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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5월 7일 11시 24분 등록

<가정환경조사서>

새 학년이 시작하면 반 배정과 새 담임선생님, 그 선생님이 제일 먼저 나누어 주던 프린트물이었다. 매년 같은 내용이다. 국민학교시절 넉넉치 못한 집안형편에 별로 적을 내용이 없었다. 살고 있는 집은 자가인지 전세나 월세인지, 자동차는 있는지, 동산과 부동산의 가액은 얼마나 되는지, 부모의 직업은 무엇인지, 그분들의 수입은 얼마인지, 누구와 함께 살고 있는지, 동거인들의 최종학력은 어떤지, 좀더 있었던 것 같다. 이제 가물 가물 기억이 잘 안 난다. 같이 공부하던 친구들도 고만고만한 환경이라 그다지 차이가 나지는 않았었다. 내가 다녔던 국민학교 학생들은 무허가 철거민촌 아이들과 학교주변(정상적인 동네)에 살고 있는 아이들 이렇게 두 부류로 나뉘어져 있었다. 철거민촌 아이들은 학교에 가느라 30분 이상을 걸어서 다녔었다. 야트마한 산도 있었고 논과 밭도 지나고 개울가에 빨래터도 지나야 했다.

 

새로운 선생님이 나누어 주신 가정환경조사서, 언제부턴가 나는 엄마에게 이 숙제를 보여드리지 않았다. 내가 적어서 냈다. 별로 적을 것이 없었던 것도 있었을 것이고, 내 마음대로 적기 위해서 이기도 했다. 왜 그랬을까 생각해본다. 한번 거짓말을 하고 나면 거짓말은 부풀려지게 마련이다. 무엇보다 내가 거짓으로 기재했던 것은 아마 부모의 학력이지 싶다. 아버지 고졸, 어머니 중졸 나는 이렇게 기재해서 제출했다. 매년 그렇게 했다. 어떤 기준에서 그랬는지는 나도 모른다. 그냥 어른들 하는 이야기 주어 들으면서 막연하게 그쯤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있었나보다. 한번도 구체적으로 어느 학교를 몇 년도에 졸업했는지 물어보지 않았다. 그냥 그랬다. 학교에서 가정환경조사서 작성할 때만 필요했던 내용이다. 아니다. 한번 더 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회사에 입사할 때, 그때도 비슷한 서류를 제출했다. 내 인생에 그다지 영향을 준 사건이 아니라, 그 건은 지나가는 듯 했다.

 

2006년 이른봄 2월 어느 날, 엄마 집에 들렀다. 불현듯 엄마생각이 나면 왠 만한 일은 뒤로 미루고 엄마집으로 가곤 한다. 혹시나 싶어 전화를 넣어 보기는 하지만 대부분 집에 계신다. 혼자 먹는 밥을 살뜰하게 챙겨 드시는 편이 아니라 식사대용으로 떡이나 과일이나 다른 주점 부리가 있으면 대충 한끼를 해결하시는 편이다. 맛있는 밥 한 그릇 나누고 싶은 마음에도 가게 된다. 물론 다른 경우도 있다. 엄마가 만들어 주시는 배추부침개를 먹고 싶어서 일 때도 있다. 가끔 주문을 하곤 한다. 귀챦을 법도 한데 언제나 흔쾌히 배추 한 통을 부침개로 후딱 만들어 놓으신다. 엄마와 나는 배추부침개로 저녁을 해결하고 집에 돌아올 때는 몇 장을 싸 주신다.

 

그날도 그랬던 것 같다. 특별한 볼일이 있어서 엄마 집에 들렀던 것은 아니었다. 저녁을 먹고 차를 한잔 마시는데 나 학교 등록했다? 무슨 학교? 중학교며칠 전에 등록했다. 너희들한테는 물어보지 않고, 아무한테도 이야기하지 않았다고 하신다. 못다한 공부를 하고 싶어 하셨던 엄마였다. 우리는 늘 이야기했다. 공부해그러면서 누구 하나 나서주지 않았다. 자식이 넷이나 있지만 모두 다 그랬다. 늘 마음에 있었지만 시작하기 어려웠던 엄마의 공부. 자식이 공부할 시기에는 형편이 되지 않아서, 자식들이 다 출가하고 난 다음에는 마음에 걸리는 자식 때문에 시작 못했다고 하셨다. 사남매 중 마지막에 결혼한 여동생이 결혼 후 몇 년이 지나도록 아이가 없었다. 명절 때면 이야기 끝에 가끔 눈물을 보이곤 하던 동생이다. 그런 자식을 두고 뒤늦게 공부하겠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고 하신다. 그 동생이 아이를 낳고 난 후이다. 어머니는 용기를 내셨다. 중학교과정2년을 시작하신 것이다. 공부할 시기를 놓친 사람들을 위한 정규학교, 과정은 2년이라고 했다. 예체능과목을 제외하고 정규과목은 동일한 수업이다.

 

엄마가 중학과정 입학을 허락 받기까지 이야기를 하는 도중에 알게 되었다. 정규학교를 다닌 기간은 불과 2년 반이란 사실을. 국민학교4학년 5학년 그리고 6학년은 다 다니지도 못했다고 하신다. 7남매의 막내로 태어난 엄마는 오빠만 6명이다. 농사짓는 부모님 밑에서 제때에 학교를 가지 못했다고 했다. 어느 날 옆집 아주머니가 딸 국민학교 입학시키러 가는 길에 따라가서 입학을 했다고 했다. 간단한 테스트를 거쳐 4학년에 배정받았다고. 옆집아주머니 덕분에 국민학교 문턱을 밟았다는 이야기다. 짧은 학교생활을 마지막으로 엄마의 공부는 중단상태였다. 언제 시작할 수 있을지 몰랐던 중단.

 

내가 학교에서 시험을 보고 오면 엄마는 물어보신다. 시험 어땠니? 응 그냥답은 다 썼니? ..

그러면 100점이네. 엄마의 대답이다. 기가 막힌다. 내가 답을 다 썼다는 이야기는 아는 것도 쓰고 모르는 것은 찍었다는 이야기인데 엄마는 다 썼으면 다 알아서 쓴 거라고 우기신다. 당연히 그래한다고. 모르면 답을 쓰지 말고 알면 쓰고 뭐 이런 식의 말씀이시다. 어떻게 저런 생각을 하시지 나 혼자 생각하곤 했다.

 

2006년에 시작하신 공부가 2008년 고등학교 과정 2010년에 전문대과정 올해 2012년에 학사편입. 대학3학년 학생. 나의 큰아이보다 한 학년 위다. 공부는 가족중에서 제일 열심히 하신다. 며칠 전에는 난생처음 사이버로 시험을 봐야하는데 너무 긴장된다며 도움을 요청해 오셨다. 바쁜자식들은 아무도 도와줄 수 없는 상태였다. 동급생들끼리 삼삼오오 같이 시험을 치뤘다고 하신다. 등록금이 너무 비싸다고 사이버 강의를 몇 과목 신청하신 것이 이렇게 고생을 시킨다고 하셨다. 지난 토요일 어린이날 엄마집에 모두 모였다. 급기야 엄마는 침대신세를 지고 계신다. 두통과 어지럼증을 호소하시며, 병원에 갔었는데 간에 열이 있다고 한다. 바짝 신경을 쓴 탓에 병이 나신 것이다. 70년이상 썼으면 고장날 때도 되었지몸이 좀 아프면 이렇게 이야기 하곤 하시는 엄마이지만 이번에는 많이 힘이 드셨던 모양이다. 시험이란 것을 혼자의 힘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았다는 것이 당신은 잘 용납이 안 된다고 하신다. 결벽증이다. 예전 시험답안지를 다 적으면 100점이다라고 하신 엄마나 지금의 엄마나 같은 사람임에 틀림없다.

 

인간의 비극은 무엇일까? 유한함? 죽음? 사랑과 미움 탐욕 인간이 살아가는 형태는 변해도 살아가는 방식은 변하지 않았다. 그리스비극에 나오는 치정살인이나 네이버나 다음 에 올라오는 치정살인에 관한 뉴스나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눈물을 흘릴 수 없고, 무한함이 비극인 신도 있다. 인간의 비극은 그래서 인간적이다라는 말이 어울린다. 태초부터 살아온 인간의 모습을 기술하고 있는 옛날이야기들을 읽으면서 자주 등장하는 말이 있다. 인생은 다 살아봐야 안다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살아가야 하는 삶이지만 다 살아낸 다음에 괜챦은 인생이었다라는 정도는 살아줘야 하지 않을까 싶다.

 

나의 엄마. 그분의 인생. 100년을 12시간으로 본다면 오후 864분이다. 아침 점심 저녁은 지난때이다. 좀 늦은 저녁이다. 당신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음이 자꾸 마음에 쓰인다고 하신다. 걸리는 마음은 잠시 뒤로 하고 오늘도 박물관 미술관 다니며 레포트쓰고 시험도 보고 자격증준비도 하면서 하루를 보내신다. 책을 읽을 수만 있다면 공부를 멈추지 않을 태세다. 시험스트레스에 두통을 호소하면서도 또 그 속에서 즐거움을 찾고 계신다.

 

트로이의 여왕 헤카베 그대들이 나를 일으켜 주는 것은 고마우나, 무슨 희망을 의지하여 일어나면 좋단 말인가. 이제까지는 트로이 성에서 온갖 호사를 다 하던 이 몸이 지금은 한낱 비천한 종으로 떨어졌으니, 차라리 어서 돌을 베개 삼아 땅바닥에 누워서 눈물이 마르도록 울다가 지쳐서 죽고 싶을 뿐이다. 참으로 사람의 팔자가 좋고 나쁨은 생애를 마칠 때까지 헤아릴 길이 없구나의 한탄에 땅이 꺼진다.

 

나는 지금이 제일 좋아하시는 나의 어머니를 본다.

 

나는 어떤 생을 마칠 것인가!

 

나는 어떤 신화를 만들어 갈 것인가!

 

 

 

IP *.166.160.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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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5.07 13:49:20 *.51.145.193

어머님 정말 대단하십니다. 우리가 지향해야 할 인생도 어머님과 같은 인생이라

믿고 있습니다. 어머님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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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d: 문윤정
2012.05.08 02:36:02 *.85.249.182

훌륭한 어머님을 두셨군요.

어머님의 불타는 학구열에 대해 저도 많이 베워야겠습니다.

길수씨에게는  어머니의 열정 넘치는 피를 이어받았군요!

멋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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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5.08 09:24:59 *.114.49.161

어머님께 기립박수 드립니다. 짝짝짝짝

거대한 '공부에 대한 갈망'을 가진 여자가 일많은 엄마의 시기를 통과하고

할머니가 되어서야 시작한 길이 정말 멋집니다.  

(이런 객관화가 내 집안의 여자, 특히 엄마에 대해서는 안됩니다)

할머님이 보이신 저 모범 때문에 그 집안에 여자박사 날거라고 축원드리고 싶은 심정 여전합니다.

아침부터 뭉클했습니다. 길수형님 ㅠㅠ

형님 글 읽고 배추적 한 통 굽고 싶어지네요. 장물에 찍어서 먹으면 죽음인데 말입니다.

이번 오프수업 때 제가 저거 한 통 구워갈까 욕심을 부려보고 싶지만 저같은 늘보에게는

수업시간에 늦지 않고 가는 것만도 보시인듯 합니다.-_-

꽃을 들고 동인천까지 찾아오신 길수형님 덕분에 이번 주말 잘 견뎠습니다. 고맙습니다. 형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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