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에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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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된 욕망
눈 주위를 둘러가며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면 해골의 실루엣을 느낄 수 있다. 삶에 죽음을 품는 일을 깨닫기에 이보다 명징한 것이 없다. 죽으면 썩어지고 썩어지면 이내 드러날 내 앙상한 뼈를 상상하는 일은 두렵다. 나에게 피와 살을 빼버리고 나면 해골이 드러날 텐데 그 해골은 이미 내가 품고 있어서 해부학적 죽음의 모습은 상상의 문제가 아니라 시간의 문제로 치환된다. 살고 죽는 것이 내 안에서 공생하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삶보다는 죽음이 우세한 게임을 스스로 치르고 있다. 죽음은 먼 곳, 아주 먼 미래에 일어날 생리학적 현상이 아니라 이미 진행되고 있는 ‘지금’이다.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내 백골의 모습이 아니라 피와 살을 썩어가게 할 시간이었다. 팔딱거리는 심장까지 멈추게 할 그 시간 말이다.
어렵게 받은 사람의 몸으로 그저 그런대로 시시하게 살다 가는 것은 죄악이다. 평범함을 싫어했던 단테는 자신의 역작 ‘신곡’에서 입신하지 못하고 양명함에 힘을 기울이지 않은 자들을 지옥에 배치했다. 때가 되면 진학해야 하고 나이가 차면 결혼을 해야 한다. 사람들이 우러르는 변호사가 되고 의사가 되어야만 잘난 사람이 된다. 시키는 일에 대꾸하지 않고 묵묵히 맡은 일만 하는 사람을 우리는 사람 괜찮고 일 잘하는 사람이라 추앙했다. 이런 거 혹시 사회의 거대한 위선이라 생각해 본 적은 없는가. 이 모든 것에서 ‘나’는 없다. 나의 피와 살은 과연 누구에게 헌신하고 있는가. 아파트의 평수가 자신을 말해주고 자동차의 배기량이 자신의 지위를 대신하는 것은 자신을 세상에 알리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자신을 보기 좋게 묻어버리는 일이다. 명품 가방의 메이커에 자신의 어깨가 들썩이고 화려한 옷의 가격이 자신의 모가지를 곧추세우게 한다. 죽으면 썩어질 것들에게 너무 많은 시간과 정열을 할애하지 마라.
세월만큼 사나워진 게 먼저인가, 돌도 씹어먹을 것 같던 패기를 잃은 것이 먼저인가. 일어나 출근하는 이유를 알지 못한 채 무작정 회사로 간다. 서류 더미에 싸여 씨름하다 보면 어느덧 하루는 다 가고 흐물거리는 척추를 바로 세우지도 못하고 현관문을 연다. 뛰어오며 안기는 아이들은 그 때부터 아빠와 재미있게 놀 시간이지만 하루 종일 서류에 전화에 보고에 정열을 빼앗긴 아빠는 그때부터가 드러누워야 할 시간이다. 아이들은 조용해야 할 대상이 되고 떠들고, 보채고, 울고, 웃는 아이들이 귀찮아지기 시작한다. 시간은 그렇게 흘러가고 가족들로부터 소외된 가장은 결국 자신과 가족들 사이에 흐르는 큰 강물의 시간을 매꿔내지 못한다. 단테의 입장에서는 지옥에나 갈 일이다.
내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나는 직장인이다. 항상 피곤이 어깨에 걸려 있었다. 보고가 시작되면 항상 침을 꿀꺽 삼켰다. 평가를 잘 받기 위해 일을 했고 업무는 항상 주어지는 것이었다. 회사에서 성공하고 가족에 헌신하기 위해서는 ‘나’를 찾아서는 안 되는 거라 생각했다. 내가 스스로 하고자 했던 일들은 열정의 불씨를 밟아 꺼놔야 했다. 나의 욕망은 회사에 반하는 것이었고 가족들의 안위에 위배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흰 산’을 보고 싶었다. 그 눈부신 곳에 가고 싶은 이유는 단 하나였으나 가지 말아야 할 이유는 수백 가지였다. ‘지금’ 가야 할 이유는 단 하나였지만 ‘다음’에 가야 할 이유는 수백 가지였다.
어느 날, 나는 꼬박 이틀을 나의 밥과 꿈에 대해서만 고민했다. 이제껏 내가 가진 모든 가치관들이 동원되어 그 밤을 하얗게 만들었다. 마침내 스스로 결정을 내렸을 때, 세상은 밝았다. 가지 말아야 할 이유와 미루어야 할 이유는 과감하게 쓰레기통으로 들어간 이후였다. 단 하나의 기준만이 나를 지배했다. 나에게 주어진 이 땅의 ‘시간’. 전리층 조차 놀라게 할 그 선혈의 일몰이 진행되는 그 시간, 해골이 되면 더 이상 느끼지 못할 그 기쁨의 시간. 그것이 감에 아쉬워 팔짝 뛰게 할 바로 ‘시간’ 이었다. 나는 내 스스로 놀랄 일 하나를 만들어 보기로 한다. 더 이상 욕망을 관리하지 않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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