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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준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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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3월 5일 05시 24분 등록

고등학교 시절 축제란게 있었다. 남녀공학은 아니었지만 우리 학교는 여학교와 나란히 붙어 있었고 강당을 같이 썼다. 거기서 우리 학교와 여학교가 한 번씩 축제를 한다. 축제의 꽃은 시와 그림이다. 그 당시 학원에서 알게 된 여자친구가 옆 학교에 다녔고 그 애가 시를 써냈다는걸 알게 되었고 나는 시를 쓰기 위해 펜을 들었다. 그래야 나도 그녀에게 꽃을 받을 수 있을 터였다. 그렇게 시는 나에게 말을 걸었다.


그때 쓴 시와 방명록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 그 시절 쓴 시를 보면 나의 주제는 '허무', '절벽' '행군' 등의 내용으로 가득 차 있었다. 경쟁자가 별로 없었기 때문인지 내 시는 뽑혔고 방명록 첫 장에 그녀가 글을 남겼다. 나는 뛸 듯이 기뻤다. 축제 내내 여학생들에게 내 시를 설명해 주느라 바쁘던 기억이 난다. 지금 생각해보면 낯뜨거운 일인데, 그녀 친구가 남긴 글에 그녀가 내 얘길 많이 한다고 해서 너무 신이 났었나 보다.

그 후 고등학교 3학년 수험생이 되었고 그녀와 나는 흔한 연애 소설에 나오는 이야기처럼 대학에 합격한 후에 다시 만나기로 했다. 그런데 웬걸 가끔 학원에서 보고 영화, 연극을 보러 가고 할 때는 그냥 편한 친구처럼 생각되던 그녀가 이제 일 년간 못 본다고 생각하니 어찌나 보고 싶은지. 나는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일기를 쓰고 편지를 쓰고 시를 썼다. 사실 시라기보다는 낙서에 가까웠지만 지금 옛날 일기장을 열어 보면 쓴웃음이 나온다. 한걸음 나의 감정에 벗어나 있기보다는 그 속에 빤히 보이는 내 모습이 민망해서이다. 그래도 나에게 시는 그 시절의 분출구였고 그래서인지 나는 원하는 대학에 진학했다. 그녀도 그랬다. 하지만 지리적으로 떨어진 우리는 나의 허무한 편지에 그녀가 지친 것인지 내가 먼저 지친 것인지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연락이 끊어졌다. 그 후에도 대학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한 나는 낙서처럼 시를 끄적거렸다.


회사에 다니고 결혼을 하고 시를 잊고 산 지 얼마나 되었을까. 주로 문학을 많이 읽었고 시는 관심 밖이었다. 하지만 가끔 가슴에 와 닿는 구절에 가슴을 치기도 했다. 다음은 무라카미 류의 성장소설 69에 나오는 랭보의 시 구절이다.

나는 보았다
무엇을 영원을
그것은 태양에 녹아드는 바다

내 인생에서 시는 한바탕 지나가는 열병과 같았다. 시를 생각하면 무모하기도 했지만, 자신감에 넘쳤던 고교시절이 기억난다. 그 당시 썼던 내 시의 마지막 구절이다.

아아, 이 시공간 속의 모든 발버둥은 절벽을 향한 행군

시작은 끝이 있고 우리의 인생도 여러 번의 시작과 끝을 거친다. 삶의 끝에서 후회하지 않기 위해 나는 계속 발버둥 칠 것이고 나는 이 시공간 속에서 쉬지 않고 뭔가를 시도하고 시작할 것이다. 절벽의 끝에서 두려움 없이 자신 있게 날아가리라 다짐하며 오늘도 허리를 곧게 펴고 의자를 당겨본다.

IP *.236.3.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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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05 12:48:00 *.200.81.18

고등학교 축제때의 설레임이 저에게도 전해져 오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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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05 12:57:11 *.166.160.151

연애감정이 일면 누구나 다 시인이 되지요.

유행가 가사가 다 내 이야기인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처럼.

저같은 사람은 시를 지어볼 엄두는 못내었던것 같습니다.

좋은시를 읽기는 해도.

오래된 기억의 한 페이지를 펼치셨겠군요. 행복한 시간을 추억하셨겠습니다.

추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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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05 15:17:48 *.161.70.32

일찍 시체험을 당당히 하신 분인 것 같아요.

젊음이 한껏 느껴지는 걸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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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05 16:49:23 *.89.208.250

고등학교때 첫사랑이 떠오르네요, 

시집을 사다가 제 느낌과 비슷한 문구들이

있으면 편지에 옮겨 담곤 했습니다. 

 

소중한 추억 떠올리게 해줘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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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d: 문윤정
2012.03.06 02:03:06 *.85.249.182

문학소년이 커서 문학 청년이 되고 문학도가 되는 것입니다.

날마다의 성장을 꿈꾸는 그대는 이 삭막한 지구에 나무 한 그루를 심는 것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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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06 14:45:51 *.36.72.193

시를 끄적이는 멋스러움을 가지신 분이군요.

감히 범접할 수 없습니다.

초등학교 중학교 시절에는 그래도 손편지를 많이 쓰곤 했었는데..

생각나는 사람에게 시를 써서 보내는 낭만을 저도 누려봐야겠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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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07 14:05:04 *.41.190.211

나는 보았다
무엇을 영원을
그것은 태양에 녹아드는 바다

내 인생에서 시는 한바탕 지나가는 열병과 같았다...아무래도 열병을 치루고 나면 더욱 건강한 정신을 가질

수 있겠죠. 비 온뒤 땅이 더욱 단단 해 질 것 같네요. 힘!, 내시는 모습 상상 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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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08 20:54:44 *.154.223.199

잊고 살던 시를 아직도 갖고 있는 방명록과 그날의 그 시처럼 간직하고 있으실 듯 합니다.

대학에서 시를 쓰기도 하셨군요. 준혁님은요.

 

저는 어쩐지 마지막 문장의 울림이 크게 남습니다.  

'절벽의 끝에서 두려움 없이 자신 있게 날아가리라 다짐하며 오늘도 허리를 곧게 펴고 의자를 당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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