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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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에 대하여 -
바닥까지 가본 사람은 말한다.
결국 바닥은 보이지 않는다고
바닥은 보이지 않지만
그냥 바닥까지 걸어가는 것이라고
바닥까지 걸어가야만 다시 돌아올 수 있다고
바닥을 딛고
굳세게 일어선 사람들도 말한다.
더 이상 바닥에 발이 닿지 않는다고
발이 닿지 않아도
그냥 바닥을 딛고 일어서는 것이라고
바닥의 바닥까지 갔다가
돌아온 사람들도 말한다.
더 이상 바닥은 없다고
바닥은 없기 때문에 있는 것이라고
보이지 않기 때문에 보이는 것이라고
그냥 딛고 일어서는 것이라고.
열흘 전 토요일 B를 만났다. B의 고객을 만나기 위해서이다. 두 사람 다 시간을 내기 어렵다하여 토요일에 B의 고객이 다니는 치과근처 송파쯤에서 약속을 잡았다. 고객의 치과예약이
주말을 보내고 월요일, 계좌를 만들어서 고객에게 자금을 송금 받고 매수하기로 한 채권을 샀다. 그리고 다음날, 화요일이다.
기존의 내 고객이 아니다. 첫 인연이다. 퇴근길에 전철역에서 고객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직 확인된 사항이 많지 않지만 일단은 고객의 마음이 어떠할지는 가늠이 가는지라 전화부터 했다. 직접 적인 영향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지주회사의 법정관리는 자회사에게 좋은 뉴스는 아니다. 향후 자금조달에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어느 정도의 영향권에 들어갈지는 예측하기 어렵다. 금융환경은 신용이 좋을 때와 그렇지 않을 때가 극명하게 달라지기 때문이다. 개인도 마찬가지이다. 신용이 좋은 사람은 대출이 쉽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대출자체가 어렵다. 정작 돈이 필요한 사람에게 돈은 흘러오지 않는다. 금융기관의 매커니즘은 아이러니하다. 필요한 곳에 자금조달을 위해 만들어진 금융기관이지만 그 기능을 제대로 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니 말이다.
우리가 매수한 회사의 재무상태를 좀더 자세히 안내하고 전화를 끊었다. 다음날 자세한 브리핑을 하기로 했다. 전날 내가 매수한 채권의 발행회사가 법정관리 신청한 회사는 아니지만 같은 그룹에 속해있는 회사의 채권이다. W그룹은 우량회사하나를 매각해놓은 상태였다. 금요일이면 자금이 들어오기로 되어있었다. 해당그룹의 현금흐름까지 확인하고 매수한 채권이었는데 갑자기 법정관리라니….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이리저리 확인을 해보려는데 확인이 잘 되지 않고 있다. 인터넷에서 접할 수 있는 정보 정도이다. 회사 내 관련부서는 비상사태라 회의 중으로 전화연락이 되질 않는다. 인터넷에 공시자료를 보고 나는 상황이 아주 심각한 정도는 아니라는 판단이 섰다. 다음날 출근하여 추가로 상황 파악하여 고객에게 알려드리고 구체적인 대책은 논의하면 되겠다 싶었다.
다음날 아침(수요일)
주식과 달리 채권에는 신용등급이란 것이 있다. 투자자나 금융기관 종사자는 해당회사의 신용평가 자료를 참고하여 재무상태를 파악한다. 기업에 대한 정보를 세세하게 알기 어려운 상태에서, 정상적인 투자활동으로 생기는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방편이다. 금융당국에서 또는 채권단에서 어떤 결정을 하게 될지 아직은 미지수이다. 일련의 조치와는 별개로 나와 고객 그리고 B. 세 사람의 관계는 며칠 전과는 다르게 사뭇 이상해졌다. 당연한 결과이다.
이런 일이 생기고 나면 고객은 늘 이야기한다. 정보의 부재를 탓한다. “정말 몰랐느냐?” 가 질문의 요지이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 황당하기는 마찬가지 이지만 나로서는 할 말을 찾을 수가 없다. 고객의 입장을 생각해보자. 얼마나 황당하겠는가….불과 이삼 일 간격이다. 한번도 해보지 않았던 채권투자, 처음으로 시작한 투자가 시작부터 심상치 않다. 그리고 B의 입장도 생각해본다. 본인의 판단으로 내게 요청한 일이기는 하지만 B도 아쉬움이 클 것이다. 왜 하필이면 이런 일이 생기는 채권을 제안한 것일까 하는 아쉬움 말이다. 내 입장은 이렇다. 최선을 다한 선택이었다. 회사의 신용등급과 업황 그리고 재무상태 모두 고려하였고 정상적인 현금흐름이 예정되어 있는 회사에 투자하는 행위이다. 나름 틈새시장을 고려하여 선택한 채권이었다. 일명BW(신주인수권부사채)이다. 열심히 공부하여 선택한 것이다.
개인적으로 나의 고객들은 이미 몇 달 전에 해당채권을 투자해놓은 상태였다. 이미 BW투자의 경험이 있는 고객들은 내 판단을 믿는다. 그리고 B의 고객처럼 늦은 밤에 메시지를 하지 않는다. 이들의 차이는 무엇일까? 똑 같은 설명을 했는데도 누구는 편안할 수 있고 누구는 불안할 수밖에 없는 것이 사람관계인 듯하다. B의 고객은 첫 거래이다. 기존에 동일상품의 거래경험도 없다. 이런 경우 본인이 접할 수 있는 모든 정보를 찾게 되고, 정보에 대한 판단능력 또한 극단적으로 흐를 확률이 크다. 최악의 시나리오를 생각한다. 투자의 세계에서 최악의 상황은 파산이다. 그리고 깡통이다. 누구도 이것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이런 전제를 가지고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시나리오가 만들어진다. 내가 장담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아마도 이번 주에 B의 고객은 그날 함께 매수한 다른 채권도 팔기를 원할 것이다. 첫 거래에서 너무나 강력한 예방주사를 맞았다. 아마 이겨내지 못할 것이다. 나도 참고 견뎌보자고 하지 않을 생각이다. 이분과 나의 인연은 시작도 하기 전에 끊어진 셈이다. 바닥부터 찍었다. 바닥의 딛고 일어서는 것이 아니라 아예 인연의 끈이 끊어지는 것이겠지. B와 나는 어떨까 생각해본다. 상호보완 가능한 일을 하고 있으니 관계가 끊어지지는 않겠으나 일을 함께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 싶기는 하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다만 아쉬움이 남는다. 내 일이 제대로 되지 않아서 남는 아쉬움이 아니다. 좋은 투자상품을 접할 기회를 아예 놓쳐버린 것에 대한 아쉬움과 얼마가 될지 모르지만 마음고생 할 고객이 안타깝기 때문이다.
우리는 살면서 바닥을 찍고 싶어하지 않는다. 어디가 바닥인지 몰라서이기도 하다. 오늘, 아니 지금이 바닥인줄만 알아도 다음은 희망이니 괜챦다. 바닥을 가본 사람도 모르고 딛고, 일어서본 사람도 모른다. 다만 하루 하루 최선을 다해 살아갈 뿐이다. 나의 일터에서는 상황이 조금 다르다. 누구나 바닥을 찍고 싶어한다. 아니다. 바닥을 잡고 싶어한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이다. 무엇인가를 사고파는 행위를 할 때는 제일 싸게 사고 싶은 것이 우리들의 마음이다. 그렇다보니…당연히 바닥을 잡고 싶어한다. 누구보다도 싸게 사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다. ‘지나고 보니 그곳이 바닥이었네…’ 당시에는 바닥인지 아무도 모른다. 우연챦게 바닥을 잡는 행운이 있을 수 있지만 99.99%그렇지 못하다. 당연한 이치이다. 그러나 우리가 간과하는 것이 있다. 바닥을 잡는 일, 바닥을 딛는 일. 그것은 언제나 리스크와 비례한다. 그곳이 바닥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떨어지는 칼날을 잡을 확률을 무릅쓰고 잡는 것이다. 바닥…. 오늘이 고객과 나의 바닥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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