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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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면에 어른거리는 삼십삼 ‘33’ 이라는 숫자를 노려 본다. 왜 하필 나는 서른 개 하고도 세 개를 더 보태어 어설픈 시집을 엮어낸 것 인가. 톺아보자. 어정쩡한 이 시집의 출발은 삼십삼에서부터 시작한다.
여지없이 시선이 머무는 지점은 사람이다. 사람의 나이와 포개어진 삼십삼이라는 숫자의 의미는 희미하고 회색이며 또한 아프다. 젊음을 설명하기에는 뜬금없고 늙음을 이야기하기에는 난데없다. 이쪽도 아니고 저쪽도 아니다. ‘아침에서 저녁으로 넘어가는 문지방의 나이’며 너와 나 사이에 ‘쳐져 있는 유리 벽’과 같은 나이다. 가끔 그 유리 벽을 깨기 위한 발버둥으로 피 흘리는 일도 잦다.
시를 노래한 김광석이 그러하고 배우 박용하가 그러하다. 조선 비운의 왕 철종의 조용한 외침이, 그리고 대륙을 호령한 알렉산더 왕의 장렬함이 그렇다. 시대를 풍미한 브루스 리(이소룡)도 빠질 수 없다. 그러나, 종교적 신념을 떠나 인류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예수라는 사람, 그의 성스러운 피는 여럿의 가운데 가장 윗자리에 있다. 시인 김승희는 말한다 “33세에 죽었다가 그리고 33세에 부활한 예수. 그는 나이 33세의 아침에 우리 집의 천장을 뚫고 마치 은사시나무처럼 온몸에 별 빛을 두르고 펄럭인다. 어서 가서 네 일을 마쳐라.”
그렇지 않은가. 부활, 다시 영원히 사는 법은 낡고 잗다란 숙명을 끊어버리고 주어진 운명에 저항하는 곳에서 시작한다. 생의 그 지점은 서른 세 해 언저리의 어느 날이 될 것이고 그 어느 날에 나는 서른 세 가지 시를 그 열쇠로 삼아 과거 나를 무겁게 누르던 관 뚜껑을 열어 제치려 한다.
그 발버둥에 기꺼이 동참해준 스물 여섯 명의 시인에게 경의를 담아 오랫동안 고개를 숙인다. 그들은 황무지와 같은 배금(拜金)의 시대에 바보와 같은 모습을 하고 ‘시인’으로 살아내어 주었다. 또한, 비인간적인 악취가 맹렬히 들이치는 세상에서 황당무계하게도 ‘시인’의 모습으로 살아내고 있다. 이단의 시선과 이방인의 시선을 모두 감내하고 시를 위한 그네들의 고심참담은 오늘 계속된다. ‘시적 허용’이라는 가공할만한 면책 특권이 없었다면 오늘의 시판에서조차 그들은 고사했을 터.
그러나, 그들이 끝까지 그리고 어기차게 살아내어 주어 오늘, 다시 태어날 수 있는 은혜를 입는 자들은 어이없게도 우리들이다. 고맙고 부끄럽기가 그지 없다. 그들에게 진, 갚을 수 없을 만큼의 사회적 부채를, 단지 고개를 오래 숙임으로 끝날 수 있는 일인가. 끊임 없이 반문하자. 그것이 그들에게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다.
그리고, 삶을 다시 살게 하는 서른 세 개의 열쇠를 잡고 과감하게 비틀기까지 내 손의 괘적을 함께 해준 이들이 있다. 故 김현과 정민, 고종석과 강신주, 신영복과 김용택 그리고 김수영. 그들은 인류의 시와 시인의 고갱이를 그네들의 아름다운 언어와 매서운 눈으로 엄선하였고 나는 아무런 대가를 치르지 않고 그 시선(視線)들을 오로지 나를 위한 열쇠로 취했다. 용서하시라.
어쩌겠는가. 이미 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