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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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바람이 서걱서걱 불 무렵이었다.
햇살은 딱 요즘처럼, 천천히 걸으면 정수리가 따땃하게 데워질 정도였고
하늘은 찢어질 듯 파래서 조금만 더 당기면 펑! 하고 터져버릴 것 같은.
그런 날의 오후였다.
아침을 거른 탓에 11시가 조금 지나자 배가 슬슬 고파왔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사무실 안의 몇몇 사람이 지갑을 주섬주섬 챙겨 들었다.
씽긋, 아점 맴버들이 뭉쳤다.
화장실 가는 척 지갑은 겨드랑이에 숨기고 나비처럼 팔랑,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멤버는 셋이다.
끼득거리며 테헤란로의 거리를 걷는다.
강남대로까지 시원하게 길게 뻗은 테헤란로를 걸으며
점심 메뉴를 생각해 본다.
배고픈 세 여자의 웃음소리는 이제 막 뒹굴기 시작한 나무 잎사귀처럼
뎅굴뎅굴 요란스레 발길에 채였다.
아직 메뉴는 정해지지 않고
세 여자는 그저 웃는 것이 좋아 길게 뻗은 그 길을 마냥 걸어내렸다.
그러다 한 여자의 스텝이, 엉거주춤 꼬여버렸다.
높은 구두때문이었을까.
갑작스런 현기증때문이었을까.
나머지 두 사람은 잠시 기다려야 했다.
스텝이 꼬인 순간, 바로 그 직전에
한 여자는,
멀지 않은 시야 속에서 물안개처럼 피어오르는 얼굴을 보았다.
그 얼굴은 낯익지만 섬짓한 얼굴.
언젠가 우연히 한번쯤은 만나게 될까? 라고 가끔씩 기대했던-
여자의 첫사랑이자 옛사랑이었다.
178센티의 키에 호리호리한 몸매, 긴 팔과 다리
서글서글 쌍꺼풀없는 눈매, 웃을 때면 하얀 치아가 활짝 드러나 꽤나 호감형이었던
여자의 첫사랑이자 옛사랑이었다.
우습게도 그는 연애때 여자와 함께 골랐던 폴로 자켓을 입고 있었다.
여자는 단번에 그 옷을 알아 보았다.
짙은 녹색 쿄듀로이 자켓-
어쩐지 웃으며 다가가 '아직도 이 옷 입어?' 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아는 척을 하고 싶어졌다.
우습고 슬프다.
십 년이나 된 저 낡은 자켓은 남자의 어깨에 그대로 걸쳐 있는데
십 년 전에 옷을 골라 준 여자는 아는 척을 할까 말까 망설인다.
그야말로 영화처럼
두 사람은 어깨를 스치며 제 갈길을 간다.
가을 바람이 서걱서걱 부는,
햇살은 딱 요즘처럼, 천천히 걸으면 정수리가 따땃하게 데워질 정도의,
하늘은 찢어질 듯 파래서 조금만 더 당기면 펑! 하고 터져버릴 것 같은.
그런 날의 오후에-
여자는 가슴이 헛헛하게 미어졌다.
바람도 햇살도 하늘도, 가을을 느끼기엔 너무 잔인하다.
여자는 뒤로, 뒤로, 뒤로 걷는다
그러나 돌아갈 길이 너무 먼 것을 안 여자는
울음이 터질 것 같은 벌건 얼굴로, 절대로 돌아보지 않으리라
목을 빳빳하게 세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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