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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진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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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3월 15일 02시 33분 등록

詩人 박남준을 만나던 날

 

지리산 자락을 베고
섬진강에 발을 담근 날

마음을 문지르듯
솔향기로 색을 내고
부끄러운 매화봉오리로
사알짝 째를 부리던
봄날 오후

산수유 노오란 빛깔에 취해
좋은 님과 벗하다.

 

“뜰 앞에 매화가 피었네요. 누구에게 편지를...”

왜 그랬을까. 먼발치 안면식이 있는 그였지만, 막상 이렇게 그를 만나러 가는 길이 썩 편하지 않은 이유는 무얼까. 제 급한 욕심을 앞세워 나선 길이라서 그럴까?

어제부터 지리산 자락 하동근처를 맴돌며, 집전화기의 자동응답 메시지만을 들어야 했다. 결국 급한 마음에 지인들을 통해, 손 전화번호를 얻었지만, 응답대신 ‘회의중’이라는 문자가 날라 왔다. 그랬구나. 내가 섬진강에 있던, 그 시간에 그는 여주의 여강에 있었다. 굳이 말하지 않았지만, 4대강 사업에 반대하는 무슨 행사에 참여한 것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아내와 아이들의 성화가 결국 1박2일의 주말나들이로 이어졌다. 지난 몇 개월의 골방생활을 참아 넘기기에 봄바람이 너무 달았다. 17번 국도, 전주에서 남원가는 길을 따라 섬진강이 흘렀다. 강을 따라 구례, 화개장터, 하동, 매화마을 이런 낮 익은 이름들을 거슬러서 이미 봄이 오고 있었다. 잠시 장터의 번거로움에 몸을 섞고 앉아서, 산채비빔밥에 동동주 두어 잔을 걸치고서야 내 얼굴에도 꽃이 피었다. 섬진강 모래톱에 신발을 벗고서, 성급한 맘을 강물에 담궜다. 지리산 자락을 베고 별이 쏟아져 내릴 것 같던 밤하늘을 보기엔 청학동만한 곳도 없었다. 나무 타는 냄새가 참 좋은 봄날 저녁이었다.

‘어쩌다 생선 한 토막의 비린내를 구웠으나 / 밥상머리 맞은 편 / 내 뼈를 발라 살점을 얹어줄 사람의 / 늘 비어 있던 자리...’

‘매형이 퇴근을 하셨을 것이다. 누님은 시장에 가서 한 움큼의 손바닥만한 저녁 찬거리를 봐 오셨을 것이다. 밥상위에 오른 소고기볶음, 한 접시가 아니었다. 간장종지만한 작은 그릇에 담긴 그것을 밥그릇을 다 비우도록 누님은 한 젓가락도 손대지 않고 고스란히 매형의 밥그릇에 집어 놓아주던 그 가난한 시절의 풍경이 문득 떠오른다.’

부끄럼이 많다던데. 그에게 낯선 방문이 실례는 아닐지.
혼자라는데. 가족까지 동반하고 나선 길이 결코 편하지 않았다.
무엇을 좀 챙겨가고 싶은데... 뭐가 좋을까. 보다 못한 옆자리 아내가 ‘굴비 한 꾸러미’가 어떠냐는 시린 농담을 던진다.
장터 한 켠에서 ‘금낭화’를 봤다. 꽃 이름이 많은 그의 시집이었지만, 원색적인 화려함이 어울리지 않아서였을까? 기억에 없다. 그의 화단에도 없을지 모를 일이다. 아니면, 금낭화처럼 빠알간 속주머니를 가진 우렁각시라도 생긴다면 좋겠다는 그래서 그의 시집에서도 금낭화를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는 혼자만의 생각을 접으며 금낭화를 샀다. 눈치 빠른 아주머니, 5천원이면 두 개를 준단다. 덕분에 내 몫도 하나 샀다.
그리고 다시 섬진강 따라 19번 국도 옆, 직접 만든 찐방도 샀다.

‘각시원추리가 기다리는 첫날밤은, ... 엿보고 말았다 ... 아름다운 사람의 사랑도 그럴 것이다 / 내 사랑도 그럴 것인가 / 아니다 나는 틀렸다’

무작정 다리를 건너 직진으로 마을 끝까지 따라 올라오라던 그의 말에 두 번, 세 번 물을 수가 없었다. 대문도 없는 그 집에 차를 몰고 들어가는 것이, 꼭 쳐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그는 Esse를 물고서, 뜰 앞에 핀 매화나무 앞에 서 있었다. 어색하게 차에서 내려 인사를 건냈지만, 그 역시 어찌 해야 할지를 몰라 했다. 허둥지둥 아이들을 앞세워 인사를 하게하고, 차 안에서 눈치를 보고 있던 아내도 소개를 했다. 머슥한 잠시의 시간 끝에 그가 집안으로 들어가며 크지도 않게 던진 말은 ‘차 한 잔 하고 가라’였다. 아내와 아이들을 미리 되돌려 보낼까 했던 처음 생각을 고쳐먹고, 부엌에 달린 마루 같은 테이블에 둘러 앉았다.

찻물에 끓는 동안, 박상현... 김연주... 비록 얼굴도 모르지만, 결코 낯설지 않은 이름들로 분위기를 데웠다. 양치는 어데서 하는지, 음악 CD가 많다는 둥, 눈을 어디다 둬야 할지 모르는 8살 딸래미의 수선스러움에 그가 익숙하지 않은 듯 했다. 눈치 빠른 아내가 딸아이를 데리고 나간 사이, 매화 꽃봉오리를 띄운 찻잔이 두 어 잔씩 비워졌다.

홀아비 냄새 땜에, 감초며, 당귀며, 한약주머니를 천장에 달았다고...
얼마 전 다녀간 아이들의 손에 거문고가 제 소리를 잃었다는 이야기며...
짜장면집 요리사가 되겠다던 조카는 아직도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있고,
빨간 지붕 사일로를 가진 농장에서 살고 싶다던 꿈은 아직도 파란 양철지붕 아래 쳐박혀 있고.
스승을 만나지 못했다고, 잠시 마음을 둔 분도 있었지만, 부끄럼이 많던 시절이어서...구선생은 참 좋은 분 같더라... 따뜻하고... 그런데 무슨 연구를 하는 곳인지도 물었다.

준비해 간 두 권의 시집-‘적막’과 ‘다만 흘러가는 것들을 듣는다’-을 건내 받고서는, 쌈지쌈지 아껴둔 만년필을 꺼낸다. 그리고 한. 자. 한. 자. 새겨 넣고선 마음도 그려 넣는다. 솔잎가지로 마음을 문지르듯 색을 내고, 향기를 발랐다.

‘어린 죽순이 자라서 서슬 푸른 대나무가 되듯이’
신진철 님께 4343. 3. 14. 박남준

‘강물이 흘러가는 길이 곧 순리다 삶이 순리를 지키기만 한다면야 어찌’
신진철 님께 2010. 박남준

그는 사랑니 때문에 아파했다. 쉰 네 살에 그는 아직도 사랑 때문에 아파하고 있었다. 사람이 사랑하는 것을 잊으면, 죽은 것이라고 했다. 결국 그는 내가 사간 찐빵도 하나 먹어보지 못했다. 두 권의 시집을 건내 받고서, 다시 가방을 뒤져, 혹시나 하고 인도홍차인 ‘짜이’가루를 건냈지만, 웃는 그의 모습을 기대했던 내가 역시 조급했다. 잘 가겠다는 인사도 제대로 못했는데, 이미 그의 마당에는 또 다른 지인들로 법석거렸다.

대문 기둥 대신 손님을 배웅하는 산수유가 이미 노랗게 봄맞이를 하고 있었다. 그 사이 그의 손에는 또 다른 Esse가 들려 있다. 뭔가에 떠밀리듯 그의 집을 나섰다. 다음에 또 뵙겠다는 소리를 크게 남겼다.

‘신발 한 짝이 보이지 않는다 / 알 수 없는 아이들이 왔다간 뒤의 일이다 / 깨금발을 딛고 사방을 헤맨다 ... 발걸음은 자꾸 비틀거린다 ... 왼쪽 무릎을 절뚝거린다 / 불안한 긴장이 그 길을 따라 쫒아온다’

그 길을 따라 쫒아온다...DSC02034.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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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P *.96.1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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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2010.03.15 03:00:45 *.227.177.180
잘 다녀오셨군요. 풍경이 눈에 선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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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진철
2010.03.15 03:05:21 *.186.57.173
아직도 아니 주무시고, 밖에 비가 또 내리는데...
네... 잘 다녀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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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주
2010.03.15 09:52:15 *.203.200.146
우와~ 동매마을로 다녀오셨군요~^^ 저도 시인을 만나던날...후기를 써야겠군요^^
시인의 어린아이같은 순수함과 젊은이같은 열정에 반했습니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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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진철
2010.03.15 11:42:17 *.221.232.14
행사에서 봤다고 그러시더군요. 박시인님이... 얼마나 이쁜 분인지는 말씀 없으셨고...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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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인희
2010.03.15 10:24:59 *.142.217.241
잘 읽었습니다.
많은 참고가 되었네요.
항상 여유있는 모습이 참 좋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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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진철
2010.03.15 11:43:42 *.221.232.14
인희님, 같이 가자는 제안에 답 못드려서 미안해요.
본의아니게 혼자 다녀와버린 길이 되버렸네요...
대신 제 경험이 후에 가실분들께 도움이 되길 바래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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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15 10:53:51 *.96.12.130
아~ 글이 그림이 되기도 하네요. 좋아서 두 번 읽었습니다. 뵙기를 기다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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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진철
2010.03.15 11:41:18 *.221.232.14
와~ 글이 그림이 된다... 정말 그런가요?   참 기다리던 덕담인가보네요.  제가 좋아하는 걸 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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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숙
2010.03.16 00:03:33 *.64.148.199
다녀오셨군요 !!!
길을 나서려다가.. 주말에 집에 계시지 않는다 하여 접었었죠.. 일욜에라도 계시는 줄 알았다면 찾아뵈었을 것을..
아쉽네요..
남도의 매화는 딱 이맘때 봐야하는데 말이죠.. ㅠ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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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진철
2010.03.16 01:58:58 *.186.57.173
아주 오래전에 연극반 한 선배가...
'남도에 가면 술이 끓는다'라고 하더군요.
참 멋진 말이죠? 세상에나...술이 부글부글 끓는다네요.
보고 싶은 사람 못 봐서 애가 닳고 속이 탔던 것일까요?  
더 미루지마세요. 이미 봄이 지고 있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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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지깽이
2010.03.16 07:52:19 *.160.33.180

그대, 술 마실 줄 아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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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진철
2010.03.17 09:04:28 *.221.232.14
네... 꾝 명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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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지깽이
2010.03.17 05:35:06 *.160.33.180

두 줄의 금과옥조를 얻었으니 
자네는 한 번 더 시인을 방문하고 오시게
이번에 갈 때는 좋은 술을 한 병 가지고 가시게.  
펄펄 끓는 남도 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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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진철
2010.03.16 20:42:09 *.221.232.14
강물이 흘러가는 길... 감히.. 어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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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지깽이
2010.03.16 20:31:45 *.160.33.180

순리를 지켜야 그리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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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진철
2010.03.16 19:37:58 *.221.232.14
헐~ 그래도 조심하십시요. 서슬퍼런 대나무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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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지깽이
2010.03.16 19:35:01 *.160.33.180
겨우 어린 죽순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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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진철
2010.03.16 18:23:17 *.221.232.14
하하하...넵..사실 내심 좀 겁이 났거덩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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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지깽이
2010.03.16 15:36:50 *.160.33.180

그대가 시인에게 술을 사가지 않고 찐빵을 사가지고 간 이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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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진철
2010.03.16 12:51:43 *.221.232.14
따로 배워본 적은 없고, 저잣거리에서 막술로 배웠지만. 많이는 못합니다.
와인은 1~2병정도, 소주는 반병, 맥주는 2~3잔
아주 가끔씩은 소맥도 두어잔 정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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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야
2010.03.16 09:38:01 *.12.20.220
'대문도 없는 그 집에 차를 몰고 들어가는 것이, 꼭 쳐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어딜까 어리둥절해 하며 언덕을 오르기 위해 엑셀을 밟았을 뿐인데 올리서니 시인의 마당인, 그 당황스러움을
어찌나 잘 표현 하셨는지 입안에 머금은 차 한 모금을 내뿜을 뻔 했습니다.^^

여행기가 참 아름답습니다. 마치 같이 다녀온듯 선명하게 그려짐은, 그 곳에 미리 갔다왔기 때문만은 아닌듯 합니다.
이미 봄이 지고 있다니 마음이 철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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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진철
2010.03.16 19:20:18 *.221.232.14
네...그 집 길과 대문과 마당이 구분없이 하나로... 그 당혹감. ㅋ~
악양산방... 좀 더 시간을 두고 주변 차나무밭이며, 매화무더기며..좀 둘러보지 못해 아쉬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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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
2010.03.17 09:19:03 *.107.4.162
우와.. 잼있었겠어요. 나중에 기회되면 저도 찾아가 꼭 뵙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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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진철
2010.03.18 22:10:38 *.154.57.140
나중에 기회되면...
그말인즉, 지금은 기회가 안되서...로 들리네요.. 미나님,
조금만 더 간절해진다면, 그 나중이 지금이 되지 않을까요?
더 늦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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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진철
2010.03.18 22:12:49 *.154.57.140
참, 아이셔! 그 곰발바닥 아이셔는 어떻게 하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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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2010.03.17 09:44:32 *.36.210.16
우리들의 연구소 우리들의 대학비는 이대로 계속 싼(?) 것이 좋을까? 적어도 최소한 다른 곳과 견줄만 해야 한다고 자부심과 안타까움을 가져도 좋을까?

어느 시인의 삶과 글을 편하게 읽고 싶어하는 것은 우리의 욕심에 우선하는 것일까 존중하고 배려해야 할 가치 기반에 두어야 할까?



시인과 사부님은 이미 오래 전 일면식도 없이 무엇이 통하였던 것일까?

굽이굽이 좁은 길...   왜 지금도 한사코 정치인이길 거부하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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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진철
2010.03.17 18:46:27 *.221.232.14
시인에게서 받은 금과옥조 사진을 첨부했습니다.
어떻게 해야 보이게하는지는 잘 몰라서..ㅎㅎ
혹시 필요하신 분은 다운해서 보시면 될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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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진철
2010.03.22 01:06:11 *.186.57.173
어느 분의 노고이신지는 모르겠으나, 사진을 볼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면접여행을 다녀와서.. 한 분 한 분 얼굴들과 이미지가 글발과 어우러져...흔들리네요.
고단한 이틀 끝에... 평안한 밤들 이루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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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진철
2010.04.16 09:30:17 *.221.232.14
수정합니다. 시인이 즐겨피는 담배는 Esse가 아니고, 레종(파란색)입니다. ㅎㅎ
혹, 방문하시는 분은 참고하세요. 담배 좋아하시고, 술은 코냑(특히 XO)를 좋아하신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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