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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3월 13일 18시 02분 등록

서양문명을 읽는 코드,

(김용규 지음, 휴머니스트)

 

I. 저자에 대하여

김용규 (1952~)

철학자, 소설가, 한국의 움베르토 에코

필명 : 전령의 신 '헤르메스'

서울 청파동 자그마한 정원이 있는 예쁜 벽돌집에서 피아니스트인 아내와 호기심 많은 딸과 살고 있음

 

 

Biography

튀빙겐 대학교와 프라이부르크 대학에서 신학과 철학을 공부함

 

저서

- 알도와 떠도는 사원 (2001)

- 영화관 옆 철학카페 (2002)

- 데칼로그 (2002)

- 타르코프스키는 이렇게 말했다 (2004)

- 다니 (2005)

- 철학 통조림 시리즈 (2005)

- 철학 카페에서 문학읽기 (2006)

- 설득의 논리학 (2007)

- 기적의 양피지 캅베드 (2009)

- 서양문명을 읽는 코드, (2010)

 

 

◆ 저자를 위대함에 이르게 한 7가지의 길

    : 이번 리뷰에서는 김용규 선생님과의 서면 인터뷰로 대체합니다.

 

서면인터뷰 요청에 대한 김용규 선생님의 회신내용

 

김경인 선생님, 안녕하시죠.

 

일이 있어 지방에 다녀오느라고 답이 좀 늦었습니다.

보내주신 질문들은 나름 성실히 답해서 첨부파일로 동봉합니다만,

답을 하다 보니 오해를 피하기 위해 미리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이 있어 몇 자 적습니다.

 

아시다시피, 세상에는 예로부터 지금까지 많은 훌륭한 분들이 계셨고,

당연히 그분들이 남기신 훌륭한 책들과 말씀들이 있습니다.

그렇기는 해도 그 어떤 사람도, 책도, 말씀도 완전하지는 않지요.

 

제가 이처럼 너무 당연한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저는 특별히 어떤 사람을 존경하지도 않고,

특별히 어떤 책을 좋아하지도 않고,

특별히 어떤 좌우명을 갖고 살지도 않는다는 것을 말씀 드리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을 바꿔 말하자면, 저는 숱한 사람들을 존경하고, 숱한 책들을 좋아하고,

숱한 좌우명을 갖고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제가 쓴 책들을 살펴보면 그것을 아실 수 있을 거예요.

저는 지금까지 10여권의 책을 쓰면서 다른 작가들보다 상대적으로 많은인용을 했지만,

다른 사람의 사상이나 글을 비판한 적이 거의 없지요.

가능한 한 긍정적이고 훌륭한 사상이나 주장들만을 골라 필요에 따라 인용할 뿐입니다.

 

질문에 대한 답은 푸른 색으로 적어 놓았습니다. 도움이 되시길 바라고요.

올 겨울이 유난히 추웠던 탓인지, 벌써 꽃 피고 새 우는 봄이 기다려 집니다.

기쁜 나날들 되시길 빕니다.

 

김용규

 

서면인터뷰 내용

1) 철학자의 길(신학전공, 철학 저술가)을 걷기로 결심하신 시기와 계기가 궁금합니다.

 

저는 본디 자연과학에 관심이 많아 과학자가 되고 싶었는데요, 대학입시에서 낙방을 하는 바람에 재수를 하면서 우연히 철학 책을 보게 되어 흥미를 느끼고 전공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가끔은 과학자가 되지 못한 것이 아쉽기도 합니다. 여기까지가 질문하신 내용에 대한 ‘사실적이고 공식적인’ 대답입니다. 그런데 제 나이가 올해로 60인데요, 살면서 숱한 경험을 통해 깨닫게 되는 것은, 사람의 삶이 자기 뜻대로만 되는 것은 아닌데, 그것이 꼭 나쁜 것도 아닌 것 같다는 것입니다. 아마 제가 철학을 하게 된 데에는 그럴만한 내가 모르는 어떤 좋은 이유가 있으리라 믿습니다.

 

 

2) 철학자로서 삶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시는 가치(좌우명, 아포리즘) 가 궁금합니다.

 

말씀 드린 대로, 저는 많은 보편적 가치들(자유, 평등, 박애, 정의 등등)을 사랑하기 때문에 어떤 특별한 가치(좌우명, 아포리즘)를 갖고 살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젊은 시절에 좋아했던 글귀는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영국의 철학자 버트란트 러셀의 자서전에서 읽은 그의 좌우명인데요, 혹시 도움이 될까 해서 적습니다.

 

사랑에 대한 갈구 (longing for love), 지식에 대한 탐구 (search for knowledge),

인간의 고통에 대한 참을 수 없는 동정심 (unbearable pity for suffering of mankind)

   

 

3) 깨달음의 경지를 나눌 수 있는 믿을 수 있는 어른, 즉 가장 존경하시는 분은 누구신지요?

 

말씀 드린 대로, 저는 너무 많은 분들을 존경하기에 특별히 존경하는 분이 없습니다.

 

 

4) 가장 감명 깊게 읽으신 책이 궁금합니다.

 

역시 말씀 드린 대로, 저는 너무 많은 책들을 감명 깊게 읽었기 때문에 특별히 감명 깊은 책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책에 관해서 한 가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세상에는 약간의 책들이 있고, 그 책들에 관한 수많은 책들이 있고, 헤아릴 수 없는 쓰레기들이 있다는 것이지요. 권하고 싶은 말은 “인생은 짧으니 책을 읽어라”입니다. 제가 말하는 책은 대개 고전을 말합니다. 그것도 가능하면 원전으로 읽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5) 하루 평균 저술활동에 얼마의 시간을 할애하시는 지요?

 

저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오래 전에 사회생활을 접고 오랜 세월을 집안에서 삽니다. 그러다 보니 제가 집안에서 맡은 일이 가사인데요, 가사라는 것이 해도 해도 끝이 없는 데다 돌발적인 일들이 자꾸만 생기는 것이라서, 일정하게 시간을 정해놓고 일하지는 못합니다. 시간이 나는 대로 틈틈이 읽고 쓰고 하지요.

 

 

6) 선생님의 종교가 궁금합니다

 

저희 집안은 4대째 기독교 신자입니다. 저도 마찬가지이고요.

 

 

7) 마지막으로 선생님께서 생각하시는 ''이란 무엇인지요?

 

제가 생각하는 ‘신’은 ‘제게 좀 야박하신 분’ 같습니다. 제게 좀 더 잘 대해주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요. 농담입니다만, 가끔은 솔직한 심경이기도 합니다. 이렇듯 개인이 체험하는 신은 때로는 ‘너무나 감사한 분’이기도 하고, 때로는 ‘너무나 야속한 분’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다 주관적인 생각이고요,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은, 제 책에 적힌 대로, ‘우주 만물을 포괄하는 무한자이자, 그 안에서 우주 만물을 창조하고 소멸시키는 자이고, 우주 만물에 낱낱이 관여하고 참여함으로써 그것들을 오직 자기 의지대로 이끌어 가는 유일자이지요.

 

 

※ 강연 동영상

김용규 선생님께서 한겨레와 YES24에서 주관한 '아름다운 책 이야기'에서 강연하신 내용 중

일부를 담은 8분짜리 동영상 입니다. 강연내용을 스크립트로 만들어 함께 첨부했습니다.

 

강연 동영상 보기

강연 스크립트.doc 
 

 

※ 사진

김용규선생님1.jpg

출처 : YES24 홈페이지, 한겨레와 YES24에서 주관한 '아름다운 책 이야기'에서 강연

(http://www.yes24.com/24/ChYes/VideoDetail?videoNo=765)

 

김용규선생님2.jpg

출처 : 2010년 12월 19 한국경제신문 인터뷰

(http://www.hankyung.com/news/app/newsview.php?aid=2010120907531)

 

 

◆ 내가 본 김용규 선생님 (나의 언어로 평가하기)

국내 저자였음에도 저자에 대한 기록이라고는 '독일 튀빙겐 대학교와 프라이부르크 대학에서 신학과 철학을 공부함' 이란 정보밖에는 없었다. 그나마 저자의 다른 저서를 통해 '서울 청파동 자그마한 정원이 있는 예쁜 벽돌집에서 피아니스트인 아내와 호기심 많은 딸과 살고 있다'는 사실만을 추가로 확인할 수 있었을 뿐이다. 저자의 '출생연도'도 힘들게 찾아낸 인터뷰 기사에 나와 있는 나이를 역산하여 알아낼 수밖에 없을 정도로 저자에 관한 정보는 철저히 '비공개' 였다.

 

답답한 마음에 '휴머니스트' 출판사에 전화를 걸어 저자의 이메일 주소를 알아내어 메일을 보냈다. 책을 읽고 느낀 점을 짤막하게 적고, 지금 내가 하고 있는 '독서 수련'의 취지를 설명 드린 다음 서면 인터뷰를 요청 드렸다.

 

김 선생님, 안녕하세요?

부족한 사람의 글을 고운 눈으로 보아주셨다니 감사합니다.

더구나 저자에 대해서도 관심을 표해주셔 더욱 고맙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렇다 하게 내세울 게 없는데다 또 내세우고 싶어하지도

않는 사람이라서 '저자에 관한 탐색'에는 썩 적합한 사람이 아닙니다.

질문지를 보내시면 성의껏 답은 하겠습니다만, 할 말은 많지 않을 듯 합니다.

날씨가 다시 추워졌습니다. 건강하시고요, 기쁜 일 많으신 나날 되시길 빕니다.

김용규

 

메일 내용을 보고서야 저자에 대한 정보가 왜 '비공개'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나는 정말로 ''을 잘 모르는 사람이다. 30여 년 살아오며 종교를 가져본 적도 '삶과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본 적도 없었다.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나는 ''에 대한 아주 짙은 농도를 가진 색안경을 끼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러한 색안경은 그들의 신을 믿지 않는 비 신자들을 '마귀' '사탄의 아들'로 매도하며 배척하는 아주 일부의 독실한 신도이자 친지이기도 한 몇몇 분들로 인해 생겨났다. 이런 나에게 저자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지 말고 그 손 끝이 가리키고 있는 것을 보라는 큰 울림을 전해주었다.

 

<서양문명을 읽는 코드, > 이 책을 통해 기독교 신학을 처음으로 진지하게 접할 수 있었고, '' '철학'에 대한 많은 오해의 풀 수 있었다. 이는 내게 있어 해빙(解氷)과도 같았다. 나의 앎의 영역 중 가장 취약한 부분이기도 했던 '' '철학'에 대해 이처럼 친절하게 안내해준 책을 그 동안 나는 본적이 없다.

 

책을 읽으면서 저자에 대해 느낀 것은 저자는 신(기독교의 신)을 사랑하시는 사람이고, 사랑하는 분이 받는 오해를 안타까워했고, 또한 오해를 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뼈저리게 통감하고 인정했다. 서면 인터뷰의 마지막 질문 두 항목을 저자의 종교와 신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에 대해 여쭈었던 것이 바로 이 때문이었다.

 

저자의 이번 저서는 3년간의 칩거를 통해 나온 결실이다. 고대의 플라톤부터 중세의 교부들과 스콜라 철학자, 그리고 근대와 현대 철학의 흐름을 꿰고 있는 스케일에 입이 벌어질 수밖에 없다. 얄팍한 지식과 교묘한 재탕 끓이기 식의 책들이 난무하는 현실 속에서 방대한 넓이와 깊이를 가진 현자의 책을 읽은 수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행운이 아닐 수 없다.

 

무엇보다 저자의 현대 문명에 대한 문제제기 '인간은 가치를 떠나서는 그리고 가치를 배제해서는 결국 난관에 봉착할 수 밖에 없다. 인간을 인간답게 하고, 세상을 세상답게 하는 것은 결국 가치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가치의 위기를 겪고 있고, 회복할 수 없는 위기에 봉착해 있다.' 그리고 이에 대한 해법으로 '작은 이야기가 없는 큰 이야기는 공허하며, 큰 이야기가 없는 작은 이야기는 맹목이다. 그래서 우리가 큰 이야기와 작은 이야기를 함께 함으로써, 다시 말해 전근대적인 신과 영웅들의 이야기도 하고, 근대적인 이성과 혁명에 관한 이야기, 탈 근대적인 개인의 가치에 대한 이야기도 늘어 놓아서 그것들이 서로 견제 하면서 또 보완하도록 하자'고 제안한 바 있다.

 

저자는 책의 서문에 수도꼭지의 비유로 피상적 이해의 위험성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나야말로 저자가 이야기 한  잘못된 곳에 수도꼭지를 박아 놓고, 물이 나오지 않는다고 욕지거리를 하던 사람 중 하나였다. 그러나 저자의 친절한 설명과 안내 덕분에 수도꼭지가 있어야 할 제대로 된 위치와 그 뒤로 이어진 배관을 따라 맑은 물이 샘 솟아나는 발원지까지 다녀올 수 있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 나는 세상을 바라보는 탁하고 흐린 색안경 하나를 벗어 던질 수 있었다.

 

저자는 방대한 독서와 저술 활동을 통해 신성 불가침 영역에만 머물러 있던 ''을 우리 곁으로 데려온다. 뿐만 아니라 니체의 말처럼 신을 죽이고, 가치를 상실하고 있는 이 시대에 과감하게 문제를 제기한다. 문제제기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에 대한 대안과 해법도 함께 제시한다. 이러한 저력 있는 지식인과 같은 나라, 동시대에 살아 숨쉬고 있다 것은 참으로 자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아마도 스승께서 저자를 우리에게 소개해주신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II. 내 마음을 무찌르는 글귀

지은이의 말

어느 문명에서든 신은 종교 안에만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신은 언제나 종교 밖으로 나가 종교 아닌 것들 속으로 스며들어 가지요. 세속적인 것, 일상적인 것, 문화적인 것 안으로 과감히 침투해 들어 갑니다. 신은 사회제도와 전통 안으로, 생활규범과 관습 속으로, 학문 안으로, 문학 속으로, 미술과 건축 안으로, 음악과 공연 속으로 부단히 파고들어가 문화와 문명의 심층을 이룹니다. (8) → 저자는 신을 삶과 사회를 이루는 심층의 패러다임 혹은 가치로 이야기를 전개하려 하고 있다.

 

어떤 것에 대한 피상적 이해가 가진 위험을 풍자한 우스개 소리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물이 귀해 식수마저 부족한 어느 나라 사람이 서구를 방문했다가 수도꼭지에서 물이 시원스레 쏟아져 나오는 것을 보고 경탄했다지요. 그래서 수도꼭지를 여러 개 사서 자기 나라로 돌아와 벽에 꽂아 놓고 틀어보았지만 물이 나오지 않자 크게 실망했다는 내용입니다. 벽 뒤에 마땅히 있어야 할 배관도, 급수 펌프도, 정수장도 없으니 물이 쏟아져 나올 리가 없겠지요. 심층적 이해 없이는 해결책도 없습니다. (8) → 이 얼마나 통쾌한 비유인가? 비단 신에 대한 수도꼭지뿐만 아니라, 수많은 오해와 편견이 바로 잘못된 수도꼭지의 위치에 있지 않을까?

 

이 책의 주된 목표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에 대한 바르고 정밀한 이해를 통해 서양문명의 배관도, 급수펌프도, 정수장도 파악하자는 것입니다. 더불어 세계화의 거센 물결을 타고 어느 때보다도 빠르게 보편화되고 있는 서양문명이 우리에게 부당하게 떠맡긴 심각한 문제들 (가치의 몰락, 의미의 상실, 물질주의, 냉소주의, 허무주의, 문명의 충돌 등)에 대한 해법도 찾기를 기대하지요. (9) → 바로 이 관점에서 이 책을 읽어 내려가야 한다. 저자는 우리의 문명은 서양문명에 아주 많은 영향을 받았고, 바로 그 문명이 가치 몰락 등으로 오염되어 가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해법을 찾기 위해 지금 우리 문명의 뿌리 중 하나인 서양문명을 찾아가야 한다. 바로 그 서양문명이란 수도꼭지의 원류가 바로 기독교와 기독교의 신이라는 가정에서 저자는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다.

 

 

1부 신이란 무엇인가

자신의 비참함을 알지 못하고 신을 아는 것은 오만을 낳는다.

신을 알지 못하고 자신의 비참함을 아는 것은 절망을 낳는다.

- 파스칼, 팡세 -

 

신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나

신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27)

 

신을 '보았다'는 구약성서의 기록들은 신의 본체를 보았다는 것이 아니라 신의 영광과 위험의 상징을 보았다는 의미일 뿐입니다. (28)

 

신의 영성(靈性)에 대한 상징적 묘사일 뿐 신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 구약성서를 경전으로 삼는 종교들의 공통된 해석이지요. 그리고 신약성서에서도 신은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또는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이"로 표현됩니다. (28)

 

천상세계의 '존재'와 지상세계의 '존재물'은 전혀 다른 것이어서 언어적 묘사가 불가능하지만, 인간이 이해할 수 있도록 의인화해서 표현할 테니 부디 새겨들으라는 뜻이지요. (31)

 

아무리 그래도 신은 전혀 인간처럼 생기지 않았다는 사실이지요. 당연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이것은 아주 중요한 이야기 입니다. 만약 우리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신이 인간처럼 생겼다고 생각하는 한,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을 오해하거나 전혀 이해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32)

 

미켈란젤로가 그린 노인은 누구인가

르네상스란 '재탄생' 또는 '부활'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무엇의 재탄생이고 부활이란 말일까요? 그것은 신 중심의 중세 문화를 깨트리고 인간 중심의 고대 그리스ㆍ로마의 정신과 문화를 되살리자는 것이었지요. 따라서 이 시대 예술가들은 신보다는 인간을, 신앙보다는 이성을, 종교보다는 학문과 예술을 숭상하던 고대 그리스ㆍ로마의 정신을 그들 작품 속에 재현했습니다. (중략) 고대 그리스ㆍ로마인들에게 신은 인간을 이상화 하거나 그 능력을 극대화한 존재였습니다. (중략) 고대 그리스인들은 인간의 몸을 최상의 아름다움으로 여기고 그것에 열광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36)

 

핀다로스는 신과 인간이 크기와 힘에서 차이가 있을 뿐 같은 종족임을 주장했습니다. 이것은 고대 그리스 사람들의 공통된 생각이기도 했지요. 인간이 신과 같은 불멸의 존재가 될 수는 없어도 심성과 육체를 단련하여 신처럼 위대해질 수는 있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37)

 

미켈란젤로는 고대 그리스의 정신을 가진 중세 이탈리아의 예술가였습니다. (40)

 

에로스의 날개

그리스인들은 일찍이 플라톤이 언급한 '이데아의 미', 곧 우리의 정신에 선천적으로 아로새겨진 이상적 아름다움도 열렬히 추구했습니다. 이데아의 미란 가시적 자연이 아니라 가지적 인간정신에서 발견할 수 있는 아름다움이지요. 빙켈만의 뛰어난 표현을 빌리자면 "오성에 새겨진 정신적 자연"에서 나오는 미를 말합니다. 따라서 엄밀하게 말하자면 고대 그리스인들은 자연에서는 감각의 미를, 정신에서는 이데아의 미를 찾아내 조화시키려 애썼습니다. 감각의 미는 그들 작품에 자연스러움을 심어 주었고, 이데아의 미는 숭고함을 보탰지요. (중략) "인간답게 묘사하되 동시에 이상화 하는 것"이 고대 그리스 예술가들이 지닌 최고의 규칙이었습니다. 르네상스 시대 예술가 들은 바로 이러한 정신과 규칙을 애써 물려받았지요. (42)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회화론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회화는 정신의 노동이다. 이성을 사용하지 않고 손재주와 눈가늠에 기대어 그리는 화가는, 앞에 놓인 모든 물체를 고스란히 재현하지만 그 정체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거울과 같다." (43) → 예술은 인간의 내면, 정신에서 우러나와야 진정한 예술이 될 수 있다. 이와 관련된 좋은 인용문이 또 있다. '초상화를 그릴 때 몇 가지 공통적인 어려움을 겪는다. 우선은 초상화가 실제 인물과 달라 보이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떨쳐버려야 한다. 실제 인물과 비슷해 보이려는 노력을 하다 보면 생명력이 없어진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인물의 내면을 그려내는 것이다. 초상화의 생명은 정밀묘사보다 그 인물이 풍기는 분위기와 느낌을 담아야 한다는 점이다. 이것이 바로 초상화의 매력이다. 나는 학생들에게 초상화 그리는 것을 가르쳐주기도 하는데, 대부분의 학생들은 자신이 그리는 선 하나하나가 실물과 닮기를 원한다. 그들은 주로 윤곽부터 그린 다음 그 안을 채운다. , 밖에서부터 안으로 그리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초상화는 그 반대로 그려야 한다. 즉 안에서부터 밖으로 그러야 한다. 왜냐하면 안만 제대로 그려지면 밖은 저절로 완성되기 때문이다.'

- 노마 밀러 <타임>지의 표지 그림을 그렸던 초상화가

 

미켈란젤로는 그리스인들이 추구하던 이데아의 미가 작품에서 물질성을 소멸시키고 인간의 영혼을 초월적 세계로 이끈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44)

 

플라톤은 아름다움이란 여인의 얼굴이나 신체와 같은 감각적 대상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그것들은 단지 매개체일 뿐이지요. 아름다움은 오직 우리가 감각적 대상을 통해 상기하게 되는 지고한 신적 형상의 아름다움, '이데아의 미'에서 나옵니다. 그런데 일단 우리의 눈이 아름다운 여인과 같은 감각적 대상들을 통해 이데아의 미를 받아들이면, 영혼에서는 "이를 가는 아이들에게 이가 나기 시작할 때처럼 열이 나고 근지러움과 불편함이 느껴지면서" 날개가 돋기 시작하지요. 이것이 이른바 영혼의 상승을 이끄는 '에로스의 날개'입니다. (44) → 진정한 아름다움은 감각을 매개로 하여 정신으로 승화되었을 때 비로소 가치가 있는 것이다.

 

로마시인 프로페르티우스의 '애가'는 에로스를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소년들 가운데 아모르로 묘사된 자가 누구였든

그대는 그 소년이 경이로운 손길을 가졌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이 세상에서 처음으로 사랑에 빠진 사람들이 넋 놓고 살아가는 것을

또 눈먼 욕정으로 선하고 위대한 일을 무너뜨리는 것을 보았노라.

그가 바람을 가르는 날개를 달고 있음은,

아무 이유 없이 그러는 게 아니라

인간의 마음이 신에게 날아가도록 만들기 위함이라. (45)

→ 감각을 거쳐 정신에 이르는 사랑이야 말로 신과 맞닿아 있다.

 

플라톤에게 에로스는 우리 영혼을 본향인 '이데아의 세계'로 귀환시키기 위한 '혼의 날갯짓'이고 '상승적 창조자'입니다. 또한 참되고 선하며 아름다운 천상의 이데아 세계로 연결시키는 열정이자 신에게 인도하는 안내자예요. 이로써 에로스 자신도 신적 존재가 되는데, 이것이 우리가 흔히 '플라토닉 러브'라고 부르는 사랑의 본질입니다. (45) → 우리가 흔히 이야기 하는 플라토닉 러브, 지고 지순한 정신적 사랑이라는 의미의 원류가 여기에 있었구나.

 

르네상스의 예술가들은 다원적이고 심층적인 이유에서 고대 그리스의 정신과 규칙을 부지런히 연구하고 모방했습니다. (47)

 

신인동형설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에서 신을 "자신은 움직이지 않고 다른 것을 움직이는 자"라고 규정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 말을 축약해서 보통 '부동의 운동자' 또는 '원동자' 라고 하지요. '운동'이라는 말은 장소의 변화뿐 아니라 질적, 양적, 실재적 변화를 동시에 의미하지요. 중세 신학자는 물론, 서양 근대 철학자나 신학자의 글에서도 '운동'이란 말을 발견한다면 그것을 '변화'라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다시 풀어보면 '부동의 운동자'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에는 '자기는 질적, 양적, 실재적, 장소적 변화를 하지 않으면서 다른 모든 질적, 양적, 실재적, 장소적 변화의 근원이 되는 자' 라는 의미가 들어 있지요. (50)

 

단테는 '신곡'에서 "나는 오직 하나의 신을 믿습니다. 유일하고 영원한 그분은 사랑과 소망을 통해 모든 천체를 움직이시되 당신 스스로는 전혀 움직이지 않는답니다."라고 아리스토텔레스의 '부동의 운동자'관념을 노래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유형의 그리스적 신 개념이 처음으로 무형의 자연원리로 바뀐 것이다. (51)

 

구약성서에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들 만들고" '형상' '모양'은 신의 '외적 형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적 본성'을 뜻하는 것이다. (53) → 바로 구약성서의 이 부분이 나와 같이 종교의 언저리에 머무는 사람들에게 오해의 씨앗을 준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신을 닮은 우리의 형상은 외적 형태가 아닌 내적 본성임을 이야기 하고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학대전'에서 "사람이 하느님의 형상을 따라 존재하는 것은 비물질적 지성과 이성에 의한 것이다." 라고 교훈했고, 그레고리우스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는 포괄적 표현 안에는 모든 것이 포함된다. 것은 인간의 본성이 모든 선에 참여하는 자가 되도록 인간의 본성을 지으셨다는 뜻이다." 라고 주장했으며, 칼빈은 "하나님의 형상은 모든 존엄에까지 확대된다. 이 말에는 아담이 창조될 때 의로운 마음을 향유하면서 스스로 감정을 잘 통제하고 자신의 감각이나 모든 내면적 사상을 잘 조절하며, 창조주의 영광을 아름답게 나타내는 완전한 순결성을 부여 받았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라고 표현했다. (54)

 

이처럼 외적 형태를 의미하던 히브리어 '첼렘' '떼무트'를 기독교 신학자들은 어떤 내적 본성을 뜻하는 신학적 용어로 해석했습니다. (54)

 

신론과 존재론 그리고 서양문명

신은 어떻게 생겼고 도대체 무엇인가? (55)

 

기독교의 신 개념은 히브리인들의 '종교적 신 개념'만을 계승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리스인들의 '존재론적 신 개념'만으로 이루어진 것도 아닙니다. 이 둘을 종합한 것이지요. 그런데 알고 보면 그건 신앙과 이성이라는 그 이상 간데 없이 뻗은 양극을 휘어 하나로 결합하는 것 같은 극적 종합이었습니다. 그 결과 다분히 종교적이면서도 분명 존재론적인 성격을 띠고, 여전히 히브리적이면서도 여실히 그리스적이지요. "성서의 종교에는 존재론적인 사상이 없다. 그러나 성서의 그 어떤 상징도 그 어떤 신학 개념도 존재론적 함축성을 갖지 않은 것이 없다." 라는 독일 출신 현대신학자 파울 틸리히의 말에도 바로 그런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56) → 신이 없는 것이 아니라 내가 신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신을 압니다.'라고 융은 말했다. 이 얼마나 극적인 통합인가. 서양문명은 이렇게 공존하기 어려울 것 같은 두 개의 문명이 하나로 통합되면서 태동하기 시작했다.

 

신은 모든 존재물이 존재하는 바탕입니다. 즉 모든 존재물은 신이라는 존재 안에서 존재를 부여 받아 존재하지요. '신은 존재다'라는 말은 여기서 나온 겁니다. 따라서 신은 우주마저 자기 안에 포괄하며, 무소부재하고, 신의 바깥에서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신은 유일자다' 라는 말은 바로 여기서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 존재는 또한 자신의 내적 법칙인 '말씀'에 의해 모든 존재물을 창조하지요. '신은 창조주다' 라는 말이 여기서 나왔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부단히 자신의 피조물들과 관계하여 그들을 오직 자신의 의지대로 이끌어 가지요. '신은 인격적이다' 라는 말은 여기서 나왔습니다. (56) → 이 책 전체를 이끌어 나가는 4가지 맥락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신은 존재다, 신은 유일자다, 신은 창조주다, 신은 인격적이다.

 

존재론적이며 동시에 종교적이기도 한 이유로 신은 인간이 도무지 벗어나거나 떠날 수 없는 대상이며, 그의 '말씀'은 순종하면 필히 복을 받지만 거역하면 부득불 벌을 받을 수밖에 없는 영원불변의 법칙이라는 것이 기독교의 근본 가르침입니다. (60)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의 축복과 징벌을 묘사한 작품에는 존재론적 함축성을 지닌 종교적 상징과 표현이 반드시 포함됩니다. (중략) 여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이 종교의 신이 자기 자신을 '존재'로 계시했고 또 신학자들도 그렇게 파악해 왔기 때문이지요. (64)

 

이제부터 우리가 함께 할 이야기들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안다는 것과 믿는다는 것이 같지 않기도 하고, 게다가 그 관계도 분명치는 않으니까요. '알면 믿는다'는 입장도 있고 '믿으면 안다'는 관점도 있습니다. 기독교 신학은 당연히 후자를 견지합니다. (65)

 

 

2부 신은 존재다

'있는 자' 라는 이 명칭은 신의 가장 고유한 이름이다.

- 토마스 아퀴나스 -

 

그는 누구보다 뛰어난 학자였지만 항상 겸손해서 논쟁을 할 때조차 평온함과 객관적 태도를 유지했지요. 그래서 그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조차 그의 학식에 대한 찬사와 칭송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무척 유쾌한 성품이어서 사람들은 그를 '천사적 박사'라고 불렀습니다. (71)

 

1880년 교황 레어 13세는 토마스 아퀴나스를 "신앙과 이성의 권위를 각각 높이면서도 둘을 친밀하게 결합함으로써 신앙과 이성 사이에 존재하는 모든 불화를 일소에 해소했다" 며 칭송하고 가톨릭학교들의 '수호성인'으로 공포했습니다. (75)

 

아퀴나스는 '신학대전'에서 자신이 어릴 적부터 해 오던 질문, "신은 무엇입니까?"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스스로 몇 가지 원칙을 세웠습니다. "첫째로 신이 어떤 식으로 있지 않은지, 둘째로는 신이 어떤 식으로 우리에게 인식되는지, 셋째로는 신이 어떤 식으로 이름 불러지는지를 고찰해야 한다" 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원칙에 따라 신에 대해 하나하나 꼼꼼히 살펴 나갔는데요, 그가 내린 최종결론은 신은 '있는 자' 또는 '존재 자체' 라는 것이지요. "신을 가리키는 어떤 명칭보다 더 근원적인 명칭은 '있는 자'. 이 명칭, '있는 자'는 그 자체 안에 전체를 내포하며 무한하고 무규정적인 실체의 거대한 바다와도 같이 존재자체를 갖고 있다." (중략) 토마스 아퀴나스와 같이 탁월한 중세신학자들도 신이 인간처럼 생긴 게 아니라 오히려 '거대한 바다'와 같은 모습이라고 인식했다는 사실입니다. (75)

 

1장 존재란 무엇인가

신에게는 이름이 없다

고대사회에서 이름이 지닌 특별한 의미를 독일의 구약학자 발터 아이히로트는 다음과 같이 요약했습니다. "고대인들에게 이름은 단순히 어떤 사람을 가리키는 수단이 아니라 그 사람의 존재자체와 가장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이름은 사실상 일종의 또 다른 자기가 될 수 있었다." (82)

 

신이 무엇인지 알려면 신이 어떤 식으로 이름 불러지는지를 고찰해야 한다.

- 토마스 아퀴나스 - (82)

 

존재론적으로 따져보면, 그 이유가 단순하고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신이 자기 이름을 감춘 것은 사실 신에게는 이름이 없기 때문이지요. (중략) 신에게는 이름이 없습니다. (83) → 연금술사의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천지만물을 기록한 그 손' 다시 말해 ''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 인연이 나를 이 책으로 인도해 준 것 같다.

 

세상 만물은 모두 '무엇'이라는 본질을 가짐으로써 비로소 존재하며, 일반적으로 그 '무엇'이 우리가 부르는 그것의 '이름'입니다. 따라서 이름이란 어떤 것을 그것이게끔 하는 본질이 이미 규정되고 한정된 '존재물'에만 붙일 수 있지요. (84)

 

신은 만물의 궁극적 근원이라는 자신의 속성상 그 어떤 것으로도 규정할 수 없는 '무규정자', 그 무엇으로 한정할 수 없는 '무한정자' 라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만물의 궁극적 근원이 될 수 없지요. (84)

 

네가 신을 파악하지 못한다는 것이 뭐 그리 놀라운 일인가? 만일 네가 그 분을 파악한다면, 그분은 신이 아니다.

- 아우구스티누스 (85) → 신의 무규정성, 무한정성을 의미한다.

 

신을 가리키는 그 어떤 명칭보다 더 근원적 명칭은 '있는 자'. - 다마스쿠스 요한네스 (86)

 

모든 피조물은 본질과 존재가 구분되지만 신의 본질은 그의 존재와 다른 것이 아니다. - 토마스 아퀴나스 (86) → 신은 피조물과 본질적으로 다른 속성을 지니고 있다.

 

지성도 넘고, 신비도 넘어

아낙시만드로스가 말하는 아페이론은 우선 시간적으로 "변화를 통해 형성된 것도 아니고 사라지지도 않으며, 죽음도 쇠퇴도 모르고, 시작도 끝도 없는 영원한 것이지요. 동시에 공간적으로는 너무나 광대무변하여 크기를 측정할 수 없으며, 만물을 자신 안에 포괄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아페이론은 신적인 것으로서 만물을 포괄하고 횡단하며 보호하고 조종하지요." 그러므로 따지고 보면 아낙시만드로스는 아페이론 개념을 통해서 신의 무한성을 처음으로 규정한 철학자인 것입니다. (87)

 

존재는 생성되지 않고 소멸되지 않으며, 온전한 일자이고 흔들림 없이 완결된 것이다. 그것은 과거에 있었던 것이 아니고, 미래에 있게 될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지금 있으며, 전체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 파르메니데스 (88)

 

파르메니데스의 존재개념을, 이후 자신의 존재론 체계 안에서 모든 이데아의 근거인 '일자' 또는 '선자체'로 정립한 사람이 플라톤이었고요, 그 체계를 종교화한 사람이 플로티노스였습니다. (88)

 

플로티노스도 '일자'를 신이라고 불렀는데, 그가 말하는 일자는 규정할 수 없는 것이기에 모든 규정할 수 있는 것들의 바닥에 깔린 심연이며, 한정할 수 없는 것이기에 모든 한정할 수 있는 것의 바탕이지요. (88)

 

이 점은 심지어 일자 자체까지 없는 것은 아닐지라도, 일자에 대한 이름이 왜 없는가에 대한 정확한 이유다. 우리가 그것에 어떤 이름을 부여하든지 우리는 하나의 어떤 그것 으로써 일자에 관해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일자는 하나의 그것도, 그분도 아니다. 왜냐하면 일자는 하나의 사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 에티엔 질송 (88)

 

하나님의 본질은 우리가 그에 관하여 말하고 부를 수 있는 모든 것 위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모든 명칭 위에 머물러 있다.

- 에버하르트 윙엘 (89)

 

누가 신에게 이름을 붙일 수 있겠고?

누가 고백할 수 있겠소,

나는 그를 믿는다고!

마음 속으로 느낀다고 해서

누가 감히 발설할 수 있겠고,

나는 신을 믿지 않는다고!

만물을 포괄하는 자,

만물을 보존하는 자,

그는 당신을, 나를, 그리고 자신을

포괄하고 보존하고 있지 않소?

- 괴테 '파우스트' (89)

 

이름을 붙일 수 없는 신이 스스로 자기 이름을 만들어서 알린 것은, 예컨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과 같이 추상적 신으로 표현하는 지성주의나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과 같이 이름 없는 신으로 나타내는 신비주의 같은 잘못된 신앙으로부터 자기 백성을 구하려는 일종의 은총이라는 말입니다. (89)

 

그리스 철학에서는 존재가 곧 실체다. 예컨대 플라톤의 존재인 이데아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존재인 형상은 개개의 사물들에게 그것을 그것이게끔 하는 그것의 '본질'을 부여함으로써 실제로 '존재'하게 하는 실체다. 그래서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그리스 철학에서 존재라는 개념에는 항상 본질이 붙어 다니며, 그 결과 본질과 존재가 함께 있는 존재물과 혼동될 여지가 생겼다. 그러나 신은 존재한다는 점에서는 존재물과 같지만, 본질을 갖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그와 다르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신을 단순히 존재라고 하지 않고 '존재자체'라고 구분해서 부른 것은 그런 이유다. (93)

 

기독교 교리란 기독교를 다른 이교도들의 사상과 내부 이단의 주장으로부터 기독교를 구별하려는 주장으로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교리는 그 발생부터가 이미 배타적이거나 방어적인 성격을 띤다. 이에 비해 기독교 사상이란 기독교 교리보다 폭넓은 의미로서 기독교적 삶의 표현으로 받아들인 모든 사상과 다양한 주장을 의미하며, 여기에는 신학과 교리의 발생, 인정, 진행과정이 내포되어 있다. (93)

 

→ 이 장이 어렵게 다가오고 수긍이 가지 않는 이유는 결국 신은 존재물의 성질을 가지고 있기도 하지만 그 위에 존재한다는 데 있다. 그런 설명은 너무나 교조적이다. 신에 대한 전제자체가 교조적이기 때문에 배타성을 띠고 있는지도 모른다.

 

신은 하늘에 있고 너는 땅 위에 있다

"인간정신은 그가 적당한 개념을 설정할 수 없는 실체 앞에서는 망설여지는 법이다" 라는 질송의 말처럼, 보이지 않고 사고할 수도 없으며 이름조차 부를 수 없는 대상 앞에서 우리의 이성은 절망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지요. 알고 보면 바로 이것이 우리가 부단히 '존재'를 망각하고 '존재물'에 집착하게 되는 근본적인 이유이며, ''에게서 돌아서서 '세상'으로 향하게 되는 원초적인 까닭인 것입니다. "내가 그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여기서 우리는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는 존재보다는 볼 수도 있고 만질 수도 있는 존재물을, 다시 말해 신보다는 세상을 더 믿고 의지할 수 밖에 없는 우리들 자신의 가련한 모습을 확인할 수 있지요. (98) → 우리가 대자연의 위대함 앞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가?

 

신이 그의 이름을 묻는 모세의 질문에 "나는 존재다" 라고 한 대답에는 '너는 존재가 아니다' 라는 의미가 함축되었다는 말이지요.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존재물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에흐예 아세르 에흐예" 라는 신의 대답이 가진 진정한 의미예요! 신을 '존재'로 그리고 인간을 '존재물'로 파악한 것, 바로 이것이 모세가 이룬 신 개념의 핵심이라는 말입니다. (99)

 

덴마크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일찍이 모세가 구분한 존재와 존재물 사이의 엄연한 차이를 "신과 인간 사이의 절대적 상이성" 또는 "시간과 영원의 무한한 질적 차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의 실존철학을 쌓아 올리는 초석으로 삼았지요. 또한 신학자 칼 바르트는 같은 말을 "신은 하늘에 있고 너는 땅 위에 있다" 라고 선포하고, 그 사이에는 "눈 얼음 계곡", "극 지역", "황폐지대"가 놓여 있다고 비유했습니다. 그 역시 이를 자신의 초기 신학이 발 딛을 기반으로 삼았지요. (100) → 그렇다면 그 지점을 지나고 나면 인간도 신이 될 수 있는 것일까?

 

신은 강하고 전능하고 영원하지만 어떤 하나의 존재물이 아니기 때문에, 존재물들 가운데 '가장 강한 자'이고 '가장 능력 있는 자'이며 '가장 지속적인 자', '최고의 존재물'은 결코 아닙니다. 만물의 궁극적인 근거로서 무규정자이고 무한정자이며, 원칙적으로는 이름조차 붙일 수 없는 대상인 신은 그가 모세에게 스스로 밝힌 대로 단지 '존재'지요. (102)

 

그리스인들과 존재

소박하게 생각하자면 다양한 모든 존재물이 근원적으로 가진 공통요소가, '있음' 곧 그것의 '존재'라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 단순한 생각이 서양철학사를 획기적으로 바꾸어 놓았지요. 파르메니데스는 모든 형이상학적 사변의 근본적 두 주제인 '본질' '존재' 중 하나인 존재를 간파함으로써 오늘날 우리가 존재론이 라고 부르는 형이상학으로 단번에 뛰어든 것입니다. (104)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파르메니데스의 생각은 이렇게 전개되었습니다. "존재는 변하지 않는 것이고, 변하지 않는 것은 진리다. 그러므로 존재에 대한 인식만이 진리다. 그런데 세상의 모든 존재물은 변한다. 그러므로 존재물들에 대한 모든 인식은 거짓이다" 그는 이런 논리를 바탕으로 "인식과 존재는 동일하다" 라고 주장했지요. 이처럼 '존재' '비존재' 그리고 '진리' '거짓'을 이분법적으로 날카롭게 구분한 일, 이것이 파르메니데스가 서양철학사에 남긴 공적입니다. (106) → 앞서 신의 존재에 관해 교조적이라 여겼던 부분이 파르메니데스의 삼단논법에 의해 조금은 해소가 되었다.

 

일자인 존재에는(영원하고 불멸이라는 이유에서 '존재'라고 불렀고, 자기 자신과 동일하며 차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일자'라고도 불렀는데) 사유되는 것을 놓고, 질서 없이 움직이는 부류에는 감각되는 것을 놓는다. (106)

 

우리는 현기증 나는 '뒤바뀜'을 과감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세상에 있는 만물들은 사실상 없는 것이다. '가시적 세계' '가지적 세계'의 뒤바뀜) (108)

 

플라톤에 의해 이렇게 그 실재성이 부정된 것들이 사실상 우리에게는 바로 현실적 실재의 유형이라면서 그에게 맞서 논쟁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플라톤은 철학자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그런 일은 제거되어야 할 기본적 환영이라고 분명하게 말할 것이다. (중략) 이런 경우에 만약 우리가 헛되이 플라톤에게서 어떤 대답을 구하고 있다면, 아마도 그것은 우리가 잘못된 질문을 그에게 던지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그가 '있다는 것(영원불변 하게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말한 반면, 우리는 그에게 '현존한다는 것(세상에 가시적으로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계속해서 묻고 있는 것이다. (108) → 우리가 묻고 있는 것의 속성과 그가 답하고 있는 것의 속성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의미

 

존재에 대한 플라톤의 이 철학적 사변이 후일 '신플라톤주의'를 통해 기독교 안으로 흘러들어왔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인에게도 진실하고 참된 세상은 우리의 관점에서 현존하는 이 세상이 아니라 저 어떤 다른 세상이지요. 곧 플라톤에게 '이데아의 세계'였던 것이 기독교인에게는 '하나님의 나라(天國)'입니다. (109) → 기독교가 지니고 있는 그리스 철학의 속성, 즉 종교와 이성의 결합

 

플라톤은 불변하는 실체인 존재를 '이데아'라고 불렀다. 개개의 사물 안에는 이데아가 들어있습니다. '들어 있음'을 통해 개개의 사물들은 그것을 그것이게끔 하는 그것의 '본질'은 물론, 있음이라는 '존재'를 부여 받게 되지요. 그뿐만 아니라 자신의 '이름'까지 얻게 됩니다. 한마디로 플라톤의 이데아는 사물에 본질과 존재, 그리고 이름을 부여하는 실체지요. (111)

 

이데아는 만물이 그렇게 존재하게 하는 창조주인 셈이지요. (111)

 

이데아는 사물들에 '완전히' 들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부분적으로만' 들어있지요. 그래서 개개의 사물은 이데아처럼 완전하지도 않고 영원불변 하지도 않습니다. 이런 이유로 이데아론을 '분여이론'이라고도 부르는데, 그 결과 개개의 사물은 그 본질에서 불완전하고, 존재에서도 실재성이 적지요. (112) → 바로 이 분여로 인해 피조물, 존재물은 신의 속성, 존재의 속성을 지니지만 존재가 아닌 불완전성을 띠게 된다. 분여 이론은 참 멋진 이론이며, 신의 존재에 대한 교조적 오해를 시원하게 해소해 주는 것 같다.

 

플라톤의 분여이론에 의해서 '존재와 존재물' 간의 차이와 상호관계가 분명해졌다는 점이에요. 존재(이데아)는 단일하고 영원불변 하며 존재물(사물)들에게 '본질' '존재' 그리고 '이름'을 주는 완전한 자입니다. 그리고 존재를 부분적으로 나누어 받은 존재물들은 다양하고 일시적이며 끊임없이 변하는 불완전한 자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존재만이 진리의 근거입니다만, 존재물들도 부분적으로나마 존재를 나누어 가졌으니 이제 더는 파르메니데스의 말처럼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불완전하게'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그것에 대한 인식이나 언급도 완전히 '거짓'은 아니고 단지 불완전한 지식, 곧 플라톤이 말하는 '사견'이지요. (113)

 

신은 단일하고 영원불변 하며 우주만물에 '본질' '존재' 그리고 '이름'을 주는 완전한 자다. 그리고 우주 만물은 다양하고 일시적이며 끊임없이 변하는 불완전한 자다. 따라서 신만이 진리의 근거이며, 우주만물에 대한 지식은 단지 불완전한 지식일 뿐이다. (114)

 

플라톤의 분여이론이 서양문명에 미친 영향은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지난 2500년 동안 서양문명 전반에 이것보다 더 크고 뚜렷한 족적을 남긴 철학이론은 없습니다. 이 이론은 현실세계와 가치세계의 다양한 질적 차이를 설명할 수 있게 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연의 사다리' '존재의 사다리' 라는 개념으로 발전해서 고대와 중세의 교회제도와 사회제도를 확립하는 데도 결정적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럼으로써 사실상 서양문명을 일구고 지탱해 온 허리뼈가 된 것이지요. (114) → 분여 이론이야 말로 향후 저자가 전개해 나갈 기독교의 신, 존재에 대한 대전제가 된다는 의미다. 저자는 이를 서양문명의 허리뼈라고까지 이야기 하며 치하하고 있다.

 

자연의 사다리에서 존재의 사다리로

플라톤은 '향연'에서 이데아를 향해 올라가는 길을 '층계길' 이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층계는 위로 올라갈수록 질적으로 더욱더 참되고 선하고 아름답지요. 하지만 양적으로는 그만큼 더 적어져서 맨 나중에는 단일한 것이 됩니다. (116)

 

하나님은 무로부터 창조한 사물들에게 존재를 부여했다. 그러나 하나님 당신이 존재하듯 최고의 존재로서 부여한 것은 아니다. 어떤 사물에게는 더 큰 존재를 부여하고 어떤 사물에게는 더 작은 존재를 부여했다. 그리하여 존재들의 자연 본성을 계층으로 질서 지어 놓았다. - 아우구스티누스 (118)

 

서양의 기독교인들이 신을 (중략) 가치들의 정점으로 부르면서 자신들이 바로 이 같은 가치들에 의해 인간으로 창조되었고, 그래서 이 같은 가치들을 추구하며, 이 같은 가치들에 의해 구원받으리라는 자신들의 믿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신은 인간이 추구하는 가치들의 외연인 동시에 그것들의 정점"이라는 말의 시원이 바로 여기지요. (123) → 즉 존재의 사다리 아래에서 위쪽으로 갈수록 분여 된 이데아의 비율이 높아져서 사다리의 정점, 즉 피라미드의 정점에 이르러서는 이데아 자체가 된다. 그 존재가 바로 신이다.

 

존재의 계층구조에서 사회적 계층구조로

서양의 '자연법사상' 안에는 플라톤과 플라티노스로부터 뻗어 나와 아우구스티누스와 토마스 아퀴나스로 이어지며 서양문명에 고착된 '존재의 대연쇄' 라는 형이상학이 뿌리 깊게 들어 있었습니다. (129)

 

존재가 영원 불변하는 실재이자 진리의 근거라는 파르메니데스의 주장은 플라톤과 플라티노스를 거쳐 초기 기독교 신학자들에게로 이어졌습니다. 그 결과 파르메니데스에서 아우구스티누스로 이어지는 존재론 전통에서 존재는 불변성을 본성으로 갖고 있고, 우리가 따라야 할 모든 진리의 근거입니다. (131)

 

바로 이곳이 존재에 대한 그리스적 개념과 히브리적 개념이 상충하는 지점이에요 히브리 인들의 존재개념은 만물을 생성, 소멸시키는 역동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진리 개념 역시 불변성을 근거로 하지 않고 오히려 생성, 소멸하는 작용, 곧 변화시키는 본성을 근거로 하지요. 천지를 창조한 '신의 말'이 바로 그렇습니다. 신의 말은 만물을 생성, 소멸시키고 의롭게 만드는 작용을 하므로 우리가 따라야 할 진리라는 것이 히브리 인들의 생각입니다. (131)

 

존재는 창조주다

플로티노스 : 일자 → 정신 → 영혼

 

일자란, 모든 존재물의 궁극적인 근거이자 그 모두를 포괄하는 자이지요. 그 어떤 것에도 한정되거나 규정되지 않는 무한자로서 모든 한정되고 규정된 것들의 궁극적 근거가 되지만, 그 자신은 어떤 것에도 포괄되지 않음으로써 모든 것을 포괄하는 초월자입니다. (132)

 

영원불변하는 일자가 어떻게 다른 어떤 것을 생성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해 플로티노스는 유출이라는 표현을 사용해 답했습니다. 그가 말하는 유출은 마치 빛이 발광체의 주위로 번지듯이, 뜨거운 물체가 주변으로 열을 퍼뜨리듯이, 향기가 그 주변으로 퍼져 나가듯이 매우 신비롭게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그래서 태양이 빛을 발하지만 어두워지지 않고 샘물이 시냇물을 흘려 보내지만 마르지 않는 것처럼 일자의 유출은 일자 자신에게 어떤 변화도 일으키지 않지요. 플로티노스는 "일자는 아무것도 추구하지 않고 소유하지 않으며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에 완전하다. 그리고 완전하기 때문에 넘쳐흐르고, 그 넘치는 풍요함이 또 다른 존재를 만든다" 라고 설명했습니다. (133) → 창조에 대한 멋진 은유다.

 

정신은 하나의 통일체로서 그것이 인식하는 것은 오직 그 자신입니다. 왜냐하면 그밖에는 아직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정신은 스스로가 '인식하는 자'인 동시에 '인식되는 자'이지요. 하지만 자기 안에서 인식하는 주체와 인식되는 객체로 분리되기 때문에 이미 일자가 아닙니다. (134)

 

정신은 이러한 자기직관을 통해 플라톤이 '이데아'라고 부른 것, 측 세계 창조를 위한 모든 참된 '형상'을 자기 안에 만듭니다. 이 말을 플로티노스는 "정신 자체에 정신이 나누어 줄 모든 것이 다 들어있다"고 표현했지요. 한 마디로 플로티노스에게는 정신이 곧 세상 만물을 창조하는 데 모범이 되는 틀입니다. (134)

 

여기 사과가 한 알 있습니다. '사과'라는 존재는 크기, 형태, 색깔, 맛과 같은 제한성과 규정성이라는 '안정된 조건'에서만 우리에게 사과로 인식됩니다. 이때 말하는 제한성, 규정성이라는 '안정된 조건'이 철학에서 말하는 '본질'입니다. 사과의 존재는 이처럼 사과의 본질을 통해 비로소 우리에게 드러나지요. 보다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존재한다는 것'은 본질에 의해 제한되고 규정된다는 것이며, 그럼으로써 비로소 우리에게 인식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지요. (135)

 

영혼이란 흔히 말하듯 불멸의 실체라기 보다는 정신 안에 있는 형상이 현실화되는 '현실화의 원리'이자 '운동의 능력'을 가리킵니다. 이 영혼에 의해 모든 물질세계가 만들어지는 것이고요. (136)

 

플로티노스의 형이상학에서는 정신이 '창조주'이기는 해도 다만 '창조의 틀'로만 작용할 뿐이고, 그것을 현실화하는 일은 영혼이 합니다. 영혼은 비물질적 세계와 물질적 세계 사이에 존재하며, 그 둘의 연결고리로서 위로는 정신을, 아래로는 자연계를 바라보며 만물을 창조하지요. (136)

 

물질세계를 생산해 낼 때, 영혼은 정신 안에 이미 존재하는 형상들이 물질 안에서 가시적 형태로 스스로 만들어지도록 돕는 역할을 합니다. 결국 영혼이 하는 일은 물질이 형상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일종의 촉매 작용입니다. 이를 플로티노스는 이렇게 표현했어요. "따라서 만약 영혼이 어떤 행위가 아니고 합리적인 원리라면 그것은 '성찰'이다" (136) → 플로티노스의 영혼은 정신세계와 물질세계를 연결해 주는 매개체로 작용한다.

 

사랑(성령), 부드러운 사랑이 열매로 가득한 (성자의) 가슴을 열었고

그곳에서 잠자던 <이데아들>을 깨웠다.

그들은 깨어나서 스스로 아름다움을 자랑하였다.

전능하신 성부는 미소 지으며

자신의 영원한 모습,

그 아름다운 조화의 형상들을 보았다.

그는 선하고 아름답다고 보고, 갓 태어난 계획을 축복하였다.

존재의 씨앗들이여, 아름다운 가슴 속에

모든 가능한 사물의 형상을 담고 있는 것,

일어나서 그대들의 풍요로운 힘을 보이라.

- 존 노리스 '창조성가' (139)

 

<최고 신>으로부터 <정신>이 생기고, <정신>으로부터 <영혼>이 생겼다. 그 다음으로 이 영혼이 모든 잇단 사물들을 만들어 내고 생명을 불어 넣어 주었다. 하나의 빛이 모든 것을 밝히며, 한 얼굴이 줄지어 있는 여러 거울에 비치듯이, 사물의 하나하나가 비치고 모든 사물은 연이어 계속 되고 그 연속의 밑바닥까지 이르게 된다. 따라서 주의 깊은 관찰자는 <최고 신>으로부터 사물의 맨 나중 부스러기까지 끊임없이 이어진 각 부분의 연결을 발견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호메로스의 '황금사슬'이며, 그의 말에 의하면 <>이 명령하여 천상에서 지상까지 늘어뜨린 것이다.

- 암브로시우스 마크로비우스 (140) → 최고 신 → 정신 → 영혼 → 사물

 

플로티노스의 세계구조에서 물질세계를 유출시킨 일자, 정신, 영혼은 영원불변 하는 '신적 존재'입니다. 창조와 관련해서 일자는 창조의 바탕이고, 정신은 창조의 틀이며, 영혼은 창조의 원리지요. 그리고 그들로부터 유출된 물질은 부단히 생성되고 소멸됩니다. (141)

 

히브리인들과 존재

그리스 언어가 정지적인 데 반해 히브리 언어는 역동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 보만 (144)

 

히브리 인들에게 '존재'는 영원불변 한 것인 동시에 생성, 작용하는 실재입니다. (146)

 

그리스인들에게 존재란 영원불변 한 것이었습니다. 무언가가 영원불변 하다는 것은 언제나 '자기동일성'을 유지한다는 뜻이에요. 그러므로 존재는 논리적으로는 결코 변화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다른 어떤 것을 변화하도록 만들 수도 없지요. 다른 무언가를 변화하게 만드는 것 자체가 이미 하나의 변화이기 때문입니다. 이러면 존재의 자기동일성이 깨지고 말지요.(146)

 

haya에 들어 있는 생성, 존재, 작용의 통일성이 우리들에게 기이하게 보이는 이유는 우리들의 사유가 사물들에 의해 그 방향이 설정되었기 때문이다. (즉 우리의 인식의 한계는 모순과 역설을 끌어 안지 못한다는 의미) 그러나 사유의 방향이 심리적으로 정해지면 이 종합은 잘 이해될 수 있다. 왜냐하면 인격은 끊임없는 생성으로 구성되지만, 그것은 언제나 자기 자신과 동일한, 작용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 보만 (147)

 

세상 만물은 그 무엇이든 끊임없는 자기동일적 생성과 작용을 통해서만 불면할 수 있습니다. (148)

 

'불변과 변화', '존재와 생성'이 더는 대립하거나 모순되는 개념 쌍이 아닙니다. (148)

→ 이 두 가지의 개념은 양립하는 대극의 개념이 아닌 공존하는 개념이다. 이러한 모순과 역설을 받아들여야 비로소 이곳에서 이야기 하는 신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시간화와 탈시간화의 마술

(앞 장에 이어) 존재와 생성의 종합이 가진 난해한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는 가시적 또는 사물중심적 사유냐, 아니면 심리적 사유냐에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시간에 있습니다. (중략) 그리스인들은 공간적(탈 시간적으로)으로 사유하는 경향이 강하고, 히브리 인들은 시간적으로 사유하는 경향이 짙습니다. (중략) 그리스인들은 존재든 존재물이든 모두 탈 시간화 함으로써 그 변치 않는 본질을 통해 '개념적으로' 파악했고, 히브리 인들은 신이든 인간이든 모두 시간 안에서 그 운동과 변화를 통해 '실존적으로' 파악했지요. (150)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오늘날까지 논리학은 이처럼 철저하게 탈 시간화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어떤 변화도 전혀 다룰 수가 없어요. 바로 이것이 파르메니데스가 시작하고 아리스토텔레스가 체계화한 논리학의 전통이자 한계이며, 그것을 통해 사유해 온 서양문명이 탈 시간화된 이유이고, 우리가 히브리적 사고를 이해하기 어려운 까닭이며, 우리에게 근본적으로 시간화된 새로운 논리학이 요구되는 이유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리스 철학과 히브리 종교가 만나 형성된 기독교와 그것을 기반으로 형성된 서양문명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적재적소에서 그때마다 시간화와 탈 시간화의 마술 (즉 그리스적 사유를 시간화 하거나 히브리적 사유를 탈 시간화 하는 별도의 작업)이 필요합니다. (153) → 다시 말해, 서양문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리스 철학의 탈시간화, 히브리 종교의 시간화의 모순과 역설을 끌어 안을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다.

 

존재란 생성과 작용의 '탈 시간화'된 모습이고 생성과 작용이란 존재의 '시간화'된 모습에 불과합니다. 불변이란 변화의 탈 시간화된 현상이고, 변화란 불변의 시간화된 현상일 뿐이지요. (153) → 이처럼 완벽한 문장이 있을 수 있을까?

 

신은 '시간 밖에서는' 영원히 안식하시지만, '시간 안에서는' 부단히 활동하신다. (154)

 

모순되는 두 개념을 하나로 묶어 사용하는 이중적 논법은 무엇보다도 존재에 대한 그리스적 사고와 히브리적 사유를 종합한 기독교적 신 개념을 설명하는 데 자주 사용되었습니다. (154)

 

창조한다는 것은 피조물들에게 본질과 존재를 주는 일입니다. 다시 말해 어떤 것(사과)을 그것(사과)으로 존재하게 하는 사역이지요. 스스로 생성, 작용하는 존재가 아니고서야 어떻게 본질과 존재를 피조물들에게 줄 수 있을까요. 자신을 무한한 '존재의 장'으로 펼쳐 그 안에 피조물을 생성하고 또한 그들에게 부단히 작용하여 자신의 의지대로 이끄는 존재, 바로 이것이 모세에게 자신을 야훼라고 계시한 신이자, 히브리 인들이 하야 라는 개념으로 이해한 신이지요. (157)

 

중세신학자들이 이해한 '존재자체' 라는 개념은 불변하는 존재가 아니라 역동하는 존재지요. 명사라기보다 동사에 가깝습니다. 예컨대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라는 사도 바울의 가르침이나 "자체 안에 전체를 내포하고 있으며 무한하고 무규정적 실체의 거대한 바다"와도 같다고 묘사한 토마스 아퀴나스의 비유에도 이러한 역동적인 신 개념이 들어 있지요. (158)

 

존재의 바다와퍼텐셜

존재의 장은 만물의 궁극적 근거로서 우주까지 포함한 모든 존재물이 여기서 생겨나고, 여기서 존재하며, 여기서 소멸하는 무한한 신적 근원을 뜻합니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사용한 "무한하고 무규정적 실체의 거대한 바다"라는 비유에 해당하는 셈이지요. (159)

 

현대의 양자물리학자들도 우리가 말하는 존재의 장과 유사한 이야기를 퍼텐셜이라는 용어를 통해서 하지요. 예컨대 독일 뮌헨의 막스 플랑크 연구소 소장 한스 페터 뒤르는 고전물리학자들과 달리 세계가 원자와 같은 입자들이 모여서 구성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는 마치 플로티노스의 일자처럼 아직 나뉘지 않은 '온전한 무엇'이 먼저 있었고, 그것이 분화해서 하위구조를 만들어냄으로써 세계가 구성되었다고 믿지요. 그리고 그 '온전한 무엇'의 바탕이 되는 소립자들은 물질과는 완전히 다른 성질을 갖고 있으므로 물질이라기보다는 ''이라고 부르는 것이 정확하다고도 했습니다. 비물질적인 '소립자의 장'에 의해 우주가 탄생했고 지금도 유지되며, 매 순간 새로워진다는 것이지요. 신학자 판넨베르크와 나눈 대화에서 뒤르는 스스로 물질이 되는 능력을 가져 우주 전체를 구성하는 이 비물질적 장을 양자물리학자들은 '퍼텐셜'이라고 부르고 신학자들은 '신의 숨결'이라 부른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신학자가 '신의 숨결' 이라고 일컫는 것에는 자연과학을 기술할 때 볼 수 있는 과정과 동일한 기본구조가 내포되어 있어요. 예를 들어, 양자 물리학은 '비물질적인 기본구조'를 상정합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엔, 그것이 비물질적이라고는 하지만 물질에 반대되는 무엇을 의미하지는 않아요. 우주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실은 '신의 숨결'이니까요. 그렇다면 물질적인 것이란 '신의 숨결'이 응결되면서 아직 생명을 갖추지 못한 '물질'이 형성된 것을 가리키는 말이 아닐까요? 아무튼 중요한 것은 바로 그 '숨결'입니다. (159~160)

→ 현대 과학과 신학이 결코 괴리되지 않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데이비드 봄은 퍼텐셜을 접혀 있는 질서라고 한 바 있다. 무엇보다 신의 숨결이 응결되면서 물질이 형성된다는 표현은 아름답기까지 하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영'은 물질에 부단하고도 압도적으로 작용하지만 철저히 비물질적이지요. 영 그 자신은 전혀 물질이 아니고 물질로부터 어떤 작용도 받지 않으며, 스스로 움직이는 신적 원리이자 의지입니다. 따라서 똑같이 '프네우마' 라는 용어를 사용하더라도 스토아 철학과 성서가, 또는 물리학자들과 신학자들이 같은 내용을 말하고 있는 건 아니지요. 엄밀히 말하자면 전혀 다른 대상에 대해 같은 용어를 사용할 뿐입니다. 그래서 자연과학과 신학 사이의 오해 없는 대화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전문용어 들의 조율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162)

 

사실 양자물리학자들이 말하는 퍼텐셜은 '존재의 장'보다는 오히려 아우구스티누스가 '고백록'에서 언급한 '형상 없는 땅'에 가깝다고 할 수 있어요.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신은 만물을 무에서 창조했지만 무에서 직접 이끌어 낸 것은 아닙니다. 우선, 무에 가까운 어떤 원물질을 만들어 내고 그것으로부터 다시 만물을 창조했다는 거에요. (중략) 무와 물질의 중간에 있는 이 무형의 원물질이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하는 '형상 없는 땅'이고 물리학자들이 말하는 퍼텐셜이라고 할 수 있지요. (163) → 앞서 플로티노스가 언급했던 정신과 물질의 매개체인 영혼이 이 영역에 있지 않을까?

 

최고의 본질()이 어떤 시간과 장소에도 항상 존재하면서, 동시에 어떤 시간과 장소 안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다시 말해 그것이 모든 시공 안에 존재하면서 어떤 시공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면, 제기된 반론들을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

- 안셀무스 (164) → 신은 우리의 언어, 인식 속에서는 역설로 존재할 수 밖에 없다. (칼럼 에 활용)

 

누군가가 퍼텐셜이 곧 신이라고 한다면, 그는 스피노자와 아인슈타인이 믿는 신, 곧 우주와 하나인 범신론에서의 신을 말하는 것일지언정,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인 야훼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지요. 야훼는 세계에 항상 내재하지만, 동시에 세계를 언제나 초월합니다. 같은 말을 안셀무스는 신이 모든 것을 "관통하며 포괄한다" 라고 표현했는데, 참 탁월한 묘사입니다. 내재하면서 동시에 초월한다는 뜻이니까요. 이는 마치 물 위에 뜬 물방울들을 물이 포용하듯 안팎으로 침투해서 포괄한다는 말입니다. 이를 안셀무스는 '유지하고, 뛰어넘고, 감싸 안고, 관통한다" 고도 묘사했어요. 요컨데 퇴고의 본질은 모든 것 안에, 모든 것을 통해 있고, 모든 것은 최고의 본질로부터, 그것을 통해, 것 안에 있다" 는 겁니다. 이런 사유를 바탕으로 신이 모든 장소에 있다고 하기보다는 신이 '어디에나' 있다고 말해야 한다고도 했습니다. 또한 신이 모든 시간 안에 있다고 하기보다는 '항상' 있다고 표현해야 한다고도 주장했지요. (165) → 아! 저자는 여기서 내가 이야기 하고자 했던 부분을 이야기 하는 구나! 나는 내면에 접혀진 질서, 내면의 우주가 곧 신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저자는 이런 나의 생각을 범신론이라고 정확하게 지적한다. "모든 장소에 신이 있다기 보다 어디에나 신이 있다"라는 표현. 내가 생각하는 범위를 초월한 표현이다. 또한 "관통하여 포괄한다" 역시나 신의 존재는 모순과 역설, 즉 우리의 인식 밖인 언외에 있음을 짐작하게 한다.

 

신의 모습 상상하기

신은 무한하고, 인간은 무한한 어떤 것을 상상하거나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정신이 가진 능력을 현저히 벗어납니다. 오죽하면 칼 바르트가 "모든 인간적인 것과 무한한 질적 차이로 대립하고 있으며 우리가 신이라고 부르고 알고 체험하고 경배하는 것과 결코 일치하지 않는" 이라고 표현했겠습니까! 그래서 신에 대한 모든 상상, 모든 형상화, 모든 규정과 언급은 사실상 부질없을 뿐 아니라 매우 위험한 일이기도 합니다. (166)

 

요한네스와 토마스 아퀴나스가 '자체 안에 전체를 내포하며 무한하고 무규정적인 실체의 커다란 바다'라고 기록한 표현을 빌려 '존재의 장'이라는 개념을 바탕으로 대강 이렇게 상상해 보면 어떨까요? 시작도 끝도 없는 어떤 무한한 바다가 있습니다. 그 바다는 가만있지 않고 끊임없이 역동적으로 출렁이는데, 그 안에 일정한 법칙이 있어 그 법칙에 의해 무수한 물방울들이 생겼다가 없어지지요. 게다가 무작정 출렁이는 것만은 아니고, 거스를 수 없이 강력하고 지혜로우며 거룩한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출렁입니다. 따라서 그 안의 모든 물방울은 잠시 존재할 뿐인데도 그 동안 오직 그 바다의 뜻과 의지에 의해 이끌려 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 무한하고 영원하며, 강력하고 지혜로우며 거룩한 존재의 바다가 바로 신 '야훼'이지요. 그리고 그에 의해, 그 안에서 생겼다가 잠시 후 없어지는 물방울 들이 곧 존재물 들입니다. 야고보가 "너희는 잠깐 보이다 없어지는 안개니라" 라고 묘사한 인간은 물론이고 광활한 우주마저도 이 바다에 잠시 생겼다 없어지는 물방울 하나에 불과하지요. (168~169) → 맨 인 블랙이라는 영화에서 우리 태양계가 속한 안드로메다 우주가 일개 고양이의 목에 달린 목걸이 속에 존재하는 장면이 나온다. 또한 마지막 장면에 온 우주를 담은 구슬로 신으로 추정되는 존재들이 구슬치기 하는 장면이 나온다. 결국 여기에서 바다의 비유를 통해 독자를 압도하면서까지 저자가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은 야고보가 이야기 한 바 대로 우리는 물방울 하나에도 못 미치니 신에 대해 함부로 나대며 까불지 말라는 메시지로 다가온다.

 

곧 모든 것을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보듯이 온전하게 알게 되는 그때가 오기 전까지는 '겨우 비유를 통해서'가 아니라 '오직 비유를 통해서' 신에 대해 상상하고 말할 수 밖에 없지요. (169)

 

'바다'라는 비유를 통해서, 우선 신이 암암리에 사람처럼 생겼으리라는 끈질긴 망상을 떨쳐 버릴 수 있습니다. 또한 이 바다가 우주마저 포괄하고 초월할 만큼 무한하다는 점에서 '신은 없는 곳이 없다'는 오랜 주장도 큰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지요. 동시에, 신이 유일하다는 교리를 다른 종교에 대한 배타적 선포가 아니라, 존재의 바다가 무한히 광대해서 존재하는 모든 것은 다 포괄하며 그의 바깥에는 존재하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의미로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나아가 그 바다가 그 자신은 무형이지만 모든 유형적 존재물이 생성하고 소멸하는 장이라는 점에서 형체가 없는 신이 만물의 창조주라는 교설을 이해할 수도 있지요. (171)

 

'물방울'의 비유를 통해 우리는 우주만물이 신에 의해 생겨나서 그 안에 존재하다가 그 안에서 사라지는 피조물이라는 교설이나, 신이 우리의 시작과 끝 그리고 머리카락 한 올까지 모두, 늘 헤아린다는 교훈 역시 자연스레 수긍할 수 있게 됩니다. 물방울이 어찌 바다를 벗어나서 거스를 수 있겠습니까? 사정이 그러하니, 신은 그 무엇도 거스를 수 없을 만큼 강할 뿐 아니라 동시에 한 없이 지혜롭고 거룩해서 만물을 오직 자신의 뜻과 의지로 이끌어 간다는 섭리의 교리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게 되지요. (171)

 

'존재의 바다'라는 이 비유는 또한 성부, 성자, 성령이 '나뉨 속에서 연합해' 있고, '분리되지 않는 하나이면서 동시에 구분되는 셋'이라는 신의 삼위일체 속성을 어려움 없이 이해하거나 설명할 수 있게 합니다. (172)

 

 

2장 신은 실제로 존재하는가?

신의 존재를 합리적으로 증명할 수 있나

<두 가지 질문>

신의 존재를 합리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가 : 논리적 타당성 → 대륙의 합리론

신의 존재를 경험적으로 검증할 수 있는가 : 지식의 건전성 → 영국의 경험론 (177)

 

인식론 : 무엇을, 어떻게, 또 얼마나 알 수 있는가 하는 이론 (178)

 

실존 : 실제로 존재함, 키에르케고르, 하이데거, 야스퍼스, 사르트르 같은 20세기 실존주의자들은 실존이라는 용어를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고 결단함으로써 의미있게 산다' 라는 특별한 의미로 간략하게 사용했습니다. (178)

 

하이데거의 '기획투사'란 자신의 '존재 가능성'을 향해 그 자신을 던진다는 의미 (178)

 

사르트르의 '앙가주망'은 역사적, 사회적 현실에 제 스스로를 잡아매는 것을 뜻합니다. 이로써만 인간은 무의미하고 권태로운 자신의 삶을 의미 있게 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178)

 

여기서 논의하고자 하는 '신은 실제로 존재하는가에 대한 물음은 신의 실존이 아닌 신의 현존을 의미함 (179)

 

안셀무스 : "이성적 증명을 포기하는 것은 태만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을 구호로 내세웠으며, 그가 이룬 신학적 업적 가운데 가장 알려진 것이 바로 우리가 지금부터 살펴보려는 '신의 존재 증명'이지요. (중략) 신을 "그 이상 큰 것을 생각할 수 없는 그 무엇"이라 정의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큰 것은 '가치적 크기'를 뜻하는 것이지요. (중략) 신을 "최고의 존재" 또는 "최고의 본질" 이라고 칭했지요. (중략) "그 이상 위대한 존재를 생각할 수 없는 존재" 또는 "그 이상 완전한 존재를 생각할 수 없는 존재" (중략) 그러므로 '그 이상 큰 것을 생각할 수 없는 그 무엇'은 진실로 존재하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실재가 바로 우리 주님이요, 하나님 당신입니다." (180~181)

 

가우닐로 : 그가 내놓은 비판의 핵심은 우리의 정신에 존재하는 관념이 무엇이든 실제로도 존재한다는 주장은 잘못이라는 겁니다. (중략) 만약 우리가 날개 달린 말인 페가수스나 아름다운 꼬리의 인어공주를 상상할 수 있다고 해서 그것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증거가 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182)

 

안셀무스 : () 개념은 일반 개념과는 그 본질이 다르다는, 이른바 '신 개념의 특수성'을 내세워 반박하지요. (중략) 가우닐로가 예로든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완전한 섬' '섬으로서 완정성'을 뜻하기에 이 완전성은 절대적 완전성이 아니라는 게 안셀무스의 생각입니다. 즉 그 어떤 것도 결핍되어서는 안 된다는 전제를 갖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그 현존은 필연적인 것이 아닌, 단지 우연적이라는 것이지요. 어떤 것의 현존이 우연적이라는 것은 그것이 현존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완전한 섬"은 현존할 수도 있고 현존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안셀무스가 "그 이상 큰 것을 생각할 수 없는 그 무엇"이라고 표현한 신 개념은 그 이상 완전한 존재를 생각할 수 없을 만큼 "가장 완전한 존재"를 의미하기 때문에 무엇 하나도 결핍될 수 없는 '절대적 완전성'을 갖고 있다는 것이지요. 즉 그러한 현존은 필연적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즉 신은 필연적으로 현존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지요. (183)

 

르네 데카르트 : '가장 완전한 존재'는 존재의 완전성인 현존을 '필연적으로' 소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의 현존이 그분의 본질로부터 분리될 수 없는 것처럼 명백하다" (184)

 

이마누엘 칸트 : '순수이성 비판'에서 안셀무스와 데카르트식의 신 증명을 "존재론적 증명"이라 이름 붙이고, 가우닐로의 논박을 더욱 세련되게 보강해서 데카르트의 주장을 반박했어요. 그의 반박은 두 단계로 수행되었습니다. (184)

 

① 첫 번째 단계는 '개념의 영역' '현존의 영역'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가장 완전한 존재'의 현존이 개념상 필연적이라 해도 실제적으로 필연적이지는 않다는 것이지요. 현존이란 사실의 문제이므로 경험으로 판단해야지, 사고로 증명할 문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내 생각 : 합리론과 경험론은 구분되어야 한다) 예컨대 "삼각형은 필연적으로 세 각을 갖지만, 그것은 개념적 필연성이기 때문에 그것에서 삼각형의 현존을 이끌어 낼 수 없다는 것"이지요. 마찬가지로 신의 완전성은 필연적이지만, 그것에서 신의 현존을 이끌어 낼 수는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칸트가 볼 때 존재론적 증명에는 이처럼 개념의 필연성을 뜻하는 '논리적 술어'와 현실에 정말로 존재하는 것을 뜻하는 '실재적 술어'에 대한 혼동이 들어 있습니다. (185)

 

② 두 번째 단계에서 칸트는 '신은 현존한다' 라는 명제는 이 명제를 부정한 모순명제가 모순을 포함하지 않기 때문에 논증만으로는 그것의 현존을 증명할 수 없다는 식으로 주장합니다. (중략) '삼각형은 세 각을 갖고 있다'라는 명제의 모순명제인 '삼각형은 세 각을 갖고 있지 않다'는 자체적으로 모순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삼각형이 실제로 세 각을 갖고 있는지 아닌지는 경험적으로 검증해보지 않고도 '' '거짓'을 판단할 수 있지요. 왜냐하면 삼각형이라는 주어 개념에 '세 각'이라는 술어 개념이 이미 포함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명제를 라이프니츠는 '이성적 진리', 흄은 '관념들의 관계에 관한 명제', 칸트는 '분석판단'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예컨대 '이 사과는 빨갛다' 라는 명제를 볼까요? 이 명제의 모순명제인 '이 사과는 빨갛지 않다' 라는 명제는 그 자체로는 모순을 포함하고 있지 않습니다. '사과'라는 주어 개념에 '빨갛다'라는 술어 개념이 포함되지 않기 때문이지요. 요컨대 그 사과는 녹색이거나 황색일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경험적으로 검증하지 않고는 "이 사과는 빨갛다" 라는 명제의 진위를 판단할 수 없지요. 이 같은 명제를 라이프니츠는 '사실적 진리', 흄은 '사실의 문제에 관한 명제', 칸트는 '종합판단'이라고 불렀지요. (185~186)

 

'신은 현존한다'라는 명제의 모순명제인 '신은 현존하지 않는다'가 그 자체로 모순을 포함하나요? 아니지요? 그러므로 이 명제는 분석판단 명제가 아니고 종합판단 명제입니다. 당연히 논증의 타당성만으로는 그 명제의 진위를 판단할 수 없고 경험을 통한 검증이 필요하다는 말이지요. 같은 말을 칸트는 이렇게 했습니다. "현실적 대상은 나의 개념 중에 분석적으로 포함되어 있지 않고, 나의 개념에 종합적으로 보태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어서 다음과 같이 재미있는 말도 덧붙였지요. "최고 존재자의 현존을 개념으로부터 증명하려는 그 유명한 존재론적 증명을 위한 모든 노고와 작업은 헛된 것이다. 인간이 순전한 이념들로부터 통찰을 더 늘리고자 해도 할 수 없는 것은, 상인이 그의 재산을 늘리기 위해 자기의 현금 잔고에 동그라미 몇 개 더 그려 넣어도 재산이 불어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187)

 

→ 어렵다. 참 어렵다. 그러나 마지막에 칸트의 상인의 재산 비유로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다. 즉 신의 현존은 종합판단 명제이며, 따라서 개념, 혹은 현존영역의 어느 한 쪽으로 증명할 수 없다. 다시 말해 명제의 진위 뿐만 아니라 경험을 통한 검증도 필요하다는 것이 칸트의 결론이다.

 

토마스 아퀴나스의다섯 가지 길

토마스 아퀴나스가 '신학대전'에 전개한 이른바 '다섯 가지 길'

<전개방식>

a) 세계에는 감각적으로 확인되는 일반적인 특성들이 있다.

b) 그런데 세계의 모든 일반적인 특성은 스스로 생겨날 수 없고 다른 어떤 것에 의해서만 생겨난다. 이 때문에 무한 소급해 가는 모든 원인의 궁극적 원인이 없다면 이러한 일반적인 특성을 가진 세계가 존재할 수 없다.

c) 그러므로 세계에는 궁극적인 원인이 존재한다. 그것을 우리는 신이라고 부른다. (188)

 

지상에서 시작해서 하늘까지 빈틈없이 연결된 존재의 대 연쇄!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로티노스를 통해 형성된 이 형이상학적 사다리가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의 중추지요. (189)

 

<우주론적 증명>

① 운동으로부터 모든 운동의 궁극적 근거로서 제일의 운동자인 신을 증명

② 결과의 원인인 능동인으로부터 모든 결과의 궁극적 원인으로서 제일의 능동인인 신을 증명

③ 우연과 필연으로부터 모든 우연적 존재의 궁극적 근거로서 필연적 존재인 신을 증명

 

<도덕론적 증명>

④ 사물의 성질이나 가치의 단계로부터 최고의 단계로서 신을 증명

 

<목적론적 증명>

⑤ 사물의 목적성으로부터 궁극적 설계자 또는 통치자로서 신을 증명 (189~190)

 

a) 세상에는 감각적으로 확인되는 모든 사물이 있다

b) 세상의 모든 사물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필연적으로 현존하는 '어떤 것'에 의해서가 아니면 현존하지 못한다.

c) 만일 자기 자신으로부터 필연적으로 현존하는 '어떤 것'이 없었다면 세상에는 어떤 것도 현존하지 못했을 것이며 지금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d) 그러므로 자기 자신으로부터 필연적으로 현존하는 '어떤 것'이 있다. 이를 모든 사람이 신이라고 한다. (190)

 

순수한 개념과 사고에 의해서만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 했던 안셀무스와는 달리 아퀴나스는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감각적이고 구체적인 사실로부터 신의 현존을 완벽하게 이끌어 냅니다. (191) → 즉 안셀무스의 개념적 존재 증명의 한계를 토마스 아퀴나스가 나서서 경험적으로 증명했다.

 

비판의 핵심은 토마스 아퀴나스가 감각적 경험에서 논증을 시작한 것은 옳지만 오직 사고만으로 '우연적 존재'의 현존에서 '필연적 존재'의 현존을 이끌어 내는 추론 과정은 결정적 문제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191)

 

칸트에 의하면 인간의 이성은 경험세계에만 적용할 수 있도록 한계 지어졌어요. 그럼에도 이성이 자신의 추론을 경험할 수 없는 무한한 대상에까지 확장해 나가면, "이성은 하나의 길(경험적인 길)에서든 또 다른 길(선험적인 길)에서든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하고, 단지 사변의 힘으로 감성세계를 초월하려고 그 날개를 펴지만 헛수고에 그칠 뿐"이며 필연코 오류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191)

 

모든 무한소급은 논리적으로만 가능하지 존재론적으로는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 칸트가 제시한 원칙이지요. '필연적'이라는 용어는 '논리적 용어'일 뿐 '존재론적 용어'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경험으로 증명되지 않는 대상에 이 용어를 적용시키는 것은 분수에 넘치는 일이지요. 이를 칸트는 우주론적 증명에는 '변증법적 월권의 그물망이 감추어져' 있다고 표현했습니다. (191)

 

같은 관점에서 칸트는 신의 현존을 증명하기 위해 토마스 아퀴나스가 제안한 '다섯 가지 길'이 모두 타당하지 않다고 단정했다. 그에 의하면 "물리신학적(목적론적) 증명의 기초에는 우주론적 증명이 있지만, 우주론적 증명의 기초에는 존재론적 증명이 놓여 있다" 이 말은 곧 칸트에게 유의미한 논증은 존재론적 증명뿐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그 역시 부당하다는 것이 이미 증명되었기 때문이다. (191)

 

그러니 말해 보라. 비논리적 존재들이 우리를 속인다고 믿는가?

그대가 보는 사다리가 무너졌다고 믿는가?

감각이 저 높은 곳으로부터 조명되고 있는 그대여!

빛을 향해 서서히 한 계단식 올라가는

피조물의 사다리가 인간에게서 멈추었다고 생각하는가?

- 빅토르 위고 '정관시집' (193)

 

페일리의 시계를 망가뜨린 사람들

a) 세상의 모든 자연적 사물은 그것을 존재하게 한 각각의 목적 때문에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감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b) 그런데 자신의 목적을 인식하지 못하는 사물들은 그것을 인식하고 깨달은 어떤 존재에 의해 통치되지 않으면 각각의 목적에 도달할 수 없다. 이것은 마치 화살이 사수에 의해 조정되지 않으면 과녁에 도달할 수 없는 것과 같다.

c) 그러므로 모든 자연적 사물이 각각의 목적에 도달할 수 있도록 질서 지어주는 어떤 지적 통치자가 존재한다. 그 존재를 우리가 신이라고 한다. (195)

 

<페일리의 시계 유추 논증>

a) 시계는 우연의 산물이 아니고 어떤 지적 설계자에 의해 특별한 목적을 갖고 만들어졌다.

b) 세계는 시계와 유사하다.

c) 그러므로 세계는 어떤 지적 설계자에 의해 특별한 목적을 갖고 만들어졌다. 그 설계자가 신이다.

 

오늘날 흔히 '지적 설계론'이라고 부르는 이 주장의 현대적 표현은 "오존층의 두께가 생물 보호에 어쩌면 그리 적합한가? 이는 오직 신의 설계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식의 주장들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196)

 

<물리신학적 증명, 목적론적 증명에 대한 비판>

① 영국의 경험론자 데이비드 흄은 '에피쿠로스의 가설'을 예로 들면서 어떤 것이 질서를 가지고 있다 해서 반드시 그것이 설계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는 회의론을 제기 했습니다. (중략) 흄은 우연에 의해서도 세계가 형성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으므로 단순히 추론에 의해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일은 부질없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중략) 칸트 역시 목적론적 논증은 세계 내에 존재하는 의도와 질서에 대한 경험에 기초하지만, 그 경험은 우리에게 궁극적 목적으로 필연적 존재()의 현존을 증명하지 못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따라서 이 증명은 기껏해야 자기가 가공한 재료의 적합 여부에 의해 항상 많은 제한을 받는 세계 건축가를 나타낼 뿐, 그 이념에서 일체가 종속하는 세계 창조자를 이끌어낼 수는 없다고 했다. (중략) 지성의 모든 종합적 원칙은 내재적으로만 사용되는데, 최고 존재()의 인식을 위해서는 이러한 원칙의 초월적 사용이 요구된다. 하지만 우리의 지성은 이러한 초월적 사용을 위한 아무런 장비도 갖추고 있지 못하다. (198)

 

② 존 스튜어트 밀은 페일리의 논증의 문제점을 논리학적으로 지적했는데요, 유비추론은 전제들이 참인 경우에도 결론이 '확률적 참' 또는 '기능적 참'일 뿐 '필연적 참'이라는 보장은 없다는 것이었지요. 유비추론이란 사물이나 사건의 유사성을 근거로 결론을 이끌어 내는 논증입니다. (은유, 비유, 메타포) 이러한 추론은 비교하는 대상과의 유사성이 높을수록 논거가 강해지고 낮을수록 논거가 약해집니다. 밀은 페일리의 논증이 유사성이 낮고 논거가 약하다고 주장했지요. (199)

 

※ 페일리의 논증이 인기를 얻었던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두 가지는 있습니다.

1) 먼저 이 논증이 고대 수사학에서 흔히 '예증법' 이라고 부르는 유비추론의 형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도 '수사학'에서 자신이 개발한 삼단논법보다 예증법이 훨씬 설득력 있는 논증 방법이라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그래서 동서고금의 성현들은 모두들 예증법을 즐겨 사용한 것이고, 사실상 그 분야의 천재들이었습니다. (200)

 

적절한 예 하나가 곧이곧대로 들리지 않는 말을 추호도 의심할 수 없는 교훈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바로 이것이 수사학적 논증법으로서 예증법이 지닌 힘이자 페일리의 논증이 가진 설득력의 비결이지요. (201)

 

2) '페일리의 시계 유추'를 비판한 흄, 칸트, 밀 같은 철학자들은 그에 대한 반론을 제기했을 뿐 페일리가 설명한 자연의 복잡성과 합목적성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줄 만한 대안을 내놓지는 못했던 것이지요.

 

③ 가장 결정적인 반론은 찰스 다윈의 진화론에 의해 제기되었습니다. 진화론은 자연의 복잡성과 합목적성을 당시 서구의 지식인들이 선호했던 귀납법을 사용해서 경험적, 실증적으로 설명해 주었지요. 예를 들어 새의 날개, 물고기의 지느러미, 인간의 눈과 심장 등이 그렇게 복잡하고 정밀하며 목적에 합당하게 만들어진 것은, 진화가 동식물을 막론하고 생존경쟁을 하는 가운데서 환경에 더 유리한 조건을 갖춘 종만 살아 남는 방향으로 '충분히 오랫동안' 진행되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중략) 오존층이 누군가에 의해 생물들에게 적합한 두께로 설계된 것이 아니라, 오존층의 두께에 적응한 생물들만이 살아남은 것이라고! (202) → 처음엔 페일리의 논증에 탄성을 자아냈지만 곧 그 탄성은 잦아들고 다윈의 반론에 환호성을 질렀다.

 

다윈은 토머스 헉슬리를 따라 신에 대해서는 어떤 것도 알 수 없다는 '불가지론적' 입장을 견지했지요. 진화론은 기독교를 향해 '자연을 위한 신의 개입은 처음부터 아예 필요가 없었다.'는 결정적 메시지를 던졌습니다. 다윈의 진화론에 의하면 자연의 창조주는 자연선택이라는 기계적 메커니즘이고, 그것에는 아무런 예정된 목적도 없기 때문이지요. (203)

 

리처드 도킨스는 '눈먼 시계공'에서 "자연선택은 마음도, 마음의 눈도 갖고 있지 않으며 미래를 내다보며 계획하지 않는다. 전망을 갖고 있지 않으며 통찰력도 없고 전혀 앞을 보지 못한다" 라고 주장했지요. (204)

 

당시 정통적 신학자들이나 신실한 성직자들은 차라리 다윈의 진화론은 받아들일 수 있을지라도, 페일리식의 자연신학은 허용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자연신학은 인간의 이성을 신으로 섬기는 이신교, 인류를 숭배하는 인류교와 같이 기독교를 인간중심적이고 과학적인 종교로 개조하려는 이단들의 온상이었기 때문이지요. 기독교는 언제나 외부에 있는 다른 종교들뿐 아니라 내부에 존재하는 이단들과 싸워 왔는데, 모든 일에서 그렇듯 '안에 있는 적이 더 위험한 법'입니다. (204)

 

근래에 지적 설계론을 두고 과학자들과 기독교 지식인 들이 벌이는 논쟁은 적어도 다음 두 가지 관점에서 문제가 있습니다.

 

① 페일리처럼, 또는 지적 설계론을 주장하는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처럼, 자연의 복잡성과 합목적성으로부터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자연신학적 주장들에 대해서는 기독교가 예나 지금이나 적극 반대한다는 것입니다. (중략) 페일리의 논증을 상대로 기독교를 공격하는 과학자들은 논리학에서 말하는 '허수아비 논증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사실도 말해줍니다. 허수아비 논증이란 상대방의 주장을 쉽게 공격할 수 있도록 단순화하거나 왜곡해서 그것을 허물어뜨리는 형식의 논증인데, 그 내용을 불문하고 논리적 오류에 속하지요. 도킨스가 페일리의 논증 내지 지적 설계론이 마치 기독교가 지지하는 정통 이론인 것처럼 '허수아비'를 만들어 세운 다음, 그것을 공격하는 것도 마찬가지라는 이야기입니다. (206)

 

② 다른 하나는 다윈의 진화론이 반드시 무신론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닐 뿐 아니라, 전통적 기독교 신학은 '신은 진화라는 메커니즘을 통해 창조한다'고 주장할 수 있는 이론적 근거와 여지를 이미 오래 전부터 갖고 있다는 것이지요. (206)

 

→ 즉 기독교는 지적 설계론을 문제의 가운데에 두고 있지도 않을 뿐더러 다윈의 진화론을 대극적 관점에서 배격하지 않고 있다. 다시 말해 지적 설계론과 진화론을 들고 이루어지는 기독교 비판은 잘못된 과녁에 화살을 쏜 것과 같다는 의미다.

 

마야의 찢지 못하는 베일

신의 존재증명에 관한 안셀무스와 토마스 아퀴나스의 방법론적 차이점과 그 의미입니다. (208)

 

① 안셀무스

개념에서 출발해서 결론을 이끌어 내는 논증을 전개

플라톤, 플로티노스, 아우구스티누스로 이어진 존재론의 영향

대륙의 합리론으로 발전

 

② 토마스 아퀴나스

감각적 경험에서 시작해서 결론을 이끌어 내는 논증을 전개

아리스토텔레스의 존재론을 적극 수용

영국의 경험론으로 발전 (208)

 

플라톤에게 진리는 우리가 정신으로만 파악할 수 있는 '이데아에 대한 지식'이고,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우리의 감각을 통해 파악할 수 있는 '에이도스에 대한 지식'입니다. (210)

 

플라톤은 '철학을 하는 신학자'였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을 하는 과학자'였던 겁니다. 위대한 두 거인의 이러한 학문적 취향이 그들 이후의 서양 학문을 크게 두 줄기로 갈라놓았지요. (210) → 이러한 견지에서 저자는 아리스토텔레스 보다는 플라톤으로부터 더 많은 영향을 받은 것처럼 보이며, 뒤에 이어지는 전개 또한 약간은 플라톤의 관점으로 편향된 주장을 펼치고 있다.

 

오랜 세월을 두고 아리스토텔레스의 후손들은 플라톤의 후예들을 반박하고, 플라톤의 후예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후손들에게 재 반박을 가해 왔습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2000년은 족히 이어지던 해묵은 논쟁에 사실상 마침표를 찍은 이가 18세기 독일에 혜성처럼 나타났지요. 당신도 알다시피 대륙의 합리론과 영국의 경험론을 종합한 이마누엘 칸트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 (212)

 

칸트의 '순수이성 비판'에는 이런 구절이 있어요. "감성이 없으면 어떠한 대상도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을 것이며, 오성이 없으면 어떠한 대상도 사유되지 않을 것이다. 내용 없는 사고는 공허하며,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이다. 그러므로 개념을 감성화하는 일(즉 개념에 대해 그 대상을 직관에 부여하는 것)은 직관을 오성화 하는 일(즉 직관을 개념 아래 넣는 것)과 마찬가지로 필요하다. (중략) 이 둘의 종합에 의해서만 인식이 나올 수 있다." (212) → 저자는 칸트의 이러한 경구에 모티프를 얻어 이 책의 결론을 도출한다. 즉 공존할 수 없는 것의 통합을 이끌어 내어 큰 이야기와 작은 이야기를 함께 가지고 가자고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의 이야기와 연관해서 이 말이 뜻하는 바는 매우 간단하고 무척 허무합니다. 요컨대 신의 현존에 대한 논증은 그것이 어떤 것이든 간에 일종의 오류라는 것이지요! 신은 우리의 감성으로 파악되지 않아서 그에 대한 모든 인식은 단지 공허한, '내용 없는 사고'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칸트는 이 같은 '내용 없는 사고' 들이 떠도는 영역을 '폭풍이 이는 광대무변한 바다' 또는 '가상의 본거지'라고 불렀습니다. '가상'의 사전적 의미는 '주관적으로 실재하는 것처럼 보이나 객관적으로는 존재하는 않는 거짓 현상'이지요. (212)

 

감성을 통해 경험되는 대상이 현상체이고, 감성의 한계를 벗어나기 때문에 경험할 수 없는 대상이 곧 가상체라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영혼이나 신에 대한 사고가 가상입니다. 이런 대상도 사고될 수는 있고 또 사고되어야 하지만 인식될 수는 없지요. 왜냐하면 경험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얼핏 평범한 이야기 같지만, 이로써 칸트가 신학을 포함한 모든 종류의 형이상학에 준 타격은 치명적이었어요. (213)

 

윌 듀랜트는 자신의 친근하고 재치 넘치는 책 '철학 이야기'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형이상학은 사상사를 통해 실재의 궁극적 본성을 찾아내려는 시도였으나, 이제 사람들은 가장 존경할 만한 권위에 입각해서 실재는 결코 경험할 수 없다는 것, 실재는 생각할 수는 있으나 인식할 수 없는 가상체라는 것, 아무리 정밀한 인간지성이라도 결코 현상을 넘어서지 못하며, 마야의 베일을 찢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213)

 

마야의 찢지 못하는 베일, 바로 그 뒤에서 우리의 이성이 저지르는 온갖 오류가 생겨나지요. 칸트에 의하면, 인간의 이성은 무한히 벋어나갈 수 있지만 감성이라는 섬 안에 있어야만 안전합니다. 한마디로 감성의 한계가 곧 이성의 한계지요! 감성의 한계를 벗어난 모든 사고는 가상이고 오류의 원천입니다. 따라서 그러한 사고들은 '진리의 땅'에서 발붙이지 못하고 내쫓겨, 폭풍이 이는 험한 바다를 떠돌게 되지요. (213)

 

논증만으로 신의 현존을 증명하려는 일체의 행위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이를 칸트는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이성을 신학에 단지 사변적으로만 사용하려는 모든 시도는 전혀 무익하며 내적 성질에 비추어 보아도 아주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그 반면에 이성의 자연적 사용의 원칙들은 신학에는 전혀 이르지 못한다. 따라서 만약 사람들이 도덕법칙을 기초에 두지 않거나 또는 실마리로 잡지 않는다면, 이성의 신학은 도무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요약해, 신의 존재증명을 위한 모든 종류의 논증이 부질없다는 이야기지요. (215)

 

칸트가 신의 존재증명이라는 유구하고 무익한 오류들로부터 신학을 지켜준 것은 엄연한 사실이고 또한 높이 평가할 만한 일이지요. 이로써 신학은 20세기에 칼 바르트가 갔던 길, 다시 말해 신의 현존에 대한 합리적 증명이나 이해보다는 '살아 계신 하나님'에 대한 체험과 신앙을 우선하는 길로 나아가는 이론적 발판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결코 칸트 자신이 의도했던 것은 아니지만, 그가 이른바 '진리의 땅'에서 신에 관한 명제와 논증을 '폭풍이 이는 험한 바다로' 내쫓아 버림으로써 근대신학이 적어도 이 부분에서만은 철학의 망령에서 벗어나 종교적 성격을 회복하기 시작했던 겁니다. (217) → 사실 처음 칸트로 인해 신의 존재증명이 무익하다는 결론을 보고 기독교의 비판이 될 것이라 여겼는데, 오히려 그 반대였다. , 철학과 과학의 언저리에서 머물던 신의 존재에 관한 일이 칸트라는 걸출한 인물을 통해 다시 종교의 세계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이구나.

 

"내용 없는 사고는 공허하며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이다" 라는 말을 통해 칸트는 이성을 감성의 테두리에 가두었습니다. 그 이후 근대 학문에서는 중세에 비해 경험의 중요성이 현저하게 강조되어 진리라는 개념이 새롭게 정립되었지요. 현대 논리학의 용어를 사용해서 표현하자면, 진리는 타당할 뿐 아니라 건전해야 한다는 것인데, 타당하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모순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고 건전하다는 것은 경험적으로 검증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물론 이 새로운 규범은 신의 존재와 법칙을 찾는 신학보다는 자연에서 그것들을 찾는 자연과학에서 더욱 강하게 요구되었어요. 과거의 자연과학과는 달리 현대과학이 찾는 대상의 존재와 법칙은 신의 그것에 못지 않게 형이상학적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현대 천체물리학과 양자물리학은 특히 그렇지요. (218)

 

이 세 사람은 모두 이론적으로 증명되고 심리적으로 확신하지만 경험적으로 검증할 길이 없는 아름다운 생각들을 각자의 가슴에 품고 있었던 것이지요. (218) → 앞서 신의 숨결이라 표현되었던 부분이며, 퍼텐셜이라 표현되었던 것이다. 지금까지의 이야기와 다르게 이 문구는 따뜻한 시처럼 다가온다.

 

신의 존재를 경험적으로 검증할 수 있나

'신에 대한 경험' 또는 '종교적 경험'이란 가능한가에 대한 학자들의 대답은 단연코 '그렇다!' 입니다. 종교적 경험이란 본디 모든 종교의 근원이지요. (220)

 

신에 대한 그리스인들의 주된 태도가 사유였다면, 히브리 인들의 태도는 경험이었지요. 신에 대한 지식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히브리 인들에게 신의 현존에 대한 지식을 갖는다는 건 논증을 통해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신의 행위를 경험하는 것이며, 동시에 그와 인격적 관계를 맺는 것이었어요. 기독교에서도 신에 대한 모든 지식은 인간이 철학과 같은 '초등학문'을 통해서는 얻을 수 없고 오직 신과 인간 사이의 쌍방적 인격관계를 통해 파악되는 것이라는 생각이 처음부터 강력했지요. (220)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이 아신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 노릇 하려 하느냐"

- 사도 바울 (221)

 

"타오르는 것은 아는 것 이상의 그 무엇이다"

- 성 베르나르두스 (221)

 

"느낌이 종교의 심층적 요소다. (중략) 철학적, 신학적 공식은 하나의 교재를 다른 언어로 번역하는 것처럼 이차적 산물이다"

- 윌리엄 제임스 (221)

 

종교적 경험이 종교의 가장 중요한 요소이고, 진술이나 추론, 비판, 반성 같은 지적 활동의 산물인 철학적, 신학적 이론은 부수적 요소라는 말이지요. 요컨대 종교적 경험은 다양하고 복잡한 종교 현상이 생겨나게 하고 종교의 생명력을 유지시키는 '살아 있는 샘물'인 것입니다. (221)

 

① 종교적 체험의 신비적 형태

신비적 형태의 종교적 경험은 보통 어떤 종교적 내용이나 대상이 물질적 세상을 잠시 잊게 함으로써 인식 전체를 채워주는 의식 상태를 체험하게 하는 것을 말하지요. 개인적으로는 환상, 마음의 소리, 괴이한 감정, 신비한 황홀경 속에서 초월적 대상과의 만남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고, 공적으로는 기적과 같은 매우 특별한 사건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224)

 

'신학대전'은 중세에 쓰인 그 어떤 저술보다도 선명하고 정교한 논리적 구조물로서 마치 해맑은 수정 덩어리들을 지상에서 하늘까지 쌓아 올린 거대한 성전과 같은 느낌이지요. 그랬기에 그가 신비적 형태의 종교적 경험을 했으리라고 생각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225)

 

토마스 아퀴나스는 성 니콜라스 성당에서 축하 미사를 집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미사 중간 갑자기 어떤 것에 의해 이루 말할 수 없이 큰 충격을 받았지요. 그는 무엇인가를 보고 들었는데 그것이 그에게 심히 영향을 미쳤고 그를 크게 변화시켰습니다. (중략) "레기날드, 난 할 수가 없네. 내가 본 것과 내게 계시된 것에 비교해 볼 때 내가 쓴 모든 것은 지푸라기처럼 여겨지네." (일종의 회심) (226) → 스승의 저서 '마흔 세 살에 다시 시작하다'에서 이 부분이 언급된 바 있다.

 

② 종교적 체험의 일상적 형태

종교적 경험의 일상적 형태란 어떤 신비적 체험이 아니라 예배와 기도 같은 일상적 종교생활에서 종교적 깊이와 생명을 불어넣어 주는 성스러운 경험을 말합니다. 영국의 종교철학자 윌리엄 템플은 이것을 "종교적 인간의 총체적 경험" 또는 "종교적으로 삶을 경험하는 형태" 라고 표현했지요. 설명하자면, 종교적 경험의 일상적 형태란 인간이 삶의 모든 것을 '신과 연관해서' 살펴보고, 삶의 모든 관계와 책임의 영역에서 '신에게 대응하는' 태도를 말하는 겁니다. 이것은 일종의 사고의 틀이고 삶의 태도예요. 미국의 과학사학자 토머스 쿤이 정의한 '패러다임'이라고도 할 수 있고요. (227)

 

쿤에 의하면, 패러다임이란 본디 그 자체가 '신념' '가치체계'이자 동시에 '문제 해결 방법'입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패러다임과 이를 통해 얻은 경험이 구분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중략) '그렇게 생각하니 그렇게 보이고, 그렇게 보이니 그렇게 생각한다'는 겁니다. (227)

 

우리가 '무엇을 보는(또는 경험하는) '이 아니라 '무엇을 무엇으로 본다(또는 경험한다)는 것'을 말해 주지요. 결국 우리의 인식은 일종의 해석인 것입니다. (228)

 

등고선 지도를 보면서 학생은 종이 위에 그어진 선들을 보지만, 지도 제작자는 지형에 관한 그림을 본다. 거품상자의 사진을 놓고 학생은 혼란스럽게 끊어진 선을 보지만, 물리학자는 낯익은 원자핵 내부의 사건 기록을 읽어 낸다. 그러한 시각적 변형을 숱하게 거친 다음에야 학생은 과학자 세계의 일원이 되어 과학자가 보는 것을 보고 과학자가 반응하듯이 반응하게 된다.

- 토머스 쿤 (228)

 

'신의 현존을 경험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결국 당신이 어떤 패러다임을 가졌느냐에 달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230)

 

"그리스도가 나를 구원했다는 것을 내가 명확히 아는데 그가 존재하지 않을 수 있는가?" 라는, 철학자 키에르케고르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기독교적 패러다임을 가진 사람에게 신의 존재는 이미 '증명의 문제'가 아닌 것이지요. (230) → 결국 신의 현존에 대한 경험론적 증명은 개인의 신비체험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것인가? 내가 어느 날 새벽에 한 내면의 우주를 목격한 일, 혹은 무당의 접신 체험은 어떻게 이야기 할 것인가? 기독교적이지 않은 신비체험에 대해서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사실 그들이 그런 논증을 펼친 것은 그걸 통해서 신의 현존을 '확인'하려는 목적이라기보다는 신의 현존을 신앙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는 신도들의 이성을 '설득'하려는 의도로 행해졌다고 보아야 합니다. (230)

 

메타노이아-신비적 형태에서 일상적 형태로

종교적 경험에 관해 우리가 간직해야 할 교훈은 그것의 '신비적 형태' '일상적 형태'로 이어질 수 있으며, 또 이어져야 한다는 것이지요. 즉 우리는 '아주 인상적이고 기억되는 사건' 들을 통해 신비적 형태의 종교경험을 하게 되는데, 이러한 경험이 삶 전체에 새로운 의미를 던져주는 '의미의 중심점'이자 '삶의 전환점'이 되어 '종교적 경험의 일상적 형태'로 나타나야 한다는 말입니다. 쿤의 용어로 말하자면 '패러다임의 전환'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에 대응하는 신약성서의 용어가 '메타노이아(metanoia)'입니다. 어의적으로는 '나중에 생각을 바꿈', '달리 생각함', '정신적 가치지향을 변화시킴'이라는 뜻을 가진 명사지만, 기독교 용어로는 이전의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의미에서 '회개' '회심'이라고 번역하지요. (232) → 여기에서도 '메타노이아'라는 말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구나! 비단 종교적 체험뿐만 아니라 우리는 삶에서 크게 한 생각을 바꾸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변화를 돕고자 하는 일이 내가 업으로 삼고자 하는 것이기도 하다.

 

회심이란 물론 쉬운 일이 아니지요. 쿤도 패러다임 전환을 '종교적 개종' 또는 '정치적 혁명'에 비유했을 정도입니다. (232)

 

진정한 회심은 인간으로 인해 수없이 진노한 존재, 인간을 어느 때나 정당하게 멸할 수 있는 보편적 존재 앞에 인간이 스스로를 무로 만드는 데 있으며, 그 존재 없이는 인간이 아무것도 할 수 없고, 또한 그에게서 버림받음 외에는 아무것도 받을 수 없음을 인정하는 데 있다. (233)

 

'일상적 형태'로 이어지지 못한 종교적 경험의 '신비적 형태'는 여타 종류의 환상이나 환각과 구분할 길이 없으며, 나아가 그 자체가 적어도 기독교 입장에서는 무의미 합니다. 그러나 '종교적 경험의 일상적 형태' 속에서는 개인의 삶에서 경험하는 개별적 사건뿐 아니라, 세계와 역사 안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경험 하나하나가 '신과의 만남' '신의 존재에 대한 실증적 경험'이 되는 겁니다. (233) → 사부님의 사상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부분이다. 단절을 통한 혁명이 일상에 정착되어야 한다. 하루에 녹여낼 수 없는 혁명과 변화는 진정한 변화가 아니다. 스승의 변화경영 사상과 내가 추구하고자 하는 '변화'라는 분야는 메타노이아와 정확히 같은 의미라 여겨진다.

 

어떤 종류의 신비적 경험을 한 후 그것이 전환점이 되어 그 사람의 삶이 기독교적으로 변하면 그는 분명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을 경험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게 아니면, 아닌 것이지요! (234)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 사도 바울 (234)

 

신이 모든 인간이 인정할 수 있도록

인간 앞에 나타난다는 생각은 옳지 않다.

그렇다고 진심으로 그를 찾는 사람들까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숨어 있다는 생각도 옳지 않다.

그는 그를 찾는 이들에게 그 자신을 온전히 드러내고

명확히 나타나길 원하시는 반면,

진심으로 피하는 사람들에게는 자신을 감추시길 원하기 때문이다.

그를 찾는 사람은 그를 알 수 있고,

찾지 않는 사람은 그를 알 수 없는 표시를 주었다.

<오직 보기를 원하는 자에게는 충분한 빛이 있고, 이와 반대되는 마음을 가진 자들에게는 충분한 어둠이 있다.>

- 파스칼 '팡세' (235)

 

 

3부 신은 창조주다

두 사람(성 아우구스티누스와 그의 어머니 모니카)은 세상의 감각적 쾌락이 아무리 크고 물질적 풍요가 더없이 좋을지라도 신이 '진리의 양식'을 먹이시는 저 영원한 생명에 비하면 말할 가치조차 없다는 것을 확인하며 기뻐했습니다. (239)

 

3장 창조론이 왜 《고백론》안에 있나

위대한 생애, 불멸의 학문

아우구스티누스는 철학과 종교, 이성과 신앙, 다시 말해 아테네와 예루살렘을 성공적으로 절충하고 통합한 사람. (248) → 그리스 철학과 히브리 종교를 통합한 자

 

회의주의가 '이성의 한계'를 드러냄으로써, 아우구스티누스 개인뿐 아니라 시대적으로도 기독교적 계시를 받아들일 수 있는 하나의 준비단계로 작용했다는 점입니다. (250)

 

아우구스티누스는 '진리라고 믿는 것을 바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이해하려고 안달이 난 그런 부류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252)

 

아우구스티누스는 "이성의 한계가 신앙을 필수불가결한 것으로 만든다" 라는 암브로시우스의 가르침을 따라 이성에 대한 신앙의 우월성을 평생 강조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암브로시우스가 그 말 바로 앞에 붙인 "신은 우리가 이성 없이 그분에 대한 신앙에 복종하기를 원치 않으신다" 라는 말을 따라 이성의 중요성도 죽을 때까지 잊지 않았어요. 사실 그가 기독교에 남긴 위대한 업적은 바로 계시를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게 도운 일이지요. (253)

 

신플라톤 주의는 오리게네스나 아우구스티누스 같은 초기 기독교 신학자들만이 아니라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이 같은 르네상스 시대의 과학자들에게도 피타고라스와 플라톤이 정립한 이성주의 세계관을 전하는 일을 훌륭하게 수행했습니다. 현대의 신학자 파울 틸리히는 아우구스티누스가 그리스적 이성주의를 내세워 동방의 이원론인 마니교를 극복한 것은 하나의 상징적 의미를 갖는 사건이라고 평가했습니다. 그 덕분에 현대의 자연과학, 수학, 테크놀로지가 발전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지요. (254)

 

아우구스티누스의 생애에서 삼십 대 초반은 마치 포도가 포도주로, 애벌레가 나비로 변하는 것과 같은 변혁의 시기였습니다. (254)

 

"주여, 언제까지 진노를 그치지 않으시렵니까? 원하옵건대 지난날에 저지른 죄를 기억하지 마시옵소서.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합니까? 내일입니까? 또 내일입니까? 왜 지금은 안 됩니까? 왜 바로 지금 이 시간에 나의 더러움을 벗어 버릴 수 없나요?" (256)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257)

 

아우구스티누스가 신앙을 위해 이성을, 신학을 위해 철학을 부단히 사용했다는 사실입니다. (260)

 

방대한 아우구스티누의 저술을 크게 세 단계로 분류 (261)

① 첫 번째 시기 : 마니교를 논박하며 주로 인식론과 신론을 정리

② 두 번째 시기 : 도나투스 분파 문제에 골몰하여 교회론과 성례전을 정리

③ 세 번째 시기 : 페라기우스주의자들과 싸우며 은총론과 예정론을 확립

 

아우구스티누스는 우리를 위해 꿀이 가득 찬 천국의 벌집을 짓는, 진실로 부지런한 하나님의 꿀벌

- 밀레비스 (261)

 

서양철학이 플라톤 철학의 각주이듯 서구의 기독교 신학은 아우구스티누스의 각주라고 말 할 수 있다.

- 화이트 헤드 (261)

 

'신학계의 플라톤'이라고도 불리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술들은 그 후 안셀무스와 토마스 아퀴나스를 비롯하여 거의 모든 가톨릭 신학자들에게 직간접적 영향을 미쳤습니다. (262)

 

철학에서도 데카르트,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같은 대륙 합리론자들은 물론이고 칸트, 볼프, 헤겔을 포함한 독일 관념론자들도 인간정신의 내부에는 '변하지 않는 것'이 있어 역사를 창조할 뿐 아니라 의식할 수 있다는 것 등 아우구스티누스 사상의 덕을 보았습니다. (262)

 

아우구스티누스를 이해한다는 것은 단적으로 말해 서양문명을 읽는 기독교 코드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을 상당 부분 이해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지요. (262) → 아우구스티누스는 서양문명 뿐만 아니라 저자의 기독교 사상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음이 분명하다.

 

고백인가, 증언인가

인간의 삶이란 오직 '신의 섭리'에 의해 인도된다는 것을 생생히 보여주기 위해서였지요. 이처럼 출생에서 죽음에 이르는 인간의 모든 삶과, 창조에서 종말에 이르는 세계의 모든 역사가 오직 신의 섭리에 의해 예정되고 인도된다는 교리를 기독교에 처음 정립한 사람은 2세기 루그두눔의 감독이던 이레네우스였습니다. 그는 '인간과 세계의 구원에 관한 신의 의도적이고 조직적인 계획'이라는 의미로 '오이코노미아'라는 용어를 사용했지요. 우리말로는 보통 '구속경룬' 또는 '신적 경룬'으로 번역하는데요, 신이 그의 섭리로 인간과 세계를 이끌어 간다는 뜻입니다. (265)

 

신율은 자율을 폐기하지 않고 오히려 완성시키지요. 요컨대 신율은 섭리에 의해 모든 상황과 여건이 성숙되어 초월적으로 실현되는 자율을 말합니다. 그래서 틸리히는 "자신의 신적 근거를 알고 있는 자율이 곧 신율"이라고 규정하지요. (265)

 

신율이란 사실상 당사자만 느낄 수 있을 뿐 아무도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고백록'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아우구스티누스는 자기 삶을 신율적으로 파악했다는 사실이지요. 아우구스티누스가 자기 삶의 신적 근거를 깨달았을 때 '자율'적이던 자신의 모든 과거가 적어도 그에게는 '신율'적으로 드러났던 겁니다. (266)

 

아우구스티누스는 삶의 정점에서 회고록을 쓴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삶을 매개로 자기가 맡은 교구의 교인들을 교육할 신앙 간증서 내지 신학 교육서를 썼던 겁니다. (266)

 

이처럼 작가들은 자신들의 작품을 단순히 그들의 사실적이거나 환상적인 신앙 체험을 기술하는 '고백문학'이 아니라, "영원의 섭리를 내가 증명하여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길이 옳음을 밝힐 수 있도록" 진리를 밝히는 '증언'으로 삼았지요. (267)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삶이 증명하듯이, 창조에서 종말에 이르는 우주의 역사 또한 어떤 우연이나 운명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오직 신의 의도적이고 조직적인 계획에 의해 창조되고 보존되며 인도된다는 점을 독자들에게 전하려 했던 것이지요. (268) → 저자가 앞서 이야기했듯 아우구스티누스가 서양문명의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 것이 바로 창조론에 대한 업적 때문일 것이다.

 

신율에 의해 그의 마음 안에서 점점 자라난 '진리의 빛'은 그 자신의 어둠을 밝혀주었습니다. 나아가 그 빛은 시대를 초월하여 지금도 갈 길을 몰라 헤매는 모든 인간에게 길라잡이가 되고 있지요. (269)

 

우리는 경험했지만 그 의미는 놓쳤다.

그러나 그 의미에의 접근은

경험을 회복시킨다.

하지만 다른 형태로.

- 토머스 엘리엇 '목마른 구조' (269)

 

우리는 '고백론'을 읽으면서, 우리가 삶에서 경험했지만 놓쳐 버린 숱한 의미를 새롭게 회복시킬 수 있지요. 물론 그 일은 '다른 형태로' 이뤄지지만 말입니다. (270)

 

우리는 이제부터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론'에 의해 고대 히브리 인들의 창조설화가 이전까지 알려진 것과는 전혀 다른 의미로 부활해 기독교 신학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을 보게 될 겁니다. 예지로 가득한 그의 '창세기' 해석은 이미 과학적, 합리적 인간이라는 세례를 받은 우리들조차 충분히 수긍할 수 있도록 놀라운 방법으로 신학적, 종교적 의미를 새롭게 창조해 주기 때문입니다. (270) → 저자는 신학도로서 아우구스티누스를 신학자 이상으로 존경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세상에게 물어보라, 하늘의 아름다움, 별들의 빛남과 질서,

낮의 태양과 달, 밤에 내리는 서리를 가진 세상에게!

땅에게 물어보라, 나무들과 식물들을 풍요롭게 하는,

온갖 동물이 서식하여, 인간을 위해 가꾸어지고, 마련된 땅에게!

바다에게 물어보라, 자기 안에서 태어난 모든 존재로 충만해진 바다에게!

모든 것을 물어보고 나서 보라, 저마다의 것이 자신의 종류에 따라

자신의 감관을 통해 너에게 대답하고 있지 않은가 :

"신이 우리를 만드셨다." 드높이 숙고한 철인들이 이것을 물었고,

그들은 세계라는 예술품으로부터 신적인 예술가를 인식했다.

 

이 글을 보면 아우구스티누스가 예술품 같은 자연으로부터 예술가적 창조주를 발견하고 감탄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70)

 

번개나 천둥, 그리고 폭풍 속에서

장엄한 힘으로 압도해 오는 존재를,

만발한 꽃의 향기와 온화한 바람의 산들거림 속에서

사랑스럽게 다가오는 존재를

우리가 느껴서는 안 된다는 말인가?

- 괴테 (271)

 

4장 창조는 어떻게 이루어졌나

태초는 언제인가?

아우구스티누스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에서 '태초'라는 말에 주목했습니다. 그리고 이 말의 의미를 시간상 '아주 오래 전'이 아니라 '시간의 시작'으로 보았지요. 그는 "세계가 시간 속에서 만들어지지 않고 시간과 더불어 만들어 졌다" 라고 단언했습니다. '시간과 더불어 이루어진 창조'라는 말은 신이 세계를 '시간 밖에서' 창조했다는 의미지요. (275)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물리적 시간이란 변화하는 사물과 사건들 사이의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사물이 아직 없는 곳에는 시간이 존재할 수 없지요. 그래서 그는 "시간이란 한 형상이 다른 형상으로 바뀌는 사물의 변화로 이루어지는 것이옵나이다" 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창조 이전에는 사물이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에 시간도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요컨대 "피조물이 생겨나지 않는 한,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창조는 시간 속에서 행해질 수 없고 '태초에' 창조와 함께 시공이 시작되었다는 이야기지요. (275)

 

천지를 짓기 전에 신은 안식하셨다는 겁니다. 창조와 함께 시간이 시작되었으므로 창조 이전에 신은 시간 밖에 있었지요. 그런데 시간 밖에는 어떤 변화나 행동도 없습니다. 이 같은 논리로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이 천지를 짓기 전에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라고 담대하게 답했지요. 요컨대 신은 시간 밖에서는 안식하고 시간 안에서는 활동한다는 말입니다. (276)

 

창조와 함께 시간이 생겼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주장이, 신기하게도 천체물리학이 내세우는 우주론인 '빅뱅이론'과 맞아 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빅뱅이론 역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우주가 탄생한 것이 아니라, 우주가 탄생하면서 시간과 공간이 펼쳐졌다고 주장하기 때문이지요. (276)

 

창조론과 빅뱅이론을 비교해 보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 될 겁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대립하는 두 이론에 대한 새로운 이해는 물론, 한발 더 나아가 히브리적 요소와 그리스적 요소, 유신론적 성격과 유물론적 성격, 종교적 믿음과 이성적 사고가 여전히 대립하면서 공존하는 서양문명의 이중적 성격을 더 넓고 깊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277) → 저자가 이 책의 결말에서 이야기하는 대립하여 공존할 수 없는 속성의 것들을 공존시킬 수 있는 방법이 이곳에 적용되고 있다.

 

우주가 어느 순간 갑자기 폭발하듯 생겨나 지금도 여전히 팽창하고 있다는 빅뱅이론은 1920년대 벨기에의 성직자이자 과학자였던 조르주 르메트르가 처음 제시했습니다. 그 후 1947년 러시아 출신의 저명한 물리학자 조지 가모브가 이론적으로 정리했지요. 그 과정에서 가모브는 제자들과 함께 훗날 빅뱅의 결정적 단서가 될 우주배경복사를 예측했습니다. (278)

 

허블은 1936, 지금은 고전이 된 저서 '성운의 세계'에서 자신이 발견한 적색편이 현상이 '팽창하는 우주'를 증명한다는 주장을 내놓았지요. (279)

 

파동을 발생시키는 파원과 그 파동을 관측하는 관측자 중 하나 이상이 운동을 하고 있을 때, 그 운동에 따라 나타나는 파장의 외형상 변화를 물리학에서는 도플러 효과라고 합니다. (279)

 

'풍선 비유'에서 동전들 사이가 멀어진다면 풍선이 팽창하고 있다는 증거지요. 우주와 성운도 마찬가지입니다. 적색편이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은 우주가 팽창하고 있다는 이야기지요. (280)

 

우주배경복사란 빅뱅이 생긴지 약 38만 년 후 원자가 형성될 때 떨어져 나온 전기파로, 사실상 대폭발을 증명할 수 있는 "창조의 메아리" 입니다. (281)

 

우주배경복사가 폭발에 대한 증거를 제공하고, 적색편이 현상이 팽창에 대한 증거를 제시하는 것이지요. (282)

 

특이점이란 천체물리학에서는 중력의 세기, 밀도, 온도와 같은 물리적 측정량이 무한대가 되는 하나의 점을 의미하는데, 일반적으로는 어떤 기준을 상정했을 때 그 기준이 적용되지 않는 점을 뜻한다. (283)

 

"이 우주를 출범시키는 데 필요한 정밀도는 우주의 순간순간 행동을 지배하는 동역학 방정식들(뉴턴, 멕스웰, 아인슈타인 등의)이 이미 우리에게 보여준 놀라운 정밀도에 비하여 전혀 손색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빅뱅은 어째서 그렇게 정밀하게 계획된 것일까?"

- 펜로즈 (283) → 그것이 곧 신의 섭리임을 강하게 시사하고 있다.

 

무에서 유가 어떻게 나오는가?

현대물리학자들은 대개 '에너지로 충만한 진공'이나 '양자비약을 통해 최초의 물질 형식들이 생성된 양자 영역'을 무로 설정합니다. (285)

 

양자요동이 일어나는 '에너지로 충만한 진공'이나 '최초의 물질이 형성되는 양자 영역'은 우리가 생각하는 '절대적 무'가 아니라는 점이지요. 그래서 그것들은 또 어디서 어떻게 생겨난 것인가 하는 의문이 여전히 남습니다. 이에 대해 과학자들은 "그건 아직 모른다" 라고만 대답하고, 신학자들은 "당신들이 모르는 그 원인이 바로 신이다" 라고 말합니다. (286)

 

과학이론도 더는 연역될 수 없는 가정들로부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궁극적 물음에는 대답을 할 수가 없지요. (중략) 신학자들은 그때마다 "그 대답할 수 없는 궁극적 원인 바로 신이다" 라고 답하겠지요. 이런 이유로 모든 궁극적인 물음의 해답은 언제나 경험과학의 영역 너머에 놓이게 마련입니다. (287) → 신의 존재가 교조적인 성격을 가질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나와 있다.

 

쿠르트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가 대변하듯이 자기 자신을 정초하는 수학 이론은 존재할 수 없지만 신은 개념상 스스로 자신을 정초함으로써 모든 것의 궁극적 원인이 되는 존재입니다. 따라서 "당신들이 모르는 그 궁극적 원인이 바로 신이다" 라는 신학자들의 대답을 과학자들은 영원히 몰아낼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287)

 

우주가 탄생할 때 어떤 식으로든 무에서 유가 생겨나는 일이 '적어도 한 번은'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만일 그것이 불가능했다면 지금 존재하는 이 우주의 '존재'가 불가능하기 때문이지요. (288)

 

우리는 우주가 어떤 특이한 한 순간에 탄생했고 지금도 무서운 속도로 계속 팽창하고 있다는 것만 알아 두고 넘어가도록 하지요. (289)

 

무수한 우주가 존재한다고?

"10-43초는 1초의 1조의 1조의 1조의 1000만 분의 1만큼 짧은 시간이다. 그런데 그 시간 안에 어떻게 이 기막힌 일이 우연히 일어날 수 있겠는가? 도저히 불가능하다. 바로 이것이 우주의 모든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알고 있는 전지전능한 신이 존재하며, 그의 계획에 의해 우주가 창조되었다는 과학적 증거가 아니겠는가?" 이러한 생각을 과학자들은 '인본 원리'라고 부르고,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은 '지적 설계론'이라고 합니다. 또 신학자들은 이런 주장을 논증 형식으로 표현해서 신의 존재증명 가운데 '목적론적 증명'이라고 부르지요. (292)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유익과 구원을 위하여 만물을 정하셨으며, 그가 우리에게 주신 유익과 은혜, 하나님의 권세와 은혜를 우리가 묵상케 하시고 그것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찾고 찬양하고 사랑하도록 자극하신다. 그리고 모든 것을 인간을 위하여 창조하신 바, 그 사실을 그가 유지하는 질서를 통해 보여주셨다."

- 칼빈 (292)

 

다중 우주 해석론 : 우주는 아주 작은 시공거품에서 시작합니다. 그 속에서는 모든 사건이 인과적으로 연결되어 있는데, 그것이 갑자기 팽창하여 하나의 우주가 되지요. 그런데 그것이 포함된 전체 우주는 마치 부글거리며 끓는 죽과 같아서 이 같은 시공거품 하나가 아니고 무수히 많이 생성되었다가 또한 소멸하는 카오스 입니다. 그것을 다중우주라고 부르는 것이지요. 시공거품들 가운데 초기 상태가 '우연히' 우리가 사는 데 적합하게 발생하도록 조율된 하나가 팽창해서 우리가 사는 이 우주가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293) → 앞서 페일리의 시계 논증에서 다윈적 반박과 유사한 반박이다.

 

데카르트는 "신이 만물을 창조할 때 다른 목적은 고려하지 않았다는 식으로 모든 사물이 인간을 위해 만들어졌다고 하는 것은 결코 있음직한 일이 아니다" 라며 인본주의를 강력하게 거부했지요. (295)

 

여섯 개 최적의 숫자가 지금의 우주를 탄생시켰다고 주장한 마틴 리스도 우주 초기 상태에 그런 최적의 조율이 있었다고 해서 여기에 굳이 신의 섭리를 도입할 필요는 없다고 잘라 말했습니다. 그는 어쩌면 무한한 다중우주가 존재하고 각각의 우주는 나름대로 고유한 특성과 구조를 갖고 있는데, 그것들 가운데 우리의 우주는 우연히 여섯 개 최적의 숫자에 의해 우리가 살기에 적합하게 구성되었을 뿐이라고 믿고 있지요. 리스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습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우주는 여러 집합체 중 하나일 수도 있다. 거기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우주가 각기 다른 물리법칙을 따르면서 고유의 방식으로 존재하고 있다. 그 중 우리가 속한 우주는 아마도 복잡성과 의식이 허용되는 우주일 것이다" (296)

 

다이슨은 "우리가 우주에서 우연히 나타났다는 것은 옳지만, 우연이라는 개념 자체가 우리의 무지를 덮어두기 위한 장치일 뿐이다. 이 우주에서 나는 이방인이라고 느껴지지 않는다. 우주에 대해 조사하고 그 구조를 자세히 연구하면 할수록, 우주는 어떤 의미에서 우리가 출현할 것을 알고 있었다는 증거가 점점 더 많아진다. 우주가 살 수 있는 곳이 되기 위해서는 핵물리학의 법칙에 매우 놀라운 우연의 일치가 있어야 하는데, 실제로 핵물리학의 법칙에는 우주만물이 '공모'한 것처럼 느껴지는 정도의 우연의 일치가 존재한다." (297)

 

그는 "정신이 우주의 기능에 본질적 역할을 한다는 가설이 우주의 구조와 모순되지 않는다" 라고 주장하지요. (297) → 어려운 내용이기도 하지만 심오하게 다가오는 내용이기도 하다. 내가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이 '정신'이기 때문이다.

 

앨렌 구스와 아우구스티누스의 차이

기독교 신학에서 신이 세계 이전, 곧 시간과 공간의 '밖에서' 창조했다는 말은 일단 신이 시간이나 공간 그 어느 것의 제약도 받지 않고 절대적 독립성을 가진 '세계초월적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중략) 기독교인들은 신의 '세계초월성'을 신의 '전지전능성'과 연결지어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299)

 

다시 말해 기독교인들은 신이 세계의 어떤 것에도 제약을 받지 않는다는 말을 그가 세계의 모든 것을 오직 자기 의지대로 생성, 소멸, 인도할 수 있다는 의미로 해석한다는 것이지요. 바다를 가르고 태양을 멈추며 처녀를 잉태하게 하고 죽은자를 살리는 일이 신에게는 조금도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300)

 

언어의 의미는 그 언어가 발화된 환경과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에, 그 사실 여부 역시 그 언어가 속한 존재세계로 인해 가려지게 마련이지요. 성서 텍스트의 '사실'은 예컨대 자연과학적 사실과는 전혀 다른 존재세계의 사실입니다. 즉 창조, 신의 통치, 언약, 중생, 심판, 종말, 부활, 새 세상 등 성서의 언어로 구성된 '성서세계'에서 그 의미가 결정되고 객관성이 보장되는 사실들이라는 이야기에요. (301)

 

비트겐슈타인에 의하면 모든 '언어놀이'에는 그 언어놀이를 구성하는 풍습, 제도, 역사, 문화를 비롯한 인간의 총체적인 '삶의 양식'이 반영됩니다. 따라서 언어란 그 언어가 사용된 언어놀이 안에서만 일정한 의미를 갖지요. 그러므로 "언어놀이가 변하면 그때는 개념상의 변화가 생기고 개념과 더불어 단어들의 의미도 변한다"는 것입니다. (302)

 

비트겐슈타인은 "하나의 언어를 머리에 떠올린다는 것은 하나의 삶의 양식을 떠올리는 것이다" 라고도 주장했습니다. 이것은 곧 어떤 사람의 언어를 이해하려면 그 사람의 삶의 양식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는 뜻이겠지요. (303)

 

언어놀이를 바꾸는 것은 '하나의 사고 차원에서 다른 사고 차원으로 옮겨 가는 것'이자, '하나의 삶의 형식에서 다른 삶의 형식으로 옮겨 가는 일'이 되는 겁니다. 이런 의미에서 삶의 양식, 곧 문법은 한 세계에 대한 단순한 정보만이 아니라, 그 세계에 대한 삶의 통찰을 제공하지요. 이러한 '통찰'은 우리에게 세계를 보는 하나의 새로운 관점을 형성해 줍니다. 그 결과 "이미 사용 가능한 개념들이 변화하거나 더욱 확장되도록 함으로써 새로운 정보 발견을 가능하게 해주는 진보" 곧 이해의 폭을 넓히고 타인고의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이해의 진보'를 선물합니다. (303)

 

결코 화해할 수 없을 것 같은 과학과 종교의 대립에서도 이들이 전혀 다른 문법으로 서로 다른 언어놀이를 하고 있음을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야만 과학과 종교 사이에 바람직한 소통이 비로소 가능해지며,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가 사는 세계에 대한 새로운 통찰과 이해의 진보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지요. (305) → 저자는 언어놀이라는 방식의 도입을 통해 종교와 과학이 대립하지 않고 공존할 수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마이클 루스와 존 호트는 모두 과학과 종교 간의 진정한 소통을 지향한다. 나는 이들의 노력에 원칙적으로 공감하지만 그들이 시도하는 과학과 종교의 접촉이나 지지에 대해서는 조심스럽다. 과학과 종교의 만남에서, 예컨대 빅뱅이론과 아우구스티누스의 창조론 해석처럼 두 이론이 어떤 합의와 일치에 도달했다 하더라도, 각각의 언어놀이에서 발생한 고유의 의미 역시 보존하는 것이 바람직하기 때문이다. (305) → 즉 저자의 입장은 두 개의 영역을 하나로 통합해 새로운 뭔가를 만들어내는 것이 본질이 아니라, 두 개의 영역의 고유성을 인정하되 서로 조화롭게 공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보다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

 

비트겐슈타인의 '언어놀이'는 쿤의 '패러다임'보다 훨씬 유연합니다. 쿤의 패러다임이 상대적으로 '닫힌 체계'라면, 비트겐슈타인의 언어놀이는 '열린 체계'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지요. 한 사람이 여러 차원 또는 여러 종류의 언어놀이를 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는 마치 우리가 자신이 속한 나라의 언어와 문화(즉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는 삶의 양식)를 포기하지 않고도, 다른 나라의 언어나 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예요. 하나의 삶의 양식을 갖고 사는 것과 그것을 이해하는 것은 다르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자신의 언어놀이에 속해 있으면서도 다른 사람들이 하는 언어놀이 문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으며, 그것을 통해 이해의 진보를 가져와 타인과의 의사소통이 오히려 가능해질 수 있습니다. (307) → 언어놀이 라는 개념은 내게 있어서도 아주 중요한 개념으로 다가왔다. 예전까지는 세상을 바라보는 틀을 패러다임에 비유하여 생각하곤 했었다. 그러나 언어놀이야 말로 패러다임보다 보다 유연하고 부드러운 비유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개인적인 생각으로 내가 생각하는 메타노이아 식의 변화는 패러다임의 변환 처럼 극적인 변화의 비유가 더 어울릴 것 같고, 언어놀이의 비유는 문화 간의 이질성에 대한 비유나,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는 관용에 대한 비유로 더 적합할 것 같다.

 

리오타르의 다원적 이성과 상호이해

내가 언어놀이 이론을 지지하는 이유는 우선 과학과 종교 사이에 엄연히 존재하는 "차이에 대한 우리의 감수성을 세련시키고 불가공약적인 것에 대한 우리의 인내력을 강화" 하자는 것이지요. 언어놀이 이론이 과학적과 종교의 소통을 막으리라고 우려하는 존 호트도 이 점에 대해서는 "과학과 신앙을 제멋대로 섞는 행위를 막으려면, 과학과 신앙의 만남은 신중하고 자의적으로 그리고 무엇보다도 참을성 있게 이루어져야 한다" 라고 같은 입장을 표명한 바 있습니다. 그래야 비로소 진정한 소통이 가능해지기 때문이지요. (308) → 앞서 저자가 이야기 했던 과학과 종교를 하나로 통합하는 것을 지지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때 우선적이고도 중요한 것은 상대의 주장과 그 주장이 나온 상대의 발화 환경에 대한 진정한 이해입니다. 그런 다음에야 "찻잔의 손잡이는 오른쪽도 왼쪽도 아닌 어느 한쪽에 붙어 있다."라는 합의내지 일치가 가능하든 말든 하지 않겠습니까? 만일 당신이 상대의 주장에 대한 이해를 통해 이 같은 새로운 합의나 일치를 얻어 냈다면 당신은 비로소 '이해의 진보'를 이룬 것이고 그로써 상대와의 의사소통이 가능해진 것이지요. (309)

 

리오타르도 "합의는 낡고 의심스러운 가치가 되어 버렸다. 그러나 정의는 그렇지 못하다." 라면서 획일적이고 폭력적인 합의와는 무관한 정의의 개념 및 실천을 위한 원칙을 다음 두 가지로 제시했습니다.

 

① 언어게임의 이질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② 즉 각각의 게임 그리고 여기서 이루어지는 '활동들'을 규정하는 규칙에 대한 합의가 존재한다면, 이 합의는 국부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합의는 현재의 파트너에 의해 이루진 것이며, 경우에 따라 쉽게 취소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다원적 이성에 의한 원칙들에 의해서 리오타르는 '지식에 대한 정당화' '사회적 정의에 대한 정당화'도 새롭게 구축되길 바라지요. 나는 적어도 이러한 사유 모델이 오늘날 시도되고 있는 과학과 종교간의 대화와 소통에는 적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311) → 이러한 리오타르의 방법론 또한 저자가 결말에 주장하는 큰 이야기와 작은 이야기가 서로 모순, 대립하는 것을 해소시켜줄 수 있는 좋은 방향과 일맥상통한다.

 

과학과 종교가 대화와 소통을 통해 어떤 합의나 일치를 얻어 낸다면 그건 바람직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가 급하게 서둘러야 할 목표는 아닙니다. 내 생각에는 과학과 종교 간에 이뤄져야 하는 대화와 소통의 조건이자 목표는 어떤 합의나 일치를 얻어 내는 것이 아니라, 상대 담론에 대한 '진정한 이해' 입니다. (중략) 상대에 대한 진정한 이해가 전제되지 않은 일치나 합의에는 사실상 강한 자가 약한 자에게 가하는 부당한 대우와 폭력이 들어 있게 마련입니다. (311) → 저자는 누차 대화와 소통의 목적은 합의와 일치가 아닌 서로에 대한 진정한 이해에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바로 그 이유로 합의와 일치에 있는 부당한 대우와 폭력을 들고 있다.

 

과학과 종교 간의 바람직한 소통을 위해서는 적어도 두 가지가 선행되어야 하지요.

① 상대가 사용하는 전문용어에 대한 정확한 이해입니다.

② 대화와 소통이 '상호주관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서로 다른 문법을 가진 담론들을 하나의 문법으로 획일화하려는 야망을 갖고 접근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지요. (312)

 

나는 우리의 삶과 세계에서 진리를 드러내는 일은 마치 오늘날 영상기술자들이 3차원 영상을 만드는 방법과 같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영상기술자들은 서로 다른 각도에서 촬영한 두 개의 2차원 영상을 나란히 겹쳐 놓음으로써 보다 실사에 가까운 3차원 영상을 얻어 내지요. 그렇게 해서 우리에게 전혀 새로운 차원의 경험을 선사합니다. 진리를 드러내는 우리의 작업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같은 대상을 서로 다른 관점에서 조명하여, 단지 하나로 통합하거나 융합하는 게 아니라 나란히 겹쳐 놓음으로써 보다 진리에 가까운 입체적이고 생생한 지식이 제 스스로 드러나게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313) 종교와 과학이 서로의 관점을 이해하되 서로 독립적으로 병존할 수 있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지속적으로 전하고 있다. 이를 3차원 영상에 비유하다니! 너무나 멋지고 실감나는 비유가 아닐 수 없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은 세계로부터 어던 제약도 받지 않는 절대적 독립성을 가졌다는 의미인 세계초월성과 세계에 부단히 참여하며 자신의 뜻대로 인도해 가는 인격적 속성을 가졌다는 의미인 세계내재성을 동시에 지닌 유신론적 신입니다. (314)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 사도 바울 (315)

 

"자신 안에 자연을, 자연 안에 자신을 품고 있는 자!"

- 괴테 (315)

 

영원이란 무엇인가

'태초' '시간 안'이 아니라 '시간 밖'을 뜻합니다. 그런 만큼 이 말은 신이 '시간 밖에서' 우주를 창조했고, 창조와 동시에 시간이 시작되었다고 이해해야 하지요. (317)

 

"공간과 시간이 빅뱅에 의해서 발생하고 블랙홀들에서 소멸한다면, 공간과 시간과 시간 속에서 정리할 수밖에 없는 그런 존재이지만, 우리의 이론들은 경험들을 완전하게 설명하기 위해서는 공간과 시간을 벗어난 개념들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려준다. 물론 생각만으로는 공간과 시간의 저편에 정말로 무언가가 있다는 확신을 얻을 수 없다. 그러나 심오한 물리학적 분석은 그런 가능성을 파악하기 어렵게 만드는 장애물들을 제거한다."

- 게르하르트 뵈르너 (317)

 

뵈르너의 이 말은, 만일 공간과 시간이 빅뱅에 의해서 발생하고 블랙홀들에서 소멸하는 사례가 있다면 그것은 오직 공간과 시간 속 사물들의 질서만 존재한다는 생각에서 우리를 해방시킨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공간과 시간 자체가 가변적이라면, 우리가 표상할 수 없는 다른 질서, 공간과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는 질서도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지요. (318)

 

새로운 용어가 새로운 사유를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지요. (319)

 

'시간 밖의 시간' 이라는 말은 우리가 시간이라고 규정한, 시간이 가진 성질이 아닌 어떤 다른 성질을 가진 시간을 의미합니다. 즉 무한하게 분산되며 미래에서 다가와 현재를 거쳐 과거로 부단히 흘러가는 성질이 아닌, 그와는 다른 성질을 가진 어떤 시간을 뜻하지요.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영원이 바로 이렇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게 바로 신의 시간이라지요. (319)

 

"주님의 연대는 불과 한 날이며 주님의 날은 되풀이되지 않고 언제나 오늘이옵니다. 주님의 '오늘'은 내일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고 어제를 뒤좇지 않나이다. 주님의 오늘은 '영원'하옵니다."

- 아우구스티누스 (319)

 

영원에는 시간의 흐름이 없고 과거와 미래가 모두 현재로 존재한다는 말입니다. 바로 이것이 '시간 밖의 시간'이자 모든 시간의 근원인 '신의 시간'이 가진 성질이지요. (319)

 

"하나님의 영원성 속에서, 신성의 완전함 가운데 하나인 창조되지 않는 자존적 시간 속에서 과거, 현재, 미래, 어제, 오늘, 내일은 연속적이 아니라 동시적인 것이다."

- 바르트 <교회 교의학> (321)

 

따라서 바르트에게 창조는 "과거, 현재, 미래, 어제, 오늘, 내일은 연속적이 아니라 동시적인" 신의 시간, 곧 영원 안에 있는 신의 의지가 과거, 현재, 미래로 흐르는 인간의 시간 안에서 전개되는 것입니다. 즉 영원 안에 있는 창조가 시간 안에서 작동하면서 순차적으로 역사가 발생하지요. 바르트는 이것을 "하나님의 영원성 안에 있는 모든 것은 어머니의 팔 안에 있는 어린아이와 같다" 라고도 비유적으로 표현했습니다. 따라서 미래란 장차 일어날지 안 일어날지 모르는 어떤 시간적 과정이 아니라, 어린아이가 점차 자라나듯이 영원한 신의 의지가 인간의 시간인 역사로 순차적으로 "침입해 들어옴"일 뿐이지요. 따라서 그것은 예정적이고 결정적이며, 만물을 급진적이고 가차 없이 새롭게 합니다. (321) → 예술적 표현이다. 앞에서 표현한 신의 숨결이자 접혀진 질서를 떠올리게 하는 표현이다. 미래의 풍광, 시간적 도치란 시간의 영원성을 바라보고 하는 작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플라톤 철학에서 영원한 존재란 자기동일성을 유지함으로써 자기 전체성 안에서 언제나 자기 자신으로 현존하는 존재 곧 '불변하는 실재'를 뜻합니다. 시간의 차원에서도 마찬가지예요. 영원에는 과거나 미래가 없고 언제나 자기동일적 현재만 있기에, 영원은 불변하는 실재이며 신과 연결되는 것입니다. (322)

 

"영원이란 마치 하나의 점 안에 모든 것이 자리하듯이 그에게는 흘러 지나가는 것이 없으며, 오히려 자기동일성 안에 머물러 항상 자기이기에 언제나 변화가 없는 존재, 과거도 미래도 없는 현재라고 하겠다."

- 플로티노스 (323)

 

시간이란 무엇인가

플라톤에 의하면 시간은 '영원의 모상'입니다. (중략) 불변하는 영원이 변하는 시간 안에 부분적으로 내재해 있다는 말입니다. 이데아와 영원은 모두 원형이고 개개의 사물들과 시간들은 각각의 모상이지요. (325)

 

원형과 이를 본뜬 모상의 관계를 아는 것은 플라톤과 플로티노스 그리고 아우구스티누스로 이어지는 존재론 전통의 다양한 주장을 이해하는 지름길입니다. (325)

 

영원의 분여에 의해 시간이 '비록 한정되니 이것으로나마' 지속이라는 형태로 나타나고 인식되며, 이름도 갖게 된다는 겁니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플라톤은 시간을 "영원의 모상" 또는 "영원의 변화하는 모상"이라고 규정했어요. (326)

 

플로티노스는 공간이 연장을 재는 척도이듯 시간이란 지속을 재는 척도이며, 그러한 시간을 파악하는 주체는 우리의 마음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따라서 마음이 없다면 지속과 운동은 있을지라도 시간은 없다는 것이지요. 시간은 '마음 밖에서' 파악할 수 없고 오직 '마음 안에서' 드러나며, 마음과 하나라는 겁니다. 그래서 마음이 변하면 삶이 변하고, 삶이 변하면 시간도 변하지요. 이러한 의미에서 플로티노스는 시간이란 "마음의 삶이다" 라고 선포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학자들이 플라톤에서 플로티노스 그리고 아우구스티누스로 이어지는 존재론 전통에서 말하는 시간을 '심리적 시간'이라고 부르는 계기가 되었지요. (326) →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떠올리게 한다.

 

영원은 신에게 속하는 동시에 값어치 있는 것이고 시간은 인간에게 속하는 동시에 세속적이고 부질없는 것이지요. (327)

 

시간의 끝에 영원이 있다

플로티노스에게 영원은 신의 마음이 사는 삶이고, 시간은 인간의 마음이 사는 삶입니다. 하나는 한결같이 머무르고 다른 하나는 끊임없이 흘러가지만 둘 다 '마음의 삶'이라는 점에서 같지요. 그래서 인간의 마음은 부단히 신을 닮으려 하고, 시간 역시 꾸준한 집념으로 영원을 닮으려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시간은 결국 인간이 신에게 다가가도록 하는데요, 그러다가 마침내 우리의 마음이 신에게 이르면 그때는 시간이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시간의 끝에는 영원이, 신이, 구원이 있는 것이지요. 이런 의미에서 시간은 불완전한 존재가 완전해지는 가능성이자 과정입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우리의 마음이 불완전하기에 시간이 필요한 겁니다. 시간은 모든 불완전한 존재가 완전한 존재인 신에게 가는 문이자 통로지요. 이것이 플로티노스가 찾아낸 시간의 아름다운 얼굴입니다. (330) → 그 아름다움에 순간 전율했다. 이것이 내가 모르는 신의 영역인 것일까? 이러한 영원의 체험이 사람들이 종교를 가질 수 밖에 없게 하는 이유일가? 내가 너무도 이해하고 싶었던 구원이 바로 여기 영원에 있는 것일까?

 

일자, 곧 신에게로 자신의 마음을 향하게 함! 바로 이것이 플로티노스가 발견한 영원한 삶을 얻는 구원의 방법이자, 아우구스티누스가 종교적 언어로 "당신은 우리를, 당신을 향하도록 창조하셨나이다" 라고 고백한 의도이며, 우리 삶에 주어진 시간의 궁극적 의미이고 가치이지요! (331) → 창조론이 고백론 안에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구나!

 

'시간'을 사는 우리의 마음을 신의 마음처럼 '영원'을 살도록 바꾸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과거, 현재, 미래로 끝없이 분산되어 흘러가면서 그 안에서 사는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로 분산시켜 단지 흘러가고 말게 하는 것, 그래서 값어치 없는 것, 의미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시간의 파괴성'을 극복하자는 것이지요. (332)

 

키에르 케고르가 '반복'에서 주장한 '반복'은 단순한 과거의 재현이 아니고 미래를 향해 과거를 회복하는 것이다. 즉 미래를 기대하면서 과거를 상기하는 것이다. 이 같은 반복을 통해 과거, 현재, 미래는 '동시성'을 갖는다. (중략) 이런 주장은 모두 과거가 기억으로 현전하고, 미래 또한 기대로서 현전하는 시간, 곧 아우구스티누스가 발견하고 오늘날 우리가 흔히 '심리적 시간'이라고 부르는 시간과 연관된다. (332) → 아.. 스승이 주장한 미래의 회고가 바로 이와 일치하는 주장이 아닐까? 미래는 현재가 흘러 오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향해 과거를 회복하는 것이며, 내 안에 접혀진 질서가 펼쳐지는 과정이다. 아직 완전하지는 않지만 시간에 대한 고정관념을 버리고 새로운 관점을 획득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므로 과거와 현재와 미래라는 세 가지 시간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차라리 과거의 현재, 현재의 현재, 미래의 현재, 이 세 가지의 때가 있다고 말하는 편이 옳을 것입니다. 이 셋은 마음(영혼) 안에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그것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현재는 기억이고, 현재의 현재는 직관이며, 미래의 현재는 기대입니다."

-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우리의 마음 안에는 이미 지나간 과거와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를 하나로 연결하여 마치 '바로 눈앞에 보이듯 존재하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는 마음이 가진 이러한 힘을 '상기의 힘'이라고 불렀지요. 신으로부터 부여 받은 이 능력을 통해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로 무한히 분산되지 않고 하나의 통일체가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시간의 통일체 안에서는 과거도 사라져서 허무한 것이 아니며, 현재 역시 무의미한 것이 아니며, 미래 또한 다가올지 오지 않을지 모르는 불안한 것이 아니지요. (중략) 이렇듯 상기의 힘은 개인적 차원에서든 역사적 차원에서든 모든 허무주의를 극복하게 한다는 것이 아우구스티누스의 시간론에 갈린 심오한 사유입니다. (334~335) → 여기서 말하는 상기의 힘은 그 동안 내가 들어온 '상상력'과 동일한 의미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상상력과 시간의 도치를 통해 우리의 미래를 다가온 현실로 인식하고 나아가 지나온 현실로 회고하는 정신적 작업이야 말로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고유한 능력이 아닐까?

 

아우구스티누스는 분여이론의 변형이라 할 수 있는 자신의 시간론을 통해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단지 흘러가고 사라져 버리는 것으로 인식되던 인간의 삶과 세계 역사에 '비록 한정적으로나마' 의미와 가치를 부여함으로써 그것들을 구원했지요. 인간의 삶과 역사는 헛된 것이 아니라고! 구원과 영원으로 나가는 통로라고! (336)

 

○ 물리적 시간 = 분산되는 시간 = 존재물의 시간 = 세속적 시간

○ 심리적 시간 = 통일된 시간 = 존재의 시간 = 신적 시간 (336)

 

우리의 마음(영혼)이 물리적 시간을 살 때 삶은 사라진 과거 때문에 허무하고, 사라지고 말 현재 때문에 무의미하며, 올지 안 올지 모르는 미래 때문에 불안합니다. 그래서 존재물에 집착하게 되고 세속적이 되지요. 하지만 우리 마음(영혼)이 심리적 시간을 살 때 우리의 삶은 현전하는 과거, 현재, 미래로 인해 의미와 가치 그리고 희망으로 충만하고 풍요로워지지요. 그래서 존재물보다는 존재에 관심을 갖게 되고 신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337)

 

원하는 것을 얻은들 소득이 무엇이랴

그것은 꿈이요, 한 순간의 입김이다.

덧없는 쾌락의 거품일 뿐

누가 일주일의 고통을 주고 한 순간의 환락을 사랴.

장난감 하나를 얻고자 영원을 팔아?

달콤함 포도 한 알을 얻기 위하여

덩굴을 모두 망칠 자가 누구랴.

어던 어리석은 거지가

당장 왕홀에 맞아 죽을 텐데 왕관을 만지겠는가?

- 셰익스피어 '루크리스의 겁탈' (338)

 

아우구스티누스의상기와 프루스트의회상

인간에게 어느 순간 갑자기 일어나는 '무의지적 기억'은 단지 잊었던 옛 추억을 떠올려 주는 것으로 끝나지 않아요. 그것은 마치 아우구스티누스의 '상기' 처럼 과거와 현재를 나란히 겹쳐 놓음으로써 시간에 의해 분산된 여러 가지 상들을 모아 이전까지는 감춰져 있던 삶의 진실을 드러내 보여 주는 일을 합니다. 그 결과 잃어버린 자신의 정체성, 삶의 의미와 가치를 되찾아 주는 일을 하지요. 또한 미래를 기대하게도 만듭니다. (342) → 미래의 회고를 통해 접혀진 질서가 펼쳐진다. 같은 의미의 주장이 반복되고 있다. 또한 융이 주장한 '동시성'이 이와 같은 개념이 아닐까?

 

"프루스트의 사상에서의 '무의지적 기억'은 기독교 사상에서의 은총처럼 초자연적 역할을 한다. 기억은 실추한 인간의 본성,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원래의 본성에서 분리된 인간의 그 본성에 대하여, 일거에 전적으로 그 근본 조건을 회복하기 위해서가 아닌, 구령의 길을 발견할 수 있도록 효력을 발휘하는 그런 불가해한 현상이다. 회상이란 '인간이 혼자 힘으로는 빠져나올 수 없는 허무로부터 인간을 구출하기 위해서' 찾아온 '천상의 구원'인 것이다. 그래서 프루스트 작품들에서 회상은 인간적인 동시에 초인적 형상을 띠고 끊임없이 나타난다."

- 조르주 풀레 (343)

 

역사란 물리적 시간에 의한 단순한 자연적 과정으로 파악하는 것이 아닌, 인간의 의식이 시간의 통일체 안에서 여러 가지 사건을 연쇄적 또는 인과적으로 파악하는 데서 시작하기 때문이지요. 한마디로 역사의식 없이는 역사적 사건도 없다는 말입니다. 이를 독일의 철학자 헤겔은 다음과 같이 표현했지요.

 

"역사 기술이 시작되기 이전에 여러 민족에게 흘러가 버린 시간, 즉 여러 가지 혁명과 대이동 그리고 격변으로 가득 차 있을지도 모를 시간을 우리가 수백 년 또는 수천 년이라고 생각하더라도 그것은 역사가 아니다. 그들은 주관적 역사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객관적 역사도 갖고 있지 않다. (344)

 

인간은 역사의 객관일 뿐 아니라 역사의 주관이요, 주체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역사를 창조할 뿐 아니라 의식하고, 과거를 기억 속에 축적할 뿐 아니라 미래를 기대 속에서 기획하지요. 그럼으로써 현재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인식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모든 역사의식은 사실 과거와 미래를 현전하게 하는 상기의 힘에 의해 비로소 발생하는 것이지요. (344)

 

"오직 신만이 미래의 우연적이고 개별적인 것들을 (현시점에서) 인식한다"

- 토마스 아퀴나스 (345)

 

"시간이 경과하는 전체 과정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든, 신은 그 모든 것을 자신의 영원 속에서 확실하게 인식한다. 그의 영원성은 현존하는 방식으로 시간의 전체적 경과에 관계되고 이것을 초월한다. 그래서 우리는 마치 높은 망대 위에 위치한 어떤 사람이 여행자들이 지나가는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전체를 동시에 직관하듯 신이 자신의 영원성에서 시작의 흐름을 인식한다는 것을 안다."

- 토마스 아퀴나스 (346)

 

물리적 시간으로 자신의 삶과 세계를 파악하는 관점에서 심리적 시간의 관점으로 바꾸는 것은 인간의 관점에서 신의 관점으로 바꾸는 일종의 패러다임 전환이지요. 기독교에서 말하는 '메타노이아(metanoia)', 곧 회심입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주인공 마르셀이 '무의지적 기억'을 통해 이룬 게 바로 이것이지요. (346)

 

시간의 선분 도식을 이용하면 왜 우리의 관점에서 진화로 보이는 사실들이 신의 관점에서는 창조인지, 왜 우리가 매 순간 자유의지로 결정하는 사실들이 신에게는 예정된 사실인지를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348)

 

천지란 무엇인가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이 창조한 천지를 각각 '지혜의 하늘' '형상 없는 땅'이라고 해석했습니다. (349)

 

① 지혜의 하늘 : "하늘 들의 하늘"이라는 말을 인용해 표현한 그곳은 천사들이 하나님과 함께 하는 완전한 영역으로, 하나님 가까이에 있다고 했지요. 시간도 공간도 없는 어느 미지의 영역이라는 말입니다. (349) → 내가 그 동안 상징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표면적인 것만 해석한 아주 낮은 수준의 이해였음을 알게 되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처럼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늘'이 우리가 보는 우주공간을 뜻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했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신이 거처하는 '하늘'은 시공과 그것을 지배하는 모든 물리적 법칙을 벗어난 곳이기 때문에, 우리가 기도하는 소망들을 허용할 수 있는 신의 전지전능성이 존재하는 곳이라고 주장했습니다. (351)

 

② 형상 없는 땅 : 아우구스티누스는 '형상 없는 땅'은 우주공간을 포함한 모든 세계를 형성해 내는 원물질을 뜻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신으로부터 형상을 얻어 우리가 지각하는 세계를 형성하지만 원물질 자체는 빛깔도 형태도 성질도 없기에 가시적인 어떤 것이 아니지요. ''는 아니지만 ''에 가까운 것, 형상을 가진 물질과 무 사이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352)

 

"주님이 만드신 이 땅 자체는 형상이 없는 질료였나이다.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고 형태가 없었고 흑암의 깊음 위에 있었나이다. 이 불가시적이고 형상 없는 당, 거의 무에 가까운 그 무형적인 것으로부터 주님은 변화 가능한 만물을 지어내셨으니 이로 말미암아 변화하는 우주가 생겼나이다. 변화가 있기에 덧없는 것이지만 이 변화에 의해 시간과 시기가 관찰되며 우리가 그것을 계산할 수 있나이다. 시간이란 한 형상이 다른 형상으로 바뀌는 사물의 변화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353)

 

소립자들은 '사과' '책상'처럼 하나의 존재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단지 입자 또는 파동으로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이나 경향성만을 의미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그는 이것들을 '잠재된 가능성의 상태', 곧 잠세태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용어를 빌려 '포텐티아'라고 이름 지었습니다. (354) → 이미 수 차례 언급한 접혀진 질서, 씨앗과도 같은 개념이다. 

 

"그런 입자들은 물질이라기 보다는 장(field)이라고 하는 편이 정확한데, 그런 장이 서로 응집하여 우리가 입자라고 부르는 것이 생깁니다. 그래서 세계를 기술할 전혀 새로운 방법이 필요해진 거지요. 원자를 관찰해 보면, 물질이 아니라 일정의 비물질적인 퍼텐셜이라 할 장이 우리 앞에 펼쳐진 현실세계를 구성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이 퍼텐셜이 스스로 물질이 될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이른바 이 ''이 우주 전체를 구성하는 유일한 요소인 셈이지요."

- 한스 페터 뒤르 (354)

 

여기서 뒤르가 말하는 '', '비물질적인 퍼텥셜'이 아우구스티누스가 언급한 불가시적이고 무형적인 '형상 없는 땅'이라 할 수 있습니다. (355)

 

존 러셀은 ① 신이 세계를 지속적으로 창조하기 위해 양자물리학 차원에서 활동한다는 것과 ② 신의 특정한 양자 사건 안에서의 행위가 우리가 보통 기적이라고 부르는 특별 섭리 사건을 산출해 내는 것이라는 두 가지의 매우 특별한 주장을 펼쳤습니다. (356)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말했지요. "창조자의 능력 자체는 사물의 이러한 자연적 운동과 진행과정을 넘어서서, 이런 모든 사물과 관련해서, 말하자면 이 모든 것의 종자적 이성(일반섭리)이 지니지 않은, (초자연적) 행위를 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 (356)

 

여기서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하는 '종자적 이성'이란 신이 창조 때 개개의 생물을 지금의 모습대로 창조한 것이 아니라 정해진 때가 되면 '그것'이 되게끔 부여한 일종의 자연법칙으로 일반섭리에 해당한다. (356)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하는 '형상 없는 땅'이 바로 모든 양자 사건이 일어나는 퍼텐셜이라면 러셀의 이 같은 주장은 전통신학과 현대과학을 연결 짓는 매력적인 가교가 될 수 있을 겁니다. (중략) "중요한 것은 그것이 자연과학 지식과 대립하지 않는다"는 점이지요. (357) → 종교와 과학이 대립이 아닌 공존할 수 있음을 지속적으로 주장하고 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천지'에 대한 해석이 신학적으로 중요한 이유는 그 안에 청조에 관한 매우 중요한 교리가 담겼기 때문이지요. (357)

 

무로부터의 창조

'무로부터의 창조' 라는 교리에는 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내용이 들어 있는데요, 바로 '신의 절대적 독립성' '전지전능성'입니다. (360)

 

"하나님은 자신의 전능성을 보존하기 위해 자신이 만들지 않은 재료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 아우구스티누스 (361)

 

"신은 사물들을 창조하면서 질료를 전제하지 않는다"

- 토마스 아퀴나스 (361)

 

"주께서 무엇인가를 가지고 이 모든 것을 만들었다고 생각하지 마라" 라는 말이 '무로부터의 창조'를 의미한다고 학자들은 해석합니다. (362)

 

신은 무로부터 만물을 창조할 수 있을 정도로 물질세계에 대해 '절대적 독립성'을 갖고 있고, 따라서 그는 물질세계의 법칙을 초월해 신실한 자들에게 부활을 선물할 수 있는 '전능한 자' . 그러니 조금도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363)

 

기독교는 처음부터 '무로부터의 창조'를 신의 '절대적 독립성' 내지 '전지전능성'과 연결하여 이해해

했던 겁니다. (363)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니라" 라고 '무로부터의 창조'와 연결하여 교훈했습니다. (363)

 

기독교인들은 '무로부터의 창조'를 자연과학적 원리로 이해하지도 주장하지도 않는다는 사실이지요. (중략) 기독교인들은 오직 그들의 삶에서 체험하는, 막막한 절망과 간절한 소망에 귀를 기울여 주고 그 손을 뻗어 해결해 주는 신의 무한한 능력과 연결 지어 무로부터의 창조를 이해했을 뿐입니다. 따라서 어던 과학자가 기독교인에게 "도대체 무로부터 유가 나오는 일이 어떻게 물리적으로 가능한가?" 하며 맞서는 일은 부질없고 의미도 없는 일이지요. 기독교인들은 그들과는 전혀 다른 '언어놀이'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363) → 저자의 주장이 어떤 의미인지 모르는 바는 아니나, 다른 언어놀이를 하고 있다고 결론지어 버리는 것은 허무감을 안겨준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이 무신론자들이 기독교를 배격하는 중요한 이유이기도 한데 말이다.

 

보시기에 좋았더라

세계가 아름답다는 이 주장은 철학적으로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자신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친 신플라톤주의자들과 갈라서서 오히려 플라톤에게로 다가가는 심오한 사유임, 교리적으로는 마니교의 주장을 반박하는 데 사용했던 뛰어난 변증이기도 합니다. (366)

 

플라톤은 만물의 궁극적 근원인 일자를 태양에 비유하여 '선의 이데아'로 규정한 다음, 그로부터 나온 물질 역시 선하고 아름답다고 인정했습니다. (366)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다"는 바울의 가르침만이 아니라 '세계는 선자체에 의해 선하고 아름다운 성과물로 창조되었다'라는 플라톤의 사유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의 육체는 전혀 악하지 않고 "영혼에게 부담을 주는 것은 육체가 아니라 육체의 타락 가능성"이며, 신은 오히려 "(인간이) 선한 일을 할 수 있도록 육체에 영혼을 부여한다" 라고 주장했지요. 아울러 물질과 육체가 악하다는 마니교도들의 주장을 반박했는데요, 바로 이때 '무로부터의 창조' 라는 교리를 사용한 겁니다. 그의 논리는 이랬습니다.

 

"신은 그가 창조하지 않은 질료, 즉 마니교에서 말하는 악하고 추한 질료로부터 물질을 창조한 것이 아니다. 영적이든 물질적이든 모든 피조물은 선한 신에 의해 무로부터 창조되었다. 따라서 물질도 선하고 아름다우며 물질로 구성된 인간의 육체와 세계 역시 선하고 아름답다." 한 마디로 창조는 그 근거와 결과가 모두 선하고 아름답다는 것이 아우구스티누스의 주장이었어요. (367)

 

차라투스트라가 그렇듯이, 고대의 신들은 악하고 추하며 두려운 면모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차라투스트라를 '초인'이라고 부르며 찬양했던 독일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는 신적인 성스러움을 기괴하고 무섭고 불길한 것으로 묘사했지요. 하지만 기독교와 함께, 특히 아우구스티누스와 더불어 신적인 성스러움과 그에 의해 창조된 모든 것이 선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규정되면서 서양문명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368)

 

신은 온전하게 선하고 아름답지만 인간과 세계는 불온전하게 선하고 아름다우며, 바로 그 때문에 언제나 타락의 가능성을 갖고 있지요. (369)

 

'불온전하게 됨', 이것이 타락의 기독교적 (또는 존재론적) 의미고 '다시 온전하게 만듦', 이것이 구원의 기독교적 (또는 존재론적) 함의지요. (370)

 

예수가 구원받은 인간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렀고, 다시 온전해진 세계를 "천국"이라 칭하며 교훈했다는 것만 말해 두지요. 예수는 이런 가르침도 남겼습니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370)

 

"모든 피조물은 신에 의해 창조되었지만 신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는데, 그 이유는 무로부터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아우구스티누스는 '무로부터의 창조'라는 교리를 인간과 세계의 선의 근거로 해석한 동시에 타락의 가능성으로도 파악했습니다. 또한 그는 그것을 신과 그 피조물을 철저히 분리하는 데도 사용했지요. 누구든 세계가 신으로부터 창조되었다고 주장하거나 또는 신과 세계가 하나라고 생각한다면 범신론에 빠지게 됩니다. (371) → 범신론을 반박하는 근거는 언제나 교조적이다. 내가 범신론적 입장이기 때문에 그렇게 색안경을 끼고 보는 것은 아닐까?

 

신이 선하고 아름답기 때문에 무로부터 창조된 인간과 세계 역시 (비록 불온전하지만) 선하고 아름다우며, 그 어떤 악마적 세력으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있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유는 예나 지금이나 귀하고 복됩니다. 인간은 기근, 전쟁, 질병 외에도 운명, 불안, 죽음, 허무, 무의미성, 죄책 같은 악마적인 것들에 속절없이 노출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가엾은 인간적 상황에서 '신과 세계의 선함'은 언제나 커다란 위로와 희망을 던져주지요. (372) → 지금까지 전개한 논조와는 다르게 너무 주관적이고 감성적 표현이 아닌가?

 

성부가 그와 아들로부터 영원히 샘솟는 사랑(성령)으로 그의 아들을 응시하시니

말로는 이루 다 형용할 수 없는 태초의 힘(말씀)께서

마음속과 공간을 운행하는 모든 것을 창조하셨으니

그를 바라보는 자, 그 완벽함과 오묘함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게 하셨도다.

그러니 독자여, 그대의 눈을 들어 나와 함께 저 반짝이는 천구를 지나,

운행과 운행이 맞닿는 곳을 보고 그 오묘한 솜씨에 기쁨을 맛보시라.

- 단테 '신곡' (372)

 

창조의 여섯 날이 글자 그대로 ‘6인가

우리의 하루 개념은 태양의 주위를 공전하는 지구의 1회 자전으로 규정되는데, 창세기의 하루는 태양과 지구가 아직 생기기 이전이니 결코 같은 개념일 수 없지요. (373)

 

아우구스티누스는 창세기의 하루를 '다른 어떤 방식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했지요. 그는 여섯 날 만에 세계를 창조하는 것으로 적힌 구절들은 "먼저 창조를 전체적으로 제시한 후 신비로운 날짜 수에 따라 그 부분들을 순차적으로 집행하는 것처럼 묘사한다"라고 해석했습니다. 창조 시기의 날짜 수는 단지 창조의 순서를 나타내는 '신비로운 날짜 수'로서 자연적 의미의 날짜 수와는 다르다는 의미지요. (374)

 

서양문명은 일찍부터 창조를 태초의 어떤 신비로운 시간에 의해 여섯 단계에 걸쳐 순차적으로 진행된 것으로 이해해 왔습니다. (374)

 

슈뢰더는 빅뱅으로 우주가 탄생해서 엄청나게 팽창해 가는 과정의 시간인 '우주의 시간', 아담의 창조와 함께 시작된 '인간의 시간'을 구분합니다. 창세기의 시간은 우주의 시간이고,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시간은 인간의 시간이라는 뜻이지요. (중략) 초기 우주 상태에서는 중력이 막대하여 시간이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느렸다는 겁니다. (중략) 슈뢰더는 "주의 목전에서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경점 같을 뿐이니라."라는 성경 구절이 설득력 있다고 주장했지요. (376)

 

창조가 오직 신의 의지에 따라 어떤 신비롭고 거룩한 '순서'대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고,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성서의 여섯 날이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6일과는 '결코' 같은 개념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377)

 

말에서 육신으로, 진리에서 행위로

 신이 육신이 되어 세상에 왔다는 성육신의 계시는 매우 신비롭고 특이합니다. (379)

 

성육신은 유대교뿐만아니라 그리스 철학에서도 매우 낯선, 기독교 고유의 사유이기 때문입니다. (383)

 

기독교는 성육신과 함께 시작했고 성육신을 믿는 종교입니다. 이점에서 기독교는 구약성서를 경전으로 삼는 또 다른 종교인 유대교나 이슬람교와도 완연히 갈라서지요. 그만큼 성육신은 기독교의 본질이자 핵심입니다. (384)

 

다바르를 로고스로 표기한 요한의 작업을 통해 로고스의 의미가 다바르의 의미까지 포괄하여 더 확장된 것이지요. 즉 다바르에 내포된 동적, 인격적, 행위적 성격 그리고 비물질적 세계 초월성이 로고스에 담긴 정적, 지적, 이성적 성격 그리고 물질적 세계내재성과 결합하여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 낸 것입니다. 이는 마치 (앞에서 든 비유처럼) 서로 다른 각도에서 촬영한 두 개의 2차원 영상을 나란히 겹쳐 놓음으로써 보다 실사에 가까운 입체적이고 생생한 3차원 영상을 얻어낸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지요. (386)

 

'말뿐만 아니라 행위로도'라는 구호로 압축되는 예수의 사역이 가진 성격도 함께 부각되었지요. (중략) 예수는 단순히 신의 말을 전하는 교사나 선지자가 아니고, 그 자신이 곧 '말씀(logos)'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은 발화와 동시에 언제나 그것이 뜻하는 행위가 함께 이루어지는 수행적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388)

 

말로 천지를 창조한 신도 말만으로 구원하지는 않는다는 것이지요. 행동이 함께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고 기록된 성육신에 담긴 또 하나의 심오한 의미입니다. 요컨대 진리를 아는 자나 말하는 자가 아니라, "진리를 행하는 자가 빛으로 나아간다"는 것이지요. (388)

 

로고스와 다바르의 이러한 종합은 정지적인 그리스의 존재 개념과 역동적인 히브리의 존재 개념이 종합을 이루어 영원불변 하는 동시에 생성, 작용하는 기독교적 신 개념이 형성된 것과 궤를 같이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불변하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생성, 작용하는 신의 본질', '불변하는 진리'인 동시에 '창조하는 신의 말씀'이 가진 아름다운 통일성을 찾아볼 수 있지요. (388)

 

 

5장 창조의 목적은 무엇인가?

풍요한 부자가 무엇이 필요하여?

구약시대부터 창조는 일회적 사건이라기보다는 시간에 따라 계속되는 '신의 역사'의 시작이자 일부로 이해되었습니다. (393)

 

신은 피조물을 창조할 뿐 아니라 지속적으로 보존하고 또 끊임없이 인도한다는 것이지요. (393)

 

창조가 태초에 이루어진 일회적인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일어나는 것이며 보존하고 인도하는 신의 사역으로 재차 강조되었지요. (393)

 

보존은 구분되는 창조의 행동이 아니라 계속되는 창조다. (393)

 

"인간의 마음은 창조 안에서 하나님의 힘을 한때 깨닫고서 그 자리에서 멈추고 만다. (중략) 그러나 믿음은 진실로 그 지점에서 더 전진해야 한다. 믿음은 창조주로서 알려진 하나님을 영원한 통치자와 인도자로서 인식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세상과 우주의 움직임을 운행하시며, 작은 새에 이르기까지 모든 피조물을 보살피시고 유지시키고 먹여 주신다."

- 칼빈 (394)

 

기독교인들에게는 창조에 대한 언급이 단순히 지나간 과거의 일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지금 이 순간에도 진행되고 있는 신의 사역에 대한 신앙고백의 성격을 늘 갖지요. 창조에 대한 이러한 해석은 창조의 의미와 목적에 대한 질문과 자연스레 연결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신은 무슨 목적으로 만물을 창조해서 보존하고 인도해 가느냐의 문제가 기독교 신학 안에서 이야기되었지요. (396)

 

롱사르는 신이 어떤 결핍도 없이 오직 자족과 풍요만 있었는데도 세계를 창조했다고 읊고 있지요. 이제 반해 노리스는 그렇다면 신은 무엇 때문에 자신의 자족을 향유하지 않고 굳이 창조를 했느냐고 꼬집고 있습니다. (397)

 

신의 작업에는 어떤 이유도 없다

플라톤은 "선이란 그것을 소유한 존재는 언제나 모든 점에서 가장 완벽하게 충족되며 어떤 것도 부족함이 없다는 점에서 다른 모든 것과 본질적으로 다르다" 라고 설명했지요. '선자체'로서의 '일자'는 언제나 완전하게 자족적이기에, 그에게는 자기 자신 외에 그 어떤 것도 필요치 않습니다. (398)

 

신은 도대체 왜 자족 상태를 향유하지 않고 물질세계를 창조했는가 하는 의문 말입니다. (중략) 플라톤은 한마디로 일자의 '자기초월적 풍요성' 때문이라는 것이었지요. (중략) 일자는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을 정도로 '자기충족적'이기에 풍요성을 갖게 되었고, 그 풍요성을 급기야는 자기 바깥으로 넘쳐흘러 자연스레 창조가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중략) "일자는 아무것도 추구하지 않고 소유하지 않으며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에 완전하다. 완전하기 때문에 넘쳐흐르는 것이며, 따라서 그 넘치는 풍요함이 또 다른 존재를 만든다." 요컨대 유한한 존재물을 생성시키는 원인은 무한한 존재의 '자기초월적 풍요성'이라는 이야기입니다. (400)

 

모든 시샘을 스스로 몰아낸 신의 선함은

마치 불처럼 자기 속에서 타올라 빛을 발하는 불꽃같이 영원한 아름다움을 외부에 퍼뜨린다.

- 단테 '신곡'

 

무슨 특별한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라 넘쳐흐르는 풍요라는 자신의 본성 때문에 자연스럽게 창조가 이루어졌다는 말이지요. (400)

 

"정말로 하나님께서는 그의 모든 피조물이 없으셔도 된다. 그런데도 신이 인간을 창조하면서 스스로의 영광은 고려하시지 않으리라고 추론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논쟁에 불과하다. (중략) 비록 하나님께서는 부족함이 없으실지라도 인간을 창조하는 주요 목적은 하나님의 이름이 그 둘 속에서 영광되게 하려는 것이다. (402)

 

도킨스는 "자연선택은 마음도 마음의 눈도 갖고 있지 않으며 미래를 내다보면서 계획하지 않는다. 만약 자연의 선택이 자연의 시계공 노릇을 한다면, 그것은 '눈먼' 시계공이다." (중략) 세계를 창조하고 자신의 특별한 목적에 따라 이끌어 가는 신은 니체의 말처럼 죽은 것이 아니라 아예 처음부터 없었다는 것이지요. (405)

 

다윈의 진화론과 그 영향

근 현대 사상사 전문가인 프랭클린 보머는 '유럽 근 현대 지성사'에서 18세기를 인류 사유의 틀이 "존재로부터 생성을 향한 전환"을 시작한 시대로 규정했습니다. (408)

 

다윈은 "내 마음은 귀납적 방법에 고정되 있고 그래서 나는 연역적 추리를 이해할 수 없다. 나는 대다수의 사실로부터 시작했을 뿐 원리에서 시작한 것이 아니다" 라고 자신의 연구가 귀납주의의 소산임을 분명히 밝혔지요. 하지만 "이론을 만들지 않고서는 어떤 관철도 없다"고 전하면서, 자신이 연역주의자임을 분명히 털어놓았습니다. 실제로 다윈은 '종의 기원'을 쓰기 전부터 진화론에 대한 착상을 먼저 갖고 있었고, 그것을 증명하기에 합당한 관찰들을 오랜 세월 끈기를 갖고 수행한 연역주의자였지요. (413) → 다윈에 대한 조금은 불편한 시각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자연은 동식물을 막론하고 살아남을 수 있는 숫자보다 훨씬 많은 자손을 생산하기(자연의 다산성) 때문에, 자손들 간에 생존을 위한 투쟁(생존경쟁)을 할 수 밖에 없는데, 그 결과 생존에 필요한 조건에 적응하기 위해 변종들이 생겨나고, 그들 가운데 환경에 더 유리한 조건을 갖춘 변종은 살아남지만 그렇지 못한 변종은 자연히 제거되는 선택(자연선택)이 일어난다. (414)

 

다윈은 자연과학 이론인 자신의 진화론을 떠받치는 '생존경쟁' '적자생존'이라는 두 가지 용어를 각각 맬서스와 스펜서의 사회학적 개념들로부터 빌려온 셈이지요. 그런데 바로 이 사소한 학문적 행위가 그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사회진화론과 연결되어 엄청난 사회적 불행을 초래하는 징검다리가 되었습니다. (416)

 

피에 물든 이빨과 발톱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자연이 '피에 물든 이빨과 발톱'이 지배하는 원시적 공간이라는 것과 인간사회가 그렇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의미를 갖는다는 사실입니다. 우선 인간사회가 자연의 일부라고는 해도 자연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인간이 동물로부터 왔다고 해도 동물로서만 살아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간사회는 우리가 만들어 가는 것이기 때문에도 그렇지요. '만들어 간다'는 데는 ' (또는 바람직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가치 기준이 전제되어 있으니까요. (418)

 

사회학에서 나온 '생존경쟁' '적자생존'이라는 개념들이 다윈에 의해 비유적 의미로 자연에 적용됨으로써 자연으로부터 절대적 정당성을 인정받은 다음, 다시 사회학으로 당당하게 돌아오는 과정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자연은 신의 빛을 드러내" 보이며 "그것은 분명하고 변함이 없으며 보편적인 빛" 이어서 자연의 법칙인 생존경쟁과 적자생존에는 과오가 있을 수 없으며, 같은 이유로 인간사회에 그대로 적용되는 것이 당연하다는 논리와 믿음이 당시 서구사회에 만연했던 것이지요. 요컨대 19세기 서양 사람들의 믿음은 자연적인 것은 사회적이기도 하다(또는 사회적이어야만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그것이 그들이 사회다윈주의를 거부감 없이 받아들인 근원적 이유였습니다. 그러나 '생존경쟁' '적자생존'은 사실상 신의 빛도 아니고, 분명하고 변함없는 보편적 빛도 아니지요. (421)

 

19세기 후반은 유럽만이 아니라 북미 대륙에도 사회다윈주의가 그 위세를 맹렬히 떨치던 시기였습니다. 당시에는 서양문명 전반에 걸쳐 개인주의자들은 무자비한 방임을, 자유주의자들은 무제한 경쟁을 요구했고, 우생학자들은 동족 내의 신체적, 정신적, 경제적 약자들의 합법적 제거를 부르짖었으며, 인종주의자들은 자국 내의 열등한 인종이나 외국인 추방을 외쳤고, 제국주의자들은 아프리카나 아시아 대륙을 미개지로 몰아 계몽 또는 선교라는 미명 아래 정복을 감행했습니다. 그런데 이들 모두가 하나 같이 사회다윈주의를 내세워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했지요. (424)

 

우리가 주목하고 싶은 건 자연상태와 마찬가지로 인간사회에도 치열한 생존경쟁 관계가 존재하고 그 결과 적자생존이라는 비정한 현상이 생겨난다는 것과 그것이 사회적으로 정당화된다는 것 사이에는 엄청나 차이가 있어요. 우리는 사회에 존재하는 부당한 조건과 환경을 시정해 살 수 있으며 또 부단히 그래야만 하는데, 어떤 것이 일단 사회적으로 정당화되고 나면 그것을 시정하기가 무척이나 어렵기 때문이지요. 20세기 후반 사회생물학에 바통을 넘겨주기까지는 사회다윈주의가 바로 그런 부당한 일을 자행했습니다. (424)

 

자연은 선하지도 않고 악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인간과 사회는 분명 선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하며, 바람직할 수도 있고 바람직하지 않기도 하지요. 자연과는 달리 인간과 사회는 언제나 가치지향적이고, 또 항상 그래야만 합니다. 따라서 역사는 진보하기도 하고 퇴보하기도 하지요. 그런데 19세기 후반부터 자연을 따라 인간사회에서도 생존경쟁과 적자생존을 정당화하는 스펜서의 사회다윈주의와 함께 자유, 평등, 박애를 지향하던 이성과 계몽의 역사가 빠르게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425) → 저자의 주장이 강하게 베어 있는 부분이다. 아마도 저자는 이 지점에서 인간이 정원사에서 사냥꾼으로 변모해 갔다고 여겼을 것이다.

 

경쟁이란 동물세계에서나 인간세계에서나 진화의 원리가 아니다. 그것은 동물들 사이에서도 번식기 같은 극히 예외적 시기로 국한되며 (중략) 진화의 더 나은 조건은 협동에 의한 경쟁 소멸에 의해 만들어진다. (427)

 

나쁜 선택에는 나쁜 결과가 따르는 법이지요. (427)

 

그들(사회다윈주의자)은 자신들의 정당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부당한 수단을 제 스스로 정당화했던 것입니다. (428)

 

독일 출신 유대인 정치학자 한나 아렌트가 지적한 '악의 평범성'은 이렇게 언제 어디에나 웅크린 채 숨어 있습니다.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의 본질이 무사유라고 설파했지요. 무사유는 일반적으로 '사려 깊지 못함'을 뜻하지만, 그녀는 이 단어를 보다 실천적 의미로 '자신이 하고 있는 행위에 대한 반성의 불능 또는 거부'를 지칭하는 데 사용했습니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사회다윈주의자 들이 바로 그렇게 행동했고, 아렌트가 경악했던 나치의 유대인 학살은 그 역사적 귀결이었어요. (429)

 

다윈과 기독교

다윈은 '인간의 유래'에서 인간이 하등동물로부터 진화했음을 역설하고 멀지 않은 장래에는 문명화된 우세 인종이 야만적인 열등 인종을 대치할 것이라면서, 그의 가슴 속에 오랫동안 숨겨온 신념을 드러냈습니다. (430)

 

니체에 의하면 도덕적으로 진화한 그 새로운 인간이 바로 '초인'이지요. 이 일을 수행하면서 니체는 인간에 대해 다윈보다 훨씬 낮은 평가를 함으로써, 자신이 주장하는 도덕적 진화의 필수불가결성을 극대화했습니다. 그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중략) 초인에게 인간은 이같이 웃음거리가 아니면 비참한 굴욕일 뿐이다.

그대들은 구더기에서 인간으로의 길을 걸어왔도다.

그러나 그대들 속에는 아직도 많은 것이 구더기로 남아 있구나.

일찍이 그대들은 원숭이였다.

그러나 그대들은 아직도 어떤 원숭이보다 더한 원숭이인 것이다.

 

→ 의외로 니체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듯 하면서도 궁극적으로는 긍정적 시각에서 바라본다. 저자가 어떤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신의 창조가 구원의 시작이라는 것이 기독교의 오랜 교리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어떤 기독교인이 신이 자기를 창조했다고 말할 때, 그건 결코 특정한 자연과학적 원리를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고 신이 자기를 구원한다는 종교적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중략) 다윈이 '인간의 유래'에서 밝힌 새로운 진리에 의하면, 인간은 신이 구원이라는 특별한 목적에 따라 창조한 것이 아닙니다. 인간도 원숭이와 마찬가지로 하찮은 동물로부터 우연히 진화했을 뿐이라는 것이지요. 이러한 생각이 도달하는 결론은 뭘까요? 당연히 인간의 구원이나 부활에는 그 어떤 보장도 없다는 겁니다. (433)

 

오늘날 우리가 그렇듯이, 19세기의 유럽인들도 나날이 발전하는 산업과 과학을 통해 현세에서는 물질적 삶을 충분히 즐기고, 일주일에 한 번 교회에 가는 종교생활을 통해 내세에서는 영원한 삶을 얻으면 그만이라는 세속적 낙관주의에 빠져 있었습니다. 다윈과 동시대에 살았던 덴마크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가 평생 온몸으로 저항하며 싸웠던 것이 바로 그러한 세속주의였지요. 그는 "대중과의 싸움, 평등이라는 폭정과의 싸움, 피상성, 난센스, 저열성, 야수성이라는 악동과의 싸움에 비하면 왕이나 교황과의 싸움은 오히려 쉽다"라고 한탄하기도 했습니다. (435)

 

매슈 아널드에 따르면 당시 영국의 계급사회는 영적으로도 지적으로도 한심한 상황에 빠져 있었지요. 상류층은 야만적이었고, 중산층은 속물이었으며, 서민들은 누가 뭐라 하든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진화론의 사회적, 종교적 함의를 당시 기독교인들이 그다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은 근원적인 이유였지요. (436) → 아. 이런 역사적 배경이 있었구나.

 

19세기 기독교인들이 진화론에 민감하게 대적하지 않았던 두 가지 이유

① 다윈 자신은 물론 헉슬리 같은 당시 다윈주의자들이 진화론이 반드시 무신론과 연결된다고는 주장하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그들은 '현명하게도' 이른바 불가지론을 내세웠습니다. (중략) 유신론자들, 무신론자들, 관념론자들을 싸잡아 조롱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하기 위해 이 말을 만든 것이지요. (436)

 

② 진화론 외에도 이신론, 인류교, 자유주의 신학, 실증주의, 유물사관 등의 부단한 도전에 지쳐 있던 19세기 후반의 교회가 '약삭빠르게' 진화론에 대해 유화적 태도를 취했기 때문이지요. (439)

 

창조론은 진화론을 수용할 수 있나

존 호트는 "다윈 이후의 시대에는 당연히 신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이전과 완전히 같을 수는 없다. 하지만 진화가 반드시 창조와 섭리의 신에 대한 신뢰를 감소시키는 것은 아니다. 사실상 오늘날 사려 깊은 많은 유신론자는 진화가 다윈주의 이전의 세계관이 제공했던 것보다 훨씬 더 깊이 신을 이해할 수 있게 해 준다고 여긴다." 이런 이유로 진화론에서 가차 없이 무신론을 이끌어 내는 것은 잘못이라는 말입니다. (443)

 

호트에 의하면, 진화가 창조의 메커니즘 가운데 일부라고 볼 수 있는 근거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① 하나는, 우주는 생명체가 존재하기 오래 전부터 이미 복잡성이 증가하는 쪽으로 자기조직을 하는 본유적 경향성을 갖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중략) 진화는 이렇게 생명 없는 물질에까지 이미 널리 퍼진 자기조직이라는 신의 창조적 경향 가운데 극히 작고 거친 한 부분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② 또 다른 근거는 신학자 칼 라너가 주장했듯이 무한자인 신의 사랑을 유한자인 우주가 받아들이려면 '진화하는 것'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는 것입니다. 신이 진화가 맹목적으로, 즉 미결정적 방식으로 이뤄지도록 창조한 것도 바로 이 사랑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 세계에 일정한 자유와 우연성을 허락하는 것이, 강제하는 것보다는 설득하기를 원하는 신의 사랑에 합당하다는 말입니다. (444)

 

기독교에서 말하는 성부에 해당되는 '일자'는 전혀 변화하지 않아요. 따라서 창조에도 직접 관여하지 않습니다. 일자는 오직 자기로부터 유출된 '정신' '영혼'을 통해서 사물을 생성하고 사물에 작용하지요. 이 때 성자에 해당하는 정신은 신의 영원한 형상을 자신 안에 생성합니다. 이 형상이 자연물의 범형이 되기 때문에, 플로티노스는 그것을 '종자적 형상' 또는 '자연의 씨앗'이라고 불렀지요. 그리고 성령에 해당하는 영혼은 그것들이 현실화 되는 '원리'이자 '운동능력'으로 작용해서 모든 물질세계를 순차적으로 창조해 냅니다. (448) → 삼위일체 이론이 창조를 위한 거푸집의 역할도 하는구나

 

기독교 신학에서도 성부는 창조에 직접 개입하지 않지요. 창조를 하는 이는 성자인데, 그는 자신 안에 있는 성부의 영원한 형상들을 '현실화 원리'인 성령을 통해 차례로 구현합니다. (448)

 

신은 세계를 직접 창조한 것이 아니라 세계 영혼(또는 성령)에게 '세계를 현실화하는 질서와 과정'을 부여해 그에 의해 창조가 차례로 일어나게 했다는 말이지요. (449)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세계는 태초에 시간과 함께 창조되었지만, 이때 만물이 모두 '가시적으로 그리고 현실태로' 창조된 것은 아니지요. 특히 땅에 거주하는 생명체들은 '감추어진 씨앗'의 형태, "나무의 씨앗 속에 시간에 따라 점차 나무로 자라날 모든 것이 비가시적으로 함께 존재하는 것처럼" 잠재적으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는 이것을 '종자적 형상'이라고도 불렀는데, 이 때문에 생명체들은 이후 신의 섭리에 따라 정해진 시간에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형태로 나타나게 되지요. (450) → 어쩌면 내가 생각하는 것들이 다 여기에 들어가 있을 수 있을까? 바로 이 씨앗의 비유가 창조에 대해 한방에 이해해 줄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아퀴나스는 "모든 운동은 가능태를 현실태로 바꾸는 현실화이며 영혼이 생물에 내재하는 이 현실화의 원리를 성취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을 자신의 신학에 끌어들여 창조를 이해했지요. 그 결과 그는 신이 세계를 창조할 때 세계를 숱한 인과관계 속에서 순차적으로 가능태를 현실태로 변화시키는 원리, 곧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운동(또는 변화)의 네 가지 원인 중 하나인 '능동인'들과 함께 창조했다고 생각했습니다. (451)

 

창조는 일시적 사건이 아니고, 전체적 혹은 부분적으로는 신이 그에 직접 개입하지도 않았으며, '우연적이고 자발적으로' 운행하는 어떤 원리에 위임해서 순차적으로 일어나게 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자연은 신의 직접적 통치가 아니라, 신이 창조할 때 함께 부여한 어떤 통치의 법칙, 곧 오늘날 우리가 자연법칙이라고 부르는 법칙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운행되어 나간다는 것입니다. (454)

 

그렇다면 자연선택이라는 다윈의 '진화원리' 또한, 신이 만들어 지속적 창조를 위임한 '현실화 원리' 내지 '자연법' 또는 '영원한 법칙'의 일부로 받아들이지 못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454) → 창조론은 결코 진화론을 배격하지 않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는 대목이다.

 

이것만은 분명합니다. 만일 기독교 어느 종파나 교파가 원하기만 한다면, 기독교 신학은 큰 틀에서 진화론을 받아들일 이론적 바탕을 오래 전부터 갖고 있었다는 것이지요.(456)

 

'신은 진화라는 메커니즘을 통해 창조한다'고 주장할 수 있는 이론적 근거를 기독교가 이미 오래 전부터 확보했다는 것과, 약간의 장애물만 제거하면 창조론이 진화론을 수용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457)

 

천 년이 지나간 어제같은 문제

창조론이 진화론을 수용하는 데 걸림돌이 되는 요소들

① 하나는 세계 안에 존재하는 모든 생물과 그것들이 지닌 경이로운 복잡성, 정밀성은 '태초의 6' 이라는 어느 특정시기에 일회적으로 창조된 것이 아니고, 자연이 오랜 세월 동안 부단히 진화한 결과라는 주장입니다. ② 다른 하나는 진화가 어떤 외부적인 원인이 설계한 특별한 목적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자연선택이라는 자체 메커니즘에 의해 '자발적'이고 '맹목적'으로 일어난다는 것이지요. (458)

 

구약성서에 기록된 태초의 엿새가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6일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시간 안'이 존재인 우리의 관점에서는 장구한 세월이 '시간 밖'의 존재인 신의 관점에서는 일시적인 것임을 해명할 수 있는 성서적, 신학적 이론들을 기독교 신학은 이미 오래 전부터 갖추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구약시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창조가 일회적 사건이 아니라 시간 안에서 계속되는 신의 역사라고 주장하는 기독교 교리와 신학도 이미 확보되어 있지요. 이를테면 칼빈이 신을 창조 이후 가만히 쉬고 계신 분이 아닌, 세상을 자신의 섭리대로 이끌기 위해 "키를 잡은 배의 선장 같은 분"으로 교훈한 것이 그 한 예입니다. (459)

 

신학은 특정 교리를 영구불변 하는 진리로 주장하는 체계라기보다는, 그것의 시대적 해석이 적절한지 또는 수용가능한지를 늘 질문하면서 성서와 전통적 사상들을 통해 부단히 재고해 나가는 하나의 과정입니다. (460)

 

훌륭한 연설가가 청중을 미리 알고 자신의 연설을 청중의 눈높이에 맞추듯이, 신이 계시를 할 때도 계시를 받는 사람들의 이해 수준에 맞추었다는 것이지요. (461) → 신학의 존재 이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역시 신학을 전공한 사람답다.

 

아놀드 토인비가 전체 기독교 신학의 탐구는 인간의 문명처럼 "어떤 상태가 아니라 운동이며, 항구가 아니라 항해" 라고 비유한 것은 매우 적절하다고 할 수 있지요. 기독교 신학은 항상 성서에 근거해야 하지만, 그것은 마치 역사학이 그렇듯이 언제나 과거와 현재 사이의 창조적 상호작용 속에서 재해석, 재정립되기 때문이에요. 창조론도 예외가 아닙니다. 다른 교리들과 마찬가지로 창조론 역시 성서 텍스트와 전통적 신학 그리고 당대 학문과의 창조적 상호작용을 통해 재해석되어야 마땅하지요. (461)

 

창조의 합목적성과 진화의 맹목적성(또는 우연성)을 조화시킬 만한 이론을 기독교는 확보하고 있는가?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가? 바꿔 말하자면,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신의 필연적 계획 안에서 진화의 우연성을 모순 없이 설명할 수 있는 전통적 신학 이론이 있는가? 만일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가? (462)

 

눈먼 시계공과 눈뜬 하나님 문제

아우구스티누스는 이처럼 신의 예지와 인간의 자유의지가 상충하지 않고 양립한다는 말로, 사람이 자유의지로 죄를 범하는 것이 아니라는 에보디우스의 연언전제를 논파함으로써 딜레마를 물리칩니다. 인간이 자유의지로 어떤 일을 행한다는 말도 옳고, 신이 그것을 미리 알고 있다는 말도 옳다는 내용이지요. (467)

 

양립주의란 인간의 자유의지가 신의 예지와 상충하지 않고 존재할 수 있다는 관점의 주장들을 말하지요. (467)

 

신이 어떤 일(A)을 일어날 것임을 예지한다면 그렇다고 해서 인간의 자유의지가 침해 받지는 않습니다. 이때 신은 그 일(A)의 원인으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일(A)이 일어날 것이기 때문에 예지하는 것이거든요. (468)

 

신은 무한하므로 우리를 강제하지 않고 자유의지를 허락한다 하더라도 우리가 매 순간 자유의지로 행할 일들의 모든 가능성과 경우의 수를 미리 알아서 준비한다는 것이지요. (469)

 

'프랑크푸르트 스타일' 이론의 핵심은 설령 우리가 다르게 행동할 수 없다는 것이 사실이라 해도, 만일 우리가 그 사실을 모른다면 우리의 행동이 자유롭다는 것은 여전히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469)

 

'프랑크푸르트 스타일'은 우리에게, 양립주의가 모든 경우에 성립하지는 않더라도, 어떤 '특별한 조건' 아래에서는 성립할 수 있다는 의미 있는 사실을 가르쳐 주지요. 즉 강제하는 자는 모든 것을 알고 있지만, 강제 당하는 자는 그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다는 '한정된 상황' 아래서는 양립주의가 문제없이 성립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과 인간 사이에는 실제로 바로 그런 특별한 조건이 성립한다는 것, 다시 말해 신은 미래의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조정할 수 있지만 인간은 그에 대해 전혀 알 수 없다는 것이 기독교 신학의 전제가 아니던가요! 따라서 인간의 자유의지와 신의 예지 사이에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양립주의가 아무 어려움 없이 성립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470)

 

시간과 영원의 무한한 질적 차이

복잡계란 무수한 요소가 상호작용해서 어떤 패턴을 형성하거나, 예상 밖의 성질을 나타내거나, 각 패턴이 각 요소 자체에 되먹임 되는 시스템이다. (중략) 복잡계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끊임없이 진화하는 과정에 있는 시스템이다. (471)

 

이미 주어진 저차원의 질서에서 이전에는 없던 고차원의 새로운 질서가 어느 순간 제 스스로 만들어지는 것을, 복잡성 과학에서는 '창발'이라고 부르지요. (472)

 

그들은 단지 자신들의 본능적 욕망이 만든 몇 가지 단순한 규칙을 따라 맹목적으로 움직일 뿐입니다. 그렇지만 사전지식을 갖고 그 모습을 지켜보는 우리는 뱁새와 개미들의 본능적, 맹목적 행위들이 가져올 떼 이동과 둥지 건축이라는 창발적 결과나 목적을 미리 알 수 있지요. (중략) 또한 떼 이동이나 둥지 건축이 뱁새나 개미들에게는 단지 맹목적 적(또는 본능적) 행위가 낳은 우연적 결과겠지만, 우리에게는 합목적적 행위가 가져온 필연적 결과가 되지 않겠습니까? 이러한 차이가 일어나는 이유는 간단하지요. 우리는 뱁새나 개미와 시간적, 공간적, 그리고 무엇보다 지능적으로 전혀 다른 범주와 차원에서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473)

 

인간을 극대화한다고 해서 신이 되는 게 아니고 시간의 극대화가 영원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474)

 

"누군가가 사물에 대해 더 많은 지식을 가졌다고 해서 그게 무슨 대수겠는가. 그가 그런 지식을 가졌다면 좀 더 높은 곳에서 내려다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한에서는 여전히 멀지 않은가. 그리고 우리의 수명이 10년 연장된다 해도 영원 안에서는 똑같이 미미한 게 아닌가. 무한()에서 보면 모든 유한(피조물)은 동등하다"

- 블레즈 파스칼 (474)

→ 결국 인간은 결코 신에 이를 수 없음을 이야기 하는 것인가?

 

아우구스티누스가 주목한 대로 신은 '시공 밖'의 존재이고 인간은 '시공 안'의 존재입니다. 그래서 신은 토마스 아퀴나스가 비유했듯이 "마치 높은 망대에 오른 사람이 여행자들의 여정 전체를 처음부터 끝까지 한 눈에 직관하는 것처럼" 인식하지요. 한마디로 신과 인간의 인식은 판단의 범주와 차원이 전혀 다르다는 것입니다. , 바로 이겁니다. 이렇기 때문에 우리가 '프랑크푸르트 스타일'을 받아들이고 신과 인간 사이에 존재하는 무한한 질적 차이를 인정한다면, "그런즉 하나님은 모든 미래사를 예지하신다는 사실을 우리가 부정하지 않으면서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바를 원하는 것이다" 라는 아우스티누스의 양립주의적 교훈을 수긍할 수 있다는 말이지요. (474)

 

인간의 자유의지와 신의 예지 사이에서 발생하는 에보디우스 딜레마가 진화의 맹목적성과 창조의 합목적성 사이에서 생기는 딜레마와 똑같은 형식이라는 점에 주목하려 합니다. 인간의 자유의지와 진화의 맹목적성은 둘 다 비결정적이라는 점에서, 신의 예지와 창조의 합목적성은 모두 결정적이라는 점에서, 두 문제는 똑같은 형식의 딜레마를 만들지요. 또한 인간과 자연에 그 같은 자유(인간의 자유의지, 자연의 맹목적성)를 허락한 것이 신의 사랑에서 기인했다는 점도 똑같습니다. 당연히 그 해법도 형식이 같아야겠지요? (476)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연의 모든 진행이 필연적이라면 진화는 맹목적 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라는 에보디우스의 연언전제를 부수는 '뿔로 잡기'를 시도합니다. 즉 신의 섭리에 의한 합목적적 예정이 자연의 맹목적 적 진화를 '반드시' 배제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이어서 그는 이렇게 선언합니다. "그런즉 하나님이 모든 미래사를 합목적적으로 예정하신다는 사실을 우리가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우리는 자연이 맹목적 적으로 진화한다고 할 수 있다." (477)

 

예컨대 당신은 토마스 아퀴나스를 따라 이렇게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본래적 원인'이자 제1원인인 신은 '우연적 원인'이자 제2원인인 진화법칙에 자연의 창조와 진행을 맡겼지만, 2원인 역시 제1원인에 의해 창조되고 조정된다. 내 말의 요점은, 우연성(맹목적성)은 제2원인의 속성이고 필연성(합목적성)은 제1원인의 속성이라는 것이다. 2원인과 제1원인은 전혀 다른 차원에서 작용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이 합목적적으로 창조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자연이 맹목적 적으로 진화한다고 말 할 수 있다." (477)

 

당신이 어떤 해법을 생각했든 공통점은 있습니다. 진화의 맹목적성과 창조의 합목적성은 같은 범주나 같은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아우구스티누스를 따라 "그런즉 하나님이 모든 미래사를 합목적적으로 예정하신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우리는 자연이 맹목적 적으로 진화한다고 말할 수 있다" 라고 주장할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한발 더 나아가 다윈과 함께 열렬한 유신론자인 동시에 진화론자가 될 수 있다고 선포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478)

 

()가 제한 받지 않고 스스로 물러나서

나의 선을 나타내지 않지만, 이는 하든,

안 하든 자유요, 필연과 우연은 내게 접근하지 못하니, 내 뜻이 곧 운명이니라.

- 밀턴 '실낙원' (478)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신이 섭리에 의해 자연을 합목적적으로 진화한다는 것도 옳고, 자연이 우연성에 의해 맹목적 적으로 진화한다는 것도 옳다'고 믿는다 해도, 그것은 결코 신의 필연적 섭리와 자연의 우연적 법칙이 대등하게 옳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단지 신의 필연성이 자연의 우연성을 창조하고 지배하며 이끌어 간다는 의미일 뿐이지요. 한마디로 '필연과 우연은 신에게 접근하지 못하니, 신의 뜻이 곧 운명'이라고 기독교인들은 말하고 있는 겁니다. 물론 여기에는 '바로 그렇기 때문에 설령 인간이 진화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해도 여전히 신의 피조물이기 때문에 신에 의해 구원받을 수 있다'는 믿음이 함께 담겨져 있지요! (479)

 

창조의 목적은 구원

전통 기독교 교리가 지지하는 창조의 목적은 과연 무엇일까요? 아우구스티누스는 물론이고, 동방정교와 서방 가톨릭이 고대로부터 취하는 일관된 관점은 창조의 목적을 구속사와 연관시키는 것입니다. 요컨대 인간과 세계를 궁극적으로는 신성에 참여시키는 만물의 신성화를 위해 창조가 이뤄졌다는 주장이지요. 여기에는 분명 그리스도의 사역을 부각함으로써 기독교의 창조론을 유대교의 창조 신앙과 구분 지으려는 의도가 들어있습니다. (480)

 

오리게네스는 "하나님은 '만유'일 것이다. 선과 악이라는 구분이 더는 없을 것이며 악이 어디에도 없다는 사실을 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중략) 개체가 정화되고 깨끗이 된다. 이때 홀로 계시며 한 분이신 선한 하나님이 그 개인에게는 만유가 된다. 또한 소수의 개체나 다수의 개체가 아니라 그분 자신이 '만유 안의 만유'이시다. 죽음과 죽음의 독침과 그 어떤 악도 더는 없을 것이다. 이때 하나님께서 정말로 '만유 안의 만유'이실 것이다." 라고 주장했습니다. (481)

 

토마스 아퀴나스는 "만물의 궁극적 목적은 신의 선성이다. 창조된 모든 것에서 출생과 완전성의 목적은 행위 하는 자 또는 출생시키는 자의 형상이며, 그것들은 바로 그 형상의 유사성에 도달하게 된다. 그러나 제1 작용자, 즉 신의 형상은 그의 선성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만물은 신의 선성과 닮기 위해서라는 이유로 만들어졌다." 라고 주장했습니다. (482)

 

신이 행하는 일은 모두 피조물의 구원을 위해서이며

(신은) 스스로의 만족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우리에게 구하지 않는다.

거대한 바다에 대해 물방울 하나가 무엇이란 말인가?

- 헨리 모어 '영혼불멸' (482)

 

칼 바르트도 창조를 신과 인간 사이에서 이뤄지는 구원의 역사를 가능하게 하는 시발점으로 보았어요. 창조가 없었으면 구원 사역도 불필요했다는 게 바르트의 논리로, 그에게도 창조는 구원의 시작이요 구원은 창조의 목적이었습니다. (482)

 

완전한 신에게는 자족이고 불완전한 우리에게는 은총인 창조의 목적은 오직 인간과 세계구원입니다. 존재자체, 진리자체, 선자체 또는 아름다움자체인 신처럼 온전하게 되는 것이 목적이라는 이야기지요. (484)

 

당신께서는 지선하시니, 피조물이 하나도 없다고 해도

당신의 행복에는 아쉬울 것이 없나이다.

당신께서 만물을 지으시고 다듬어 주신 것은

무슨 아쉬움 에서가 아니라 넘치는 선하심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당신의 즐거움이 그것들로 인해 채워지기 때문이 아닌 것입니다.

불온전한 피조물들이 온전하신 당신의 마음에 들 리가 없고,

도리어 그것들이 당신에 의해 완전케 되어야만

당신의 마음에 드실 것입니다.

-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론' (485)

 

 

4부 신은 인격적이다

"가장 비참한 비극은 신의 섭리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것이요,

가장 큰 축복은 이 신의 섭리를 인식하는 것이다"

- 요한 칼빈 '기독교 강요'

 

네로는 모든 향락주의자들이 필히 가질 수밖에 없는 자신의 불안과 결국 패배할 수밖에 없는 힘든 전투를 벌이고 있었던 게 아닐까요? (490)

 

바울은 기독교를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해" 신이 택한 도구이었습니다. (491)

 

6장 아테네와 예루살렘이 무슨 관계가 있나

세네카의운명

연회에 초대된 사람은 너무 일찍 자리를 떠나 주인을 섭섭하게 해서도 안 되지만, 너무 늦게 떠나 주인에게 폐가 되어서도 안 된다는 것이었지요. (498)

 

나는 누구와도 싸우지 않았노라.

싸울만한 가치가 있는 상대가 없었기에.

자연을 사랑했고, 다음으로는 예술을 사랑했다.

나는 삶의 모닥불 앞에서 두 손을 쬐었다.

이제 그 불길이 가라 앉으니 나 떠날 준비가 되었노라.

- 새비지 랜더 '죽음을 앞둔 어느 늙은 철학자의 말' (498)

 

신의 법인 '자연법'이 인간들의 '실정법'보다 우선되는 것은 서구에 내려오는 오랜 전통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자연법사상'이라고 부르는 이 전통은 "인간의 모든 법은 신의 법에 의해서 명맥을 유지한다" 라는 헤라클레이토스의 말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지요. (498)

 

플라톤은 자연법사상의 근간이 된 분여이론과는 별도로 신의 법(자연법)과 국가법(실정법)이 형제이며 동등하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 같은 주장은 '법률'에도 나오는데, 여기에는 플라톤이 말하는 철인왕이 다스리는 이상국가라는 전제가 놓인 것으로 볼 수 있다. 플라톤이 설계한 이상국가에서는 신의 법(자연법)과 국가법(실정법)이 충동하지 않고 서로를 지탱해 준다. (499)

 

스토아 철학자들이 말하는 로고스가 바로, "항상 살아 있어서 왕의 법령이라도" 감히 어길 수 없는 하늘의 법, 곧 자연법입니다. (500)

 

로마의 절충주의 철학자 키케로는 "모든 사람의 전면적 동의는 자연법으로 인정되어야 한다"라고 말하며 '보편적 법칙'과 자연법을 동등한 것으로 보았지요. 이후 로마의 법학자들도 자연법과 만민법을 동일시 했습니다. (중략) 아우구스티누스도 같은 이유로 자연법을 '영원법'이라 불렀습니다. (중략) 토마스 아퀴나스도 신학대전에서 이렇게 말했지요. "사물들의 실제적 주권자인 신 안에 존재하는 통치 개념이 자연법이다. 그렇다면 신의 정신은 시간 안에서는 생각할 수 없기 때문에 영원의 개념을 지니며, 그 법칙은 영원법이라고 불려야 한다. 현재 인간 이성이 도달한 구체적 결과들은 그것이 이미 진술한 자연법의 조건을 만족시키는 경우에 '인정법'이라고 불린다. (501)

 

계몽주의자 몽테스키외도 "법이란 가장 일반적 의미에서 사물의 본성에서 도출되는 필연적 관계를 말한다. 개개의 이성적 존재는 그들이 만든 법을 갖고 있을 테지만, 그들이 만들지 않는 법도 갖고 있다. 그들이 존재하기 이전에 그들은 가능적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가능적 관계, 즉 가능적 법을 갖고 있다. 실정법이 만들어지기 이전에 가능적 법관계가 있었다. 실정법이 명령하고 금지하는 일 이외에 공정하다거나 불공정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고 말하는 것은 마치 누군가가 원을 그리기 전에는 원의 모든 반지름이 똑같지 않다는 주장과 같다." (501)

 

이처럼 서양문명에서 로고스는 신의 섭리로서 '영원법'이자 인간이 따라야 할 모든 법과 도덕의 근거인 '자연법'으로 인식되어 왔습니다. 따라서 서양인들은 근원적으로 자연법은 '정당하기 때문에 법'이고, 실정법은 '명령되었기 때문에 법'이라고 생각해 왔지요. (502)

 

로고스는 또한 인간의 이성이기도 했습니다. 이간은 로고스(이성)를 자기 정신 안에 지니고 있기 때문에 자연과 사회 안에 있는 로고스, 곧 자연법칙과 도덕법칙을 인식하고 따를 수 있는 것이 스토아 철학자들의 생각이었지요. "나면서부터 로고스를 나누어 가진 자에게는 올바른 이성도 법칙도 주어져 있다." 라는 것이 그들의 구호였어요. 그렇지만 그 이성에 의해 파악되어 우리에게 주어지는 신의 법칙인 섭리는 인간이 부단히 따라가야 할 복종의 길일 뿐 인간의 삶에 깔려 있는 희망과 절망, 기쁨과 고통과는 무관한 것이었습니다. (502)

 

세네카는 섭리를 따르는 일이 때때로 "슬프고 무섭고 견디기 힘든 일"이지만 용기를 내서 참고 견뎌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중략) 세네카는 이렇듯 섭리를 필연적인 것, 즉 운명으로 생각했는데요, 이는 스토아 철학의 전통이기도 했습니다. 섭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결정되어 있어서 우리가 분개하고 불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참고 견뎌야 하는 신의 뜻이지요. 독일의 문화 철학자 요슈발트 슈펭글러는 "네가 동의하면 운명은 너를 인도하고 네가 동의하지 않으면 운명은 너를 강제한다"라는 세네카의 말도 그래서 나온 겁니다. (503)

 

고대철학의 중요한 임무 중 하나는 인간의 삶과 죽음에 도사린 두려움을 제거하는 것이었습니다. (503)

 

가난을 무시해라.

태어날 때만큼 가난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고통을 무시해라.

고통은 사라지거나 너희와 함께 끝날 것이다.

죽음을 무시해라.

죽음은 너희의 고통을 끝내 주거나 다른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

- 세네카 (504)

 

스토아 철학자들이 운명에 복종할 것을 권할 때, 그들은 인간이 이성을 통해 "슬프고 무섭고 견디기 힘든" 운명을 제 스스로 따름으로써 우주의 섭리인 로고스와 합일하면 '존재론적 승화'가 이루어진다고 생각했지요. 그래서 결국에는 신들보다 더 위대해진다는 것입니다. (504)

 

스토아 철학자들은 스스로 고통을 극복했기 때문에 고통을 아예 모르는 신보다 더 우월하다는 이야기지요. 그래서 세네카는 참된 스토아 철학자는 '신들 위의 신'이라고 주장했습니다. (505)

 

죽음이 육체라는 감옥에 갇힌 영혼을 해방시켜 신이 되게 해준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이지요. (505)

 

로마제국도 기독교의 적수는 아니었다. 여기서 놀라운 것은 기독교에 중대한 위기를 초래한 것은 네로처럼 제멋대로인 폭군도, 줄리안 같은 광신적 반동주의자도 아닌, 도리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같은 점잖은 스토아주의자였다는 사실이다. (507)

 

바울의예정

우리가 지금 주목하려고 하는 것은 신의 섭리에 관한 부분입니다. (511) → 저자가 신의 섭리를 통해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신의 인격성에 대한 논지를 펼치기 위함이다.

 

바울 또한 이처럼 인간의 모든 일은 오직 신의 섭리에 의해 태어나기 전부터 예정되어 있으며, 이에 대해 누구도 불평하거나 불만을 가질 수 없다고 가르친 것입니다. (512)

 

세네카와 바울의 가르침은 매우 닮았어요. 두 사이에 존재하는 이러한 유사성은 스토아 철학의 로고스 이론이 초기 기독교 교의학과 윤리학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과도 무관하지 않지요. (512)

 

토머스 제퍼슨은 바울이야 말로 "예수의 가르침을 최초로 오염시킨 자"라고 공격했지요. 또 영국의 극작가 버나드 쇼도 "예수의 정신에 바울의 정신적 결점이 덧씌워진 것보다 더 꼴사나운 덧씌우기는 여태껏 저질러진 적이 없다"고 비난했습니다. 이때 이들이 '오염' 내지 '덧씌우기'라고 말한 것이 바로 바울의 가르침 안에 들어 있는 그리스 철학적 요소지요. (513)

 

바울이 자기 사상으로 예수의 복음을 윤색해서 기독교를 일구었다는 게 바울에 대해 부정적 시각을 가진 비평가들의 한결같은 주장이지요. 하지만 우리의 이야기는 바울의 가르침이 그리스 철학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용어와 수사학적 표현 형식에서 그랬을 뿐이며 내용에서는 구약성서와 예수가 전한 복음의 핵심에 닿아 있고, 그것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기독교의 초석이 되었다는 입장을 견지합니다. (514) → 저자는 바울의 입장을 옹호하고 있다.

 

바울이 전한 신앙의 열매들이 비록 그리스 철학적 용어와 표현 형식이라는 그릇에 담겼다 해도, 예수가 나타내고자 하는 바로 그것이었다는 뜻이에요. (515)

 

세네카 섭리 사상의 근원은 플라톤 철학이지요 (516) → 플라톤이 정말 서양문명의 거대한 한 뿌리를 차지하고 있구나.

 

세네카가 말하는 섭리는 앞에서 언급한 대로 마치 자연법칙처럼 우리가 복종할 수밖에 없는 법칙일 뿐 우리의 희망과 절망 그리고 소원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요. 이와 달리 바울이 말하는 섭리의 근원은 당연히 구약성서의 계시입니다. (516)

 

우리가 주목하고자 하는 바는 세네카의 섭리와 바울의 섭리 사이에 존재하는, 도저히 건널 수 없는 간격은 각각의 섭리를 주관하는 신이 인격적이냐 아니야 하는 차이에서 나온다는 점입니다. 세네카의 신은 비인격적이고 바울의 신은 인격적이라는 말이지요. (517)

 

칼빈의섭리

요한 칼빈은 바울을 따라 섭리와 은총을 자신의 신학 기반으로 삼았습니다. (518)

 

"(중략)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힘은 시작 때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우주의 영원한 상태 속에서 온 누리에 영원히 빛나고 있다. (중략)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를 논할 때, 이 말이 하나님께서 천국에 안일하게 앉아서 땅 위에서 일어나는 일을 방관하신다는 뜻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오히려 모든 사건에 대처하려고 키를 잡은 배의 선장과 같은 분이다."

- 칼빈 '기독교 강요' (518)

 

칼빈은 아우구스티누스 같은 라틴 교부들의 저서를 탐독했고, 라블레와 에라스무스의 저서를 통해 당시 유행하던 인문주의를 접했으며, 루터의 종교개혁에도 상당한 흥미를 가졌습니다. (중략) 회심 이후 그는 평생 동안 "오직 성경으로" 라는 구호를 따른 엄격한 성서주의자로 살았지만, 동시에 뛰어난 인문주의자기도 했지요. (520)

 

우리의 이야기와 연관해서 중요한 것은 그가 스토아 철학자들과 기독교인들이 세상과 인간을 지배하는 초자연적 섭리의 존재를 인정한다는 점에서 일치한다고 확신했다는 점이지요. (522)

 

칼빈은 신의 섭리를 세 가지 측면으로 분류했습니다.

① 일반섭리 : 자연질서인데, 신은 모든 행위의 가장 우선적, 직접적 목적을 남겨 둔 채 자신이 창조할 때 부과한 법칙들에 스스로를 일치시키면서 역사한다.

② 특별섭리 : 신은 자신의 종을 돕고 악인을 응징하며 신실한 성도의 인내를 시험하거나 벌을 낼 공의의 심판을 실현한다.

③ 성령의 내적 작용 : 신은 성령을 통해 그가 선택한 자들을 감화시키고 다스려서 거듭나게 한다.

 

이 가운데 둘째와 셋째는 스토아 철학과 무관합니다. 거듭 말하지만, 스토아 철학적 섭리는 우리가 마땅히 따라야 할 도덕법칙으로 작용할 뿐, 우리를 돕고 응징하며 인도하고 심판하며 감화시키고 다스려서 구원하는 일은 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중략) 세네카가 '운명'이라고도 부른 스토아 철학적 섭리는 그야말로 우주적 보편성을 갖고 있어서 어떤 것이든 그 직접적 인과관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질서이기 때문이지요. (523)

 

회심이 신의 섭리에 따라 여러 모양으로 나타나고, 순간적일 뿐 아니라 점진적일 수도 있으며, 외적 의식을 통해서가 아니라 내적 변화를 통해 일어난다는 것을 칼빈은 자신의 개종을 통해 보여주려 했던 것이지요. (524)

 

칼빈은 '시편 주석'의 서문에서 자기 삶이 표면적으로는 제 자신이나 아버지의 뜻대로 진행된 것 같지만 실상은 오직 신의 섭리에 의해 인도된 것임을 누차 강조했습니다. (525) → 다시 말해 이미 정해진 수순을 따른다는 의미다. 신의 섭리 다시 말해 신의 참여를 통해.

 

세네카와 바울, 칼빈을 통해 인간이 도저히 저항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하게' 인간의 삶에 참여하고, 그 출생부터 죽음까지 '끊임없이' 인도하는 신의 어떤 속성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또한 신의 그 속성이 궁극적으로는 우리를 선으로 이끈다는 것도 살펴보았지요. 그들이 '운명'이라 했든 '예정'이라 했든 아니면 '섭리'라고 했든, 기독교 신학에서는 이러한 신의 속성을 신의 '세계 내재성' 또는 '인격성'이라고 부릅니다.  (528) → 바로 여기서 섭리로 인해 이야기하고자 했던 내용이 나온다. 바로 신의 인격성에 대한 설명이다.

 

신의 인격성은 종교로서 기독교를 이루는 근간이자 원천입니다. 왜냐하면 기독교 교리에 의하면 우리는 신의 인격적 속성을 통해서만 신을 실제로 만날 수 있는데 신에 관한 직접적 경험 없이는, 비록 신을 철학적으로 사유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종교적으로 신앙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철학자의 신과 종교인의 신, 아테네의 신과 예루살렘의 신이 판이하게 갈라서는 분기점이지요. (528)

 

아테네의 신

아리스토텔레스는 신을 '부동의 운동자'로 규정했습니다. 그가 말하는 '부동의 운동자'는 언제나 있었고 또 언제나 있을, 영원히 세계에 작용하는 '원리'로서 자기 자신과 세계를 구별할 줄도 모르며, 또한 세계 안에 있는 존재물 들을 돌보지도 않지요. (530)

 

쾌락주의자 에피쿠로스가 계승하고 설파한 이른바 '걱정 없는 신'이라는 개념이 여기서 나왔습니다. (중략) 신들은 쾌락 속에서 살며 더할 나위 없는 지복 속에서 쉬고 있고 다른 신이나 인간들 일에는 간섭하지 않는다. (531)

 

이런 이유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서는 세계를 돌보는 일이 전적으로 인간의 책임으로 주어졌지요. (중략) 질송은 이 정황을 적절하고 날카롭게 비판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와 더불어, 그리스인들은 다툴 여지도 없이 이성적 신학을 획득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종교를 상실해 버렸다." (532) → 저자가 이 책에서 아리스토텔레스와 토마스 아퀴나스를 많이 다루지 않은 이유이기도 한 것 같다.

 

'이성적 신학'을 학자들은 '자연신론'이라고 합니다. 자연신론에서 신은 야훼처럼 창조주이며 세계를 초월하지요. 그러나 그는 야훼와는 달리 자신이 창조한 세계와 인간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지는 않습니다. 세계는 오직 그가 만든 자연법칙과 도덕 법칙에 의해 자동적으로 운행될 뿐이지요. 그래서 자연신론자들은 자연법칙과 도덕법칙을 매우 중요시 합니다. (532)

 

"신은 실체들을 창조하고 필요한 법칙을 부여한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그 법칙을 그들 자체에 맡기고 그들 자체에 대한 작용 가운데서 유지되게 하는 일 외에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 라이프니츠 (533)

 

인간은 오직 자기 정신 안에 들어와 있는 로고스인 이성을 믿고 도덕법칙에 의지해야 하지요. 그에게는 그것이 신에게로 다가가는 유일한 '구원의 길'이기도 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스토아학파의 섭리와 기독교의 섭리가 둘 사이에 존재하는 많은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여지 없이 갈라서지요. (535) → 세네카와 같은 스토아 학파에서 신의 섭리를 따라야 한다고 주장 할 때 거기에는 신의 보살핌을 믿거나 그에게 의지한다는 뜻이 전혀 담겨져 있지 않다.

 

눈얼음 계곡 건너가기

기독교 교리에서 인간이 자기이성에 의지해서 신에게 다가갈 길은 '원칙적으로' 없습니다. (536)

 

인간의 이성과 신의 섭리 사이에는 '원칙적으로' 칼 바르트가 표현한 '눈 얼음 계곡', '황폐지대'가 놓여 있습니다. (536)

 

토마스 아퀴나스 같은 중세 교부들이 이 눈 얼음 계곡과 황폐 지대를 건너가는 건실한 '존재의 사다리'를 놓았으니깐요. (536) → 결국 이 사다리를 토마스 아퀴나스가 놓았구나

 

존 밀턴이 주장한 '존재의 유비'는 신과 그의 피조물이 분여에 의해 양적으로만 다를 뿐 질적으로는 같다는 전제에서 나온 매우 흥미로운 생각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존재의 유비 교리를 따르면 구원이 그리스도를 통한 신의 은총에 '전적으로' 맡겨진 것이 아니라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인간이성에 달린 것이 된다는 점입니다. 이 같은 위험은 그리스 철학에서 나온 '존재의 사다리' 개념이 기독교에 들어온 이래 항상 존재했어요. (538)

 

에밀 브룬너는 창조주의 영은 피조물의 세계에 각인되어있기 때문에 창조도 일종의 계시이며, 또한 이 세계는 신과 의사소통을 나누는 장소가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중략) 칼빈도 자연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무대"이자 "하나님을 발견하는 장소"로 이해했고, "가장 아름다운 무대에서 열리는 명백하게 드러난 하나님의 작품에 대해 경건한 기쁨을 가지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맙시다" 라고 교훈했지요. (540)

 

브룬너도 '창조의 계시'가 구원을 가져올 만큼 충분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어요. 그럼에도 '자연에 나타나 있는 신의 계시'에 대한 인간의 이성적 지식이 율법의 근거이며, 인간은 자연 안에서 신에 대한 인식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에 의해 나타난 역사적 계시에 매달리느라 창조 안에 있는 자연 계시를 피할 필요는 없다고 거듭 강조했습니다. 또한 그래야만 구원에서 인간의 책임성을 물을 수 있다며 그 정당성을 피력했지요. 브룬너의 이 주장은 "오직 그리스도 안의 계시"만을 주장하는 칼 바르트를 겨냥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541)

 

신교와 구교를 막론하고 기독교 신학은 마르틴 루터가 한 마디로 선언했듯이 "신앙을 통해 신에게 다가간다"는 것을 원칙적으로 강조합니다. 그러니까 이성을 통해서가 아니지요. 이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선포한 것처럼 "믿지 않는다면 이해할 수도 없다"라는 원칙이 적용되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요약하면 세네카가 로마 광장에서 '인간의 이성과 도덕에 의한 구원의 길'을 가르치고 있을 때, 바울은 아테네 거리에서 '신의 섭리와 은총에 의한 구원의 길'을 선포했다는 이야기지요. (544) → 결국 여기서 이야기 하는 눈 얼음 계곡은 구원에 이르는 길에 대한 철학과 신학과 견해 차이를 의미한다.

 

예루살렘의 신

히브리인들이 신앙으로 그 답을 찾았을 때 그들은 신이 말을 걸어 오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구약성서에 기록된 계시지요. 신은 인간을 창조한 후 곧바로 그들과 대화하고 그들의 삶에 부단히 참여하기 시작했습니다. (중략) 이러한 신의 참여와 인도를 근거로 인간도 신과 사귀고 신의 역사에 참여할 수 있고, 비로소 신과 인간 사이에 인격적 관계가 맺어지지요. (중략) 인간 스스로 신에게 나아갈 길을 연 것이 아니지요. 신이 먼저 인간에게 다가와 말 걸고 인도했다는 말입니다. (545)

 

그는 세계를 향해 끊임없이 자신을 드러내고 인간의 삶과 역사에 부단히 참여하여 관계를 맺는 2인칭의 신, '신적인 너'입니다. 그래서 히브리 인들은 신과 인간의 관계를 언제나 '나와 그것'이 아니라 '나와 너' 라는 인격적 입장에서 파악했지요. (546)

 

히브리 인 들은 신을 '나와 너'라는 인격적 입장에서 파악했지만 동시에 한 없이 두렵고 어려운 상대로 인식했습니다. (중략) 마르틴 부버도 '나와 너'에서 신을 "나의 나보다 더 나에게 가까이 있는" 완전한 자기 라고 표현하면서도, 동시에 "완전한 타자"이며 "나타나고 압도하는 두려운 신비"라고 고백했습니다. (547)

 

예수를 통해 신의 인격성이 강화된 겁니다. (549)

 

 

7장 신의 인격성이란 무엇인가

내가 정녕 너와 함께하리라

구약의 선지자들은 신의 모습을 손, , , 얼굴 같은 인간의 신체 부위를 사용해 묘사했습니다. (중략) 그것들은 모두 신에 대한 직접적인 묘사가 아니고, 선지자들이 자신들의 '놀랍고도 신비로운 체험'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포하면서 사용한 비유일 뿐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기독교의 가르침입니다. (554)

 

"(중략) 그분으로서는 스스로를 우리의 무지함에 맞추셔야만 했던 것입니다."

- 칼빈 (555)

 

우리의 부족한 이해를 돕기 위해서라는 말이지요. 구약성서학자 아이히로트는 " 하나님이, 자신이 영적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말하자면 베일에 감춰 두 채 주로 인격적 존재로 스스로를 드러냈고 사람들이 그렇게 이해하도록 했다는 것은, 하나님 편에서는 지혜로운 절제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성서에 나타난, 신에 대한 신이동형적 내지 신인동감적 표현들은 모두 초자연적인 자신을 인간들에게 보다 친숙하게 계시 또는 선포하려는 지혜에서 나왔을 뿐, 신이 인간처럼 생기거나 인간처럼 느끼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555)

 

존재론적 관점에서 보면, 기독교 신학이 말하는 신의 인격성이란 단순히 신이 피조물들에게 '참여와 인도' 라는 원리로 작용한다는 뜻입니다. 신이 존재인 한 신은 존재하는 모든 존재물이 존재에 '이미 그리고 언제나' 참여하고 있습니다. 또한 신이 생성, 작용하는 한, 신은 피조물들의 모든 변화를 '이미 그리고 언제나' 이끌고 있지요. 그럼으로써 신은 자신이 창조한 피조물들의 존재를 궁극적으로 온전하게 합니다. (556)

 

구약성서에서 야훼는 "내가 정녕 너희와 함께 하리라" 라는 단 한마디 약속으로 계시했습니다. '함께 하리라'가 바로 참여와 인도라는 신의 인격성을 나타내는 탁월한 성서적, 존재론적 표현이지요. (556)

 

기도로 신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나

신의 인격성에 대한 인간의 인격적 대응이 곧 기도입니다. 기독교인들에게 기도란 참여와 인도라는 신의 인격성을 경험하는 가장 보편적이고 적극적인 방법이지요. 또한 신과 만나고 신의 사역에 동참하는 가장 일반적이고 대표적인 방법이기도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칼빈은 기도를 '신과 인간의 대담'으로 규정했습니다. (560)

 

섭리는 삼위일체처럼 성경에는 나오지 않는 말입니다. 하지만 둘 다 기독교 교리들을 떠받치는 튼튼한 기둥이지요. 섭리는 신이 인간과 교회 그리고 세계를 미리 정한 목적에 따라 이끄는 의지로 해석합니다. 이점에서 신이 모든 일의 결과를 미리 정해 놓았다는 '예정'과 신이 세상 모든 것을 자신의 의지대로 이끌고 간다는 '섭리'의 구별이 쉽지 않은데요, 사실상 모든 섭리는 예정적이고 모든 예정은 섭리적입니다. (중략) 신은 미리 예정한 섭리를 통해 자신의 창조세계와 그 안의 모든 피조물을 보존하고 돌보며 구원하지요. (중략) 섭리에 의한 그의 강제적 사역은 결코 맹목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이지요. (562)

 

기독교인에게 신을 믿는다는 것은 신의 인격성을 믿는 것이자 곧 그의 섭리를 믿는다는 것입니다. (563)

 

바울은 신의 섭리가 때로는 우리를 기쁘게 하지 않을 수 있음을 알았지요. 하지만 그는 고통의 배후에는 언제나 신의 선한 목적과 뜻이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 목적과 뜻은 하나의 신비로 세상에 감춰져 있는데 그 신비 속에 후회하심이 없는 부르심이 들어 있다는 것이지요. (567) → 연금술사의 초심자의 행운으로 시작하여 가혹한 시련으로 점철된다는 표현이 떠오른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기도란 '자신에게 합당한 것'을 청원하는 것이 아니라 "신에게 합당한 것을 청원하는 것"이라고 표현했지요. (567)

 

우리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서, 즉 감각적 지각도 이성적 관념도 다 버리고 완전히 순백의 상태에서 기도할 때, 온 영혼을 불살라 기도할 때, 그제야 모든 것이 신의 섭리에 의해 잘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568) → 불교에서 이야기 하는 용맹정진이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강한 섭리, 약한 섭리

우리가 구하기 전에 우리에게 있어야 할 모든 것을 신이 이미 알고 있다는 말을 두 번이나 반복했습니다. 그러니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염려하지 말고, 먼저 신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가르쳤지요. (중략) 예수는 물론 이 둘을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라 선후의 문제인 것처럼 교훈했습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중략) , 물질적 풍요에 대한 우리의 가련한 바람은 이토록 끈질깁니다! (570)

 

예수가 말한 신이 더해 줄 '모든 것'이란 '신이 보기에' 우리에게 있어야 할 모든 것이지 우리가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모든 것은 아닙니다. 다시 말해 신은 오직 그의 섭리에 따라 우리에게 '궁극적으로 좋은 모든 것'을 더해 준다는 뜻이지요. (중략) '좋은 것'도 우리가 생각하는 좋은 것이 아니라 신이 생각하는 좋은 것입니다. (571) → 그러니 기도를 통해 세속적인 요행을 바라지 말라는 의미로 들린다.

 

강력한 섭리는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자유의지와 양립할 수 없기 때문에 자기모순에 도달한다는 주장이지요. (572)

 

신의 섭리에 대해 '신이 아직 모든 결과를 알지 못한 채 자유로운 피조물들의 반응에 따라 결과가 나오도록 조정해 놓은 것' '약한 섭리론'이라고 부르도록 하지요. (573)

 

전통적으로 중요한 신학자들은 한결같이 '강한 섭리론'을 지지했으며 강한 섭리론 안에서도 신의 섭리가 인간의 자유의지와 모순 없이 양립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574)

 

신은 우리의 모든 기도에 언제나 귀를 기울이고 우리 삶에 항상 참여합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선을 이루는, 신의 섭리에 합당한 기도만 들어주고 합당하지 않은 기도는 들어주지 않지요. (574)

 

아우구스티누스는 "소원하는 것을 얻으려는 기도가 힘을 발휘하는 것도, 기도하는 사람에게 은총을 내리는 것도 신이 예지한 대로 된다" 라고 교훈했고,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의 섭리가 모든 것을 다스린다"라고 가르쳤으며, 또한 칼빈은 "모든 사건은 신의 감추어진 뜻에 의해 다스림을 받는다"라고 잘라 말했지요. (574)

 

기도는 왜 하는가

"신으로부터 (무엇을) 획득하기 위한 기도는 기도하는 자 자신 때문에 인간에게 필요하다. 즉 그 자신이 자기의 결함을 고찰하고, 기도함으로써 얻기를 소망하는 것을 경건하게 바라도록 자기 마음을 기울이기 위한 것이다 이것을 통해 그는 받기에 적합한 자가 된다."

- 토마스 아퀴나스 (576)

 

"모든 사람은 기도를 통해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언제나 듣지는 않사오나, 자신이 원하는 어떤 것에든 주님의 응답을 받사옵니다. 주님으로부터 자신이 원하는 것을 들으려 하지 않고 주님으로부터 들은 것을 원하려는 사람이 주님의 가장 훌륭한 종이옵나이다."

- 칼빈 (576)

 

알고 보면 신을 믿고 그의 섭리에 의지한다는 것은 본디 극단적 자기 체념을 전제합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교훈했지요. "자신을 버려라. 내가 말하노니 자기 자신으로부터 스스로를 버려라. 당신이 자신을 막아라. 만약 당신이 자기 자신의 자아를 내세운다면 당신은 파별하고 말 것이다. 당신 자신으로부터 도망쳐라. 그리고 당신을 창조하신 그분께로 가라." (577)

 

부단한 자기체념과 자기부정을 통해서만 신에게로 나아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세상 누구든 자신을 믿으면서 동시에 신을 믿을 수는 없다는 말이지요. 밀이 부서져 빻아지지 않고서야 어떻게 빵이 되겠습니까?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신의 절구에 자신을 집어 넣어 부서지고 빻아져서 (그러나 버려지거나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영원한 생명의 빵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라는 게 기독교의 가르침입니다. (577) → 이 또한 메타노이아에 대한 다른 설명이다.

 

기독교 교리에 따르면 인간은 이성과 도덕을 통해서는 결코 구원에 이르지 못하지요. 구원은 오직 믿음과 신의 은총에 의해서만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스토아 철학자들이 이성적 체념을 통해 마음의 평정은 얻을지 몰라도 기독교인들이 얻는 구원에까지 이르지는 못한다는 것이 기독교의 가르침이지요. (578)

 

"기독교가 아무리 스토아 사상을 많이 받아들였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우주적 체념을 감수하는 스토아주의와 우주적 구원을 믿는 기독교의 신앙 사이에 걸친 간격을 없이할 수는 없다"

- 틸리히 (579)

 

키르케고르의실존의 3단계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의 성숙 단계를 심미적 단계, 윤리적 단계, 종교적 단계로 나누어 설명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보통 '실존의 3단계설' 이라고 부르지요. (580)

 

① 심미적 단계

"인생을 즐겨라" (중략) "순간에서 순간으로" 또한 "향락에서 향락으로" (중략) 이러한 삶의 방식을 키에르케고르는 '윤작'이라 이름 지었습니다. 마치 농부가 풍성한 수확을 위해 작물의 종류를 번갈아 경작하듯이, 심미적 단계의 사람들은 권태를 쫓고 쾌락을 얻으려고 대상을 자꾸 바꾼다는 뜻이지요. (중략) 이들은 향락을 위해서라면 자기 자신마저도 부단히 바꿉니다. (중략) "천장이 과히 높지 않은 지하 방에서 고즈넉이 살고 싶어 하는 일종의 비겁이고 인간답지 못한 짓"이라고 규정했습니다. (중략) 키에르케로르는 전능한 황제 네로를 "욕망의 지옥을 예감한 사람"으로 보고, "그의 가장 깊은 내면의 본질은 불안과 두려움" 이었다고 진단했습니다. (582)

 

'뉘우침'이 심미적 단계의 인간을 다음 단계로 상승시켜 '윤리적 단계'에 이르게 합니다. 그럼으로써 그는 비로소 선과 악이라는 윤리적 범주 아래 처하게 되는 것이며,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다"가 아니라 "이것이냐 저것이냐" 라는 양자택일을 할 수 있는 자유로운 상황에 놓이게 되지요. 한 마디로 뉘우침이 인간을 '천장이 과히 높지 않은 지하 방'으로부터 해방시켜 윤리라는 햇볕 아래 서게 한다는 말입니다. (583)

 

힘과 건강과 부와 사랑 등 욕망 속에 바랄 수 있는 모든 것을 소유하고, 비록 무엇이든 할 수 있다 하더라도 인간은 그것만으로는 필경 절망할 수 밖에 없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혹시 당신은 알고 있나요? 절망의 끝자락에서야 새로운 희망이 싹트는 법임을! "그러니 이제 그대여 절망하라"고 키에르케고르는 우리에게 오히려 권하지요. (585)

 

(심미적으로 사는 사람은) 그가 심미적으로 살려고 하면 할수록 그의 생활은 더욱더 많은 것을 필요하게 되고, 그런 것들 중 가장 하찮은 것이라도 채워지지 않을 경우에 그는 죽는다. (이에 반해) 윤리적으로 사는 사람은 항상 타개책을 갖고 있다. 일체가 그에게 반기를 들고, 그를 짓누르는 폭풍우가 어둡게 그를 감싸고 있어서 그의 이웃들마저 그를 볼 수 없을 때라도 그는 파멸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꽉 붙들 수 있는 한 점을 갖고 있다. 그리고 그 점은 그의 '자기'인 것이다. (586)

 

일찍이 괴테가 적절히 언급했듯이 빛이 밝은 곳에서는 그림자도 짙게 마련이지요. (591)

 

③ 키에르케고르에 따르면 뉘우침이란 본디 최고의 윤리적 표현이지만 동시에 최고의 자기부정입니다. 이 최고의 자기부정을 그는 "무한한 자기체념"이라고 불렀지요.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이것이 우리와 같은 나약한 인간을 '종교적 단계'로 이끈다는 겁니다. 마치 밤이 깊어야 이윽고 새벽이 오듯이 키에르케고르에게 "무한한 체념은 믿음에 앞서 있는 마지막 단계"이지요. 인간은 오직 뉘우침과 죄의식이라는 처절한 절망감 속에서만 '무한한 자기체념'을 할 수 있게 되며, 그제야 비로소 신을 발견하게 되고, 신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의지하고 헌신하는 '종교적 단계'로 들어가게 된다는 말입니다. (593) → 해 뜨기 전 새벽이 가장 어둡다.

 

두려움과 떨림

'이해할 수 없음' 속에 "잠을 이루지 못하게 할 수 있는 불안"이 들어 있습니다. 어떤 이유에서든 (무엇보다도 세계와 신의 모순성 때문에) 자신의 삶과 그 안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들을 이해할 수 없는 모든 인간의 내면에는 언제나 불안이 자리하고 있지요. (596) → 바로 그 두려움이 우리 인간을 종교에 귀의하게 만드는 원인으로 작용한다.

 

고뇌는 내리쬐는 태양 아래 들끓었고 절망은 빛나는 별빛 아래 얼어붙었을 테지요. (597)

 

"아브라함은 바로 이와 같은 것의 정점에 서있다. 그의 시야에서 사라지는 최후의 단계는 무한한 체념이다. 그는 거기서 참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 신앙에 이르렀다." (601)

 

오직 당신 품에서만 죽을 수 있기 때문에

그날 그 산에서 아브라함이 신에게 바치려던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아들 이삭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전부였지요. 아브라함이 가진 모든 것이었습니다.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것 전부였지요. 또 그날 그 산에서 정작 아브라함이 불태워 신에게 바친 것은 무엇인가요? 그것은 한 마리 숫양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모든 불안과 불신이었지요. 아니, 그것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불안과 불신 전부였습니다. 그러니 그날 그 산에서 아브라함이 구해낸 것은 무엇인가요? (중략) 그것은 삶에 스며드는 부조리 때문에 불안과 공포에 전율하며 하루 하루를 살아가야 하는 모든 인간이었습니다. (중략) 투명한 모순과 불투명한 불한 속에서도, 몸서리치게 하는 공포와 치아가 맞부딪치는 전율 속에서도, 그는 신을 믿었고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지요. 아브라함은 실로 믿을 수 없는 것을 믿었습니다. (604) → 단순한 기독교적 신호라고 여긴 것에서 이렇게 심오한 종교적 의미가 있다는 것. 이 책을 통해 지속적으로 깨우치는 교훈이다. 결코 나의 피상적이고 얄팍한 지식의 잣대를 들이대어 볼 것들이 아니었다.

 

2의 인류는 무한히 자기를 체념하는 자기파괴자들이고,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것을 믿는 어리석은 자들이며, 바랄 수 없는 것을 소망하는 광기 있는 자들이고, 자신을 미워함으로써 결국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이며, 신의 섭리를 믿는 현명한 자들이지요. (606)

 

종교적 인간이 된다는 것은 종교적으로 '사유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으로 '사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그는 "겉치레로 살지 말라!" 라고 외쳤지요. 인간이 되려면 인간답게 살고, 기독교인이 되려면 기독교인처럼 살라는 것입니다. (608)

 

종교적 인간은 결국 '실존의 처절한 절망감' 속에서만 '무한한 자기체념'을 할 수 있으며, '윤리적 영웅'이 아닌 '나약한 죄인'으로서, 이성이 아닌 신앙으로 비로소 신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직 이 길을 통해서만 '자신도 용납할 수 없는 자신'이 신으로부터 용납되는 구원에 이를 수 있지요. 바로 이것! 자신마저도 용납할 수 없는 인간을 신이 용납한다는 그것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은총의 본질입니다. (609) → 결국 종교적 실존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인간은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이구나.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은 인격적입니다. 신이 인간의 세계의 시작부터 종말까지 그 모든 것에 부단히 참여하고 부단히 인도한다는 뜻에서 인격적이지요. 그렇지만 신은 오직 자신의 섭리대로 인간과 세계를 이끌어 갑니다. 그럼으로써 인간과 세계의 구원이라는 궁극적 선을 이루지요. 여기에는 어떤 타협이나 침해도 없습니다. 이것이 "신은 인격적이다" 라는 말의 기독교적 의미지요. (609) 4부 신은 인격적인가? 에 대한 결론이다.

 

이러한 체념, 이러한 자족, 이러한 지혜, 이러한 구원을 자기 백성에게 주는 것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의 인격성이지요. (610)

 

주여, 나로 하여금 나에게 절망하게 하소서.

그러나 당신에게는 절망하지 말게 하소서.

혼미한 모든 슬픔을 맛보게 하소서.

모든 고뇌의 불꽃을 핥게 하소서.

모든 부끄러움과 욕됨을 맛보게 하시고

내가 나 자신을 가누는 것을 돕지 마옵시며

내가 뻗어나가는 것을 보살피지 마옵소서.

그러나 나의 모든 자아가 파괴되었을 때는

당신이 그것을 파괴하셨고

당신이 불꽃과 고뇌를 낳으신 사실을

나에게 가르치소서

왜냐하면 나는 기꺼이 멸망하고

또 기꺼이 죽을 수 있습니다만

오직 당신 품에서만 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 헤르만 헤세 '기도' (610)

 

 

5부 신은 유일자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 바울

 

"내 영혼이 나의 육체로부터 벗어나 나의 다른 많은 것을 뒤로 하고, 오로지 순수한 자아만을 찾아 나갈 때 나는 경이롭고 위엄에 찬 아름다움을 발견했나니, 정녕 저 숭고한 영역에 속하는 찰나 최고의 경지에 이르는 삶에 확신을 얻고 마침내 신과 하나 됨에 이르더라"

- 플로티노스 (615)

 

플로티노스의 관심은 온통 천상세계의 영혼과 영원한 시간에 쏠려 있었어요. 그래서 본의 아니게 그는 플라톤의 개념과 사상들을 자기 취향에 맞게 변형해서 가르쳤지요.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신플라톤주의라고 부르는 사상의 핵심입니다. (617)

 

플로티노스는 시냇가에서 조약돌을 줍는 소년처럼 명상 속에서 흘러간 시간들을 하나씩 마음에 모았습니다. 그는 항상 마음이 '시간의 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의 생각에는, 시간이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것처럼 태양의 회전운동이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 시간을 만들어 내지요. 마음이 없으면 지속과 운동은 있을지라도 시간은 없습니다. 시간은 마음 안에 있고 마음과 하나지요. 그러므로 항상 흘러가는 것 같지만 전혀 사라지지 않는 것이 시간입니다. 언제나 아직은 오직 않은 것 같지만 이미 와 있는 것이 바로 시간이지요. "죽음도 역시 다르지 않거늘,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두려워하며 기쁘게 맞지 못하랴!" (618) → 마음에서 시간과 세상이 비롯된다. 바로 그 마음 속에서.

 

"무얼 염려했단 말인가. 우리의 영혼이 양생자임을 몰랐는가? 영혼은 이 세상을 사는 것처럼, 동시에 저 세상에서도 산다는 것을 가르치지 않았던가? 그러니 내 영혼도 당연히 때마다 자리를 바꾸어 가며 이편 또는 저편에서 살아가지 않겠는가." (619)

 

플로티노스에게 영혼은 정신과 감각이라는 "이 두 가지 능력을 동시에 겸비하면서 그 사이에 자리한다" (619)

 

기독교인이 "신은 유일하다" 라고 말 할 때 우리는 그 뜻을 단순히 독선적인 종교의 오만한 선포나 배타적 종교관에서 나온 말로만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의 유일성에는 플라톤의 '선자체'나 프로티노스의 '일자'가 가진 심오한 의미가 분명히 담겨있지요. 더욱이 그 말에는 기독교 신학자들이 삼위일체론을 통해 부여한 고유의 의미도 함께 들어가 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621) → 이 설명만으로는 기독교의 유일신 관념의 배타성을 이해하고 납득하기는 어렵다.

 

예나 지금이나 기독교가 가진 가장 큰 해악이 유일신 신앙에서 나온 배타성이며, 바로 그 때문에 전 세계에서 참혹한 분쟁과 테러가 그치질 않는다고 믿는 사람이 여전히 많으니까요. (622) → 저자는 독자의 반응을 살피며 글을 쓰고 있음이 분명하다. 위에서 내가 던진 의문점을 알고 있었다는 듯이 뒤에 이 글을 썼다.

 

한 세계를 지배하는 신 개념은 그 세계의 사람들이 추구하는 가치들을 고스란히 반영합니다. 신 개념은 언제나 그 시대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추구하는 가치들의 외연이자, 그 정점이지요. 바꾸어 말해 그 세계가 숭배하는 신 개념에 속하지 않은 세계의 가치는 없고, 그보다 더 높은 가치도 없다는 말입니다. (624) → 저자가 이 책에서 전하고자 하는 신의 개념이다. 신은 곧 그 시대, 그 지역의 사람들이 추구하는 최고의 가치다.

 

유일신 개념이 타 종교에 대한 배타성과 폭력성의 근거라는 것은 터무니없는 오해의 산물입니다. 우선 플라톤과 플로티노스가 규정한 일자의 의미와 기독교의 삼위일체설을 차례로 살펴볼 것입니다. 이를 통해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의 유일성이 과연 어떤 의미인지, 그것이 타 종교에 대한 배타성과 폭력성의 뿌리인지 아닌지를 자세히 알아볼 겁니다. (624) → 이 책이 짜임새 있게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5부의 제목인 '신은 유일한가?'에 대해 서두에 이렇게 어떤 방법으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갈 것인지 언급함으로써 저자로 하여금 숲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도움을 준다.

 

8장 일자란 무엇인가

플라톤의 일자

'아름다움의 이데아'는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사물에게 자신을 나누어 주기 때문에 단일하지 않다는 말입니다. "심지어 모든 이데아 중 가장 단순한 것조차 하나가 아닐 뿐더러 사실상 무한한 다수성을 포함한다는 점이 나타난다" 라는 질송의 말이 그래서 나왔지요. 그런데 이 말은 동시에 이데아는 만물의 궁극적 근원인 일자가 아니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만물의 궁극적 근거는 오직 하나여야 하기 때문이지요. 둘만 되어도 그 둘의 근거가 되는 어떤 것이 다시 전제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627)

 

'선자체'는 모든 이데아가 그것으로부터 나오는 '이데아 중 이데아'로 실체 중 실체입니다. 플라톤은 '선자체'를 태양에 비유했습니다. 태양이 가시적 세계의 만물에 생육과 자양을 주듯이 '선자체'는 가지적 세계의 모든 이데아에 존재와 본질을 부여합니다. 또한 만물은 변하지만 태양은 변하지 않듯이 이데아들은 인식되지만 선자체는 인식되지 않지요. 따라서 이에 대한 인식은 모든 변화(생성, 소멸)하는 것들에 대한 인식과는 다른, 가장 훌륭한 것에 대한 관조로 바뀌어야 합니다. 선자체의 본성은 사고의 영역을 벗어나며, 언어 형식으로는 "묘사할 수 없는 미"로 권능과 위엄에서 모든 이데아를 능가하지요. (631)

 

플라톤은 만물의 궁극적 근거인 신이 둘이 아니라 하나이며 그 본질은 선이라고 주장했지요. 그렇게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633)

 

플라톤 철학이 가진 이러한 구세적 성격은 나중에 "그러나 이 모든 일에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라는 사도 바울의 '승리 찬가'로 불리는 기독교의 '섭리 사상'과 연결되어 적어도 19세기까지는 서양문명을 이끌었습니다. 플라톤의 철학이 '연원의 철학'이라고 불리는 까닭이 여기 있지요. (634)

 

신은 악한 게 아니라 선하기 때문에 우리가 세상을 마음 편히 살다가 죽을 수 있다는 뜻이지요. 바로 이것이 플라톤이 서양 사람들에게 준 위대한 선물입니다. (634)

 

만물의 궁극적 근거가 선이라면 인간은 당연히 선하게 살아야 하고, 그러지 않으면 벌을 받는다는 생각이 고대인들에게 비로소 가능해진 것이지요. 플라톤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 "선자체를 보고 그것을 표본으로 삼아" 살아야 한다고 교훈했습니다. (635)

 

신의 선성이 도덕적 선의 '충분한 이유' 라는 이야기입니다. 이 같은 플라톤 사상을 기반으로 세계와 인간의 삶에 본래적으로 선한 신적 질서가 존재한다는 스토아 철학의 자연법 사상이 만들어졌습니다. 이것이 이후 로마에 들어가 로마법의 기초가 되었고, 초기 기독교인들에게도 깊이 침투해 기독교 윤리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지요. (636) → 한 사람의 철학이 어떻게 역사와 사회, 나아가 개인에게 스며들어가는지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대학시절 심리학 교수님께서 독서의 중요성을 강조하시면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해 말씀해 주신적이 있다. 물론 사회과학자인 교수님은 플라톤보다 아리스토텔레스를 비중있게 말씀하셨지만, 그분의 요지는 무릇 배우는 자는 그 배움의 원류를 알아야 한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데올로기, 도그마, 패러다임 등의 어떻게 왜 형성이 되었는지를 알지 못하고 학문을 하는 것은 수박 겉핥기에 불과하다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다른 수업에 대한 기억들은 희미해졌어도 그 강의만큼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플라톤이 논리적 오류를 고의로 범하면서까지 일자와 선자체를 동일시한 것은 '존재론적 목적'이 아닌, 오직 '도덕론적 목적' 때문이었다는 것이지요. 플라톤은 흔히 오해되는 것과는 달리 초월적인 '천상의 세계'만 동경하던 사람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는 오히려 (그의 철학체계에서는 한갓 헛된 것인) '지상의 세계'를 진정으로 사랑한 철학자였지요. 그래서 만물의 궁극적 근거인 일자를 선자체로 정의함으로써 사람들에게 위안과 희망을 주고 선한 삶을 끌어내는 데 전념했던 겁니다. 플라톤 철학의 진짜 목적은 '천상세계로의 초월'이 아니라 '지상세계에서의 승화'였던 것이지요. (636) → 저자의 플라톤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느껴지는 장절이다.

 

러브조이는 "플라톤의 역사적 영향에 관하여 가장 주목할 만한 사실은 그가 유럽의 내세성에 특징적인 형식과 용어와 논법을 제공했다는 것뿐만 아니라, 그 정반대적 경향 (즉 각별히 건전한 종류의 현세성)에도 특징적인 형식과 용어와 논법을 제공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철학은 우리가 이른바 내세적 방향으로 정점에 이르자마자 제 스스로 방향을 바꾸었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역사상 그 어떤 철학자도 따를 수 없는 플라톤의 위대한 면모입니다. (637)

 

질송은 "플라톤은 신비주의의 문을 열었다. 그러나 그는 그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라고 평가했습니다. (638)

 

플로티노스의 일자

플라톤이 깊은 종교적 통찰력을 가진 철학자였다면 플로티노스는 깊은 철학적 통찰력을 가진 종교인이었습니다. (639) → 어쩜 표현을 이렇게 꼼짝없이 잘 할 수 있을까?

 

일자의 가장 두드러진 본질은 '첫째'가 아니라 '절대적 초월'이지요. 같은 말을 파울 틸리히는 "디오니시우스나 신플라톤주의자들이 '일자'에 대해 말할 적에 그들은 결코 '하나'라는 수를 생각한 것이 아니라, 넘어서 있는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라고 표현했습니다. 따라서 일자의 ''은 기수의 일도 아니고 서수의 일도 아니지요. 오직 유일하다는 의미의 ''이지요. 이후 서양문명에서 말하는 일자는 곧 유일자입니다! (640)

 

일자의 초월성은 오히려 모든 존재물을 포괄하는 바탕이자 존재에 대한 긍정이지요. 존재물 입장에서 보는 일자는 초월자이지만, 일자 입장에서 보는 일자는 포괄자 입니다. 요컨대 일자는 규정할 수 없는 것이기에 모든 규정할 수 있는 것들의 바닥에 갈리는 심연이 되며, 한정할 수 없는 것이기에 모든 한정할 수 있는 개별적인 것들이 그 안에서 생성되었다가 사라지는 포괄자에요. 기독교의 신이 갖는 유일성도 바로 이렇습니다. (640)

 

"일자에는 개념도 없고 지식도 없다. 그래서 신은 정신의 저편에 있다고 말한다." 라는 플로티노스의 말이 여기서 나왔습니다. (641)

 

일자는 존재론적으로든 인식론적으로든 하등의 규정과 제한을 갖지 않음으로써 규정과 제한을 갖는 모든 존재물의 바탕이자 인식과 언명의 근거가 됩니다. 플로티노스는 "모든 것이 일자로부터 나오는 이유는 그 안에 (그것을 제한하거나 규정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교훈했지요. (641)

 

주목할 것은 일자에 관한 이런 사유가 기독교 사상 안에서 삼위일체의 신의 제일위인 성부로 발전했다는 사실입니다. (641)

 

"그리하여 원의 중심(일자) 자체가 존재하는 한편 원의 반지름(정신)이 원의 중심점에 기초해서 존재하며 나아가 그 반지름에 기초해서 하나의 원을 구성하는 원의 둘레(영혼)가 존재하듯이 일자, 정신, 영혼이라는 세 자립체는 하나로 존재한다."

- 플로티노스 (641) → 관념적인 비유이지만 완전한 설명같다.

 

플로티노스의 일자에서는 정신과 영혼이 순차적으로 유출되었고 이것이 각각으로 분리된 채 하나의 자립체로 존재하기는 해도 어쨌든 일자에 종속됩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라"에 나타난 것처럼, 성부, 성자, 성령은 태초부터 동시에 하나로 존재하며 분리되지도 않고 서로 동등하지요. 알고 보면 바로 이 차이점을 극복하려는 노력이 초기 기독교사에서 가장 큰 논쟁이 '삼위일체 논쟁'의 핵심입니다. (643) → 이 장을 이끌어 가는 주요 맥락은 '삼위일체 논쟁'이다.

 

삼위일체란 무엇인가

하이젠베르크는 잠세태라는 적절한 용어를 개발함으로써 실험과 관찰을 통해서는 드러나지만 우리의 언어와 사고로는 접근하기 어려운 미시세계의 물리적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길을 열었습니다. 이를 보통 '코펜하겐 해석'이라고 하지요. 이 같은 역사적 사실은 학문에서 '전문용어'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증명해 주는 좋은 사례입니다. (652)

 

테르툴리아누스는 이전까지는 누구도 하지 못한 발상으로, 삼위일체를 설명할 수 있는 전문용어를 개발하여 당시 기독교 신학계가 당면한 이 어려운 문제를 해결할 물꼬를 텄습니다. (652)

 

테르툴리아누스의 용어들

테르툴리아누스는 '위격' '본질'이라는 법학 전문용어를 끌어들여 '삼위일체'라는 용어와 이론을 처음으로 만들어 냈습니다. (656)

 

"신은 세 위격으로 존재하는 하나의 본질"이라는 사유와 언급이 기독교 신학 안에서 비로소 가능해졌으니까요. (657)

 

'위격'이란 라틴어로는 '페르소나'인데, 당시의 법률적 용어로 '어떤 것이 법률상 밖으로 드러난 지위'를 말합니다. (중략) 테르툴리아누스가 삼위일체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한 '페르소나'는 바깥으로 나타나는 신의 지위, 곧 성부, 성자, 성령을 의미합니다. (658)

 

테르툴리아누스가 삼위일체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한 '수브스탄티아' 라는 용어는 성부가 성자, 성령과 함께 공동으로 소유하는 신적 권능을 의미했습니다. 따라서 삼위일체, "세 위격으로 존재하는 하나의 본질"이라는 말은 신이 '바깥으로 나타난 위격으로는 셋(성부, 성자, 성령)'이지만 '그것을 그것이게 하는 권능(사고, 의지, 행동)에서는 하나'라는 뜻이지요. (659) →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은 셋이지만 본질은 하나다.

 

본질적으로 하나인 신이 세계를 다스리기 위해 자신 안의 세 위격을 단계적으로 전개한다는 것이지요. 그러기 위해 마치 태양에서 빛이 나오듯이 창조의 순간 둘째 위격인 성자가 생겨나고, 이어 셋째 위격인 성령이 발출되었다고 테르툴리아누스는 설명했습니다. 이 같은 주장을 오늘날 신학자들은 '경룬적 삼위일체론'이라고 부르지요. (660)

 

오른발은 신학에, 왼발은 철학에

오리게네스는 평생 동안 오른발은 신학에 왼발은 철학에 담그고 살았지요. (662)

 

당시 순교자들의 대부분이 육체는 영혼의 감옥이므로 육체가 파괴될 때 비로소 영혼도 해방된다는 당시 교부들의 신플라톤주의적 가르침을 굳게 믿었던 것이지요. (663)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는 "계약을 제공하신 바로 그 하나님은 그리스인들에게 철학을 주신 자이며, 이에 따라 전능하신 자가 그리스인들 사이에서도 영광을 받으셨다"라는 말로 그리스 철학의 진리성을 인정했습니다. (668)

 

오리게네스의 삼위일체론

오리게네스에게 성부는 플라톤의 선자체, 알비누스의 제일신, 플로티노스의 일자와 동일하고, 성자인 말씀은 플라톤의 창조주, 알비누스와 플로티노스의 정신에 해당하며, 성령은 알비누스와 플로티노스의 영혼과 같은 것이지요. (672)

 

오리게네스가 '원리론'에서 한 일은, 테르툴리아누스 이후 당시 기독교 사회에 널리 퍼졌는데도 내용은 부실했던 삼위일체론을 중기 플라톤주의 사상으로 풍성하게 채우는 한편 체계화 한 것이었습니다. (673)

 

"심리적으로 말해서 혹자는 신플라톤주의자로서 철학 할 수 있고 기독교인으로서 신앙할 수 있다. (그러나) 논리적으로 말하면 누구도 동시에 신플라톤주의자이면서 기독교인으로서 사유할 수 없다.'

- 질송 (674) → 즉 심리적으로는 철학과 신앙이 동시에 공존 가능하나, 논리적으로는 그렇지 못하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질송은 저자가 가장 많이 인용하는 사람인 듯 하다.

 

'기독교 교리에서는 아버지와 아들이 구분된다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동등해야 하는데 플라톤주의에서는 아버지에게서 나온 아들은 아버지에 대해 차등적이며 종속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 차이를 극복하기가 너무도 어려웠기 때문에 삼위일체론은 처음부터 혼란이 가라앉지 않았고 결국 격렬한 논쟁으로 파급되었던 것이지요. (675)

 

오리게네스는 두 가지 상반되는 입장을 동시에 취했습니다. 즉 아버지와 아들의 '동등성'을 주장하는 입장과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종속성'을 주장하는 입장을 모두 취한 것이지요. 그래서 후일 그의 후계자들도 이 가운데 어떤 입장을 취하느냐에 따라 '오리게네스 우파' '오리게네스 좌파'가 되어 서로 대립합니다. (675)

 

(로고스 또는 아버지)과 아들이 한 실체라는 동등성 등식이 도출되어 이것이 후일 서방 가톨릭교회에 속하는 '오리게네스 우파'의 주장이 되었지요. (675)

 

아들은 아버지의형상이자 얼굴이며 본질이지만 아버지 자신은 아니며, 오직 구원 사역을 위해 아버지로부터 나왔다는 테르툴리아누스의 경룬적 삼위일체론이 되살아난 것이지요. 여기서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종속적 등식'이 성립해 후일 동방정교회에 속하는 '오리게네스 좌파'의 입장으로 자리 잡은 겁니다. (676)

 

오리게네스는 두 가지 입장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을 유지했어요. 그는 상황에 따라 알맞은 용어를 사용하면서 "피조물들에게 성부는 존재를, 성자는 합리성을, 성령은 성결함을 부여하다"라는 식으로 삼위일체를 교훈했습니다. 이 말은 후에 동방과 사방을 막론하고 신학자들이 삼위의 역할을 구분하는 기준이 되지요. 예컨대 칼빈은 "성부는 일의 시초가 되시고 만물의 기초와 원천이 되시며, 성자는 지혜요 모사요 만물을 질서 있게 배열하시는 분이시며, 성령은 그와 같은 모든 행동의 능력과 효력을 관장하는 분이시다." 라고 교훈했습니다. (677)

 

삼위일체 논쟁

화약고에 먼저 불을 붙인 것은 오리게네스 좌파의 대표인 '아리우스'였지요. "아들은 시작이 있었으며, 아버지에 의해 무로부터 창조 또는 조성된 것이라고 추종자들에게 가르쳤습니다. 일자에서 정신이 나왔다는 플라톤주의의 이론을 충실히 따른 셈이지요. 아들은 만물을 만들었지만 그 자신은 아버지에 의해서 만들어졌으므로 피조물이고, 엄격한 의미에서는 신이 아니라고도 주장했습니다. 한마디로 예수는 반인 반신의 존재이거나 양자 그리스도론 자들이 주장하던 존재라는 것이지요. (679)

 

아나타시우스는 체구가 작았지만 용모가 수려했고 안광이 번쩍여서 대적들마저 그 앞에서 함부로 할 수 없는 위엄을 갖고 있었지요. 미래를 내다보는 통찰력, 누구에게도 무릎 꿇지 않는 용기, 왕성한 활동력으로 신앙과 교회를 위해 싸워 "위대한 계몽자", "하나님의 모퉁잇 돌"이라는 찬사를 받은 이 사람의 주장은 단순하고 명료합니다. "아들은 구세주고, 오직 신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아들이 곧 신이다." 가 바로 그것입니다 (682)

 

오직 신만이 우리를 신성화 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한마디로 "신은 우리가 신이 되도록 하기 위해 인간이 되었다"는 겁니다. 아타나시우스의 이 같은 주장이 '신의 세속화를 통한 인간의 신성화'라는 동방정교 신학의 중추가 되었지요. 신만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는 것! 바로 이것이 아타나시우스가 '사벨리우스주의자(또는 성부수난론자)'로 몰리면서까지 아버지와 아들의 동질성을 강조한 이유였고, 바로 이것이 그가 아리우스주의자들을 '사모사타의 바울주의자(또는 양자 그리스도론 자)'로 몰면서까지 반대했던 까닭이었습니다. (682)

 

"(중략) 샘이 시내가 아니고 시내가 샘이 아니지만, 둘은 하나이고 같은 물이 샘에서 시내로 흐르는 것 같이 신성도 구분 없이 성부에게서 성자에게로 부어진다."

- 아타나시우스 (683)

 

한마디로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이고, 아들도 신이며, 기독교는 유일신교라는 것이지요. (684)

 

아버지와 아들이 동일본질이라는 뜻인 '호모우시오스'라는 용어를 신조 안에 넣을 것을 제안 했습니다. (684)

 

니케아 신조의 핵심은 아들이 '아버지와 동일본질'이라는 것, 곧 일자=창조주 라는 오리게네스 우파의 동등성 등식이었습니다. 여기서 당신이 주목할 것은, 아리우스주의자 들은 모음 'i' 하나만 덧붙인 '호모이우시오스(유사본질)'이라는 용어가 채택되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니케아의 결정' '호모우시오스(동일본질)'라는 용어를 택했다는 점이지요 철자로는 비록 모음 하나 차이였지만, 의미로는 지대한 차이였기 때문입니다. 종교적 측면에서 보면 예수의 신성을 명백히 인정하는 것이었고, 사상사 관점에서 보면 기독교 신학이 그리스 철학을 비로소 극복한 계기가 되었지요. (686)

 

카파도키아의 위대한 세 교부

카파도키아의 위대한 세 교부는 니케아 신앙을 보존하기 위해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689)

 

대부분의 문제는 언제나 배리적이거나 합리적일 수밖에 없는 종교적 사유들을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용어가 없다는데 있습니다. (695)

 

문학에서든 미술에서든 결국 문제는 어떻게 하면 성부, 성자, 성령이 셋이면서 하나이고 하나이면서 셋이라는 것을 표현할 수 있느냐였지요. (695) → 모순과 역설을 어떻게 문학과, 미술 등 예술로 승화시키느냐의 문제다.

 

아우게이아스의 외양간 청소

카파도키아의 위대한 세 교부가 그 폐단을 없애기 위해 혼란스런 용어 정리를 시작했지요. 이 세 사람이 과감히 나서서, 마치 현대철학에서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이 "철학은 언어가 우리의 지성을 사로잡는 것에 맞서는 투쟁"이라고 외치며 수행한 것과 똑같은 일을 고대신학에서 이루어 냈던 것입니다. (697)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에 사로잡힌 우리의 정신을 파리통에 빠진 파리에 비유하며 "철학에서 당신의 목적은 무엇인가? 파리에게 파리통에서 빠져나갈 출구를 가르쳐 주는 것" 이라고 주장했다. (697)

 

카파도키아의 세 교부가 바로 이러한 언어적 혼란을 정리했습니다. 그들의 원칙은 삼위일체를 단호하게 플라톤주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이었습니다. 우시아는 플라톤적 의미에서 '본질', 히포스타시스는 플로티노스적 의미에서 '실체', '본체'로 확정하여, 신은 '세 본체로 존재하는 하나의 본질'이라고 명백히 선포했지요. (704) → 삼위일체론이 이렇게 논란이 된 이유는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의 괴리를 설명하기 위함이다.

 

카파도키아의 세 교부는, 그들이 '세 본체로 존재하는 한 본질'이라는 새로운 정식을 구축하는 데서는 오리게네스 좌파와 마찬가지로 분명 신플라톤주의를 따랐습니다. 그러면서도 이 정신을 해석하는 데서는 오리게네스 우파의 주장도 무시하지 않고 '신적 본질이 다른 세 가지 고유한 존재양식 속에서 자신을 표현하지만, 삼위는 "나뉨 속에서도 연합해" 있기 때문에 오직 서로의 관계에 의해서만 구별이 가능하다는 것을 분명히 했습니다. (705)

 

아우구스티누스의 삼위일체론

아우구스티누스는 삼위의 불가분성을 주장하며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본질과 실체에서) 분리될 수 없으며, 분리될 수 없게 행동한다" 라고 서슴없이 말했지요. (709)

 

"어떤 일은 함께 하시고 어떤 일은 따로 하신다면, 삼위일체는 불가분적으로 일하시는 것이 아니실 것이다." 한마디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함께 음성을 냈으며, 함께 처녀에게서 그 육신을 창조했고, 함께 비둘기 모양을 만들어 냈다는 말이지요. (710)

 

기독교 사상가들은 일반적으로 자신들의 진리를 언제나 좌로도 치우치지 않고 우로도 기울지 않는 '황금의 중간 길'에서 찾곤 했습니다. (710)

 

삼위는 오직 '관계에서만' 서로 다를 뿐이기 때문에 구분되지만 분리되지 않고, 나뉘지만 연합해 있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른바 '관계설'이 삼위일체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해석이지요. (711) → 나같이 기독교에 거부감을 가진 사람에게 균형 잡힌 시각에서 기독교를 알게 해주는 훌륭한 책이다.

 

"아버지와 아들 이 둘은 서로 상관관계를 이루면서 하나로 계시기 때문에 따로 떼어서 하나만 생각할 수는 없다." 중세에 토마스 아퀴나스가 "신 안에는 오직 관계에 따른 구분만 있을 뿐이다" 라고 선언했을 때나, 근대에 칼빈이 "그리스도는 자신에 대해서는 하나님이라고 불리며,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생각될 때는 아들이라고 불린다" 라고 교훈했을 때, 그들은 모두 아우구스티누스를 따라 말했던 것이지요. (712)

 

아버지와 아들은 본질적으로는 '분리할 수 없이' 하나이고 누가 먼저 존재하고 누가 나중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며, 다만 관계적으로만 구분된다는 것이지요. 그 둘은 마치 '종이의 앞면과 뒷면' 처럼 서로의 관계 속에서만 아버지에 대해 아들로, 아들에 대해 아버지로 구분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바로 이것이 아우구스티누스가 주장한 관계설의 핵심이지요. (712)

 

"이미 존재하고 있는 존재는 또 다시 낳을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아버지가 아들을 낳았다고 할 바로 그때까지는 아들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 옳다." (713)

 

아우구스티누스는 "아버지와 아들은 태초부터 함께 있었으나 우리가 그 중 하나를 아버지라고 할 때 다른 하나가 아들이 된다. 따라서 존재하지 않았을 때가 있었다는 건 옳지 않다." (713)

 

삼위일체가 진정 의미하는 것

어떤 무한한 바다가 있다. 그 바다는 가만있지 않고 끊임없이 역동적으로 출렁이는데, 그것에는 일정한 법칙이 있어서 그 법칙에 의해 무수한 물방울 들이 생겼다가 없어진다. 게다가 무작정 출렁이는 것이 아니고 거스를 수 없이 강력하고 일관된 자신의 의지를 이루기 위해 출렁인다. 따라서 그 안의 모든 물방울은 잠시 존재하는 동안에도 그 바다의 뜻과 의지에 의해서만 이끌려 간다. 이 무한하고 역동적인 바다가 바로 신이다. (715) → 이 책에서 이야기 하고자 하는 신의 의미, 내가 생각하는 내면의 우주, 에너지의 바다와도 비슷한 개념이다. 그러나 신은 개념이나 이론, 관념, 인식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바로 어느 날 내가 했던 새벽의 체험과도 같은 내적 체험이 동반되어야 하는 것이다.

 

모든 존재물이 그 안에서 생성, 소멸하는 무한한 바다가 곧 성부(일자)이고, 그 바다에서 무수한 존재물들을 생성, 소멸하게 하는 법칙이 곧 성자(정신)이며, 거스를 수 없이 강력하고 일관되게 작용하는 그 바다의 의지가 바로 성령(영혼)이다. (715) → 어쩌면 이렇게 완벽하게 비유할 수 있을까? 신의 유일성 여부를 떠나 이렇게 은유 할 수 있는 능력이야 말로 신에 맞닿은 인간의 위대한 능력이 아닐까?

 

아우구스티누스는 삼위일체의 신비에 대해 우리가 확실히 밝힐 수 없는 이유를 다름 아닌 인간의 이성과 언어의 한계에서 발견했지요. (중략) 그는 우리가 육체의 한계와 이에 따른 이성의 한계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때에야 이 진리를 완전하게 알게 될 것이라고 말하며, 그것을 인간의 한계로 조용히 받아들였지요. (중략) 삼위일체가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 또는 지시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럼으로써 아우구스티누스는 '지식'을 떠나 '지혜'로 성큼 걸어 들어갔지요. (717)

 

아우구스티누스는 '삼위일체론' 8권에서 신의 본성인 ① 사랑에 '삼위일체 흔적'이 들어 있다고 했습니다. 모든 사랑에는 사랑하는 자, 사랑 받는 자, 사랑의 세 요소가 있고, 그것들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지요. 마찬가지로 9권에서는 ② 정신과 정신에 대한 사랑, 그리고 정신에 대한 지식이 삼위일체 흔적임을 밝히고, 10권에서는 ③ 기억과 이해와 의지에서 삼위일체 흔적을 발견해 제시합니다. (718)

 

아우구스티누스가 신의 삼위일체 본성에서 사랑(성령)에 의한 동등한 사귐과 교제로서의 '인간공통체 원형'을 발견하고 주장했다는 사실이지요. 오늘날 현대 신학자들에 의해 '사회적 유비'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조명되고 있는 이 독특한 사유를 아우구스티누스는 '삼위일체론'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718)

 

"성령은 두분(성부와 성자) 중 한 분이 아니시다. 두 분은 그(성령)로 말미암아 결합되며 ; (성령)로 말미암아 낳은 이가 난 이를 사랑하고, 난 이가 낳은 이를 사랑하며 ; (성령)로 말미암되 그것은 그에 참여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본질로 인함이며 ; 위로부터 온 은사로 인함이 아니라 그들 자신으로 인하여,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신다. 우리는 은총을 받아 하나님과 우리 자신을 향해서 이 일을 본받으라는 계명을 받았다. (중략) 그러므로 성령은 무엇이든 간에 성부와 성자와 공통적이시다. 그리고 이러한 사귐 자체는 본질공동체적이며 영원동등적이다. 그리고 이 친교를 우정이라고 부르는 것이 합당하다면 그렇게 불러도 좋다. 그렇지만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이 가장 합당하다. 그리고 이 사랑은 또한 본질적 존재다. 하나님이 본질적 존재시며, 성경 기록과 같이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719) → 삼위일체설도 기독교의 핵심 가치인 사랑으로 귀결되는 구나.

 

성부, 성자, 성령의 공통체적이고 동등한 사귐이 곧 신의 본질인 사랑이라는 것 그리고 우리가 그러한 사랑을 본받으라는 계명을 받았다는 것이 이 글의 핵심입니다. (719)

 

아우구스티누스가 인간의 영혼 속의 기억, 이해, 의지의 통합에서 발견된다고 주장한 이른바 '심리적 유비'가 그것입니다. 반면 그가 삼위일체로부터 '인간 공동체 원형'을 이끌어낸 '사회적 유비'는 거의 주목 받지 못했습니다. (719)

 

진리는 말뿐만 아니라 행위를 통해 구현된다는 것, 기독교를 통해 서양문명 안에 잠재되어 부단히 내려오는 바로 이 고귀한 사유를 감안할 때, 우리가 삼위일체의 내용을 단순히 사변적으로 파악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이 우리에게 어떤 실천적 지침이 되느냐 하는 것이지요. 아우구스티누스는 바로 이 일을 한 겁니다. (720) → 삼위일체에 대한 이해는 이 책에서 배운 정수이기도 하다. 결국 진리는 말뿐인 허울이 아닌 행위 되고 실천되어질 때 비로소 구현될 수 있는 것이다.

 

1500년이 더 지난 현대에 와서야 신학자들은 성령(사랑)의 공동체적이고 동등한 사귐과 교제에서 '인간 공동체'의 모델을 찾으려는 노력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721)

 

상호내주적ㆍ상호침투적 공동체로서의 삼위일체

몰트만은 다원적 삼위의 공동체성을 강조하는 '사회적 삼위일체론'을 내세웠지요. 몰트만은 이 주장을 동방신학의 '페리코레시스'라는 개념에서 가져왔습니다. 페리코레시스란 상호내주와 상호침투라는 다분히 존재론적 의미를 가진 용어입니다.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서로가 서로의 안에 침투해 들어가 있다'는 뜻이지요. (722)

 

당신의 양손이 만든 두 개의 동그라미가, 서로가 서로 안에 침투해 들어간 모양이 되지요? 우리는 이처럼 단순한 작업을 통해서도 서로가 서로 안에 침투해 들어간 형태를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럼으로써 우리의 논리적 사고가 가진 한계 (즉 상호주관적 사고를 할 수 없는 한계)를 간단히 확인할 수 있지요. 우리가 심오한 진리에 보다 가까이 다가가려면 우리의 사고 영역을 확장할 필요가 있습니다. (723)

 

'페리코레시스' 라는 용어를 통해 하고자 했던 말은 성부, 성자, 성령이 가진 통일성은 동일한 것이 모여 있는 '단일성'이 아니라 다양한 것들이 서로가 서로에게 침투해 들어가 있는 '공통체성'이라는 이야기 입니다. (724)

 

"그들의 영원한 사랑 덕분에, 신적 위격들은 서로 함께, 서로를 위해 그리고 서로 안에서 참으로 친밀하게 존재함으로써, 그들은 고유하고 비교할 수 없는 완전한 통일성 안에서 자신들을 형성한다." 사랑이 바로 그런 일은 한다는 것이지요. 몰트만에 의하면 삼위가 "서로 함께, 서로를 위해 그리고 서로 안에서" 완전한 통일성을 이룬다는 의미에서 "하나님은 사랑"입니다. 그리고 삼위를 하나로 묶는 이 사랑은 단순히 자신과 동일한 것만 받아들이는 '동종 사랑'이 아니고, 그것을 넘어서서 이질적이고 다양한 것까지 받아들이고 포괄하는 '이종사랑'이라는 겁니다. 몰트만의 이러한 주장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사랑, 곧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하는 '복음적 사랑'이 플라톤이 규정한 에로스가 아니라 아가페 라는 전통적 주장과도 괘를 같이 하지요. (725) → 몰트만의 이러한 사회적 삼위일체론, 다시 말해 상호내주, 상호침투하는 사랑으로 기독교가 동종사랑이 아닌 이종사랑을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기독교의 배타적인 속성을 회복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고 있다.

 

아가페는 서로 이질적인데도 불구하고 '통일적 하나 됨'을 이루려는 욕구입니다. 따라서 흔히 '~에도 불구하고 하는 사랑' 또는 '신적 사랑'이라고 하지요. 여기에는 서로 다른 것이 어울려 통일을 이루는 조화만 있을 뿐 합일을 위한 강제는 그 어떤 것도 없는데요, 몰트만이 말하는 '이종 사랑'이 바로 이런 겁니다. (725) → 몰트만의 이종사랑은 결국 차이점을 인정하고 조화를 이루는 '관용'의 정신과도 일맥상통한다고 이야기 할 수 있다.

 

프랑스의 실존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은 "아가페는 용해를 넘어서서 (각각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존재들의 세계 속에서만 자리 잡을 수 있다." 요컨대 아가페는 (마치 여러 가지 악기가 서로 다른 자신들의 역할을 오히려 굳게 지킴으로써 다성성을 가진 하나의 음악을 이루어 내는 교향악 처럼) 서로 다른 개체들이 모여 서로의 이질성을 인정하고 다양성을 존중함으로써 '하나이면서 여럿이고, 여럿이면서 하나'인 공동체를 마침내 이루어 내는 사랑이지요. (726) → 하나이면서 여럿이고, 여럿이면서 하나이다. 아름다운 표현이다. 더불어 사는 우리가 이러해야 하지 않을까?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사랑이다.

 

'조성음악'의 두드러진 특징은 서로 다른 여러 가지 음이 동시에 울려 화성을 이룬다는 겁니다. (중략) 서양 조성음악에서 화성을 이루는 각 음들은 상호배타적으로 분리되지도 안지만, 상호융합적으로 혼합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화음이 만들어지지요. 교향악에서는 악기들이 각자 자기 소리를 냄으로써 또는 4부 합창에서 각 성부가 각각의 역할을 유지함으로써, 단성음악보다 훨씬 풍성하고 아름다운 다성음악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런 이유로, 예컨대 헨델의 '메시아'같은 합창곡이 삼위일체의 본질이자 기독교의 핵심인 이종사랑을 표현하는 데 적합하다는 이야기예요. (727) → 삼위일체를 예술에까지 확장시켜 설명할 수가 있구나. 결국 삼위일체는 공존, 조화, 모순과 역설의 끌어안음과 같은 것이다.

 

제레미 벡비는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과 아버지가 하나이신 것 같이 제자들도 하나가 될 것을 위해 기도 하셨다. 그들을 하나게 되게 하는 사랑은 아버지와 아들을 하나가 되도록 결합시키는, '서로가 스며드는' 사랑이어야 한다. 지금까지 말했듯이 소리가 결합될 때 하나가 되면서도 각자 특성을 갖는다는 점에 비추어 볼 때, 화음을 이루어 합창을 부르는 것이 기독교 전통에서 두드러졌다는 사실이 별로 놀랍지 않다. (728)

 

"그들의 흘러 넘치는 (이종)사랑 덕분에 성부, 성자, 성령은 자신을 넘어서서 창조와 화해와 구속 안에서 유한하고 모순된 도덕적 피조물인 타자를 위해 자신을 개방하신다 그 결과 자신의 영원한 삶 안에서 그들을 위해 자신의 공간을 제한해서 그들이 자신의 기쁨에 참여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 몰트만 (728)

 

"하나님의 세 인격이 상호내주를 통해 하나의 공동 공간을 형성하는 것처럼, 피조물 차원의 공동체 역시 상호 자기발전을 위한 사회적 공간을 형성해야 한다. 피조물들은 나란히 그리고 더불어 실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요컨대 몰트만은 삼위일체론이 자유와 평등 그리고 사랑을 추구하는 비위계적, 비지배적 사회를 위한 모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고, 그러므로 기독교적 사회윤리는 삼위일체적 사고에 근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729) → 저자가 결말에 제시하는 큰 이야기와 작은 이야기가 공존할 수 있는 좋은 모형으로 제시될 수 있는 주장이다.

 

누구든지 그 자체로 온전한 섬은 아닐지니

모든 인간이란 대륙의 한 조각이며

또한 대양의 한 부분이어라.

만일 흙덩어리가 바닷물에 씻겨 내려가게 된다면

대지는 또 그만큼 작아질 것이고

만일에 모래펄이 그렇게 되더라도 마찬가지이며

그대의 친구들이나 그대의 땅이 그렇게 되어도 마찬가지여라.

어느 누구의 죽음일지라도 그 역시 나를 감소시키나니

나는 인류 속에 상호침투 된 존재이기 때문이어라.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그를 위하여 조문할 사람들을 보내지 말라.

종은 바로 그때를 위하여 울리기에.

- 존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 결국 우리 모두는 결국 한 뿌리에서 나온 가지라는 의미로 다가온다. 법정스님의 '한 사람은 모두를 모두는 한 사람을 위해'라는 책 제목이 떠오른다. 역시 진리라는 것, 종교라는 것은 각자 출발점이 다르더라도 궁극적으로 이르고자 하는 곳은 동일하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의 유일성은 단일성이 아닙니다. 그것은 "삼위성이 단일성으로, 단일성이 삼위성으로 축소되는 일 없이 결합한" 통일성입니다. 이 통일성 안에는 상호내주적이고 상호침투적인 자유와 평등과 사랑으로 이룩되는 인간 공동체의 원형이 담겼지요. 그것은 성격상 무규정성과 무제한성에서 오는 일자의 '획일적' 포괄성과 통일성을 훌쩍 뛰어넘는 것으로, 삼위일체 신의 이종사랑에서 나오는 '공동체적' 포괄성과 통일성이지요. 전자가 수동적, 소극적 성격을 가졌다면 후자는 능동적, 적극적 성격을 지녔습니다. 한마디로, 기독교에서 말하는 유일신은 '동일한 하나'가 아니라 '통일적인 하나' 라는 겁니다. (731)

 

기독교에서 말하는 삼위일체 신이 갖는 유일성은 포괄성이지 배타성이 아니라는 것, 또한 그것은 통일성의 전제이자 결과지요. 따라서 누구든 "신은 유일하다" 라고 외치려면, 그는 그 말이 '신의 이름으로' 타인에 대한 차별과 폭력을 행사하겠다는 망언이 아니라는 것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그 말은 오히려 '신의 이름으로' 상호내주적이고 상호침투적인 포용과 사랑을 베풀어 "나란히 그리고 더불어" 실존하는 공동체를 만들겠다는 엄중한 선언이라는 것을 가슴에 새겨야만 하지요. (732) → 아.. 앞서 내가 적개심과 경계심을 가지고 차갑게 접근했던 것이 여기에서 이렇게 녹아 내리는구나.

 

 

9장 유일신은 배타적인가

구약의 신이냐, ‘신약의 신이냐

마르시온은 영지주의적 이원론을 기독교 신학에 끌어들여 구약과 신약, '악의 신' '선의 신'이라는 두 영역으로 철저히 분리함으로써 해결하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적게 생각하는 자는 쉽게 말한다." 라는 중세 격언의 교훈처럼 매우 간단하고 효과적인 방법이었지만 옳은 길은 아니었습니다. (738)

 

예수는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라는 가르침으로 자신이 구약의 유일신 전통을 계승하고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은 복되시고 유일하신 주권자이시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요" "주도 한 분이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라는 교훈으로 자기가 믿는 신이 유일자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중략) 같은 맥락에서 바울도 "하나님은 다만 유대인의 하나님이시냐? 또한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냐?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한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739)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이 가진 유일성은 결코 배타성이 아닌 포괄성이고요, 일치를 원하는 사랑이 아닌 조화를 원하는 사랑입니다. 그것이 예수와 사도들의 가르침이었지요. 그러므로 기독교 안에 현저하게 존재하는 배타성과 폭력성은 단지 기나긴 박해를 견디며 교단이 정립되는 과정에서 외부의 이교도, 내부의 이단과 싸우면서 처음 발생하여, 이후 세월이 흐르면서 교세를 구축하고 확장하려는 의도에서 더욱 굳어진 것으로, 기독교에서 한시라도 서둘러 버려야 할 '반신앙적 유산'이라는 말입니다. (741)

 

"최선의 것의 부패는 최악이다" (742)

 

신을 왜곡하여 빌미로 삼는 일(혹세무민, 惑世誣民)은 예나 지금이나 가장 쉬운 선동방법이지만 동시에 가장 나쁜 방법이기도 하지요. (742)

 

유일신이 왜 질투하나

독일 베텔 신학교의 구약학 교수 프랑크 크뤼제만은 '자유의 보존'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즉 신이 유일자인 교설에서 신을 다신론적으로 이야기 할 때는 신 그 자체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단지 '인간에 의해 경험되는 신'이라는 하나의 특정 맥락에서 이야기된 것으로 봐야 한다고요. 다시 말해 유일신에 대한 다신론적 표현은 신이 실제로 여럿이어서가 아니라 고대 히브리 인들이 신을 여럿으로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745)

 

왜 고대인들은 다신론을 받아들이게 되었을까요? 크뤼제만은 다음과 같이 그 이유를 밝혔습니다. "세속적 현실 속에서 이루어지는 신에 대한 인식은 각각 하나의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세계, 내적인 경험의 맥락 속에서 얻어진다. 고대인들에게 이것은 무엇보다 우주와의 조우였다. 한 인간 혹은 한 집단이 이렇나 하나의 맥락 속에서 초월적 경험을 얻게 될 때, 이러한 개개의 현실 배후에 끝없는 심연과 내세적 은총이 존재한다는 것이 명료해지고, 이러한 종교적 경험이 하나의 신적 형상에 대한 구체적 원인으로 성장했던 것이다. 의도된 것은 경험된 내세였다. 이것에 이름 붙이고 이것을 숭배하기 위하여 이것을 신적인 형상 안에 압축시켰다. 이러한 경험들이 수없이 존재하기 때문에 수없이 많은 형상들 또한 존재한다." (746)

 

크뤼제만의 설명은 기독교 신학적이라기보다 인류학적 내지 종교학적 설명이다. 기독교 신학은 (고대인뿐 아니라 현대인들까지도, 예컨대 존 힉이 "우리가 여러 가지 신, 즉 금전의 신, 사업의 신, 성공의 신, 권력의 신, 현상유지의 신 그리고 한 주일에 한 번씩은 유대교나 기독교의 신을 섬기고 있다"고 비판한 것처럼) 인간이 다신론적 성향을 가질 수밖에 없는 이유를 신에게서 돌아선 죄에서 찾는다. 신으로부터 돌아섰기 때문에 불안과 공포, 그리고 현세욕이 생기고, 그 불안과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또는 그 현세욕을 충족시키고 숱한 우상을 신으로 섬기게 된다는 것이다. (746) → 그렇다면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은 불안과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찾는 신이 아니라고 부인할 수 있는 것인가?

 

인류의 역사에서 '매우 특별했던' 어느 한 시기를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대강 기원전 8세기에서 기원전 3세기까지 약 600년은 인류의 정신사에서 가장 독특한 시기였습니다. 중국에서는 공자, 노자, 장자, 열자를 비롯한 제자백가가 나왔고 인도에서서는 '우파니샤드'가 완성되었고 부처가 생존해 있었으며, 이란에서는 차라투스트라가 등장했지요. 또한 그리스에서는 호메로스, 파르메니데스, 헤라클레이토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가 등장했으며, 투기디데스와 아르키메데스도 이 시기에 활동했습니다. 바로 이때 팔레스타인에서는 엘리야와 이사야, 예레미야를 거쳐 제2이사야 같은 선지자들이 나왔던 것입니다. 철학자 칼 야스퍼스는 '역사의 기원과 목표'에서 이 특별한 시기를 '차축시대'라고 이름 지었습니다. 인류 정신사에서 거대한 수레바퀴가 움직인 시대라는 뜻이지요. 이때 인류는 사유 속에 처음으로 무제약성과 초월성을 경험하게 되었고, 개별적 사물들로부터 보편적 개념을 확립시키기 시작했습니다. 인류의 정신사에 최초로 이성이 모습을 드러냄으로써 철학을 비롯한 각종 학문과 보편 종교가 생겨났지요. (748)

 

히브리 인들도 이 시기에 와서 비로소 신을 인류의 보편적 신으로 파악하기 시작했지요. 성서학자 도드는 "정의가 보편적이어야 하듯이 정의로운 신이라는 개념 속에서 일신교가 탄생했다"라고 간략하게 설명했습니다. (중략) 그렇다면 신에 대한 이해와 표현의 변천은 단지 '인간에 의해 경험된 신의 역사'일 뿐입니다. (중략) 신이 변해서가 아니라 히브리 인들이 신을 그런 식으로 경험했다는 말일 뿐이지요. (748)

 

당신을 찾는 이들은 모두 당신을 시험해 봅니다.

그리고 당신을 찾은 이들은

당신을 형상과 모습에다 결박합니다

하지만 나는 당신을 이해하고 싶습니다.

마치 대지가 당신을 이해하고 있듯이.

내가 성숙함에 따라

당신의 나라도

성숙합니다.

나는 당신의 존재에 대해 증명할 수 있는

허영 따위는 바라지도 않습니다.

나는 알고 있습니다.

시간은

당신과 특별한 관계라는 사실을.

나를 위해 기적을 베풀지 마소서.

세대에서 세대를 거쳐 점점 선명해지는

당신의 법칙을 바르게 따를 수 있도록.

- 라이너 마리아 릴케 '순례자의 서'

 

릴케는 우주가 곧 신이라는 범신론을 접하고 감명을 받아, 신의 성숙과 생명 성장이라는 사변에 심취했다고 한다. (749)

 

인간이 성숙해 감에 따라 신의 나라도 성숙하고, 그래서 "세대에서 세대를 거쳐 점점 선명해지는" 것이 신의 법칙이라는 것이지요. 우리 이야기와 연관해서 해석한다면, 릴케가 말하는 신의 나라와 법칙의 성숙이 역사 안에서 인간에 의해 이해되는 신의 성숙일 뿐입니다. (750)

 

'다른 신'을 질투하는 것으로 계시된 야훼는 야훼 그 자신이 아니고 단지 당시 히브리 인들에게 이해된 야훼이며, 마찬가지로 야훼의 질투 대상 역시 야훼의 입장에서 본 '다른 신'이 아니고 단지 히브리 인들에 의해 경험된 '다른 신'일 뿐이라는 이야기지요. (751) → 결국 신의 형상은 인간의 관념이 만든 소산물이라는 이야기

 

존재이자 창조주인 신은 태초부터 영원까지 불변하고 유일하지만, 인간에게 계시되는 신은 역사 안에서 진보하는 인간정신과 문화에 따라 그때마다 다른 모습으로 이해되고 표현된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야훼의 배타성, 폭력성, 질투는 바로 이런 관점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754)

 

아브라함은 구원받았는가

유스티누스는 스토아 철학자들이나 알렉산드리아 출신 유대인 철학자 필론의 영향을 받아 로고스를, 우주를 창조하고 이끌어 가는 이성적 원리로 파악했습니다. 그가 그리스도를 "산출적 로고스"라고 부른 것이 그 증거지요. 그러나 유스티누스는 그리스 철학의 로고스 이론과 요한복음의 가르침을 결합해 '선재적 그리스도론'이라는 아주 새로운 '기독교적 로고스이론을;을 개발했습니다. (760)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유스티누스는 바로 이 구절을 근거로 로고스가 만물을 창조한 '산출적 그리스도'일 뿐 아니라, 이 세상에 예수로 성육신 하기 이전의 그리스도인 '선재적 그리스도'라고 주장했지요. (761)

 

"진리의 씨앗" "온전한 로고스"인 그리스도로부터 모든 사람에게 분여 되었다는 이야기였지요. (762)

 

유스티누스가 하고자 하는 말은 바로 이겁니다. 즉 아브라함이나 소크라테스처럼 예수 이전에 살아서 역사적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몰랐던 사람이라 하더라도 '선재적 그리스도'인 로고스를 알았다면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이지요. 실제로 그는 예컨대 소크라테스를 "그리스도 이전의 그리스도인" 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말은 곧 소크라테스처럼 역사적 예수와 기독교라는 종료를 몰랐던 이방인들에게도 구원이 허락된다는 뜻이지요. (762)

 

예수가 말한 '', 즉 아브라함이 보고 즐거워한 그는 태초 이전부터 신의 곁에서 천지를 창조한 '로고스'이자, 진리로서 세상에 존재하는 '로고스' '선재적 그리스도'라는 이야기입니다. (중략)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라는 예수의 가르침에서 등장하는 ''는 당연히 '선재적 그리스도'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 바로 유스티누의 생각이었습니다. 즉 그는 아브라함이나 소크라테스처럼 설사 '성육신한 로고스'인 역사적 예수와 그의 복음을 모르는 사람일지라도 '선재적 그리스도'인 진리를 알았다면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이지요. (765)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이 어던 존재인지, 그가 어떻게 활동하는지 모른다 하더라도 그들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선한 삶의 열매를 맺는 생활을 해 나간다면 신이 그들의 삶에 간여하는 것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지요. 한마디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라는 것이지요. 라너는 이런 사람들을 "익명의 기독교인"이라고 불렀습니다. (769)

 

"그리스도의 복음과 교회를 알지 못할지라도 성실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찾으며, 양심의 명령으로 알려진 하나님의 뜻을 은총의 힘으로 실천하고 노력하는 사람은 영원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라고 선포했지요. (769)

 

유신론은 극복되어야 하나

칼 바르트와 함께 현대 프로테스탄트 신학의 쌍벽을 이룬 파울 틸리히는 '존재의 용기'에서, '하나님 이상 가는 하나님'이라는 개념을 내세워 "하나님에 관한 유신론적 관념을 초월" 하려는 시도를 감행했습니다. 이 안에,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의 유일성으로 인한 배타성 초월을 강력히 주장하는 내용이 있지요. (771)

 

오늘날 기독교에서 말하는 유신론적 신은 "하나의 세계를 소유하고 있는 자아, 너와 관계 맺고 있는 나, 결과와 분리되어 있는 원인, 특정 공간과 끝없는 시간을 소유하고 있는 자" 입니다. (771)

 

"그는 전능하고 전지해서 나의 주체성을 빼앗아 버리고 만다. 나는 여기에 반항하고 그를 객체로 만들어 버리려고 한다. 그러나 이 반항은 실패로 돌아가고 절망을 느끼게 된다. (그러고 나면) 하나님은 건드릴 수 없는 폭군, 그 앞에서는 다른 존재자들이 다 부자유하고 주체성도 잃은 존재로 보이게 된다. (중략) 이것이 바로 니체가 말하는 하나님, 절대적 지식과 절대적 지배의 단순한 대상이 되는 것을 (우리 중) 아무도 용납할 수 없다는 이유로 죽여야 한다고 한 하나님이다. "

- 탈리히 (772)

 

탈리히는 객체로서의 이 신이 "무신론의 가장 깊은 뿌리"이자 신학적 유신론에 대한 반동으로 정당화할 수 있는 무신론의 근거이고, "실존주의적 절망과 널리 퍼져 있는 무의미성에 대한 불안의 가장 깊은 뿌리" 라고 지적했지요. 따라서 "유신론적 하나님을 초월해야만 존재에의 용기가 회의와 무의미성에 대한 불안을 포섭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772)

 

카잔차키스의 수도사의 우화는 우리에게 우리가 신과 주체-객체 관계에 있는 한, 소외되고 절망하게 되며 구원받을 수도 없다는 것을 적나라하게 말해 줍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유신론적 신을 초월해 틸리히가 말하는 '하나님 이상 가는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신앙'을 가져야 하는 이유지요. (774)

 

틸리히가 말하는 '하나님 이상 가는 하나님'은 한마디로 우리가 이미 언급한 '존재자체'를 말합니다. (중략) 이 궁극적 초월자, 궁극적 포괄자를 틸리히는 '존재자체' 또는 '하나님 이상 가는 하나님'이라고 부른 겁니다. (774)

 

틸리히의 존재자체는 플라톤의 '선자체'나 플로티노스의 '일자'가 그런 것처럼, 현존과 본질을 모두 초월합니다. 이런 이유로 틸리히는 하나님의 현존을 부정하는 게 무신론인 것처럼 긍정하는 것도 무신론이라고 주장했지요. (중략) 틸리히는 존재자체, '하나님 이상 가는 하나님'은 객체도 아니고 주체도 아니라고 강조했지요. 이 말은 결국 '하나님 이상 가는 하나님'은 모든 것을 초월함으로써 모든 것을 포괄한다는 뜻입니다. 또한 '하나님 이상 가는 하나님'은 신과 인간의 만남이 있는 곳에서는 (비록 감춰졌기는 해도) 어디에나 존재하지요. 그는 "존재한 것은 무엇이나 다 초월하는 존재의 힘"이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존재한 것은 무엇이나 다 거기에 참여하고 있는 존재의 힘"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틸리히에 의하면 '하나님 이상 가는 하나님' "운명과 죽음에 대한 불안을 통해 경험되며, 허무성과 무의미성에 대한 불안 안에 존재하며, 죄책과 정죄에 대한 불안 안에서 작용하는" 비존재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삶의 무의미성과 죄책에 대한 불안을 짊어질 수 있는 용기, '존재에의 용기'를 우리에게 부여하지요. 틸리히는 바로 이 같은 절대적 초월자이자 절대적 포괄자인 존재자체를 믿는 신앙을 '절대적 신앙'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해서 "존재자체에 사로잡혀 있는 상태"라고 규정했지요. 그것은 한마디로 주체-객체의 관계가 없는 상태이며, 일체의 구별과 차별이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항상 죄인이며 항상 의인"이라는 루터의 역설을 받아들이는 상태이자 "용납될 수 없는 자가 용납되는" 상태지요. (775~776)

 

신의 유일성이 연대와 협력의 근거

오늘날 우리는 사실상 불안, 공포와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폴란드 출신의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이 예리하게 갈파한 대로, 이제 공포는 어두운 거리에도 있고 빛나는 텔레비전 화면 안에도 있으며, 침실에도 있고 부엌에도 있지요. 우리의 집에서도 일터에서도 공포가 기다리고, 그곳을 오가기 위한 지하철과 항공기에도 공포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이나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도, 우리가 소화하는 것들과 우리가 접촉하는 것들에도 공포가 숨어있지요 바우만은 이처럼 낮에도 밤에도, 가정에서도 직장에서도, 땅에서도 하늘에서도, 선진국에서도 후진국에서도 피할 수 없고 예측할 수 없고 통제할 수 없는 공포를 "유동하는 공포(Liquid Fear)"라고 불렀습니다. 이제 우리는 불안과 공포마저 세계화된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지요. (780) 9/11 테러, 환경호르몬, 최근의 구제역, 조류독감, 신종인플루엔자 등 우리는 그 어떤 것으로부터 안심할 수 없는 환경에 처해있다. 바우만은 정확하게 예언했다.

 

종교들 사이의 평화 없이 세계 평화란 있을 수 없으며, 종교들 사이의 대화 없이는 종교들 사이의 평화가 있을 수 없으며, 서로에 대한 정확한 지식이 없이는 종교들 사이의 대화가 있을 수 없다.

- 한스퀑 (781)

 

서로에 대한 정확한 지식이 종교들 사이의 대화를 이끌고, 종교들 사이의 대화가 종교들 사이의 평화를 낳으며, 종교들 사이의 평화가 세계 평화를 이른다는 말이지요. 이는 '신은 언제나 그 시대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추구하는 가치들의 외연이며, 동시에 그것들의 정점이다'라는, 내가 이 책에서 기본 강령으로 삼은 것과 깊숙이 연관된 문제의식입니다. (781) → 결국 이 책이 제기한 문제의식에 대한 답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새뮤얼 헌팅턴이 <문명의 충돌>에서 "많은 사람이 지적한 대로 세계 주요 종교들은 - 서구 크리스트교, 정교, 힌두교, 불교, 이슬람교, 유교, 도교, 유대교 - 비록 인류를 분열시킨 측면도 있지만 핵심적 가치관을 공유하고 있다" 면서 이어 간 다음 주장과도 맥을 같이 하지요. (781)

 

"인간은 어떤 문명이 살고 있건 간에 다른 문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과 공유하는 가치관, 제도, 관행을 확대하는 방법을 꾸준히 모색하고 그 방안을 실천에 옮겨야 한다. 그런 노력들이 쌓이게 되면 문명의 충돌 가능성이 줄어는 것은 물론 단일 문명의 실현 가능성도 높아진다. 단일 문명은 수준 높은 윤리, 종교, 학문, 예술, 철학, 기술, 물질생활이 복합적으로 섞인 상태를 의미한다." (781)

 

하지만 분명한 것은 기독교도 이제 세계 평화와 인류공존을 위해 다른 문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과 공유하는 가치관, 제도, 관행을 확대하는 방법을 꾸준히 모색하고 그 방안을 실천하는 데 발 벗고 나서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782)

 

기독교 입장에서 종교적 다원주의는 기독교 신앙을 '가능한 한 덜' 포기하면서 타 종교의 신앙을 '되도록 더' 인정하는 것을 목표로 삼습니다. (782)

 

기독교가 말하는 신의 유일성은 본디 차별적 배타성과 폭력성의 근거가 아니라, 오히려 무차별적 포괄성과 다양성의 바탕이니까요. 따라서 단순히 논리적 관점에서 보더라도 종교적 다원주의에 관한 건전한 연구와 논의는 '신의 유일성을 어떻게든 보존하면서'가 아니고, 어떻게 '신의 유일성을 근거로 하여' 다른 종교와의 연대와 협력을 이루어 낼 것인가에 모아져야 합니다. (782)

 

신의 유일성은 기독교가 어떤 경우에도 결코 포기할 수 없고 또 포기해서도 안 되는 신의 속성입니다. 오히려 그 안에 내재한 무차별적 포괄성과 다양성을 바탕으로 인류 모두가 "나란히 그리고 더불어" 상호내주적ㆍ상호침투적으로 실존하는 인간 공동체를 이루어 나가야 하지요. (783)

 

과제는 주어졌습니다. ,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두말할 나위 없이 신의 유일성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올바른 이해와 교회의 전향적 선포가 우선적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에 합당한 실질적이고 제도적인 행동과 조치가 뒤따라야 하지요. (783)

 

나는, 신의 삼위일체적 특성에서 '인간 공동체 원형'을 발견한 아우구스티누스와 몰트만의 방식이 무엇보다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들의 이론이 신의 유일성에 대한 선포가 배타성과 폭력성 그리고 획일성에 대한 교훈이 아닌, 오직 포괄성과 통일성 그리고 다양성에 대한 가르침이라는 것을 명백히 설명해 주기 때문이지요. (784)

 

천지창조에서 최후의 심판으로

미켈란젤로가 4년 넘게 그린 시스티나 성당의 거대한 천장화를 마치면서 마지막으로 남겨 놓은 메시지는 당연히 이렇게 정리 되어야 할 것입니다. "신의 뜻을 거역하는 독선적이고 탐욕적이며 배타적인 성직자와 교인들아! 너희는 에레미야 선지자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듯이 신의 가혹한 징벌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요나에게 밝혔듯이 신은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아끼기 때문이다." (790) → 결국 저자는 미켈란젤로의 천장화를 통해 기독교가 결코 배타적인 종교가 아님을 옹호하고 있다.

 

신의 유일성을 왜곡해서 해석하고 그것을 빌미로 이교도들에 대한 배척과 분쟁을 정당화하려는 사람들은 사실상 그들이 믿는 경전을 따르는 자들이 아니지요. 자신들이 만든 이데올로기의 추종자일 뿐입니다. 그들이 배척과 분쟁을 일으키는 근본 동력이 사실은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조건이나 이기심인데도 불구하고, 그것들은 교묘히 감춘 채 종교적으로 이데올로기화된 이슈들을 내세워 추종자들을 그리고 나중에는 자기 자신마저 기만하는 것이지요. (798) → 종교가 배타성을 띠는 것은 결국 자신의 이데올로기와 숨겨진 욕망을 정당화 시키기 위해 이용한 자들의 기만 때문이다.

 

자기성찰은 문명의 자기파괴적 잠재력이 상존하는 '위험사회'에서, 피할 수도 없고 통제할 수도 없는 '유동하는 공포'와 함께 살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반드시 필요한 일이지요. 우리가 이 같은 자기성찰을 얼마나 철저하게 또 얼마나 지속적으로 하느냐에 우리의 미래가 달렸을 겁니다. (799) → 결국 문명의 가치 상실, 냉소주의 등 저자가 모두에 이야기 했던 우려를 해결할 수 있는 궁극적인 해결책은 철저한 '자기성찰'에 있음을 피력하고 있다.

 

존재론적으로 보면 존재보다 더 큰 범주는 없습니다. 존재는 모든 것을 포괄하지만 자기 자신은 아무것에도 포괄되지 않는다는 뜻이지요. 그러니 신이 존재라면 그는 유일합니다. 또 논리적으로 봐도 마찬가지지요. 이미 수 차례 밝혔듯 어떤 것이 만물의 '궁극적 포괄자'라면 그것은 '유일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만일 그것의 바깥에 다른 어떤 것이 있다면 그는 이미 '궁극적 포괄자'가 아니기 때문이지요. 신이 존재인 한 유일자라는 것은 존재론적 결론이자 귀결입니다. (799)

 

기독교에 말하는 신은 일자성을 가졌을 뿐 아니라, 삼위일체성도 동시에 갖고 있지요. 일자성은 무규정성에서 오는 포괄성과 통일성이지만, 삼위일체성은 사랑에 의한 자유롭고 평등한 사귐과 교제에서 오는 포괄성과 통일성입니다. 따라서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의 유일성은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을 빌리면 본질공동체적, 영원동등적이고, 몰트만의 표현을 따르자면 상호내주적, 상호침투적 사랑이 그 본질이지요. 여기에는 서로의 이질성과 다양성을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통일적인 하나됨'을 이루는 '이종사랑'만이 존재할 뿐 그 어떤 배타성이나 폭력성도 침투할 수 없습니다. (800) → 저자는 여러 차례에 걸쳐 신의 일자성과, 삼위 일체성이야 말로 기독교가 배타적인 종교가 아닌 모든 것을 아우르고 포괄하는 종교임을 피력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이 책의 결론으로 제시하고 있다.

 

 

맺음말-새로운 출발을 위하여

우리는 지금까지 기독교에서 말하는 존재로서의 신, 창조주로서의 신, 인격자로서의 신, 유일자로서의 신을 그와 관련된 문학, 역사, 철학, 과학, 예술 등과 연계해서 살펴봤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신에 대해서, 그뿐만 아니라 신의 침투로 형성된 서양문명의 심층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자 했지요. (802) → 책의 전체를 아우르는 4가지의 관점에 대해 정리하고 있다.

 

"자신의 비참함을 알지 못하고 신을 아는 것은 오만함을 낳는다.

신을 알지 못하고 자신의 비참함을 아는 것은 절망을 낳는다."

- 파스칼 (802)

→ 이 경구가 결국 저자가 서두에 제시한 우리가 당면한 문제들 즉, 가치의 몰락, 의미의 상실, 물질주의, 냉소주의, 허무주의, 문명의 충돌 등에 대한 나름대로의 해법을 제시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바로미터가 되어줄 것이라 이야기 하고 있다.

 

근대 이후 서양문명은 애석하게도 신과 그의 이름으로 언급되던 최고의 가치들이 점차 사라져가는 역사를 맞고 있습니다. 이제 신은 사회제도에서도, 관습에서도, 생활규범에서도, 학문에서도, 또한 문학, 미술, 조각, 건축, 음악, 공연 같은 예술로부터도 점차 분리되어 잊혀가고 있지요. 내 생각에는 이것이 서양문명을 위기로 몰아가는 주된 원인입니다. 어디 서양문명뿐인가요? 그것이 보편화되고 있는 오늘날 '가치의 위기'는 범세계적으로 널리 퍼져 통념이 되었고, 이에 대한 무관심, 방기, 폄하, 비아냥거림은 하나의 지적 유행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문제들도 알고 보면 바로 여기에 그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지요. (803) → 곧 저자는 현대 문명을 보편화된 서양문명으로 가정하고 그 서양문명을 주도한 것을 기독교적인 신이라고 보았으며, 바로 그 기독교적인 신의 개념은 최고의 가치와, 선으로 간주하였다. 바로 그러한 신의 개념이 상실이 작금의 문명을 위기로 몰아가는 주범이라 보고 있다. 이 책이 집필된 궁극적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니체가 선지자적 목소리로 신의 죽음을 선포하면서 이른바 "최고의 가치의 탈 가치화"가 공공연하고 철저하게 진행되었지요. 그런데 기대와는 달리 최고의 가치를 대체하고 마냥 승승장구하리라고 믿었던 세속적 가치(이성, 개인의 행복, 사회진보, 민중해방, 인본주의)들도 함께 위기를 맞기 시작했습니다. 그럼으로써 신의 죽음이 곧바로 인간의 죽음으로 이어진다는 것, 최고의 가치의 탈 가치화는 동시에 세속적 가치들의 탈 가치화를 불러온다는 것을 불 보듯 뻔하게 드러내 보였지요.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따져보면 논리적 귀결이고 돌아보면 역사적 사실입니다. (804)

 

근대 이후 개발된 각종 자연과학 및 사회과학적 지식들, 예컨대 계몽주의, 과학주의, 사회다윈주의, 자본주의, 헤겔의 변증법, 역사주의, 마르크스 주의, 정신분석학 같은 한갓 '작은 이야기'들이 진리로 정당화됨으로써 제 스스로 '큰 이야기'가 되었지요. 그리고 곧바로 보편성이라는 미명 아래 각기 자신의 한계를 넘어 문화, 예술, 정치, 경제 등 각종 다른 영역에 침범하여 주인으로 행세하며 폭력을 행사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20세기 후반부터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신랄하게 고발한 이른바 근대성의 실체인데, 그것이 연출한 가장 비극적 장면을 우리는, 샤워실 안으로 가스를 주입한 아우슈비츠, 굴뚝으로 독극물을 투입한 구소련의 굴락, 여인들과 노인들 그리고 아이들의 머리 위로 원자폭탄을 투하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확인하고 전율했지요. 이후 라캉, 푸코, 데리다 같은 해체주의자들을 시작으로 리오타르, 하버마스, 로티와 같은 포스트모던 철학자들이 마치 프로크루스테스를 퇴치한 테세우스처럼 무참한 야수를 해체하려고 실로 영웅적 노력을 기울였지만, 아직은 미완입니다. 게다가 새로운 위험들도 속속 자라고 있지요. 근래에 유전공학, 진화생물학과 함께 부활하고 있는 과학주의가 통섭이라는 미명 아래 자신들이 다시 큰 이야기로 등극하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고,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만들어 낸 새로운 작은 이야기들 역시 큰 이야기가 되어 가는 느낌입니다. (805)

 

21세기, 포스트모던 시대를 사는 우리는 이제 개인의 심리, 성적취향, 소수자의 권익, 문화의 다양성, 인식과 가치의 상대성, 일상의 중요성 등에 몰두하고 있지요. 그게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라캉과 푸코가 충분히 입증했고 리오타르가 적절히 언급한 대로, 우리는 그런 '작은 이야기'들도 부지런히 해야만 합니다. 그래야 '큰 이야기'가 가진 폭력성을 차단할 수 있지요. 문제는 우리가 '큰 이야기'를 더는 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신과 영웅 그리고 자기희생과 봉사에 대해서는 전근대적이라는 이유로 이야기하지 않고, 이성과 주체 그리고 사회적 진보와 혁명에 대해서도 근대적인 것이라며 입을 닫고 있지요. 그리고 오직 탈 근대적인 이야기들, 즉 세속적인 것, 일상적인 것, 개인적인 것, 상대적인 것에만 관심을 둡니다. (805)

 

그러다 보니 인간의 삶과 세계의 역사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고, 그것들이 나아갈 방향을 설정해 주며, 우리를 위협하는 다양한 공포로부터 방어막이 되어주던 모든 것이 홀연히 사라져버렸습니다. 자기 희생과 헌신을 이끌어 내서 인간과 세계를 가치 있게 하던 신은 죽어 버렸고, 인류애와 연대를 통해 사회를 진보시킬 이성과 주체도 소멸해 버렸지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향해 바다를 갈랐던 모세의 지팡이는 부러졌고, 유토피아를 향해 치켜들던 레닌의 팔은 잘렸습니다. 작은 이야기들이 큰 이야기들을 차례로 몰아내고 스스로 큰 이야기가 됨으로써, 시대마다 유효했던 공인된 처방들이 망명정부의 지폐처럼 휴지조각이 되어버린 겁니다. (806) → 탈 근대적인 작은 이야기들에 천착한 나머지 우리를 지탱하던 큰 기둥들의 밑동이 잠식되어 붕괴되어 버렸음을 이야기한다. 모세의 지팡이와 레닌의 팔 비유는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비유다.

 

세계는 이제 예측할 수도 없고 통제할 수도 없는 자연적, 사회적 재난들이 삽시에 전 지구적으로 확산되는 이른바 '위험사회'로 진입했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만들었지요. 그곳에서 이제 당신과 나는 '스스로 선택하는 자'로서 모든 당혹스러운 일을 해결해야 할 책임을 떠맡게 되었습니다. 자고로 모든 위험한 선택에는 두 가지가 필요하지요. 하나는 ① 지혜이고 다른 하나는 ② 신념입니다. 전자는 전근대적인 개념이고 후자는 근대적 개념이지요. 탈근대적 이야기 안에는 이 두 가지가 모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치 부모 잃은 아이처럼 혹은 의사 없는 환자처럼 허둥대기 시작했고, 거리에는 공포가 유령처럼 떠돌아다닙니다. 그래요. 바우만이 이름 붙인 유동하는 공포지요. (806)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다시 신을 불러와야 할까요? 아니면 다시 이성에 매달려야 할까요? 공인된 처방은 아직 없지만 나름의 약방문은 분분합니다. 바우만도 <모두스 비벤디>에서 대책을 마련했지요. 그는 전근대, 근대, 탈근대라는 역사적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특성을 각각 '사냥터지기', '정원사', '사냥꾼'에 비유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807)

 

① 전근대는 자연이 사냥터이고 인간이 사냥터지기로 활동했던 시기입니다. 사냥터지기의 임무는 '자연적 균형', 즉 신이 지혜로 조화롭게 질서 지어 놓은 '존재의 대연쇄'를 보존하는 것이지요. 반면 ② 근대는 인간이 정원사로 일했던 시기입니다. 정원사는 자기가 가꾸는 정원을 설계한 다음, 그에 적합한 식물들은 성장하게 하고 적합하지 않은 잡초들은 제거하는 일을 하지요. 그의 임무는 유토피아를 실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시대가 끝나고 말았습니다. 지금은 ③ 사냥꾼의 시대지요. 사냥꾼은 "오직 한 명의 사냥꾼에 지나지 않는 나 또는 많은 무리 중 한 무리의 사냥꾼에 지나지 않는 우리"로서 사냥터나 다른 동료야 어찌 되든 사냥감만 많이 잡으면 그만입니다. 그의 임무는 단지 살아남는 것이지요. 그럼으로써 세계는 점점 지옥이 되어 갑니다. (807)

 

바우만은 세계가 이처럼 지옥이 된 원인이 "정원사가 사냥꾼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있기 때문"이라고 간파하고 그것을 되돌릴 것을 촉구했습니다. 그가 제시한 약방문이지요. 처방에 의하면, "유토피아 창조자가 될 수 있는 사람은 바로 정원사"입니다. 그 때문에 우리는 다시 정원사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지옥을 강요하는 "온갖 종류의 압력에 맞서 용감하게 싸워야만" 합니다. 그렇습니다. 그의 말이 일면 옳습니다. 오늘날에도 계몽, 연대, 혁명은 여전히 필요하고 유효하지요. 그럼에도 내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근대를 지나면서 우리는 훌륭한 정원사가 결코 아니며 또 그렇게 될 수도 없다는 게 명백하게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적합한 식물들은 성장하게 하고 그렇지 않은 잡초들은 제거하는 일에 우리가 소스라치게 폭력적이지요. 이를 통제할, 믿을 만한 처방 없이 다시 정원사로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또 다른 아우슈비츠, 굴락, 히로시마를 만들 수는 없기 때문이지요. (808)

 

게다가 우리는 바우만이 간파한 대로 이미 사냥꾼이 되어 지옥에 떨어졌습니다. 세계화의 깃발과 함께0 사냥나팔이 울렸고 사냥개들은 뛰기 시작했지요. 우리가 역사를 통해 배운 불변의 법칙이 있다면, 역사는 되돌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저 위대한 르네상스도 헬레니즘 시대로 고스란히 돌아간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샤를 페로가 1687년 프랑스 학술원에서 당당하게 낭송했듯이, 그들은 아름다운 고대를 존경하면서도 무릎은 꿇지 않고 새 길을 갔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새 길은 무엇일까요? 도대체 우리에게 그것이 있기나 한 것일까요? (808)

 

내 생각에 이 문제는 이것이냐 저것이냐 하는 방법으로 해결될 성질의 것은 아닙니다. 이것을 취하되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하지요. 요컨대 작은 이야기들도 하되, 큰 이야기도 함께 하자는 말입니다. 그래야만 큰 이야기가 동반하는 폭력성도 차단되고, 작은 이야기가 가진 맹목성도 제거되지요. 칸트의 유명한 경구를 흉내 내어 표현하자면, 작은 이야기 없는 큰 이야기는 공허하며 큰 이야기 없는 작은 이야기는 맹목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큰 이야기와 작은 이야기들이 서로를 보완하고 견제하게 하자는 것이지요. (809) → 저자가 제기한 문제에 대한 궁극적인 해법이다. 그러나 앞서 나온 본문과는 다른 성질의 주장이다. 본문은 기독교에 대한 신에 관한 이야기를 전개한 것이지, 이러한 큰 이야기와 작은 이야기를 해결하기 위한 내용 전개는 없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의 탐욕, '자기 사랑' '물질 사랑'의 끈질긴 성질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것들을 모두 죄로 몰아 금하는 기존의 교리와 사뭇 다른 처방을 내렸습니다. 그는 우리가 사랑해야 할 것이 모두 네 가지가 있다고 했지요. 첫째는 ① 위에 있는 신이고,  둘째는 우리 자신이며, 셋째는 우리 옆에 있는 이웃이고, 넷째는 아래에 있는 물질이라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기독교 교회가 첫째 '신 사랑'과 셋째 '이웃 사랑'만을 교훈하는 이유는 우리가 둘째인 '자기 사랑'과 넷째인 '물질 사랑'은 가르치지 않아도 너무나 잘 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그 어느 쪽이든 두 가지 사랑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 아우구스티누스의 생각입니다. 이 네 가지 사랑이 모두 합해져야 비로소 '온전한 사랑'이 된다는 것이지요. 그가 말하는 '온전한 사랑' 안에서는 자기 사랑과 물질 사랑이 신 사랑과 이웃사랑의 공허함을 해소하고, 신 사랑과 이웃 사랑이 자기 사랑과 물질사랑의 맹목성을 바로잡아 줍니다. (809)

 

내가 이 책에서 전개한 신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도모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큰 이야기와 작은 이야기들을 함께 함으로써 우리의 이야기를 '온전한 담론'이 되게 하자는 것이지요. 물론 여기에 뒤에 따르는 문제들이 없기야 하겠습니까. 곧바로 예상되는 난제는 서로 상반, 대립하는 큰 이야기와 작은 이야기들을 어떻게 한데 아우를 수 있는가, 충돌하는 가치들을 어떻게 종합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지요. 이 말을 바우만의 표현을 빌려 바꾸어 보면 그 난해성이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세계화와 함께 시작된 지옥에서 살아남기에도 급급한 우리가 어떻게 사냥도 하면서, 정원도 가꾸고, 사냥터도 지킬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810)

 

우리가 이 책에서 집요하게 천착해온 기독교의 신 개념은 애당초 상반, 대립하는 히브리 종교와 그리스 철학의 불가능한 종합을 시도함으로써 이루어졌습니다. 그것은 인류가 이루어 낸 최초이자 최고의 종합이었지요.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을 주축으로 한 서양문명이 종합을 통해 비로소 출발을 알렸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당시 학자들이 이뤄 낸 놀라운 지적 노력을 추적하면서 상반, 대립하는 것들을 하나로 종합하는 다양한 기법들 (탈 시간화 시간화의 논리, 러브조이의 이중적 논법, 쿠사누스의 애립의 칠치, 리오타르의 다원적 이성, '페리코레시스'에 대한 몰트만의 해석 등)을 이미 집중적으로 살펴보았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이것들을 더욱 적극적으로 고찰하고 발전시킴으로써 우리가 해야 할 새로운 종합을 이룰 길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810) → 상반, 대립하는 것들을 하나로 종합하는 다양한 기법들을 고찰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큰 야기들과 작은 이야기들 사이에 상반, 대립하는 가치의 충돌을 종합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인가? 그렇다면 저자가 앞에서 장황하게 논한 것이 상반되는 가치를 통합하기 위한 단순한 방법론적 고찰에 불과한 것일까? 내가 생각하기에는 앞서 본문에서 다룬 신에 대한 이야기 전개가 기독교의 신에 대한 오해를 풀기 위한 논리 전개라 여겼는데, 갑작스레 방법론 적인 것들로 요약이 되니 길을 잃고 헤매는 느낌이 든다. 내가 전체적인 구성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길이 없으면 길을 만들어 가야겠지요. 여기서부터 희망입니다. 역사는 불행히도 가치의 파편화를 낳았고 파편화된 가치들은 인간과 세계를 위기로 몰고 있지만, 어둠이 내리면 미네르바의 부엉이가 날아오르지요. 고대가 저물어 갈 무렵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의 종합이 이뤄졌고, 중세가 황혼에 물들 때 르네상스가 일어났습니다. 이제 우리도 새 길을 찾아야 할 때 입니다.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아마도 이것이 오늘날의 인문학에 주어진 가장 중요한 과제인지도 모릅니다. 만약 성공한다면, 그건 새로운 종합이 될 것이며 새로운 르네상스가 될 것입니다. 알렉산더 포프의 <인간론> 가운데 다음 구절을 소개하며 마칩니다.

 

인간의 지식은 그 입장과 위치에서만 합당하고

그의 시간은 하나의 찰나이며, 그의 공간은 하나의 점.

어떤 차원에서든 온전하게 되기 위해서라면

이른들 늦은들, 이곳인들 저곳인들 어떠리.

오늘 복 받은자 온전히 복 받고 있느니라.

천 년 전부터 복 받은 자와 다름없이. (810~812)  

→ 결국 역사는 되풀이되지 않지만 또한 되풀이 된다. 저자는 큰 이야기와 작은 이야기를 함께 다루는 것을 해답으로 제시했고, 그러한 통합에 대한 모티프를 서양 문명이 신, 그 중에서도 기독교의 신에 대한 이야기를 전개함으로써 그 전개를 통해 기독교 신에 대한 바른 이해, 오해의 해소 등을 다루었고 이와 함께 공존할 수 없어 보이던 문명이 공존하게 되는 과정과 방법론적 고찰을 통해 우리의 다음 문명도 공존하기 어려운 큰 이야기와 작은 이야기의 통합으로 새로운 르네상스로 발돋움 할 수 있음을 희망적인 목소리로 시사하고 있다. 

 

 

 

III. 내가 저자라면

◆ 전체적 구성에 대하여

두꺼운 책의 분량과 '신과 철학'이라는 무거운 주제에 지레 겁을 먹었다. 그래서 역시 책을 받자마자 과감하게 4권으로 분책을 했고, 마인드맵을 통해 목차부터 베껴 적었다. 4 9 85개의 꼭지 글(지은이의 말, 각 부의 들어가는 말, 맺음말 포함)로 구성된 적지 않은 분량이었다. 지은이의 말(프롤로그)에 나와 있는 '수도꼭지' 비유에 감탄하며, 나와 궁합이 아주 잘 맞는 책일 것이라는 좋은 느낌을 갖고 여행을 출발했다. '신과 철학' 모두 내가 잘 모르고, 그 때문에 지금까지 요리조리 피해온 분야이기도 했다. 그런 무거운 주제를 어쩌면 이렇게 맛깔 나게 표현할 수 있을까? 서양철학의 본고장에서 철학과 신학을 전공한 저자는 '디아트리베'라는 고대의 수사학을 활용한 전개를 통해 나와 같은 사람들의 머리를 무겁게 만드는 '신과 철학'이란 주제를 굴뚝에 하얀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나는 숲 속 통나무 오두막 카페 벽난로 앞에 나란히 앉아 대화를 나누는 것 같은 편안한 분위기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갔다. 나는 이러한 전개방식이 이 책이 가진 최고의 묘미라고 생각한다.

 

책의 구성을 살펴보면 먼저 '지은이의 말'을 통해 저자는 피상적 이해의 위험성을 '수도꼭지' 비유로 설명한다. 수도꼭지 뒤의 세계 다시 말해, 근본적인 원인에 대한 심층적 이해 없이는 해결책이 없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현대문명의 가치몰락 위기에 처해있다는 사실을 문제로 제기하고, 그 전제로 현대문명은 서양문명의 지대한 영향을 받았고, 서양문명은 기독교에 큰 영향을 받았으므로 그 원류인 기독교 신에 대해 이해함으로써 문제에 대한 해법을 찾아보자고 제안한다.

 

1 '신이란 무엇인가'를 통해 시스티나 성당에 있는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에 나오는 신의 이미지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저자는 신은 우리가 오해하고 있는 것처럼 인간과 같은 형상을 띠고 있지 않으며, 그러므로 존재자체의 내적 본성으로 이해하기를 주문한다. 1부는 이 책의 관문으로 기독교가 히브리적 종교론과 그리스적 존재론의 융합으로 탄생되었으며, 신을 ① 존재 ② 창조주 ③ 인격성 ④ 유일자, 이렇게 4가지 속성으로 설명함으로써 바로 이러한 기독교의 신이 서양문명의 원류가 되어 현재에 이르기까지 학문과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피력한다.

 

2 '신은 존재다'에서는 신은 모든 존재물의 바탕이며, 모든 존재물은 신이라는 존재 안에서 존재를 부여 받아 존재함을 존재의 사다리, 시간화와 탈시간화의 개념, 신에 대한 증명, 메타노이아 등을 통해 설명한다. 3 '신은 창조주다'에서는 신은 내적 법칙인 '말씀'에 의해 모든 존재물을 창조한다고 주장하며, 이를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론, 시간과 영원의 차이, 진화론과의 관련성, 언어놀이 이론 등을 통해 설명한다. 4 '신은 인격적이다'에서는 신은 부단히 피조물들과 관계하여 그들은 오직 신 자신의 의지대로 이끌어가고 있음을 운명, 예정, 섭리 그리고 아테네와 예루살렘으로 상징되는 관점의 차이를 통해 신의 인격성을 피력한다. 5 '신은 유일자다'에서는 신은 우주마저 자신에게 포괄하며, 무소부재하고, 신의 바깥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그야말로 유일한 존재임을 플라톤과 플로티노스의 일자개념과 삼위일체론을 통해 설명한다. 또한 처음 이야기를 시작한 '천지창조'가 있는 시스티나 성당으로 되돌아와 수미일관으로 신에 대한 이야기를 마무리 짓는다.

 

'새로운 출발'이란 제목의 맺음말을 통해 저자는 본문을 통해 이야기한 신에 대한 설명이 궁극적으로는 '지은이의 말'을 통해 제기했던 현대문명의 가치몰락이라는 문제에 대한 해결의 실마리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저자는 니체를 인용하여 가치몰락을 '신의 죽음'으로 표현했고, 바우만의 표현을 빌려 탈근대화된 현대사회를 '사냥꾼의 시대'로 비유하며, 오늘날 현대문명의 '유동하는 공포'의 현존에 대한 우려를 나타냈다. 저자가 이러한 현대문명의 문제점에 대하여 앞서 펼쳐 놓은 신에 대한 설명과 연관 지어 도출한 결론은 '큰 이야기와 작은 이야기를 함께 이야기 하자'는 것. 앞서 상반, 대립하는 히브리 종교와 그리스 철학의 불가능한 종합을 이룬 기독교적 통합 방식(탈 시간화의 논리, 다원적 이성, 페리코레시스 등)을 시도하여 큰 이야기와 작은 이야기 사이에 발생할 수 있는 모순과 역설을 통합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저자와의 즐거운 대화는 지난 30여 년간 가졌던 기독교에 향한 색안경을 맑히고, 마음의 빗장을 열게끔 해주었다. 그러나 내게 있어 철학과 신학은 여전히 무거운 주제였다. 책을 읽고 난 후 즐거운 여행을 마쳤다는 뿌듯한 마음도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혼란스럽기도 했다. 이 책이 궁극적으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서양문명을 이해 하기 위해 기독교의 신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인지, 기독교의 신을 이해하기 위해 서양문명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인지 헷갈렸기 때문이다. 지은이의 말과 맺음 말을 통해서 저자의 의도가 전자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본문에 나온 신의 4가지 속성과 연결 짓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랐다. 만일 지은이의 말과 맺음 말을 읽지 않고 본문만 읽었다면 나는 아마도 이 책이 '기독교 신 안내서' 정도로 여겼을 것 같다.

 

또한 기독교의 신을 설명함에 있어서 조금은 개신교적 관점으로 편향되어 있는 것은 아니었나 하는 아쉬움도 들었다. 그리고 플라톤, 플로티노스, 아우구스티누스 등에 대한 내용이 많은 비중을 차지한 반면에, 서양문명의 또 다른 한 축을 이루는 아리스토텔레스, 스콜라 철학, 토마스아퀴나스 등에 대한 비중이 적어 내용의 균형 면에서도 약간의 아쉬움이 남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높게 평가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잘못된 곳에 깊게 박혀있던 나의 수도꼭지를 제대로 된 곳에 옮겨 주었기 때문이다. 이제 더 이상 신에 관한 이야기가 회자될 때, 얼굴을 찡그리며 귀를 닫을 필요가 없어졌다. 사람의 무지를 씻어주고, 고정관념을 타파하고, 앎을 실천으로 옮기는 책, 그런 책이 좋은 책이라면 이 책은 정말 좋은 책이다.

 

 

내가 저자라면

'지은이의 말', 서문의 역할을 하는 1, 신의 속성을 설명하는 2~5, 맺음말, 그리고 각 부의 개관역할을 하는 '들어가는 글', 개인적으로 이 책은 완전한 구성을 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철학과 신학이라는 어려운 장르를 쉽고 친근감 있게 전개 했고, '천지창조'가 있는 시스티나 성당에서 이야기를 시작하고 이야기를 맺는 수미일관 한 구성을 통해 저자가 어려운 주제를 독자에게 쉽게 설명하기 위해 고심을 한 흔적을 엿볼 수가 있다. 다만 아쉬움이 있다면 '지은이의 말 + 맺음말' '1~5부의 본문'과 상호연관성을 찾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앞서 설명했지만 본문 내용만을 가지고서는 저자가 애초에 의도했던 서양문명에 대한 이해를 통한 현대문명의 가치몰락의 실마리를 찾기에는 어려움이 따른다. 연관성이 아예 없다기 보다는 연관성을 찾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따라서 만약 내가 저자였다면 각 부 말미에 하나의 꼭지 글을 추가하여 신의 존재성, 신의 창조성, 신의 인격성, 신의 유일성이 현대문명의 가치몰락에 어떤 점을 시사하는지 혹은 어떤 해결방법을 제시할 수 있는지 설명했을 것이다.

 

무엇보다 이 책이 매력적이었던 것이 곳곳에 배치된 문학작품의 발췌였다. 그러나 아쉬웠던 점은 신과 관련된 문학작품 뿐만 아니라 좀더 많은 예술 작품들, 예를 들어 좀더 많은 조각과 회화들이 있었다면 저자가 의도했던 무거운 주제에 대한 가벼운 설명인 '디아트리베'가 좀 더 완성도를 가질 수 있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마지막으로 내가 저자라면 만만치 않은 책의 분량으로 인해, 방대한 텍스트의 숲 속에서 독자들이 길을 잃고 헤매지 않을 수 있도록 도식화된 지도를 만들었을 것이다.

 

 

◆ 책의 구성을 도식화한 이미지

서양문명신.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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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ves saint laurent
2011.05.31 16:58:08 *.111.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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