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샐리올리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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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베아트리체 : 나에게 종교란?
그의 영혼에 지워지지 않는 더 깊은 상처를 남긴 것은 1290년 6월 9일 베아트리체가 병에 걸려 죽으면서였다.
좌절과 눈물, 고뇌 거기서 단테가 갈구한 것은 문학이었다. 베아트리체는 죽었으나 단테는 살아 글을 쓴 것이 새로운 삶이었다.
베아트리체의 육체는 단테의 사랑에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분명 베아트리체는 시적 구성물이 아니라 살아 숨 쉬는 여자였다.
더 중요한 것은 그녀에 대한 사랑을 통해 단테가 신의 세계를 상상했다는 점이다. 이는 새로운 삶에 이어 신곡을 쓰게 한 중요한 원동력이었다.
특히 두 번째 만남에서 베아트리체가 건넨 인사는 단테에게 구원의 의미로 받아들여져서 세계 문학사에서 최고의 걸작을 쓰는 영감을 얻는다.
거기서 단테는 속세적 의미의 감성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중세의 기독교적 구원의 메시지를 이 지상과 내세에서 실현시키고자 하는 의도를 드러낸다.
베아트리체에 대한 단테의 마음을 읽으며, 나의 베아트리체는 무엇일까? 베아트리체에 대한 해석이 여러 가지 있겠지만
이번엔 나의 종교에 관한 베아트리체의 의미를 생각해 보기로 했다.
“ 하나님 언제까지일지 모르겠지만 Time을 선언합니다.
제가 세상에 있는 종교를 좀 돌아다녀보고 와도 좋을까요? ” 하나님은 허락하셨고 난 아직 방랑중이다.
단테처럼 추방된 것도 아니고, 돌아갈 수 없는 피렌체가 내게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난 5년 전 스스로 기독교에서 추방을 선언했다.
어느 날 문득 깨달음이 있었다.
아 ~ 기독는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었구나! 하는 깨.달.음.
가톨릭 세례명은 수산나. 단테의 연보를 보며 700년의 세월이 있지만 나이를 헤아리며 그의 발자취와 업적을 따라가는 신곡이었다.
단테의 출생시기 1265년 나는 700년 이후 1965년 .
단테는 1266년 3월 26일 Saint 조반니 성당에서 세례를 받는다. 난 언제인지 모르지만 명동성당에서 1-2살에 유아영세를 받았다.
그 이후 연희동 성당이 생기기전 우리는 늘 주일이면 명동성당까지 미사를 드리러 갔다. 난 참 성당 가는 것이 즐거운 일이었다.
그러나 미사엔 별로 관심이 없고 일요일마다 코스모스 백화점에 들러 쇼핑을 하는 것이 참 즐거운 일이었던 것 같다. 그
런데 문제는 매주 아버지를 누가 백화점에 가자고 말하는 것이냐 하는 것이었다. 나랑 오빠는 아버지 뒤를 졸졸 쫓아가며
아 “오빠가 얘기해.” “ 아, 너가 해 봐.”이러다 아무도 이야기 하지 못하고 집으로 오는 때도 있었다.
이렇게 나의 신앙생활은 명동성당의 미사 그리고 코스모스 백화점으로부터 시작되었다.
1973년 초등학교 3학년 때 첫영성체 그리고 대학교 2학년 때 견진성사를 받으므로 순전히 부모님의 의도와 계획 아래 가톨릭 신자로 만들어져 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1991년 결혼. 결혼과 함께 난 구교에서 신교로 이동을 한다. 처음엔 도저히 맞지 않는 종교 형식으로 많이 힘들었지만 어느새 나는 집 – 교회, 교회 - 집을 오가는 열성 신도가 되어 가고 있었다. 매일 4시 반이나 5시에 일어나 새벽예배로 하루를 시작하고 통성기도를 전혀 하지 못하던 난 어느새 그들을 흉내 내어 가고 있었다.
그래도 방언은 하지 못하는 신자였다. 2001년 내 인생의 바닥인 죽음을 경험하며 난 더 처절하게 매달리는 형국이 되었다.
난 목회상담학을 한다는 미명하에 시작한 신학공부. 그러나 철학적인 배경 없이 신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거의 무지함과 무모함의 극치였다.
난 처음으로 밤을 새워가며 조직신학과 씨름했던 기억이 있다. 목회학을 마친 후 2006년 목회상담학을 하며 알게 된 코칭.
나처럼 현실에 잘 순응하는 성품은 만일 이슬람에서 태어났다면 난 알라신을 믿는 사람이 되어 있었겠구나 하는 생각. 그리고 난 세상의 종교를 좀 둘러보기로 결심 한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 신곡을 읽으며 ‘아, 돌아올 때가 되어 가는 구나!’ 를 알 수 있었다.
난 오늘은(5.27) 봉은사 옆에 있는 곳에서 이 글을 작성 중이다.
잠시 후에 초파일 행사로 떠들썩한 봉은사를 다녀올 생각이다. 잠시 머리도 식힐 겸. 난 그렇게 봉은사를 지나다녀도
내가 종교에 대해 타임을 선언한 이후에야 봉은사 부처님 상이 보였다.
그 관점의 변화는 얼마나 사람들이, 아니 내가 보고 싶은 것만을 보고 살았는지를 알 수 있었다.
그 이후 나의 생활 중 주일이 자유로웠지만 마음 까지도 자유하지 않았다는 것을 이번 신곡을 읽으며 알 수 있었다.
나의 뿌리요 근원은 우주에, 창조자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나 할까?
봉은사는 세 번째 방문 초파일에는 처음 가는 봉은사였다. 아니 머리털 나고 처음으로 초파일 즈음에 가는 절이었다.
둘러보니 별 것은 없지만 등이 무척 많이 달려 있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그런데 경기가 어려워서 그런지 아직도 등이 달려야 할 곳에 빈 구멍들이 눈에 띄기도 했다.
여기저기 둘러보고 마음에 감응이 일어나지 않은 채 나오는데 어느 아이가 하는 소리가 들렸다.
“ OH. my Jesus, OH. my Jesus, OH. my Jesus, ” 하하하.
어느 꼬마가 엄마 손을 붙잡고 절 안에서 외치는 소리가 아닌가?
아마도 기독교 신자인가보다. 엄마를 따라 절에 왔는데 그 아이는 계속 OH. my Jesus를 외쳐 대고 민망한 엄마는 그 녀석의 손을 다짜고짜 붙들고 조용히 하라고 이른다.
이것은 또 무슨 Sign 일까? 아니 난 아직 나의 종교에 대한 혼란을 겪고 있는 상태다.
우연히 시작된 믿음체계의 혼란. 그리고 끝나지 않은 방황의 여정. 다만 이번 주를 통해 얻는 것이 있다면 다시 창조주에게 돌아갈 날이 머지 않았다는 또다른 깨달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