사자는 자기와 아버지가 동일하다는 사실과, 자기가 곧 아버지의 입장이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159)

여성이 곧 삶이다. 캠벨의 결혼에 대한 아내에 대한 다른 책에서의 글들이 오버랩 된다. 내 삶이 완성 되기 위해서는 여신과 결혼해야 하는 것이다. 결혼의 의미를 확대해보고, 아내의 존재를 확대해 본다.

 

이렇게 해놓고 보니, 용어가 일반인에게 생소해서 영웅의 문제는 일반인의 삶과 무관해 보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삶의 상황을 수습하는 데 대한 실패는 결국 의식의 제약으로 나타나는 수밖에 없다. 싸움이나 짜증은 무식한 자들의 미봉책에 지나지 않고, 후회는 때늦은 각성일 뿐이다. (159)

 

우리는 우리를 가로막는 제약의 벽을 허물어뜨리는 데 필요한 길잡이로 삼아야 한다. 도깨비란 대체 누구이며 어디에 있는 것일까? 도깨비들이란 자기 인간성의 미해결 수수께끼가 투영된 것이지 다른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상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개개인이 자기 삶을 파악하는 징후인 것이다. (160)

 

삶의 배후에 있는 삶을 찾아나서는 모험가는 그녀의 유혹을 물리치고, 현실 세계 너머에 존재하는 에테르(精氣) 속으로 날아들어가야 한다. (161)

 

<화해 atonement>, <하나되기 at-one-ment>란 스스로 만들어낸 두 마리의 괴물(, 초자아)으로 보이는 용과 죄악(억압된 이드)으로 보이는 용을 포기함으로써만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자면 자아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하는데 이게 예사 어려운 일이 아니다. (170)

어버지의 무섭고 잔인한 측면은, 피해자의 에고가 투영된 것이다.(170) 이러한 것은 잠재적인 성인의 정신을 세상에 대한 온전한 견해로부터 봉쇄한다.(170) --> 논리의 앞뒤를 다시 풀어봄.

나를 벗어나듯, 도덕률로서 주어진 신의 족쇄를 벗는 것이 온전한 성인의 정신으로 가는 전제가 되는 것이다.

 

영웅이, 조력자인 여성에게서 희망과 자신을 발견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시련을 통해서다. 여성의 마법(꽃가루라는 호부, 중재의 능력) 덕분에 영웅은, 자아가 송두리째 흔들리게 하는 아버지의 무서운 입문 의식 경험으로부터 보호를 받는다. (171)

 

지원을 보장받은 영웅은 위기를 견디어 나가고, 결국에 가서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서로를 투영하고 있지만 사실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171)

 

자식에 대해 지나치게 관대한 이 부모의 이야기는, 입문이 잘못되었을 때 입문자의 삶에는 혼란이 올 수 있다는 옛사람들의 생각을 확인시켜 준다. (177) 포이보스와 파에톤의 이야기로부터

 

아버지는 아들에게 있어서 미래 세계의 상징이요, 딸에게 있어서는 미래 남편의 상징이다. 알든 모르든, 그리고 사회의 지위가 어떻든 아버지란 존재는 자식이 더 넓은 세계로 나갈 때 마땅히 거쳐가는 입문식의 사제다. (177)

 

비법 전수자(아버지 혹은 아버지를 대신하는 사람), 유아기의 부적당한 카텍시스(cathexes, 리비도가 특수한 사람, 물건, 도는 관념을 향하여 집중 발현되는 현상)로부터 놓여난 입문자에게만 의식의 상징을 베풀게 되어 있다. 이런 입문자라야 자기 강화라는 무의식적(혹은 의식적, 합리적일지도 모른다) 동기나 개인적인 선호나 혹은 증오 때문에 정당하고 비개인적인 힘을 오용할 가능성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상적으로 말하자면, 입문의 영광을 입는 자는, 자기 인간성을 모두 박탈당하고, 비개인적인 우주적 힘을 대표하는 사람이 된다. 그는 이제 거듭난 자이며, 그 자신이 곧 아버지다. (178)

 

위대한 아버지의 뱀의 몸<안에서> 어머니를 잃는 대신에 그 보상으로 얻게 될 새로운 세상을 소개받는다. 그리고 아이들은 자기 성상의 중심(즉 세계의 축)에다 젖가슴 이미지 대신 남근을 세운다. (180)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의 신화를 보면, 초기 입문 의식에서는 모든 젊은이들이 죽음을 당한 것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이 의식은 연장자 세대에 대한 오이디푸스적인 공격의 극단적인 표현으로 비쳤다. 완화된 거세 의식인 할례 의식 역시 마찬가지였다. (181)

<오이디푸스적인> 어의에 대해서 생각해볼 것

어머니와의 낙원을 침입하는 것은 아버지의 상징이다. 그러니 오이디푸스적인 공격은 미지의 세계로 인도하는 인도자로서의 아버지이자 낙원을 침입하여 그것을 앗아가는 침입자로서의 아버지 인것이다.(내가 봐도 괜찮은 해석이 될 같다.)

 

죽음을 당했다 부활한 디오뉘소스의 비문이기도 한 이 <뒤트람보스_Dthyrambos>라는 말을, 그리스인들은 <두 문을 지난 사람>, 즉 재생의 무서운 관문을 통과한 사람을 뜻하는 말로 이해했다. (185)

 

이 땅에 살기 시작한 이래로 인간은 이러한 신성한 절차를 통하여 현상계에 대한 공포를 이기고 불사의 존재를 향한 초월의 희망을 획득할 수 있었다.(180)

제의의 두 가지 목적 1. 현상계에 대한 공포(두려움) 극복, 2. 초월적 희망의 획득(불사, 영원)

 

비라코차의 특징 가운데서도 가장 독특하고 감동적인 대목은, 비라코차 고유의 것인 저 눈물이다. 생수는 신의 눈물이다. 여기에서 <모든 생명은 슬프다>는 비관적인 어느 수도승의 통찰은, <과연 생명>이라고 찬탄하는 아버지의 낙관적인 확신 속으로 수렴된다. (191)

눈물을 통한 삶의 소생은 혹시 삶의 단면을 설명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삶은 고해라고 하지 않았던가

 

자기 손이 창조한 생명의 고뇌를 익히 자각하고 혹심한 고통, 머리를 터드리는 듯한 미앙의 불길, 자기가 창조한 자기 참해적이고, 쾌락적이고, 분노에 달고 있는 우주를 생생하게 의식하는 이 신은 삶이 삶을 점화시키는 행위를 승인한다. (192)

 

정액의 사출을 보류하는 것은 멸종을 초래할 뿐이다. 그러나 이를 사출하는 것은 우리가 아는 세계를 창조하기 위함이다. 시간의 본질은 유동하며, 한 순간 존재하던 것의 흐름이다. 그리고 생명의 본질은 시간이다. 신의 자비, 시간이라는 양식에 대한 그의 애정을 통해, 이 데미우르고스(조물주)적 인간 중의 인간은 저 고해로 몸을 내맡긴다. 그러나 자기의 행위를 완전히 자각하고 있는 경우, 그가 사출하는 정액은 곧 그 눈에서 흐르는 눈물이다. (192)

유한한 시간을 살지만 우리는 창조한다. 창조할 수 없는 삶은 삶의 불임인 것이다.

 

창조의 역설, 영원으로부터의 시간이라는 양식의 도래는 아버지가 지니는 근원적인 비밀이다. 이것은 설명될 수가 없다. 따라서 모든 신학 체계에는 배꼽, 즉 어머니인 생명의 손가락이 닿았던 끝내 아무도 알 수 없는 아킬레우스 건이 있는 법이다. 영웅이란, 정확하게 그곳을 뚫고(그가 속한 세계와 함께) 들어가, 그의 존재를 제약하는 매듭을 잘라야 하는 것이다. 192

창조의 역설? 두 번째 읽을 때 좀더 이해하도록 할 것.

자신의 태를 자신이 자른다. 그럼으로써 풀려날 수 있다. 자궁에서 제약에서.

제우스가 크로노스로부터 존재하게 되듯이...???? 존재를 제약하는 매듭을 자르는 것. 제우스는 시간이라는 영원한 제약에서 벗어남으로써 신중의 신이 된 것.

 

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영웅은 영혼의 문을 열어 공포를 극복하고, 이 광대무변하고 무자비한 우주의 걷잡을 수 없는 비극을 존재의 존엄성 속에서 완전하게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영웅은 자기 몸에 박힌 가시(약점)를 통해 삶을 초월하여, 한 순간이나마 그 근원을 투시한다. 그는 여기에서 아버지를 만나고, 아버지와 자기가 화해에 이르렀다는 것을 깨닫는다. (192)

<아버지와의 화해>가 어떤 것인지 스스로 정의하여 볼 것.

아버지가 상징하는 것에 대해서 그것이 내가 다시 태어난다는 관점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고찰해볼 것 - 위대한 아버지 뱀의 부름은 아이를 놀라게 했고, 어머니는 아이의 보호자였다. 그러나 이윽고 아버지가 왔다. 그는 미지의 신비로 아이를 인도하는 안내자이며, 비의의 전수자였다. 어머니와 누리던 유아기라는 아이의 낙원에 침입한 아버지는 원형적인 것이다. 이때부터 아이에게 있어서 평생토록 모든 적은 아버지를 상징한다. 그래서 <살해당한 것은 모두 아버지>가 되는 것이다. (204)에서 힌트를 얻는다.

 

아들이 아버지를 알 나이가 되면 시련의 고뇌가 이미 그의 내부에 태동해 있다. 세상은 더 이상 눈물의 골짜기가 아닌, 행복이 기다리는 현존의 완전한 현현이다. (194)

 

불교에서 가장 영험이 있는 분으로 믿어지고 도 가장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보살은 연꽃을 들고 다니는 관세음보살이다. 이 분은 존재의 구렁텅이에 빠져 고통 받고 있는 모든 지각 있는 중생을 가엾게 여긴다고 해서 관세음보살, <대자대비로 굽어보시는 주()>라고 불린다. (195)

 

인간에게 알려진 신들 가운데 관세음보살만큼 많은 기도를 가납하는 신도 없을 것이다. 여기엔 이유가 있다. 즉 그는 인간으로 이 땅에 살다가 마지막 관문을 넘어서는 순간(이 순간만 넘어서면, 이름 붙여지고 경계 지어진 우주의 헛도니 망상을 초월한 공의 무량 세계가 열린다)에 이를 작파해 버리고, 모든 중생을 정각에 이르게 한 연후에야 공에 들겠다고 맹세했기 때문이다. (196)

본인의 해탈과 세상의 구원에서 후자를 택한 관세음보살,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의 생에 비견되는 대목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잠재해 있는 해탈의 상태이며, 영웅들이 됨으로써 누구나 획득할 수 있는 상태다. <만물에는 불성이 있으니>, (같은 말을 달리 하자면) <일체의 존재는 자아가 없기 때문이다.> (197)

 

보살의 양성구유적(兩性具有的, androgynous) 성격, 남성인 관세음과 여성인 관음의 성격을 동시에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198) ...이러한 신들은 마음을 객관적인 체험을 초월한 상징적 영역, 이원성이 존재하지 않는 영역으로 인도한다.

 

여성을 다른 형태로 후퇴시켰다는 사실은 완전성에서 이원성으로의 타락을 상징한다. 이어서 선악의 이원성이 나타나고, 하느님이 걸으시던 낙원에서의 추방과 낙원의 울타리가 세워졌다. 낙원은 <대립적인 것이 공존 coincidence of opposite>하는 곳이었는데, 이제 인간은 이 낙원의 울타리에 의해 하느님에 대한 환상과 하느님 형상에 대한 회상으로부터 단절되었다. (200)

 

즉 영원성이 시간성으로 발전하고, 하나가 둘에 이어 다수로 분열하며, 둘의 시간성으로 발전하고, 하나가 둘에 이어 다수로 분열하며, 둘의 재결합으로 새 생명의 세대가 나타나는 것이다. 이 이미지는, 우주 발생적 순환의 시작에 해당하는데, 영웅의 모험이 막바지에 도달하여 낙원의 벽이 허물어지는 순간, 신의 형상은 다시 나타나고, 지혜는 다시 원상으로 회복된다. (200)

 

영웅은 의식을 통하여 남성 이상의 어떤 존재가 되는 것이다.(203)

 

피가 흘러 내린다는 것은 곧 피를 흘린 아버지가 삶의 원천과 자양을 내부에 지니고 있음을 나타낸다. 즉 그들과 영원히 마르지 않는 세계의 샘은 동일한 것이다. (203)

 

위대한 아버지 뱀의 부름은 아이를 놀라게 했고, 어머니는 아이의 보호자였다. 그러나 이윽고 아버지가 왔다. 그는 미지의 신비로 아이를 인도하는 안내자이며, 비의의 전수자였다. 어머니와 누리던 유아기라는 아이의 낙원에 침입한 아버지는 원형적인 것이다. 이때부터 아이에게 있어서 평생토록 모든 적은 아버지를 상징한다. 그래서 <살해당한 것은 모두 아버지>가 되는 것이다. (204)

 

뿐만 아니다. 전쟁을 일으키고 싶은 충동도 여기에서 비롯되고, 아버지를 죽이고 싶은 충동은 끊임없이 집단 폭력으로 발전한다.(204)

폭력에 대한 인간의 충동은 오이디푸스적인 것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낙원이 침입 당한 것에 대한 보호로서 적대적인 것의 인식.

 

종족 및 인종적 토템과, 공격적인 집단 행위를 겨냥한 제의는 사랑으로 증오를 정복하는 심리적 문제의 부분적인 해결책만을 나타낸다.(205) ....세계는 서로 싸우는 무리들로 가득 차 있다. 이 모두가 토템, 국기, 그리고 집단의 숭배자들이다. 심지어는 기독교 국가라고 불리는 나라들도 지엄하신 그들의 주가 가르친 에고, 에고의 세계, 그리고 에고의 종족 신의 정복과 동의어라 할 수 있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실천하기보다는, 식민지주의적 야만성과 너 죽고 나 죽자 식 전쟁의 선수로 역사에는 더 알려져 있다. (205~206)

오이디푸스적인 본성을 제의를 통해서 사회가 통제하고 승화시켜야 하지만 우리는 상징을 잘못 해석하는 오류를 범함으로써 승화하여야 할 제의는 오이디푸스적인 본성을 더욱 자극하는 꼴이 되어버린 것이다.

 

우리가 일단 세계의 원형들에 대한 편협스런 교회적, 종족적, 국가적인 해석의 선입견을 홀가분하게 벗어 던지게 되면, 우리가 전수받아야 할 최상의 도리는,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서슴없이 이웃을 공격하는, 누구에게만 자애스런 아버지의 도리가 아님을 이해하는 게 가능해진다. (207)

 

희미한 미망의 그물 안에서 자기를 고문하고, 자기를 속이고, 그 그물에 엉김으로써 부단히 일어나는 인간의 번뇌, 해탈의 비밀이 제 속에 있는데도 이를 깨닫지도, 제 것으로 만들지도 못해 좌절하는 인간의 번뇌. 그는(관세음) 그것도 굽어본다. (210)

 

우리는 모두 보살 이미지의 그림자다. 우리 내부의 고통은 바로 저 신적인 존재다. 우리와 저 보호자인 아버지는 한 몸이다. 이것은 구원의 통찰이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은 모두 우리 보호자인 아버지다. 그러니 이 무지하고, 유한하고, 자위적이고, 고통 받는 육신이 다른 육신()으로부터 위협을 받을 경우에는 그 적 또한 신이라는 걸 알아야 한다. 도깨비는 우리 기를 꺾지만, 유능한 후보자인 영웅은 <사나이답게> 입문한다. 보라, 그 도깨비가 바로 아버지였다. 우리는 그의 안에 있고, 그는 우리 안에 있다. (211)

 

우리의 보호자인 사랑하는 어머니는 우리를 저 위대한 아버지 뱀으로부터 보호해 줄 수 없었다. 어머니가 준 필멸의, 현실적인 육체는 그의 무서운 힘 안으로 빨려 들었다. 그러나 죽음은 끝이 아니었다. 새 생명, 새로운 탄생, 새로운 존재의 지식이(따라서 우리는 이 몸만으로 사는 게 아니고, 보살처럼 모든 몸, 세상의 모든 육신으로 산다) 우리에게 주어졌다. 저 아버지가 바로 어머니, 즉 재생의 자궁이었던 것이다. (211)

 

보살에 대한 첫 번째 경이로움은 바로 이것, 즉 보살이라는 존재의 양성구유적 성격이다. 이 보살과 만남으로써 분명히 신화의 대립적인 모험이 서로 만난다. 신화의 대립적인 모험이란 여신과의 만남, 그리고 아버지와의 화해다. (213)

이 구절 뒤에 나오는 여신과의 만남, 아버지와의 화해에 대한 해석은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 두 번째 세 번째 읽을 때는 이해가 오는지 측정의 지표로 살펴보자.

여신과의 만남 - 장애물을 극복하고, 도깨비를 퇴치하고 여정이 끝나는 것이라 생각되는 자리에 여신과의 만남이 있고 이것은 영웅의 마지막 모험으로 해석된다. 켐벨은 여신과의 만남을 사랑의 은혜(자비, 즉 운명에의 사랑)를 얻기 위해 영웅이 맞는 마지막 재능의 시험 단계라고 하였다. 이 사랑의 은혜는 바로 우리 삶이 누리는 영원성의 그것과 같은 것이라고 하였다. 진정한 영웅이 어머니의 가장 대표적인 상징과 같은 것을 몸에 담는 것이다.

아버지와의 화해 - 어버지는 결국 피해자의 에고가 투영된 것이다. 유아기 때의 장면이 전면 투사되어 있는 지난날의 상징인 것이다. 뱀이 허물을 벗듯이 그것들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영웅 여정의 필수인 것이다. 단칼에 베어내라고 하지 않았던가.

 

보살신화에서 주목해야 할 두 번째 경이로움은, 보살이 삶과, 삶으로부터 해탈의 차이를 없애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보살이 열반을 단념한다는 사실로 상징되고 있다. 열반이란 말은, <탐욕과 성내는 것과 어리석음이라는 세 겹의 불(三毒)을 끈다>는 뜻이다. (213)

열반을 단념하고 세상의 구원이라는 길을 나서는 것. 이것은 이 세상과 해탈의 세상이라는 이원화된 것을 이세상과 바라는 어떤 세상에 구분이 없다는 각성의 세계로 일원화하는 깨침이 아닌가. 사부님의 이원성과 일원성에 대한 말씀이 생각난다.

나 또한 떨치고 싶은 욕망의 자아와 삶에 대한 깨침이 있는 나를 어느 순간에는 헤어지고 만나게 될 구분되는 나로 인식한다. 가능하지도 않을 것을 고민 없이 받아들이고 있는 어리석음이 있다. 지금이 나를 사랑하여야 한다. 욕망의 자아를 잘 설득하고 미래의 나를 받아들이는 것을 생각해볼 것.

 

nirvana라는 동사는 <분다>는 뜻이다. 그러나 불어서 이동시킨다는 뜻이 아니고, 불 같은 것을 불어서 꺼버린다는 뜻이다. 기름을 따라 삶의 불길이 잠잠해지듯이, 마음이 제어되면 그 마음의 주인은 <열반의 평화>, <신 안에서의 자포자기>에 이른다. 평화에 도달하는 것은, 불길에다 기름을 끊음으로써인데, 이를 달리는 <이해를 초월한다>고도 일컫는다. (213_주석)

 

불교의 팔정도는 이치를 올바르게 보는 정견(正見), 정견으로 본 이치를 올바르게 생각하는 정사유(正思惟), 진실한 지혜로 구업(口業)을 닦는 정어(正語), 잘못된 행동이 없게 하는 정업(正業), 정당한 법으로 살아가는 정명(正明), 꾸준히 매진하는 정정진(正精進), 진실한 지혜로 정도를 생각하는 정념(正念), 진실한 지혜로 선정에 드는 정정(正精)이다.  마지막 <미망과 욕망과 적의의 적멸> (즉 열반)과 더불어 마음은 생각이 실체가 아님을 깨닫는다. 생각은 사라지는 것이다. 이런 참된 경지에 들어간 마음은 안식을 얻는다. 상태는 육체가 사윌 때까지 계속된다. (215)

"마음은 생각이 실체가 아님을 깨닫는다" 범인 범부에게 현실과 해탈 사이에 걸어가야 하는 길은 무엇일까? 존재의 본질과 현실적 욕망을 구분하여 버릴 것과 취할 것을 선택하는 것은 어쩌면 무의미 한지도 모르겠다. 본질과 욕망 사이를 연결해주는 다리와 같은 것을 찾는 것. 영혼, 의미 있는 삶 이런 것들이 떠오른다. 삶의 영원한 숙제이겠지. 욕망에서 시작하여 본질에 이르는 다리를 건너는 것이 삶이 아닐까? 어디 쯤에서 죽게 될지 그것도 궁금하다. 한 치 앞으로도 나가지 못해서 주저앉아 있는 꼴은 아닐런지. 아님 다리를 건너 가볍게 손짓하는 그런 삶을 갖는 것은 아닐지.

 

세상으로부터의 출발은 오류가 아니라 여행의 첫 출발이다. 이 먼 여로에서, 우주 순환의 심오한 적멸을 깨치면 깨달음에 이르는 것이다. (217)

 

자아를 통일하고 만사 평등하게 보면 일체 만유 속에서 자아를 보고 자아 속에서 일체 만유를 본다. ....절대의 마음으로 만유 안에 있는 나를 우러러 섬기는 사람, 그런 사람은 세속의 삶이 어떠하든 신 안에서 사는 사람이다. (217)

 

등은 굽었지만 정신만은 영원히 젊은 선인(仙人)...(218)

그렇구나 신선은 정신이 영원히 젊고 맑은 존재이구나.

 

나무,바위,,, 이 모든 것은 살아 있다. 이러한 무정물은 우리를 보고 있고 우리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안다.우리에게 의지할 것이 없을 때, 문득 그 존재를 드러내고 우리에게 말을 거는 것이 바로 이러한 무정물들이다. (222)

 

보살 신화의 세 번째 경이로움은, 첫 번째 경이로움(양성적인 형상)이 두 번째 경이로움(찰나와 영원의 동일성)의 상징이라는 것이다. 신적인 차원의 언어로 일컬을 때 시간의 세계란 곧 위대한 어머니의 자궁이다. 아버지에 의해 끼쳐진 생명은 그 안에서 어머니의 어둠과 아버지의 빛으로 합성된다. 우리는 어머니 안에서 배태되어, 아버지로부터 격리된 채 산다. 그러나 우리가 때가 와서 그 시간의 자궁을 빠져나오면(영원으로의 탄생이다) 우리는 아버지의 손으로 넘어간다. 현명한 자는 그 자궁 속에서도, 자기가 아버지에게서 와서 아버지에게 돌아가고 있음을 안다. 그보다 더 현명한 자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하나의 본체 안에 있다는 것까지 안다. (223)

 

상상의 세계 너머에 존재하는, 말로 다할 길 없는 천복의 가르침은, 어린 시절에 상상했던 것과 비슷한 옷으로 위장하고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래서 동화는 다분히 황당하다. 그리고 심리학에 대한 독서가 위험할 수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233)

 

일본에는 <인산이 재물을 내려달라고 기도하면 신들이 웃는다>는 속담이 있다. 신도에게 내리는 은혜는 그 신도의 처지와 그가 발원한 소망에 준하여 내려진다. (248)

 

만물은 나아가고, 일어나고, 되돌아온다. 나무는 꽃을 피우나 오직 뿌리로 되돌아가기 위함이다. 뿌리로 되돌아감은 정일을 찾음이다. 정일을 찾음은 천명으로 합일함이다. / 영원을 알면 이해력이 넓어지고, 이해력이 넓어지면 포용력이 넓어진다. 시야가 넓어지면 귀함을 얻는다. 귀함이란 천상적인 것과 다름 아니다. (248)

말씀의 단계를 잘 살펴보자. 영원에 대한 이해를 통해서 귀함을 얻을 수 있다. 영원이란 무엇인가.

 

개인적인 한계를 넘는 고통은 곧 전신의 성숙에 따른 고통이다. 예술, 문학, 신화, 그리고 밀교, 철학과 수련은, 모두 인간이 자기 한계의 지평을 넘고 드넓은 자각의 영역으로 건너게 해주는 가교인 것이다. (249)

 

근원을 투시함으로써, 혹은 남성이나 여성, 인간이나 동물로 화신한 자의 은혜를 입음으로써 영웅의 임무가 수행되었다고 하더라도 모험 당사자인 영웅은 아직 생을 역전시키는 전리품을 가지고 귀환하는 모험을 치러야 한다. (253)

영웅이 귀환하여야 한다는 것과 귀환을 거부하는 것 또한 영웅이 건너야 할 큰 강이라는 것을 캠벨을 만나서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왕의 권능, 지상의 소유, 부화 권력, 벗과 자식들, 아내와 추종자들 이 모든 존재는 제 오감을 홀렸습니다. 저는 이 모든 것을 원했습니다. 이런 것들이 저에게 복을 준다고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제 것이 되는 순간부터 이 모든 것들은 그 본성을 벗고 불길이 되었습니다. ....내 주님 이신 신이시여, 저 역시 당신의 희롱에 말리어 이 세상의 제물이 되고, 허물의 미로를 방황하고 자아 의식의 그물에 걸려 허우적거렸습니다. 이제 원하옵건대, 당신의 실제(끝없고 자비로운)를 피난처로 삼아 미 모든 것에서 자유롭게 하소서. (256)

욕망에서 자유롭고자 하는 것은 시대와 모든 영웅들의 개별의 소망에서도 나타난다. 그것은 상대적으로 떨칠 수 없는 강렬함에 대한 반증이기도 할 것이다.

 

심리적으로 해이해진 상태에서의 요가 수련은 몹시 위험하다고 가르친다. / 단계를 거쳐 정신을 수련한 다음에야 수련자에게는 홀로 초월의 경지로 나아갈 수 있는 순간이 온다. (263)

 

두 세계의 상호 관계를 불가능하게 하는 것은 언제나 사소한 실수, 즉 인간의 약점이라는, 사소하나 치명적인 증세이다. 그래서 인간은, 사소한 일만 피하면, 모든 것이 잘 풀려나갈 것이라는 터무니 없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269)

 

단일 신화가 완성될 수 있으려면 우리는 여기에서 인간적인 실패나 초인간적인 성공이 아닌, 인간적인 성공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 귀환의 문턱에 도사리고 있는 위기가 중요한 문제일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269)

 

서로 멀리 떨어진 문화권에서 채집한 이 세가지 예화(라벤, 아마데라스, 그리고 이난나)는 외부로부터의 구조 상황을 충분하게 그려내고 있다. 초 자연적인 힘은 주인공의 시련에 끝까지 동참하다 마지막 단계에 나타난다. 영웅은 의식을 잃고 무의식의 상태에서 원래 그가 살던 세계로 되살아난다. 영웅은 자아를 지키는 대신 자아를 잃어버린다. 그러나 조력자의 은혜로 영웅은 자아를 되찾는다. (280)

 

천신만고 끝에 얻은 재생의 영약을 가지고 돌아가 원래 속해 있던 사회와 맞서면서 그들의 까다로운 신문과 서릿발 같은 증오와 맞서야 한다. 뭐가 뭔지 영문을 모르는 선한 사람들까지 설득하지 않으면 안 된다. (280)

 

영웅의 귀환은, 그 저승에서의 귀환을 말한다. 이승과 저승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 하나의 세계다. 신화나 상징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는 바로 이것이다. 신들의 세계는 우리가 아는 세계의 잊혀진 부분이다. 이 잊혀진 부분의 탐험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일상생활에서 중요하게 보이던 두 세계의 가치나 차이는, 지금까지 전혀 다른 것으로 인식하던 <타자> <자아>를 동화시키는 동시에 사라져 버린다. (281)

 

심층에서 솟아난 지혜와 속세에서 유용한 분별 사이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모순이 존재한다. 그래서 미덕에서 득실 계산이 파생하고, 그 결과 인간의 존재는 타락한다. 순교는 성자나 하는 것이지만, 범인에게도 그들 나름대로 중요한 것은 있는 법인 바, 이런 것들을 들의 백합처럼 멋대로 자라게 버려둘 수는 없다. (281)

이것이 결국은 욕망과 본질의 괴리가 아니겠는가? 도덕률과 진리를 따르고자 할 때 일시적으로 발생하는 듯한 욕망에 대한 손해와 같은 것이 이것들을 막아서지 않던가. 나의 이득 앞에서 눈 감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가만 둘 수록 잡초처럼 무성해지는 것이 욕망이다. 결국은 내가 주인이고 욕망은 살아가면서 찾아오는 손님일 텐데, 살다 보면 손님이 주인이 되고 주인인 나는 결국 그의 종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귀환하는 영웅이 당면하는 첫번째 문제는, 성취의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운 체험을 겪은 이후에 덧없는 기쁨과 슬픔, 삶의 범용과 소란한 외설스러움을 현실로 받아들이는 문제다. 왜 그런 세상으로 되돌아와야 할까? 헛된 정열에 소진된 범상한 남자와 여자에게 왜 초월적인 은혜의 체험을 그럴싸한 것, 혹은 흥미로운 것으로 보이게 해야 하는 것일까?  (282)

 

오로지 감각의 배타적 증거에만 급급하는 일반인에게 어떻게 저 만유의 근원인 공()을 설명한단 말인가? (282)

하지만 영웅은 이것을 설명해야 하는 것이다.

 

백 년이라는 주기는 전체성을 의미한다. 360도라는 원의 중심각도 전체성을 뜻한다. 힌두교의 푸라나에 따르면, 신들의 1년은 인간의 360년에 해당한다. 인간의 눈으로 보면 이러한 세계는 변화와 죽음으로 보이고, 신들의 눈으로 보면 불변하는 형상, 곧 끝없는 세계일 뿐이다. (288)

 

속세의 지식이라는 과일 맛은 정신의 집중점을 영겁의 세계에서 말초적 위기의 순간으로 옮겨놓는다. (289)

 

자기 모험을 완성하기 위해서, 귀환한 영웅은 세계의 충격을 견디어야 한다. (291)

 

기억 속에서 자기 영혼의 다른 부분과 만났음을 상기시키는 신비스러운 반지는 영웅이 그곳에 간 적이 있음을 시사한다. / 이 반지는 또, 일상의 현실은 저승의 현실을 배반하지 못한다는, 생시의 믿음을 재확인시켜 준다. 이 반지는, 두 세계를 통합하려는 영웅의 희망을 상징한다. (294)

 

우리가 관심 갖는 것은 상징 체계이지 역사성은 아닌 것이다. ...역사적으로 실재했는지 여부는 부수적인 문제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에서 역사성을 강조하면 혼란이 생길 뿐이다. 즉 암시적 메시지를 어지럽게 할 뿐 인 것이다. (299)

 

신화란 신화는 이 한 순간의 이야기 속에 모두 들어 있다. 예수는 안내자이며, 길이며, 초월적인 세계, 귀환의 동반자다. 제자들은 그의 비의 전수자들이다. 그러나 그 신비를 통달한 자들이 아니라, 두 세계를 일거에 수렴하는 역설적 체험으로 안내 받는 자들이다. (298)

 

상징이란 의미 소통의 <수레>에 불과하다. 상징은, 그 언급하는 바의 궁극적인 의미, <진로>로 오해되어서는 안 된다. 아무리 매력적이고 또 인상적이라고 하더라도 상징이란 이해를 돕기 위한 편의적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305)

 

의미를 실어 나르는 수레를 의미 자체로 오해하면 헛된 잉크뿐만 아니라 헛된 피까지 흘리게 된다. (305)

 

예수는 똑 같은 것을 훨씬 간명하게 가르치고 있다. <나를 위해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생명을 얻을 것이다.> 집착을 버리고, 진리를 깨닫고 거듭하는 데 필수적인 자기적멸에 대한 저항을 버리면, 개인은 위대한 <하나됨 at-one-ment>, , <자기화해 self-atonement>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306)

자기를 버리는 것 = 집착을 버리고 진리를 깨닫는다.

 

깨달은 자는 이런 상태에서도 지복의 극락을 산다. 무대 의상을 입고 있든, 벗고 있든 배우는 배우 이전의 그 자신이듯이, 불멸의 지혜를 깨친 자는 늘 그 불멸의 경지 안에 거한다. (307)

 

우리들 대부분이 그렇듯이, 이 세상의 예외적인 존재로서 자기 입장을 합리화하고 허위적인 자기 이미지를 드러내는 사람도 있다. 말하자면 자기는 선한 자를 대표하고 있다는 간주하고, 죄악을 불가피한 것으로 합리화함으로써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 부류도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자기 합리화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물론, 인간과 우주에 대한 본질에 이르기까지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신화의 목적은 개인의 의식과 우주적 의지를 화해시킴으로써 생명에 대한 그 같은 무지를 추방하는 데 있다. (307)

모든 일에 있어서 자기합리화는 일상이다. 나를 객관적으로 비판적으로 보는 것은 가능한 것인가? 자기적멸에 이르는 첫 번째 단추는 매사에 자기를 합리화하는 우스꽝스러운 가면을 벗어버리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에 대한 오해!!!!!!!!!!!!

 

영원의 원리 안에서 집착하지 않는 이승 세계의 인간이 만일 자기행위의 결과에 초연해하고, 이를 살아 있는 신의 무릎에다 올려놓을 수 있다면, 그는 이 제물에 의해 죽음의 고해에서 풀려날 수 있다.

<그러므로 애착을 떠나 마땅히 해야 할 바를 행하라. 너의 모든 일을 나에게 맡기고, 네 생각을 가장 높은 자아에 모으고, 원망과 이기심에서 벗어나되, 흐트러지지 말고 나가 싸우라.> (308)

 

영웅은 생성된 것의 투사(鬪士)가 아니라, 생성되는 것의 투사다. 왜냐하면 그는 현재 존재하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이 있기 전에 내가 있는 것이다> 그는 시간 속의 엄연한 불변성을, 존재의 영속성으로 오해하지 않는다. 변화가 영속성을 파괴할 때도, 다음 순간(혹은 <다른 사물>)을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원래의 형태를 보존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위대한 재상의 손길인 자연은 부단하게 형상에서 형상을 만들어나간다. 온 우주 안에서 사라지는 것은 하나도 없음을 알라. 오직 변화하고, 새로운 형상으로 재생될 뿐인 것이다.> (313)

 

영웅의 모험 <도표> (315)

 

중국의 예도 흡사하다. 인본주의적이고 도덕적인 유교가 자기네 고대 신화에서 웅대 화려한 요소를 모조리 비워버린 중국에서는, 오늘날 신화라고 치부하는 이야기들이 고작 이러저러한 행적으로 지역 사회에 봉사하고, 그 사회의 인사치레를 통하여 국지적인 신으로 추앙 받는 정치가들의 아들 딸들 이야기가 고작이다.

현대의 선진 기독교 국가에서 그리스도는 <대접을 받고자 하거든 남을 대접하라>는 자비의 교리를 가르치고도 범죄자로 처형당한 역사적인 인물이며, 준동양적 과거의 현인이 되어 있다. 그의 죽음에 대한 기록은 고결함과 견인 불발의 산 교훈으로 읽히고 있다.

전기나 역사나 과학으로 읽힐 때 신화의 명은 거기에서 다한다. 왕성하게 살아 있는 이미지들이 옛날 다른 하늘 아래서 있었던 까마득한 사실들로 전락하는 것이다. 한 문화가 자기네 신화를 이런 식으로 번역할 때 그들의 삶은 고갈되고 그들의 사원은 박물관이 되며, 과거와 미래의 끈은 끊어지고 만다. 이러한 오류는 성경이나, 많은 기독교 의식에 대해서도 자행되어 왔다. 이러한 신화의 이미지를 생생하게 되살리려면, 이를 현대의 문제에 적용시키려 할 것이 아니라, 영감으로 살아 숨쉬던 과거의 형태로부터 암시를 읽어내어야 한다. (319)

 

최근에도 신화에 대한 많은 책들이 나오며, 신화에 대한 상징들은 영화나 드라마에서 수 없이 차용되고 있다. 특히나 캠벨이 이야기하듯이 신화에 대한 재해석의 책들을 보면 어디까지가 신화에 나온 이야기이며 어느 부분이 저자에 의해 윤색되고 각색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 너무나 현대적 감성과 흥미를 신화의 이야기에 끼워 넣음으로써 신화 본연의 상징은 없어지고 흥미위주의 이야기만 남는 경우를 많이 본다. 내가 신화를 언급하거나 차용하는 글과 책을 쓸 때는 가능한한 신화 원래의 상징을 잘 살려서 써야 함을 다시 한번 느끼게 한다.

 

 

신화적 상징은 그 함축적인 의미 그대로 계승되어야 한다. 즉 수천 년에 걸친 영혼의 모험을 유추에 의해 표상해 온 만큼 그 대응 관계의 전 체계를 섣불리 펼쳐 보이기 이전에 그것이 지닌 모든 함축적 의미들을 검토해야 할 것이다. (322)

 

 

2부 우주 발생적 순환

 

지난 수십 년간 활약한 많은 학자들은 꿈과 신화 해석의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이들의 학설은, 각자 서로 다른 것이긴 하나, 상당히 공통적인 원리체계에 의해 괄목할만한 경향으로 수렴된다. 동화와 신화의 패턴 및 논리가 꿈의 패턴 및 논리와 일치한다는 발견과 더불어 오랫동안 의혹의 대상이 되어왔던 인간의 기괴한 환상은 극적으로 현대인 의식의 표면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326)

테세우스가 아버지를 찾아가는 것과 그것의 단서로서 제공되는 주춧돌 밑의 아이게우스의 칼이나 우리의 주몽신화에서의 아버지의 상징으로서 칼이 동일할 만큼 유사한 것에 놀랐다. 오디세우스와 페넬로페의 사랑이야기는 춘향전의 이몽룡과 성춘향의 모티프와 유사하다. 이런 것들은 이야기가 세상에 흘러흘러 어느 한쪽 이 다른 한쪽의 이야기를 차용한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것은 인간의 꿈이라는 단서를 보면 조금은 이해가 되는 듯하다. 동화와 신화의 패턴이 꿈의 패턴 및 논리와 일치한다면 그것의 궁금증이 풀리는 것이다.

타네-마후타가 하늘과 대지를 분리하는 것과 크로노스가 가이아와 우라노스를 분리하는 유사성도, 그리고 수 많은 처녀잉태의 신화들도 인류의 꿈의 이야기인 것이다.

 

신화 체계란, 전기나 역사, 그리고 우주론으로 오독되어 온 심리학이다. (326)

 

신화와 꿈은 같은 근원(즉 환상이라는 무의식의 샘)에서 유래하고 그 문법도 동일하다. 그러나 이 신화가 수면의 산물이라 아니라는 의미에서 이 양자는 동일하지 않다. 오히려 신화의 패턴은 의식적으로 통제된다. 그리고 신화는 전통적인 지혜를 전달하기 위한 강력한 회화적 언어로 기능한다. (326)

 

이러한 상징적 심상들은 인간의 삶을 버티고 철학, , 그리고 예술의 영감을 자극해 왔다. 노자, 부처, 조로아스터, 그리스도 혹은 모하메드에 의해 거론된 전승적 상징(도덕적, 형이상학적 가르침을 전교한 위대한 정신적 스승들에 의해 채용되었던) 덕분에 우리는 암흑이 아닌 깨어 있는 의식과 함께 할 수 있는 것이다. (327)

 

즉 이 힘은 모든 구성물의 생성 원리이고, 그들이 이 세상에 현현해 있을 동안 그들을 지탱하고, 그들을 채우며, 궁극적으로 그들이 돌아갈 귀소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과학에서는 에너지라고 부르고, 멜라네시아인들은 <마나mana>, 수우족 인디언들은 <와콘다wakonda>, 힌두교도들은 <샤크티>, 기독교도들은 <하느님 능력>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정신분석가들은, 심성에 나타나는 이 존재를 <리비도libido>라고 부른다. 이 존재의 우주적 현현이 바로 우주 자체의 구조며 우주의 변화인 것이다. (330)

 

명상의 조건이 완비되면 개인은 홀로 남는다. 신화는 부수적인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이 현상계 저쪽 세계((), 혹은 범주를 초월한 존재)로 들어가 적멸에 드는 것이다. 따라서, , 혹은 신들은 편의적인 방편, 즉 말로 다할 수 없는 것을 잘 나타내고 또 그것에 도움이 되는것이기는 하나, 신 혹은 신들 자체는 어디까지나 편이적인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이름과 형식을 통하여 이 세계의 얼개를 설명하는 성질이 부여되어 있을 뿐, 이들은 결국 세계를 설명하는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 말하자면, 신들은 우리 마음을 움직이고 마음을 깨우며, 우리 마음을 겨냥할 상징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330)

 

정신분석학자들은, 천국, 지옥, 신화적 시대, 올륌포스 산 및 그 밖의 신들의 거처는 모두 무의식의 상징으로 해석한다. 따라서 현대의 심리학적 해석 체계의 열쇠는 바로 <형이상학적 영역=무의식>이라는 등식이다. 이 문을 여는 또 하나의 열쇠가 있다면 전후 항을 바꾼, <무의식=형이상학적 영역>이라는 등식이다. (331)

 

우리가 우주적 능력의 근원은 보지 못하고 그 능력에서 투사된 현상계의 형태만 볼 수 있는 것은 의식이 응축되었기 때문인데, 이 의식의 응축 현상은 초의식을 무의식으로 바꾸어 놓는다. 그리고 동시에 같은 징표로서 세상을 창조한다. 구원은 초의식으로의 귀환과, 이에 따른 세상의 소멸에 있다.

어렵다. 의식의 응축과 무의식, 그리고 세상 창조까지 연결고리를 만들지 못하고 헤맨다.

 

영웅의 모험은 그의 삶에서 깨달음을 얻은 순간을 나타낸다. 이 순간은 그가 살아 있을 동안에, 우리의 살아 있는 죽음의 어두운 벽 너머의 빛의 길을 발견하고, 이 길을 열었다는 의미에서 참으로 중요한 순간이다. (332)

 

우주적 상징이 종잡기 어려운 역설로 표상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신의 왕국은 내재적인 것이면서도 동시에 외재적인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신은 잠자는 공주, 즉 영혼을 깨우는 편의수단이다. 삶은 공주의 잠이고, 죽음은 공주의 깨어남이다. 자기자신의 영혼을 깨우는 영웅은, 그 자신이 자기 소멸의 편의수단일 뿐이다. 영혼을 깨우는 신은 그 영웅과 죽음을 함께 한다. 이 신비를 설명할 수 있는 가장 웅변적인 상징이 바로, 고난을 당하는 신, <자기 자신을 자기 자신에게> 제물로 바친 신일 것이다. (332)

 

신은 인간의 삶을 떠맡고, 인간은, <대립물이 합일하는> 순간, 즉 신과 인간이 서로 먹이로 각각 하강하고 상승하는 길목으로서의 태양의 문턱에서 만나는 순간, 제 내부에 있는 신을 방면한다. (332) , 함의, 이해가 미치지 못함.

 

우주 발생적 순환에 의해 설명되는 철학적 공식이란, 존재의 세 단계를 통한 의식의 순환을 말한다. 그 첫 단계는 깨어나는 체험의 단계, 즉 태양의 조명을 받고, 만물에 공통된 외계 우주의 험난하고 총체적인 사실들을 인식하는 단계다. 두번째 단계는 꿈 체험의 단계, 즉 꿈을 꾸는 당사자와는 본질상 동일한 개인적 내부 세계의 유동적이고 모호한 형태를 인식하는 단계다. 세번째 단계는 깊은 잠에 빠지는 단계, 꿈을 꾸지 않는 지복의 단계다. 첫번째 단계에서 우리는 삶에 대한 교훈적인 체험과 만나고, 두번째 단계에서는, 이러한 것들이 소화되어 꿈을 꾸는 당사자의 내적인 힘에 동화되며, 세번째 단계에서는, 내부적 통제자가 들어앉은 방 안, 모든 것의 근원이자 끝인 상태, <마음속에 있는 공간> 안에서 모든 것을 즐기고 의식할 수 있게 된다. (338)

 

모든 신화 체계의 기본 원리는, 끝과 시작이 함께 한다는 바로 이 원리다. 창조 신화는, 모든 피조물은 그들의 모태가 된 불멸의 존재와 닿아 있음을 상기시키는 파멸 의식과 함께 고루 퍼져 있다. 모든 피조물은 씩씩하게 살아가고 있으나 필경은 극점에 이르러 파멸하고 그리고 회귀한다. (342)

 

한처음의 우주는 인간의 형상을 한 자아Self였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아무것도 눈에 띄지 않았다. 그래서 처음으로 <내가 바로 그다(I am he)>라고 소리쳤다. 여기에서 <>라는 이름이 생겼다. 오늘날에도 누가 말을 건네오면, <, >라는 말로 서두로 삼은 연후에야 자기가 만난 다른 사람의 이름을 거론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354)

 

아닙니다. 제가 이 돌멩이를 던져 보겠습니다. 만일 이 돌멩이가 떠오르면, 우리는 영원히 살 것입니다만, 가라앉으면 영원히 죽어 서로의 죽음을 슬퍼하게 될 것입니다. 여자는 돌멩이를 던졌고, 돌맹이는 가라앉았다. 노인이 말했다. ‘그것 보아라. 네 운명을 네가 골랐다. 인간에겐 끝이 있을 것이다. (368)

 

세계를 생성시키는 아버지의 정기는 변용하는 매체(세계의 어머니)를 통해 다수의 지상적 체험으로 변한다. (374)

 

달이여 나를 도우소서, 태양이여 나를 풀어 주소서

큰곰자리 별이여, 지혜를 빌어주소서

내가 모르는 문을 통해, 내게 생소한 길을 통해,

나를 가두고 있는 이 작은 둥지에서, 이 같이 비좁은 이 처소에서,

나그네가 찾아가는 땅으로, 그 맑은 바람 속으로 나를 인도하소서.

하늘의 달을, 그리고 태양의 광휘를 볼 수 있도록. (379)

 

우주적 여신은, 여러 가지 가면을 쓴 모습으로 인간에게 나타난다. 왜냐하면 창조의 결과란 다양하고 복잡한 데다, 창조된 세계의 관점에서 경험할 때면 상호 모순적이기 때문이다. 생명의 어머니는 동시에 죽음의 어머니다. 이 어머니는 기근과 질병이라는 추악한 마귀의 가면을 쓴다. (380)

여신의 이미지

 

금성이 새벽별로 반짝일 대 우주적 여성은 처녀였고, 저녁별일 때엔 달의 배우자인 밤하늘의 매춘부, 일출과 더불어 그 모습이 사라졌을 때엔 지옥의 마귀 할멈이었다. ... 연신의 특징은 늘 이 변화하는 별빛의 영향을 입었다. (383)

 

여기에서 원초적인 남성은 달이다. 새벽별은 그의 본처, 저녁별은 제2부인이다. 바이나뫼이넨이 제 힘으로 자궁에서 빠져나온 것처럼 이 월인(月人, moon man)도 심연에서 솟아오른다.(383)

 

인간의 시야도 이제는 좁아져 오직 가시적이고, 손에 잡히는 존재의 표피만 이해할 수 있을 뿐이다. 심연을 투시할 전망은 이제 사라졌다. 인간 고뇌의 의미 심장한 형상은 이제 보이지도 않는다. 사회는 오류와 재난 속으로 빠져든다. <소자아> <대자아>의 재판석을 강탈했다.

이것은 신화에 나타나는 영원한 테마요, 선지자의 목소리로 듣는 귀에 익은 절규다. 사람들은 이 영혼과 육체가 더불어 뒤틀린 세계에서 다시 한번 화신한 심상의 시가를 읊어줄 사람을 목마르게 기다린다. (389)

 

<우주발생적 순환>에서 우리는 두 단계를 거쳐왔다. 즉 첫째는 비실재적 실재의 직접적인 유출에서 신화적 시대의 유동적이나 시간을 초월한 존재에 이르는 단계, 둘째는, 이 실재적 실재에서 인류 역사의 영역에 이르는 단계다. ... 이제 우주발생적 순환은 보이지 않게 된 신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모습을 갖춘 영웅에 의해 진행되어야 한다. (396)

 

영웅이란 성취되는 것이 아니고, 운명 지워진다는 관점과 일치한다. 이러한 관점은, 영웅의 전기와 그 고유한 성격과의 관계에 문제를 제기한다. 가령, 예수는 엄격한 고행과 명상으로 지혜를 터득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가 하면, 인간의 모습을 취한 하강한 신이라고 믿어질 수도 있다. 전자의 견해를 따르는 사람은 예수와 같은 초월적 구원을 경험하기 위해 그의 행적을 글자 그대로 흉내 내는 수가 있다. 그러나 후자의 견해를 따를 경우, 예수라는 영웅은 글자 그대로 본이 되는 전형이라기보다는 묵상해야 할 하나의 상징이다. 신적인 존재란, 우리 모두의 내부에 있는, 전능한 자아의 계시다. 삶에 대한 묵상은, 따라서 정확한 모방에 이르는 전주곡으로서가 아니라 자기의 내재적인 신성에 대한 명상의 형태여야 한다. 말하자면 <이러저러하게 행동해서 선함을 얻는> 것이 아니고 <이를 앎으로써 신이 되는 것>이다. ★★★★★★★★★★★★★★★ (400)

영웅이란 성취되는 것이 아니고, 운명 지워진다.

신성은 내재되어 있는 것이고 우리의 과업은 자신 안에서 자기만의 신성을 찾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운명 지워진 영웅인 것이다. 다만 그 영웅이 자신의 소명을 듣지 못하고 찾지 못하는 것이다. 자신을 소명을 앎으로써 신이 되는 것이다. 운명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 진정한 영웅의 삶인 것이다. 그 후 전개되는 모험과 귀환은 출발에 귀결되는 부차적인 것이다.

 

영웅의 첫번째 과업은, 우주 발생적 순환의 그 전단계를 의식적으로 체험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유출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 가는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 과업은 심연에서 일상의 삶으로 귀환하여 조물주적 잠재력을 가진 인간적인 변환자재자(變換自在子)가 되는 것이다. (402)

 

십자가 위에서의 고난과  부활의 주제는, 영웅 자신의 몸, 혹은 그가 속한 세계가 맞는 효과로 나타날 수 있다.(413)

 

신화적인 영웅은 <이루어진> 사상의 옹호자가 아니라 <이루어지는> 사상의 옹호자다. 그의 손에 살해되는 용은, 현상이라는 괴물 바로 그것이니, 괴물은 쇠사슬 같은 과거의 옹호자이다. 그의 손에 살해되는 용은, 현상이라는 괴물 바로 그것이니, 괴물은 쇠사슬 같은 과거의 옹호자이다. 영웅은 암흑에서 일어서지만, 적은 힘이 세고 권능 또한 엄청나다. 적은 자기 지위의 권위를 자신을 위해 행사하기 때문에 적이며, 용이며, 폭군이다. <과거>를 옹호했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옹호>한다는 이유에서 그가 바로 사슬이다. (422)

영웅의 적은 누구인가? 결국 자기 자신의 욕망이 아닐까?

미노스의 황소에서 우리는 결국 욕망으로 인해서 끝없이 무너지는 한 영웅의 삶을 보았다. 의로운 미노스는 결국 욕망에 휘둘리는 미노스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수치스러워 미궁 깊은 곳에 감추어야 했던 미노타우로스야말로 그 스스로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은 내면의 그림자는 아니었을까? 영웅의 가장 무서운 적은 자기 안에 있는 황소일 것이다.

 

폭군은 자만한다. 그리고 자만은 바로 폭군이 파멸하는 씨앗이다. 폭군은, 가기 힘을 자기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자만한다. ...신화적 영웅은 폭군을 파멸로 몰아 넣는 비밀을 알고 있다. 단추 하나 누르는 듯한, 참으로 간단한 몸짓으로 그는 이 무서운 형상을 지워버린다. 영웅의 행적은 순간의 결정화(結晶化)에 대한 끊임없는 파괴행위다. ★★★★★★★★(422)

첫 번째 읽기에서는 놓쳤던 부분이다. 순간의 결정화는 자기 내부의 폭군을 죽이는 과정을 나타내는 의사결정 순간을 이야기하고 있다. 다만, 캠벨의 생각에 동의하고 싶지 않은 부분은 과연 신화적 영웅이라고 해서 폭군을 죽이는 순간의 결정화가 과연 단추 하나 누르는 듯한 간단한 몸짓이었을까 하는 것이다. 결정은 순간이겠지만 마음 속 갈등은 간단치 만은 않을 것이라는 생각.

 

 

영웅의 기본적인 임무는, 그러한 괴물과 폭군을 퇴치하고 그 인간의 삶의 무대를 정화하는 것이다. (423)

 

여성은 수많은 용을 죽인 영웅의 애인이며, 질투심이 강한 아버지로부터 유괴되어 온 신부며, 부정한 애인으로부터 구출된 처녀다. <영웅과 영웅의 상대역인 여성은 곧 하나>이기 때문에, 처녀는 영웅 자신의 <다른 한쪽>이다. 영웅이 세계의 군주라면, 처녀는 세계이며, 영웅이 전사라면, 처녀는 명예다. 처녀는, 영웅이 감옥으로부터 해방시켜야 하는 영웅 자신의 운명의 이미지다. 그러나 영웅이 자기운명을 인식하지 못하거나, 엉뚱한 사상에 현혹될 때, 영웅은 아무리 노력해도 장애물을 극복할 수 없다. (428)

 

이 세상에는 그의 힘으로 되지 않는 일이 없다. 예기치 못한 조력자의 도움을 얻고, 시간과 공간의 기적을 경험한 그는 마침내 자기 과업을 완수한다. 즉 운명 자체(곧 처녀)가 그에게 힘을 빌려준다. ....숙명적인 승리자의 눈은 어김없이 상황이라는 요새의 틈을 읽어내고, 그의 주먹은 그 틈을 출입구로 뚫어낼 수 있다. (431)

영웅이 되려면 기본적인 직관을 가져야 한다. 삶의 직관은 어떻게 만들어 지는 것인가?

 

바퀴와 사과가 구르면서 영웅에게 내어주는 보이지 않는 특이한 길이다. 이것은 운명적인 기적의 상징이며 교훈으로 해독되어야 한다. 눈에 보이는 표면적인 것에 대한 감상에 현혹되지 않고, 과감하게 자기 본성이 부름에 응답할 수 있는 자(니체의 말을 빌리면 <스스로 구르는 바퀴>인 사람) 앞으로는 어려움이 비켜나고 뜻밖의 탄탄대로가 나타나는 법이다.(431)

욕망을 이기는 것, 여정에서 고난을 이길 때 마다 쉬고 싶은 안락감, 성취되는 만족들은 뒤로 하고 자기 본성을 다시 바라보는 것. 그리고 보이는 것을 다시 따라 나서는 용기 그것이 진정한 영웅과 일시적인 영웅을 구분하는 것이리라.

 

최고의 영웅이란 우주 발생적 순환의 원동력을 추진시키는 영웅이 아니라, 눈을 다시 뜨고서 오고 가며 기쁨과 고뇌가 교차되는 세계의 파노라마를 통해 하나의 실재가 다시 드러나게 된다는 것을 깨치는 영웅이다. 이러한 영웅이 되려면 보다 깊은 지혜를 갖추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행동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의미 심장한 개념의 작용의 결과로 나타난다. (432)

개념이 선행하고 그에 따르는 행동.

 

첫번째 영웅의 상징이 명검(名劍)이라면 두번째 영웅의 상징은, 권위의 홀장, 혹은 율법서다. 첫번째 영웅의 특징적인 모험이 신부(신부는 곧 삶이다)을 얻는 것이라면, 두번째 영웅의 특징적 모험은 아버지를 찾으러 떠나는 것이다. 이 아버지는 곧 보이지 않는, 미지의 존재다. (432)

전쟁에서의 영웅과 삶에서의 영웅(현자)의 그런 이미지. 깨달은 자가 더 큰 영웅

페르세우스와 테세우스의 차이를 설명할 수 있을 듯한 느낌....페르세우스는 마지막까지 행복한 삶을 마감하지만 테세우스의 끝은 그렇지 않다. 그런 차이가 이 부분으로 설명이 가능한가?

 

자기 치적의 은총을 초월적이며 근원적인 존재의 은혜로 돌리지 않고, 황제는 마땅히 자기가 누릴 바를 누린다는 입체적인 환상을 품는다. 이런 자는 더 이상 두 세계의 중재자일 수 없다. 인간의 시각이 평행 상태의 인간적인 측면으로 기울어질 때, 천상적 능력의 체험은 그것으로 끝난다. 한 사회를 관류하던 사상도 사라지고, 오직 힘만이 그 사회를 동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 경우 황제는 도깨비 같은 폭군(헤롯, 니므롯)이 되며, 세계는 이 손 안에서 구원되어야 하는 지경에 이른다. (437)

왕으로써의 영웅이 진정한 영웅에 이르는 가장 어려운 시험의 단계인 듯하다.

 

아버지의 집에서는 두 단계의 이니시에이션이 구분된다. 첫번째 단계에서 아들은 사자가 되어 귀환하지만, 두번째 단계에서는 <나와 아버지는 결국 하나>라는 통찰과 함께 귀환한다. 이 두번째의 보다 높은 자각에 이른 영웅은 구세주, 한 차원 높은 의미에서의 이른바 지고한 존재의 화신이다. 그들의 신화는 우주적인 조화를 지향한다. 그들의 언어는, 권위의 홀장과 율법서의 영웅이 뱉어낸 어떤 말 이상의 권위를 갖는다. (437)

 

어제의 영웅은, 오늘 <스스로>를 십자가에 달지 않으면 내일의 폭군이 된다. (442)

자기적멸. 집착을 버리고 진리를 깨닫는 것.

 

순수하게 있는 그대로를 보고, 엄격하게 ‘자아’를 통제하고, 소리와 빛과 맛 같은 색에 집착하지 않고, 애증을 버리고, 고독 안에서 살고, 소식하고, 말과 몸과 마음을 삼가고, 명상과 정신 집중에 전심하고,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데 힘쓰고, 이기심과 권세, 자만심과 색욕, 분노와 편견을 떨치고, 마음 안에서 정일을 얻고, ‘자아’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사람, 이런 사람은 능히 불멸의 존재에 값 하는 사람이라 일러 무방하다. <바가바드 기타> (443)

 

말할 필요도 없이 죽음에 겁을 먹는다면 그 영웅은 영웅이 아니다. 영웅은 마땅히 무덤과 화해할 수 있어야 한다. (445)

 

놀랄만한 권능을 가진 막강한 영웅은 바로 우리들 개개인이다. 거울에 비추어볼 수 있는 육체 자체로서가 아니라, 우리들에 내재하는 왕으로서다. (458)

 

그 날과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모르고,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이 아신다. (473)

 

에필로그

 

뒤르켐은 개인을 집단에 귀속시키기 위한 비유적인 가르침의 보고라고 했고, 융은 인간의 심성 깊은 곳에 내재한 원형적 충동의 징후인 집단의 꿈이라고 했으며, 쿠마라스와미는 인간의 심오한 형이상학적 통찰을 담은 전통적인 그릇이라고 했고, 교회에서는 하느님 백성에 대한 하느님의 계시라고 정의했다.

신화가 무엇이냐는 관점이 아니라, 신화가 어떻게 기능하고 과거에 어떻게 인간에 봉사해 왔으며, 오늘날 어떤 의미를 갖느냐는 관점에서 검토해 보면, .... (478)

 

삶의 양태에서, 개인은 인간의 전체 이미지의 단편이며 일그러진 형상일 수 밖에 없다. (479)

 

개인의 전체성은 개별적인 구성 인자로서가 아닌 사회라는 공동체 안에서만 누릴 수 있다. 개인은 한 구성요소 일 수 있을 뿐이다. 개인은 이 집단으로부터 삶의 기술, 사유의 바탕인 언어, 삶의 자양인 이상을 빚졌다. 그의 육체를 이루는 유전자도 그 사회의 과거로부터 전해 내려온 것이다. 개인이 실제든, 상상이나 느낌을 통해서든, 그 사회로부터 자신을 단절시킨다는 것은 존재의 근원과의 절연을 의미할 뿐이다. (479)

 

출생, 세례, 결혼, 장례, 취임 등의 종족적인 제의는, 개인의 삶의 위기 및 행위를 표준적이고 비개인적 형식으로 바꾸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제의는 개인의 정체를 그 자신에게 보여준다. / 전체사회는 이 제의를 통하여 마모되지 않은, 살아 있는 단위로 참가자들의 눈앞에 전개된다. (479)

 

이제 인간의 시야는 넓어졌다. 맡는 역할이 비록 하찮다고 하더라도 개인은 이 인간의, 아름다운 축제의 이미지(잠재적이긴 하나 필연적으로 그의 내부에 깃들여 있는 이미지)에서 자기 역할이 바로 자기의 본질이었음을 깨닫는다. 사회적인 의미를 통해 개인은 축제를 정상적, 일상의 생존으로 수렴할 것을 배운다. 이로써 개인의 정체가 확인된다. 거꾸로 말하면 무관심과 반항(혹은 도피)은 개인과 사회를 단절시킨다. 사회라는 단위에서 볼 때 그 단위에서 단절된 개인은 아무것도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쓰레기다. (480)

 

[나는 저것이 아니다. 저것이 아니다. 조금 전에 죽은 내 어머니도 아니고, 내 아들도 아니다. 내 몸은 병들거나 나이를 먹는다. 내 팔, 내 눈, 내 머리, 이 모든 것을 합한 것도 아니다. 나는 내 감정이 아니다. 내 마음이 아니다. 내 직관력이 아니다.] 이러한 명상을 통해 입문자는 자기의 심층에 이르고, 마침내 그 껍질을 뚫고 엄청난 자각에 이른다. (482)

 

이것이 나르키소스가 호수를 내려다보는 단계이며, 부처가 보리수 아래 앉아 명상하는 단계다. 그러나 이 단계는 궁극적인 목표가 아니다. 필요한 단계이지 목적은 아닌 것이다. 목표는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어떠한 상태에 <있는가>, 즉 본질을 깨닫는 것이다.

이 단계가 우리 커리큘럼의 Take-Off에 해당하는 부분인가. 묻는 것, 깊이 보는 것 깨닫기 위해서 걸어가는 과정.

 

종교적 무언극이 일요일 아침에 벌이는, 경건한 체하는 종교 놀음에서 더도 덜도 아니게 되고 말았다. 나머지 6일간은 물론 기업 윤리니, 애국심이니 하는 것들이 판을 친다.(485)

 

니체는 <그날이 도래한 듯이 살라>고 하고 있다. 창조적인 영웅을 이끌고 구원하여야 하는 것은 사회가 아니다. 아니 사회를 지키고 구원하여야 할 사람이 바로 창조적 영웅이다. 그리하여 우리 각자는 그 영웅의 족속이 대승을 거두는 그 빛나는 순간이 아니라, 그가 개인적으로 절망을 느끼고 침묵을 지킬 때 그가 겪는 모진 시련(구세주의 십자가를 지는 일)을 나누어 부담하는 것이다. (488)

 

 

역자후기

 

시인적 본성은 심리학적 관심과 무관하지 않고, 심리학적 관심은 신화에의 관심과 무관하지 않다. _토마스 만 (490)

 

그의 견해에 따르면 모든 신화는 꿈과 동일한 문법을 갖는다. 가령 프로이트의 이른바 <꿈의 작업>, 즉 응축, 치환, 형상화 작업은 신화 형성에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491)

 

 

3. 내가 저자라면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은 조셉 캠벨이 1947, 그의 나이 마흔셋에 쓴 책이다. 그의 젊음이 그간의 삶을 통해 배우고 느낀 것들을 거침없이 쏟아낸 느낌이다. 읽고 난 책을 북리뷰를 통해서 정리해 보니 '이해되지 않음'이라는 개인적인 한계가 많이 눈에 띤다. 번역상의 난문도 있겠지만 긴 호흡으로 작성된 장문들은 읽고 있으면 어떤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것인지 이해되지 않는 문장이 있었고, 조사의 흐름 또한 자연스럽게 이해되지 않는 부분들이 많았다. 그리고 번역을 하는 역자 이윤기님 또한 그의 명성에 어울리지 않게 목차의 타이틀 조차 책의 전개와 맞지 않는 오타가 있을 뿐더러 세부적인 부분에서는 의아할 정도로 오타가 자주 눈에 들어왔다. 물론 오타가 전체적인 이해나 흐름을 해치는 것은 아니지만 캠벨의 노력과 그의 노고가 사소한 것들로 인해 흠집이 날까 하는 마음이다.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은 세계 각국의 신화나 전설들에 대한 심리학적인 비교 분석을 통해서, 서로 달라 보이는 세계의 신화 구조가 결과적으로 근본적인 공통점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의 내용은 크게 3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첫 번째 부분은 영웅의 모험 분석, 두 번째 부분은 신화의 내용에 있어서 우주의 발생학적인 순환, 마지막으로 에필로그를 통하여 신화의 기능과 현대사회에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를 살펴보고 있다. 그 중 1. 영웅의 모험은 출발-입문-귀환-열쇠라는 구조를 통해서 생각의 흐름과 이해가 어렵지 않았으나 2. 우주발생적 순환은 유출-처녀의 잉태-영웅의 변모-소멸이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영웅의 변모를 시작하면서 캠벨은 이런 나의 이해를 돕듯이 앞의 두 단계 유출과 처녀의 잉태 부분에 대한 흐름과 의미를 간단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 부분은 2부를 시작하면서 전체적인 의미를 설명하면 훨씬 본인이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을 독자들이 깊이 받아들일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갖는다.

 

그리고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은 본 내용인 1. 영웅의 모험, 2. 우주발생적 순환의 내용을 프롤로그와 에필로그가 좌청룡 우백호처럼 내용을 감싸 안고 있다. 작가가 의도한 바, 그리고 작가의 주관적인 철학을 본문에서 한발 물러나 배치함으로써 전체적인 완성도를 더욱 높인 느낌이다.

 

다만 이해를 어렵게 하고, 읽는 흐름을 중간중간의 너무 긴 신화사례가 침범함으로써 전체적인 내용의 흐름에서 내가 어디에 있는지 길을 잃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너무 생소한 문화의 신화는 공감과 이해를 돕기보다는 이런 사례를 굳이 여기에 넣어야 했는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했다. 그리스로마 신화를 비중 있게 다루지 않는 그였기에 다른 문화의 사례들을 더 많이 인용하고 싶었겠지만 대중적인 것을 멀리하고 외적인 것을 차용함으로써 도리어 독자들이 그의 사상을 이해하는데 장애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다.

 

이 책은 한 부분에 대해서 깊이 있는 저자의 분석을 기초로 하고 있다. 그저 여기저기 떠도는 이야기들을 모아 놓은 것이 아니라 그의 주관이 책의 처음과 끝까지 전개되면서 사례들은 그의 주관을 돕고 있다. , 저자의 이야기가 주가 되고 신화의 사례는 부가 된 것이다. 대부분의 신화에 대한 책들은 신화가 주가 되고 신화에 대한 저자의 해석이 부가 되는 책들이 많다. 그런 면에 있어서 저자의 인생의 노고를 충분히 읽을 수 있었고, 책을 쓴다는 것에 대한 커다란 가르침을 얻은 그런 책이다.

 

첫 번째 책을 읽을 때도 자기욕망의 통제, 자기적멸, 자아를 버리는 것, 무의식과 소통하는 것이 개념상 어떤 것인지는 느낌으로 알 수 있었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사례에 대한 아쉬움이 있었다. 두번을 읽으면 그것에 대한 느낌이 좀더 구체화 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것에 대해서는 여전히 아쉬움이 남는다.

 

내가 캠벨과 같은 내공의 저자라면 혹은 캠벨이 오늘 이 책을 쓴다면 이런 부분이 보강되었으면 한다.

 

부록 : '영웅의 길'을 위한 자기적멸(자기정화) 실천 메뉴얼

1. 자아의 여러 가지 얼굴

2. 나를 불편하게 하는 욕망이라는 것

3. 나를 참되게 하는 방법

   - 진리, 책을 통하여

   - 명상을 통하여

   - 스승을 통하여

   - 벗을 통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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