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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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에 대처하는 자세
아이가 아프니 영원이고 원형이고 영웅이고 우주고 대지고 지랄이고 없더라. 한 순간 사유의 차원은 낭떠러지로 떨어지고 천박한 분노가 일어 신을 이야기하던 입으로 아내에게 화를 내었다. ‘전화를 왜 안받니?’ 단지 아이가 아파 병원에 입원한 그 사태 하나로 신이 사라졌고, 아내가 전화를 받지 않는다는 사태로 인해 신은 엎어졌다.
태어나자 마자 80리 Traffic Jam을 뚫고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만이 들어선다는 중환자실로 직행했던 이 아이는 제 자신이 한 번 큰일을 겪어서 그런지 마치 제 아비를 생각하는 듯 그리도 무던했다. 어린 것이 벌써 육신의 고통에 익숙한 것이, 그것이 더 가슴을 후벼 판다. 태어난 지 5개월, 다시 그 조막손에 바늘 구멍이 뚫리어진다. 신은 없었고 나는 읽고 있던 책을 집어 던질 뻔 했다. 우주적 순환의 고리는 제 핏줄이 당하는 육신의 고통 앞에서 무참했다. 껍데기의 본능만이 남아 나를 이러저리 요리한다.
그런데, 아이러니다. 신화를 읽고 영웅을 읽고 존재 가치의 궁극과 그 존재 너머의 세계를 동경하던 차에 제 새끼의 고통이라니. 무슨 이런 절묘한 타이밍이 있는가. 어줍잖은 말을 지껄여대는 나에게 신이 보내는 경고인가. 그래서 나를 보기 좋게 한번 엿 먹이려는 것인가. 이것은 시험이었다.
하루 종일 울며 보채는 아픈 딸 자식과 씨름하다 지쳐 누운 아내를 본다. 여전히 흥건한 땀이 그 수고를 말해주고 목덜미에 찰싹 붙은 머리카락은 처연하다. 나는 묻고 싶었다. 이 또한 예정된 일이었나? 이 사태 또한 당신이 하는 일인가? 우리가 사는 삶은 결국 모래에서 기름을 짜려고 평생을 그렇게 쥐어짜는 부질없는 일이었나?
캠벨이 인도 구루에게 물었던 물음은 나와 같은 것이었다. ‘세계에 ‘아니’라고 하면 안 되는 것인가.’ 이 모든 고통과 기쁨들은 죽은 대통령이 말하는 ‘운명’이라는 잗다랗고 세속적 단어 앞에서 모두 압도 되어야 하는가 말이다.
소중한 것을 내어주는 연습으로 자식의 목숨과 제 육신의 뼈아픈 고통을 감내하는 신들의 이야기가 있다. 그것이 가능했는지는 모를 일이다만 대각성의 정각에 이르기 전까지 그 누가 ‘이것 또한 운명이다’라고 짐짓 초탈한 척 너스레를 떨 수 있는가. 이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유일한 개체인 인간에게 던져진 마지막 숙제다.
캠벨은 또 묻는다.
‘인간의 눈으로 보면 이러한 세계는 변화와 죽음으로 보이고 신들의 눈으로 보면 불변하는 형상, 곧 끝없는 세계일 뿐이다. 그러나 문제는 직접적인 지상의 고통과 기쁨을 무릅쓰고 어떻게 이 같은 우주적 관점이 유지되겠냐는 것이다.’
비유가 적절한지는 알 수 없다. 이후 캠벨은 영웅적 관점에서 지상의 고통과 기쁨으로부터 우주적 관점을 유지하기 위한 ‘절연수단’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지극히 범사 중에 하나인 질병의 고통으로 인해 ‘신이 있니 없니’ 하는 불경을 저질렀으니 팔, 다리가 잘려 나가고 머리가 터진 판테오스가 받은 저주를 받아도 싸다. 나는 이미 영웅은 아니겠다. 그네들의 ‘집중된 전력(電力)’과 나와의 애써 수고스런 구분이 ‘게토’와 같이 필요한 범부일 뿐이다. 그저 비교적 낮은 전력장을 구성하는 작은 암페어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나, 그러나 우리 다시 생각하자. 우리가 왜 스스로 영웅이 될 수 없는가. 우리 각자는 모두 하나에서 출발한 영웅들의 변신된 모습이라 하지 않았나. 우리는 이미 존재 자체로 무량아승지겁(無量俄陞之怯)을 건너온 영웅들이다. 아난다 쿠마라스와미는 나에게 생경한 사람이지만 그의 이야기는 깊은 교감을 준다.
‘존재를 그만 두지 않고는 어떤 생명체든 보다 높은 차원의 존재를 획득할 수 없다.’
손이 무릎으로 가게 만드는 이 말은 결국, 현존하는 모든 생이 그 자체로 가장 멋진 삶들이라는 말이겠다. 맞는가.
존재를 그만두는 행위, 즉 시간의 자장(磁場)속에 있는 것 자체로 더 높은 차원으로의 진보를 위한 영웅의 모습이 아니겠는가. 그 자장 안에서 겪는 어떤 형태의 고통이든 그것은 제 자신을 더 큰 우주로 한 발짝 들어서게 해 줄 것이라 믿는다.
아픈 자식을 앞에 놓고 아둔하고 무능한 아비가 늘어놓는 얼척없는 비약은 결국 제 마음만 위무하고 만다. 그러나, 그리라도 하지 않으면 비싼 병원비 시원하게 낼 수 없다. 병원 수납처, 줄줄이 세워진 의자에 앉아 빨갛게 깜빡거리는 순서 번호판을 보며 겁먹은 얼굴로 혼자 중얼댄다.
‘얼마나 더 큰 영웅이 되려 이리도 아픈 것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