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본형
- 조회 수 11315
- 댓글 수 8
- 추천 수 0
여기 시가 하나있다. 이 시의 제목은 '내 고추'다.
변소에 가서
오줌을 누려고 하는데
해바라기가
내 고추를 보려고 한다
나는 안 보여줬다
어느 초등학교 3학년 학생의 시다. 열 살짜리의 시인데, 귀엽다. 그러나 원래의 시는 다르다. 원작은 이렇다.
변소에 가서
오줌을 눌라고 하는데
해바라기가
내 자지를 볼라고 한다
나는 안 보여줬다
제목도 '내 고추'가 아니고 '내 자지'다. 사투리도 표준말로 고쳤다. 학교 선생은 다른 학생들에게 원작을 그대로 보여 주는 것이 불편해서 교육적 차원에서 젊잖게 고쳐두었다고 한다. 강제 개작을 통해 이 시의 어린 작가는 '초등학교 3학년 학생'이라는 정체성에서 벗어 날 수 없게 되었다. 표준화 되었고, 무난해졌다. 그러나 교육이라는 거름망을 지나오는 동안 '열 살짜리 남자 아이'라는 본질을 잃고 말았다. 생명을 잃었고, 진실을 잃었고, 시(詩)를 잃었다. 해바라기가 보려고 하여 숨긴 것은 내 고추가 아니라 내 자지인 것이다. 고추라면 숨길 필요도 없다. 오직 자지이기 때문에 숨길 필요가 있는 것이다.
신화는 문명의 고치지 않은 원판이며 야생의 사유다. 모든 어른 속에 아이가 들어 있듯이, 인류는 그 사유 속에 원시를 품고 있다. 마찬가지로 인간이 만들어 낸 모든 문명은 원시로부터 시작되었다. 원시를 품지 않은 문명은 죽은 것이다. 야생의 사유가 없는 문명은 아스팔트며, 가면이며, 생명이 다했거나 애초에 생명이 없이 만들어진 조화(造花)에 불과하다.
신화는 인류가 만들어 낸 가장 오래된 원시의 철학이다. 그때 그들은 이 사유의 틀로 사람을 이해했고 자연을 이해했고 우주를 이해했다. 과학이 발달하면서 원시를 미신이라고 불렀고, 문명이 발달하면서 원시를 야만이라고 모멸했다. 그러나 신화는 이야기 속에 체계적으로 위장되어 있는 진리의 상징이다. 그것을 풀어내면 옷 속에 감춰진 인류의 은밀함에 접근해 갈 수 있다.
번호 | 제목 | 글쓴이 | 날짜 | 조회 수 |
---|---|---|---|---|
603 | 이야기하기 위해 살다 [2] | 구본형 | 2008.02.20 | 6978 |
602 | 부부가 여름밤을 재밌고 신나게 보내는 방법(1999.8) [2] | 구본형 | 2002.12.25 | 7006 |
601 | 휴가, 쉴 겨를의 의미 [2] [1] | 구본형 | 2002.12.25 | 7010 |
600 | 나를 캐리어 스폰서라 부르라 [2] | 구본형 | 2005.05.29 | 7015 |
599 | 천둥같은 웃음 뒤 번개같은 진실이... [2] | 구본형 | 2002.12.25 | 7018 |
598 | 일과 삶 [3] | 구본형 | 2006.04.23 | 7030 |
597 | 임부가 생명을 품듯 [2] | 구본형 | 2002.12.25 | 7038 |
596 | 포스트 모던 마케팅 [4] | 구본형 | 2007.01.18 | 7054 |
595 | 새로운 비즈니스의 공간을 찾아라 [2] | 구본형 | 2005.05.29 | 7056 |
594 | 지난 여름 피서지에서 생긴 일 [3] | 구본형 | 2004.09.11 | 7061 |
593 | 어떤 사람 [3] | 구본형 | 2006.11.08 | 7072 |
592 | 아이들이 있는 일상 - 3개의 스케치 [3] | 구본형 | 2004.06.06 | 7073 |
591 | 21세기 항해를 위한 '십자지르기' [2] | 구본형 | 2002.12.25 | 7083 |
590 | 보보스 [2] [2] | 구본형 | 2002.12.25 | 7089 |
589 | 설득 당하지 말고 설득하라 [2] | 구본형 | 2002.12.25 | 7093 |
588 | 시간을 벗삼아 ... [2] | 구본형 | 2002.12.25 | 7100 |
587 | 건망증에 대하여 [3] | 구본형 | 2003.12.07 | 7101 |
586 | YWCA(1999. 2)-유산 [3] | 구본형 | 2002.12.25 | 7102 |
585 | 세계인과 한국인 [3] | 구본형 | 2005.04.20 | 7102 |
584 | 느림과 기다림에 대하여(1999.8) [2] | 구본형 | 2002.12.25 | 71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