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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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지인과 함께 영화를 보았다. 영화를 한 편 본다거나 피자를 한 판 먹는다거나 하는 따위의 일은 특별한 ‘사건’이 아닌 소소한 ‘일상’이기 마련이다. 그 날도 역시 ‘우리 심심한데 영화나 한 편 볼까?’ 하는 누군가의 별 뜻 없는 제안으로 예상에도 없던 영화를 보게 되었다. 무엇을 볼까 고민할 틈도 없이 상영시간이 꼭 15분남은 영화가 눈에 들어 왔다. 똥파리. 뭔 영화제목이 저래? 괜히 뒷목이 근질근질했다. 어디서 킁킁 구린내가 나는 것 같기도 했다. 담배 한 대를 꼬나 문 젊은 남자 하나가, 세상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만큼 껄렁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봤다. 희뿌옇게 뿜어져 나오는 담배 연기 속 이 남자, 지독하게도 말 안 듣게 생겨 먹었다.
우리는 정확히 15분 후에, 담배를 꼬나 문 껄렁한 그 남자가 바로 ‘똥파리’임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억세게 운이 좋게도, 영화를 보러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이 똥파리와 조우하게 되었다. 동행 중 자칭 영화 평론가인 아무개가 엘리베이터에 함께 탄 어느 허름한 남자를 보더니 앗! 하고 소리를 질렀던 것이다. 아무개의 눈은 어느새 오백 원짜리 동전만큼이나 커져 있었다.
“양익준 감독님 맞으시죠?”
“아.......네.......”
남자는 머리를 긁적이며 슬며시 웃는다. 달에 사는 토끼 같이, 깜찍한 얼굴을 한 소녀가 옆에서 따라 웃었다.
“어? 꽃비씨 아니예요?”
“아.......네.......맞아요.”
나는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이 아리송한 광경에 잠깐 넋이 나간 상태였다. 감독은 뭐고 이름이 또 꽃비는 뭐람? 잠시 후, 나는 두 사람이 우리가 보려고 하는 영화의 감독이자 주인공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고 이런 뜻밖의 만남에 가슴이 살짝 콩닥거리기까지 했다.
그런데 포스터의 그 남자가 내 앞에 있는 바로 이 남자라는 말인가! 도무지 매치가 되지 않는다. 시장 통 널부러진 쓰레기 같던 그 똥파리 말이다. 껄렁한 얼굴로 담배를 꼬나물고 있던 똥파리가, 저렇듯 착한 얼굴로 내 앞에 서 있다니. 그는 똥파리가 아니라 배추잎 벌레나 콩벌레 마냥 오히려 귀여운 구석이 있는 사람이었다.
두 사람의 인지도나 유명세와 상관없이, 영화의 감독과 주인공을 직접 눈앞에서 마주보며 얘기한다는 사실은 관객인 나를 잔뜩 들뜨도록 만들었다.
알고 보니 이 영화는 이미 해외 여러 영화제에서 호평은 물론 각종 수상을 거머쥔 작품이란다. 단편영화에서는 꽤나 잔뼈가 굵은 실력 있는 감독. 수수한 듯 수줍은 듯, 그러나 강단 있는 눈매와 당당한 가슴팍이 그의 숨겨진 내공을 대신 말해 주고 있었다.
무대 인사를 하러 온 것이라 한다. 감사하다며, 잘 봐달라고 인사하는 그들이었다.
조명이 어두워지고 곧이어 영화가 시작되었다. 흔들리는 화면에 다짜고짜 거친 욕설과 주먹이 오고 간다. 배추벌레 같던, 콩벌레 같던 그 순진한 표정의 사람은 간데없고, 세상의 막장 인생이 거기 있었다. 더럽고 추악한 현실이 스크린 밖으로 와구와구 삐져나온다. 간간이 영화 중간에 일어서 나가버리는 사람들도 보인다. 영화는 그만큼 세고 자극적이었다. 현실의 치부가 너무나 노골적으로 드러나니, 웬만한 사람들은 그 충격에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조명이 켜지고 사람들의 한숨이 여기저기서 흘러 나왔다. 드디어 이 악몽에서 벗어났다는 안도감일까. 설명할 수 없는 먹먹함과 쓰디 쓴 눈물이 광대뼈 언저리에 얹혔다.
어두움이 걷히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지만 나는 쉽게 자리를 뜰 수 없다. 영화가 주는 ‘감동’ 때문이라고 하기엔 너무 순진하고 어린 표현인 듯싶다. 어느새 영화관엔 나와 지인, 그리고 저 먼 구석에 몸을 잔뜩 웅크린 채 끝까지 화면을 응시하는 그들만이 남았다.
똥파리와 꽃비였다. 두 사람의 어깨가 너무 작고 가냘프게 느껴져 가슴이 아렸다. 가만히 안아 주면 좋으련만. 슬프고 우울한 기분이 오래도록 가시지 않는다. 설명할 수 없는 먹먹함과 쓰디 쓴 눈물이 광대뼈를 타고 흘렀다.
감사하다며, 잘 봐달라고 인사하던 감독과 여배우의 해사한 얼굴 안에, 질리도록 노골적인 우리네 삶이 있었다.
똥파리와 꽃비는 어느새 영화관을 나서고 있다. 콩벌레 한 마리가 꼬물거리며 지나간다. 토끼 한 마리가 깡총 뛰어간다. 그 둘의 뒷모습은 다정하고 착하다.
나는 나지막히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었다.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을 만큼 아주 작은 목소리로.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일상에서, 이토록 짠한 울림을 주는 당신들이 너무나 고마워 눈시울이 뜨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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