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도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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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은 지나가 버린다." - 무라카미 하루키
이미 꽃이 져 버린 벚나무 아래에 잠시 누웠습니다. 연두빛 나뭇잎이 봄바람에 살랑입니다. 투명한 일렁임을 즐기다 살풋, 잠이 들었습니다. "인생은 짧고 낮잠은 길다" 했던가요. 아주 잠깐인 듯 영원같은 시간이 흘러갑니다. 나뭇잎 새로 스며든 눈부신 햇살에 잠을 깹니다. 얼굴을 가린 채 좀 더 누워, 봄날 오후의 나른함을 즐겨봅니다.
이제 저 여린 잎들이 더욱 짙은 녹색으로 물들어가면 뜨거운 여름이 시작되겠죠. 모든 것이 지나가버린다는 사실이 푸른 물감이 번지듯 선명하게 느껴질 때면, 마음 한 구석에서 일말의 불안감이 일기도 합니다. '모든 것이 저 빛처럼 흘러가는데, 일상은 바람처럼 스쳐가는데, 나는 그 어디로도 향하지 못하고 아직 여기에 있구나.'
그러나 무언가에 쫓기듯 어딘가로 달려갈 생각은 조금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지나가면 또 무언가가 다가오겠죠. 여린 나뭇잎마다 투명한 햇살이 깃들 듯, 자연의 순리처럼 제 영혼의 방에 비쳐들 단 한줄기의 빛을 기다려봅니다. 맨발로 신나게 내달릴 온전한 자신만의 길을 그려봅니다.
다시 눈을 뜨니 세상은 부끄럽게도 너무나 환합니다. 누가 볼 새라, 배추 흰나비가 가볍게 포르르, 날아오르는 오후, 오늘이 다 가기 전에 이 투명한 연둣빛을 마음껏 즐겨야겠습니다. 아직 다가오지 않은 날들을 고민하기엔 너무 아까운, 찬란한 봄날입니다.
(2008년 4월 24일, 열일곱 번째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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