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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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살금살금 옷깃 스치는 소리도 안나게 조심하며 움직인다.
누구라도 깰까봐 조심조심, 살금살금.
흑비단같이 어두운 밤에 새벽 1시가 넘고 2시도 넘은 깊은 새벽,
나는 혼자 책상다리를 하고 밥상에 팔꿈치를 기대었다.
삐그덕 녹슨 철다리에서 팔 무게를 지탱하는 쇳소리가 들리면, 후다닥 놀라 팔꿈치를 떼고선 허공에 잠시 정지.
오래동안 한 자세로 앉아 있다 보니 다리가 저리고 허리가 뻣뻣하다.
며칠만 있으면 중간 시험이다.
약간의 편집증이나 강박증이 있었던지 시험 보기 몇 주일 전부터는
표준전과나 동아전과, 교과서를 아예 통째로 외우지 않으면 잠이 오질 않았다.
고등학생도 아니고 중학생도 아닌 겨우 국민학생 4, 5학년 꼬맹이 주제에
이런 공부방법은 좀 심하다 싶기도 하다고 스스로 생각하곤 했다.
언제부터 공부에 매달렸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어쨌든 독하다 싶을 정도의 공부욕심은(아니 1등욕심이라고 하는 게 더 맞는 거겠다.)
성적표에 그대로 드러나 주었고
수우미양가 로 평가되던 그 시절, 나의 성적표는 그야말로 퍼펙트 했다고 해야 할까?
친구들은 나를 부러워 하면서도 미워했다.
6년 내내 반장 자리를 놓치지 않았고
운동이면 운동, 미술이면 미술, 주요과목은 물론 예체능까지 못 하는 게 없었던지라
샘많고 지기 싫어 하는 그 또래 여학생들은 한 번쯤은 나를 흘겨 볼 만도 했다.
하지만 누가 아랴.
그런 내가 새벽에 살금살금, 달밤의 도둑고양이처럼 숨죽이며 책장을 넘겼다는 사실을.
달빛도 잘 들지 않는 반지하 단칸방에서 내가 공부할 수 있는 방법은 오로지 '새벽에 살금살금'이었다.
식구들이 모두 잠든 밤, 스탠드를 켜기도 미안한 좁은 방에서,
삐그덕거리는 밥상 다리를 고정시켜 벽에 베개를 대고 기댄다.
이 세상에 하나뿐인 나만의 독서실
동생들의 새근거리는 숨소리와 이불 뒤척이는 소리, 그리고 창으로 들어오는 노란 불빛이 어우러진 곳에서
새벽에 살금살금....
때로는 서글프기도 했고 때로는 고단하기도 했던 것 같다.
하지만 힘들어서 한숨을 쉬거나 눈물을 글썽이는 일은 없었다.
그저 녹슨 밥상 다리에서 삐걱삐걱 쇳소리가 나지 않기를,
잠든 동생들이 스탠드 불빛에 깨지 않기를 바라는 아이다운 마음이 전부였다.
어떨 땐 잠이 안 온다며 텔레비젼을 소리없이 켜 놓고 시간을 보내는 동생이 밉기도 했던 그 때.
그래도 나때문에 소리없는 티비를 졸린 눈으로 보고 있는 동생이 고마웠던 그 때.
그러다 문득 새근새근 자고 있는 동생들을 보며 콧등이 시큰거리기도 했던 그 때.
녹슨 밥상 다리 소리, 새근거리는 숨소리, 노란 가로등 불빛이 있었던 나의 새벽.
나의 살금살금한 새벽
새벽에 살금살금.
지금은 아련하기만 한 나의 그 새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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