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지깽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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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과수원을 해보고 싶었던 적이 있다. 젊어서 늙은 다음에 그러리라 생각해 보았던 일이다. 지금은 과수원 하겠다는 생각을 절대 하지 않는다. 과수원 나무들이 불쌍해서다. 지금 처럼 잎이 덜난 상태에서는 더 그리 보인다. 위로 자라야 할 가지들이 전부 옆으로 퍼져있다. 과일이 열리면 따기 쉽게 하기 위해 하늘가지들을 어려서 잡아매어 길들여 놓았다. 머리박고 다리를 모두 편 채 거꾸로 선 낙지 모양이다.
나무는 하늘을 향해 커야 멋지다. 푸른 하늘을 향해 바람에게 손을 흔들어야 나무 답다. 그것이어야하는 그것일 때 저답다. 모든 자연은 자연스러울 때 자연답다. 작가 역시 그렇다. 글은 기예가 아니다. 문장은 작가의 속에 쌓인 무언가가 흘러 나오는 것이다. 그 사람의 진액이 묻어 나온 글이 좋은 글이다. 나는 글을 배워 본 적이 없다. 앞으로도 배울 생각이 없다. 그저 저 답게 쓰면 된다는 생각이다. 나는 과수원의 나무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책을 읽다 문득 배우게 되면 익혀 쓰게 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그저 내키는대로 쓸 것이다. 나는 제멋대로 자란 나무가 좋다. 글도 그렇다.
연구원들의 글을 본다. 한 두 사람을 빼놓고는 전에 글을 써 본 적은 없어 보인다. 그러니 잘 쓸 때도 있고 잘 못 쓸 때도 있다. 자꾸 쓰다 보면 나아진다. 빨리 나아지지 않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건 시간의 문제일 뿐이다. 더딘 사람은 신을 닮아서 그렇다. 신들은 무르익을 때를 기다릴 줄 알기 때문에 바삐하지 않는다. 신은 결함이 많은 사람을 좋아한다. 내가 신이라도 그렇겠다.
8기 연구원 각자 몇 편의 칼럼을 올려 두어 읽어 보았다. 한 사람씩 그동안 올려 둔 몇 편의 글들을 비교해 보았는데, 좋은 글이 있고 그렇지 못한 것도 있다. 예를들어 진성희의 글은 대단히 평이하다. 지금은 별로 볼 것이 없다. 그러나 아이아스와 오디세우스의 비교는 현재로서 매우 좋다. 왜 여러편의 글들 중에서 이 글이 가장 좋을까 ? 하영목의 글 역시 대단히 평이하다. 역시 지금은 별로 볼 것이 없다. 하영목의 칼럼 중에 눈에 띄는 것은 없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사단이 난 후, 여럿이 사과의 글을 올린 글들 중에 하영목의 글이 유난히 눈에 띈다. 왜 그럴까 ?
같은 사람이라도 두 개의 조건이 맞아 떨어지면 잘 쓰게 되어있다. 첫 째는 생긴대로 쓰면 된다. 잘쓰는 사람도 있고 못 쓰는 사람도 있지만 어떤 상황 속에서 스스로 인식한 것을 생긴대로 쓰면 글에 무언가 진짜가 묻어 있다. 그게 대단한 매력이다. 진짜가 아니면 공명되지 않는다. 제 글투로 제 멋에 겨워 써야 푸른 하늘을 향해 손을 흔드는 것 같다. 둘째는 제 관심사가 되면 내용이 생긴다. 글을 잘 못쓰는 사람도 이 대목에 이르게 되면 훌륭한 글을 써 낼 수 있다. 무엇에 대해 쓰느냐가 품질을 결정하는 관건이 된다. 그러니 문체도 내용도 제것을 다루어야 한다. 제 것이 없으면 제 글도 없다. 이것이 글쓰기의 바탕이다. 그 외의 것들은 기예이니 차차 배우면 된다.
저는 작곡가 거쉰의 불안을 줄곧 생각해 왔습니다. 재즈풍의 교향곡 <랩소디 인 블루>로 생에 다시 없을 성공을 맛보았지만 제대로 된 음악 교육은 받지 않았던 사람이었죠. 그 바닥 없는 불안 때문에 그는 다른 유명한 작곡가를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그 작곡가는 거쉰이 벌어들이는 액수를 전해듣고는 도리어 거쉰에게 배우고 싶다고 했습니다.
저는 아직도 거쉰의 불안을 공유하고 있습니다(늘 생각합니다). 귀가 팔랑귀라 누군가가 전해주는 제대로 된 팁이라면 제깍 받아들일 태세입니다. 저에게도 필히 씨앗이 있을진대 도대체 어떻게 자라야 하는지 어리둥절한 상태랄까요?
그런데 사부님의 말씀을 듣고나니, 이토록 명쾌할 수가 없습니다. 예전에 한 선배가 사부님께서 가끔 툭툭 던지는 말 속에 깨달음이 있다고 했는데 당시에는 고깝게 들리지 않았던 게 사실입니다(지송). 그런데 이제 얼핏 알 것 같습니다. 누구라도 사부가 될 수 있지만, 사부님은 진짜 사부님이시네요.^^
사실 제가 생일날 받은 꽃다발이 두 개 있었는데, 오늘 집에 돌아와보니 어머니께서 꽂꽂이를 해버리셨습니다. 핀에 꽃혀서 줄기는 빳빳한 채 고개는 푹 수구린 꽃들을 보니 그렇게 화가 날 수가 없더군요. 미학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어머니를 다그칠 뻔했습니다. 응당 꽃은 아무렇게나 꽃아야 맛인것을.
사부님 덕분에 편한 마음이 되어 잠자리에 들 것 같습니다. 저의 본질에 맡기겠습니다. 팔랑귀가 제 본질이라면, 아마 저는 나무라기보다는 담쟁이일지도 모르겠네요!
사부님과 선배님과 동료들을 열심히 기어오르겠습니다. 엉금엉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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