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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권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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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4월 23일 11시 55분 등록

과수원집 2세대의 할 일

 

 

괴룡과 압제자는 그 전 세대, 즉 구세주를 맞던 그 이전 세대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이렇게 요약해서 말할 수 있다. 영웅의 임무는 아버지(용 시험자, 무섭고 잔인한 왕)의 부정적인 측면을 살해하고 우주의 자원이 될 생명 에너지를 그 굴레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다. 441

어제의 영웅은 오늘 스스로를 십자가에 달지 않으면 폭군이 된다. 442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이 비에 벚꽃, 살구꽃이 지리라. 대신 사과꽃 맹아리가 벌겠지. 올해는 꽃길 한 번 걷지 못했다. 둥싯 환하게 떠오른 꽃나무 아래에서 속편한 사람과 쓰잘데기 없는 이야기를 깔깔 노닥거리고, 도시락을 까먹고, 마시고, 읽고, 졸았으면 좋겠다. 손을 잡고 거닐면 금상첨화. 작년에는 자유공원 백살 넘은 벚나무 할머님들을 독대하러 아침마다 달리러 갔다. 다음 주에 사과꽃이 피기 시작하면 문경 찻사발 축제를 하고, 꽃적과가, 본격적으로 과수원집 농사가 시작된다. 11월 중순에 따서 창고에 넣을 때까지 정신 없다. 엄마하고 통화하면서 벚꽃 길을 걸어보시라 말했다. 엄마는 그깟 벚꽃이야 안봐도 된다, 우리 집에는 쫌 있으면 사과꽃이 핀다, 보기만 해도 배부른 꽃이라고, 내게는 아직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 그럴 수 없다고 한다. 지금까지 엄마 마음의 여유는 생겨난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나는 비 오는 날을 좋아한다. 비 오는 날만 부모님이 일하러 가지 않고 쉬기 때문에 생긴 버릇이다. 사과나무를 질투했다. 내 부모를 통째로 차지하는 것들. , , , 학비가 되고, 집안의 희망, 자존심의 바탕이 된다는 걸 알긴 했다. 우리 형제들은 그래서 내내 기다렸다. 아이들에게 너를 위해서 돈 벌러 간다는 부모의 말은 그다지 설득력 있지는 않은 듯 하다.

 

우리집이 과수원집이 된 건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였다. 광산에서 일했던 아버지는 뽕나무밭을 샀다. 삼십대 초반의 젊은 부부는 포크레인을 불러올 돈이 없어서 땅 속에서 괴기스런 모양으로 자라는 뽕나무 뿌리를 일일이 괭이로 캐야 했다. 저녁밥을 지어놓고 부모님을 기다렸다. 동생들이 밥 먹자고 했지만, 안된다고 엄마아빠 오면 같이 먹자며 달랬다. 태레비 파란 불빛 속에서 동생들이 잠들었다. 그러고도 한참 지나서 경운기 소리가 들렸다. 엄마는 사람도 안 사는 집처럼 왜 불도 안켜고 있었냐고 역정을 냈다. 나무를 심은 지 3년 만에 수확했던가? 증조할머니 제삿상에 그 첫 사과를 올릴 때 추수감사의 제물에 부모님은 기꺼워했고, 우리도 아이였지만 숨죽여 그 뿌듯한 감격을 공유했다.

 

그 전에는 동네 과수원집에 사과를 사러 갔다. 세 집이 생각난다. 한 집에서 겨울에 국광 꼬다마를 오천원어치 한 자루 사서 이고 오면서 이십 대의 젊은 엄마는 잇몸을 드러내며 웃었다. 나는 형제들과 쪼르르 따라 가서 과수원집 안주인이 따라온 아이들 손에 개평으로 쥐어주는 사과알을 들고 기뻐했다. 국광 꼬다마는 푸르댕댕하고 야물고 뻑뻑했다. 어떤 것은 무우처럼 시원한 거 빼면 니 맛도 내 맛도 없었다. 여름에 엄마가 그 집 일을 해주고서, 반은 썩은 자리를 뾰족하게 도려내고 한 소쿠리 얻어올 때가 있다. 썩은 사과가 더 맛있다는 엄마 말을 믿었다. 그 진리를 혀로 확증하듯이 나는 시고 달콤한 홍옥 사과를 좋아했다. 이가 없는 증조할머니는 숟가락으로 싹싹 긁어서 즙을 맛나게도 드셨다.

 

한 집은 가운데 공동샘가에서 윗샘에 걸쳐 있었다. 그 과수원은 내가 최고로 사랑하던 쓰레기장 바로 뒤에 있었다. 나는 작대기를 하나 들고 쓰레기장을 뒤지며 노는 걸 좋아했다. 끈 떨어진 삐딱구두를 찾아 신고, 주막집 술병처럼 생긴 구루무통 뚜껑을 살살 돌려서 빼면 소꿉놀이 살림살이가 되었다. 우리는 그걸 빵깨라고 불렀다. 빵깨 산다고 했다. 검은색 열매도 따먹었다. 까마중이라 했던가? 그 쓰레기장 옆에 두부집이 있었고, 쓰레기장과 두부집 사이에 있던 컴컴한 수로에 어느 날 우리 개 흰둥이가 쥐약을 쳐먹고 죽어있었다. 어른들은 개의 내장만 발라내고 먹었다. 그 집에서 푸른 색 여름 사과를 철조망 사이로 기어들어가 서리하다가 현장에서 걸렸다. 엄마는 그 때 샘에서 탄복 빨래를 하고 있었던가? 배추 고갱이를 씻고 있었던가? 나는 엄마한테 끌려왔다. 주인은 뭐라고 나를 더 어떻게 하지는 않았지만 사람 많은 데서 엄마한테 한 소리를 한 것 같다. 그날 집에 와서 엄마한테 매타작을 했는지 어쨎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빨래터로 가던 순간의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은 소리가 지금도 기억난다.

 

세번째 집은 철길 너머에 있었다. 여름에 냇가에 가는 길에 쥬부를 울러맨 이들 꽁지를 따라갔다. 나는 튜브를 가져본 적이 없다. 그래도 그거 얻어 타보고 싶어서, 집에서 생라면을 들고 따라 나선다. 하도 많이 뽀샤 먹으니까 엄마는 아침에 상자에 남아 있는 생라면 개수를 헤아려놓기도 했다. 우리 형제 3명이 빼나르다 보면 어떤 날은 6봉이 없어지기도 했다. 나는 안 가져가는 척하면서 잘 가져갔다. 이 집 총각이랑 맞선을 본 적이 있다. 두 어머니가 동네 마을 회관에 앉아 있다가 우리집 노총각이랑 그집 노처녀랑 한꺼번에 처리해보자는 묘안을 냈다. 아주 곤욕스러웠다.

 

나는 자수성가형 과수원집의 부모님 밑 딸래미로 열한 살부터 살았다. 우리가 사과를 사러 갔던 과수원집은 국광, 홍옥을 키웠고, 우리집은 후발주자답게 부사, 아오리, 감홍, 홍로를 키웠다. 훨씬 맛있고, 키가 작아서 기르기 쉬운 나무였다. 결혼할 무렵 부모님의 목표 두 가지, 과수원을 하는 것과 자식을 모두 대학에 보내는 것은 달성되었다. 시전제물이었던 밭 서마지기와 논 너 마지기는 인제 중농에 들게 많아졌다. 옆을 돌아보지 않고 앞만 보면서 달려왔다고 말했다.  

 

그런데 내 눈에, 돌아보지 않았기 때문에 살펴지지 않았던 부분이 일으키는 문제들이 2세대들에게 나타나 있는 게 보인다. 그 선발 과수원집 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주로 일하러 가야 해서 돌보지 못했던 자식 대에서 일어나는 문제였다. 저 위의 과수원집에서도 뼈아픈 일들이 많이 있었다. 다 그렇진 않다. 내 부모님은, 또 다른 과수원집들은 분명 가난에서 집을 일으킨 영웅이었다. 희생제물을 드리는 걸 않고 사유하려 했던 미노스 왕은 괴물 자식 미노타우로스를 두었다. 그걸 감추려고 목수를 불러다 미궁을 지었다. 미노타우로스 신화는 내부에서 변화가 와야 한다고 말한다. 그게 혜택 받은 내 몫인 것 같다. 그건 손에 피를 묻히며 한 길로 갔던 태종을 이은 세종이 문화를 꽃피우고, 다윗을 이은 솔로몬의 손에서 여러가지 아름다운 것들이 만들어진 것과 같다. 내 부모님에게는 뭐랄까? 자수성가형이 공유하는 어떤 특징이 최대의 장점이 또한 최대의 단점이 되어 작용하는 듯 하다. 참구할 일이다.     

IP *.114.49.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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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4.23 12:09:35 *.151.207.149
사과꽃 핀 과수원 길을 따라 준비된 친구의 출판 기념회를 간 적이 있었지요. 귀농한 남편을 따라 괴산으로 내려온 아내에 대한 남편의 선물이었어요. 콩두님도 사과꽃 가득 필 때 꼭 출판기념회를하 길 바랍니다
글 잘읽었어요.. 로이스님이 극찬한 사과가 콩두님네것인 것 같음.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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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4.24 10:30:27 *.114.49.161

우산님^^ 괴산에 그런 친구분이 계시군요. 사과꽃 필때 어떤 걸 축하하다니 멋진 일입니다.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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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d: 문윤정
2012.04.23 12:22:52 *.85.249.182

가슴을 치는 글입니다.

글에 흠뻑 젖어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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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4.24 10:31:18 *.114.49.161

^^ 이번 주는 참 길었어요. 새롭게 다가옵니다. 조심스럽기도 하구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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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4.23 12:27:21 *.192.175.177

윤정님 글 참 잼있어요. ^^

짧고도 힘있는 문장이 팍팍 들어와요. ^^ 

글을 읽다가

소풍가던날 차 안에서 마이크를 쥐고 여기도 이런거 시키냐며 곤혹스러워하던 윤정님이 떠올라 혼자 빙그레 웃었답니다. ㅎㅎ

 

저도 사과 좋아하는데 과수원은 한번도 가본 적이 없네요.

윤정님네 사과밭(?) 사진이 한장  함께 있다면 저같은 촌사람은 얼마나 좋아할까 하는 생각도 들었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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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4.24 10:35:57 *.114.49.161

뿔테 안경을 쓰신 단아한 모습 저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촌사람 분위기 아니신데요^^

그런데 저렇게 사진 속 누워계신 모습은 새롭습니다. 

마이크 이야기를 들으니 마이크 두려움이 떠오르네요. 옴마나.

사과밭 사진 한 장 구해서 올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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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4.23 12:42:37 *.51.145.193

정신없이 읽어 내렸습니다. 문경가고 싶은 생각이 계속 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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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4.24 10:36:59 *.114.49.161

3관문 술집에 갈 날을 그려봅니다.

숙제 내는 게 좀 안정되는 그날 강화제 삼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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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4.23 14:03:50 *.68.172.4

늘 느꼈던 것이지만, 콩두 언니는 소설을 써도 정말 잘 쓸 것 같습니다. 콩두 언니의 글은 사람을 끄는 지독한 매력이 있어요. 처음 콩두님 글을 읽었을 때의 충격이 아직도 생생하네요. 꼭 작가의 길로 가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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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4.24 10:39:10 *.114.49.161

레몬, 칭찬 고마워요. 소설? 작가?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습니다. 저는 저 하나만 잘 데리고 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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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4.23 14:43:47 *.166.160.151

들척지근한 맛, 까마중 맞다.

고놈이 약초더라. 하기사, 우리 주변에 있는 것들이 대부분 약초다.

태초에 인간이 살 방도는 다 마련해둔것 같다.

니맛도 내맛도 아닌맛, 그맛의 의미를 알지. 돌볼 시간이 없어서 저희들끼리 놀아야했던 시간.

그 시간이 분명 어떤형태로든 나타날거다. 나타나는 것은 어쩔수 없다 치더라도

대응하는 것은 지금 우리의 영역이지.

콩두가 대응해야 하는 영역에 대한 힌트도 이번 과제에는 있던것 같더라.

다행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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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4.24 10:41:22 *.114.49.161

까마중도 약초였군요. 오디처럼 달든지, 개암처럼 고소하든지, 찔레순처럼 시큼하든지 ㅁ못하고...어정쩡한 맛이었어요. 이번 과제에서 형님이 발견한 저의 힌트 그거 저한테 직설적으로 언제 얘기한 번 해 주십사 청합니다. 감사합니다. 길수형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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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4.23 21:11:12 *.154.116.89

누님의 글을 읽고 있으면, 신경숙 작가의 글을 읽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잔잔히 흘러가면서도 주변의 인물과 사물을 활용해서

할 이야기 다하면서 읽는 사람들을 빠져들게 합니다. 

그러다가 모두가 공감하는 이야기를 콕 끄집어 내서는

감동과 웃음을 주는 방법이 꼭 닮았습니다.

 

읽다가 너무 재미있어서 배꼽 빠지는 줄 알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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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4.24 11:26:53 *.114.49.161

한젤리타님을 웃겼다니 기뻐요^^ 만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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