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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id: 문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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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5월 7일 06시 30분 등록
 

다섯 번째 칼럼


삶에 대한 자기고백과 수면제


   커다란 검은 눈에 우울과 고독을 담고 있는 눈빛 그리고 검은 색 목도리를 하고 있는 그녀의 사진은 아직도 내 가슴 속에 살아있다. 지적(知的)인 그녀를 흉내 내어 겨울이면 검은색 털실로 짠 목도리를 하고 다녔다. 문학소녀였던 나는 서른한 살의 나이에 자살로 생을 마감한  ‘전혜린’을 흠모했었다. 그녀의 에세이집 <이 모든 괴로움을 또 다시>,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를 몇 번이고 읽었다. 전혜린의 사인(死因)은 수면제 과다복용이었지만, 나는 자살로 믿고 싶었다. 독일 유학생 출신이자 교수인 그녀는 나의 우상이었기에 그녀의 죽음을 미화하고 싶었다.

 

   ‘안개 낀 뮌헨에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면 오렌지 등이 켜진다’는 구절을 읽고 막연하게 독일과 뮌헨을 동경했다. 한 친구가 전혜린이 읽고 있던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빌려가서 그 책을 읽고는 며칠 후 자살해버린 사건 때문에 전혜린이 충격에 빠졌다는 이야기는 나를 또 다른 세계로 이끌고 갔다. 죽음을 엿보았다고나 할까.  같은 책 <데미안>을 읽었는데, 자살충동조차 느끼지 않는 예민하지 못한 나 자신에 대해 절망하고 실망했다. 그땐 감수성이 풍부하고, 영민하고 예민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절망과 실망에 빠진 나를 위로하기 위해, 그것보다는 나를 어떤 식으로든 포장하고 싶었다. 약국으로 달려가 수면제를 샀다. 사실은 전혜린의 자살 원인이 ‘수면제 과다 복용’이었기에 약국으로 달려간 것이다. 한 번에 많은 양의 수면제를 팔지는 않기 때문에 약국 두어 군데에서 수면제를 구입했다. 전부 열 몇 알정도 되려나. 이 정도로는 절대로 죽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를 예민하고 영민한 아이로 나 스스로가 인정하고 싶어서 다량(?)의 수면제를 구입한 것이다. 그때의 내 상식으로는 수면제 100알 정도가 치사량(致死量)인 것으로 알고 있었다. 구입한 수면제를 내 보물 상자에 넣어놓고서 우울하거나 슬프거나 그럴 때면 꺼내보곤 했었다. 가끔씩 ‘자살’이라는 단어에 매혹되기도 했었다. 그때 친구들과 함께  겉멋이 잔뜩 들어있었다.

 

  알베르트 까뮈는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 자살’이라고 했다. 인생이 살만한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것이야말로 철학의 근본문제에 답하는 것이라 했다. 까뮈는 역설적이게도 ‘살아갈 이유라는 것은 동시에 목숨을 버릴 훌륭한 이유가 될 수도 있다고 했다.

 

  그리스 비극에 보면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왕>에서 ‘이오카스테’는 사건의 전말을 대충 알고는 밧줄의 고리로 목을 매어서 자살했다. 신의 뜻 이전에 오이디푸스왕의 어머니이자 부인이라는 것에 대해 견딜 수 없었던 그녀가 선택한 것은 스스로 생을 멈추는 것이었다.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에서 안티고네의 약혼자인 ‘하이몬’도 자살을 선택했다. 얼핏 보면  약혼자의 죽음에 대한 슬픔 때문인 것 같지만 아버지인 크레온에 대한 실망감이 죽음을 불러온 것 같다. ‘죽음은 죽음을 부르고 자살은 자살을 부른다’고 했던가. 크레온의 어머니는 아들의 죽음에 관한 소식을 듣고 그녀 또한 자살해 버렸다. 아들과 아내의 잇단 죽음 소식을 듣고 크레온은  이렇게 한탄한다.


      내 운명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여,

      내 마지막 날을 가져오는 것,

      가장 좋은 운명, 어서 오게 하라.

      다시는 내일의 빛을 못 보게!

 

  극의 정황으로 보아서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크레온도 자살할 것 같다. 연극이긴 하지만, 여러 사람을 자살하게 만든 소포클레스도 자살이라는 행위에 대해 매혹을 느낀 것은 아닐까? 등장인물들에게 ‘너는 너를 파괴할 권리가 있음’을 암시해주고 슬며시 칼자루를 쥐어주는 소포클레스. 그도 필시 자살충동을 자주 느낀 것이 아닐까 의심을 해본다. 아니면 그 당시에도 자살이 사회에 만연해 있었는지 모른다.

 

   그리스 비극에서 에우리피데스의 <히폴리토스>에 등장하는 왕비는 의붓아들을 사랑하여 상사병을 얻은 자신이 부끄러워 자살을 선택했다. 계모가 남겨놓은 거짓 편지 때문에 히폴리토스는 아버지로부터 계모를 욕되게 했다는 의심을 받고서 내쫒기고 말았다. 히폴리토스는  말을 타고 가다 사고로 죽게 된다. 사고라고는 하지만 히폴리토스는 더 이상 삶을 연장시키고 싶지 않았기에 그만 고삐를 놓쳐버린 것이다. 사고를 가장한 자살이라고 해야 하나?   

 

   그리스 비극에는 자살이 넘쳐난다. 까뮈는 ‘자살은 어떤 의미에서 멜로드라마처럼 하나의 고백’이라고 했다. 삶을 감당할 길이 없음을 혹은 삶을 이해할 수 없음을 고백하는 것이란다. 쉽게 말하면 ‘굳이 그런 의심과 절망 속에서 살만한 것이 못된다’는 자기 고백인 셈이다. 고단한 삶에 대한 자기고백을 다른 방법으로 얼마든지 할 수 있는데, 왜 하필 그렇게 힘들고 난해한 길을 택하는 것일까? 

 

   우리의 생명이란 그렇게 쉽게 설명되어 질 수 없는 것이다. 산다는 것은 수만 년 동안 이어온 생명의 전승을 실현하는 것이고, 앞서 간 사람들의 못다한 삶을 내가 대신 연장해주고 있는 것이다. 나의 생이 그만큼 고귀하다는 것이다.

 

   에우리피데스의 작품 <트로이의 여인들>에 등장하는 트로이의 왕비 ‘헤카베’를 두고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여자라고 한다. 헤카베는 그의 며느리가 “비참하게 살아가느니 보다는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는 말에 대해  “그러나 죽는 것과 사는 것은 역시 다르단다. 죽으면 모든 것이 끝장이지만 살아만 있으면 그래도 희망이라는 것이 있는 법.”이라고 답했다. 코러스의 노래처럼 죽음이란 언젠가는 오는 법인데, 우리는 일부러 죽음을 청하거나 바랄 필요는 없다.

 

  또 다시 전혜린으로 돌아와, 나는 아직도 31살의 푸른 그녀, 열정과 광기에 들뜬 그녀를 흠모한다. 10대인 나에게 자신의 에너지를 몽땅 짜내어 공부하고 생활을 꾸렸던 그녀의 열정을 보여주었다. 또 죽음과 우울증에 대한 매혹적인 그녀의 글은 ‘죽음’을 성찰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세코날 마흔 알’로 생을 마감한 전혜린에 대해 비난의 목소리 없지 않아 있지만, 그녀에게는 죽어야만 했던 절박한 이유가 있었겠지. 광기에 들뜬 자신의 열정이 그녀를 죽였다고 해도 그것 또한 까뮈가 말한 삶에 대한 자기고백의 방식 중 하나이다. 

 

  보물상자에 들어있던 수면제는 오히려 나의 10대를 행복하게 만들었다. 수면제를 통해 죽음을 떠올리거나 죽음을 엿본다는 것만으로도 짜릿했다. 부모님 몰래 이렇게 위험하고도 깜직한 생각을 하는 내가 대견스럽기까지 했다. 좀 유치하지만, 수면제를 소유하지 않은 아이들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우월감마저 있었다. 이것 또한 과장되고 위장된 나만의 삶에 대한 자기고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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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5.07 13:30:17 *.51.145.193

근데 멋지십니다. ^^ 제 존재가치를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는 방법을 항상

'지니고' 계셨으니 위험하기도 했겠지만 지금은 이렇게 살아 계시니 멋집니다.

 

그 수면제를 제가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 봤습니다.

근데 신기하게도, 무섭기는 커녕 큰 백그라운드가 나를 호위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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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d: 문윤정
2012.05.08 00:40:23 *.85.249.182

재용아! 정말 정확하게 봣다.

수면제를 가지고 잇으면 큰 위로를 받는 느낌이 든단다.

오늘 우리 번개햇는데, 멋진 재용이 이야기도 했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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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5.08 08:19:57 *.154.223.199

칼리여신님은 한 때 전혜린 광팬이셨군요. 전혜린빠^^ 저도 그녀의 책을 한 권 읽었어요. 역시나 전혜린에 빠진 문학소녀 (아, 그러고 보니 그 친구는 국문과를 갔으니 문학소녀 맞아요.) 가 읽던 걸 곁에서 훑어 봤어요. 저한테는 그녀의 흑백 사진 옆에 있던 어린 딸 사진이 기억에 더 남습니다. 쟤는 엄마가 자살해서 혼자 커야하는 쟤는 어쩌나 했었는데 이 기억이 맞나 모르겠어요. 전혜린씨한테 딸이 있었던가요? 다른 사람의 책을 그녀의 책으로 착각하고 있는 지도 모르겠어요.

 

수면제를 보물상자에 지닌 여학생이라...특별한 느낌이 납니다. 또 어떤 이야기들이 그 보물상자 안에 들어있을까 흥미진진합니다.

 

어제 벙개는 잘 하셨지요? 저는 돌아와 잠들었습니다. 처음에는 1시간만 자고 벙개가야지 했는데요, 일어나니 새벽입니다. 책을 다 읽지도 못햇으면서 어제 새벽 1시에 일어나서 종종댔습니다. 칼럼은 마감 20분 전에 막 쳐댔다는 것 아닙니까? 어휴 한심해요. 이런 것 좀 안해보고 싶은데요, 여전히 이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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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d: 문윤정
2012.05.08 20:35:30 *.85.249.182

예 어제 번개 잘 하엿습니다.

전혜린, 수면제, 청춘, 반항 이런 것이

저의 10대 키워드인 것 같습니다.

콩두님의 응원에 힘입어

다음엔 보물상자를 한 번 열어보겠습니다.

토요일날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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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5.08 19:47:32 *.166.160.151

깔이여신님의 속살 한꺼풀...재밌었습니다.

참 구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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