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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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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9월 16일 11시 03분 등록

가을 바람이 서걱서걱 불 무렵이었다.

햇살은 딱 요즘처럼, 천천히 걸으면 정수리가 따땃하게 데워질 정도였고

하늘은 찢어질 듯 파래서 조금만 더 당기면 펑! 하고 터져버릴 것 같은.

그런 날의 오후였다.

아침을 거른 탓에 11시가 조금 지나자 배가 슬슬 고파왔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사무실 안의 몇몇 사람이 지갑을 주섬주섬 챙겨 들었다.

씽긋, 아점 맴버들이 뭉쳤다.

화장실 가는 척 지갑은 겨드랑이에 숨기고 나비처럼 팔랑,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멤버는 셋이다.

끼득거리며 테헤란로의 거리를 걷는다.

강남대로까지 시원하게 길게 뻗은 테헤란로를 걸으며

점심 메뉴를 생각해 본다.

배고픈 세 여자의 웃음소리는 이제 막 뒹굴기 시작한 나무 잎사귀처럼

뎅굴뎅굴 요란스레 발길에 채였다.

아직 메뉴는 정해지지 않고

세 여자는 그저 웃는 것이 좋아 길게 뻗은 그 길을 마냥 걸어내렸다.

그러다 한 여자의 스텝이, 엉거주춤 꼬여버렸다.

높은 구두때문이었을까.

갑작스런 현기증때문이었을까.

나머지 두 사람은 잠시 기다려야 했다.

스텝이 꼬인 순간, 바로 그 직전에

한 여자는,

멀지 않은 시야 속에서 물안개처럼 피어오르는 얼굴을 보았다.

그 얼굴은 낯익지만 섬짓한 얼굴.

언젠가 우연히 한번쯤은 만나게 될까? 라고 가끔씩 기대했던-

여자의 첫사랑이자 옛사랑이었다.

178센티의 키에 호리호리한 몸매, 긴 팔과 다리

서글서글 쌍꺼풀없는 눈매, 웃을 때면 하얀 치아가 활짝 드러나 꽤나 호감형이었던

여자의 첫사랑이자 옛사랑이었다.

우습게도 그는 연애때 여자와 함께 골랐던 폴로 자켓을 입고 있었다.

여자는 단번에 그 옷을 알아 보았다.

짙은 녹색 쿄듀로이 자켓-

어쩐지 웃으며 다가가 '아직도 이 옷 입어?' 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아는 척을 하고 싶어졌다.

우습고 슬프다.

십 년이나 된 저 낡은 자켓은 남자의 어깨에 그대로 걸쳐 있는데

십 년 전에 옷을 골라 준 여자는 아는 척을 할까 말까 망설인다.

그야말로 영화처럼

두 사람은 어깨를 스치며 제 갈길을 간다.

가을 바람이 서걱서걱 부는,

햇살은 딱 요즘처럼, 천천히 걸으면 정수리가 따땃하게 데워질 정도의,

하늘은 찢어질 듯 파래서 조금만 더 당기면 펑! 하고 터져버릴 것 같은.

그런 날의 오후에-

여자는 가슴이 헛헛하게 미어졌다.

바람도 햇살도 하늘도, 가을을 느끼기엔 너무 잔인하다.

여자는 뒤로, 뒤로, 뒤로 걷는다

그러나 돌아갈 길이 너무 먼 것을 안 여자는

울음이 터질 것 같은 벌건 얼굴로, 절대로 돌아보지 않으리라

목을 빳빳하게 세웠다 . 

IP *.51.1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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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
2009.09.17 09:19:24 *.167.143.107
-돌아갈 길이 너무 먼 것을 안 여자는 울음이 터질 것 같은 벌건 얼굴로,
절대로 돌아보지 않으리라. 목을 빳빳하게 세웠다.-

가슴 절이는 대목입니다.
그래요. 돌아보지 마세요.
헤어질 땐 헤어질 이유가 충분했을 겁니다.
25여년 전 사랑을 잃고 가슴 절절했던 그 어느 날, 모윤숙씨의 '키 작은 코스모스' 에서 발견했던 글귀입니다.
'헤어진 사람은 헤어질 만큼만 사랑했던 사람이다."
돌아갈 길이 너무 멀다면 그것으로 시간과 세월을 낭비하지 마세요.
사랑은 다시 찾아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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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9.18 14:28:52 *.51.12.117
그래서 더 열심히..사랑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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