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본형
- 조회 수 3620
- 댓글 수 3
- 추천 수 0
어제 아내와 함께 장을 보러 갔습니다. 우리는 아주 작은 일로 말다툼을 하게 되었습니다. 너무 사소한 일이라 무엇 때문에 다투게 되었는지는 벌써 잊었습니다. 어쨌든 아내가 제법 싸늘한 눈초리로 내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 당신은 생각이 없어. 이 무뇌야."
무네 ? 무내 ? 생각이 없어 ? 무뇌 ? 그러니까 뇌가 없다는 뜻이군요. 순간 깡통이 연상되며 황당했습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마음이 너무 편해지는거예요. 머릿속에 뇌가 텅빈 머리가 떠오르더군요. 내가 아내를 쳐다 보았을 때 이미 그녀는 웃고 있었습니다.
나는 뇌가 텅빈 그 빈 깡통에 파란 바닷물을 담아 보았습니다. 흰구름 한 조각 뜬 하늘도 담아 보았습니다. 설악산 계류를 담아 보기도 했지요. 만발한 들꽃을 가득 꽂아 두기도 했습니다. 뇌가 깡통처럼 비었다는 것이 이렇게 좋은 것이군요.
2년 전에 초아 선생이 나를 처음 보고 '일산'(日山)이라는 호를 써 주었습니다. '해 떠오르는 산'이라는 뜻인데, 뜻이 너무 커서 감히 자주 쓰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내가 내게 딱 맞는 호를 하나 지어 주었습니다. 무뇌 구본형. 언젠가 죽을 때쯤이면 이 호가 '무내'로 바뀔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무내 - 내가 없다" 그렇게 생각하니 일산이라는 호도 맘에 듭니다. 내 앞이마가 좀 벗겨졌기 때문에 해 떠오르 듯 반짝일테니 일산이라는 호도 제격입니다. 일산이라는 호도 살면서 더 자주 써 보아야겠습니다.
여러분들은 호가 없는지요 ? 아내나 남편에게 하나 지어 달라고 그러세요. 아직 결혼하지 않았다면 스스로 지어야겠군요. 쉬는 날은 호 짓기 좋은 날입니다. 나는 오늘 내 빈 깡통 속에 흰 국화를 가득 담아두겠습니다. 오늘 내 머리는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꽃을 꽂을 수 있는 화분이군요.
댓글
3 건
댓글 닫기
댓글 보기
VR Left
번호 | 제목 | 글쓴이 | 날짜 | 조회 수 |
---|---|---|---|---|
477 | 벤치마킹의 기술 | 문요한 | 2008.07.08 | 3496 |
476 | 사랑과 두려움, 그리고 선택 [4] | 박승오 | 2008.07.07 | 4560 |
475 | 땅끝 바다로 가라 [1] | 구본형 | 2008.07.04 | 3614 |
474 | 세렌디피티 [1] | 김도윤 | 2008.07.03 | 3716 |
473 | 따로 또 같이 [2] | 문요한 | 2008.07.01 | 3549 |
472 | 인연을 붙잡되 거짓되지 않기 | 박승오 | 2008.06.30 | 4722 |
471 | 버리는 법의 차이 [3] | 구본형 | 2008.06.27 | 4409 |
470 | 단순함의 미학 [2] | 김도윤 | 2008.06.26 | 3575 |
469 | 오리와 대화중 | 문요한 | 2008.06.24 | 3745 |
468 | 꿈을 핑계로 현재 일에 소홀하지 않기 [3] | 박승오 | 2008.06.23 | 4755 |
467 | 오늘의 모든 것을 사랑하리 [1] | 구본형 | 2008.06.20 | 3991 |
466 | 햇살 눈부시게 찬란하던 날 | 김도윤 | 2008.06.19 | 3641 |
465 | 초점을 전환하라 | 문요한 | 2008.06.17 | 3435 |
464 | 사파에서 온 사내 [2] | 박승오 | 2008.06.16 | 3630 |
463 | 글은 이미 행동입니다 [2] | 구본형 | 2008.06.13 | 3860 |
462 | 동굴 이야기 | 김도윤 | 2008.06.12 | 4555 |
461 | 실패가 있는 곳에 성찰이 머물게 하라 | 문요한 | 2008.06.10 | 3312 |
460 | 엄지의 가르침 [1] | 박승오 | 2008.06.09 | 3758 |
» | 이 무내야 [3] | 구본형 | 2008.06.06 | 3620 |
458 | 새로운 삶으로의 여행 | 김도윤 | 2008.06.05 | 338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