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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ㅠㅠ. 사흘째. 글쓰기가 힘들어요...
하루에 글 하나 써내는 거 이거 진짜 장난이 아닙니다요. ㅎㅎ
글이 짧아지더라도 이해 부탁드려요... 매일 첫날 썼던 것처럼
쓰는 건 좀 무리라는 생각이 드네요; ㅎㅎ
버트런드 러셀의 '행복의 정복'을 읽고 있는데,
어렵지 않게 쓰여있고 적절한 위트에 현대인의 문제에
대한 통찰력까지. 너무 좋아요. 알랭 드 보통처럼 재밌지만
한 수 위, 라고 감히 주장하고 싶어요 :)
개인적으로 저에게 가장 견디기 힘든 것 중 하나가
삶의 '권태'인 것 같아요.
반복되는 삶이 지루하고... 이렇게 살아야 되나 싶고...
세상에 더 즐거운 일들이 많이 있는데 내 젊음을 이렇게 헛되이 보내나 싶고. ㅎㅎ
'권태롭다'라고 이야기하면, '배부른 고민 한다'는 말 많이들 하죠.
확실히 권태는 최소한의 물질적 요건이 충족되었을 때 오는
배부른 고민인 것 같긴 합니다.
더이상 매일의 끼니와 안전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오늘날,
우리는 권태를 느껴야 하는 시간이 너무나 많아진 거죠.
권태의 반대말은 무엇일까요? 즐거움?
아닙니다. 권태의 반대말은 '자극'입니다.
자극에 대한 욕망은 인간의 본성이기도 합니다.
수렵시대, 모든 것을 사냥하고 전쟁하고 치열한 생존이 걸려있던 때에는
생의 도처에 널린 것이 자극이었을테죠.
하지만 농경시대로 접어들면서 조상들이 겪는 권태가 시작됩니다.
매일 반복되는 농사, 밤이 되면 할 일도 없고..
당시의 생활은 너무나 지루해서 러셀은 '마녀사냥의 관습만이
겨울 저녁에 생기를 불어넣을 수 있는 유일한 소일거리'였을 것이라고 감히 추측하네요.
이 때에 비하면 우리는 직장에서
동료들과 함께 일하며, 일이 끝난 이후 할 수 있는 소일거리들도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지루함의 끝판왕인 우리 조상들보다
권태에 대한 두려움은 훨씬 깊은 듯합니다.
이제는 권태가 받아들여야 할 운명이 아니라,
우리가 마음만 먹으면 피할 수 있는 어떤 것이라고 느껴지니까요.
그래서 형편이 되는 한, 우리는 이곳저곳 옮겨다니며
색다른 즐거움을 누리고 싶어합니다.
때론 조금도 권태롭지 않은, 자유롭고 즐거운 삶을 이상으로 삼기도 하죠.
러셀은 여기에서 현대인에게 일침을 놓습니다.
전날 밤의 즐거움이 크면 클수록, 아침의 권태는 더 깊어지게 마련이다.
결국 중년 시절도 오고, 노년 시절도 올 것이다.
스무 살 때에는 서른 살이 되면 인생은 끝날 거라고 생각한다.
쉰여덟 살이 된 나로서는 그런 생각은 받아들일 수 없다.
그런 생각은 인생이라는 금전적인 자본처럼 소비하는 것으로 결코 현명하지 못하다.
자극에 대한 욕망은 채우면 채우려 할수록
끝없이 늘어나는 '밑 빠진 독'과 다름 없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오히려 그럴수록 점점 즐거움에 대한 감각은 무뎌지고,
근본적인 만족감은 표면적 쾌감으로 바뀌게 됩니다.
러셀은 '훌륭한 책들은 모두 지루한 부분이 있고, 위대한 삶에도 재미없는 시기가 있다'
이야기하면서 재미있는 예를 듭니다.
칸트는 평생 동안 쾨니히스베르크 반경 16km 이상을 나간 적이 없고,
다윈은 세계일주 이후 남은 생을 자신에 집에서 보냈다고 합니다.
마르크스 조차도 혁명 선동 이후 여생을 대영박물관에서 보냈다고 하네요.
어떤 성취를 위해서는 고도의 정신집중이 필요하기에
더 센 자극을 쫓아다닐 힘이 남아 있지 않은 거죠.
그래서 러셀은 아이들에게 어렸을 때부터
너무 많은 자극을 제공하면 안 된다고 주장합니다.
아이가 자신 스스로 노력해 즐거움을 찾도록 해주지 않으면,
어떤 성과를 위해 견뎌야 할 지루함조차
견뎌내지 못할 수 있다는 거죠.
(특히 영화 관람처럼 재미는 있지만
육체 활동이 없는 오락거리를 제일 경계하네요)
저 자신도, 이 생을 좀 더 즐겁게 사는 데에
많은 생각과 에너지를 집중했던 것 같은데요.
손만 뻗으면 즐거운 유혹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지금,
인고의 끝에야 찾아올 열매를 위해
지금 잠을 참고 ㅠㅠ 글을 쓰고 있네요.
특별하거나 짜릿하진 않아도, 그 나름으로 소중한
오늘 하루 보내세요! :)